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풍경은 가히 아름다웠다. 어색할 틈도 없이 빈 자리에 앉자 분주히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빙 둘러앉아 먹는 만찬은 오랜만이었다. 어제 방에 있던 사람들이 다 모인 듯 했다.




"rose, here"

(로즈, 여기야)




빵 한 조각에 잼을 바르는 도중에 그 애가 나왔다. 여윈 몸,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니 꽤나 어여쁜 인상이었다. 새삼 이곳에 오게 된 게 계시인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we would like to take you on a tour"

(관광시켜드리고 싶습니다)

"........"

"if you're okay"





옆에 앉은 여자가 조심스레 말했다. 몇몇이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는 게 보였다.



"Ahh, I make reservation, program"

(아, 관광투어 예약했어요)

"It start in our hotel"

(저희 호텔에서부터 진행해요)




음....그렇군. 프로그램 외 투어를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덧붙이는 말을 보니 추가 비용 없이 감사의 뜻으로 하겠다는 소리인 것 같아 마다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나는 가난한 졸업반 의대생일 뿐이니까. 예정보다 길어진 여행에 비용이 빠듯했다.






"rose, would you?"

(로즈, 네가 하겠니?)




묵묵히 식사를 하던 노파가 말했다. 여자가 잠깐 당황스러운 기색을 비췄지만 아이는 빵조각을 입에 잘라넣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어린 아이의 가이드를 받게 된 것이 멋쩍어 턱을 살짝 긁적였다.



눈이 마주치가 아이가 살짝 웃었다. 창백하던 어제와 달리 생기있는 얼굴 아래로 여전히 묶인 손수건이 보였다. 바짝 말랐는데도 걸고있네. 시니컬하게 생각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투어는 마을의 역사 등을 설명하고 체험하는 것들 위주였다. 프로그램 안에서는 그런 모양이었지만, 나는 로즈와 둘이 다니는 기행에 가까웠기에 둘러보고 싶은 것을 둘러보고, 궁금한 걸 물어보는 식이었다.


마을에서 직접 생산하는 치즈 몇 통과, 부모님께 드릴 와인을 한 병 샀다. 아침에도 그렇고 빵이 굉장히 맛있어서 빵도 사고 싶었지만, 돌아가기 전에 다 내 뱃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숙소에서 조금 먼 마켓까지 둘러봤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에는 마차를 빌려 타게 되었다. 로즈의 집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노파의 영향력이 큰 모양인지 우리가 묻기도 전에 같이 가자는 제안이 있었다. 한 것에 비해 지나치게 대접받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순한 사람들이 내 장기를 떼어가거나 하진 않겠지.





"Can you tell me your name?"

(이름 알려줄래요?)



우물쭈물대던 로즈가 불쑥 내게 말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멀미라도 하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디디라고 알려주자 작게 속삭이며 따라하는 게 보였다. 얼굴을 붉히는 게 귀여웠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서서히 지고 있는 노을의 색이 로즈의 머리색과 비슷하게 뒤섞였다.

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기 전 로즈의 얼굴이 궁금증으로 가득 찬 것을 보았다.




".....ae.."



로즈가 내 팔을 툭툭 쳤다. 다시 한 번 말해달라는 거였다.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로즈가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로즈는 가끔 나오는 감탄사같은 외국어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 하루종일 내 말을 종달새처럼 따라했다.




"예..쁘다고"

"meaning?"

(뜻은요?)




....모른척할까.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쳐다보는 통에 무시하고 넘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대충 아무렇게나 알려주면 되겠지.




"thanks"

(고맙다고)

"에...브다"




더듬더듬 비슷한 발음을 만들어 낸 로즈가 활짝 웃었다.




"에브다!"




.....아니면 내게 고맙다고 했거나.











자다가 번쩍 눈이 뜨였다. 언제 잠들었지 근데....


투어가 생각보다 고단했던 모양인지 씻고 잠깐 걸터앉아 있으려는 게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다. 꺾인 허리가 뻐근했다. 물이라도 마시고 와야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일층으로 향했다.




"......안 자나"




부엌 너머로 밝은 불이 비치길래 로비까지 나왔더니 로즈의 방이었다. 꽤나 늦은 시간인데..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새나라의 어린이지. 어린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가?



"......."

"...rose?"



그냥 돌아서려는데 언뜻 앓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분명 로즈의 목소리였다. 살며시 문을 열고 침상에 다가서니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로즈가 보였다.


멀쩡한 나도 이렇게 피곤한데 역시 무리했던걸까? 여자가 낮에 빨아놓은 마른 천을 황급히 물에 적셨다. 똑바로 돌려 눕혀보니 꽤나 오래 앓았던 모양인지 침상이 축축했다. 빠르게 작은 얼굴과 목덜미를 슥슥 닦아주었다.





"doc...."

(선생님...)

"가만히 있어"




다른 증상은 특별히 없는 것 같았다. 손금을 꾹꾹 누르는데도 딱히 어디가 아프다는 리액션이 없었다.


뭉친데도 없고.....방 한 켠에 걸린 옷더미에서 원피스 하나를 찾아 내밀었다. 뒤돌아 엉망이 된 옷더미를 정리하는 동안 로즈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났다.

일단 다시 자게 두고 아침에 경과를 살펴봐야겠다. 지금은 딱히 해줄 수 있는 조치가 없었다.

시내 병원에 데려가보던지..투어 비용을 아꼈으니 약값 정도는 도와줄 수 있으니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불을 끄고 나가려는데 로즈가 나를 붙잡았다.





"can yo stay with me..?"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어딘가 모르게 가여운 목소리였다. 불도..일부러 켜 놓은 건가? 어둠이 무섭다거나....

뭐,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럽긴 하지. 어차피 깬 거 재워놓고 올라가면 되지 않을까?



"close your eyes"

(눈 감아야지)




침상에 다가가 아이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안심한듯 갈아입은 옷가지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눈을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아이의 볼에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에브다.."




예쁘다. 내 마음의 소리를 대변하듯 로즈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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