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이야-”





출근하는 나재민의 얼굴빛이 환해. 아침 일찍부터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아침 인사까지 하는 재민이랑 다르게 이 비서의 두 눈에는 다크서클이 앉아있겠지. 피곤함과 어제 여주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그 죄책감에 잠을 조금 설쳤대.





“양심 없는 사람... 위선자...”





이 비서가 나재민에게 안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를 확 돌아보는 나재민 때문에 놀란 이 비서. 입을 바로 앙 다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겠지. 이 비서가 하는 말은 못 들었지만 반응 보니까 이 자식, 뒤에서 내 욕하고 있었구나? 바로 눈치챘겠지.





“이 비서. 결재할 거 들고 바로 들어와요.”





그래도 그냥 넘어가 주기로 해. 왜냐면 나재민 오늘 기분이 좋거든. 어제 재민이가 가고 어떻게 마무리를 했는지 보고 받고 결재 끝난 다음에 나가려고 하는데 재민이가 이 비서를 부르는 거지.





“그 새끼 연락처 있지. 여주씨 집 앞에 찾아왔던 놈.”


“네? 어떤... 아, 그 사채업자요?”


“어.”


“그때 얘기 다 하신 거 아닙니까?”





어제 여주의 얘기를 들으며 대답은 해주지만서도 표정이나 행동에서 큰 반응은 없던 나재민. 얼핏 보면 자기 일 아니니까 관심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겠지만 만약에 어제 이 비서가 옆에 있었다면 엄청 조마조마했을 거야.





나재민은 화가 나면 날수록 오히려 여유롭고 차분해지거든. 그 말은 나재민 어제 존나 빡쳤다는 소리야.





전에 사채업자가 여주네 집으로 찾아왔을 때, 그 다음날 나재민 사라진 이모 내외가 어디 있는지 찾아서 데려오라고 했었어. 그렇게 이모랑 이모부를 찾아서 사채업자들에게 옜다, 너희 돈 떼먹은 놈들 데려가라- 하며 던져주고 나재민이 분명히 얘기했었지.





‘내가 대가 없이 너희들을 도와주는 거라 착각하지 마.’





이모가 여주 도장 훔쳐서 보증인이 여주가 된 거였잖아. 나재민이 이모 내외를 찾아주면서 내던진 조건. 여주가 더 이상 이모네 때문에 피해 받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하고 처리하라고 그거 하나만 내걸었는데.





“연락해서 원금하고 이자까지 내가 다 계산한다고 해. 그리고 나한테 넘기라고.”







내가 씨발, 그렇게 어려운 거 시킨 것도 아닌데 그 쉬운 거 하나 똑바로 못하는 멍청한 새끼들.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내가 처리하고 관리 하는 게 낫지. 욕을 읊조리는 나재민.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이를 까득 물었고 곧 나재민의 페로몬이 전무실에 넓게 퍼졌어. 만약 앞에서 결재하던 사람이 이 비서가 아닌 알파였다면 온 몸이 베이는듯한 고통을 주는 페로몬에 5분도 못 버티고 쓰러졌을 거야.





베타라서 전무실에 위협적인 페로몬이 퍼졌는지도 모르는 이 비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물음표만 띄우는 거야. 김여주씨한테 어제 무슨 일 있었습니까? 하고 이 비서가 물으면 어제 자기 집에 온 여주. 그리고 지금도 집에서 자고 있을 모습이 떠올라서 씩 웃는 나재민.





“......”





그리고 이 비서는 그 웃음에 소름이 돋겠지.





“이 비서 그거 알아?”


“뭘 말입니까.”


“......아니다. 이 비서는 몰라도 돼.”


“네? 아니, 왜 말씀해 주시려다가 마세요.”


“이 비서가 여주씨에 대해 알 필요는 없잖아.”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거고... 그러다가 여주씨 얘기라는 말에 궁금함이 사라지겠지. 그런거면 저도 알고 싶지 않거든요. 속으로 생각하고 있어.





나재민은 이 비서에게 어제 씻고 나온 여주가 되게 말랑말랑 찹쌀떡 같았다고 인간 찹쌀떡 본 적 있냐고 자랑하려다가 입을 다문 거야. 나만 알고 있을 거야. 안 알려줄 거야. 여주를 생각하니 좀 전에 분노가 섞였던 페로몬이 수그러들고 기분 좋은 페로몬이 맴돌겠지.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난 거야.





“이 비서. 휴가 말고 아예 해외 지사로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


“놀러 가는 건 좋아도 일하러 가는 건 싫습니다.”


“......아쉽네.”





이 비서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시는건지, 속으로 생각하고 재민이는 이 비서의 단호한 거절에 아깝다며 혀를 차겠지.






* * *






“이 비서 지금 몇 시지?”


“이사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기 시계가 안 보이십니까? 시력에 문제가 생기신 거라면 바로 검진 예약을 잡고, 시계가 작아서 그러신 거라면 바로 큰 시계로 바꾸겠습니다. 이 비서가 웃는 얼굴과 다른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겠지. 계속 시계만 훔쳐보고 이 비서에게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하는 나재민.





“아무래도 저 시계가 고장 난 거 같아서 그래.”


“시계는 멀쩡합니다.”





아까 점심에 여주한테 연락이 왔는데 아무래도 어제 일 때문에 불안해서 오늘 오후 알바도 그냥 뺐다는 거야.





- 당분간 집에서 못 지내니까 간단하게 제 짐만 챙겨오고 싶은데, 저 혼자 가기 좀...





퇴근하시고 괜찮으시면 같이 가주실 수 있으세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데.








씨발 당연이 갈 수 있지 우리 여주가 부탁하는데 안 가겠니? 그래서 계속 시계만 쳐다보게 되는 거야.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나 하면서.





“이 비서.”


“10분 지나서 이제 세시 이 씹팔! 분입니다. 아직 퇴근하시려면 멀었어요.”


“.....일부러 악센트를 쎄게 말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십니다. 이사님.”





진짜 고용주만 아니었으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할 텐데. 이 비서 이를 악물고 애써 웃겠지. 재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닌 것 같지만 믿어줄게. 하더니 근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거지? 또 같은 말 반복하게 만들겠지.





그래서 이 비서가 그럼 오늘 좀 일찍 퇴근하시는 건 어떤가요? 묻는거야. 어차피 이 회사 나재민 집안 거니까 나중에 나재민이 물려받을 거잖아. 출퇴근 좀 해이하게 해도 상관없는 거 아니야? 그러면 또 여주가 일 내팽개치고 오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 하긴, 이 비서가 여주한테 나재민 회사에서 일 열심히 한다고 입 턴 것도 있잖아.





퇴근 시간까지 계속 저럴 것 같길래 한숨을 쉬던 이 비서가 밖으로 나가더니 곧이어 엄청나게 많은 보고서와 기획안을 가져와 나재민 책상 위에 던지듯이 올려놓겠지. 놀라서 커다래진 눈으로 이 비서를 쳐다보면





“그럼 제가 시간이 빨리 가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직 기한이 남은 일까지 모조리 싹싹 긁어모아서 가져온 거야.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금세 이사님이 기다리시던 퇴근 시간이 오겠죠. 왜냐면 이 비서도 이거 다 끝내놔야 프로젝트 끝나고 휴가 갔을 때 마음 편히 쉴 수 있으니까.






* * * 






이 비서 말대로 정신없이 결재를 하다 보니까 퇴근시간이 됐어. 이 비서. 나 먼저 갈게. 알아서 퇴근해. 회사에서 빠져나와 집까지 운전해서 가겠지. 그런데 그거 알지. 꼭 마음 급한 이런 날에 신호란 신호는 다 걸리는 거.





“하, 진짜...”





나재민 개빡쳐서 고개 뒤로 젖히고 입안으로 욕을 씹겠지. 신호 풀리자마자 바로 쌩- 하니 달려가. 아슬아슬하게 속도위반 안 걸릴 정도로 밟아서 도착한 집. 빠른 발걸음으로 올라간 재민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 오셨어요?”


“....와.”





기다리고 있던 여주가 현관 쪽으로 걸어오겠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여주의 페로몬이 바로 느껴졌어. 자기 집 안 곳곳에 맴돌고 있는 여주의 페로몬에 기분이 짜릿해.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여주가 마중 나오는 거? 오면서 계속 상상했지. 근데 그 상상들이 그렇게 막 순수한 상상은 아니었어. 집까지 오는 동안 아래가 몇 번이나 반쯤 부풀어 올랐었거든. 물론 상상했던 거랑은 다른 모습이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상상했던 거 다 저리 가라야. 나재민 지금 최고로 황홀하고 벅차올라.





나재민이 들어오자마자 여주에게도 느껴지는 나재민의 페로몬. 그 페로몬에 여주 지금 나재민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파악했겠지. 본인이 나재민에게 얼마큼의 영향을 주는지 전혀 모르는 여주는 그냥 돈 많은 금수저도 퇴근하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구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 그런 생각만 하는 거야.





“여주씨 아무래도 저 헬기를 사야 할 거 같아요.”


“갑자기 헬기를요?”


“집까지 오는 데 너무 오래 걸려요.”





신호 기다리는 것도 싫고. 퇴근하고 오자마자 허튼소리부터 하는 나재민에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겠지. 진짜 왜 이럴까. 고작 집까지 오는 길이 오래 걸린다고 헬기를 사겠다니, 정말 이해가 안가.





근데 나재민은 진심으로 고민하는 거야. 여기는 옥상에 헬기장이 없는데 이사를 가야 하나?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안 여주는 나재민 보고 진짜 미쳤냐고 폭풍 잔소리를 하는 거지.






* * *






그렇게 나재민과 함께 여주 집으로 갔겠지. 솔직히 가져올 짐들은 그렇게 많이 없었어. 그냥 그나마 멀쩡한 옷들과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놨던 통장과 비상금. 그리고 가족사진. 짐을 다 가방에 넣었지만 반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았어.





짐을 챙겨 나온 여주는 나재민의 차에 타고 나서 말하겠지. 오늘은 진짜로 호텔에서 자겠다고.





“왜요? 저희 집 별로예요?"


“네? 아뇨? 이사님 집 좋던데요?”


“좋아요? 그럼 여주씨 줄까요?”


“아, 뭘 줘요. 맨날 뭐 좋다 하면 다 주겠대.”


“진짜 다 줄 수 있으니까 그러죠. 말만 번지르르하는 놈들이랑 다르다고요.”





왜 내 진심을 몰라주지?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얘기하는 나재민. 그럼 여주가 그 마음 사양하겠다고 하는 거야.





“저희 집이 그 호텔보다 훨씬 더 좋을 텐데?”


“......”


“호텔이 좋은 거라면 여주씨 원하는 대로 바꿔줄게요. 침구도 식사도 다 호텔 느낌 나게. 호캉스 하러 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아, 뭘 또 바꾼다고 그래요. 이미 호텔보다 더 좋으면서.”


“그럼 내가 불편해요? 어제 내가 불편하게 했나?”


“아뇨. 그것도 아니에요. 집도 엄청 넓어서 불편할 것도 없던데요.”


“그럼 그냥 저희 집에 있어요. 왜 굳이 호텔을 간다고 해요.”


“......”





여주도 양심이 있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사 가기 전까지는 밖에서 지내야 하는데 어떻게 재민이네 집에서 지내. 그런 여주 생각과 다르게 재민이는 여주가 자기 집에서 아예 눌러 살았으면 좋겠는 거야.





“이사님한테 제가 계속 이렇게 받기만 하는 게 조금 그래요...”


“네? 저는 괜찮은데?”


“제 마음이 그렇다고요.”


“음......”





재민이 달리던 차를 잠시 세우겠지. 그러고서 몸을 살짝 틀어 여주를 보고서는 그럼 그렇게 하는 건 어때요? 하면서 얘기하겠지.





“제 집에서 지내면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놀라고 하는 건 여주씨도 싫을 거잖아요.”


“네. 그렇죠.”


“그런데 진짜로 집에서 여주씨가 할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정해진 요일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와서 집안일은 할 필요가 없었어. 밥도 거의 밖에서 사 먹거나 도우미 아주머니가 가끔씩 차려놓는 걸로 해결했으니까. 그럼 재민이가 여주에게 뭘 얘기할까?





“저 퇴근하고 올 때마다 오늘처럼 반겨줬으면 좋겠어요.”


“...겨우 그걸로 퉁 치자고요?”


“겨우 그거라뇨. 저 오늘 진짜 너무 좋아서 기절할 뻔했는데?”





예전에 한번 말했듯이 재민이는 누가 자기한테 손대는 것도 싫어하고 자기 공간에 타인이 있는 것도 안 좋아해. 그래서 나재민 집에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건 이 비서랑 도우미 아주머니뿐이야. 심지어 나재민 부모님도 집에 못 오게 해.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 하면 밖에서 만나거나 본인이 본집으로 찾아가지.





여주는 정말 그거면 되겠냐고 몇 번이고 되묻겠지. 아니. 진짜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싶은 거야. 혼자 지내니까 퇴근하고 집에 와도 외롭고 쓸쓸했는데 여주가 퇴근할 때마다 반겨주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또 여주가 마음 약해질만한 소리를 하는 나재민.





“.... 이사 갈 때까지만 좀 신세 질게요.”





결국 이번에도 여주가 졌어. 아- 우리 여주씨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라니까. 하지만 나는 여주씨의 그 점이 너무 좋아. 재민이는 속으로 큭큭 웃겠지. 여주에게는 방긋 웃으며 자기 집 쪽으로 핸들을 돌리는 나재민.





“네, 네. 그래요- 이사 갈 집은 제가 알아봐 줄게요-”







나재민이 진짜로 이사 갈 집을 알아봐 줄까? 아니. 그럴 생각 전혀 없겠지. 전부터 계속 어떻게 해야 여주를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 여주가 자기 집에 한 번 들어온 이상 절대 내보낼 수 없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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