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씨 우리 딸이랑 구면이야?”

“아침에 예술학부에 갈 일이 좀 있었거든요. 가을씨가 정교수님 따님이셨네요.”



이정의 장난스러운 시선이 가을에게 길게 머무는 걸 가을도 느낄 수 있었다. 바쁘고 보기 힘들다는 사람이 오늘 하루 내도록 가을이 발걸음 하는 곳마다 존재했다. 이정의 시선에 우연이 겹치면 뭐가 어떻다는, 우습고 유치한 농담이 자꾸 떠오르려고 했다. 가을은 그 농담이 떠올랐다는 걸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소이정씨가 왜 여기 있어요?"

"정교수님 도와서 연구 진행하는 게 있어요. 벌써 저녁이네요. 이렇게 까지 얘기가 길어질 줄은 몰랐는데."



이정의 시선이 가을에게서 창밖으로 향했다. 소이정이 학교의 연구 사업을 돕고 있다는 얘길 들었으면서도, 그가 돕는 사업 중에 엄마의 일도 있을 것이라곤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이 대화 나누는 말투와 분위기를 보아하니, 가을의 엄마는 이정과 꽤 편한 사이 같아 보였다. 가을이 계단에서 단호하게 선 그은 것이 민망해 질 정도였다.



가을의 등장으로 이정과 가을의 엄마, 정현아 교수의 회의는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던 서류들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관련 데이터는 메일로 보내고… 아, 오늘 논의했던 서류는 지금 뽑아줄게요."



자리를 정리하던 정현아 교수는 방의 프린터가 고장 났다며 이정과 가을만 연구실에 남겨두고 자리를 비웠다.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은 방 안의 공기가 어색해 가을이 이미 익숙한 엄마의 연구실 여기저기에 시선을 돌리는 동안, 이정은 테이블에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고, 펼쳐져 있던 노트북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가을과 달리 어색함이라곤 없는, 여유로운 행동이었다.



"약속도 없이 하루에 3번 만나는 상대에겐 목숨을 맡겨도 된다던데."



가을이 겨우 머리 속 한켠으로 치워놨던 농담을 이정이 상기시켰다. 여상한 그 말투에 습관적으로 공감의 대답을 할 뻔하다가, 문득 농담의 방향이 가을이 생각했던 농담과는 다름을 느끼곤 되물었다.



"목숨이요?"

"하루에 몇 번이고 마주칠 인연이라면 대륙 양 끝에 갈라놓더라도 만날 수 있으니 절대 원수로 삼아서는 안된대요. 만약 원수가 된다 하더라도 어차피 도망칠 수 없으니 목숨을 맡겨두어야 하고, 친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타나 도와줄 테니 목숨을 맡겨도 상관없고."



이정의 말은 한 번에 소화하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원수라는 건가? 가을이 이정의 말을 곱씹는 사이 노트북과 태블릿까지 가방에 넣어 지퍼를 닿은 이정은, 가을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나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요. 낮에 제가 가을씨한테 무례하게 했다면 사과할게요. 어쩐지 방금 나 보고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아서."



그러니 결국 친하게 지내잔 얘기였다. 어차피 엄마의 연구실에 들어서서 이정의 얼굴을 본 순간, 간단히 끝날 인연이 아님을 직감한 참이었다.



"아, 뭐… 그냥 놀란 거예요. 이정씨가 싫다던가 한 건 아니고."



생각해보면, 이정이 가을에게 특별히 잘못한 게 있지는 않았다. 그저 이정에겐 본의 아니게 개인적인 부분을 자꾸 들키는 것 같아서 민망했을 뿐이었다. 이정이 초면인 사이 치고 가을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긴 했지만, 생각이 읽히지 않는 다던가, 가을이 처음부터 이정의 조각에 불만을 품었다던가 하는 사유들이 존재했다. 이정은 에스퍼치곤, 특히나 S급 에스퍼치곤 매너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목숨을 맡기면 이정씨가 손해 보는 거 아니에요? 이정씨는 S급 에스퍼니까 목숨을 믿고 맡길 만 하지만, B급 가이드한테 맡기기엔 좀…”

“에스퍼는 가이드에게 늘 목숨을 빚지는 걸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죠.”



분위기도 풀 겸 가을이 농담조로 한 말이었는데, 이정이 꽤 진지하게 대답했다. 가이드 공급과잉 시대에 오게 된 지금, 에스퍼가 가이드의 존재로 인해 살아갈 수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가이드에게 저런 말을 하는 에스퍼는 흔치 않았다. 가이드를 자신의 능력을 돋보이기 위한 부속품 쯤으로 여기는 에스퍼가 한 둘이 아니었다. 에스퍼 윤리 강령, 가이드 인권 조례 같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나는 이유였다.



“제가 믿음직스러운가요?”

“음… 에스퍼는 가이드를 지키는 본능이 있잖아요.”



이정이 농담처럼 한 질문에, 이번엔 가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각인한 사이가 아닌 에스퍼와 가이드라면, 에스퍼가 반드시 가이드를 지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퍼는 어쩔 수 없이 가이드를 보호하게 되어 있었다. 목숨줄을 향한 본능적인 행동의 일환이었다. 이정이 목숨이 오고 가는 위험한 상황에서 본능을 무시하고 가이드의 목숨을 버릴 정도의 냉혈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 처음 본 사이에 내릴 판단은 아니겠지만, 그 또한 가이드의 본능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가을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이정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 우연은 없다던, 가이드 훈련학교 재학 시절 가을의 담당 교수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정과 눈이 마주친 이 순간에, 계단에서 이정이 했던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가을의 육감이 특별히 뛰어나다거나 가이드로서 특수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정의 에스퍼이고 가을이 가이드인 이상, 이미 이정과 가을의 인연이 엮여버렸다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가이드 훈련학교 시절 들었던 에스퍼-가이드 관계론의 기본이 되는 말이었다. 그 문장이 이론적이고 피상적인 문장이 아님을, 오로지 사실일 뿐인 문장임을 이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지금 이정이 가을에게 가이딩을 요구한다면, 가을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어 줄 것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현아 교수가 방으로 들어왔고, 이정과 가을의 시선이 자연스레 교수 쪽으로 옮겨져 갔다. 하지만 가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정현아 교수에게 서류를 받는 이정을 보며, 이정도 가을과 비슷한 것을 느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술학부에서 가을을 잘 부탁한다는 정교수의 말에 가을을 돌아볼 법 한데도, 이정은 가을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바라보지 않음에서 가을은 이정의 신경이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정은 같이 저녁을 먹자는 정현아 교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정교수는 항의하는 딸의 눈빛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제 이정을 마냥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며칠 만에 만난 엄마와의 식사자리에 제삼자가 끼는 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정과의 만남이 가을의 생각보다 더욱 길어지고 있었다.



이정과 엄마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자리에서, 가을은 왜 엄마와 이정이 친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둘 다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분명 회의가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하러 온 건데도 두 사람은 일 얘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가을이 옆에 있으니 기밀이라는 현 연구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두 사람 사이엔 함께 대화 나눌 수 있는 공통된 주제가 많았다. 대부분 가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제인 탓에 가을은 그저 얻어먹는 맛있는 식사에 열중했다. 이정의 소개로 오게 된 한식집의 음식은 가을의 입맛에 잘 맞았다.



식사가 마무리 될 때쯤, 가을은 오늘 이정과의 만남은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이정을 어떻게 더 마주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만남은 뜻밖의 저녁 식사가 끝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식당을 나와 가을이 당연하게 엄마의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가을의 행동을 막았다.



“어, 엄마 연구실에서 일 좀 더 하다 가야 하는데…. 이정씨가 가을이 좀 데려다줄래요?”



가을이 방금 들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정교수를 쳐다보았다. 가을이 아는 엄마는 남에게 빚지는 걸 싫어했기에 저런 부탁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부탁을 들은 사람인 이정은 당연하다는 듯 정교수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흔쾌히 알겠다 대답하는 그 모습과, 이정의 차로 안 가고 뭐하냐는 눈빛으로 가을을 쳐다보는 정교수에게 가을은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가을에겐 소이정이 아직 낯선 사람이었는데, 가을의 엄마에겐 소이정이 이미 삶에 꽤 녹아든 사람인 것 같아 보였다.



“타세요.”



이정은 손수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가을의 엄마는 정말 연구가 바쁜 듯, 그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차에 올라 시동을 걸어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가을은 허망하게 엄마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정이 여전히 조수석 문을 잡아주고 있어서, 오래도록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 데려다주면 좀 돌아가시는 거 아니에요? 저 그냥 버스 타고 가도 되는데….”



가을의 제안에 이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까운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까지만 태워줘도 괜찮다며 절충안을 내어보았지만, 이정은 정교수님이 부탁하고 가셨으니 본인도 어쩔 수 없다며 가을의 절충안을 모두 거절했다. 어머니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것과는 상반되는 태도에 결국 가을은 타협을 포기하고 이정의 차에 올라탔다.



이정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생화 향기가 가득 느껴졌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향기가 아닌, 진짜 생화에서 나는 향에 가을이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차 뒷좌석엔 여러 종류의 꽃과 화분들이 가득 놓여있었다. 식물학부의 교수인 엄마의 차도 이 정도로 꽃이 가득하진 않아서, 가을은 이정이 운전석에 앉자 마자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저게 다 뭐예요? 웬 꽃이랑 화분들이 저렇게 한가득….”

“아, 정교수님이랑 같이 하는 연구에 필요해서요. 자세한 건….”

“기밀이죠?”



이정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연구길래 현역 정신계 에스퍼까지 필요한가 궁금하긴 했지만, 더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을은 입을 다물었다. 어디 쪽으로 가야 하냐는 이정의 물음에 가을이 사는 동네 이름을 대답했다. 이정과 가을의 엄마가 친해 보이긴 했어도 사는 동네까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정의 차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이정과 가을 사이의 침묵을 메꾸어 주고 있었다. 가을은 머리 속으로 적당한 대화거리를 뒤적거렸다. 저 때문에 너무 돌아가시는 것 같은데 어디 사시느냐고 물어보기엔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었고, 클래식을 좋아하시냐고 물어보기엔 가을에게 클래식에 대한 대화를 이어 나갈 만한 지식이 없었다. 가을은 이정의 차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소소한 대화거리로 삼을 만한 사진 하나 조차 걸려있지 않았다.

가을은 많지 않은 소개팅의 경험을 떠올렸다. 무슨 과를 나왔냐, 무슨 일을 하시냐는 질문으로 보통 대화를 시작했던 것 같은데, 가을은 이미 조교 덕분에 이정에 대한 사전정보가 많이 쌓여 있었다. 거기다 현역 에스퍼가 하는 일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는 기밀인 경우가 많았다. 가을은 대화를 포기한 침묵 속 드라이빙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먼저 침묵을 깬 건 이정이었다. 아침에 과사무실에선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잘 물어보던 사람이 갑자기 허락을 구하는 게 조금 우스웠다.



“안 된다고 하면 안 물어보려구요?”

“그러려고요. 아침에 내 질문 기분 나빠했던 것 같아서.”



이정의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추었다. 이정은 핸들을 잡고 있던 오른손으로 머리를 넘겼다.



“제가 무의식적으로 남의 기분을 저한테 맞추는 경향이 있어서, 남의 기분을 잘 못 살펴요.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이정의 오른손은 다시 핸들 위로 돌아와 가볍게 핸들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저한테 기분 나쁜 게 있으면 말해줘요. 원래 남이 말하기 전에 잘 알아채는 편인데, 가을씨한텐 그게 안 되네요.”

“뭐… 기분 나쁘진 않았어요. 그냥 좀 당황스럽다 정도…. 물어보려고 했던 게 그건가요?”



생각보다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이정의 태도가 조금 낯설었다. 가을이 제대로 대답도 하기 전에 자신의 페이스대로 질문하던 오전의 소이정과는 확실히 달랐다.



“아, 그건 아니고요.”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이정의 차가 다시 부드럽게 출발했다.



“왜 그렇게 예술학부를 싫어하는 거예요?”



의외의 질문이었다. 가을은 본인이 예술학부를 싫어하는 티를 그렇게 냈나 생각했지만, 오전에 건물을 좀 노려본 것 말고는 특별히 티를 낸 적은 없었다.



“식당에서 가을씨 화장실 갔을 때, 정교수님이 가을씨 예술학부에서 괜찮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보통은 첫 출근 잘 했냐고 물어볼 것 같은데.”



가을의 엄마라면 물어볼 법한 질문이었다. 가을이 예술학부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처음 말했을 땐 아무 내색도 하지 않더니, 내심 가을이 걱정된 모양이었다.

이정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생각만 하고 있었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가을이 이정을 흘긋 바라보았다. 계속 이정에게 개인적인 부분이 밝혀지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아침의 일을 해명하려면 결국 밝혀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혹시 엄마한테서 제 아버지에 대해 들으신 거 있으세요?”

“아뇨. 그러고 보니 정교수님한테서 딸 이야기는 몇 번 들었는데 남편분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네요.”

“이혼하셨거든요. 제가 기억도 못할 만큼 아주 오래 전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 지 고민이었다. 간단하게 말하고자 한다면 이혼한 아버지의 직장이 에스퍼 훈련학교의 예술학부였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었고, 자세히 말하고자 한다면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게 된 과정부터 이야기 할 수도 있었다. 가을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부터 가을의 집까지 차로 간다면 15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15분이라면, 좀 자세히 말해도 될 만한 시간이었다.




“아빠는 가이드였어요.”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의 결혼이었으면서도 각인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가을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곧 엄마가 아닌 다른 에스퍼와 각인했다. 업무를 위한 단순한 각인이 아니었다. 아빠의 말에 따르자면, 실수였다.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 실수. 가을의 엄마 입장에선 더 이상 가을의 아빠와 가정을 꾸려나갈 이유가 없었다. 가을이 걸어 다닐 수도 없을 때, 가을의 부모는 이혼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을과 아버지 사이의 연락이 뚝 끊긴 건 아니었다. 가을의 아버지는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주기적으로 가을을 만나서 아버지 노릇을 하곤 했다. 가을의 초등 시절 추억엔 아버지와의 추억이 적지 않았다. 아직 에스퍼 훈련학교 예술학부의 건물 외벽에 화려한 조각이 없던 시절, 가을은 그 건물 1층에서 자주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었다. 그나마도 초등학교 때 까지의 기억이었다.


가을의 가이드 발현은 중학교 입학 이후였다. 에스퍼 어머니와 가이드 아버지 사이의 자식이니 발현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가을이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로 발현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에스퍼일 경우 자식이 에스퍼인 경우가 더 흔했지만 가을은 개의치 않았다. 엄마를 가이딩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쁜 마음이 더 컸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건 가을뿐이었는지, 그맘때부터 아버지와의 연락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발현 이후의 삶이 그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가을의 발현은 예정되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변화가 낯설고 정신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가을은 가이드로서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연락하곤 했지만, 답장을 받는 게 쉽지 않았다. 훈련학교까지 찾아가도 못 만나는 경우가 다수였다.



가을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러 에스퍼 훈련학교를 찾아갔던 날, 그날 가을은 운 좋게도 아버지를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예술학부의 건물의 중앙 로비 한쪽 구석의 의자에 앉아있던 가을은, 아버지가 동료와 함께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대화 소리가 더 먼저 들려왔다.



“딸이 가이드로 발현됐다고?”

“응. 당연히 에스퍼일 줄 알았는데, 귀찮게 됐어.”

“전처가 에스퍼라 하지 않았나? 추 프로가 관리할 필요는 없지 않아?”

“그러니 그나마 다행이지.”



이미 그 당시부터 가이드 공급 과잉이 사회 문제가 되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귀찮다는 아버지의 말에 가을은 그동안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 오던 말들을 돌이켜보았다. 아버지는 늘 가을이 어떤 에스퍼로 발현될 건지를 궁금해했었다. 가을은 그걸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가을의 어머니가 가을에게 아버지의 험담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끔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너네 아버지는 그저 기회주의자일 뿐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기회주의자라는 단어의 뜻을 사전적으로만 알고 있던 가을은, 그날 자신의 아버지의 딸이 아닌 미래를 위한 기회 중 하나였단 것도, 기회주의자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도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오랜만에 예술학부 건물에 온 거예요. 합격 전화 받았을 때 예술학부로 배정됐다는 말이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니까요.”



가을의 말이 마무리 될 때쯤, 핸들을 쥔 이정의 손엔 힘이 과하게 들어가 있었다. 덤덤하게 자신의 과거사를 말하는 가을의 마음이 너무 궁금했지만, 어떻게 해도 이정은 가을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루네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