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하나 같이 악마 뿔이 붉은 빛으로 반짝거리는 머리띠를 쓰고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모두 월드컵 중계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인파가 많은 곳을 지날 때면 조금 숨이 막혔기에, 걸음을 옮겨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술집이 즐비한 골목의 좋아하는 식당을 찾았다.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와글와글 들려오는, 상 밑에 쓰레기통이 있고 감성적인 조명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오래된 식당이었다. 우리는 음식을 몇 가지 주문했다. 상에는 굴전과 칼국수가 올랐다. 술도 시켰다. 저번에는 신분증 검사했던 것 같은데. 내가 농담 삼아 아쉬운 소리를 했다. 나는 멋대로 소맥을 말았다. 얼마 안 가 애인 얼굴이 벌개질 때까지 벌개졌다. 차가운 내 손을 그의 뺨에 가져다대니 그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무언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존칭을 쓰지 않는다. 그도 이름 불러주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고, 나도 그게 편했다. 나는 젓가락질을 하며 맞은 편에 앉은 그를 물끄러미 봤다. 흰 셔츠에 국물이 튈까봐 앞치마를 두른 그는 그날따라 퍽 회사원처럼 보였다. 희미한 수염 자국 같은 것도 보였다. 나는 문득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정장 입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이런 마음과 비슷한가? 생각했다.


펍에서 월드컵 실황을 전부 시청하고 집에 돌아오니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그는 침대에 엎어져서 방명록을 쓰고, 나는 컵라면에 물을 받았다. 그에게 선물 받은 백합 냄새와 라면 냄새가 뒤섞여 요상한 향이 방을 메웠다. 나는 야참을 다 먹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를 괴롭히는 일그러진 마음들에 대해 그에게 고백했다. 충분히 상처가 될 수 있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내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사람의 마음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서럽게 울다가 진이 빠져 엎어진 내 손가락, 발가락을 마디 하나씩 주무르며 그가 말했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도 이 열 손가락만큼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했어. 나는 대답했다. 식물인간이 되면 못 움직이잖아. 그가 다시 말했다. 내가 움직여주면 되지, 이렇게.

Life as told by my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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