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리, 이번 건은 맨 처음 안으로 진행하자고."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나중에 나온 2 안이나 3 안이 더 경제적이고 합리적일 것 같은데...' 까칠한 부장의 성격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어 말해본다. 




"저... 부장님. 2 안이나 3 안은 어떨까요?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이 안은 좀 더 경제적이고, 3 안으 보다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일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죠..."




 "내 이야기 못 들었어? 그럼 안 된다니까? 그냥 1 안으로 가!"




 한숨을 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김 대리의 어깨가 유독 작아 보인다.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차마 말 못하고 소심한 눈 흘김으로 짜증을 내본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소통은 전혀 생각 없는 ‘독불장군’은 사무실은 물론, 학교에서도. 심지어는 가정에도 있다. 어쩌면 남의 말에 귀 기울인 위인들의 이야기를 찾고, 읽는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리라. 




 다른 이의 의견을 소중하게 여긴 사례로  한 고조 유방을 들 수 있다. 사기나 고조본기는 그를 무식한 사람. 별 볼 일 없는 집안 출신에, 빈둥거리기만 하는 건달 같은 인물로 평가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최후에 황제의 자리에 앉은 것은 항우가 아니라, 이 사람 유방이었다.




 어떻게 이런 역전이 가능했을까? 유방은 한신, 소하, 장량 같은 참모들을 늘 가까이 두었다. 참모들이 언제든 정책에 대한 제의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도록 정서적 거리감을 없앴다. 그는 위기 때마다 참모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의견을 물었고, 거기에서 나온 말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유방의 진영에서 큰 공을 세웠던 참모 중에는 후에 초왕이 되는 한신이 있었다.  그는 본래 항량을 따라갔다가 항량이 싸움에서 패배하자 항우 밑으로 들어가 낭중이 된다. 항우의 편이 된 한신은 최선을 다해 전략을 짜고 계책을 몇 차례 올렸다. 하지만 하급 관리 한신의 조언을 번번이 무시한 항우의 태도에 질려버린 한신은 결국 그에게서 떠나 유방에게로 간다. 




 유방은 촉으로 들어갔고, 한중 땅의 수도 남정까지 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수십의 장수가 탈영을 한다. 유방의 진영에서도 미관말직에 머물렀던 한신은 ‘여기서도 무시당하는구나’ 생각하며 함께 탈영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역시 탈영은 중죄 중의 중죄였고, 한신 역시 다른 이들과 사형에 처할 위기에 빠졌다.




 그때 한신의 진면모를 알아본 유방의 참모 소하는 주군에게 급히 다가가 "도망친 다른 장수들 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한신에 견줄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왕께서 계속 한중의 왕으로 만족하신다면 상관없지만, 천하를 놓고 다투기 원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일을 함께 꾀할 사람이 없습니다." 라며 간언했다.




 유방은 한신을 죽이지 않기로 한다. 이후 한신은 다른 참모들과 더불어 유방이 천하 패자가 되는 일에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이에 비해 항우는 자신의 능력과 업적을 과시할 뿐 참모들의 비판이나 건의를 경청하지 않았다. 결국 가장 충실한 참모였던 범증조차 의심하고, 마음을 뜨게 만들었다.




 한국인들에게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 역시 경청에 탁월했다. 32년간 임금으로 있으면서 신하와 함께 공부하거나 나랏일을 논하는 자리인 경연을 1898회나 마련했다. 아버지 태종이 18년간 다스리며 60여 회 경연을 한 것을 생각해보면, 세종이 얼마나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하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확실히, 다른 이의 의견을 듣고 생각하는 일은 혼자서 결정하는 일보다 현명한 태도다. 하지만,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생각하고, 반영하는 일이 늘 합리적이며, 이상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방앗간 주인과 아들이 당나귀를 내다 팔기로 했다. 당나귀를 풀어 끌고 가는데, 지나가던 방물상이 그들을 보고 한 마디 한다. "이런 바보들 같으니라고. 당나귀는 뒀다 뭐하고 걸어가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아들을 당나귀에 태웠다. 




 한참을 더 갔는데, 저 앞에 걸어오는 노인들이 그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저 불효자놈 좀 보게. 자기 편해지자고 늙은 아비를 걷게 만들다니?" 부끄러워진 아들은 얼른 내려 아버지를 태웠다. 




 "어휴, 어떻게 아버지가 되어서 어린 애를 걷게 만들어요? 자기만 편하면 다인가?" 우물 옆에서 물을 기르던 아낙네들의 말에 이번에는 결국 아버지와 아들 모두 당나귀에 올라타기로 한다. 


 


 그것을 본 한 무리의 건장한 사나이들이 아버지에게 "못된 사람들 같으니라고! 짐승이 불쌍하지도 않소?"라고 말했고, 아버지와 아들은 당나귀의 다리 둘을 막대기에 묶어 어깨에 메고 가게 된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웃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너는데, 물이 흐르는 밑바닥을 본 당나귀가 겁이 나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둘은 당나귀를 놓쳤고, 당나귀는 개울에 빠져 익사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풀이 잔뜩 죽어 집으로 돌아갔다.




- 라퐁텐 우화집 중 '팔려 가는 당나귀' - 




 당나귀를 팔러 나가는 길에 아버지와 아들은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모두를 정성껏 반영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은 당나귀가 익사하고 두 사람은 풀이 죽어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가 벌써 고3이지? 대학은 어디로 갈 거니? 진학하고 싶은 과는 있니?"



 "어머, 오랜만에 봤더니 처녀 다 됐구나. 남자친구는?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이제 결혼했으니 자녀 계획도 슬슬 해야 하지 않니?"




 '명예 시어머니'가 너무 많다.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라며 때마다 묻고 또 ‘이런 건 이렇게 해야지’ 하는 사람들의 말이 한편으로는 관심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경청하는 일은 정말로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존중하고, 그들의 조언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보다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휘둘리는 태도 역시 곤란하다. 타인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생각을 보다 폭넓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남의 생각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타인의 평가에 목을 맬 때 타인의 존재는 지옥이 된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말 저말을 다 듣다 결국 팔아야 할 당나귀를 익사하게 만든 두 사람 처럼 타인들의 의견과 평가에 빠져 허우적대는 현대인의 지옥도를 표현한 말이다.




 영국의 시인 존 던을 모르더라도 ‘인간인 우리가 섬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섬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이고, 큰 것의 일부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타인의 시선, 평가, 조언들을 기억하되 거기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조언을 해주는 사람은 많지만, 결국 끝까지 남아 책임지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경청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져주지 않을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시장에 팔 당나귀를 물에 빠뜨릴 뿐 아니라 타인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결국 나와 끝까지 함께 있어서 나를 책임져 줄 수 있는 이는 '나 자신'뿐 아니던가? 




 이 사실을 기억하면 ‘타인은 지옥’이더라도, 거기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열쇠는 쥐고 있는 셈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평판에 대해 걱정하면서, 또 스스로 바꿀 의지도 없는 행동에 대해 끙끙 앓며 살아가는 일은 살아있다고 할지라도 이미 시체가 된 격이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우리에게는 지옥을 깨고 나올 자유가 있다. 그러니 적어도 그런 의지는 품어보는 것이 어떨까? 나 스스로 타인을 지옥으로 만들지는 말자. 시선에 사로잡혀 자유민이 되기를 포기하고 제 발로 노예의 길을 걷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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