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혈선교주 제갈린 x 진천희, 혈선유호 x 진천희 양념첨가

- 소재와 취향에 대한 태클은 거절합니다.

- 침잠(沈潛) 에서 이어집니다

- 의원, 다시살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1264화 기준)


현훈(眩暈) : 어지럼증 중에서 주위 사물이나 자신이 빙빙 도는 것처럼 느끼는 증상.


외이도(外耳道) 에서 체온보다 따뜻하거나 또는 찬물을 주입하면 내림프의 유동이 생겨 환자가 현훈을 느끼며 안진이 촉발된다. 전정신경염이나 청신경종양 혹은 반규관기능저하(半規管機能檢低下)가 있다면 현훈과 안진은 발생하지 않게 된다. 


제갈린은 벌거벗은 몸을 얌전히 맡겨오는 제자의 귀를 양속으로 막고 외이도에 차가운 기운을 불어 넣었다. 기(氣)의 진동시켜 약한 바람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빙공의 묘리로 온도를 함께 조절하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외이도를 찬바람이 장악하고 1초, 2초......십 수초가 흐르기 시작했을 때 진천희의 눈동자가 초점을 잡지 못하고 불규칙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천희는 온 몸의 힘이 풀려 그대로 스승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다. 


눈을 감고 있어도 사방이 빙글빙글 돈다. 지구의 자전을 느낄 수 있게 된 건가-?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무인이라도 전정기관을 단련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지구별에서 이비인후과에 가면 할 수 있는 전정기능검사 온도안진검사가 떠올랐다.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간신히 구역감을 삼키는 사이 문득 의문이 들었다. 스승님은 어떻게 외이도에 온도 변화가 생기면 현훈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그러나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



그렇지 않아도 구역감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데 뜨거운 것이 위장을 찢어버릴 듯 찔러들어오자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 같이 치밀어 올랐다. 스승님 앞에서 감히 구토를 할 수는 없어 급히 입을 막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명백히 즐거움과 흥미를 품고 있는 저음은 소름끼치게 듣기 좋았다. 전정기관이 적응해 현훈이 사라질 때쯤 되면 움직임을 멈추고 다정한 손길로 귀를 감쌌다. 그러면 또다시 따뜻한 온기와 함께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식도를 관통할 것처럼 밀고 들어올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삼키기 위해 왼팔을 물었다. 

까득. 

이빨이 파고들며 피부가 짓이겨졌다. 찢어진 피부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피와 구토를 함께 삼키며 억지로 버티는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푸른 눈의 교주는 환하게 웃었다. 반쯤 의식을 내려놓은 채 허리를 바들바들 떨고 제자를 내려다보며, 제갈린은 진천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웃으렴. 얄미울 정도가 딱 좋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절정의 여운에 몸을 가늘게 떨던 진천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사정 직후의 나른함도, 엉망이 된 전정 기능 때문에 느껴지던 현훈도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한 시진 내내 괴롭힘을 당했던 달팽이관보다 더 깊은 곳에서 간신히 잊고 있던 목소리가 울렸다.



[웃어. 얄미울 정도가 딱 좋아.]



이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망향의 기억이 어둠속의 등불처럼 떠올랐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아주 오래 전 해줬던 조언이다. 백린의각 소각주 진천희가 아닌 대한민국 외과의사 진천희에게. 


진천희의 턱이 덜덜 떨렸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스승의 얼굴을 쳐다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따스한 미소로 진천희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백린의선의 손이 눈을 덮었다. 어둠과 함께 견딜 수 없는 현훈이 덮쳐왔다. 진천희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진천희에겐 한 때 깊이 동경하던 사람이 있었다. 

의원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그 사람의 말투를 닮아갈 정도였다. 함께 의사생활을 헤쳐 온 선배. 결국 파벌싸움에 못이겨 의국을 나갔지만, 의국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조차 진천희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선배’는 얼마나 눈썰미가 좋은지 제 몸이 아픈지도 몰랐던 진천희의 감기를 알아차리고 퇴근길에 약을 사다줄 정도였다.


가족도, 친척도, 사랑하는 이도 없던 삶에서 유일하게 의지했던 상대였다. 선배에게 진천희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진천희에게 ‘선배’는 그저 선배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무림으로 넘어오고 꽤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종종 그가 해준 말과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릴 만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니 억지로 그리움을 종잇장처럼 접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보관했다.


그랬었는데.



[웃으렴. 얄미울 정도가 딱 좋단다.]



진천희는 눈을 번쩍 떴다. 어슴푸레한 빛이 유리창을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삐-하는 이명이 들렸지만 다행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던 현훈은 없다. 대신 고막의 뒤에서 스승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웃으렴. 얄미울 정도가 딱 좋단다.]



진천희는 몸을 부르르 떨고 주변을 훑었다. 몸은 깨끗하게 씻겨져 있고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침의 또한 새것이다. 정액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아 하복부가 불편하긴 했지만 이정도면 양호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이불까지 착실히 덮여 있는 것을 보면 스승님께서 무언으로 명령을 하신 것이나 다름없다. 오늘 밤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실컷 고민해보라고.



[웃어. 얄미울 정도가 딱 좋아.]



다시금 덮쳐오는 현훈에 진천희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제갈린의 목소리와 '선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에 달라붙었다.


도대체 어떻게. 스승님께서 '선배'가 한 말을 알고 계신 걸까?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스승 제갈린은 화제국의 언어가 아닌, 명백한 한국어로 진천희의 귓가에 속삭였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 전생의 언어가 귓가에서 들리는 경험은 정말로 소름 돋고 두려운 것이었다.



"도련님. 저녁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유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 순간 부터인지 스승께서는 아침저녁으로 기묘한 탕약을 먹으라 명하셨다. 달콤한 복숭아의 향기와 비릿한 피냄새가 함께 느껴지는 탕약은 첫 모금부터 구역질이 난다. 그러나 스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진천희는 벌써 일 년 째 꼬박꼬박 유호가 가져다주는 그 탕약을 들이키고 있다. 먹고 나면 아랫배에 뭉근한 통증이 느껴지는 탕약은 현원전단신공이 대성에 이른 진천희도 맛으로 재료를 추측조차 할 수 없는 탕약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은 복숭아 향이 아닌, 다른 향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그리운 향을 맡은 순간 진천희의 가슴이 다시 한 번 쿵-하고 떨어졌다. 바닥을 모르는 것 마냥 수직낙하 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총관이 내민 그릇에 손을 뻗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약사발은 손이 데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다. 손이 덜덜 떨렸다. 아슬아슬하게 담겨 있던 액체가 넘쳐흘렀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유호가 다가와 진천희의 양손을 감싸 떨림을 멎게 하고는 그릇을 진천희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드십시오. '주인님'이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하셔서 먼 남쪽까지 가서 가져온 겁니다. 흐음....따뜻하게 마시는 것을 즐긴다고 말씀하시던데. 맞습니까?"



"...."



"새외에서는 이것을 카와(Qahwa)라고 부릅니다. 열매에서 씨앗을 추출해 볶은 후 분쇄해서 뜨거운 물로 추출했습니다. 씨앗을 많이 볶을수록 쓴맛이 강해진고 하더군요. 주인님께선 카와를 너무 많이 볶지 말고 추출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도련님의 취향이라고요."



총관의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이 작게 미소 지었다. 진천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유호가 한 말은 모두 정답이지만 너무도 두려웠다. 차가운 것 보다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강배전으로 쓴맛이 많이 나게 만든 것 보다는 약배전으로 은은한 향이 살아있는 커피를 진천희는 선호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단 한 사람 뿐이다. 


'선배'


턱을 덜덜 떨며 진천희가 입을 벌렸다. 창백하게 질린 입술 사이로 체온보다 뜨거운 음료가 쏟아져 들어왔다. 은은하고 깊은 향과 함께 어우러지는 얕은 쓴맛에 신맛이 살짝 감춰져있다. 언뜻 딸기를 떠올리게 하는 풍미에 진천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만약 유호가 함께 들고 있지 않았다면 약사발은 바닥에 추락해 산산이 깨졌을 것이다.



"손이 풀릴 만큼 맛이 좋습니까?"



아홉개의 꼬리를 가진 존귀한 짐승이 웃었다. 어느새 총관의 껍데기를 치워버린 짐승은 어린 신관의 볼을 우악스럽게 움켜잡고 차가운 액체를 흘려 넣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카와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온 몸이 카와로 젖어 들어갔다. 귀한 커피를 절반도 삼키지 못했지만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사발이 모두 비었을 때, 짐승은 사발을 대충 던져버린 후 키득거리며 어린 신관을 감싸 안았다.



"어떻습니까. 주인님과 제가 준비한 선물이."



유호의 은밀한 속삭임에 진천희의 어깨가 들썩였다. 



"어떻게....."



아주 예전에. 진천희는 유호에게 천외천의 존재를 믿는지 물었다. 그리고 스승에게도 자신이 천외천의 출신이라는 은밀한 비밀을 밝힌바 있다. 그러니 다른 세상에도 지성체가 존재하고 그곳의 문물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선배'가 했던 말을 그대로 입에 담는 것은. '선배'밖에 모르던 진천희의 취향을 알아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저들이 진천희의 기억을 낱낱이 해부해서 그와의 추억을 보거나 아니면 '선배'를 직접 만나 진천희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들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술과 음험한 술법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 혈선교. 

가장 음험하고 삿된 집단의 교주와 그 집단이 숭배하는 존재가 한 인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읽어내는 방법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본능이 진천희에게 속삭였다. 혈선교주가 이렇게 행동하는 데는 분명 '선배'의 존재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분명 ‘선배’를 그들이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진천희는 이를 까득 물었다. 방망이질치는 심장을 간신히 억누르며 물었다.



"내가. 무슨 대가를 지불하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어? 피? 머리카락? 아니면 손가락 하나라도 잘라야 하나?"



짐승이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혀로 입술을 슥 축인 후 커다란 손가락으로 진천희의 아랫배를 덮었다.



"흐음. 대가는 나도 한 가지 질문을 하고 도련님이 대답하는 것으로 하죠. 질문을 한 번 들어볼까요?"



"유호 같은 존재들은 천외천에 사는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진천희의 질문에 유호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단련된 자가 아니라면 그대로 뇌가 녹아내려 정신이 파괴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심령을 뒤흔드는 웃음이었다. 진천희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짐승은 한참동안 웃더니 이내 다시 백린의각 총관의 가죽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는 아주 차분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



"믿든 믿지 않든 도련님의 자유입니다만, 이번 대답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습니다. 제 진명을 걸고."



유호의 말에 진천희는 다시 한 번 움찔했다. 아무리 존귀한 것이라도 진명을 건 이상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대답을 마친 가장 어둡고 낮은 존재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평온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 선배."



유호의 목소리에 진천희는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잊고 있었던 이름. 어쩐지 떠올릴 수 없었던 이름이 고막을 울리자 갑자기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웃어. 얄미울 정도가 딱 좋아.]



선배의 목소리가 두개골 안에 쟁쟁하게 울렸다. 오래 전, 북해 빙궁에서 스승의 정체를 처음 조우한 그 날 이후로 보지 못했던 경악한 표정이 고운 얼굴에 떠올랐다. 유호는 조용히 진천희가 앉아있던 침상에 다가와 그를 내려 눌러 눕혔다. 한참동안 정신적인 충격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진천희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그 이름을 아는 거야?"



목소리가 하염없이 떨렸다. 평소라면 어떻게 해서든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태연함을 가장하고 질문 하나하나를 계산해서 했을 텐데 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해버렸다. 현원전단신공의 공능도 무용지물이었다. 존귀한 것들의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요동치던 이지(理智)가 고요해졌다. 늘 푸른빛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짙은 갈색빛으로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빤히 모고 있던 유호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이렇게 까지 동요할 줄이야."



무인들의 호신강기마저 뚫을 수 있을 만큼 날카롭고 긴 손톱이 아랫입술을 훑었다.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짐승의 황금빛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에서 드러나면서 진천희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꿰뚫어버릴 것 마냥. 



"사랑이라도 했던 겁니까? ■■ 선배를."



유호의 속삭임을 들은 순간. 진천희는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과 아득하게 덮쳐오는 현기증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웃어. 얄미울 정도가 딱 좋아.]



가족은 없었다. 실패하는 게 두려웠고,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족이 없는 진천희에게 돌아갈 곳은 의국뿐이었고 늘 유리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나날들. 죽는 순간까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고 사랑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오래전에 버렸었다. 그저 세상에 낀 이물질처럼 살아왔다. 



[얌마. 실력이면 전부 다 될 줄 알아? 파벌이 우스워 보여?]



다른 교수들이 진천희에게 연락 올 때는 아쉬울 때 뿐. 가족모임이 있으니 당직을 서 달라, 논문 점수가 필요하니 공동저자에 올려 달라. 다른 곳에서 위안을 얻을 수 없었던 진천희는 삶을 일로 채워 넣었다. 


가족이 없어 시간이 많은 젊은 교수. 일에 미쳐 사는 수술실력 좋은 교수. 윗사람들이 싫어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시간이 많다는 이유로 진천희에게 과중한 업무가 쏟아져도 그 누구도 잘못되었다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진천희는 의국의 가장 중요한 부속품으로서 살아왔다. 그 누구도 진천희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을 이곳에 오고서야 알았다. 그런 곳에서 유일하게 '인간 진천희'에게 관심을 가져준 이가 선배였다.



[하....너란 녀석은 진짜. 그래. 내가졌다. 그런데....너 임마.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일단 골프 부터 배워라.]



독감에 걸려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슬그머니 나타나 진천희를 위로해줬던 선배. 환자가 죽고 자괴감에 몸을 가눌 수 없을 때 슬그머니 곁을 지켜주던 선배. 한없이 자신감이 부족한 진천희가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등 떠밀어준 선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주마등에서 그래도 선배라면 자신의 죽음을 애도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진천희에게 '선배'는 특별한 존재였다. 어쩌면 본인이 자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 선배.'



힘들고 고통스러운 그 순간, 자신의 손을 억지로 잡아 끌어준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잊고 있었던 이름인데 유호의 입을 통해 들은 순간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영원히 볼 수 없으리라 체념했던 그 얼굴이 동공을 지나 시신경에 박혔다. 그리고 그 선배를 사랑이라도 했느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진천희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진심으로 따르고 동경했던 사람이었기에 감히 연관 짓지 못한 감정. 같은 남자이기에 더더욱 부정해왔던 감정. 세계선을 뛰어넘었음에도 너무도 선연하게 남아있는 이 기억의 단편들을 모아 드디어 ‘선배’를 향한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아아. 나는 사랑을 했었구나.'



시작한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이했고, 죽음으로서 첫사랑은 끝이 나버렸다. 백린의선과 짐승의 언질이 없었다면 마치 없었던 것 마냥 스쳐갔을 봄바람은 갑작스러운 태풍이 되어 진천희의 마음을 흔들었다. 도저히 잦아들지 않는 현훈을 느끼며 진천희는 간신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소각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도저히 잠이 들 수는 없을 것 같고, 이대로 답을 찾을 수 없는 망념에 빠진다면 심마가 올 것 같아 차라리 일을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유.....의 보급도 나쁘지 않고. 그로 인한 신생아 사망률도 개선....순조롭네."



백린군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던 진천희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스승이자 혈선교의 교주인 백린의선은 진천희의 행보를 전혀 막지 않았다. 의원으로서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발버둥을 오히려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늘 진천희를 살뜰하게 보살피며 장막 뒤에서 판을 움직였다. 


왜. 왜일까. 

혈선교는 말세를 바라며 육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고 있을 진대.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결코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진대. 백린의선은 활인을 향한 진천희의 맹목적인 광기를 늘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한심하게도 그 비뚤어진 애정이 너무도 기꺼워서. 진천희는 결국 스승을 벗어나지 못한 채 괴뢰처럼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다.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던 진천희는 문득, 연락이 끊긴지 오래된 아우를 떠올렸다.



"하륜이는....잘 있으려나."



문득 혈선교주와 가장 어두운 짐승의 협공에 천마가 죽임을 당한 후 천마신교는 조각조각 났다. 마도 무림의 여섯 가문들 중 둘은 멸문하고 셋은 혈선교주의 휘하에 들어왔으며 나머지 하나는 사파에 숨어들었다. 남은 마인들도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극소수는 혈선교의 교도가 되었으며 일부는 정체를 감추고 도주했고, 대부분은 혈선교의 제물이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백린의선의 입에서 여하륜을 붙잡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실낱같은 희망인 줄을 알면서도 진천희는 부디 여하륜이 무사하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기도를.


빠르게 마무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저 멀리서 동이 터오는 것이 보였다. 새벽의 찬 이슬을 맞으며 진천희는 천천히 대욕탕으로 향했다. 스승님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수련을 마무리 하고 목욕을 재개한 후 인사를 울려야했다. 그런데 오늘 따라 몸이 이상했다. 갑자기 열이 오르며 몸이 묵직해졌다. 목이 부어 아프거나 기침도 나지 않는데 이상하리만치 머리가 무거웠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발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져 천근에 달하는 추를 양쪽 팔다리에 매단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목욕을 하고 나면 좀 나아질까 싶어 급히 탕에 몸을 담갔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삐-하는 이명 때문에 아침 새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결국 진천희는 아침 수련을 포기하고 억지로 자신의 방에 돌아와 침상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흉곽을 꽉 졸라맨 것 같은 압박에 숨을 쉬는 것조차 온 힘을 쏟아야만 했다. 



"독감....인가....?"



지구별에서는 드물지 않은 바이러스성 질환인 독감. 고열과 인후통, 기침이 동반되는 이 질환은 지구별에 처음 등장했을 때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백신이 개발되어 치명율은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감염성 질환이다. 아무리 무인이라도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피할 방법은 없다. 남들보다 덜 걸릴 뿐 세균에도 감염되고 고뿔에도 걸린다. 독감도 마찬가지다. 비말을 통해 쉽게 감염되는 만큼 진천희는 독감에 걸려본 적이 있었고, 그 때 혼자 방에 틀어박혀 끙끙댔었다. 그 때와 똑같았다. 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제 무리하고 푹 쉬지 못한 탓일지도 몰랐다. 저도 모르게 정신이 까무룩해지며 눈을 감았다.



"희야. 죽을 한 술 떠보렴."



정신을 차린 것은 왠지 모르게 그리운 냄새 때문이었다. 고소한 잣죽의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리운 냄새였다. 독감으로 열이 올라 꼼작도 못하고 혼자 자취방에서 심하게 앓던 그 날. '선배'가 사다준 잣죽.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사온 평범한 잣죽이었지만 진천희는 꽤 오랫동안 그 맛을 잊지 못했다.


어렵사리 눈을 뜨자 새하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한 손길이 등을 일으키고 입 안에 잣죽을 밀어 넣어주었다. 한 입 그 죽을 머금은 순간 둑이 터진 것 마냥 눈물이 흘러내렸다. 분명 죽을 끓인 것은 스승님인데, 어째서 그 날의 잣죽 맛이 나는 걸까.



"열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구나. 오늘 하루는 푹 쉬렴."



한 술 한 술 떠 넣어주는 죽은 더할 나위 없이 고소하고 풍미가 훌륭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겨우 그릇을 비워내자 스승님이 자그마한 환약을 내밀었다. 평소 백린의각에서 빚는 환약과는 전혀 다른 길죽한 모양의 조그마한 환약을 본 진천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선배........?"



진천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단어에 제갈린이 환하게, 너무도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제자의 입 안에 환약을 밀어 넣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진천희는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고 침범해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였다. 



"역시 너였구나."



축 늘어진 제자를 품에 안은 백린의선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치 손쉽게 깨어지는 유리 세공품을 다루는 것 마냥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진천희를 쓰다듬었다. 진천희는 힘이 하나도 없는 손을 들어 올려 스승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머리가 엉망진창이었다. 다시 주변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구역감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심각한 현훈에 진천희는 다시 눈을 감고 스승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이성적인 사고가 완전히 정지했다. 그를 안고 있는 것이 선배인지 스승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진천희는 갑자기 스쳐가는 질문을 여과 없이 입에 담았다.



"....선배. 혹시....내 장례식에....오셨어요?"



"가고 있었지. 도착하지는 못했고."



"예....?"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꾸나. 오늘은 이만 자들렴."



더, 더 묻고 싶은데 혼혈을 내어준 탓에 덮쳐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했다. 분명 잠이 들었는데도 어지러웠다. 어둠이 빙글빙글 돌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더 깊은 수면으로 향하는 길.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의식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의 아래로, 아래로 추락했다. 깊은 어둠에 잠기고 나서야 간신히 지독한 현훈에서 해방되었다.



...



혈선교주. 

혈선교 내에서는 통천교주라 불리는 존재는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아니다. 제갈린은 그것을 '현상'이라 칭했다. 그 이유는 혈선교주가 탄생하는 방식의 특수성 때문이다. 


마교에서도 배척받을 정도로 어둡고 음습한 악의를 지닌 이들이 모이는 곳인 만큼 뿌리를 알수 없는 각종 사술들이 난무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이 혈선교주다. 엄밀히 말하면 혈선교주라고 하는 것은 혈선교에 모여든 모든 무공과 마공 그리고 술법들을 압축한 기억과 정보를 계승하는 자라 할 수 있다. 그 중에는 당연히 익히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혼백과 심령을 해치는 것들이 가득했고, 이 모든 기억과 정보를 계승하는 인간은 본디 아무리 고강하고 고귀한 영혼을 지녔다 하더라도 타락할 수밖에 없다.


혈선교주가 강한 것은 선에 다다르는 지름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 계승되는 존재가 둔재라고 할지라도 수백, 수 천년에 걸쳐서 축적된 악의와 정보는 계승자를 순식간에 경지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에는 치명적인 구멍이 하나 있는데, 혈선교주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기억이 계승된 직후 경지에 도달하기 까지 일정 기간 동안에는 상당히 취약한 상태라는 것이다. 


백린의선이라는 칭호를 획득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 제갈린은 혈선교주라는 ‘현상’을 계승한지 얼마 되지 않은 존재와 우연히 만났다. 전전대 혈선교주가 천기를 흩어내기 위해 불러온 ‘경계를 넘은 인간’. 전전대의 혈선교주는 그 존재에게 모든 것을 계승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하필 백린의선을 만났고, 모종의 이유로 생사결을 벌였다. 혈린광살은 그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렸으나 혈선교주는 마지막 발악으로 대법을 시행해 제갈린에게 ‘현상’을 계승했다. 그러나 대법은 절반만 성공했다. 백린의선은 '혈선교주'라는 현상에 먹히지 않고 '인간 제갈린'으로서 자아를 유지한 유일한 통천교주가 되었다. 그리고 혈선교주들의 기억들을 마치 도서관마냥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장 흥미롭게 지켜본 것이 ‘경계를 넘은 인간’의 기억 속에 있던 천외천의 추억이었다.



"전임자에게도 '진천희'라는 건 꽤나 큰 존재였나 보군요. 천외의 기억이 지금까지 망념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니."



"사랑이라 불러야 마땅한 감정이란 생각이 드는군.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말일세."



제갈린은 애정 가득한 표정으로 제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지금껏 긴가민가했는데 이번에 제자의 반응을 보고 확실해졌다. 제갈린이 목을 벤 전대의 혈선교주와 진천희가 같은 천외천에서 왔으며, 두 사람이 아는 사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자각한 것 보다 훨씬 더 서로를 깊이 은애하고 있었음을.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제갈린은 너무도 유쾌해졌다. 전대 혈선교주의 기억에 남아있던 천외의 기억들은 모두 한 사람과 연관되어 있었다. 신기한 문물들과 유용한 정보들보다도 더욱 흥미로웠던 추억은 그 제갈린조차도 쉽게 지워낼 수 없었다.



"인간 시절의 기억은 쉽게 왜곡되곤 하지. 그래서 전임자의 기억 속에서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던 인물이 실제로 존재할거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았네. 헌데 이렇게, 내 손에 들어올 줄이야."



"전임자의 기억에 영향을 받았단 말입니까? 기억을 계승하고도 '제갈린'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당당히 말한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하하. 어디까지나 영향일 뿐,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지.“



인간에 대해 회의적이고 그들을 축생과 다를 바 없이 대하는 제갈린이 반할 만큼 올곧은 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구음절맥과 천형에 묶여 운신조차 쉽지 않은 귀찮은 육체를 벗고 탈각에 들지 말지 고민하던 그 순간, 진천희가 눈앞에 나타났다. 


기억 속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천외의 의술을 펼치며 반짝이는 눈동자로 삶을 포기하지 마라 말하던 작은 꼬마. 그 꼬마 속에 든 혼백이 전대 혈선교주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이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봤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혈선교주의 기억을 계승하지 않은 '제갈린'도 결국 이 아이를 은애하게 되었을 것이란 걸세."



만난 이상 결과는 단 하나 뿐이다. 결국 제갈린은 진천희를 은애하게 될 것이란 것. 통천교주의 기억은 그저 제자를 곁에 묶어두기 위한 아주 좋은 도구일 뿐이었다. 제갈린에게 '선배'의 일부가 남아있는 이상, 진천희는 결코 제갈린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스승님...."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킨 제자의 눈동자는 새파랗다. 잠결에 제갈린과 유호의 대화를 들은 모양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총명한 의원은 몇 마디 안 되는 말 속에서 이미 진실의 한 귀퉁이를 추론해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제자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이 보였다.



"잘 잤니? 한 시간만 늦게 일어났으면 들쳐 업고 응급실로 뛸 뻔 했구나."



[잘 잤냐? 한 시간만 늦게 일어났으면 들쳐 업고 응급실로 뛸 뻔 했다, 임마.]



백린의선의, 아니, 통천교주의 목소리 위로 '■■ 선배'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진천희는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도달한 답을 부정하며 꽉 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 선배는....이 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인데...어떻게....."



하염없이 떨리는 제자의 목소리가 퍽이나 안쓰러웠다. 제갈린은 진천희의 머리카락 끝을 손으로 감아 올려 가볍게 입 맞췄다. 평소라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서라도 안겨왔을 아이가 가늘게 몸을 떨며 몸을 웅크렸다.



"흐음...이 세상엔 말이다. 가끔씩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단다. 예를 들어 천기를 흩어버릴 방도를 찾던 미치광이가 세상의 경계를 넘어 무언가를 소환한다던가 하는 일이라던가."



"......"



"내가 교주로서 '이어받은' 기억에는 신기한 천외천의 문물과 함께 아주 반짝이는 존재가 하나 있더구나. 평소라면 천외의 문물에 더 관심을 갔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한 존재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지. 남아있던 전임자의 천외의 기억과 시선 모든 곳에 그 존재가 있었고, 전임자는 한 번이라도 더 그 존재를 만나기 위해, 세계선을 뛰어 넘기 위해 천기를 무너뜨리려 했지. 허망하게 실패하긴 했지만."



".................!"



어깨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밀려왔다. 제갈린은 해사하게 웃으며 무표정하게 굳어버린 제자를 품에 안았다. 진천희의 얼굴이 맞닿은 가슴께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자를 연모했던 모양이구나."



진천희의 몸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 마냥 크게 들썩였다. 품 안에서 끄윽, 끅, 하는 언어가 되지 못한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제갈린은 양손으로 제자의 귀를 막았다. 차가운 바람이 고막을 훑자 다시금 현훈이 덮쳐왔다. 몇 번이나 헛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구토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음이 엉망이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토해내고 다시 잠들고 싶은데, 현원전단신공이 그의 의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심한 어지러움에 고개를 더욱더 깊이 파묻는 제자의 등을 단단히 감싸 안으며 제갈린은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첫사랑의 마지막 파편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 이젠 나를 사랑하렴."



그것은 독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을 뇌가 거부했다. 

스승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부터 진천희는 스승을 막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바쳤다. 피를 원하는 혈선에게 주기적으로 자신의 피를 바쳤고, 방술로서 정기를 바쳤으며 스승이, 교주가 심심함을 느끼지 못하게 광대가 되어 그의 앞에서 재롱을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지 않았던 것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최후의 자존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지나갔던 절절한 짝사랑이 사실 짝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떠나온 세상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한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들은 순간. 그리고 그 상대의 일부가 통천교주이자 스승인 제갈린에게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진천희는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의 편에 설 수 없게 되었음을 자각했다.



"입을....맞춰주세요, 스승님...."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날 준비를 하던 것이 무저갱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반짝임은 눈으로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황홀하고 찬란했다. 제갈린은 다시는 맛볼 수 없을 희열을 느끼며 진천희의 입술을 먹어치웠다. 


그 순간. 어둠이 하늘을 살라먹기 시작했다. 무수한 선업을 쌓아 가장 고귀한 선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을 타락시킨 업은 천기를 가르고 새로운 하늘을 탄생시켰다. 가장 어두운 하늘을. 새로운 격(格)을 손에 넣은 제갈린은 품에 안긴 아이에게 축복을 내렸다. 한 때 그의 제자였던 이의 혼백은 그의 권속이 되어 영원히 손 안에서 노닐게 될 것이다.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천희는 땅울림이 진짜 땅울림인지, 아니면 그저 며칠 내내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현훈(眩暈)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서 확인 해 봐야 하나-? 라고 고민하던 것도 잠시, 진천희는 그냥 눈을 감았다. 스승의 품 안에 있는 다면 그 둘을 구분 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평소처럼 회진을 돌고, 환자를 치료할 것이다. 진천희가 살려낸 인간의 숫자만큼 제갈린은 이 땅 어딘가에서 인간들을 갈아버릴 것이고. 진천희는 그것을 모르는 것 마냥 아슬아슬한 평행선을 유지하며 열심히 의원노릇을 할 것이다. 그것을 ‘선배’의 조각을 삼킨 스승께서 바라시기에. 



"이 땅 위에 놀이터를 만들어 줄 테니. 질릴 때 까지 마음껏 놀거라." 



앞으로 영원히 그를 따라다닐 현훈(眩暈) 속에서, 진천희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존재의 품이 세상 무엇보다 포근하고 안락하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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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다살 최신화 스포있음!!!!

드디어 혈선교주가 재등장함. 그리고 내 머리는 깨져버렸다. ㅎㅎㅎㅎㅎ 와....내 머리 깨져버림. 아니 진교수님은 정신이상자들을 끌어 모으는 페로몬이 나오는게 분명함. 본인도 정상이 아니긴 한데....진천희가 자각은 못했지만 지구별에서 첫사랑이 선배였던 것 같은데...와......스승님이 곁에 계셔서 정말로 다행이다. 그리고 스승님은 도대체 무엇이 되어가시는 겁니까? 진짜 마음만 먹으면 신선 대가리도 후드려 깔수 있을것 같음. 그래서 좋다고요 ㅋㅋㅋㅋㅋ 아무튼 최신화를 보고 안 쓸 수가 없었다 ㅋㅋㅋㅋㅋㅋ 혈선교주 제갈린 ㅋㅋㅋㅋㅋㅋ 아 이설정 쓴지 너무 오래되서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다시 계략크툴루 스승님 취향 고개를 들어버리네. 사실 원래 이 다음편도 있는데....그건 너무 극악마이너한 취향이라서....포타에서 짤릴까봐 도저히 올리지를 못하겠음. 진짜 진교수님은 사람에게 음심을 품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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