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넬버스

※하단은 소장용 결제창입니다














지성은 아침부터 혼란스러웠다.


여주가 먹고 싶다고 했던 쌈밥을 사러 가는 와중에도 멍했다. 아침 운동 겸 산책 겸 러닝을 하던 센터 직원들이 지성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는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센터 직원들은 우리 지성이가 아직 눈물 나는 용서 받기 프로젝트를 끝마치지 못했구나- 하며 그를 위로했다.


쌈밥을 사러 식당에 들어선 와중에도 여전히 정신은 멍했다. 그래도 그간 여주를 챙겨주곤 했던 버릇이 몸에 배어 있어 주문은 정확하게 끝냈다. 양배추 찜 쌈과 상추를 비롯한 온갖 쌈 채소를 시키고, 쌈장부터 시작해 우렁강된장, 약고추장 등등을 잔뜩 시켰다.


주문을 넣고 음식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멍했다.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는 지성을 발견한 A1팀의 팀장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에게로 둠칫둠칫 다가갔다. A급의 센티넬인 선서경. 그는 당연하게도 지성보다는 후배이며, 센터에 들어온 초장기 땐 지성과 함께 이론 교육도 받았었다.




“어~ 우리 박지성이~ 뭐하냐!”




서경은 워낙에 흥이 많은 사람이었다. A급의 일렉트로이기도 하다. 서경은 굵게 웨이브 진 머리를 흩날리며 “너 아직도 여주씨한테 용서 못 받았니?” 하며 낄낄거렸다.




“으이구, 이 자식아.”

“…….”

“그러게 진즉에 이 누님한테 찾아와서 연애 강의 받으라고 했잖아!”

“…….”

“봐봐, 지성아. 너 같은 타입은 평소에 계속 귀엽게 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빡! 남자다운 모습을…!”


“…썸…….”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지성에 서경이 말을 하다 말고 “어? 뭐라고?” 하며 귀를 들이밀었다. 지성은 그런 서경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다 포장된 음식이 나왔다는 알람에 멍한 얼굴을 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썸… 쌈…….”

“……어?”

“그렇지, 쌈밥…… 우리 누나가 아침에…….”

“뭐?”

“……저 먼저 가볼게요.”




시종일관 멍한 얼굴로 알 수 없는 썸이니 쌈이니를 중얼거리던 지성이 멍하니 인사를 건넸다. 서경은 그가 포장된 음식들을 들고 식당을 터덜터덜 빠져나가는 것을 황당하다는 얼굴로 지켜봤다.


저거, 저거… 용서를 못 받아서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니면 명을 달리 한 두더지들처럼 대가리가 깨지기라도 했나? 서경은 고개를 쭉 내밀고 그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는 가만히 지성의 뒷모습을 살펴보다 감격스러운 얼굴을 해서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려 막았다.


그래, 사랑을 하다 보면 정신이 좀 나갈 수도 있지… 그건 그렇고 우리 애가 참 잘 컸어…!


서경은 사랑의 고난과 역경 따윈 우리 지성이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중얼거렸고, 그 중얼거림에 식당에 있던 많은 이들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렇다. 그들은 아까부터 속으로 지성을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성이라면 사랑이라는 문제가 안겨 주는 온갖 시련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듣는 사람은 이제 가고 없었지만, 그들은 그래도 무언의 응원을 계속했다. 그들은 하루걸러 한 번씩 생겨나는 두 사람의 스캔들에 이미 중독이 될 대로 돼 있는 상태였다.


센터 생활 너무 즐거워. 짜릿해. 늘 새로워. 도파민! 도파민!





















지성은 아침부터 혼란스러웠고,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장본인은 여주였지만, 정작 여주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 함께 맛있는 쌈밥을 아침으로 먹었다. 커다란 쌈을 와앙 입에 넣은 여주의 볼은 빵빵해졌다가 홀쭉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여주의 옆에 앉은 지성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얼굴을 해서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 와중에도 여주는 잘 챙겼다. 식사 시간마다 여주의 입에서 나오는 “센터는 음식점을 해야 된다니까.” 라는 말에 “누나 말이 다 맞아요.” 라고 꼬박꼬박 대답도 해가면서.


지성이 정신을 못 차리든 말든, 그들은 아침부터 바빴다. 여주가 일어나기 전 새벽, 숙소 거실을 꽉 채우고 있던 서류 더미들은 다른 팀원들이 미리 A-01 훈련실의 회의실 안으로 옮겨 놓은 상태였다. 이제 새로운 숙소로 가지고 갈 짐만 챙기면 되었다.


1팀의 숙소와 1-1팀 숙소 앞 길목에는 그들의 짐이 담긴 캐리어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사실 짐이라도 할 것도 딱히 없었다. 당분간 입을 옷들이나 속옷들이 전부였다. 애초에 옷도 많이 없었다. 현장복을 입고 다니는 시간이 훨씬 많아 옷에는 딱히 관심이랄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여주는 해바라기 무늬가 그려진 자신의 캐리어를 제일 앞에 세워 놓았다.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업무를 계속할 이들을 제외하고, 새로운 숙소에 이삿짐을 옮기기 위해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팀원은 재현과 도영이었다. 짐 옮기는 것에 최적화 된 능력을 지닌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여주의 캐리어를 보고 귀엽네, 꼭 선배 같은 거로 잘 골랐네, 예쁘네- 한마디씩 덧붙이다 캐리어에 붙은 포스트잇을 보고 또 한마디씩 했다.




“저걸 저렇게 잘 보이게 붙여놔야겠어요?”

“누가 열면 어떡해.”

“아니, 누가 봐도 선배 거잖아. 아무도 안 열어요. 신줏단지 모시듯이 옮겨 놓는 거면 모를까.”

“아침부터 잔소리 오지네…….”


“이거 그냥 땔게요.”

“왜 때! 누가 열면 어떡하라고!”

“아니, 아무도 안 연다니까?”

“마이 러블리…….”


“그래! 왜 때! 선생님이 붙여 놓으라잖아!!”




길바닥 한복판에서 우당탕탕 시트콤도 찍었다. 두 가이드들의 성화에 결국 두손 두발을 다 든 도영과 재현이었다. 우리 가이드들을 어떻게 이겨, 못 이기지. 금쪽이도 이런 금쪽이 가이드들이 따로 없네. 재현은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천군만마 부럽지 않은 정우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준 여주는 승리의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키링남들에게 다가갔다.




“테엔.”

“왜.”

“너도 회의실로 갈 거지?”

“너 데려다주고 센터장 집무실 가봐야 돼.”

“태용이한테?”

“어.”

“왜? 태용이 보고 싶어서?”




텐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여주를 내려다 봤다.




“내가 걜 보고 싶어 하겠어?”

“보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우리 태용이 귀엽잖어.”

“네 눈에나 귀엽겠지.”

“……아닌데? 누가 봐도 귀엽지 않나?”




태용의 옹심이 같은 동그란 얼굴(여주 기준)과 소의 눈망울보다 더 순한 동그란 눈매(이것도 여주 기준)를 곰곰이 떠올리던 여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태용이 진짜 꼬마 주먹밥처럼 생겼는데…….”




텐은 진심으로 여주의 취향이 걱정되었다. 자신에게도 귀엽다고 하더니, 이태용을 귀엽다고 해? 아마 센터 직원들이 이 얘기를 들었으면 기겁을 했을 거다. 그 S급 센티넬이자 센터장인 이태용을 꼬마 주먹밥이라고 칭하다니- 하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선 진짜 그러고 다니지 마.”




그 말에 짭, 입맛을 다시며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여주였다. 내 취향이 진짜 남다른가? 입술을 삐죽이며 땅을 툭툭 차던 여주가 “그럼 왜 가는데.” 하고 물었다. 텐은 본부 요원 방문 허가 처리를 위해 처리해야 할 서류가 몇 가지 있다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본부 요원의 방문이기에 센터장의 직인이 필요하다면서.




“아하, 글쿤.”




업무를 위해 가는 거라면 가지 말라고 징징거릴 수도 없었다.




“그거 금방 끝나?”

“아마도.”

“다 하고 A-01 회의실로 올 거지?”

“어.”

“올 때 빵 사다 줘.”


“뭐.”

“바게트나 베이글.”

“어.”

“아, 그리고 크림치즈도 같이.”

“어.”

“아, 아! 그리고 커피도!”

“알았어.”




본부장을 심부름꾼으로 부려 먹는 인생, 너무 재밌당. 낄낄거리며 웃던 여주가 옆에 서 있는 지성의 팔뚝을 제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우리 방은 네가 직접 꾸밀 거라며.”


“……네.”

“그럼 너는 회의실에서 일하다가 여기 다시 오겠네?”

“……네.”

“나도 같이 할까?”

“……네.”

“그래.”

“…….”

“…….”

“……아니, 아니요!”




어우, 씨. 깜짝이야. 그리 말하는 것치곤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은 얼굴을 해서는 지성을 쳐다보는 여주였다. 지성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누나는 그냥 쉬어요. 왜? 힘들게 왜 일을 해요? 누난 그냥, 그냥 놀아요.” 하고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제가 방 다 정리할 때까지 누난 그냥 놀고 있으면 돼요.”

“…….”


“아니, 왜 이런 일을 누나가 해. 누난 그냥 놀고 있다가 나중에 몸만 오면 되는데.”

“…….”

“어차피 얼마 안 걸려요. 제가 다 할게요.”




비장하게도 말하는 지성이었다. 여주는 그런 지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지긋하고도 끈질긴 시선에 지성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 무렵, 여주가 방긋 웃었다.




“그으래-.”




그리고는 툭툭! 그의 등을 힘을 줘 토닥이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키링들아, 가자.”




폴짝폴짝.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통통 튀었다. 텐은 마치 당근밭을 발견한 토끼처럼 걸어가는 여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옆으로 스윽 고개를 돌렸다.




“넌 또 왜 그 모양인데.”




아침부터 넋이 나가 있더니, 여주와 대화를 나눌 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지성은 맹한 표정으로 텐을 마주 봤다.




“선생님.”

“어.”

“……선생님은….”

“어.”

“그…….”

“…….”

“그러니까… 그…….”




솥뚜껑만 한 커다란 손을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휘적이며 입을 달싹이던 지성은 이내 두 팔을 힘없이 툭 떨구고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그냥.”




그리고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버린 여주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지성이었다. 텐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또 미쳤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그가 여주에 관한 문제로 정신을 놓아 버리는 건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



A-01 회의실. 그 커다란 회의실은 서류 더미로 사방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여기서 더 추가될 서류들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아직 심층 심문이 다 끝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성은 심층 심문이 내일까지 이어질 것 같다는 소식을 막 전해 들은 참이었다. 오늘 내로 끝을 내라면 낼 수는 있었지만, 심층 심문을 도맡아 하고 있는 정신계 센티넬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단다. 가혹할 정도의 업무량 때문이었다.


한시가 급했지만, 이 이상의 재촉은 할 수 없었다. 30시간 만에 이 정도로 심층 심문을 뽑아낸 것도 정신계 센티넬들에게는 거의 고문 수준이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소식을 들은 여주도 심층 심문이 조금 늦어지는 정도는 괜찮다고 말했다.


팀원들은 일을 계속했다. 중간중간 밖에 나가 새롭게 추가된 보고서들을 가져와서는 수정하고 분석하고 취합하고. 하나의 업무를 끝내면 두 개의 업무가 쌓여갔다.


지성은 이사가 다 끝나면 굳이 숙소로 옮길 필요 없이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며 여주에게 물었고, 여주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초에 팀원들이 숙소에서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여주가 그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확인받고 싶어서 였다. 지금도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주아주 약간은 불안했지만, 그것이 새로운 숙소를 사무실화 시키고 안 그래도 바쁜 이들을 두 번 일하게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할 거였다. 직접 찾아와서 봐도 되었다.


넓은 회의실에는 간간이 들려오는 대화 소리를 제외하면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사각사각, 듣기 좋은 펜 소리. 그리고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는 소리로 꽉꽉 찼다. 그 업무 소음들 틈에 유일하게 업무 소음이 아닌 것이 하나.




“이거 맛있다.”




부스럭부스럭, 냠냠. 여주가 내고 있는 소음이었다. 여주는 현재 팔자 좋은 한량처럼 누워 팀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 중이다. 어디에서? 회의실 안 간이침대에서.


태일이 연구실에서 부랴부랴 가져온 접이식 간이침대. 그 위에 지성이 폭신폭신한 두터운 담요를 깔아주었다. 오로지 여주를 위한 휴식 공간이었다. 간이침대에 모로 누워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여주는 텐이 사 온 베이글을 냠냠 뜯어 먹었다.




“진짜 맛있게도 먹네.”

“응. 줄까?”

“아니, 누나 많이 먹어.”


“제가 나가서 더 사 올까요?”

“아니, 괜찮아.”




나른한 표정으로 누워 무심히 대답하고 있는 여주였지만, 여주는 이 상황이 꽤 불편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신의 똥강아지들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서류에 파묻혀 있는데 혼자서만 이러고 있다니. 여주는 양심이 아파 왔다.


그렇지만 여기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서류 업무야 과거에서도 많이 했던 일이기에 하라고 하면 잘 할 수 있었지만, 팀원들이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위인들이 아니었다. 일손에 보탬이 좀 되고 싶어 은근슬쩍 서류를 가져가려 하면 이럴 때만이라도 제발 좀 쉬라며 만류했다.


갑자기 종이가 살아 움직여 나를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무슨 위험한 폭탄이라도 만지는 것마냥 반응하더라. 과보호 오지는 놈들. 웃겨, 진짜. 흥, 여주가 콧방귀를 작게 뀌며 커피를 쪼로롭 빨아 마셨다.


한창 일을 하던 지성이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천천히 자리를 정리했다. 여주가 그 모습을 맹한 얼굴로 지켜보며 베이글을 작게 베어 물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누워 있는 간이침대로 걸어오는 지성에 여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넌 또 어디가?”

“숙소요.”

“어… 아, 짐 다 옮겼대?”

“응. 금방 갔다 올게요. 얼마 안 걸려.”




고개를 느리게 주억이던 여주가 “진짜 같이 안 가줘도 돼?” 하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며 물었다. 그 물음에 옅게 웃은 지성이 여주의 손에 들린 반쯤 남은 베이글을 쏙 빼가며 말했다.




“누난 여기서 뒹굴거리고 있어요. 보기 좋으니까.”

“어…… 근데 그거 내 베이글,”

“잘 먹을게요.”




쪽. 볼과 입술이 맞닿다가 떨어지는 짧고도 민망한 소리와 함께 베이글을 먹으며 회의실을 나서는 지성이었다. 여주는 멍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쫓다가 이내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봉지에서 새로운 베이글을 꺼내 들었다.




“잘 먹고 있었는데…….”




여주가 투덜거리며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치덕치덕 발랐다. 그러다가 퍼뜩 고개를 든 여주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느리게 굴리다 크림치즈를 바르던 플라스틱 나이프로 베이글을 작게 썰었다.


크림치즈가 덕지덕지 발라진 베이글 조각을 손에 쥔 채 간이침대에서 내려왔다. 여주의 가벼운 발걸음이 향한 곳은 텐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서류에 밑줄을 치던 텐은 제 옆으로 다가와 테이블에 걸터앉는 여주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왜.”




짧은 물음과 함께 다시 시선을 밑으로 내리는 텐이었다. 여주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손에 들린 베이글 조각을 그의 입 앞으로 가까이 들이댔다.




“먹어 봐.”

“싫어.”

“음- 이번엔 억지로 네 입에 집어넣는 짓은 안 할 거야.”

“…….”

“대신 네가 먹을 때까지 계속 이렇게 들고 있을래.”




인상을 찌푸린 텐이 다시 고개를 들고 여주를 마주했다. 여주는 그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텐이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답답함이 묻어있는 손짓이었다.


여주의 얼굴과 여주의 손에 들린 베이글 조각을 한 번씩 번갈아보던 그는 결국 못 이기겠다고 중얼거리며 그 작은 손에 들려 있던 베이글을 받아먹었다. 그나마 담백한 베이글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미간을 좁힌 채로 베이글을 느리게 씹는 텐을 여주는 가만히 내려다 봤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여주는 텐의 저작 운동이 멈추자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네.”




뭐가 괜찮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말하는 여주의 표정이 희미하게 웃는 낯이었기에 그러려니- 하는 텐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 애가 보고 싶어.”


“나도.”




태용과 영호는 바빴다. 씻을 시간도 아까웠다. 샤워라기보다는 거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쓰레기통에 수북하게 쌓인 캔은 전부 에너지드링크였고, 병은 태일이 손수 가져다준 영양제들이었다. 커피 캔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이만하면 슬슬 공문 보낼 준비 해도 될 것 같다.”

“문제는 언론 쪽이야. 그새를 못 참고 여기저기 찔러보고 다니더라고.”

“정부 쪽에서 뭐라도 흘린 거 아냐? 그쪽도 입 간지러울 텐데.”

“그 인간들은 하루도 못 참는 거냐고.”




한 달이 지나기를 했나, 일주일이 지나기를 했나. 고작해야 아직 이틀도 안 되었다. 그런데도 오늘 아침부터 연락이 오더라. 언제쯤 발표할 예정이냐면서 꼬치꼬치 캐묻는 행태는 태용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했다.


아무리 치가 떨려도 정부랑은 등지면 안 돼. 대신 정치에는 귀 열고, 정치질에는 귀 닫아. 센터는 독립 기관이라 정치질에 굳이 휘말리지 않아도 되니까.


오래전 센터장 수업을 할 때 여주가 해주었던 말만 아니었다면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을 것이다. 이번 일에 책임을 지기 싫어 모든 일을 센터에 일임했으면 입 다물고 얌전히 기다릴 줄은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태용이 시간을 살폈다. 이제 슬슬 정우가 올 시간이 된 듯싶다. 두 사람은 가이딩을 위해 정우를 호출한 참이었다.


두 사람의 가이딩 수치는 70대 전반으로 넉넉한 편이기는 했지만, 센티넬의 만병통치약은 가이딩이다. 이 피곤함과 쌓여있는 피로로 인한 두통, 두통으로 인해 날카로워진 신경.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건 가이딩이었다.


영호는 뻐끈해진 목을 옆으로 꺾으며 앓는 소리를 내다 물었다.




“이진씨 찾는 건 어떻게 돼가.”




그 말에 한쪽 눈썹을 들썩인 태용이 한 박자 느리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래서 아직 김도영은 못 보냈고, 태일이 형이 계속 조사는 하고 있어.”




진이 자주 끼고 다녔던 반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태일의 말에 의하면 브랜드 제품이 아닌 수공예 제품 같다고.




“수원 상광교동 쪽 CCTV는 복구할 수 있는 만큼은 전부 복구해놨다던데.”

“복구할 수 있는 만큼이면 얼만데?”

“그쪽은 전쟁 여파가 커서 복구할 수 있는 게 얼마 안 된다더라고. 그나마 제일 오래된 기록이 205…”




콰앙!!!


말을 하던 태용도, 말을 듣고 있던 영호도 깜짝 놀라 움찔거리며 문을 쳐다봤다. 무려 센터장의 집무실인데도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린 문. 그 문 앞에 배를 내밀고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은,




“윗대가리들의 깜찍이 여주 등장!”




역시나 여주였다.




❊❊❊



정우가 받은 가이딩 호출은 중간에 여주가 가로챘다. 심심하기도 했고, 서류 처리도 하고 있는 정우보다는 할 일이 없는 자신이 오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팀원들의 만류가 있기는 했지만, 여주는 정우를 자리에 다시 앉혀 놓곤 회의실을 냅다 빠져나왔다. 내가 가겠다는데 지들이 뭐 어쩔 거람?!


덕분에 태용과 영호는 여주의 가이딩을 꽉꽉 채워 받았다. 센티넬들의 이데아라 불리는 가이딩을 100까지 꽉꽉 채워 받은 터라 머리도 맑아졌고, 몸도 가벼워졌다. 게다가 여주도 봤으니 두 사람에겐 일석이조였다.


컨디션이 가뿐해진 두 사람은 업무를 지속했고, 여주는 가이딩이 끝난 이후 집무실을 어슬렁거렸다. 집무실에 설치된 미니바도 한 번 구경하고, 두 사람에게 치대기도 하다가 일명 회장님 의자라고도 불리는 태용의 의자에 앉아 보기도 했다.


역시 센터장 전용 의자는 푹신함부터가 다르다며 감탄하던 여주는 그 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더니 종국에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빙글빙글 돌고, 또 돌다가 뜬금없이 그랬다.




“너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도형이 삼각형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




그 후로 여주는 입에 모터라도 단 듯이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로 시작해서 괜찮은 것 같기도 해- 라는 말로 끝나는 문장들은 죄다 주어가 텐과 지성이었다. 여주는 텐과 지성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센티넬들은 진짜 그래? 자기 가이드가 공평하게 사랑해주지 않아도 별 신경 안 써?”




저런 말을 해대고 있는 것을 보면 주어가 그 두 사람인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여주에게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 확실했다. 여주에게 좋은 의미로 바람이 들어찼다.


여주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여주의 삶을 원하는 그들에겐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이곳에 미련이 많이 남으면 남을수록 생존 확률이 올라갈 테니까. 여주가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살 거라는 마음을 가지게 될 수도 있으니까.


여주는 자신의 사랑을 죽음 때문에 포기했었다. 본인 때문에 상대방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주가 연애 상담을? 그들은 감격스러웠다.


우리 애가 드디어 연애할 생각을 하는구나. 우리 애가 조금씩이지만 욕심을 내고 있구나. 진짜 눈물이 다 난다.


속으로 그런 생각하며 피실 피실 웃던 영호가 서류에 멋들어진 사인을 휘갈기고 슬쩍 고개를 들어 여주를 바라봤다. 여주는 여전히 폭신하고 고급진 가죽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성향에 따라 갈리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은 신경 안 쓰긴 하지.”

“아니, 왜? 나 진짜 이해가 안 가.”

“내 가이드랑 내가 쌍방이 됐잖아. 적든 많든, 가볍든 무겁든. 어쨌든 서로 주고받게 된 거니까.”

“…….”


“센티넬 입장에선 여기서 더 바랄 게 없지.”




빙글빙글 돌던 여주가 두 손으로 책상을 잡고 자리에 멈춰섰다. 살짝 인상을 쓴 채 영호를 보고 있던 여주는 곧 도리질을 잘게 치며 말했다.




“넌 따지고 보면 외국인이잖아. 그것도 미국인.”

“……그래서?”

“여긴 코리아라고. 그쪽 연애관은 우리나라 정서랑은 별로 안 맞아.”

“뭐?”

“그, 거기 이름 뭐지? …어, 맞아. 할리우드. 할리우드 거긴 난장판이잖아.”


“너 그거 편견이다. 그리고 난 시카고에서 자랐어.”

“어차피 다 같은 미국 땅덩어리 아냐! 난 토종 한국인이란 말이야!”




한국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어! 앙칼지게 대꾸한 여주가 휙, 시선을 돌려 태용을 쳐다봤다. 이번엔 네가 한번 말해보라는 듯한 시선에 움찔거린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여주의 끄덕거림에 볼을 긁적이던 태용이 눈짓으로 영호를 가리켰다.




“쟤 말이 맞아.”




여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여긴 노 아메리카인데도?”

“아메리카든 코리아든 다 똑같아. 다 같은 센티넬이니까.”




센티넬과 가이드는 발현을 하면서 부터 갑과 을이 정해진다. 사실상 갑을관계라기보다는 주종관계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가이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센티넬과, 센티넬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가이드. 속된 말로, 납작하게 기어 엎드려야 하는 쪽은 무조건 센티넬이다.




“평균 비율로만 따져도 센티넬 5에 가이드가 1이잖아. 가이드가 무조건 한 명을 고른다고 하면 나머지 넷은 그대로 탈락이라는 거나 다름없는데.”

“…….”

“다른 애한테 99를 주고 나한테는 1만 줘도 감지덕지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한 태용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다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여주에 움찔거렸다.




“…….”


“……왜?”




여주는 그런 태용을 말없이 노려보다 마음에 안 든다며 낮아진 음성으로 읊조렸다.




“아니… 뭐가…?”

“너네는 화도 안 나? 가이드들이 옜다- 하고 선심 쓰듯이 먹던 빵 던져주는 거나 다름없는데?”

“으음…….”

“난 너네 그렇게 안 키웠어!”




주먹 쥔 손으로 책상을 탕! 하고 내려친 여주가 책상 위로 엎드렸다. 어디 가서 내 똥강아지들이 그런 취급을 받고 다닐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가 어떻게 키워낸 원석들인데!


당연히 가이드들이 대놓고 센티넬을 노예처럼 부리지는 않았다. 어젯밤 대화를 나눴었던 재민도 그렇고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두 사람도, 텐과 지성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엇비슷하게는… 생각하려나?


노예처럼 부리는 가이드도 찾아보면 있기야 하겠지만, 보편적이진 않았다. 당연하게도 법이 잘 되어 있기도 했지만, 법이 없었어도 괜찮을 거라고 본다. 우리들에게는 오랜 기간 핍박을 당해온 세월이 있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해오고 있기에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에는 그로 인한 동질감이 있다.


왜, 외국에 나갔는데 그 머나먼 타지에서 같은 동향 사람을 만났을 때 제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일단은 반갑지 않은가. 그런 거다. 뿌리가 같다는 것에서 오는 동질감. 그렇기에 서로가 애틋했다. 우리들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생태계에서 생존에 성공한 소수집단이었다.


여주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가 갑을관계나 주종관계라기보다는 공생관계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가이드는 보호받고, 센티넬은 삶의 안정을 취하고. 신체적으로는 가이드가 약자지만, 신체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는 가이드가 강자다. 물론 여주는 신체적으로도 강자다.


어쨌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을을 자처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라는 말이다. 센티넬 쪽에서 받는 것은 보호가 아닌 생명이니 어찌 보면 가이드를 제 자신보다 더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는 해도…


……내가 진짜 그 두 키링의 주인인가?


엎드리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운 여주가 사뭇 진지하게 고민했다. 장난처럼 키링들이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 둘을 나의 손발처럼 부려 먹고는 있지만. 센티넬들 입장에선 그 정도는 갑질도 아니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갑질은 맞지 않나? 나 엄청나게 안하무인처럼 굴지 않았나?


과거, 자신이 했던 언행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던 여주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얼굴 위로 깨달음이 번져 나갔다.




“나 가이드처럼 굴었네.”




자그마한 중얼거림에 태용과 영호의 의아함이 담긴 눈동자가 여주에게로 향했다. 여주는 맹하게 풀린 얼굴을 해서는 허공을 보며 연신 중얼거렸다.




“내가 가이드처럼 굴었네…… 가이드 질을 했네, 했어…….”




두 사람은 미미하게 웃는 낯으로 서로 시선을 한 번 교환하다 다시 여주를 쳐다봤다. 여주는 여전히 맹하게 풀린 얼굴로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본인이 가이드인데, 가이드가 가이드처럼 굴었다는 게 저렇게 충격적인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상대가 여주였다.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태용은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빙그르르 돌리다 툭 내뱉었다.




“보기 좋던데.”




눈을 느리게 꿈뻑이던 여주는 천천히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꾹 감았다.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왜냐.




“니들은 내가 숨만 쉬어도 보기 좋다고 하잖아…….”




숨 쉴 때뿐만이랴. 밥을 먹을 때도. 다들 열심히 일할 때 혼자 뒹굴거리고 있어도. 쓸데없는 일로 고집을 부리고 짜증을 부려도. 별것도 아닌 것에 빽 소리를 질러도. 그들은 언제나 보기 좋다고 칭찬 일색이었다.


지금도 봐라.




“……보기 좋으니까?”




저딴 소리나 하고 앉아 있었다. 내가 다짜고짜 욕을 퍼부어도 ‘듣기 좋다. 계속해.’ 라고 할 인간들 같으니라고.


후우우.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묵직한 한숨을 길게 내쉰 여주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주무르던 여주가 한결 맥 빠진 시선으로 태용을 마주했다.




“보통 가이드는 다 이렇게 살겠지?”

“이것보다 더 하면서 살아.”

“……정우는 안 그러던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들이 가이드들을 너무 잘 만난 편이지. 안 그래?”


“어. 로또 당첨보다 너희들 같은 가이드 만나는 게 더 어려워.”

“……나랑 우리 퍼피가 대단한 편이기는 하지….”




당연한 사실을 들은 사람처럼 심드렁하게 반응한 여주가 다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비싼 의자이기에 이렇게나 돌려댔는데도 끼익- 하는 소음 한 번이 안 나지? 지성이한테 이 의자 하나 사달라고 할까. 멍하니 생각하던 여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덮었다.


물들었다. 속세에 물들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지성의 전 재산을 넘겨받긴 했지만, 그땐 딱히 쓸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전 센터장의 카드도 있었기에 지성이 준 카드로는 그냥 소소하게 커피 한 잔… 과자 하나… 뭐 이 정도만 썼었고, 임무에 필요해서 차 한 대 긁었던 것이 전부였는데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걔 돈이 내 돈인 것처럼 생각하게 됐다.


텐의 것은 내 것이라며 그의 카드를 강탈했을 때도 샀던 거라고는 털실, 길 가다 발견한 떡볶이 사 먹기, 커피 사 마시기 정도였는데. 생필품은 제외하고 쫌쫌따리 쓰는 것 외에는 그들의 돈으로 딱히 사치를 해본 적이 없었다.


사치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죄다 선물을 받거나, 선물을 받거나, 선물을 받거나 한 것들이었다. 텐과 지성이 준 것들도 있지만, 팀원들이 준 선물도 꽤……


가만?




“너희들이 내 버릇을 잘못 들여놓은 것 같은데…?”




어쩐지 스산하게 들리는 중얼거림에 영호는 “그 말도 맞지.” 하며 동조했고, 태용은 큭큭거리며 서류로 얼굴을 가린 채 웃었다. 여주는 그런 두 사람을 짧게 째려보다 폭신한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대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톡톡. 손톱을 튕기며 앉아 있던 여주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지금 이 상태도 괜찮은 것 같아.”




라고. 서류를 한 장 뒤로 넘기던 영호는 “어떤 상태?” 하고 되물으며 여주를 쳐다봤다. 여주는 느릿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무심한 손길로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답했다.




“그냥 이런 상태.”

“이런 상태?”

“굳이 이 관계를 정의 내려야 하나- 싶기도 하고.”


“왜. 너무 복잡해?”

“그것도 그런데, 어차피 헤어져야 되니까.”




기지개를 크게 켜던 여주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눈살을 찌푸리며 “왜. 뭘 봐.” 하고 까칠하게 대꾸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난 다시 과거로 돌아갈 거고. 거기서 여기로 다시 안 올 수도 있는데, 그러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때 헤어져야 되잖아. 평생 날 기다리면서 살라고 할 수도 없고.”




영호는 제 뒤를 지나쳐 걸어가는 여주에게 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아챘다. 그 행동에 고개를 돌린 여주가 왜 그러냐는 듯이 눈짓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기다리지 말라고 해도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 안 해?”

“그건 내가 싫어.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 나 같은 거 잊고 잘 먹고 잘살라고 하고 돌아갈 거야.”

“……그걸 그 두 사람이 귀담아들을까, 과연?”

“귀담아듣든 말든… 그리고 이건 너네도 마찬가지야.”




여주의 말에 눈썹을 위로 올리며 입술을 감쳐문 태용이 곧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누나, 미안.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게.”

“어쭈.”

“기다리는 건 내 마음이지. 그리고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일걸. 듣는 시늉이라도 하면 양반이지.”




그 말에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여주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장난처럼 가볍게 말하고는 있지만, 태용이 한 말엔 거짓 하나 담겨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반응도 태용이 말한 것과 비슷한 반응일 터.


어흐, 모르겠다. 머리를 마구 긁적이던 여주는 고개를 휙 돌리곤 “나 간다.” 짧은 인사를 건넨 뒤 성큼성큼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은 여주가 아- 하며 뒤를 돌아봤다.




“지성이랑 애들한테 나 태일이 연구실 놀러 갔다가 간다고 전해줘.”

“네가 전하지, 왜? 또 핸드폰 안 들고 나왔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착실하게 핸드폰을 꺼내 드는 영호였다. 여주는 영호의 손에 들린 핸드폰에 짧게 시선을 주다 말했다.




“나 핸드폰 없어.”


“네가 핸드폰이 왜 없어?”


“누나, 핸드폰 잃어버린 거야?”




태용의 물음에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여주가 조금은 머쓱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부쉈어. 홧김에.”

“홧김?”

“어제 지성이 걔랑 얘기 좀 하다가…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핸드폰을 부쉈다고?”

“아- 그땐 뭐든 부수고 싶었어. 내 안의 그… 뭐라 그래야 돼, 그 파괴 충동? 아무튼, 그런 게 일어났었다고. 완전 빅뱅이었다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여주를 보고 있는 태용과 영호였다. 여주는 두 사람의 시선에 뻔뻔한 표정으로 그랬다.




“그렇다고 박지성이나 텐의 두개골을 부실 수는 없잖아.”

“…….”

“그 새끼들 말고 핸드폰만 부순 걸 다행으로 알어.”




나 진짜 간다.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에서 쏙 빠져나가 버리는 여주였다. 태용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고, 영호는 진짜 대단하다고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토독토독 두드렸다. 잠시 후 울리는 진동에 태용이 제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영호에게 온 단체 메시지였다.




>우리 애 문 닥터 연구실에서 놀다 들어간대 *0003




메시지를 확인한 태용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구겨졌다.




“너 뭐, 진짜 학부모야?”




황당하다는 듯이 묻는 태용에 영호는 그저 껄껄 호탕하게도 웃었다. 하하하!






















태일의 연구실에서 여주는 새로운 소식 하나를 듣게 되었다. 차강열이 만들어낸 세퍼레이터의 프로그래밍. 그 프로그래밍을 해준 프로그래머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소식이었다.


태일은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며, 저번에 지성이 임무에 나가 생포해 온 해커가 실마리가 되어주었다고 했다. 급이 있는(여주는 이 대목에서 폭소했다. 너무 우스워서) 해커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 교류를 하는 딥넷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한 해커가 세퍼레이터에 적용된 프로그래밍에 사용된 C언어와 흡사한 자료를 보여주었던 적이 있었다고.


그 내용을 토대로 조사를 한 결과 지성이 생포해왔던 해커와 마찬가지로 그쪽 세계에서는 유명한 해커라고 했다. 일반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활동 범위로 보아 높은 확률로 브라질 쪽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밝혀진 게 없단다. 남미 쪽에서는 꽤나 골칫덩이로, 이번에 그 해커도 생포를 하게 된다면 국가에 돌아오게 되는 이득이 어마어마할 것 같다더라.


여주는 국가가 이득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을 하긴 했지만, 국가가 받게 될 이득이 무엇인지 세세하게 따져볼 정도의 관심은 없었다. 다만 해커에게는 관심이 있다. 일반인이라고 했다. 혹시 그 해커도 전범의 자손일까? 그 커뮤니티 쪽에도 속해 있는?


차강열의 정체를 알고, 그 프로그램이 어떤 용도도 사용될지도 알면서 도와준 것과 그저 의뢰를 받아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기만 한 것에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다. 후자라면 모르겠지만, 전자라면 그는 최소 무기징역이었다. 그리고 최대 사형.


왜 사형이냐면, 내가 죽일 거거든. 쓰읍, 그러고 보니 그 새끼를 죽이려면…… 나도 그 난다인가 놀다인가 하는 곳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 가기 싫은데. 그렇다고 애들을 보낼 수는 없으니 텐한테 본부 요원 한 명 시켜서 여기로 데리고 오라고 할까?




“언니!”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거린 여주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여기서 날 언니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는데, 대체 누가…




“와! 언니 맞네요!”




여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무척이나 반갑다는 얼굴을 한 여주가 활짝 웃었다.




“연화야!”




❊❊❊



연화는 그 이름 모를 바위섬에서 구조가 된 이후 센터에 옮겨졌다. 신원을 조사 받고, 검사를 받고, 센터에서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몸에 칩을 심었다. 아직 언론에는 이번 일이 발표되지 않았기에 집에는 연락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연화는 딱히 불만이 없었다.


죽을 뻔했지만 무사히 구출이 되었고, 암암리에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센터에 입성해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연화는 같이 잡혀 있었던 가이드 셋과 함께 총 네 명이서 4인실의 병실에 배치됐다.


센터는 4인실도 끝내줬다. 병실인데도 욕실과 화장실이 무려 2개씩이나 되었고, 창밖으로는 녹음이 무성했으며, 병원 밥도 끝내줬다. 왜 센터 밥이 맛있다는 소문은 안 났던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센터 직원들도 친절했고, 특히나 자신을 연구소장이자 1팀의 팀 닥터라 소개한 태일은 친절하다 못해 얼굴까지 친절했다. 저런 사람이 있는 병원이라면 병원의 환풍구로 태어나도 괜찮겠다 싶었다. 태일이 직접 제 팔뚝 안쪽에 칩을 심어줄 땐 조금 짜릿함도 느꼈다. 그 후로 내가 이렇게 변태스러운 사람이었나- 하고 자아 성찰의 시간도 가졌었고.


아무튼, 연화는 환자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도 적당히 얌전하고 적당히 소란스러워 딱히 심심하지도 않았고, 죽을 뻔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는 공통점도 있어 대화도 꽤 잘 통했다.


병실 사람들과는 나이대가 비슷하진 않았다. 연화는 열아홉이었고, 연화의 옆자리는 26살이었으며 맞은편은 14살의 중학생이었고, 그 중학생의 옆자리는 37살이었다. 37살의 직장인이자 한 가정의 어머니이기도 한 유나민. 그는 B급 가이드였다.


나민은 오늘 아침, 맛 좋은 병원 밥을 먹으며 말했었다.


나 센터랑 계약하려고. 여기서 일 할 거야.


집도 있고, 가정도 있지만 이런 일을 한 번 겪어보니 차라리 센터에 취직해 확실하게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단다.


추후에 가족들과 상의는 해보도록 하겠지만 어차피 나이도 있기에 현장직이 아닌 사무직 쪽으로 빠질 것 같고, 사무직이라면 출퇴근도 할 수 있으니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과 딱히 달라질 건 없을 것 같다고.


어차피 칩도 심었으니까 심은 김에 센터에 자리 잡는 거지. 그리고 센터면 나중에 퇴직할 때 퇴직금도 엄청 넉넉하게 챙겨주잖아. 철밥통에 연금도 나오니까, 일석삼조지.


라고 하면서.




“그래서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진로를 확 틀었잖아요. 변호사 쪽으로. 여전히 변호사도 하고 싶기는 한데, 제가 그날 언니 하는 거 보고 센터에서 가이드로 사는 것도 겁나 멋지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아, 그래?”

“네! 완전 막… 파바박! 하면서 적 다 부수고 다니는 거 존나 멋있었어요.”

“흐음…….”

“그래서 사아아알-짝 흔들리긴 했는데, 그래도 저는 굳이 따지면 인텔리 파라서 몸 쓰는 거에는 딱히 재능이 없단 말이에요. 완전 몸치에요. 달리기도 엄청 느리고.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단 말이죠? 변호사 쪽으로.”

“응.”

“근데 나민이 언니 말 들으니까 혹 하더라고요. 나민이 언니 말이 맞긴 하잖아요. 센터에서 일하면 보호도 받게 될 거고, 철밥통에, 저는 A급 가이드라서 조건도 엄청 좋을 거고. 얘기 들어보니까 가이드들은 현장 안 나가도 된다더만요.”

“뭐 그렇지. 나가기 싫으면.”

“현장 안 나가면 훈련도 최소한으로만 받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뜻을 관철할까요? 변호사 시험에 온 힘을 다 해본 다음에, 그래도 안 되면 센터에 취직하는 게 낫겠죠? 어려운 길 옆에 쉬운 길이 있다고 쉬운 길로만 가면 안 되잖아요.”

“음…….”

“근데 또 언니처럼 살아보고도 싶어요. 진짜… 존나 멋있었는데…….”




아득한 눈으로 머나먼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하는 연화였다. 여주는 픽 웃다가 다 마신 음료수 캔을 작게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것을 보고 오오- 하며 손뼉을 짝짝 치던 연화는 “전 몸치라 이런 것도 못 해요.” 라고 말하며 풀 죽은 목소리로 찡얼거렸다.




“그래도 네가 원하는 걸 해야 하지 않겠어? 남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가이드이자 인생 선배로서 해줄 어드바이스는 없나요?”

“방금 해준 게 어드바이스였는데? 원하는 대로 해. 네 인생이잖아.”

“그건 그런데…….”

“어른이라도 다 아는 것도 아니야. 어른이 뭐 별거야? 나이만 먹으면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건데.”

“……내년에 저도 스무 살이 되면, 누군가가 보기에는 어른으로 보일까요?”

“교복 입는 애들 눈에는 어른으로 보일걸?”




그 말에 그것도 맞는 소리라며 꺄르르 싱그럽게도 웃는 연화였다. 여주는 연화가 입고 있는 환자복을 매만지며 아픈 곳이나 다친 곳은 없냐 물었고, 연화는 너무 튼튼해서 탈이라며 능글맞게도 대꾸했다.




“아, 그렇지. 저한테 칩 심어주신 분이요. 문태일이라구, 1팀 닥터라고 하던데. 맞아요?”

“응.”

“1팀이면 언니네 팀인 거죠?”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칩을 심었으니 괜찮겠다 생각해 여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화는 꺄아- 작게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왜 비명을 지르지? 여주가 의아한 눈초리로 연화를 쳐다봤다. 연화는 주먹 쥔 손으로 여주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툭툭 때리며 말했다.




“엄청 귀엽게 생겼어요!”




아- 그런 이유. 그런 이유라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공감이 간다. 태일이는 귀여우니까.




“성격도 귀여워, 태일이.”

“그 왜- 우리 구해주셨던 분들도 다 같은 팀인 거죠? 몇 명은 TV에서 봤어요.”

“맞아. 그때 우리 팀만 나갔던 임무니까, 네가 본 애들은 전부 우리 애들일 거야.”

“진짜 죽여주던데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퍼펙트.”

“그 센터장에 그 직원이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맞지?”




여주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빠르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던 연화가 콧등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 혹한 것도 있어요. 센티넬들이 다들 잘생겼더라고.”

“아니지. 센티넬들이라고 다 잘생긴 건 아니야. 우리 애들이 잘생긴 거지.”

“맞아요,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센터 물이 길바닥보단 훨씬 나아요.”




길거리는 완전 수산시장이라고요. 그렇게 덧붙이는 말에 여주가 하하!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연화는 그런 여주에게 승리자의 비웃음인 거냐며 장난스러운 어투로 장난을 걸어왔다. 그 말에 더욱 크게 웃어 재끼던 여주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연화를 쳐다봤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움찔거린 연화가 왜 그러냐며 물어왔다.


여주는 그런 연화를 찬찬히 살폈다. A급 가이드. 열아홉. 센터가 아닌 밖에서 생활하고 있고, 평가를 할 생각은 아니지만 참 귀엽게 생겨서 성격도 붙임성 많고 호탕했다. 누가 봐도, 어느 모로 봐도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아이.




“너 남자친구 있니?”




여주의 연애 상담 2부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텐은 넓은 센터 부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본부장인 텐이 왜 한국 센터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냐면,


누나 태일이 형 연구실에서 아까 나갔다는데, 회의실에도 없어요?


팔자에도 없던 미아 찾기 때문이었다. 아니, 미아 찾기가 아닌 숨바꼭질이라든가, 추격전이라든가. 아무튼, 텐은 여주를 찾기 위해 나와 있었다. 연락을 하고 싶어도 여주에겐 핸드폰이 없었다.


회의실에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여주는 기분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한 짓이 있으니 갑자기 기분이 상해 숨어있을 가능성도 있다. 기다릴까, 아니면 찾아볼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죄를 지은 장본인인 두 사람이 직접 발로 뛰어 찾아다니기로 했다.




>문화 존에는 없어요. 아무도 못 봤대요. *0010




지성에게서 온 메시지에 인상을 팍 쓴 텐이 한숨을 짧게 내쉬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대체 연락도 없이 어딜 간 건지, 도통 보이지를 않았다. 혹시 몰라 회의실이나 숙소로 돌아간 건가 싶어 1팀 팀원들에게 연락을 해봤더니 아직 안 왔단다.


갈 곳도 별로 없을 텐데, 이번엔 또 어딜 간 거야.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변을 둘러보던 텐이 자리에 멈춰섰다.


저 멀리 병동으로 향하는 길목 벤치. 그곳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여자. 한 명은 환자복을 입고 있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그 옆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은 텐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형체였다.


허.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쟤는 저기서 처음 보는 애랑 뭘 하고 있는 거야.’ 의 뜻이 담긴 짧은 헛웃음을 친 텐이 통화를 연결하며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누나 찾았어요?]




짧은 수신음 끝에 들려온 목소리는 지성이었다. 여보세요, 라든가 네, 하는 예의상의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이었다. 급한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지성에게서 예의라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던 텐은 별다른 말 없이 용건을 전달했다.




“병동 앞.”

[…무슨 병동 앞?]

“가이드 병동. 길가에 있는 벤치.”

[알았어요, 금방 가요.]




짧은 통화를 끝낸 텐의 걸음이 병동으로 향했다. 이곳은 가이드 전용 병동으로 시설이 좋기로는 유명했다. 다만 가이드의 절대 수가 적고, 부상을 입을 법한 현장에는 가이드들이 잘 나가지 않아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곳이기도 하다.


언제나 텅텅 비어있기만 했던 곳이 지금은 만석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 임무에서 구출해온 가이드들을 전부 가이드 병동에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책이라도 하는 듯 길가에서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이들도 많았다. 외국인도 많았고.


남의 나라 센터 안에 이렇게 많은 타국의 가이드가 돌아다니는 건 또 처음 보는 광경이네. 속으로 생각하며 여주와 이름 모를 누군가가 앉아 있는 벤치로 걸어가는 텐이었다.


무표정하던 텐의 고운 얼굴이 구겨졌다. 자신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질을 하는 여주와 그런 여주의 손가락질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자신을 쳐다보는 이름 모를 환자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또. 몰려오는 두통에 제 이마를 느리게 문지르던 텐은 점차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표정이 잘 보였는데, 여주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고, 여주의 뒤에 숨어 어깨너머로 눈만 빼꼼 내밀고 있는 사람은 두 볼이 발그레했다.




“테엔- 왔어?”




여주의 앞에 우뚝 멈춰선 텐이 자신을 반갑게도 맞이하는 모습을 보며 눈을 꾹 감았다.




“여주야.”

“응?”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수다 떨었지.”




그 말에 여전히 여주의 뒤에 숨어있는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텐이 물었다.




“누군데.”

“아, 이쪽은 연화야. 함연화, 열아홉 살이고 A급 가이드.”

“구조자?”

“응. 현장에서 도움도 좀 받았었어. 연화야, 너도 인사해. 얘가 텐.”




쭈뼛쭈뼛 여주의 뒤에서 나온 연화가 수줍은 얼굴을 해서는 “안냐세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예.” 짧게 대꾸한 텐의 시선이 다시 여주에게 향했다.




“목석이야, 뭐야? 좀 친절하게 좀 대해라!”


“내가 왜.”

“하여튼, 싹바가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어나.”

“어?”

“너 연락도 안 돼서 다 걱정 중이야. 가봐야지.”

“아.”




얼빠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 여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나 멈칫했다. 길목 끝에서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지성을 발견한 덕이었다. 여주는 한쪽 팔을 길게 뻗어 붕붕 흔들며 목을 뒤로 살짝 뺐다.




“연화야, 연화야. 애기 부팀장 알지? 쟤가 걔야. 지성이.”

“꺅.”




여주가 음흉하게 웃었고, 연화는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고 깜찍한 단말마를 내뱉었다. 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야, 이거? 여주는 그런 텐을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치다 순식간에 제 앞으로 달려온 지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엄청 빠르네. 안 힘드냐.”

“네.”




숨도 한 번 안 고르고 대답하는 지성이었다. 어떻게 저기서 여기까지 순식간에 달려왔는데 숨이 안 찰 수가 있지? 연화는 여주의 뒤로 슬금슬금 숨으며 소리 없이 감탄했다.




“누나 여기서 뭐 해요? 어디 아파서 온 거예요?”

“아이, 아니야- 연화 만나서 얘기 좀 하느라 잠깐 온 거야.”


“연화… 그게 누군데? 그런 사람이 센터에 있어?”

“어, 지금 내 뒤에 있어.”




여주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지성이 그제야 연화를 발견하고는 “아,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건넸다.




“두 사람은 저번에 봤었다며. 연화가 그러던데.”




저번에? 미간을 좁히고 다시 연화를 쳐다보던 지성은 한 박자 느리게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변호사 지망생.”

“어? 그건 어떻게 알았어?”

“자기 입으로 말해주던데요.”




여주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제 뒤에 숨을 연화를 쳐다봤다. 연화는 여주의 시선에 그럴 일이 좀 있었다며 얼버무렸다. 지성은 그 말에 픽 웃었고, 텐은 심드렁한 표정을 해서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여주는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물었다.




“애들이 걱정 많이 해?”

“많이는 안 하는데, 조금은 하죠. 이제 점심도 먹을 시간이라 누나 밥 먹여야 하니까.”

“아, 그렇지. 점심은 뭐 먹을래?”


“누나 좋아하는 거로요. 아, 점심이니까 칼국수도 괜찮을 것 같아요. 수제비나.”

“으음. 그럼 텐, 너는?”


“몰라. 일어나기나 해.”




입술을 삐죽거린 여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서 두 사람을 마주한 채 지긋한 시선을 보내던 여주는 자신을 따라 벤치에서 일어난 연화에서 속닥거렸다.




“내 말이 맞지?”

“네.”




단번에 튀어나오는 대답에 흐흥, 하며 웃은 여주가 연화의 등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중에 또 놀러 올게. 몇 호라고?”

“501호요.”

“알았어, 501호. 먼저 간다. 밥 잘 챙겨 먹고.”

“네!”




마지막으로 연화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은 여주가 제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사이를 쑥- 하고 빠져나갔다. 텐과 지성은 연화에게 고갯짓으로 짧게 인사를 해주고 여주를 따라가려다,




“진짜 골라 먹는 재미가 있겠네.”




뒤에서 들려오는 그 말에 다시 뒤를 돌아볼 수밖에는 없었다.




“뭘 봐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언제 그렇게 부끄러워 했냐는 듯이 까칠하게 대답하는 연화에 말문이 턱 막혔지만. 연화는 자신을 보는 두 사람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여 주곤 몸을 빙글 돌려 병동으로 향했다. 지성은 그런 연화를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심이었나…?”




그 중얼거림에 텐이 “뭐가.” 하고 물으며 지성을 쳐다봤다. 지성은 그와 시선을 맞대고 아침에 자신이 들었던 그 충격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려다 저 앞에서 “빨리 안 와?!!” 하며 소리를 치는 여주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적거렸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요. 누나, 같이 가!”




텐은 피곤함에 젖은 숨을 길게 내뱉다 느지막하게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빨리 좀 걸으라며 재촉하는 여주의 호통에도 아랑곳없이, 느릿느릿.











제가 다음주... 늦으면 주말? 까지는 못 올 것 같습니다!

딱히 큰 일은 아니구용.. 할머니를 뵈러 큰 집에 내려간 김에 김장도 하고(따흑ㅠ) 부산에 있는 큰고모네 집도 들렀다가 올 거라... 집에 도착하는 건 월요일인데 김장 골병으로 화수는... 저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ㅠ 목까지 넉넉하게 쉰다치면 바로 금요일이니까...


김장 휴무 공지를 사족에 적는게 저도 좀... 이 상황이 웃기긴 한데...ㅋㅋㅋㅋㅋㅋㅠㅠㅠ

그래도 혹시나 기다려주실 분이 계실까봐 알립니다..

저 김장하러 가용...😂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김장은 중요하죠...

김장은.... 김장은 중요하지...

우리집의 1년을 책임져줄 김치니까 정성스레 김장하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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