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Whiskey and Morphine - Alexander Jean




Medic Travel Log 07

#07_whiskey_and_morphine





여행에서 얻는 게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할배의 허락을 얻어 내려 억지로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될 여행이라고, 내 인생의 마지막 자유가 될지도 모르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정해진 대로 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인생이었다. 그렇다고 보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나름 이 안에서 성취하고 성장했다. 물론 한 편에 남들처럼 다 지니는 꿈이 있긴 했다. 하지만 꿈은 말 그대로 꿈이었다. 나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잘 구분하는 편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얻게 될 건 경험, 세상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약간의 자유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게, 정말이지 새로운 인연을 만들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내가 한국의 가지고 돌아갈 건 무형의 감정이지 이렇게 만져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품 안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그런….

 

“으, 음…, 흐, 하아….”

 

계속되는 키스가 버거운지 라일리가 고개를 비틀었다. 꽉 껴안고 있는 탓에 그의 변화가 확연히 느껴졌다. 물론 그도 그럴 터였다. 허리를 뒤로 빼며, 맞닿는 아래에 공간을 만들려고 하기에 일부러 엉덩이를 확 움켜쥐며 골반을 바짝 당겼다. 그의 아랫배에 내 아래가 닿았다. 허리를 움직이며 손을 티셔츠 안으로 넣었다. 내 손이 스치는 곳마다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왜인지 모르게 만족스러웠다. 한 손으론 등을 쓸고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엉덩이를 주물렀다. 옷을 벗기고 싶었다. 고개를 잠시 떼어냄과 동시에 그의 티셔츠를 잡아 빼냈다.

 

“으, 어…!”

 

외마디 비명은 다시 내 입으로 먹혔다. 틈을 주지 않았다. 유리창에 그의 등이 닿자 차가운지 본능적으로 등을 떼서 내게 안겼다. 맨살은 예상대로 역시 부드러웠다. 손이 닿는 곳이 바뀔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간지럼을 타는 걸로 봐서 살성이 예민한 게 분명했다. 신음처럼 내뱉은 소리와 손에 닿은 살결, 미미하게 끼치는 체향과 서툰 키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내 취향이었다.

 

입술이 떨어지면 쪽 소리를 만들었다. 라일리와 눈을 마주칠 새도 없이 바로 목에 얼굴을 묻었다. 혀를 내어 목을 따라 핥았다. 다리가 풀린 듯 중심을 잃은 그의 엉덩이를 손으로 받치다시피 들고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목을 빨며 밴드를 떼어냈다.

 

“흐, 하아, 아…! 정국 씨…! 으응.”

 

그가 간지러운 듯 몸을 이리저리 비튼다. 그러면서도 밀어내지 않는 게 기특했다. 아니 발칙하다고 해야 하나. 손을 움직여 바지를 벗겼다. 다리 아래로 반바지가 툭 떨어졌다. 이 또한 별 반항이 없어 수월했다. 마지막 남은 속옷을 벗기기엔 나도 용기가 필요했다.

 

“라일리.”

 

그의 귀를 물고 속삭였다. 거의 나체에 가까운 그가 쑥스러운 듯 내 허리를 조금 더 세게 안았다.

 

“하, 네, 네….”

“답답해요.”

“….”

“옷 좀 벗겨줘요.”

 

귀를 아프지 않게 잘근 물고 나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고작 키스일 뿐인데 얼굴이 흥분으로 얼룩진 라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을 들어 톡톡 단추를 풀러나갔다. 옷깃을 잡고 셔츠를 벗겨낸다. 라일리가 손을 떨었다. 사락 소리를 내며 셔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할 말이 있는 듯 눈을 마주친다. 입을 달싹이며 쳐다보기에 손가락으로 콧망울을 톡톡 건드렸다. 왜냐고 묻는 뜻이었다.

 

“저….”

“네.”

 

그가 말하기를 망설인다. 마음이 급했지만 차분하게 기다렸다. 벗은 상체에 힐끔 시선을 둔 그의 귓불이 빨개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 들이는지 궁금했다. 라일리의 머리칼을 쓸었다. 나름 재촉이었는데 그가 알아들었는지 목소리를 흠흠 가다듬는다.

 

“저, 혹시 오늘….”

“네.”

“어디까지 하나요…?”

 

하마터면 크게 웃음이 터질뻔했다.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리는 무드 없는 질문임에도 그의 순진한 눈동자를 보니 욕정이 끓었다. 어디까지. 그런 걸 정해두진 않지만, 그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우리에겐 콘돔도, 뭐도 없다.

 

“라일리.”

“네?”

“혹시 지금 이 상황도 업무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를 놀리듯 물었다. 그가 작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콩 때렸다.

 

“저 의대 나왔다니까요…. 똑똑하다고, 으앗!”

 

그의 주먹이 닿았던 가슴이 뜨거웠다. 샐쭉하게 내뱉는 말을 듣자니 참기가 힘들었다. 그대로 라일리의 몸을 반대로 돌렸다. 라일리 뒤에 바짝 붙어 둘 다 창밖을 바라보는 꼴이었다.

 

 

“라일리가 좋아하는 야경 구경좀 합시다.”

“하, 응….”

 

그의 목과 어깨에 잇자국을 내며 손을 앞으로 가져갔다.  손으로 아래를 천천히 쓸며 문지르자 끄응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뒤로 쭉 뺀다. 그 덕에 내 앞과 그의 엉덩이가 밀착했다.

 

“자. 편하게.”

 

그의 손을 한쪽씩 차례로 유리창을 짚게 했다. 준비도 없이 밀어붙일 순 없었다. 귀를 진득하게 빨며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다 속옷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 이, 거… 정국, 정국 씨.”

 

달라붙는 속옷을 비집고 들어간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가 신음을 내뱉은 탓에 유리창에 뿌연 김이 서리다 빠지길 반복한다. 창에 손자국이 그대로 묻어났다.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내 손에 제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속옷 아래로 손을 넣은 탓에 그의 속옷 엉덩이 부분이 터질 것처럼 팽팽히 당겨지고 내 손목도 조였다. 내 밑을 확인한 라일리가 재빨리 시선을 앞으로 돌린다. 이미 붉어진 귀부터 목까지 피가 도는듯 더 달아올랐다. 

몸을 창에 기댄 채 간신히 버티던 그가 다리가 풀린 듯 휘청였다. 주저 앉기 전에 가슴에 있던 손을 허리로 가져와 감싸서 일으켰다.

 

“아, 아… 그… 흐….”

 

서 있기가 버거운 듯 창을 짚은 라일리의 손이 벌벌 떨렸다. 그가 몸을 빼내려 버둥거린다. 왜 이렇게 몸무림치나 싶어 보니 내 손에 미지근한 게 묻어있다.


“하하.”

 

실소가 터졌다. 이렇게 잘 느껴버리면 내가 너무 보람찬데. 


“야경 어때요.”

“하, 으응! 그, 그만….”

 

결국 한 손으로 파들거리며 유리창을 짚고 다른 손을 내려 움직이는 내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다시 겹쳤다. 


“이거 벗자.”

“….”

“벗겨줄게.”

“…네.”

 

그의 어깨에 입을 박고 우물대며 말하니 그가 작게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마음도 몸도 급했다.

 

이내 속옷이 발등으로 떨어졌다. 완벽히 나체가 된 그였다. 어제 술김에 만졌던 엉덩이의 살집은 꿈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뭘 하려는 지 예상하지 못한 듯 그가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쳐다봤다. 풀린 동공이 미치게 야하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다니.

 

“뭐, 뭐 하시게요…?”

“글쎄.”

“아, 아앗!”

 

그대로 그의 배를 감싸 허리를 꼿꼿히 세웠다. 나의 가슴에 라일리의 등이 밀착했다. 그를 꽉 껴안고 맞붙은 다리를 이용해 그와 체온을 나눴다.

이렇게까지 욕정이 넘쳤던 적이 있던가.

삽입만 안 했지 우리가 하는 행위는 섹스였다. 느낌이 이상한듯 그의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버거운듯 라일리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손을 허공에 허우적대기에 결박한 몸통을 풀어주니 유리창에 팔을 짚는다. 

 

“아, 아아… 흐, 아 정구, 국 씨….”

 

그가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간지러운지 몸을 비튼다.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허리의 속도를 높였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삽입섹스를 한다면 호텔에서 나가지 못하게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라일리의 몸이 흔들렸다. 동시에 창밖의 화려한 불빛도 눈 앞에서 파편처럼 흩어지다 모이길 반복하다.

 

“좋아? 네가, 하아… 좋아하는 야경… 허윽, 실컷 보고 있잖아.”

 

숨이 턱턱 막히는 와중에도 그에게 짓궂은 말을 건넸다.

 

“좋, 좋… 아아…! 좋아, 좋아요… 으흣!”

“좋아? 하,”

“네, 네… 흐…”

“뭐가, 뭐가 좋아.”

 

손톱으로 긁히지도 않는 창을 긁어댄다. 접힌 그의 몸을 일으켜 다시금 라일리의 등과 내 가슴을 맞댔다. 몸에 힘이 빠진 그가 내게 몸을 맡겼다.

 

다리를 꼬다시피 맞붙은 라일리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창문에 그의 몸에 짖눌리듯 밀착했다.

 

“허윽, 하아… 좋아?”

“네, 네… 아, 저… 아흐….”

“뭐가 좋냐니까.”

“이, 이거… 지금, 아… 아으!”

“똑바로 말 해봐.”

“기, 기분이..하….”

 

뒤에서 그를 꽉 껴안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떨림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몸을 돌려 마주봤다. 완전히 맞닿자 그가 몸을 움찔 거린다. 최저온도로 가동되는 에어컨임에도 둘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상태였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라일리의 얼굴을 입술로 훑었다. 눈가의 눈물과 입가의 타액까지 모두 다. 천천히 느릿하게 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 맞췄다.

 

“씻을래요?”

 

잘만 나오던 반말이 행위가 끝나니 다시 존댓말로 바뀌었다.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그가 떨어진 옷가지를 줍곤 제 아래를 가린다. 정신이 돌아왔는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였다.

 

“욕조에 물 받을게요.”

 

당연히 같이 씻을 생각이었다. 그를 안아 들어야 하나 손을 잡고 갈까, 아무래도 허벅지에 묻은 정액이 흘러 불편할 테니 들어 안는 게….

 

“저, 저는 샤워 부스에서….”

 

그가 제가 쓰는 화장실을 손으로 가리켰다.

 

“따로 씻겠다고?”

 

뭐 이런 경우가. 손에 쥔 옷으로 최대한 제 몸의 많은 면적을 가린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랑 내외해요? 이제와서?”

“밀당이라고 이라고 생각해 주실래요….”

“참나.”

 

욕조에서 꼭 씻기만 할 건 아니었는데 차마 말하지 못했다. 겨우 내게 기대어 서 있는 그가 좀 안쓰러워서.

 

“그럼 샤워부스까지 데려다줄게요.”

 

당연한 매너였다. 그를 들어 안으려고 하자 라일리가 기겁하며 내게서 떨어진다.

 

“아, 아니요. 괜찮,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당황한 그가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으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를 스쳐 화장실로 뛰어가는 뒷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옷으로 앞은 가렸지만 미처 뒤는 신경쓰지 못한 모양이다. 잇자국이 새겨진 어깨 밑으로 도드라진 날개뼈, 가는 허리를 지나 패인 보조개가 걸음을 뗄 때마다 윤곽을 드러냈다. 그 아래로 탄력있게 움직이는 엉덩이와 마찰로 새빨개진 허벅지 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쾌감이 느껴지는 뒤태에 시선을 뺐겼다. 그가 거실을 가로질러 걷다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옷을 뒤로 가져가 엉덩이를 가린다.

 

“푸하하하!”

 

그 모습을 보고 웃으니 ‘이익’ 하고 약 오른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로 쏙 들어간다. 샤워기의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도 방으로 들어왔다.

 

 

 

*

 

 

샤워하면서 결국 혼자 물을 한 번 더 뺐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다가 라일리가 생각나 한 번 더, 방에서 나가기 전에 라일리를 볼 생각을 하니 슬그머니 일어날 기미가 보이는 좆을 잡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오늘은 옆에 누워서 자자고 해볼까. 하루가 너무 길었다. 그랜드 캐니언으로 시작해서 싸우고 격한 화해까지. 제대로 된 식사는 낮에 한 게 전부라 배도 고팠다. 나보다 잘 먹는 그도 당연히 그럴 테니 룸서비스를 시킬 생각이다. 그에게 뭘 먹겠느냐고 물으러 방을 나섰다.

 

“…뭐해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창문 앞에서 허리를 숙이곤 연신 무언갈 하고 있다.

 

“아, 나오셨네요.”

“뭐해요, 나와요.”

 

창문에 잔뜩 뿌려진 아까의 흔적을 닦고 있는 라일리였다. 쪼그려 앉아 카펫도 톡톡 닦는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우고 몸을 일으켰다.

 

“아, 이것만 하면….”

“라일리.”

“네?”

 

그를 돌려세워 나를 바라보게 했다. 단호한 내 목소리에 그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화도 못 내게 진짜.

 

“나랑 방금 한 게 업무의 일종이었어요?”

“…아뇨.”

“그럼 뭐였어요.”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붉힌다.

 

“…좋아서.”

 

좋아서라는 세 글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래, 야경도 아니고 이 도시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서로가 좋아서 한 행위였다.

 

“그런데 왜 이런걸 라일리가 해요.”

“…그래도 이걸 클리너한테 그대로 내보이기가….”

“내가 하면 되잖아요. 나를 시켜야죠.”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나 매너없는 놈 만들지 말죠? 지금부터 라일리가 할 일은,”

“….”

 

그의 어깨를 잡고 소파에 조심스레 앉혔다. 스트립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였다.

 

“여기 이렇게 앉아서.”

“….”

 

빠른 걸음으로 미니바를 열어 음료를 꺼냈다. 앉아있는 그가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일어서려고 하자 다시 어깨를 눌러 앉혔다.

 

“음료수로 목 좀 축이면서.”

“….”

 

이번엔 테이블에 놓인 룸서비스 메뉴를 건넸다. 역시나 그가 불편해하기에 그의 무릎 위에 메뉴판을 펼쳐 올려놨다.

 

“뭘 먹을지 고민하고.”

“….”

 

창가로 가서 그가 닦고 있던 유리창을 마저 닦았다.

 

“야경 구경이나 하다가 내가 얼추 다 닦은 거 같으면 먹고 싶은 메뉴 말해주면 돼요.”

“….”

“쉽죠?”

 

격했던 아까의 시간을 증명하듯 꽤 많은 양의 희끄무레한 액체가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라일리는 민망한 듯 고개를 메뉴판에 박은 채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근데, 라일리 자위 오랜만에 해요? 엄청 많이도 싸…”

“정국 씨! 저 그, 네, 크랩 샌드위치랑 루꼴라 파스타랑, 쉬림프 샐러드가 좋겠어요.”

“풉.”

“코, 코, 콜라도. 스프라이트랑 진저에일도….”

“알았어요.”

 

창문을 뽀드득 소리 나게 닦았다. 흔적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뿌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니 멍하니 나를 보고 있다가 후다닥 고개를 돌린다.

 

손으로 노크하듯 유리창을 두드렸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그가 나를 쳐다본다.

 

“자, 깨끗하죠. 만족해요?”

“네…. 감사합니다.”

 

소파에 몸을 묻은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씻고 나와 말간 얼굴이었다. 계속 향초를 사용하는 건지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배고프다. 밥 먹죠.”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가 말한 메뉴에 몇 개를 더했다. 라일리는 나보다 작은 주제에 먹보니까. 그가 양 볼에 음식을 가득 넣고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모습이 얼른 보고 싶었다.

 

 

 

*

 

 

둘이 먹기에 꽤 많은 양이었는데 역시나 라일리가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었다.

 

“진짜 잘 먹네.”

“네, 배가 좀 고팠거든요.”

“그럴 만하죠, 아까 유리에 묻은 거 보니까 많…!”

“이익! 진짜!”

 

그가 제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맨날 조그맣게 하던 ‘이익!’ 소리를 크게 들으니 미치겠다. 그의 손바닥에 쪽쪽 입 맞추니 손을 얼른 거두고 뒷짐을 진다. 이런 존재가 있었다. 분명 라일리는 모세혈관, 적혈구, 뉴런까지 내 취향일 게 분명했다.

 

“밖에 구경할까요.”

 

그와 창 앞에 나란히 섰다. 뽈뽈 다가온 그가 창에 손을 대고 바짝 붙어 야경을 바라본다. 좋은가? 여기가? 그렇게?

 

“그렇게 계속 보면 안 질리나.”

“또 언제 볼 줄 알고요. 너무 좋아요.”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준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타입은 아니다. 분명 오늘 낮까지만 해도 실없는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왜인지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못 하겠다. 이상하게.

 

“그렇게 좋아요?”

“네. 저는 화려한 거 좋아해요. 번쩍번쩍하고 그런 거.”

“그렇구나. 잘 어울린다, 라일리랑.”

“에이, 무슨. 정국 씨가 잘 어울리겠죠.”

“내가?”

 

한국에서의 나라면 그랬다. 고급 외제 차에 날마다 걸치는 명품, 따르는 수행원과 경호원, 보안이 뛰어난 집, 그리고 정해진 대로 흘려보내기만 하면 되는 삶. 하지만 미국에선 옷도 최대한 수수하게 입고 목에 거는 줄마저 낡은 카메라 하나 들고 여행을 다녔는데 화려함과 어울린다니. 의아함에 그를 쳐다보니 눈을 접어 웃는다.

 

“엄청 부자실 거 아니에요. 전 잘 모르지만. 영화 같을 거 같아요. 어딜 가나 주목받고, 멋진 것들로 나도 꾸미고.”

“그런 걸 원해요?”

“정국 씨는 익숙하시겠지만…. 그냥 동경인 거 같아요. 호기심? 그런 거. 물론 상상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가 민망한 듯 웃었다. 그에게 선물 같은 시간을 주고 싶었다. 많은 일이 있던 이곳은 좀 떠나고 싶었다. 이틀이면 충분했다. 

문득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주목 받고 싶다고 하니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보게끔 만들면 된다.

 

고개를 돌려 라일리를 쳐다봤다. 단정하게 생긴 그이지만 꾸며 놓으면 분명 다른 얼굴일 게 분명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의식하듯 헛기침하며 눈알을 굴린다. 귀가 붉어지는 걸 보니 아까 여기서 했던 걸 상상하는 것 같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 안 했어요.”

“야한 생각 했네.”

“아니거든요?”

 

빠르게 쏘아붙인 그가 내게서 한 발 떨어진다. 한 발 떨어지면 뭐, 어쩔 건데. 귀여워 가지곤.

 

“내일은 떠나요.”

 

내 말에 그가 나를 쳐다본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다.

 

“벌써요?”

“네.”

 

그는 다음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빠짐없이 이곳의 야경을 눈에 담겠다는 듯 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 자요?”

“아직요. 어서 주무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내게 꾸벅 인사하곤 다시 고개를 돌린다. 같이 자는 줄 알았는데. 그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물끄러미 라일리를 바라보다 방으로 돌아왔다. 나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그에 대해서.

 


침대에 누워 미국에서의 4일을 그렸다. 종종 꿈꾸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그랬다. 가만히 누워서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면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한국이 현실이고, 지금이 꿈인데 헷갈리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라일리는 무슨 생각일까. 유효기한 한 달짜리의 감정이라 생각할까. 어떤 감정과 생각으로 나를 대하고 있을까.

 

라일리가 좋다. 호감은 당연히 넘어섰고, 좋다. 좋은데…. 한편으론 무섭다. 두렵다. 꿈에서 깨야만 하는 때는 반드시 온다. 깨기 싫으면 어떡하지.

 

어쩌면 감정이 시작되면 어떡하나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물꼬는 터졌고 당장은 도리가 없다. 특별한 계획 없이 이곳에 온 것처럼, 그렇게 라일리와는 계획도, 전략도 세우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하기로 했다. 두려움과 불안함, 걱정은 잠시 뒤로 미뤘다.

 

덜컥- 하고 문밖에서 라일리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거실로 나갔다. 방금까지 창문에 붙어 밖을 구경했는지 그의 입김이 유리창에 뿌옇게 서려 있다. 보기만 해도 취할 것처럼 화려하고 매혹적인 야경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순진한 입김에 웃음이 났다. 도톰한 입술을 벌리고 아이처럼 구경했을 라일리의 모습이 그려졌다.

 

방에서 카메라를 가져와 유리창을 찍었다. 멋진 야경 일부를 소탈하게 덮고 있는 입김이 그대로 찍혔다. 남들이 보면 용량만 차지할 사진이라며 비웃을 게 뻔했지만, 나에겐 이 장면이 라스베이거스고 또 라일리였다.

 

유리창으로 다가가 서린 입김에 손가락을 들어 글씨를 썼다. 당연히 내가 쓴 글자는 그의 이름이었다.

 

박지민

 

술과 도박, 웅장했던 자연으로 채워졌던 이틀간의 여행에 대한 감상은 역시, 

오늘도 역시나,

박지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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