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 브금 가보까요

'by the riverbank'


길들이기









“그래서.”


“뭘 그래서예요.. 들으신대로예요.”




내 말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그가 눈가를 찌푸리며 말을 잇는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조금 황당하다는 낯빛이었다.




“네 말대로라면,”


“.....”


“이 몸이 너 따위와,”


“.....”


“혼인을 약속했다?”




저 말에 나는 평소처럼 뻔뻔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황당해하는 그 얼굴이 평소 내가 아는 그 얼굴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같은 얼굴인데 전혀 다른 느낌이다. 눈에 내가 있으나 내가 없다. 그 무감정하고 무의미한 눈빛에 가슴 한구석이 욱신 하고 만다.


입을 꾹 다문 내 모습에 그는 헛웃음을 가볍게 흘리며 말했다. 혼잣말에 가까웠다.




“황당하군.”


“......”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원.”




그의 말에 심각성 따윈 다 집어던지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너 나한테 미쳤었거든? 좀 미친 게 아니라 개미쳤었어.

그리고 넌 원래 좀 미쳐있었고 이 미친놈이!! 제정신인척 오지네.


그가 연신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으나 나는 예전처럼 툭툭 아 뭐 그러시던가요~ 뉘예뉘예~~누구 말씀이시라구요~ 암요암요~ 라고 거들먹거리며 말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 저 새끼가 그러던 말던 뭔 옘병을 떨어대고 있네. 너 후회나 하지마라? 하고 혀를 차며 방을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내 발은 못을 박아놓은 듯 꼼짝도 못하고 있다.


아니, 꼼짝 못하는 걸 넘어.. 저놈이 저렇게 차갑게 대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싸르르르르 하고 찌르르르르 한 것이,


이것은..!




“나 어떡해.”


“뭐?”


“진짜 어떡해?”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를 향해 말한 건 맞으나, 그에게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런 날 보고 변백현이 날 따라 덩달아 찡그리며 말한다.




“뭐가 어떡하냐는거지?”


“나 미쳤나봐.”


“??”




알고는 있었다. 그래 알고는 있었어. 저 인간에 대한 내 마음 같은거 말이야. 그러니 이곳으로 돌아온거고 그와의 미래를 계획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거겠지.


그래. 정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시바. 나 너 존나 좋아하나봐..”


“.. 뭐?”


“존나 사랑하나봐.. 망했어. 어떡해..”




그 마음이 이렇게나 큰 줄은 미처 몰랐음이다.

제대로 깨달아버린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떡하지. 나는 깨달았는데,




“.. 알아서 해결 해. 꺼져.”




그는 나를 잊었다. 그것도 아주 새까맣게.



개새끼야!!!!








# 싸구려 장르




나는 자고로 액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한다. 호러물은 안본데 없을 정도로 제패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해 괴수를 봐도, 괴수가 사람을 죽여도, 괴수가 잔인하게 죽어나가도 눈하나 깜짝 안하지 않았나. 다들 그런 나를 보고 이방인은 다르긴 다르다는 말을 했고, 콩깍지가 제대로 씐 변백현은 역시 황후의 재목이라고 내게 자꾸만 세뇌를 했지만 말이야.


이런 말을 왜 하냐고? 하- 지금 내게 일어난 이 장르가 내가 접하지 않아왔던 장르여서 그렇다. 도무지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감이 안 온단 소리다. 난 로맨스 판타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판타지는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같은거였다고!!




“이러실게 아니라니깐요!”


“다시 돌아오시게 여주님이 그 근처를 맴도셔야 해요!!”


“맞아요!! 계속 보이면 기억이 돌아오실지도 몰라요!!”




시녀들이 들썩인다. 자기가 그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미치고 팔짝 뛴다. 가슴까지 통통 치며 애끓는 그녀들을 보며 여주가 한숨을 쉰다.


그래. 변백현이 기억을 잃었다. 북부에 나타난 괴수들을 진압하러 황제가 친히 친정을 나간 것이다. 가기 싫다고 징징 거리면서 밤새 놔주질 않고 결국 며칠을 미루다가 장군까지 찾아오게 만들어놓고 그걸 싹 다 잊어? 이런 괘씸한 놈.


자, 잠시 여기서 질문. 친정을 떠난 황제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올 확률은 얼마나 되는걸까.




“계속 이렇게 있다간 그 여우.. !! 큼큼.. 연우.. 님께 빼앗기신다니깐요!!!”


“오늘도 치료해준답시고 황제궁으로 들어가셨다잖아요. 기가 차서 참..”


“폐하도 어이없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죠??”


“맞아요. 기억이 돌아오면 얼마나 후회하시려고??”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친정을 떠난 황제가 부상을 입고 기억을 잃은 채 황궁으로 돌아왔는데 그 지역 귀족 영애와 돌아올 확률은?




“아 몰랑. 어떻게 되겠지. 뭐 이런 일이 다 있냐.”




여주니이이이이이임!!!




시끄럽게 구는 시녀들을 뒤로한 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뭐 이런 전개가 있나. 아니,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 로판 소설이 아닌가. 참나, 드라마도 이렇게 뻔한 내용으로는 안쓸거다.


기억상실증 소재는 우리나라 00년대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소재 아니었나? 이 흔해빠진 소재가 지금 내게 나왔다고? 아주 조만간 드래곤이 나타나서 내게 고백까지 하시겠어? 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이 추천하는 집착광공 소설 몇 개 좀 읽어둘걸...”


“네?”


“악녀의 등장일까, 찐여주의 등장 이런건가?”


“네????”


“.. 아니야.. 그래서 변백.. 아니, 폐하 반응은? 가만히 있대? 그 성격상 난리 났을 거 같은데???”




시녀들이 쭈뼛쭈뼛 댄다. 서로 눈을 맞추더니 내게 미안해 죽는 눈치를 하며 말한다.




“.. 치료를 받고 계시대요..... 마법관들까지 전부 물리시구요...”




이어 중얼중얼 이방인의 입에서 그 세계의 욕일 것임이 분명한 굉장한 단어들이 단조롭게 흘러나왔다. 시녀들이 모두 큼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나 억양이 꽤나 강력해 누가 들을까 무서운 단어들의 향연이었다. 게다가 저 욕의 대상이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아닌가. 불경 중의 불경이었으나 아무도 그녀의 입을 막진 못했다.




“아.. 그냥 피의 계약 할거 그랬다니깐.. 확 그냥 죽여버릴걸..”









# 했어야 했어




피의 계약.


상대의 피와 자신의 피로 주술을 거는, 목숨을 담보로 한 고대 마법이었다. 그 고대 마법은 7서클 이상의 마법사와 황족만이 시전할 수 있었다. 그는 내게 늘 이 계약을 요구했다.


듣기만 해도 섬찟한 계약명에 내가 칠색 팔색을 해서 함부로 들이대진 못했지만 그는 무슨 일만 생기면 이 계약을 들먹였다.




“.. 네가 날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




그날도 그랬다. 서로 투닥대다 분에 못이긴 내가 궁 깊숙한 곳에 숨어버렸고 혹시라도 내가 지난번처럼 내 세계로 떠났을까 사색이 된 채 그가 업무도 팽개치고 나를 찾아다녔다. 나를 발견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나를 보던 변백현이 늦은 저녁쯤 피곤한 얼굴로 내게 찾아와 제 마음을 털어냈다.




“눈을 감는 순간부터 눈을 뜬 내내, 두렵고 초조한 이 마음을 너는 절대 모르겠지.”




그는 기가 꺾이면 늘 이랬다. 언제 사나웠나 싶을 정도로 주인 잃은 강아지 꼴을 했다. 저를 놓고 갈까, 버려두고 갈까, 한눈판 새 잃어버릴까 끙끙 거렸다. 눈을 떼지 못했다.


사뭇 진지한 백현의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낯간지러운 상황을 싫어해 최대한 넘기려해도 황제는 이따금 이런 모습으로 하여 여주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참나... 왜..!! 내가 왜 모를거라 생각해요??”




내 말에 그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린다. 웃음이 나왔다기 보다 질문 자체가 우스운 모양이었다. 평소처럼 비웃었어요? 라고 할 수도 없을만큼 처연하고 힘없는 모습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말한다.




“내 사랑이 더 크니까.”




풀죽은 어깨와 침울한 낯빛. 늦은 시각 달빛만으로 드러난 얼굴은 안쓰러움과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잘생겨가지고 진짜. 얼굴이 무기다, 정말.




“너는 몰라.”


“......”


“너는 결코 모를거야.”


“... 뭘 그런걸 확신하고 그래요.”


“확신할 수 밖에. 나날이 마음이 줄어들긴 커녕 커져만 가는데.”




사랑 고백 한번 참 그다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좋겠다. 침울한 얼굴 하나로도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다니말이야. 미인은 이래서 위험해.


샐쭉한 입술을 하고 퉁퉁 거리는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뭐.. 나는 불안하고 그런거 없는 줄 아나? 여기는 정부를 두는 게 일상이잖아요. 지금은 나 좋다좋다 해도 언제 갑자기 ‘자, 여기는 내 새 애인이다. 투기하지말고 서로 잘 지내도록.’ 이래버리면 나 어떡하라구요. 나는 다 버리고 여기로 온건데.”


“또 쓸데없는 소릴...”


“쓸데없다니! 후궁도 두면서? 여기 황제들은 황후랑 그 밑으로 후궁들 두셋정도는 둔다고 들었거든요? 나 그 꼴 못보는데?!”


“지금도 조금만 잘못하면 도망가려 안달인데, 잘도 내가 후궁까지 두겠네.”




그가 한숨을 쉬며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기분이 쪼끔 풀린 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질투를 하고 자기한테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참 좋아했거든. 내친김에 더 해줘야겠다 싶어 침대에 앉아있던 난 무릎까지 꿇곤 신이 나서 말한다.



그거 기억은 하느냐. 너 좋아한다는 그 이웃나라 공주라는 여자애가 나한테 어깨빵 날리고 가더니 네 손잡고 춤추지 않았냐. 그때 너답지 않게 거절 안하고 춤췄다고. 나 그때 아주 그 기지배 머리털을 닭털처럼 다 뽑아버릴걸 전쟁날까 꾹 참았다. 내 인내심이 그리 길지않은데 정말 나라 생각해서 꾸욱 참았다.


그건 기억하냐? 너 며칠 근방 시찰 나갔을 때 그 지역 제일 잘나간다는 무희 하나가 네 침소로 들이닥치지 않았냐고. 내가 그거 전해 들었을 때 피가 거꾸로 솟았는데도 아주 꾸욱 참았다? 어?


그 뒤로 내가 자다가도 별별 나체들의 향연이 머릿속에 생닭들 마냥 둥둥 떠다녀서 수면향 피운 채 잔적도 많다?



그렇게 종알거리는 내 모습을 한참이나 가만 보던 그의 손이 내 뺨으로 향한다. 흉내내기도 어려운 그의 우아한 손동작은 그의 고귀한 태생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변백현이 제 아무리 개망나니 폭군재질의 황제라 해도 확실히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만 보더라도 그의 피를 숨겨내긴 어려웠다.



가볍게,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뺨을 톡 친다.




“그런 생각할 시간에 날 더 생각해.”




과장되게 액션을 취해가며 말하던 내가 순식간에 애송이가 된 기분이었다. 얼굴 전체가 홧홧하게 물든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 어두워서 다행이야. 여기에는 전기 같은게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죽어도 이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기 싫어. 얼마나 놀리겠어.




“... 이게 생각한거 아니고 뭐람..”


“그런 생각말고.”


“.....”


“내가 하는 생각을 네게 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아쉽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붉은 눈동자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오롯이 날 담아낸다. 마음이 간지럽다. 누가 자꾸 가슴에 대고 입바람을 부는 것만 같다.


누가 봐도 사랑하는 연인을 쳐다보는 따뜻하고 그윽한 눈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무릎 위로 쪼르르 올라간다. 그와 닿고 싶어졌다. 만지고 싶고 붙어있고 싶어졌다. 그의 목을 두팔을 쭉 뻗어 가두며 말했다.




“지금까지 일했어요?”




그가 자연스레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말한다.




“그래. 누구 덕에 밀린 일이 많아서 퇴근을 안시켜주더라. 망할 것들. 요즘 좀 유하게 대했더니 아주 머리꼭대기에 오르려 해.”


“잘해줘요!! 다들 고생 엄청 한다구!”


“.. 그러고 있거든.”




오늘 대신들과 궁인들이 나만 보면 조금만 더 참으시면 안되겠냐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걸 들었을 때는 왜 나한테만 난리야!!! 하고 신경질과 서운함이 들었는데.. 이쯤 보니 다 내 잘못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변백현과 그들과 달리 난 오늘 하루종일 탱자탱자 놀았으니까.


.. 미안해라.


피곤해보이는 그를 보며 괜히 민망함에 궁시렁거렸다.




“... 일부러 그런건 아닌데. 나.. 그냥 화나서 발 닿는데 아무데나 간건데. 거기가 그렇게 찾기 어려울 줄 나라고 알았나..”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무슨 거짓말이에요!”


“일부러 나 애태우려고 꽁꽁 숨은 주제에.”




그의 눈썹이 비죽대며 올라간다. 가늘어진 눈이 괘씸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아닌데.. 뭐.. 중얼거리다 괜히 민망함에 버럭 큰소리를 냈다.




“자꾸 뭐라하니까 그러죠!”


“.....”


“그 기사님이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깐요. 진짜예요. 아니, 머리에 새똥이 묻었는데 그걸 그냥 냅두는 기사가 어딨어요? 당연히 닦아주시는거지. 애초에 그분이랑은~”


“알아.”


“그니까 아시는 분이!.. 알아?... 어? 알아?”


“그래.”


“... 어어?? 안다구요??”


“응. 아무 사이 아니라는 것도, 오늘 처음 본 사이라는 것도, 교대 시간에 마주친 사이라는 것도 알아.”


“... 뭐야.. 나보다 많이 아네? 근데.. 아는데 왜 그래?”




오늘 그와 투닥거린 이유였다. 내가 기사와 마주한 산책로에서 시작된 의처증 플레이 말이다.


다짜고짜 다가와 기사에게 윽박질렀고, 내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고, 그 기사를 죽일 듯 굴어 앞을 가로막자 더 미치광이처럼 굴었지.


아무사이도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낸거야? 황당함으로 물든 나와 다르게 그의 표정은 똑같았다.




“아는데도 그래.”


“에?”


“아는데도 화가 난다고.”


“... 에에?”


“그냥 네 옆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걸 어떡하겠어.”


“그거..”


“병이라고?”


“..... 나 아무말 안했는데.”




금세 꼬리 내린 내 모습에 그가 피식 하며 짧게 웃는다. 그가 내 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차분히 넘긴다. 넘길 머리카락은 없었음에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손가락이 자꾸만 스쳐 귓가가 간지러울 정도였다. 못참겠다 싶을 때쯤엔 동그란 귀를 가볍게 잡고 비비듯 문지르고 살짝 잡아 비튼다. 기분 좋은 간지러움에 내가 움츠러들기도 했지만 그가 하는 걸 막진 않았다. 그저 가만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바라보던 붉은 눈동자는 아까와는 또 달라져있었다. 다정했던 두 눈은 다정함을 넘어 지독한 탐욕을 담고 있었다. 열기마저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한참이나 나를 뜯어먹을 듯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자신의 마른 입술을 가볍게 깨물던 그가 말한다.




“... 안심시켜줘.”




고개를 살짝 비튼 그가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무얼 요구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아 나 역시 살짝 몸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




“... 음, 뽀뽀해줘요?”


“.. 아니. 그걸론 부족해.”


“에.. 많이 컸네..”


“그러게. 많이 컸지?”


“네.. 옛날엔 이거 하나면 아주..”


“개처럼 헐떡였지.”


“... 그 정돈 뭐.. 아니고.”




오늘따라 이놈은 왜 이리 정답만 말할까. 입만 열면 거짓말이었으나 막상 거짓말을 못해 뻘쭘해하는 나와 달리 그는 태평했다. 백현의 늘씬한 손가락이 내 입술을 콕 찌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입술 한번 받아보겠다고 하루종일 애가 달아 밤만 되길 기다렸는데.”


“......”


“진짜 미치는 줄 알았거든. 녹아 내리는 기분이더라고. 일에 집중도 안되고, 입이 마르더라. 물을 마셔도 갈증이 해소가 안됐어.”




그의 손가락은 가볍게 내려와 내 쇄골 아래를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숨을 들이마셨다.




“거기만 좋은 줄 알았는데, 더 한데도 있었고.. 난 그런 게 불쾌할 줄 알았거든. 행위 자체가 짐승 같잖아? 좀?”


“음..”


“그런데 왜 짐승같이 되는 줄 알겠더라.”




그가 혼잣말을 하며 쿡쿡 거린다. 얇은 옷은 마치 안 입은 것만 같은 느낌이라 그의 손이 움직이고 옷 위로 스칠 때마다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아랫배가 간질간질하다.


백현의 손이 자신에게 올라탄 덕에 훤히 드러나 있는 그녀의 허벅지 위로 닿았다. 희고 말랑한 살을 가볍게 움켜 쥔 그가 부드럽게 허벅다리를 쓸어 올리며 말한다.




“나는 욕심이 많아.”


“.. 알죠.”


“아니, 넌 몰라.”


“전 뭐 맨날 모른데요?”


“모를 수 밖에. 내가 많이 참고 있거든.”


“...... 그게 참는거예요?”


“응. 정말 참는거야.”




그의 손이 거침없이 밀려들어왔다. 진득하고 어딘가 눌린 듯한 그의 숨소리가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내가 봐도 놀라울정도로 나는 참고 있어.”


“... 아-..”




밀려드는 쾌락에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끙끙 앓는 건 변백현이었는데 손길 하나에 내가 끙끙 앓게 됐다. 전세가 역전됐다.




“그런데 이젠 한계인가봐.”




모솔 아다여서 벌벌 떨었던 지난날과 다르게 이제 그는 내가 어딜 만지면 기분이 좋은지, 어떻게 하면 느끼는지, 어느 부위가 약한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어느새 달뜬 얼굴이 된 내 얼굴을 보며 그가 말한다.




“.. 그러니 안심시켜줘.”


“....”


“너만 할 수 있어.”


“.. 어떻게?”




어느새 눕혀진 나를 보는 황제는 자신의 옷을 거칠게 풀러내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간단한거야. 아픈 것도 아니고, 금방 끝나.”




좋아죽겠다는 얼굴, 흡족해죽겠다는 얼굴이 나와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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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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