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엔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휙 돌아보았다. 회랑은 뻥 뚫려 있는 데다 릴리가 손까지 흔들었으므로 필리엔이 자신을 부른 사람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필리엔은 릴리를 발견하곤 깜짝 놀란 듯했다. 샛별처럼 떠오른 반가움 이후에 당혹감을 드러냈는데, 아마 대련 장면을 봤다는 것을 깨닫고 심히 당황한 것 같았다. 마지막에 보인 추태가 좀 강렬하긴 했다. 옷차림도 좀 많이 흐트러지기도 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릴리는 언제나처럼 자신감과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빙긋 웃어 보인 뒤 빠른 걸음으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필리엔 쪽으로 먼저 달려가기에는 릴리에게도 이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릴리는 고요히 선 대현자에게 먼저 인사했다.

"이른 시간에 초대받지 않은 객이 결례를 범한 걸 용서하시길. 저는 동부에서 온 릴리 카일라-로렌 그레이스라고 합니다. 저희 구면이지요?"

릴리가 먼저 자신을 알렸다. 지난번에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침묵으로 답했지만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지 호기심이 동했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하얀 검을 옆으로 비스듬히 내린 대현자가 릴리의 인사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후드 아래로 빠져나온 가늘고 매끈한 은발이 가볍게 살랑거렸다.

뜬금 없는 감상이지만, 릴리는 이렇게 가까이 서 보니 대현자와 자신의 키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키가 비슷하니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릴리의 바람에 영향을 미친 탓이겠지만.

"……예. 구면이군요. 세필리아 폰 라그랑시에입니다."

이번엔 대답을 들었다. 여전히 적응 안 될 정도로 아찔한 미성이었으며 그에 뒤따르는 상대가 지닌 경지를 살짝 엿보는 감각은 아찔할 지경이었다. 지나치게 높고 너무나 짙어서 실제로 호흡을 건드는 건 없는데도 숨을 쉬기 어려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릴리는 살짝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최근 들어 너무 강력한 마법사들과 자주 마주하게 되는 것 같은데 이런 건 아무리 자주 겪어도 익숙해지기 어렵겠지?

순순히 제 입으로 이름자를 말하는 것하며 아무래도 대현자는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감 있는 신비주의를 놓아버리기로 한 것 같았다. 물론 자기 저택까지 온 손님들이 그의 이름자 하나 모를 리 없으니 그냥 말하는 쪽이 자연스럽기는 했지만 말이다. 릴리는 새하얀 후드 아래 드러난 날렵한 턱선과 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돌려 셋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필리엔을 보았다. 

"로라 카일라 일레인이에요."

"반갑습니다, 일레인 양."

릴리는 통성명을 하는 두 사람을 배경으로 두고 필리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신의 검을 챙겨 걸어오는 필리엔은, 이런 비유를 드는 것을 안다면 속상할지도 모르겠지만, 풀죽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것도 누리끼리한 강아지. 

릴리는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필리엔에게 말했다.

"아침부터 사라져 있으면 어떡해요? 제가 얼마나 보고싶어할줄도 모르고 떠나 있었던 죄값을 받아야 하겠어요."

필리엔이 당황한 표정과 몸짓을 감추지 못했지만 릴리가 씩 웃으며 바로 뒤이었다.

"보상은 이렇게 다시 나타나준 걸로 받을게요."

필리엔의 얼굴에 당혹이 걷히고 안도의 웃음이 번지는 걸 보며 릴리는 필리엔이 10년을 묵어도 리르먼처럼 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표정에 감정이 쉽게 드러나는 건 귀족적이지 못한 태도였으나 그게 릴리로 하여금 필리엔을 낮추어 보게 만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부분이 싫었다면 필리엔을 좋아하게 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니면 이미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소탈함이 긍정적으로 해석된 걸지도.

하긴 바닥을 나뒹굴며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고 한다면 이미 많이 늦은 것이기는 했다. 더군다나 한 손에는 로라의 신장에 가까워 보이는 흉흉한 검을 들고 있는데도 그렇게 느낀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강을 좀 건너면 어떤가. 릴리는 이미 엄청난 방법으로 흰강도 건너 본 사람이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전 멀쩡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릴리는 정말로 필리엔에게 화가 났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아직 아침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마음속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어 버리는 것이다. 동부에는 남자를 너무 좋아하면 대업을 못 이룬다는 말이 있었지만 영웅은 호색이라는 말도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필리엔을 마주하니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걸 보니 릴리도 참 심하긴 심했다. 

기분이야 진작 풀려버렸지만 그래도 릴리는 필리엔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새벽부터 나갔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어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가 봐요?"

"어,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절 찾을 줄 몰랐습니다."

"그럼 찾지 안 찾겠어요? 얼마만에 겨우 다시 만난 건데요. 집으로 돌아온 지 하루도 채 안 되어서 나가다니 그렇게 기다렸는데 또 기다리기는 싫단 말이에요."

"……미안해요.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어요."

릴리는 그렇게 말하는 필리엔에게 더 화를 낼 수 없는 자신이 좀 불쌍해졌다. 하지만 필리엔이 저렇게 풀이 죽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계속 화를 낼 수 있겠느냔 말이다. 릴리에게 그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미욱한 녀석이지만 이 부족한 것의 허물은 또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의 응당한 허물이기도 하니 고개를 숙여 레이디께 용서를 빌지요."

나긋한 미성이 들려오고 나서야 릴리는 자신이 있는 곳이 공작의 저택이며 지금 필리엔과 둘만 있는 게 아니라 대현자가 함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초대도 받지 않은 사람이 불쑥 들어와선 주인을 두고 제 볼일만 챙기다니 영 인상이 나쁠 짓이었다. 뜨끔한 릴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이른 시간부터 결례를 범해 용서를 바라 마땅한 건 제 쪽이죠."

"저 모자란 것이 레이디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심려를 드렸으니 어찌 그게 레이디의 탓이겠습니까."

"제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때문이니까요."

대현자는 여전히 후드를 눌러쓴 그대로 릴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얼굴이 아예 안 보일 때도 좀 괴팍하다 생각했지만 반이나마 보이니 어째 더 냉랭한 느낌을 풍겼다. 분홍빛을 띤 불그스름한 입술마저 무정하게 닫힌 게 고고한 대마법사답게 냉담한 느낌이었다. 말하는 게 나긋한 것과는 별개였다. 

릴리는 혹여 자신이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 생각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일단 멋대로 쳐들어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탓이다. 릴리의 짧은 반성이 이어질 정도로 충분한 짧은 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대현자가 릴리에게 질문했다.

"저 아이는 정말이지 부족하고 불안한 녀석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필리엔을 사랑하십니까?"

다행히 릴리의 무례를 탓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필리엔이 대현자에게 릴리에 대해 미리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대뜸 필리엔을 사랑하냐니. 그래도 다행인 건 릴리 입장에선 좀 갑작스럽기는 해도, 대현자가 질문할 때 취한 진지한 태도와는 다르게 릴리에겐 대답이 전혀 어렵지 않은 질문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부분갑을 벗고 몸을 돌려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있던 필리엔은 갑자기 튀어나온 얘기에 놀라 손도 멈추고 은근히 긴장해선 두 사람 쪽을 보았지만 말이다. 릴리가 웃으며 답했다.

"저에겐 하나도 부족하지 않은 걸요."

릴리의 대답을 들은 필리엔은 안심한 기색이었고 질문에 대한 답을 받은 대현자의 예쁘장한 입매가 조금 부드럽게 변했다. 눈빛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이 풀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말은 밉다고 하는 것 같아도 역시 아들 같은 이를 예쁘다 해주는 쪽이 좋은 건 대현자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설핏 만족한 기색을 드러낸 대현자를 보며 릴리는 자신이 방금 어떤 시험을 통과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아들이 못나고 부족하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지만 정말로 거기에 동의하는 맞장구를 쳐선 안 되며 그래도 예쁘고 양순하니 결혼하면 잘 살 거라느니 하는 말을 들어야 만족하는 남자들 특유의 화법 같은 것 말이다. 여긴 중서부이니 좀 다를 순 있겠지만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는가. 

이로써 필리엔을 납치- 아니, 자연스럽게 동부로 데려가 알콩달콩 잘 먹고 잘사는 릴리의 큰 그림이 순풍을 받게 된 게 분명했다. 제국의 공작이자 대마법사이며 인류의 스승인 은의 귀공자가 허락한다는데 누가 딴지를 걸겠는가. 릴리는 자신의 장기계획이 탄탄대로에 오른 것에 흐뭇해졌다. 내친김에 한 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혹시 다른 볼일이 없으시다면 이만 제가 필리엔을 빌려 가도 괜찮을까요?"

"저는 괜찮습니다. 저 녀석이 멋대로 찾아온 것이니 데려가 주신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요."

릴리는 흐뭇하게 웃으며 필리엔에게 다가가 구르느라 흐트러진 옷을 정돈 중이던 그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같이 돌아가요, 필리엔. 집에 가야죠."

"집이요? 아, 그렇죠."

필리엔이 잠깐 놀랐다가 금방 수긍했다. 릴리가 이카트 저택에 머물고 있으니 그런 뜻으로 머릿속에 납득이 된 것 같았다. 지금 가는 곳은 릴리의 집은 아니지만 조만간 필리엔을 진짜 집에 데려갈 테니 예행 연습이라 생각하면 딱 좋았다. 물론 필리엔이 거기까지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지금 릴리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니까. 곧 네 집이 내 집 되고 내 집이 네 집이 될 것이다.

속으로 무서운 생각을 한 릴리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필리엔에게 말했다.

"돌아가는 길에 도시 구경도 시켜주세요. 필리엔의 고향이니 여기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고 싶거든요."

"저는 구경할만한 곳은 잘 모르는데……. 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어디든 좋아요."

물론 당연하게도 이 '어디든'의 앞에는 필리엔이랑 함께 알콩달콩한다면 어딜 가든 좋다는 말이 생략되어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구는 릴리 옆에서 로라가 그런 릴리를 애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은 구경하고 오세요. 저는 좀…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로라에게 바쁠 일이 없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릴리도 알았다. 하지만 로라는 이 커플 사이에 끼어서 도시를 돌아다니는 짓을 견뎌내고 싶지 않았다. 로라가 아니라 아마 그 누구라도 거부할 법한 일이었으니 이해할 만 했다. 릴리도 그 정도는 눈치를 챘다. 게다가 릴리 입장에서도 지금만큼은 필리엔과 둘이서만 알콩달콩 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했다.

"하지만 혼자 돌아가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욕망은 욕망이고, 아무리 그래도 거리가 좀 있는데 로라가 여기서 이카트 저택까지 돌아갈 길을 알 것 같지도 않고 그냥 혼자 덜렁 보내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마차를 태워 보낸다고 해도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로라를 혼자 보내는 건 좀 불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셋이서 가야만 할까? 물론 로라가 같이 간다고 해서 문제는 없지만 지금만큼은 필리엔에게 집중하고 싶었기에 릴리도 썩 내키지는 않는 마음이 있었다. 로라 쪽에서도 곤란한 얘기였다. 눈치 없게 두 사람이 사이에 끼어있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대현자가 입을 열었다.

"제 저택에 온 손님이시니 일레인 양은 제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보내드리겠습니다."

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현자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걸요."

"손님을 박대하는 짓을 하는 건 제국의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의 명성에 흠이 된다는 이유를 들어야 맞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무례하게 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군요. 그리고 두 사람이 마음 놓고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우리가 빠져주는 게 아무래도 모양새가 낫겠지요. 일레인 양이 혼자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그레이스 양의 마음도 편치 않을 테니 말입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릴리 입장에서는 대현자가 이렇게 많이 말하는 걸 태어나고 처음 본지라 신기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거들 수 있었다.

"공작 각하 말씀이 옳아, 로라. 넌 길도 잘 모르잖아."

"아가씨처럼은 아니어도 저도 거기까지 못 찾아갈 정도는 아니에요."

대현자의 말에는 차마 대거리를 하지 못했지만 릴리가 얘기하는 것에는 로라가 옅은 하늘빛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박했다. 평소에도 종종 릴리 없이 돌아다니기도 했으니 로라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릴리에겐 필리엔과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로라를 두고 간다는 짓거리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을 절호의 기회였으므로 굽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릴리의 양심이 움직이긴 하는데 이상한 방향으로 작동했다.

물론 로라도 오랜만에 만난 연인끼리 알콩달콩 데이트를 하겠다는데 눈치 없이 끼어드는 방해꾼이나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는 전설의 대마법사이며 현존하는 제국 유일의 공작이기도 한데다 중서부의 통치자이자 무엇보다 무서울 정도로 나긋나긋한 미인과 둘이서만 저택에 남는다는 게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이런 자리는 엄청나게 부담스럽단 말이다. 야속한 아가씨는 로라의 마음이 어떤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정말 고마운 말씀이에요. 호의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님께 예는 아니나 배웅은 따로 해드릴 수 없겠네요."

"저흰 정말 괜찮아요. 진심으로요."

정말 괜찮았다. 사실 이미 릴리의 머릿속에는 필리엔과 하하호호 데이트를 하며 돌아다닐 생각으로 가득하기만 했다. 차마 대현자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한 로라가 즐거워 보이는 릴리에게 은근히 항의했다.

"아가씨? 제 의견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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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꼈구나. 근데 이 커플이 진짜~ 아이고 고양이 손에 생선을 맡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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