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겨울안개









“비싸게 사줬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아침부터 여자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았다. 약에 절어서 누워있을 때가 훨씬 나았다. 아무렴 별 상관은 없다. 벌써 계획되어 있었던 일들이 모두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게 계약서에 도장도 찍었고, 혼자 쓰기엔 큰 오피스텔도 하나 얻었다. 모자란 돈을 메우기 위해 여자의 차도 팔았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약쟁이 여자가 깨어나서 헛소리를 지껄이던 말든 간에 이 집을 나갈 모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한다.




바위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민석이 나오길 기다렸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겨둔 할 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초조함에 자꾸만 손바닥이 젖었다. 이젠 제법 서늘해진 공기에도 등줄기로 식은땀이 났다. 이런 긴장감은 너무 오랜만이라 웃음도 난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려 해도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담배가 자꾸만 떨렸다. 다 태운 담배를 바위 아래에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줄줄이 피워댄 담배의 연기가 텁텁해진 목구멍을 따갑게 했다.






“...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민석은 그녀의 각성을 진정으로 원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어쩐 일인지 정말로 깨어나니 무언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세훈은 그 모습에 약간의 기대를 걸어본다.






“잘 생각해봐.”






여기서 약이나 배우던가. 나랑 같이 나가서 빌어먹을 아빠놀이나 하던가. 겉모양만 봤을 땐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는 모습이지만 속은 그러질 못했다. 세훈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그럴 일 없어요.”






민석의 말 한마디에 머리에 있던 피가 사지로 쏟아져 내렸다가 다시 머리를 터트려 버릴 듯이 몰려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좆 같이 굴지 말고. 생각이라는 걸 좀 해봐.”






마지막 말은 흡사 읍소하듯 애절함을 가득 담은 말이었다. 민석은 성가신 표정으로 잔디를 밟으며 커다란 대문을 열었다. 이 또한 예상했던 범주 안에 있는 행동이다. 세훈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바지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다말고 생각에 잠겼다. 작고 네모난 라이터의 몸통을 손안에서 몇 번인가 굴려가며 잠시 그 감촉을 느끼다가, 바위 위에 올려두었다. 자신이 다시 오기 전까지. 부디 오늘 일을 잊지 말길 바라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세훈은 집을 나섰다. 다시 돌아올 때엔 꼭. 민석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오세훈 X 김민석





탈출 10 : 과거 회상 下








대문 앞에서 민석의 방 창문이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확인했다. 이곳에 다시 오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그는 날 생각할까. 그는 날 보고 싶어 할까. 그가 날 잊어버린 건 아닐까.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이 문을 열고나올 수가 있을까. 설레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든다.

오는 내내 그가 벌써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가 깨어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집에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가 집에서 자신을 반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정망 정말 어쩌면. 그가 날 잊어버린 채 살았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날 잊어버리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따라 나오려 할까.

어쩌면 밀어낼지도 모른다.

아니 밀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날. 날..




세훈은 주머니 속에 넣어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다가 대문을 열었다. 꼭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제 발로 지옥의 문을 열고 다시 걸어 들어온 그의 모습이 그랬다.






“너는 주제도 모르더니. 뻔뻔하기까지 하네.”


“진주씨 보러온 거 아니야.”


“그래. 붙어먹던 거 보러 왔겠지.”






‘붙어먹던’이라는 말에 세훈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말하는 그 ‘붙어먹던’게 자신의 아들인줄은 모르는 눈치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 말해버릴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왜 이제 와서? 너도 진작 살림도 차리고 빌어먹을 부부행세라도 해보지 그랬어? 이 집구석에 들어오는 남자는 왜 다 그 모양이 되는 거야? 어떤 년인데? 퇴직금이라도 챙겨줘?”






그녀의 말을 듣다보니 저속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콧대 높던 부잣집 사모는 어디로 갔는지, 침대위에서 오줌을 질질 흘리던 때보다 더 추악해 보이는 모습이다. 기가 차 말을 잊은 세훈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더욱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너도!... 너도 똑같았어! 빌어먹을 새끼들!”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된 것도 놀라운데, 그 내용이 더 가관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젖어갔고, 언성은 더욱 높아졌다. 시끄러운 소란에 아직 깨어있던 고용인 몇몇이 본채로 넘어와 여자를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손길에 더욱 화가난 팔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세훈을 때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팔은 한 손에 쥐고 비틀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만큼 약했다. 그런 손으로 때려봤자 별로 아프지도 않다. 세훈은 이것도 그저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견뎌냈다.


‘짜악-!’


가슴팍과 머리통을 때리던 손이 결국 뺨을 후려치던 순간이었다.






“아..”






그토록 고대하던 민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민석은 세훈의 눈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힘이 없이 늘어지기 시작하는 팔을 당겨 작은 품으로 익숙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천천히 힘을 줘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여자는 본격적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민석의 등장에 놀랍도록 잠잠해진 모습이었다.




세훈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분주하게 물을 떠오거나 젖은 수건을 만드는 고용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쫒았다. 곧 안방에서 나올 민석을 기다리며, 입술이 바짝 말라 몇 번이나 혀를 내밀어 입술을 빨아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돌던 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잠잠히 그리고 아무런 상념 없이 조용한 기다림의 시간들이 지났다. 천천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고용인들이 민석을 챙기며 먼저 별채로 넘어갔다. 거실엔 이제 세훈과 민석 둘만 남았다. 벽을 하나 두고 격렬한 몸짓을 이었던 그 날처럼. 두껍지 않은 방 문 너머로 그녀가 잠들어 있을 테지. 세훈은 손바닥을 펼쳐 허벅지에 문질러 습기를 닦았다.






“이렇게 봐요.”






테이블 위로 작은 상자가 올라왔다. 주섬주섬 상자에게 이것저것 꺼내던 민석이, 세훈의 어깨를 당겼다. 고개를 돌려 마주보니, 민석의 피곤한 얼굴이 보인다.






“뭐하고 있었어?”


“... 하아..”






크게 뱉는 한숨에서 약한 커피향이 났다. 꼼질거리던 작은 손이 세훈의 눈가로 올라와 치덕이며 무언가를 바르고 멀어졌다.






“..... 김민석.”






티슈에 손을 닦던 그의 모든 움직임이 느려졌다. 아니 느리게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걸 보며 다시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침을 삼키고, 작게 심호흡도 한다. 하지만 끝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훈은 알고 있었다. 그가 거절할 것이란 걸.






“여긴 뭐 하러 다시 와요.”


“.... 그게 네 대답이야?”


“....”


“고민은 해봤어?”


“...”


“내가 어떤 기분일지는 생각 해 봤어?“


“밴드 붙일 까..”


“안했겠지.”


“...”


“너는 정말 재수 없는 놈이야. 재수 없는 새끼.”






세훈의 말끝이 떨렸다. 떨리기 시작한 아랫입술을 깨물고 벌떡 일어섰다. 끝에 가서 이렇게 구질구질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팔을 들어 눈가를 벅벅 비비며 차에 올랐다.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축축한 재킷의 팔에 묻은 연고가 반짝거렸다.




그 후로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추웠던 날 딱 한 번 더 민석을 보러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근처에 서서 담배를 피우다가,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질려버렸다. 밥도 잘 못 먹어 야윈 몸을 담벼락에 기대고 깡마른 손을 내려다본다. 자신은 이렇게 형편없는 모양으로 말라가는데 안쪽에선 그렇지 않을 모습을 생각하니 조금 울분이 치밀었다. 그동안 헛된 감정 소비를 했음을 깨닫는 중이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던져놓고 두 번 다신 그를 찾지 않았다. 앞으로 볼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작은 몸을 가누지 못해 가게 복도에 고꾸라져있는 것을 보았을 땐, 머리가 차게 식었다. 최건형의 일행이라는 말에 꼭지가 터져 나올 듯 화가 치민다.




결국 넌 그 망할 집구석에서 약이나 배웠구나.

RPS 슈른. 겨울안개. 짜부. 결개. 슈슈밍. 뭐든 편하게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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