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드라캡 X 토니

* 시크릿 엠파이어 이벤트에서 하캡의 시도가 성공하고 하이드라 세상으로 변했다는 가정의 이야기










토니의 방은 펜트하우스 2층의 한 구역을 전부 사용해서 침실과 욕실, 간이 연구실과 개인 거실이 있었다. 그곳은 소품은 물론 가구 위치 하나도 빠짐없이 토니가 사용하던 때와 똑같이 구현되어 있었는데 딱 두 가지, 다른 게 있었다.

하나는 텅 비어있는 연구실이었고, 남은 하나는 감시카메라의 존재였다. 카메라는 침실과 욕실을 제외하고 사각지대 없이 구석구석 달려있었다. 

없다고 생각한 침실과 욕실도 어쩌면 눈치 채지 못할 곳에 은밀히 설치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의심은 과해도 충분하지 않다. 토니는 방과 욕실을 말 그대로 뒤엎었다. 매트리스를 들추고 소품을 깨뜨리고 가구를 움직여가며 갖은 곳을 뒤졌다. 하지만 나온 건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적어도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주겠다는 것인지. 토니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질서를 우선시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통제를 전제로 깔고 있는 사회에서 프라이버시란 게 의미가 있나 싶다. 기만도 이런 기만이 없었다. 토니는 손에 들고 있던 간접조명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조명의 유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목에 달린 초커를 제외하고는 토니의 행동을 제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토니의 방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2층의 복도부터는 황량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장식품도 가구도, 정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2층 구역의 작은 방들도 마찬가지였다. 텅 비었다. 그 모든 곳에는 유일하게 감시카메라만이 불빛을 빛내고 있었다.

토니는 아무 것도 없는 2층의 복도를 지나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엔 어벤져스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곤 하던 공용 거실이 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비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어벤져스 맨션에서 들고 왔던 초대 멤버의 초상화도 열 명이 두루 앉아도 충분했던 가죽 소파도 벽 한 면에 걸려있던 120인치 텔레비전도 없었다. 화분도 없었다. 그저 빈 공간이었다. 보고 있으면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토니의 방이 기억 속의 것과 다름이 없어서 더 그랬다. 꼭 과분한 꿈을 꿨던 것이라고 채찍질당하는 기분이었다. 토니는 고개를 들어 1층에 존재하는 감시카메라의 위치도 확인했다. 누가 실시간으로 보고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방이 카메라가 무더기였다. 그런 주제에 토니를 직접 감시하는 인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사람이라고는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선 두 명의 하이드라 병사가 전부였다.

토니의 펜트하우스는 전용 엘리베이터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게 유일한 출구였다. 엘리베이터는 거주지인 펜트하우스와 토니가 사무실로 사용하던 층—펜트하우스의 바로 아래였다—과 로비로 이어지는 1층, 그리고 메인 연구실로 사용하는 지하 1층과 전용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지하 4층, 옥상에만 섰다. 

엘리베이터 옆에 선 하이드라의 병사는 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토니의 기척을 눈치 챘을 텐데도 토니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토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단 두 명이었다. 겨우 두 명이었다. 아무리 총을 들고 있다 한들 스티브 같은 슈퍼 솔져가 아닌 이상에야 저 병사들은 토니에게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건 직접 호신술을 가르쳐줬던 스티브가 더 잘 알 것이었다. 그럼에도 저 둘만이 이곳을 지키고 서 있다는 건, 저들의 용도가 토니를 제지할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토니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곧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토니는 병사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다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때까지도 하이드라 병사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보고하는 행동조차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토니는 1층 버튼을 눌렀다. 눌리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지하 1층을 눌렀다. 마찬가지였다. 지하 4층, 옥상 역시 눌리지 않았다. 이젠 사무실을 제외하고 더 누를 수 있는 층은 없었다. 토니는 사무실이 있는 바로 아래층의 버튼을 눌렀다. 버튼에 불이 들어오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얼마 안 가 엘리베이터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도착 음이 들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정면으로 보이는 책상에 스티브가 앉아 있었다.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를 읽었다. 스티브가 앉아 있는 양 옆으로 하이드라 병사들이 전시물 마냥 여럿 나란히 서 있다. 토니는 펜트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옆에 선 하이드라 병사 둘 사이를 스쳐 지나 스티브에게 다가갔다. 스티브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을 텐데도 토니가 가까이 다가와 그 자리에 설 때까지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배고파.”

가까이 다가간 토니가 툭 내뱉었다. 스티브가 웃었다. 그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놓고 손목시계를 봤다.

“그래. 식사를 할 시간이긴 하군.”

스티브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헤일 하이드라! 그의 주위로 나란히 서 있던 병사 중 하나가 구호를 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토니는 그가 나가는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손잡이를 돌리면 열리는 문. 그 문 너머로 보이는 긴 복도. 그 복도 끝의 엘리베이터. 토니가 기억하는 구조와 똑같았다.

“자리에 앉게나, 토니. 음식이 곧 올 거야.”

스티브가 사무실 가운데에 놓아둔 소파를 가리켰다. 하이드라 개새끼와 마주 앉아 밥이 넘어가겠느냐는 빈정거림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토니는 애써 욕구를 씹어 삼켰다. 

의자에서 일어난 스티브가 먼저 소파에 앉았다. 그는 탁자에 있던 커피포트를 기울여 머그컵에 커피를 담고 자신의 맞은 편 탁자에 올렸다. 커피의 고소한 향이 토니의 코끝을 자극했다. 다른 컵에 새 것을 따른 스티브가 그를 들고 한 입 마신 뒤 컵을 탁자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아직도 서 있는 토니를 담은 푸른 눈동자가 휘었다. 토니는 거칠게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털썩, 스티브의 맞은편에 앉았다. 앞에 놓인 머그컵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  올랐다.

“마셔도 돼. 독은 없어.”

“그렇겠지.”

그렇게 쉽게 죽일 거면 애초에 전리품으로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마주 앉아 티타임을 즐길 기분도 아니었다.

“독재자가 된 기분이 어때?”

“지도자라고 표현해 줬으면 좋겠군, 토니.”

“손으로 하늘을 가리라고 해. 자네가 지도자라는 걸 인정하느니 그게 더 쉽겠군.”

“토니.”

스티브의 입매가 아래로 살짝 내려갔다. 아, 저 못마땅한 표정. 여전히 존재하는 저런 사소한 습관들이 토니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는 여전히 스티브였다. 빌어먹게도 그랬다. 토니는 속이 쓰렸다. 그는 영웅이었다. 모두의 귀감이 되는 영웅. 고결한 절대 선의 등대이자 지침이었다. 그는 결코 하이드라 따위가 아니었다.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토니는 제발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자네로 돌아오라며 소리치고 싶었다. 자네가 정말로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지 않느냐고 호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토니는 동시에 그가 신념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그 신념이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 신념이란 게 하필 하이드라라는 것에 웃음이 나왔지만 어쨌든 그게 지금 스티브가 가진 신념이라면 그는 결코 굽히지 않을 것이었다.

“세상의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좋나? 그런 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네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랬지.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올바른 지도자를 필요로 했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이 자격이 없다면,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내가 더 그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게 내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자격은 국민이 주는 거야. 스스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정당성을 피력하고 싶었다면 선거에 나갔어야지.”

“그런 안이함이 세상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거라네. 때론 강인한 지도자가 필요할 때가 있어.”

토니가 배를 쥐고 폭소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티브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그걸 독재라고 불러, 스티브.”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나. 하이드라의 무엇이 그를 이리도 매료시켰나. 토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었나?”

설령 정말로 원래의 역사가 하이드라를 위한 역사였고, 스티브가 배우고 받아들인 것이 하이드라 사상이었다고 해도 스티브는 스티브였다. 그가 비판적 시각 없이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을리 없었다. 토니가 아는 스티븐 로저스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만큼 어려운 길을 택하는 이도 없었다. 그만큼 옳은 길을 걷기 위해 타협을 하지 않는 이도 없었다.

“의문은 언제나 존재했어. 하지만 그 수많은 의문들, 고민들. 그 모든 것들을 거쳐서 내린 결론 또한 마찬가지였네. 답은 하이드라에 있어. 그것만이 이 미쳐버리고 어리석은 세상을 끝낼 수 있지. 자네 역시 다른 히어로들을 만나지 않았나. 그들의 표정이 어땠지? 그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던가?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하이드라를 따르고 있네. 세상 사람들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아. 질서 속에서 그들은 행복을 얻었지. 범죄도 현저히 줄었어. 이제는 모두가 하이드라의 사상 아래서 행복한 미래가 이어지길 기대하며 다 같이 질서에 동참하고 있네.”

“질서라. 내가 질서를 내세웠을 때,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자유를 침해한다며 나를 몰아세웠어.”

“그때의 나는 어리석었지. 그래서 죽음을 맞이했고.”

토니가 몸을 움찔거렸다. 스티브의 죽음은 설령 기억이 없어도 토니에게 너무 가혹한 결과였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자네가 말했던 그 질서를 이해해.”

“제기랄!”

그따위 이해는 받고 싶지 않았다. 토니는 진심으로 스티브가 그때의 자신을 여전히 탓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스티브였다. 급진적인 질서, 강압적인 질서를 질서라 여기지 않았다. 그는 생명체가 가진 선함을 믿었고 그들이 가지는 자유의 가치를 숭고하게 여겼다.

“자네는 이제 인간을 믿지 않는군.”

“지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믿어. 난 오히려 자네가 의외로군. 믿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내가 세운 질서를 부정할 수 있지?”

“난 미래를 알아, 스티브. 그러니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궁극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방향의 미래를 보려고 모든 걸 통제하려고 해.”

미래를 읽는 미래주의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를 고결하게 여김과 동시에 ‘읽히기 때문에’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긴다. 갈래가 있으면 있는 만큼, 모든 길을 예측하며 그 결과에 따른 대응을 고민하고 실행한다. 그러니 통제 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토니는 그런 것을 수단으로 사용하되, 그렇다고 그것이 옳다고 온전히 긍정하진 않았다.

“선한 의도. 좋지. 하지만 그게 모든 이유를 정당화시켜주진 않아.”

“그게 자네가 가진 모순이로군. 다 알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아. 그러면서 있을 수밖에 없는 희생을 막으려 발악을 하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 텐데도 포기를 못해.”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과오들이 토니의 뇌리를 스쳤다.

“그 과정에서 자네가 희생한 것들, 자네가 희생시킨 것들이 가치가 있었다고 보나?”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거로군. 이거 보게, 토니.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 역시 올바른 결과를 위해 움직이고 있네. 그 과정에서 희생은 불가피하지. 그걸 인정하기로 했어. 그리고 난 그걸 후회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려 해. 이런 나와 자네가 뭐가 그리 다르지? 글쎄. 내 생각에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런데 정작 자네는 이런 날 부정하는군.”

“왜냐면, 자네가 하고자 하는 건 결코 건강한 질서가 아니니까. 그거야말로 통제고, 억압이야. 미래를 단순화시키고 가능성을 죽여. 그러니 자네는 지도자가 아닌 거야.”

그게 내가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이유인 거고. 토니는 속으로 자조했다.

“그래서 자네가 구시대의 산물인거야, 토니. 더 좋은 길을, 올바른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얽매이는 게 많아 나아가지 못하지. 과감해져야 할 때는 과감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망설여.”

“…….”

“하지만 난 그래서 자네를 좋아하네. 그게 자네가 선하다는 증거거든. 끝까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으려 하는 꼴이 우습고 어리석지만 가여워.”

———익애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가까이 다가온 스티브가 토니의 턱을 쥐고 속삭였다. 토니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스티브가 풍기는 분위기를 토니는 모를 수가 없었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스티브의 입술이 멈췄다. 그 입술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의 혀가 얼마나 뜨겁고 젖어있는지, 그의 호흡이 얼마나 단지 알아버린 토니는 그걸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눈꺼풀이 떨리고 입에 침이 고였다. 토니는 행여 매달리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식사를 가지러 사라졌던 하이드라의 병사가 스티브의 허락을 받아 들어왔다. 스티브는 토니에게서 떨어져 다시 맞은편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하이드라 병사는 샌드위치가 올려 진 쟁반을 탁자에 놓고 물러갔다. 4번가의 샌드위치. 토니와 스티브가 종종 함께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자네는 칠리소스가 들어간 걸 좋아했었지?”

먹기 좋게 포장을 푼 스티브가 토니에게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토니는 말없이 내밀어진 샌드위치를 응시했다. 오래 들고 있어서 팔이 저려올 법도 한데도 스티브는 재촉도 짜증도 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음식을 거부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여차할 때 제대로 힘을 못 써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토니가 샌드위치를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토니의 손이 닿기 전에 스티브가 팔을 뒤로 뺐다.

“먹으라면서?”

“입.”

스티브가 단호하게 말했다. 토니의 얼굴이 붉었다 새하얘졌다. 지금 스티브는 토니에게 입으로 음식을 받아먹으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토니는 극심한 수치를 느꼈다. 어차피 지금 당장 뭘 안 먹는다고 큰일 날 일은 없었다. 토니는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려고 했다.

“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티브가 왼손을 들어 리모컨을 보였다. 토니는 경악에 찬 시선으로 그걸 확인하고 자신의 목에 걸린 초커를 떨리는 손끝으로 매만졌다.

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는 게 너무 없었으니까.

토니는 이를 악 물고 어떻게든 일어서던가, 스티브에게 한 대 주먹을 날리던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뜻대로 이뤄지진 않았다. 아무리 움직이려 애써도 토니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꽉 깨문 입술 위로 샌드위치가 닿았다. 토니가 눈을 부릅뜨고 스티브를 노려봤다. 노기를 띈 짙고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는 스티브의 맑고 푸른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자, 토니.”

토니가 욕을 짓씹었다. 그는 계속해서 버티려다 어떻게 해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결국 입을 벌렸다. 스티브가 샌드위치를 쥔 손을 더 밀었다. 한입 베어 문 샌드위치는 기억 속의 맛 그대로였지만 그때처럼 맛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뱉지말고 씹어.”

눈치도 빠르군, 그래. 어쨌든 입으로 받았으니 된 거 아니냐고 하려던 토니는 결국 입에 들어온 샌드위치를 씹었다. 지금 이렇게 씹고 있는 건 샌드위치가 아니라 함께 웃으며 샌드위치를 먹던 그날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토니는 입에 든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씹어 억지로 삼켰다. 체할 것 같았다. 음식이 목을 넘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만족한 것인지 스티브는 토니의 후들거리는 손에 나머지를 쥐여 주고 제한을 해제했다. 부들거리던 몸에 갑자기 힘이 제대로 들어가면서 토니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며 탁자에 세게 부딪혔다. 토니의 입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지켜보던 스티브가 하이드라 병사를 시켜 구급상자를 가지고 오게 했다. 그는 구급상자에서 연고를 꺼내고 탁자에 부딪힌 토니의 팔을 잡았다. 토니는 이번에야말로 그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치욕스러웠다. 어디든 스티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틀어박히고 싶었다. 펜트하우스의 침실로 향하면서 토니는 목의 초커를 손톱이 으스러져라 긁었다. 이게 팔목이나 발목에 걸려 있었다면 손가락을 자르든 발뒤꿈치를 자르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빼내었을 것인데. 

스티브가 방금 토니에게 한 건 친구가 하는 장난도 하물며 애정을 가지고 한 행위도 아니었다. 그건 그저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 굴욕을 주기 위한 행위였다.

토니는 뜨거워진 눈가를 억지로 잠재우려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정말 그런 때도 있었다. 끼니를 거르기 십상인 토니에게 뭐라도 먹이려 스티브가 직접 토니에게 음식을 입에 넣어주던 때도 있었다. 그게 좋아서 일부러 더 걱정시키곤 했었다. 그가 보여주는 그런 작은 애정들이, 우정에 기반 한 것이든 무엇이든 토니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곤 했다.

스티브는 그런 찬란한 기억들을 짓이겼다. 그는 토니가 가진 과거를 구기고 부쉈다. 꼭 토니의 머릿 속에서 과거의 자신을 지우려는 것처럼. 어쩌면 그게 목적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습다. 그가 말하는 거짓 세상 속에 토니만 홀로 남겨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침실의 문을 연 토니는 그대로 굳었다. 감시 카메라를 찾겠다고 난동을 피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침실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스티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따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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