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실존했던 나라나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전물의 분위기를 내는 정도의 글이라고 생각하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 트위터에서 풀었던 썰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 미리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연재 속도가 느립니다ㅠㅠ











랑국의 황궁은 과연 듣던 데로 크고 화려했다. 정면이 여덟 칸에 2층 전각 형태로 지어진 정문을 지나면 정문 못지않게 화려한 중간 문이 나왔는데, 이 중간 문을 지나 또 세 번째 문을 통과해야지만 제대로 된 황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문도 여러 개인데 문과 문 사이의 거리가 머니 문을 통과하는 데만도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입궐할 때 마차를 타야 한다는 말에 어째서 가마가 아닌 마차인가 하였더니, 야마구치는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 두 마리가 이끄는, 꽃과 구슬로 장식된 마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간 끝에 야마구치가 랑국의 황궁에서 첫발을 내딛게 된 곳은 황궁의 정궁(正宮)인 태성궁(太聖宮)이었다. 황실의 대례 등이 있을 때 쓰인다는 태성궁 역시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기를 구워 만든 기와에 서까래와 기둥에 얹어진 금속 장식이 햇빛을 받을 때마다 번쩍였고, 정면이 여덟 칸으로 되어 사람 수십 명은 족히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었으며, 높기는 또 얼마나 높은지 야마구치의 세 배쯤 되는 거인이 들어가야 겨우 천장에 머리가 닿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길, 그 위세에 눌린 야마구치의 기가 단번에 꺾여버렸음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야마구치의 입궐 절차는 태성궁의 계단을 오르는 것부터 시작됐다. 아마 서역에서 수입해왔지 싶은, 이국적인 모양새의 붉은 융단이 계단의 첫 부분에서부터 태성궁 안쪽까지 길게 깔려 있었다. 도톰하고 폭신한 것이 마치 구름 같다 하여 홍운단(紅雲緞)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 융단은, 사나다의 말에 의하면 잘 꺼내 놓지 않는 물건이라 하였다. 없는 것이 없다는 랑국의 황실에서도 이 정도 크기의 수입 융단은 하나뿐이다 보니 혹여 눈에 젖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공기가 차가워 쌓인 눈이 미처 녹지 못한 체 그대로이긴 했지만, 하늘만큼은 흐린 기색 없이 높고 맑아, 눈을 치워놓은 길목의 풍경만 보면 청명한 가을 날씨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짙푸른 하늘과 산산이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본 사나다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랑국의 겨울에 이런 날은 찾아보기 힘든데, 아마 신께서 마마의 입궐을 반기시나 봅니다."


야마구치는 사나다의 그 말을 반가워하는 척했지만, 실상 속내는 그렇지 못했더랬다.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듯한 차디찬 공기, 너무 지나쳐서 무섭다고 느껴질 정도로 새파란 하늘, 눈을 쪼아대는 햇빛과 지나치게 번쩍거려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태성궁의 모습, 사람의 걸음으로는 도무지 빠져나갈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은 황궁까지. 야마구치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신의 축복이라기보다는 그저 마음의 짐처럼만 여겨졌다.


울적한 상심에 잠겨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제 발치만 바라보는데 불현듯 쿵! 하는 북소리가 낮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야마구치가 화들짝 놀라니 사나다가 야마구치를 다독이며 말했다.


"마마, 놀라지 마세요. 입궐을 알리는 북소리이니, 이제 천천히 계단에 오르시면 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기억하고 계시지요?"


사나다의 물음에 야마구치가 무언가 말하려는데, 다시 북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사나다는 어서 계단에 오르시라 채근하며 야마구치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머릿속이 새카맣게 되어 입궁 절차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지만, 야마구치는 별수 없이 곱게 모은 손을 가슴 위로 올린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태성궁은 평지보다 높은 곳에 있어 반드시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계단은 서른 개쯤 되었는데, 계단을 열 개쯤 오르면 넓고 평평한 계단참이 나오고, 그러고 나면 또다시 계단 열 개와 계단참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완만한 경사의 계단 중앙에는 호랑이의 얼굴이 양각으로 새겨진 답도가 놓여 있었고, 답도의 오른쪽 길은 오로지 황제만이 밟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야마구치는 사나다에게서 배운 데로 왼쪽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렇게 서른 개의 계단을 모두 밟고 올라가자, 마침내 태성궁이 야마구치의 눈앞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활짝 문이 열린 태성궁 앞에는 황실의 사람들과 수많은 궁인이 서 있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지만, 머리 위로 쏟아지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느껴졌다. 마치 우리 안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라 마음이 불편해져, 야마구치는 낯을 붉게 물들이며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 검은 비단 옷자락이 걸렸다. 저분이 황제 폐하시구나. 랑국의 황실에서는 검은색을 길하게 여겨 황실의 대례가 있을 때면 황제와 황후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대례복을 갖춰 입는다는 말을 들은 일이 떠올랐다. 목 뒤로 침을 꼴깍 삼키며, 용기를 내어 조금 더 고개를 든 순간, 야마구치는 그만 저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야마구치의 눈앞에 선 황제는 과연 듣던 데로 빼어난 미남이었으나, `황제 폐하께서는 몹시 다정하신 분이다`라던 사나다의 말과는 달리 다정과는 거리가 전혀 멀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가운 눈처럼 희다 못해 창백한 얼굴에 랑국의 차가운 날씨마저 얼려버릴 것 같은 눈빛. 야마구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다시 숙이고 말았다. 꼭 맹수 앞에 선 사슴이나 토끼 따위의 된 기분에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불현듯 두려움이 닥쳐와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지만, 입궐하자마자 황제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무례를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야마구치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음에 저가 무얼 해야 하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계단을 올라가시거든, 태성궁 앞에서 배우신 데로 절을 하셔야 합니다. 예상치 못한 황제의 차가운 인상에 당황하여 흐트러진 정신 사이로 사나다가 알려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절을 할 때 어느 쪽 무릎을 먼저 꿇어야 하는지까지는 떠오르지 않았으나, 계단을 오를 때 답도의 오른쪽 길은 황제만이 걸을 수 있다고 한 것을 떠올려, 야마구치는 오른쪽 무릎을 먼저 꿇고, 그다음에 왼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배운 바를 떠올리려 애쓰며 야마구치는 손을 가지런히 포개 눈썹 위에 오도록 올리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경국의 대군 야마구치 타다시, 황제 폐하를 뵈옵…."


그 순간, 차디찬 무언가가 야마구치의 손을 붙잡았다. 얼음장 같은 감촉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야마구치의 손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황제의 손이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야마구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정작 황당한 것은 그가 아닌 야마구치 쪽이었다. 어떻게 다른 이도 아닌 황제가 제 동생의 비가 될 이의 손을 함부로 잡는다는 것인지. 당황스러움에 무어라 말도 못하고 크게 뜬 두 눈만 끔뻑거리는데,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야마구치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저는 폐하가…."

"아하하!"


그러나 그의 말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든 호탕한 웃음소리에 묻혀 끊어지고 말았다. 황제가 문득 제 손을 붙잡은 것도 놀랄 일인데, 황제의 말을 끊는 웃음소리는 더더욱 놀랄 일이라, 야마구치가 눈을 크게 뜨고 웃음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면류관을 쓴 남자가 환히 웃으며 황제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키가 큰 남자는 눈앞의 황제와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좀 더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뒷짐을 진 채 걸어오는 그는 검은색 비단에 붉은 천을 덧대고 금사로 수를 놓아 장식한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 쓴 면류관의 류는 짙은 보라색과 흑색의 구슬로 만들어져 있었다.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야마구치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지 않아 몰랐는데, 그가 입고 있는 옷은 황제의 의복인 검은색이 아닌 진한 군청색이었다. 짙은 군청색 의복에 어두운 남색 천을 덧대고 은사로 수를 놓아 장식한 모양새가 퍽 아름다웠지만, 화려하기보다는 점잖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의복이었다. 헉. 저도 모르게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야마구치가 제 입을 틀어막자, 눈앞의 남자는 싸늘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야마구치의 손을 놓아주었다.


"벌써부터 신랑 될 사람을 못 알아봐서야 쓰나."


면류관을 쓴 남자, 그러니까 랑국의 진짜 황제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손짓하자 곧 야마구치의 뒤로 열 걸음쯤 떨어져 걷던 사나다와 내관이 달려와 야마구치를 일으켜 주었다. 지나치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두 사람에게 의지해 간신히 몸을 일으키니 황제가 야마구치 가까이 다가왔다. 넘실거리는 면류관의 류 사이로 비치는 얼굴은 과연 사나다의 말대로 다정하고 따스했다.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니 황제는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군에게 무언가 말이 잘못 전달된 모양이군. 황제는 이쪽이 황제이고, 이자는 황제가 아니라…."


이번에는 그 손끝이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야마구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했다.


"곧 대군과 혼인하게 될 랑국의 군왕이라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야마구치는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하지만 불현듯 무릎에 힘이 빠져 풀썩 쓰러지는 바람에, 사죄는커녕 괜한 소란만 더 커지게 하고 말았다.




*




`소정궁`은 작고 조용한 궁이라는 뜻이었지만, 경국의 왕실에서 야마구치가 지내던 처소에 비하면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 하지만 색이 밝은 목재를 사용한 데다 안에 들어있는 가구도 따뜻한 색감의 것들이었고, 놓여있는 병풍이나 벽에 그려진 벽화 역시 색감이 다채로워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다정하다는 인상을 풍기는 궁의 모습은, 모르긴 몰라도 궁을 지은 이가 궁의 주인을 몹시도 사랑스러이 여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야마구치는 소정궁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틈이 없었다. 침상에 누워 두꺼운 이불을 두 채나 덮고 있었음에도 자꾸 몸이 떨렸고, 심장의 피가 매 순간 쭉쭉 빠져나가는 듯 자꾸 기력이 빠져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는데도 숨이 차고 힘들었다. 하지만 야마구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두통이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큼 두통이 심해,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이불을 꽁꽁 둘러맨 채 모로 누워 이마를 짚은 채로 끙끙 앓고 있는데, 사나다가 침전에 들기를 청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들라 이르니 곧 침상에 둘러쳐진 휘장이 걷히고, 탕약을 손에 든 사나다가 나타났다.


"마마, 탕약을 달여 왔습니다. 적당하게 식었으니 어서 드세요. 두통이 금방 가라앉으실 겁니다."


두통이 심해 차마 고맙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아 야마구치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린 뒤 탕약을 집어 들고 그대로 들이켰다. 구역질이 날 만큼 쓴맛이었지만, 지금은 구역질하다 속이 뒤집히는 한이 있더라도 이 두통부터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그저 두통이 어서 가라앉길 바라는 마음으로 탕약을 단번에 들이켜고, 사나다가 물려주는 다식(茶食)으로 입안의 쓴맛을 가라앉힌 야마구치가 냉큼 이불을 덮어쓰고 자리에 눕자 사나다가 딱하다는 얼굴로 야마구치의 이불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마마, 너무 심려치 마세요. 두통은 마음을 편히 가져야 빨리 가라앉는 법입니다. 신경을 많이 쓰시면 더 심해지실 거에요."

"응, 그래야지…. 마음 편히 가지도록 노력할 테니, 상궁도 걱정 말고 어서 들어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야마구치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사나다는 심려치 말라 했지만, 오늘의 일은 마음을 편히 가라 앉히려야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일이었다. 랑국에서는 외지에서 신부가 올 때 신랑 될 이가 직접 마중하는 것이 예법이라는 말을 사나다에게 들어 놓고도 긴장하여 새카맣게 잊은 일이나 랑국의 황실에 입궐하자마자 실수한 일은 그렇다고 쳐도, 감히 황제가 아닌 이에게 폐하라 칭한 것은 자칫하면 역심을 품었다는 소리를 듣고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를 보고 있었던가. 수많은 궁인이 야마구치를 두고 경국에서 왔다는 대군은 폐하와 제 신랑감도 분간 못 하는 바보라더라 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랑국에서 편히 지내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앞으로의 삶이 훨씬 더 고달파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야마구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나를 비웃겠지."

"마마, 그런 말씀 마세요. 폐하께서 이미 괜찮다 하시며 넘어가신 일을 감히 누가 비웃겠습니까? 비웃는 이가 있다면, 그건 감히 폐하를 거스르는 일인 것을요."


사나다의 말대로, 황제인 아키테루는 야마구치의 실수를 그저 웃어 넘겨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가 풀려 쓰러지고만 야마구치의 건강을 염려해 무려 친히 어의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고, 오늘은 야마구치가 랑국에 온 첫날이라 정신이 없을 테니 소정궁에 인사를 가거나 선물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 명을 내리는 세심한 배려까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걱정과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마음에는 그런 친절마저 그저 부담이 되고 짐이 될 뿐이었다. 괜찮다는 그 말이 정말 본심이었을까, 돌아서서는 마뜩잖은 신붓감이 왔다고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움에 하염없이 한숨만 내쉬고 있으려니 사다가가 그런 야마구치의 속내를 알아챈 듯 말했다.


"마마, 소인은 열 두 살에 입궁하여 황제 폐하는 물론이고 군왕 마마까지, 두 분 모두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습니다. 폐하는 성품이 다정하시고, 또한 매우 담백하시지요. 폐하께서 오늘 일을 그저 마마께서 랑국의 예법에 익숙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가벼이 넘기신 것은, 폐하께서 정말로 그리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성정에 흠을 잡을만한 큰일이라고 생각하셨더라면 분명 그 자리에서 말씀하셨을 테니까요. 그러니 괜한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주무세요. 내일은 여기저기서 소정궁에 선물을 전하러 올 테니 정신이 없으실 겁니다. 또한, 폐하와 황후마마, 그리고 군왕마마와 함께 저녁 만찬도 하셔야 하고요. 내일은 몹시 바쁠 테니 어서 주무시어 기력을 보충하시고 피로를 털어내셔야지요."


사나다의 말에 야마구치가 여전히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감자, 사나다는 차마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올리고 침상의 휘장을 내려주었다. 촛불 몇 개를 꺼트렸는지 침전의 불빛이 희미해지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야마구치는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사나다의 말마따나 내일은 황실의 웃어른인 황제와 황후, 그리고 저의 혼례 대상인 군왕과의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저녁 만찬이 그 무엇보다도 야마구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황제나 황후보다도, 군왕을 만날 것이 너무나도 두려운 탓이었다.


저의 혼례 대상이 될 군왕이라는 자는 야마구치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도 얼굴이 흉물스럽다더라, 혹은 툭하면 칼부림하는 반미치광이라더라 하는 말을 많이 들어 척 보기에도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얼굴은 야마구치가 태어나서 본 모든 사람 중 가장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오뚝하게 뻗은 콧대는 천치나 망나니는커녕, 학식 높은 선비와 같은 인상을 주었고,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나 또렷한 턱선은 황족다운 우아함이 엿보였다. 추운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라 그런 것인지 경국에서 살던 시절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달리 밝은 머리카락 색과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색 때문에 흡사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선인(仙人)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얼굴이 야마구치의 마음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잘생긴 외모 때문이 아니라, 차가워도 너무 차가운 인상 때문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랑국의 날씨만큼이나 냉랭했던 눈빛. 그 얼굴을 가만히 떠올리던 야마구치는 어둠이 무서워 잠들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까지 덮어썼다. 그 냉랭한 얼굴이 눈썹을 찡그린 채 싸늘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던 모습이 눈꺼풀에 붙어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게다가 그 손. 야마구치가 살면서 누군가의 손을 잡아본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손이 그토록 차가운 것은 처음이었다. 야마구치의 손을 살짝 잡았을 뿐인데도 그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시작으로 온몸에 퍼질 지경이라, 흡사 사람 손이 아니라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아…."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팔자가 사납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지겹도록 들었던 그 말이 마음에 내려앉아 야마구치를 짓눌러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좋은 낭군 감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마음속 깊은 곳에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그가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 다른 이이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눈앞에서 본 그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멀쩡히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천치라더라 하는 소문과 거리가 멀었고, 단정하고 우아한 생김새가 잔악무도한 망나니라더라 하는 소문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차디찬 태도로 보아, 적어도 세간에 떠도는 소문 중 좋은 신랑감은 아니라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약혼조차 하지 못한 것이라더라 하는 소문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였다.


`어찌 되었든 이 혼례는 불행하겠구나.`


새신부답지 않은 생각이 맑은 물에 떨어진 먹물 방울처럼 야마구치의 마음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문득 코끝이 찡해져, 야마구치는 이불을 덮어쓴 채 한참을 훌쩍거려야 했다.




*




츠키시마가 다 마신 탕약 그릇을 내려놓자 가네코는 냉큼 과편(果片)이 담긴 그릇을 그에게 내밀어 주었다. 탕약처럼 쓴 것을 먹었을 때는 대개 단맛이 강한 다식을 먹었지만, 입맛이 남들보다 배는 까다로운 츠키시마는 입안을 텁텁하게 만드는 다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온강궁의 소주방(燒廚房)에서는 츠키시마가 아침저녁으로 탕약을 마실 때마다 과편을 만들어 함께 내놓았고, 덕분에 과편 만드는 일만큼은 황궁 내 다른 소주방들 중에서도 최고였다. 그러나 최고라는 평을 듣는 온강궁의 과편마저도 오늘은 츠키시마의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혀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네 조각이 올려진 과편을 늘 남김없이 비우던 것과 달리 한 조각만 먹고 그릇을 내려놓은 츠키시마는 찌푸린 얼굴을 좀처럼 펴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내 몸이 이런 것이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고,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탕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는데, 누구를 위해 먹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 말에 가네코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츠키시마가 말하는 `누구`가 감히 저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대상, 즉 이 나라의 황제인 아키테루를 뜻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동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아키테루는 츠키시마의 건강을 각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키테루는 츠키시마의 건강 상태가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좋지 않다거나, 아침저녁으로 먹는 탕약을 한 번이라도 거른다거나 하면 만사를 젖혀둔 채 온강궁으로 달려오고는 했다. 아키테루의 입장에서야 츠키시마가 걱정스러워 하는 행동이었을 테지만, 예민한 성정 탓에 제 궁에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는 츠키시마의 입장에서는 아키테루의 그런 행동이 피곤하게 느껴질 터였다.


츠키시마가 아장아장 걸음마 하던 시절부터 그를 모신 가네코는, 솔직히 말하자면, 이 문제에서만큼은 아키테루를 옹호하고 싶었다. 아키테루만큼이나 가네코 역시 츠키시마의 건강을 심히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런 티를 내 제 윗전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네코는 츠키시마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약재를 받으러 내의원에 갔다가 당직 의관에게 들었는데…."

"…?"

"소정궁에서도 약재를 받아갔다 합니다."

"소정궁에서?"


소정궁이라는 말에 츠키시마가 관심을 보이자, 가네코는 때를 놓치지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마마. 소정궁 마마께서 두통이 심하시어 좀처럼 잠들지 못하신다 하여 당직 의관이 두통약과 수면약을 처방해주었다 합니다."

"…."

"아휴,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시지요.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시어 많이 지치셨을 텐데, 입궐하시자마자 여러 가지 일이 생겨 놀라기까지 하셨을 테니…."

"…."

"누군가 위안을 해주면 좋을 텐데, 소정궁 마마께서는 이곳에 연고도 없고 아는 이도 없으니 참 걱정입니다."

"환경이 낯설어지면 종종 아프기도 하지. 소정궁 상궁이 알아서 할 테니 휘장이나 내려라."


츠키시마는 그렇게 말하며 냉정히 등을 돌려 침상에 몸을 눕혔다. 그 냉랭한 반응에 가네코는 아무런 내색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안녕히 주무시라 인사를 올리고 침상의 휘장을 내려준 뒤 침전을 나섰다. 그렇게 침전을 나서고 나서야, 비로소 가네코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침전을 지키는 당직 내관인 츠노다가 그런 가네코의 얼굴을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츠노다의 말에 가네코는 츠노다와 함께 당직을 서게 된 젊은 내관에게 탕약 그릇을 치우라 시킨 뒤 침전의 문 쪽을 흘긋 바라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소정궁 마마께서 몸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반응이 영 냉랭하시네요."

"군왕 마마께서요? 뭐라 하셨는데요?"

"환경이 낯설어지면 종종 그러기도 한다시면서, 소정궁 상궁이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저런…."


가네코의 말에 츠노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니, 가네코가 그를 따라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오늘 하루는 소정궁에 출입하지 말라 하셨지만 사나다와 저는 함께 입궁하여 동고동락한 지기 아닙니까? 먼 길을 갔다 왔으니 인사라도 하려고 살짝 가서 잠시 만나고 돌아왔는데, 소정궁 마마께서는 어떤 분이냐 물으니 한숨부터 내쉽디다."

"아니, 왜요?"

"아랫것들에게도 지극히 예의를 갖출 만큼 심성이 착한 분인데, 또 그만큼 너무 여리시다고요."


가네코의 말에 츠노다의 얼굴이 자못 심각하게 굳어졌다.


"사나다 상궁이 그렇게 말했다니 큰일입니다. 심지가 굳건한 분이 오셔서 마마의 마음을 좀 붙잡아 주셨으면 했는데…."

"누가 아니랍니까. 마마께서 워낙 냉랭하시고 남에게 관심을 보이는 성격이 아니시다 보니, 먼저 다가와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러니까요. 혼례 올리신 후 두 분이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셔야 하는데, 참으로 걱정입니다."






가네코와 츠노다의 한숨이 깊어지던 그 시각, 츠키시마는 잠들지 않은 채 희미하게 비춰오는 촛불에 의지해 자신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까 느꼈던, 손이 저릿한 그 감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몸에 냉기가 심하게 도는 날이면 손발이 저릿한 느낌이 들곤 하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다만, 오늘 느꼈던 그 저린 느낌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꽁꽁 언 손을 따뜻한 물에 담갔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보던 츠키시마는 오늘 태성궁에서 보았던 경국의 대군이라는 자를 떠올려보았다.


별스러운 것이 없는 인상이었다. 놀랄 만큼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놀랄 만큼 못난 얼굴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미려한 이목구비에 둥그런 눈매, 주근깨가 자잘하게 내려앉은 얼굴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은 느낌을 주어 귀여운 인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 얼굴은 도통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츠키시마가 한 번 보고도 생김새를 세세하게 기억할 정도로 츠키시마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생김새보다는, 그 상황 때문이었다.


아키테루는 랑국에 갓 도착해 랑국 황실의 예법이 익숙하지 않아 생긴 사소한 실수라며 웃어넘겼지만, 폐하가 아닌 이에게 폐하라 칭하는 것은 몹시도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폐하가 아니면서 감히 폐하라고 신분을 속이는 것 역시 불경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츠키시마가 그의 손을 붙잡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저를 폐하라 부르며 절을 올리려는 그를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을 붙잡은 순간, 츠키시마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따뜻한 물에 손을 첨벙 담근 듯, 온기가 불현듯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그의 손을 붙잡는 순간, 마치 따뜻한 물에 얼어붙은 손을 담근 듯 미묘한, 하지만 꼭 기분 나쁘지만은 않은 저릿한 감각이 츠키시마의 손끝에서부터 손 전체로 퍼지고 말았다. 그 따뜻한 기운이 깜짝 놀랄 정도라, 그의 손을 붙잡는 순간 츠키시마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구겨지고 말았다. 이제 막 낯선 땅에 도착한 제 예비 신부와 황실의 사람들 앞에서 대뜸 인상을 구기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았으나, 사람의 손을 잡고 이런 느낌을 받으리라 전혀 예상치 못한 탓에 츠키시마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손이 그리 따뜻할 수도 있는 건가….`


그러나 츠키시마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팔을 내려놓고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따뜻하건 어쨌건, 츠키시마가 알 바가 아니었다.


가네코가 소정궁 마마께서 아프시다더라 하는 소식을 전하며 굳이 위안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그 의도가 뻔한 것이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츠키시마에게 직접 찾아가 위로를 전하고 이제 곧 부부가 될 이와 정을 쌓으라는 뜻을 은근하게 내비친 것이었고, 어릴 적부터 유독 영민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츠키시마가 오랜 기간 저를 보필한 가네코의 그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짐짓 그녀가 하는 말의 속뜻을 못 알아들은 척했다.


함께 쌓은 정이 크면 어느 한쪽이 떠난 후 남는 미련과 상처도 큰 법이었다. 츠키시마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고, 괜한 정을 쌓아 놓는다면 종내에 미련과 상처로 얼룩진 삶을 살아야 하는 이는 츠키시마가 아닌 그가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츠키시마가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그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 것. 그와 깊은 정을 쌓지 않는 것. 만일에 저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세상에 홀로 남을 그가 저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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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설연휴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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