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그린은 드물게 한가롭다. 그간 가졌던 피나는 트레이닝의 순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듯, 상록체육관 소속 단원들의 폼이 상승세기 때문이었다. 가장 불안했던 새내기 단원들의 수준들도 올라갔기에, 관장전까지 오는 도전자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어지간한 도전자들은 수석단원의 선에서 끝나기도 하기에, 요즘 도전자들의 수준이 낮아진것인가 싶어 진지하게 걱정한게 엊그제 일이다.


 덕분에 그간 살인적으로 느껴졌던 스케쥴이 안정적으로 줄어들고, 쉴 틈이라는게 생기게 되었다. 쌓였던 업무들을 처리하고 아직 덜식은 커피를 홀짝이고서야, 그린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는 그린은, 늘 다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는게 대부분이었지만 오늘 마신 커피가 식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엄청난것은 따로 있었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업무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 내가 꿈을 꾸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느긋한 오후의 햇빛을 제정신으로 보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밀려오는 감동에 그린이 시큰해져오는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청승맞게 이런걸로 울면 안된다. 이 얼마나 현대의 노예근성 직장인 같은 반응이야. 이 악물고 눈물을 참던 그린의 서재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관장님? 오박사님 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할아버지가?”




 왜지? 지금 진행중인 연구에 새로운 이슈가 생겼나? 최근 오박사 연구소에서 진행중인 연구는 바다건너 호연지방과 공동으로 연구하고 있는 복합타입의 유전적 발생학 원인이었다. 칼로스에서 유전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린을 필두로 진행중인 연구였다. 복합타입이면 아무래도 서식지와 생태계에 영향을 많이 받을테니 호연의 연구소와 협업중이었다. 하지만 오늘 업무 메일에는 그런 메일을 받지 못했는데?


 괜히 이유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호출 하나로 연구소까지 이동하기 싫었다. 상록에서 태초마을까지 거리가 그렇게 먼 것도 아니었지만, 아직 형식상으로 퇴근시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외출증을 끊고 나가자니 단원들의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다. 꽤 오랫동안 오박사와 함께 연구를 한 그린은 촉이 발달해 있었다. 분명 이 연락은 호출일거야. 생각없이 받았다간 바로 연구소로 튀어오라 하겠지. 뚱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린이 넌지시 말 했다.




 “호출이야? 연구소로 오래?”

 “네, 그러신 것 같아요. 급한일이 생기셨다고….”

 “어후, 또 그 소리야? 됐어, 나 없다고 해.”

 “네,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오박사님. 관장님이 지금 안 계셔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단원이 서재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린의 폰으로 오박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가볍게 무시하며, 포튜브를 켠 그린이 의미없지만 중독성이 강한 숏츠 영상들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영양가도 의미도 알맹이도 없지만 시간 버리기엔 최고다. 바로 지금처럼 연락을 무시할 때 말이다. 그 뒤로 두어번 더 울리던 폰이 꺼지고, 톡이 날아왔다. 안 읽고 씹어버린 그린의 메일함으로도 메일이 날아왔다. 그린은 그것도 확인하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오박사의 번호가 아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그린은 그것이 연구소 사람들 중 한명일 것이라 짐작했다. 저장이 안 된 번호인걸 보면, 이번에 새로 입학한 석사과정 연구원이겠지? 그것도 씹어버리자, 이번엔 체육관 관장 동료들에게서도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받을뻔 한 그린은 뇌에 힘을 주고 그것을 무시했다. 예전에 연락이 안되는 그린탓에 오박사가 웅의 폰으로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방금 걸려온 전화가 웅의 것이었고, 이번에 걸려온 전화는 이슬의 전화니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허, 내가 두번 속을 줄 알고?


 아예 휴대폰을 뒤집어버린 그린이 아직 따뜻한 커피를 홀짝였다. 이정도 여유로움이면 오늘은 정시 칼퇴근이 분명하다. 연말에 정시퇴근이라니. 믿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퇴근하면 은빛산에 틀어박혀있을 레드를 불러 이번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 저녁이나 먹으러 갈 계획을 세웠다. 만족감에 젖어 콧노래를 부르던 그린이 의자에 몸을 주욱 기대 누우려던 순간이었다. 




 -쾅쾅쾅




 "내가 못 살아! 역시 그냥 연락 씹은거지?! 너 진짜 죽을래?!?!!"




 너무 놀라서 커피를 키보드에 엎지를뻔했다. 가까스로 참사를 막아낸 그린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카랑카랑한 음성이 꾸짖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 자리한 창문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였고, 주인공은 잔뜩 화가난 표정으로 스완나를 탄 이슬이었다. 불끈 쥔 주먹으로 창문을 두들기는 모습은, 여차하면 창문을 깨버릴듯한 모습이었다. 벌써부터 수리비가 걱정된 그린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슬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진정하라는듯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간 그린이 창문을 열었다. 창문이 열리자 마자 이슬의 쌍욕이 날아왔다. 




 "연락이 다섯번 이상이면 좀 받아, 이 띨빡한 새끼야!!!!"

 "....가, 갑자기 왜 찾아온건데."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듯 씩씩거리던 이슬은 그린이 눈치를 보는것을 보고서야 화를 가라앉혔다. 




 "너 지금 바로 오박사님 연구소로 튀어가. 큰일 났으니까."

 "무슨 일?"

 "레드한테 생긴 일이니까, 잔말 말고 빨리 따라 와!!!"




 초조해보이는 표정으로 소리를 지른 이슬이 그것만 말 하곤 스완나와 함께 태초마을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멍하게 그걸 바라보던 그린은 귀에 맴도는 레드의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체육관을 나선 그린의 표정은 이슬이 그랬듯 초조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레드에게 무슨일이 생겼단걸 문 너머로 엿들은 단원들이 그린을 배웅해주었다. 


 피죤투를 타고 빠르게 태초마을로 향하는 그린의 손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




 "무슨일이야?!! 레드가 왜?!!"




 그린이 오박사 연구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오, 그린...! 드디어 왔구나...!!"

 "그린 너... 역시 일부러 연락 안 받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그린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레드를 찾았다. 아니, 네가 연락 씹었던 게 중요한 게 아니면 뭔데. 턱끝까지 차오른 말을 억누르며 이슬이 울부짖는 주먹을 잠재웠다. 그 순간, 안절부절 못하던 그린은 웅에게 찰싹 달라붙어있는 거대한 담요 덩어리를 발견했다. 익숙한 덩치에 그린의 시선이 그곳으로 꽂혔고, 그제서야 어딘가 낯빛이 붉어진 웅도 눈에 들어왔다. 




 ".....?"




 남편의 외도 현장을 목격한 아내와 같은 표정으로 그린이 손가락으로 담요덩어리를 가리키자, 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이게. 이게 지금 뭔 상황인데. 제정신이 돌아오면 침착하게 연구소를 다 깨부술듯이 그린의 눈빛은 어딘가 맛탱이가 가 있었다. 




 "오, 오해야. 오해."




 뭐야, 저 불륜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대사는. 


 새빨간 안색으로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는 웅을 보니 이상하게 더 열이 받았다. 담요로 둘둘 감싸져 머리로 추정되는 것이 비틀비틀 흔들리다가 웅의 어깨에 안착했다. 그것에 웅도 놀라서 눈이 번쩍 떠졌고, 그린은 피가 거꾸로 솟는 감각을 느꼈다. 너무 강한 충격에 순간 언어능력을 상실한 그린이 어버버 거리며 손에 1,500페이지짜리 어학사전을 집어 들었다. 이걸 관자놀이로 신속하게 가격하면, 사람하나 골로 보내는건 일도 아니다. 위험한 생각을 이어가던 중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그린이네? 언제 왔어?"




 제 2 연구실의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이수재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의외의 인물에 그린의 의식이 조금 돌아왔다. 근데, 얘가 왜 여기있어. 평소 블루시티의 자신의 연구실에만 틀어박혀있는 이수재를 그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나는건 처음이었기에 그린은 인지부조화를 적응하느라 살짝 굳어버렸다. 연구실에서 나온 이수재의 손에는 주사기가 들려있었다. 저건 또 뭔가 하던 순간 이수재는 웅에게 붙어있는 담요덩어리에게 다가갔다. 




 "레드? 잠깐 나 좀 봐봐. 응?"

 "..........."




 라텍스장갑을 낀 손으로 담요를 살짝 젖히자 그 틈 사이로 안색이 새빨갛게 익은 레드의 눈이 보였다. 푹 젖은 눈동자만 데굴 굴린 레드와 눈을 맞춘 이수재가 그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체혈 좀 해갈게. 잠시만 이쪽으로 좀 기대볼래?"




 웅에게 기대고 있던 레드는 눈만 느릿하게 꿈뻑이더니 몸을 이수재 쪽으로 기울이기 시작했다. 




 "옳지 옳지. 자, 금방 끝날거야."




 담요 속에서 꺼낸 팔뚝은 얼굴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팔 안쪽을 조심스럽게 알코올 솜으로 문지르던 이수재는 신속하게 바늘을 꽂아 피를 뽑아냈다. 따끔한 자극에 놀랐는지, 레드는 이수재에게 엉겨붙어왔다. 품 안을 파고들어오는 것에 계속 웃는 낯이던 이수재의 얼굴빛도 벌겋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보면서도 그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뭔 상황인데. 레드자식은 왜 갑자기 평소에 부리지도 않던 애교를 남들한테 부리고 있고, 이수재는 레드의 피를 왜 뽑아가는 건데. 애초에 레드의 상태도 이상했다. 어디 아픈가? 아파?? 아픈거야???


 아니, 시발. 아프면 아무한테나 달라 붙어서 응석부려도 되는거야? 내가 이렇게 앞에서 눈 시퍼렇게 뜨고있는데?




 "레드, 너 이리 와."




 열 받은듯 그린이 이수재에게 붙어있던 레드를 끌어당겼다. 그제서야 그린을 본 레드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린에게 몸을 기대어왔다. 품에 안긴 레드의 몸은 생각했던 것 보다 뜨거웠다. 그제서야 아차싶던 그린이 이수재에게 툭 쏘아 말했다. 지금 내가 기분이 아주 좆같거든? 연구소 걸레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거면 상황설명 좀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게 해줘야 할 거다. 




***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라 했을텐데, 이 돌팔이새끼. 내 말이 우스워?"

 "아니, 장난하는 게 아니라 진짜라고...!"




 억울함에 이수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억울해 보이는 표정에 거짓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린은 납득할 수 없었다. 




 "처음보는 야생열매 주워먹고 부작용으로 저지경이 되었다는, 개 뚱딴지 같은 소리를 나보고 믿으라고? 레드가 아무리 답답하게 굴고 맹한 구석이 있어도 그런 똥멍청이는 아니다. 사과해, 개자식아."

 "아니, 사실인걸 어떡해. 레드가 섭취한 그 열매도 지금 처음보는 종류의 개체라서, 레드가 멍청했다고 하기엔 좀..."

 "처음보는 걸 누가 냅다 주워먹어."

 "그렇게 말 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어... 일단, 레드 덕분에 새로운 발견이 일어났다는 것에 의의를 둬볼까, 우리?"




 몸에 좋지 않아 보이지만, 식물학계에서도 발표된 적 없는 열매거든! 신종이라니까? 완전 대발견이지...!




 "... 그래서 연구소가 이렇게 분주한거야?"

 "응..! 급하게 타지방에서 지원 오고있는 연구팀들도 있어! 관동 내의 대학원 박사이상 연구원들은 다 모여들고 있을걸...?"

 "참나, 지금 연구중인건 아무래도 이것때문에 뒷전으로 물러나겠네... 그래서, 부작용은 정확히 뭐야? 몸에 많이 안 좋아? 레드 상태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기존의 해독제들은 효과 없어?"




 품에 안긴 레드를 다독이며 그린이 물었다. 체혈한 레드의 피를 샘플관에 담던 이수재가 주절주절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응, 기존의 해독제들은 들지 않더라고. 그래서 지금 알로라의 약학연구소에서 샘플요청이 들어왔어. 이번에도 전국적으로 공동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 같아."

 "미치겠네."

 "그래도 증상이 죽을정도로 위독한건 아니라서 다행이지! 일단 지금까지 발견된 증상은, 고열을 비롯한 도파민수치 과다 분비. 혈압 수치 불균형으로 인한 잦은 빈혈... 그리고 과한 각성상태야."

 "각성상태? 몇날 며칠 잠 못자게 되는거야?"

 "그것도 그런데. 음.. 어후 말하기 민망하다."




 ? 뭐라는거야 미친놈이.




 "지랄하지 말고 빨리 말 해."




 그에 이수재가 주변을 둘러보며 답지않게 우물쭈물거렸다. 그의 시선과 맞닿았던 이슬과 웅의 표정도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고, 답답함에 그린의 표정이 험악해져갔다. 그 표정의 압박감을 못 이긴 이수재가 머뭇머뭇 답변을 이어갔다. 




 "그... 호르몬수치도 과하게 증가했는데, 진정제를 투여해도 어째선지 전혀 진정이 되지 않아...."

 "....?"




 뭐?




 "... PGAD(지속성성흥분장애) 증상을 보이고 있어."




***




 레드의 온몸을 담요로 똘똘 말아놓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몸에 열이 올라서 괴롭겠지만, 연구원이 가득 포진 된 이곳에서 성적 반응이 일어난 몸을 노출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구구절절한 이수재의 설명을 듣는 그린의 표정은 잔뜩 얼이 나가선 우주의 고양이가 되어있었다. 


 상태가 위험해진 레드를 처음 발견한건 이슬이었다. 레드를 보러 웅과 함께 은빛산 정상으로 향했다가 동굴 구석에서 끙끙거리던 레드를 발견한 것이다. 상황이 위독해 보이는 것에 깜짝 놀란 이슬이 레드의 상태를 살폈고, 레드는 원초적인 압박감에 허덕이고 있었다. 잔뜩 풀린 표정으로 이슬에게 손을 뻗으려던 레드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곤 몸을 웅크렸었다. 허공에서 꾸욱 쥔 주먹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독이는 가벼운 손길에도 움찔움찔 거리는 것에 의아함을 품던 이슬은 레드의 손이 자신에게 다가오다가 우뚝 굳어버린 것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레드는 이슬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제지하고 있었다. 다가오지 말라며 낮게 읊조리는 음성은 잔뜩 가라앉고 끈적했다. 점점 미묘하게 느껴지는 야릇한 색기를 인지한 이슬은 붉어진 낯으로 웅을 불러왔다. 그렇게 웅의 품에 안겨서 은빛산을 내려오게 된 것이다. 


 포켓몬 센터와 그 주변 대학병원까지 싹 돌아다녀 봤지만 원인은 불명이었다. 이리저리 장소를 옮기다가 레드의 상태 원인이 낯선 나무열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거기까지 알게되자 웅과 이슬은 열매 샘플을 들고 관동 최대 연구소인 오박사 연구소로 달려갔고, 현재 연구가 갑작스럽게 시작된 것이다. 문제의 열매는 여태껏 발견된 열매들과 궤를 달리하는 새로운 종자로 밝혀졌고, 그 성분을 조사하기 위해 연구소는 분주해졌다. 


 레드와 함께 열매를 섭취한 포켓몬들에게는 동일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걸 보니, 사람에게만 부작용을 일으키는 독성이 포함되어 있는걸로 추정 중인게 현재까지의 상황이었다. 상황이 어느정도 파악되고 연락을 시도했지만, 받지 않은 것은 그린이었고 말이다. 




 "역시 은빛산에는 위험한 게 많네, 그렇지...?"

 "....."




 이게 무슨 19금 에로 동인지 같은 상황이야. 


 머쓱한듯 설명을 마친 이수재가 연구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이수재가 들어가고 대신 나온 이름 모를 연구원이 그를 대신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음... 일단, 약물을 통한 모든 시도는 해봤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상태를 1시간 정도 관찰해 봤는데, 체내의 성적흥분상태가 분출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계속 이런상태면 레드씨만 고통스러..."

 "하고싶은 말이 뭐야."

 "...크흠,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설마.


 그린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석박사 통합과정 4년차를 밟고있는 이 연구원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극히 사무적인 톤으로 연구원의 말이 이어졌다. 




 "직접적인 행위로서 성적 흥분을 수시로 분출시켜주는 것입니다."

 "시발, 미친소리 하지 마."

 "연구소에서 현재 따로 방을 비우고 있..."

 "뭘 어떻게 할건데."

 "랩실 내의 소속 연구원들이 교대로 돌아가며 작업에 임할 것 입니다. 현재 도출된 실험 방법은, 음경을 통한 지속적인 마찰로써의..."

 "미친소리 하지 마....! 이 또라이 새끼들...!!! 레드는 인권도 없냐?!!??!"




 손에 들려진 실험계획표를 사방으로 집어던지며 그린이 분개했다. 미친 포르노 개발 연구소같은 짓이라며, 신랄하게 욕하는 것에 연구원의 표정에 주눅이 들어갔다. 그치만... 이 방법밖에 안 남았는데...




 "알로라의 약학연구소에서 해독제 샘플이 나오려면 아무리 짧아도 2주 정도는 걸립니다... 그 기간동안 이런상태로 버티시는건 레드씨라도 힘드실겁니다."

 "방법을 더 찾아보면 될 일이지. 지금 레드보고 이름도 모르는 연구원들한테 몸이나 대주라는거냐? 미친소리,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그럼 어떡합니까... 인력손실을 줄이려면 교대하는 방법밖엔... 앗."




 울적한 표정으로 구구절절 말을 이어가던 연구원의 눈에 반짝 빛이 들었다. 




 "그럼 그린씨가 샘플이 나올때까지 레드씨를 대신 봐주시는건 어떠십니까?"

 



?




 "제가 말씀드린 방법이 비인륜적이라는건 저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름도 모르는 다수의 연구원보단 오래 알고지낸 사이인 그린씨는 완전 세이프 아닙니까?"

 "그러네, 맞네."

 "이야, 역시 배운 분이셔서 말에 논리가 있네. 그래, 그린 네가 도와주면 되겠다."




 연구원의 말에 옆에서 팝콘을 뜯으며 구경하던 웅과 이슬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드물게 그린의 말문이 막혀버렸고, 어버버 거리던 순간 연구원이 말에 쐐기를 박았다. 




 "그린씨께서 못하시겠다면 레드씨는 연구소에서 맡겠습니다."




 그에 헉 하고 정신을 차린 그린이 세상 빨개진 얼굴로 왁 소리를 질렀다. 




 "...할, 게... 하면 되잖아....!"




***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활짝 웃은 연구원이 랩실 내에서 커다란 종이박스를 들고 나와 그린에게 안겨주었다. 




 "기술이 딸리시면 이 도구를 이용해주시면 됩니다. 매일 15시 경에 호르몬 검사를 위한 체혈을 하러 연구원이 파견갈테니, 엄수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린씨."

 "잘 됐다, 그린."

 "리그랑 상록체육관 단원들한테는 내가 말 해놓을게."




 그렇게 말 하며 웅과 이슬은 각자의 체육관으로 떠났고, 그린은 레드를 데리고 연구소를 나왔다. 언제 연락을 해 놓은건지 집은 텅 비어있었고, 테이블엔 그의 누나가 남긴 쪽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상황설명은 잘 들었고, 자신은 당분간 레드네 집에서 그의 어머님과 지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린은 강한 현타를 느꼈다.


 이게, 그... 이래도 되나...?




 "야..! 조심 좀...!"




 그린의 방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레드의 발걸음이 불안불안하게 내딛어졌다. 그린은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이건 뭐, 세상이 일 치루라고 독촉하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린이 부축하던 레드를 침대에 눕혔다. 담요를 끌어내리자 부푼 중심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린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시 시작하는 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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