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그럼 이렇게 개념화하기로 한 거죠?”



스터디룸의 매직은 경수가 잡았다.



“여기, 비혼주의를 ‘내면화’한다. 이것도 좀 걸려요. 교수님이 또 애매하다고 하실 것 같은 느낌.”

“관련 논문 찾아볼게요.”



경수가 차분히 팀플을 주도했다. 뱉은 말은 지키는 경수라는 걸 조원들도 어렴풋이 파악했다. 경수가 관련 논문을 찾아 본다고 하면 정말로 찾는 것이었다. 그것도 꼼꼼히. 단정하고 깔끔한 분위기가 모두의 신뢰를 샀다. 간혹 형민이 논점에서 벗어난 소리를 하면 경수는 단호히 씹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요점을 바꿨다. 백현이라면 대충 상대해주며 회의를 진행했겠지만 경수는 달랐다. 얄짤없었다.


백현은 경수의 그런 단단함을 좋아했다. 백현 앞에서만 무르게 굴던 순간들은 더더욱.



회의는 무탈하게 끝났다. 결과물이 또 어떻게 까일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다음주까지는 판단이 보류된 셈이었다. 할 일을 나누고 나니 시간이 어중간했다. 딱히 저녁을 먹으러 갈 만한 시간도 아니어서 모임은 자연스레 와해되었다. 새내기들은 소란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스터디룸을 빠져나갔다. 회의 내내 입을 거의 열지 않던 형민은 벌써부터 누군가와 목소리 높여 통화중이었다. 야 딱 기다려 나 지금 간돠! 마지막 새내기까지 나가고 나서야 둘만 남았다.



“경수야.”


“그저께는 미안.”

“뭐가.”

“개총 때 너무 마셔가지고.”


백현이 머리를 헝클였다.


“너도 알지. 나 술 약한 거, 근데 정선호 걔가.”



순 경수 때문에 자진해 꽐라가 되어놓고 백현은 선호의 핑계를 댔다. 마주친 경수의 눈은 침착해 보였다. 어쩐지 무서웠다. 그저께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도리어 선명해 숨고 싶은 정도였다. 멀쩡한 필름 속의 자신은 경수에게 애걸했다. 그리고 거절당했다. 그때의 모든 감정을 사과하는 것이 아니었다. 백현이 미안해 하는 것은 오직 술주정을 부렸다는 사실 뿐이었다. 술김에 내뱉은 마음은 죄 진짜였다. 터럭만큼도 굽히고 싶지 않았다.



경수가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이 관계에 주석을 달았다.



변백현.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네 상대로는 모자라.

널 계속해서 힘들게 할 거야. 내 추측이 그래.

너랑 제대로 된 걸 해낼 자신이 없어. 그러니,



“백현아, 나는 그냥.”

“응?”

“네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경수는 결국 말했다. 그리고 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네가 좋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인데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지. 변백현이 좋은 삶을 살면 내 무언가를 뺏기는 것도 아닌데, 둘 다 좋은 삶을 살자는 말인데. 그런데도 왜. 내 ‘좋은 것’은 변백현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듯.



인생은 정말…


제로섬 게임이 아닌데.



34


“야, 뭐?”



사과만 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기어코.



백현은 이 지지부진한 알력싸움의 원인을 몇 번이고 짚어봤다. 짧은 길을 두고 경수가 자꾸 뒷걸음질을 쳤다. 고장 난 인공지능 기계를 보는 것 같았다. 뭘 물어도 아닙니다, 하고 답하는.


원하는 말은 절대로 해주지 않았다. <다시 사귀자>가 아니어도 좋았다. 서로에게 빈 공간이 있다면 채우면 그만이었다. 백현의 계산은 그랬고 그래서 경수에게 지치지 않았다. 그래도, 방금 말은.



“난 너한테 그런거 안 바래.”

“…”

“뭐? 좋은 사람을 만나? 너 무슨 당장에 어디로 꺼질 것처럼.”



뱉어 놓고 섬칫했다. 사실이면 어쩌지. 도경수가 이 헬조선을 떠나 어딘가로 날아갈 준비라도 하고 있으면? 연락처도 모르는 지구 어딘가의 도경수를 그리워하고 조금이라도 도경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을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들어 혹시 도경수를 아느냐고 묻고선 모르겠다는 대답만을 들으며 침울해하는 꼴이 되면.


잊겠다는 가정은 없었다. 잊지 못할 것이다. 홧김에 헤어진 후 늘 하는 생각이었다. 백현에게도 자존심이랄지 가오랄지 하는 게 있어서 잠시간은 허세도 부렸었다. 도경수가 그렇게 특별한가? 차여놓고 부끄럽지도 않냐. 그딴 이별, 이렇게 또 배우고 커가는 거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면 슬그머니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뭘 배우려면 학교에 가지 왜 사랑을 해. 그저 좋으면 만나고 헤어지기 싫으면 붙잡는 거지.



붙잡을걸.



두툼한 양말을 시려도 발이 시렸다. 눈밭을 뒹굴던 겨울의 군대에서, 상박이 빨개진 백현은 내내 그 네 글자를 곱씹었다.


존나 헤어지기 싫었는데. 그때 왜 놓쳤더라.



너 결국 그 말까지 했다 이거지. 너 지금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 줄 알아? 모르지. 모르니까 막 뱉지. 그래, 네 말 대로 해보자. 해보는데, 너 그 말 꺼낸 거 꼭 후회하게 될 거야.



서툰 복수였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뭘.”

“네가 헤어지자 그랬을 때, 그러자고 한 거. 그래 알아, 그러면 안됐다는 거.”

“…”

“근데 그거 내 진심 아니야. 너도 알잖아.”

“그럼?”


“그럼 뭐였는데.”



존나 헤어지기 싫었는데 그때 왜.



늘 손 밖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경수였다. 사람을 어떻게 손에 쥘 수 있을까 싶다가도 욕심이 났다. 둘의 이야기는 백현의 진정성 90%와 경수의 진심 10%정도로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 여름이 아니면 너와 사귈일이 없었을 거라던 속삭임. 그건 꼭 백현이 아니라 누구라도 경수에게 백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려 질투가 솟았다. 달라서 끌렸지만 같기를 바란 순간이 더 많았다. 무심한 얼굴을 발견하면 심장이 내려앉았다. 괜히 경수가 사라졌을까 겁나 자다 깨 이불을 걷어본 적도 있었다.



항상 져주는 입장이라고만 여겼다. 져주어도 상관없지만 한 번은 이기고 싶다는 마음. 나도 널 안달나게 하고 싶고 네가 나 없는 하루를 상상해보다가 소름이 끼쳤으면 좋겠고 자다가도 옆에 있는 게 맞을까 확인하려고 내 옆구리를 더듬었으면 싶은.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내가 너 좀 이겨보려고 한 게.”

“…”

“그렇게 잘못이야?”



전에 없던 세기로 튕겨내면 비슷한 정도로 돌아올 줄 알았다.



“아니, 잘못 아니야.”



해묵은 말을 꺼내면 경수가 망설이다 받아들이고 우리는 실컷 서로를 끌어안고 입술도 좀 부비고 바닷가에서 파는 일회용 폭죽처럼 이리저리 자국을 남기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뭐야 저기 뭐 찍나? 하며 수군거리는, 드라마와 같은 장면을 꿈꿨다.



내심 기대했다. <다시는 그러지마>라고 말할 경수를. 그런 경수를 보자고 답답한 마음으로 삽질을 해댔다. 정면으로 찔러도 되는 것을 애먼 곳을 건드리며 경수를 자극했다. 좋아하는 마음만은 분명하니까, 나머지는 어떻게든 쇼부를 봐야지.



“진짜, 진짜 신경 꺼?”

“…”

“넌 그게 돼?”



난 안돼. 아무리 뒤져도 도경수의 ‘도’조차 발견할 수 없던 외딴 곳에서도 불가능했어.



경수는 한없이 외로워졌다. 백현은 자신에 대해 조금도 몰랐다. 자잘한 습관이나 취향, 그런 것에 빠삭할진 몰라도 결정적인 부분을 놓쳤다. 이기려고 했다니. 우스운 얘기였다. 경수는 늘 자신을 패자로 여겼다.


변백현, 우리 둘 다 졌나봐. 그런데 둘 다 지는 싸움 같은 건 말이 안되니까.



“그냥…백현아.”

“…”

“너랑 있으면 내가 초라해져.”

“…”

“그리고 넌 그걸 몰라.”

“…”

“나는 그게 지겹고, 힘들어.”



그래서 우리가 안 되는 거야.



경수가 드라마에서 본 대사를 떠올렸다. 엄마 어깨 너머로 본 수목드라마였다. 주인공처럼 눈물도 비죽 나왔다. 그래도 그들은 말미에 가면 무언가를 해내었다. 삶은 녹록치 않아서, 어쩔 땐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35


간만에 하늘이 맑았다. 시끄럽게 술 약속을 잡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대자보를 든 사람도 지나가고, 학군단도 지나갔다. 패딩을 입은 사람도 얇은 블레이저를 걸친 사람도 있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캠퍼스를 즐겼다. 00학번 000 노무사 합격 축하한돠! 플랜카드도 시끄러웠다. 정문으로 갈수록 열기가 거세졌다. 연합 동아리 홍보라며 여기저기 말을 붙였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파스텔톤으로 범벅이 된 홍보물을 건넸다. 요즘 신천지 수법이 이렇다던데. 영양가 없는 생각만 들었다.



백현과 사귀던 때의 일이었다.



엄마는 앞자리가 2로 바뀌면 사주를 보러 가는 거라고 성화를 냈다. 경수는 못 이기고 따라갔다. 태어난 시간같은 건 몰랐다. 저녁쯤 낳았어요. 제가 워낙 정신이 없었거든요. 어둑어둑 했는데. 그럼 여덟시 즈음이겠죠? 엄마가 계속 말을 덧댔다. 시일이 달라지면 인생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경수는 따분했다. 요즘엔 사주도 아이패드로 보는 구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엄마가 말한 대강의 정보를 입력하자 사주를 봐주던 사람의 아이패드에 빼곡한 정보가 떴다.



“아들 뭐 연예인 지망생이라도 되나?”

“연예인이요? 그런데 생각 없는 애인데.”

“도화가 있어서 그래. 도화가 두 개나 있어. 음이 많은 사주야. 여기서 음이란게, 음탕이니 음란이니 할 때 그런 음 말고. 혼자만의 세계같은 거 있잖아. 골몰하는 구석이 좀 달라. 역학 같은거 좋아하지?”


경수는 미신이라면 다 경멸했다. 신은 재수없었고.


“아니요.”

“이상하네. 그런 데 욕심이 많은 사주인데. 어머님이 돈에 욕심이 많은 사주라면 아들분은 욕심은 많은데 그 대상이 명확하지를 않어.”

“…”

“그렇다고 여자가 많은 사주도 아닌데 말이야.”



남자니까 그렇지.



사주꾼이 정의내리지 못하는 것을 경수는 알았다. 몸을 뒤흔드는 강렬한 욕심. 많은 사랑에게 사랑받는 것은 애당초 원하지 않았다. 그저 경수는,



더 많이 사랑받고 싶었다.

더 많이의 다음까지, 그 다음의 다음까지.


백현에게.



혼잡한 정문을 지나자 바로 카페였다. 경수가 갓 입학할때만 해도 대형 서점이 있던 자리였다. 공교롭게도 서점의 이름이 경구문구라, 백현은 의도적으로 그걸 경수문고라고 불렀다. 어느날은 어디냐고 몇 번을 물어도 정확한 위치는 말 해주지 않고 도경수 앞, 자기 앞, 울 경수 앞, 하길래 말장난치지 말라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저기까지 줄 서 있고 그랬는데.



학교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의 서점도 문을 닫다니. 프랜차이즈 카페 창가에 앉아 떠드는 사람들을 보는데 씁쓸해졌다. 자리를 지키리라 믿었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흔적을 감추는 세상이었다.



-힘들어? 초라해져?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

-그니까, 나랑 사귀는 내내 좆같았다는 거잖아.

-…

-좆같게해서 미안. 그것도 모르고 질척였네.



백현이 화를 냈다. 경수는 달래지 않았다. 백현이 장난을 친답시고 한겨울에 차가운 봉봉을 만진 손을 냅다 맨투맨 밑으로 집어넣었을 때도 이렇게 심장이 차게 식지는 않았었다. 지쳤다고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사귀는 내내 좆같았냐고? 변백현 쟤 정말 나를 하나도 모르네. 그동안 안다고 나대던 거 다 거짓말이었네. 내가 어디 좆같은 걸 시작이나 할 성격이야? 그런 관계였다면 진작에 때려치웠겠지.



다 좋아서 여기까지 질질 끈 거잖아. 좋아서 좋은 일들만 가득하지는 않다는 걸 왜 몰라.


꼭 이렇게 끝나야 해?



경수는 백현과 잘 헤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잘 헤어지는 연인은…티비에서나 봤지 현실에선 본 적 없었다. 웃으며 안녕? 개소리였다. 아련한 미소와 함께 엔딩 크레딧을 장식하던 그 커플들도 막이 내린 후엔 아마 조금씩 다 좆같아 했을 거라고, 경수는 짐작했다.



36


“제트스프림 어딨어요?”

“…”

“아, 안녕.”

“무슨 인사가 그렇게 어정쩡해요. 미팅 나온 것도 아닌데.”

“…”

“제트스프림 저기. 0.5 말고 다른 사이즈 찾는 거면 왼쪽 끝에 따로 있어요.”

“시…”

“시그노는 제트스프림 오른쪽에. 근데 0.38 검은색은 다 나갔어요.”



칸칸이 나눠진 매대가 복잡했다. 왼쪽 끝에 있는 제트스프림은 찾았는데 오른쪽에 있다는 시그노는 보이질 않았다. 눈가를 좁혔다. 헤매는 경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퀘스트라도 깨는 기분이었다.



“거기 옆에요.”

“…”

“안 보여요?”



세훈이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위는 깔끔한 남방이면서 아래는 후줄근한 쥐색 추리닝 바지였다. 게다가 슬리퍼. 알바생 차림으로는 영 불합격이었는데 옷 자체는 본인에게 잘 어울렸다. 키가 커서 구부린 각도도 컸다. 손님들이 뭘 물을때마다 이렇게 구부리면 허리 꽤나 아프겠다 싶었다.



“또 찾는 거 있어요?”

“…”

“참, 지류는 물어보지 마세요. 아직 못 외웠으니까.”



찾는 게 몇 개 더 있었는데 또 도움을 받기가 좀 그랬다. 경수는 쓰는 것만 썼다. 매번 사는 종류가 바뀌는데다 자주 필기구를 잃어버려 학교 앞에서 받은 볼펜-대부분 태어나 처음 듣는 단체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으로 필통을 채우는 백현과는 반대였다. 0.38로 쓰는 것은 0.38로만 썼고 0.5로 쓰는 건 0.5로만 썼다. 다 쓰면 똑같은 걸 또 샀다.



경수가 고민에 빠지는 순간은 공책을 고를 때였다. 같은 회사에서 늘 같은 규격으로 나오는 필기류와는 달리 공책은 디자인이 자주 바뀌었다. 저번에 쓴 걸 또 사는 게 불가능 했다. (옥스포드 노트 같은게 그나마 늘 똑같았는데, 한 번에 그걸 네 다섯 개씩 사기엔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한참을 골몰했다.



세훈은 씨씨티비로 경수의 모습을 봤다. 뭘 훔쳐갈 것 같아서는 아니었고, 단지 신기해서였다.


뭘 저렇게 한참고르지.


그래봤자 공책아닌가?


평소에도 비슷한 소리를 자주 했다. 그래봤자 공책이고 그래봤자 펜인데 뭐 종류가 이렇게 많아요? 바코드를 찍어야 할 상품이 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날이면 볼멘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럼 옆에서 비닐을 벗기던 사장이 세훈을 흘겼다. 너 진짜 알지? 뭘요? 새끼가, 알면서. 저 재수없는거요? 아니, 자식아 그거 말고. 그거 말고 저 아직 새내기라 아는 거 없는데. 됐다, 이거나 갖다 버려.



사장은 세훈을 잘 생겨서 뽑았다. 그리고 잘생겼다는 건, 세훈에게 ‘아는’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가 숨 쉬는 법이나 잠 자는 법을 ‘안다고’ 말하지 않듯, 세훈에게 그건 체득한 사실이 아니라 날 때부터 몸에 지닌 성질이었다. 물론 세훈도 자신이 잘난 얼굴덕에 이 자리를 쉽게 얻었단 건 알았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이제껏 그 이유로 알바를 따냈다. 방학 시즌에 다들 알바를 구하지 못해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닐 때 세훈은 한큐에 나오란 소리를 들었다. 여러 개 해보니 서빙은 힘들었고 편의점은 시급이 짰고 카페는 뭘 만드는 게 귀찮았다. 문구점? 할 일 존나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지원했고 역시나 단박에 붙었다.



예상보단 빡셌지만 새학기라 그러려니했다. 다들 연애하는 사월쯤 되면 한가해지겠지.



“여기, 계산.”

“뭘 그렇게 한참 골라요.”

“…”

“맞다. 나 모른댔지. 자꾸 치대네.”

“…너 모르지 않아.”



세훈이 바코드를 찍다가 멈칫 했다. 파인테크는 바코드 스티커가 다른 상품에 비해 작아서 아무리 리더기로 읽어도 반응이 없곤 했다. 아 또 이게 사람 성질 건드리네. 가슴이 울렁울렁거렸다.



“나는 그냥 조금, 어색해서.”

“…”

“키 되게 많이 컸다.”



경수가 말마따나 <어색함>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몇 년만에 본 친척의 친척들처럼 의미없는 감탄사를 뱉었다. 세훈은 외양에 대한 이야기가 지겨웠다. 정우성은 들어도 들어도 짜릿하다는데 세훈은 1더하기 1이 2라는 당연한 소리를 반복해 듣는 것 같기만 했다. 평소의 세훈이라면 네, 하고 짤없이 대화를 끝낼 타이밍이었다.



“그냥 훅 자랐어요.”

“아 그래?”

“밥을 많이 먹는 편도 아닌데.”

“…”

“그 왜 옛날에 형네 아주머니가 저희 집 올 때 사거리에 있던 주먹밥 집, 거기 주먹밥 사왔는데 저 그거 반절도 못먹…아 아니다. 이거 너무 티엠아이. 영수증 필요해요?”


“아 거기, 금방 망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

“아닌가.”

“…그리고 이삭 토스트 들어왔다가 또 나가고.”

“거기가 은근 장사가 안 됐나봐. 애들은 많은데.”



그리고 그 옆 골목에서 여자친구한테 뺨 맞았었는데.



경수네 아주머니가 사온 주먹밥 사이즈까지 기억나는데 어쩌다 여자친구한테 뺨을 맞았는지는 가물가물했다. 남들은 흐릿했고 경수만은 또렷했던 시절이었다.



“영수증 버려도 돼.”

“…”

“다음 주 수업 때 보자.”

“…”

“알바 잘 하고.”


경수가 나가고 세훈은 비니를 벗었다. 눌린 머리를 헝클였다. 세훈과의 동일시를 꿈꾸는 여러 친구들에게 랜덤으로 씨발, 하고 카톡을 보냈다. 놀란 애들이 왜? 왜?ㅋㅋㅋㅋㅋ 세훈쓰 뭔일임 하고 일제히 답장이 오는 것을 바라만 봤다.



끝까지 경수는 뻣뻣했다. 경수에게 세훈이 희미한 존재라는 건 확인하지 않아도 확실했다. 그게 눈에 보이는데도 실없이 입을 열었다.


무슨 네이버 밴드 동창 모임에서 첫사랑 발견한 중늙은이도 아니고.



<저 곧 있으면 마감인데 같이 저녁 먹을래요?>


그 멘트를 안해서 다행이지.



세훈만큼이나 경수도 잘 자라주었다. 모자란 키를 얼굴로 상쇄했다. 깊은 목소리가 일품이었다. 볼 때마다 흐뭇했다.


사라진 마음에도 감흥은 있었다.


역시 오세훈의 첫사랑이라고, 세훈은 생각했다.



37


저녁이 되자 바람이 더 쌀쌀해졌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경수는 자취방에 들어오자마자 난방을 돌렸다. 이 시간 쯤이면 팀플을 핑계로 괜히 경수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백현이었는데 핸드폰이 잠잠했다.



-그니까, 나랑 사귀는 내내 좆같았다는 거잖아.



곱씹을수록 서운했다. 하나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과한 행복이었다. 언제 평정심을 잃을지 몰라 두려웠다.



술 먹다가 갑자기 아이스크림(경수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사줄테니 나가자고 하던 고전적인 수법부터 대뜸 입을 맞추게 된 동아리 엠티 날 밤까지, 참 요란하게도 집적거렸다.



학식으로 어묵탕이 나온 날이었다. 경수는 국물을 휘휘 저었다. 어묵탕인데 어묵이 한 개 반 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어묵탕. 심기가 불편했다. 국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설상가상으로 반찬도 빈약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한 무리의 새내기 동기들이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시장통이었다. 뭘 먹을때면 요란스레 쩝쩝거려 경수를 괴롭게하던 백현이 어째 조용했다. 백현의 침묵이 어색해 경수가 식판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백현은 얼굴 근육을 잘 썼다. 주로 눈을 쓰는 경수와는 달랐다. 입꼬리며 눈꼬리며 잘도 구부러졌다. 줄곧 허허실실이더니 갑자기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어디 아파?

-아니.

-별로야?

-뭐가.

-그냥, 뭐든.

-월요일이라 그래.

-주말이라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월요일. 아까까진 쌩쌩했잖아.

-…

-말해봐.


-어묵.

-어묵?

-이게 어딜봐서 어묵탕이야.


어묵이 두 개 밖에…. 민망해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와하하. 백현이 어깨를 들썩였다. 경수는 저 웃음이 민망했다. 나름의 결론도 내렸다. 변백현은 나한테만 ‘이상하게’ 웃는다. 사랑과 우정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는 표정이었다. 경수는 사랑과 우정중엔 당연히 사랑이고 우정과 사랑중에 고르라고 해도 헷갈리지 않고 사랑이었는데 사랑과 우정사이 같은, 애매한 선택지는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당황스럽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꼬리를 물면 백현에게 말린 기분이었다.



-담부터 내 거 먹어.

-안 그래도 돼.

-그럼 다른 애 거 뺏어다 줄게.

-됐어.

-어묵 못 먹어서 울 것처럼 굴어놓곤.

-아니거든.

-벌써 울면 어떡해. 산타아저씨 아직 열일해.



결국 백현은 경수에게 한 대 맞았다. 백현은 애초에 맞으려던 게 목적인 사람처럼 몸을 배배 꼬며 애교를 떨었다.



-좋겠다, 아주.

-나야 경수 항상 좋아하지.

-대나무숲에 너 만나고 싶다는 애들 트럭으로 깔렸는데 왜 나야.

-…

-거기서 하나 골라잡아. 나 귀찮게 하지말고.

-와, 감격.



?뭐가 감격이라는 거야? 경수는 진심으로 의아했다.



-경수야 질투할거면…예고 때려주면 안돼? 나 방금 아작났어.



경수를 대하는 사람들의 패턴이란게 항상 똑같은 건 아니었지만 백현같은 사람은 본 적 없었다. 매번 지름길을 찾아냈다. 단박에 경수를 쑤시거나 화나게하거나 어이없게하거나, 반드시 뭔가를 해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소원대로 니 번호 지웠어.

-너도 지워.



여전히 그랬다.


백현은, 이별 역시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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