알파 스티브 / 오메가 토니

코믹스 타임라인을 대체로 따라갈 예정입니다

큼지막한 코믹스 사건들에 대한 스토리 및 설정 스포일러(주로 아이언맨 사이드)가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정발된 건 거의 포함된다고 보셔도 될 것 같네요 

기억의 왜곡과 전개상 필요해서 한 날조가 다분히 있습니다..







신이 있다면 그의 자식 중에 토니 스타크라는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토니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같은 어벤져스 멤버인 토르도 본인은 신이라 칭하지만 토니가 보기에는 좀 별난 외계인 정도로 해석이 되니까.

그래, 믿지 않은 게 문제였을까. 하지만 신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믿든 안 믿든 다 끌어안을 정도의 아량쯤은 있어야 그럴 듯하지 않겠는가.

그래, 맞다. 신은 없다. 존재를 증명도 할 수 없는 가상의 신따위 알바 아니었다. 토니가 생각하는 개념의 신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건 그저 대단히 힘이 센 초월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미치는 영향력이 우주적으로 좀 큰. 그러니 신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냥 최악의 미래를 자신이 초래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미처 예측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계산 속에서 있을 리 없었던 미래가 멋지게 닥쳐서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실로 내가 감당해야 할 미래였구나.

토니는 고개를 숙인채 손에 든 아이언맨의 헬멧에 비친 자신만 끝없이 바라보았다. 끔찍하고 가증스러운 얼굴이었다. 그게 하필이면 자신의 얼굴이었다.

감당해야 하는 미래가 너무도 무겁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나? 그런데 왜 숨을 쉬고 있는 게 나지?

뉴욕 한복판에서 이어진 히어로들의 내전, 그 전쟁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아이언맨을 내려치려던 방패를 내리고 스스로 체포되기를 희망했다. 뉴욕 시민들이 그에게 매달려 그를 말렸고, 히어로들이 도시에 끼친 피해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로저스는, 캡틴 아메리카는 전쟁에 졌을 지언정 굳건해야 했다. 토니는 그가 법안에 반대했던들 법정 싸움에서 스티브에게 유리하도록 손을 쓸 생각이었고 최대한 편의를 봐서 빠져나오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손을 내밀어 앞으로를 의논하려고 했다.

당장의 사태를 어떻게든 넘기게 되었으니 이제 다음을. 늘 그랬듯이.

그러나 그런 안이한 토니의 계획을 비웃듯이 원치 않는 비극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속절없이 다가왔다.

총소리가 울렸다.

그의 이름을, 그의 히어로명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캡틴 아메리카가 죽었다. 토니는 그 소식을 법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들었다. 운전기사가 놀라 라디오를 틀었고, 당황한 아나운서가 수없이 말을 더듬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흥분한 목소리에서 죽음과 캡틴이라는 말을 겨우 주워들은 토니는 자신이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운전기사가 흘깃 토니의 눈치를 봤다. 토니는 지갑에서 잡히는 대로 지폐를 쥐어주고 택시에서 내렸다. 내리고 나니 차폐되어 울리던 사람들의 비명과 탄식이 적나라하게 들렸다.

토니는 휘적휘적 걸었다. 연방 법원은 바로 코앞이었다. 계단 중간 쯤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스티브를 끌어안고 우는 샤론 카터의 모습이 보였다.

피가…, 붉은 피가 스티브의 몸에서 흘러 계단을 타고 흐른다. 토니는 이 모든 것이 그저 현실같지 않았다. 딛고 있는 발바닥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선명하던 소리가 명확하지 않고 웅웅 울리기만 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색채가 사라지고 스티브가 흘린 피 색깔만이 또렸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시간은 늘어진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시키는 것처럼 음울하게 흘렀다. 이 거리에서 맡아질리 없는 스티브의 혈향이 코끝에 닿았을때, 토니 스타크의 오메가 성이 각인한 알파의 생명이 지는 것을 예감하고 절망을 깨달았다.

아, 세상이.

세상이 멸망했다.










스티브 로저스의 시신은 S.H.I.E.L.D.의 영안실로 옮겨졌다. 토니의 명령이었다. 스티브를 암살한 범인을 찾기 위해서 시신을 검증해야 했고, 그 뒤엔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여 핏자국 하나없이 시신을 깔끔하게 만든 다음에 국장을 치러줘야 했다. 그것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맡길 수는 없었다. 더욱이 스티브는 유일한 슈퍼 솔져이기 때문에 그 시신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아무도 모르게 빼돌려 그의 친우이자 전우인 네이머에게 부탁해 바다 깊숙이 수장정도는 해야———.

토니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아니 그런 당연히 해야할 그런 것들이 아니라 토니는 그저 스티브와 단 둘이 있고 싶었다. S.H.I.E.L.D.의 국장이라는 감투는 그에 아주 걸맞은 지위였을 뿐이었다.

이걸 위해서 감투를 뒤집어썼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건 아주 절묘한 퍼즐 조각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이렇게 되도록 상황을 조작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변명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군, 토니 스타크.”

토니는 아이언맨 아머를 갖춰 입은채로 스티브와 마주했다. 그래야만 했다. 토니 스타크 개인이 아니라 아이언맨으로써 캡틴 아메리카의 죽음 앞에 서야 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것도 아이언맨이었고, 그와 긴 시간 동료로 함께 했던 것도 아이언맨이었으며, 그와 대립하여 이 사태를 초래하게 만든 것도 아이언맨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완전히 그만은 아니었다.

아이언맨이 곧 토니 스타크였기에. 때문에 토니는 헬멧으로 얼굴을, 목소리를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차마 고개가 들리지 않는다. 헬멧에 비치는 끔찍한 얼굴을 눈앞에 두고도 눈을 감거나 돌리지 못했다. 그 어느 것도 토니 스타크에게 용서되지 않는 행위였다.

“난 알고 있었어.”

토니는 변명을 시작하는 역겨운 얼굴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한 자, 한 자, 들을 수 없는 상대에게 건네는 말은 전부 단 한 톨의 거짓도 없었지만 뒤늦은 고해였다.

“우리가 분열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어떻게든 하나로 뭉쳐져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떻게든. 그래야 사람들의 희생이 적어지고, 우리 앞에 닥칠 더 큰 위협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난 내가 있어야 하는 곳에 섰고, 내가 옳다고 믿은 곳에 섰어. …아니, 이 말은 어폐가 있군. 내가 옳다고 믿은 곳이 아니라 타협이 가능한 자리에 선 거야.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끊임없이 되뇌었지.”

영안실은 시신의 보존을 위해 온도가 낮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가 토니의 목 언저리를 타고 아머의 안쪽까지 스며들었다.

“그래. 그래서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는 우리의 적들과도 동침하면서까지 자네를 계속 밀어붙였네.”

그렇게 당장의 문제를 우선 봉합하려고 했다. 찢어진 봉제인형을, 금방 다시 솜털이 삐져나올 걸 뻔히 알면서도 보이는대로 대충 기우려 하듯이.

“…자네가 물었지.”

이제 토니의 심장을 위협하는 파편은 하나도 몸속에 남지 않았는데도 날카롭고 작은 조각들이 무수히 심장을 찔렀다. 차례차례, 스티브 로저스의 죽음을 인식할 때마다.

“나의 알파, 스티브.”

처음 소리 내어 불러보는 각인의 이름은 감미로운 동시에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 극독이 되어 돌아왔다. 맹세컨데 결단코 이런 식으로, 이런 상황에서 숨겨둔 사실을 입에 올리게 되는 순간을 그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겠네. 그저…, 내가 자네의 명령에 뒤늦게나마 대답할 수 있게 해줘.”

토니가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그걸 허락해 줄 수 있는 상대의 대답은 이제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자네 말이 맞아.”

눈물이 흐른다. 목이 메었다. 숨통마저 끊어버릴 듯이 꽉 메여서, 아무런 목소리도 그의 목을 타고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목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한마디만은 해야 했다.

“그럴만한 가치는 없었어…!”











초인등록법이 정식으로 실행되고 발동한 이니셔티브 프로그램은 초인등록법에 의거, 신분을 등록한 히어로들로만 팀을 구성해 각 주마다 배치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들은 S.H.I.E.L.D.에 접수된 사건을 배정받고 출동한다. 사건을 해결하면 팀의 리더가 후속보고를 하도록 했는데, S.H.I.E.L.D.는 그들이 사건의 범인을 검거하면 신병을 넘겨받았고, 그 과정에서 피해가 생겼다면 데미지 컨트롤을 통해 처리했다.

토니 역시 아이언맨으로써 뉴욕 주의 이니셔티브 팀의 리더로 직접 현장을 뛰었다. 이러한 결정에 당연히 보좌관인 마리아 힐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S.H.I.E.L.D. 중진들은 국장인 토니가 자리를 비우고 현장에 나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각자에겐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할 역할이 있는 겁니다, 스타크 국장님.”

힐이 냉철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토니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고 각자에겐 각자의 능력치가 있지. 나는 내 능력이 어디서 가장 뛰어날지 잘 알아.”

“그러시다면 저기 저 구석에 만들어두신 연구실에서 나오지 마셨어야죠.”

더 듣기 싫다며 손을 휘저은 토니는 때마침 울린 사건 발생 알람의 신호를 기회로 날아올랐다. 뒤에서 마리아 힐이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 무시하면서.

가만히 자리에 앉아 들어오는 정보나 듣고 지시나 내리라고?

자리의 역할로는 틀린 것이 없었다. 다만 그러한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토니가 가만히 않아 무언가를 할 때는 유일하게 연구실에서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킬 때 뿐이었다. 

무엇보다 토니는 잠깐의 쓸데없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에 치여 있고 싶었다. 잠자는 시간조차도 없을 만큼 바쁘게.

잠은 좋은 수단이 아니었다. 잠에 들면 토니는 반드시 꿈을 꿨다. 꿈 속에서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의 광활함에 짓눌렸다. 어디에도 없는 그것을 찾고, 찾고 또 찾고 찾다가 끝내는 이젠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다. 문제는 그 다음 순간에 드는 생각이었다.

토니는 그게 싫어서 자는 것을 거부했다. 벌써 각성상태로 버틴지도 3일이 지났다. 이제 슬슬 한계점이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쓸데없는 생각이, 꿈 속의 그 ‘충동’이 현실에서도 찾아올 테니까.

토니는 스티브의 장례식을 치르고 계획한대로 몰래 시신을 빼돌려 네이머에게 넘겼다. 그가 스티브의 시신이 담긴 관을 받아들고 다시 바다에 들어간 순간부터 아머가 네이머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게 되기까진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매정하게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매정함이 저에겐 참 잘 어울렸다.

이젠 정말 자신에게는 각인 알파의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그 존재를 의식할 수만 있었던 작은 위안마저도. 그리고 토니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는지 깨달아야만 했다.

스티브의 시신을 네이머에게 넘겨 준 그 날 토니는 자신이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런 정신상태에서도 끝내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것일까. 그게 다행인 걸까. 차라리 술을 입에 대고 취해버리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랬다간 지금 자신은 여기 없었을 것이다.

토니는 기억 속에서 한때 수집했던 각인 알파와 미성숙한 오메가 관련 자료를 끄집어냈다. 각인을 어떻게든 끊을 수 없을까 고민하던 때에 얻은 자료로, 그 속에는 각인 알파가 죽고 나서도 각인이 끊어지지 않는 오메가의 사례들을 모아 놓은 게 있었다. 

알파가 죽어도 오메가의 각인은 끊어지지 않았다. 단 한 건 조차도 예외는 없었다. 그때는 그 사실에만 주목했었지만 그 뒤에는 토니가 당시에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구절이 더 있었다.

각인 알파를 잃은 오메가는 대다수가 1년을 채 못 넘기고 죽었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간혹 그보다는 오래 살아남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가 소극적인 자살을 택했다. 병에 걸린 걸 치료받길 거부하거나 사고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예측컨데 삶이 아무래도 상관 없어져서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는 이러한 기록들을 보고서도 자신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토니는 잉센의 죽음 대신 살아났다. 희생 위에 주어진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았다. 그러니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자신에게는 해당이 없을 것이라 쉬이 여겼다.

하지만 그 몇 마디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토니는 그걸, 직접 경험하고서야 절실하게 느꼈다. 각인 알파가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정도로 겪는 그 사무치는 외로움이 이제와 보면 그저 애교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토니는 지금 무엇을 봐도 무엇을 겪어도 감흥이 없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기에 그 어느 것도 새삼스레 고통이라 느끼지 못했다.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세상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럼 지금 자신은 대체 무엇을 지키고 있는 걸까. 이제와서 대체 뭘 지키려고 하고 있는 걸까. 의문은 커지고 답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겨우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겨우 한 사람이 아니었다. 겨우 한 사람이 오메가 토니 스타크에겐 세상 그 자체였다. 아이언맨인 자신은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고 머리로 반론했지만 가슴의 울림은 그게 왜 안 되는 생각이냐고 반문했다.

이 빌어먹을 오메가 성 같으니라고!

어디에도 알파가 없었다. 자신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평생을 기다려온 구원자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때는 상관없었다. 구원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미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걸 알아버렸고 그를 몸에 새겨버린 순간 오메가 토니 스타크는 그 존재 없이는 자신도 존재할 수 없었다. 

구원의 존재. 그야말로 신, 그 자체였다. 그래, 그가 바로 자신의 신이었다. 이 세상에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스티브 로저스였다.

그런 그가 죽어버렸다.

그것도 자신이 저지른 짓 때문에.

“그럼 내가 살아야 할 가치가 어디에 있지…?”

충동은 그렇게 찾아온다.

토니는 생각을 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죽을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떠올렸다. 그 중에서는 정말 실행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토니의 결행을 멈춘 건 그때마다 처리해야 하는 사건이 생겨서였다. 누굴 죽이고 얻은 감투인데 허투루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토니는 바쁘게 사는 삶을 택했다. 생각을 할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에 치여사는 삶. 

알파를 잃은 토니에게 죽음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차선의 구원이었다. 하지만 그걸 선택하는 자신을 토니는 용서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무슨 낯짝으로 구원을 선택한단 말인가. 그럴 자격이나 되느냔 말이다.

새로 느낄 수 없는 공감은 누적된 경험과 기억을 데이터로 치환해서 대체했다. 그래서 토니는 여전히 히어로였고, 아이언맨이었다. 사람의 생명을 우선시하고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 그래, 이것으로 되었다. 적어도 자신의 이 머리는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허튼 생각은 버려라. 끊임없이 되뇌고 채찍질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생각은 미션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치솟아, 토니는 이것이 소극적인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계산하고, 계산하고 또 계산한 다음 기꺼이 몸을 내던졌다.

그렇게 혼자 멸망한 세상 속에서 버티고 또 버텼지만, 스티브가 죽고 2개월이 지났을 때 토니는 진짜 절망을 맛보고 말았다.

주기마다 일어나던 히트 사이클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스스로 꽤나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던 현상이었다. 해소할 수 없는 발정이라 오히려 더 힘들고 무엇보다 사랑받지 못하는 괴로움만 가중시켜서 제발 이것만이라도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빈 적도 있었다. 그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토니는, 환호할 수 없었다. 그렇게나 싫어하던 현상이었는데 막상 나타나지 않으니 두려워서 손이 벌벌 떨렸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팔라졌다. 토니는 꺽꺽거리다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알파를 각인한 오메가는 오직 그 알파만의 것이다.

아, 이런 거였나.

토니는 눈앞의 창을 바라보며 지금 자신이 있는 건물의 높이를 생각했다. 지금 당장 아머를 입고 창을 깨고 넘어가 그걸 그대로 해제하면 죽을 수 있었다.

아머 파츠가 몸에 장착되자 토니는 입술을 콱 물었다. 찌릿한 고통과 함께 터진 상처에서 피가 울컥 흘러 나왔다. 페이스 플레이트가 닫혔다. 토니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삼켰다. 











컵에 물을 가득 차게 한 건 알파의 부재였다. 그리고 가득 찬 컵의 물을 덜어간 것 역시 부재한 알파가 남긴 흔적이었다.

토니는 스티브가 남긴 편지를 받았다. 처음엔 누군가의 장난인가 싶었지만 봉투에 적힌 그의 필체를 자신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토니는 연신 손바닥에 맺힌 땀을 바지에 닦았다. 그러다 땀에 젖어 바지가 헤어져 버리겠다 싶을 정도로.

간만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죽어있던 감각이 생생했다. 토니는 몇 번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러고도 진정이 안 돼 제자리를 왔다 갔다 수없이 돌다가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소파에 앉아 편지를 뜯었다. 손이 볼품없이 떨렸다.

토니에게, 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자신에게 남기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초인등록법으로 진영이 갈라지게 되기 전, 스티브는 전시에 함께했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사이드 킥인 제임스 뷰캐넌 반즈, 버키를 만났다. 그는 세뇌당해 살인 병기가 되어있었는데 스티브는 고전 끝에 그를 되찾을 수 있었다. 

유일하게 스티브와 같은 시대를 공유하는 그는 스티브의 둘도 없는 친구였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그가 다시 분노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토니에게 말을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일부인 캡틴 아메리카가 죽지 않게 도와달라고도.

‘토니. 부디, 꿈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게.’

언제 이 편지를 적은 것인지는 모르나 꼭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남긴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언제든 죽을 수도 있는 게 자신들이니 그때를 대비해 남겨둔 것이 지금 이 손에 들어온 것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스티브는 토니에게 뒷일을 맡기고 간 것이다. 자신이 사라지고 없는 세계를 위해 토니에게.

토니는 이제 정말 죽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거센 충동이 들어도 이 입술의 상처처럼 씹어 삼켜야 했다. 컵에 담긴 물이 흘러넘칠 것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덜어내야 했다. 그렇게 계속 살아야 했다.

스티브 로저스가 죽고 버키 반즈가 선택한 일은 토니 스타크를 죽이는 것이었다. 호시탐탐 그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건 토니도 알았다. 사실 토니의 자살계획 속에는 그의 손을 빌어 죽는 것도 있었다. 물론 결국엔 실행시키도록 두진 않았지만. 토니가 피식 웃었다. 스티브의 편지를 생각하면 그러지 않았던 게 천만 다행이다 싶었다.

스티브가 부탁했으니, 당연히 들어줘야지. 토니는 일부러 틈을 보였고 예상대로 그는 토니가 혼자 남아 있는 타워로 찾아왔다.

“기다리고 있었어.”

토니가 버키와 마주섰다. 토니는 그가 들어오자마자 눈치채기 쉽도록 대놓고 책상 위에 둔 스티브의 방패와 편지를 가리켰다.

“읽어 봐, 스티브가 남긴 편지야. 그리고 난 그것에 자네만큼 알맞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스티브의 편지라는 것을 그가 거부할 수 있을리 없다. 버키는 토니를 노려보다가 결국 책상으로 다가가 그것을 읽었다. 자신만큼 그도 스티브의 필체를, 그가 남긴 말을 잘 알아볼 것이다. 진작 편지를 다 읽고도 남을 시간동안 버키는 말없이 편지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버키는 편지를 내려놓고 스티브의,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들었다.

“널 용서한 건 아냐.”

“나도 알아. 그래도 앞으로 잘 부탁해, 캡틴 아메리카.”

버키가 방패를 짊어지고 나갔다. 토니는 그가 나간 뒤에도 한참을 방패가 있었던 자리와 남아있는 편지를 응시했다. 그 편지는 스티브가 토니에게 남기는 부탁이기도 했지만, 남겨진 친구를 위한 염려와 당부이기도 했다. 그래서 토니는 버키가 그 편지를 들고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이 있어서인지, 그는 그러지 않았다.

토니는 다가와 편지를 들었다.

“토니에게. 당신의, 스티브로부터.”

맺음말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굴리고, 또 굴렸다. 달콤한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아하는 걸 합니다

우설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