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카이 王凱

호가 胡歌







- 작년에 쓴 일각영원 1편과 2편을 읽으셔야 이해가 가는 다음편입니다ㅠㅠ

   1편 : http://posty.pe/c631e4

   2편 : http://posty.pe/2ouzsk


- 年재 정말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













다음날 아침이 되자 호가의 상처들은 많이 가라앉았다. 약을 열심히 바른 덕에 금세 좋아졌다고 호가는 카이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

“네. 뭐예요?”

“내 방에서 물건들 몇 개만 가져와...줄래? 가져와도 될까?”


호가는 카이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기숙사에서요?”

“응. 저기... 그런데...”

“네.”

“내가, 여기, 더 있어도 괜찮겠어?”

“물론이죠. 있고 싶을 때까지 있어요.”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없는 건 도리어 카이 쪽이다. 잔뜩 상처입고 온 호가를 거기로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호가는 메모한 종이를 꺼내서 주면서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옷이나 이런 건 내가 눈치껏 챙겨올게요.”

“고...”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힘들지도 않구요.”

“그래도 고마워.”

“말 안해도 아니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상처로 아픈 곳들마저 다 치유될 것 같은 상냥함이 오히려 호가를 울컥하게 했다.


“카이.”

“네.”

“사실은 말이야.”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한참이나 망설였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면 그건 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렵지만 운을 뗐다. 그래도 역시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카이는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다.


“실은 저도 할 말이 있는데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무슨?”

“솔직히 말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난 선배 돌려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날 찾아온 건 선배니까 내가 그 정도 참견은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구요.”


뜻밖의 이야기에 호가는 대답도 잊고 가만히 카이를 바라봤다.


“어차피 학기는 한 달 남짓 남았으니 지내는 게 너무 불편하지 않다면, 여기 너무 좁고 편한 곳은 아니지만... 방학이 될 때까지라도 여기서 지내지 않을래요?”

“카이...”

“나랑 지내는 게 괜찮다면요.”


호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내가 부탁하고 싶은 말이야. 고마워 카이. 그렇게 말해줘서.”

“진짜예요. 이렇게 다쳐서 왔는데 그냥 여기 있으면 좋겠어요.”

“아마, 돌아가도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근데-”

“그래도 못 보내요.”


카이가 단호하게 말해서 호가는 조금 놀랐다.


“고마워. 근데 그게 말이야, 돌아가고 싶지 않아.”


호가도 솔직하게 말이 나왔다. 카이가 선수 친 덕이라는 것도 안다. 호가가 말하기 편하도록 일부러 그랬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야말로 부탁하고 싶었어. 여기 있어도 되는지.”

“얼마든지요.”

“학교...에 이야기는 할 생각이거든. 나도 정신없고 생각이 많았는데 역시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래요, 선배.”

“그리고 너한테도 얘기,”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궁금했을 텐데 내가 말하지 않으니까 묻지 않고 있던 거 고맙게 생각해.”


진심이었다. 상처를 보며 문득 화가 나고 걱정하는 표정이었고 호가에게 잘해주려고 하는 마음도 충분히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을 텐데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대해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나는 사실 내 얼굴이 싫을 때가 있어. 컴플렉스라면 컴플렉스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얼굴에 대해 아무렇게나 말하는 게 싫었어. 제멋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싫었고. 가끔은 장난으로 받아주기 불쾌한 일들도 더러 있었고.”


그리고 호가는 한참을 멈춰 있었다. 카이는 이번에는 잠자코 기다렸다.


“몇 번 싸운 적도 있었어. 모두가 그랬다는 건 아냐, 내가 싫어한다는 걸 아는 친구들은 신경 써 주기도 해서 고마웠고, 그냥 순수하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도 괜찮았거든. 그런데...”


호가는 며칠 전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질끈 물었다.


“원래도 가끔 기분 나쁜 말을 해서 싸운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옆... 방이라서 자주 마주쳤거든. 룸메이트는 친절하고 착한 애인데, 그날은 그 애도 없었고. 옆방에 있는 둘이 문을 두드리고 같이 술을 마시고 놀자고 해서 싫다고 하긴 했는데, 나중에 다른 방 사람들이랑 여럿이서 떠들썩하게 놀더라구. 난 그냥 방에 혼자 있었는데, 같은 층에 연출과 동기가 있어서 그 애가 불러서 나갔거든. 워낙 여러 사람들이 정신없이 놀고 있어서 나도 처음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 근데 시끄럽기도 하고 재미없기도 해서 동기한테만 살짝 말하고 내 방으로 먼저 돌아왔어.”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즐겁게 보내는 자리라면 호가도 딱히 거절하진 않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고 별로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호가는 다시 입을 꽉 다물었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누가 따라온다고는 생각 못했어. 방 앞에 가서 문을 여니까 뒤에서 누가 부르더라구. 왜 더 놀지 않고 먼저 가냐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쉬고 싶다고 대답했거든. 옆방 사람들 둘이랑 다른 한 명은 누군지 잘 모르는 얼굴만 본 적 있는 위층의 누구였어. 처음엔 더 놀자고 붙들었는데 내가 몇 번 싫다고 거절하니까 화를 내면서 뭐라고 하는 거야. 나더러 혼자 고고한 척 하지 말라고, 잘난 척 하지 말라고 하면서.”


카이는 입술을 일자로 다문 채로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지만 호가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겼을 텐데 나도 좀 짜증이 나서 뭐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오더라구.”

“미친 거 아냐?”


카이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도 참고 있지만은 않아서 화를 냈거든. 그리고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데 억지로 문을 열고서 따라 들어왔어. 그때는 뭔가 큰일이다 싶긴 했어. 나가라고 했는데 나가지 않았어. 말로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곤 깨달았는데 나는 한명이고 저쪽은 셋이나 되니까 걱정이 되었어. 팔을 붙들길래 손에 잡히는 책 같은 걸로 내리쳤거든 그러니까 더 화를 내면서 덤비더라고. 처음엔 그냥 버텼는데...”


호가는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감추지 못했다.


“발로 채이고 나니까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카이는 걱정스러워서 말을 막아섰다. 호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학교에다도 말할 거니까 생각해 둬야 할 필요도 있어. 그리고 들어주면 좋겠어.”

“네.”

“저쪽은 셋이니까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을 걸 알긴 했는데, 내가 얼굴이랑 팔에 상처가 나니까 자기들끼리 막 얘기 하는 거야. 그러더니 옷을 걷으려고 해서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

“학교도 학교지만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할 거야. 참거나 견디는 것의 문제가 아니니까. 대신 나도 각오는 좀 해야 하고.”

“그런 새끼들은 다 지옥에 보내버려야 하는데...”

“내 기분이 그랬어.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닥치는 대로 휘둘렀거든. 책이랑 의자랑 이런 거 전부 다. 어차피 심하게 굴던 놈은 한 놈이고 나머지 둘은 그 정도는 아니라서 내가 세게 저항하니까 멀찌감치 물러서긴 했거든.”

“그래도 다 똑같은 놈들이에요.”


카이가 울컥해서 말하자 호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그래. 나한테 몇 대 맞고 나니까 그제야 말리더라고. 갑자기 미안하다고 하면서...”

“애초에 미안하다고 할 짓을 왜 한 건데!”


듣다 말고 카이가 버럭 화를 내자 호가는 또 표정이 풀어졌다.


“나머지 둘이 그 옆방의 나쁜 놈을 데리고 나갔어.”


그나마 거기서 끝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호가는 생각할수록 분하고 서럽고 너무 화가 났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카이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얼굴이었다. 겨우 차분하게 말을 이을 수가 있었다.


“걔네들이 나갔는데도 방 안에 있는 게 무섭더라구. 그래서 일단 밖으로 나왔어. 어둡고 그냥 무서웠어. 응........ 무서웠어. 무서웠어.”


지금 생각해도 몸이 떨린다. 카이는 안타까운 눈으로 호가를 바라봤다.


“억지로 참을 필요는 없어요. 무서워하는 건 누구나 당연해요. 그놈들이 나쁜 거고 선배는 피해를 입었는데... 혼자서 힘들었겠지만 잘... 어... 해결한 거니까, 선배가 대단한 거예요. 그리고 나온 거도 잘 생각했어요.”

“좀 정신이 없어서 신발이 벗겨진 걸 몰랐어. 맨발인 것도 사실 몰랐어. 그리고 생각나는 게 카이 밖에 없어서, 도서관은 멀지도 않았으니까.”

“와줘서 다행이에요.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그래서 너한테 폐를 끼치고...”

“아니에요. 폐라니요. 잘 생각했어요.”

“처음엔 그냥 생각하는 것도 싫고 무섭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었는데, 내가 이러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거니까, 학교에 일단 얘기하려고.”

“그래요. 잘못한 놈들은 마땅히 벌 받아야죠.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돌아가고 싶진 않아. 그냥 피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기분이 나빠서 가고 싶지 않아.”

“가지 말아요. 여기 있어도 되니까요.”


카이는 어떻게든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할 말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이왕 폐 끼친 김에 좀 더 있게 해달라고 하려던 참이었어.”

“얼마든지 괜찮아요.”

“고마워.”

“좁고 불편하고 밥도 시키는데 뭘요.”


일부러 농담을 섞으니 호가가 푸스스 웃었다.


“진짜 고마워.”

“선배가 자꾸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민망하긴 해요. 고맙다는 말 너무 많이 해요.”

“고마운걸...”


상냥하고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걸 카이도 알고 있다. 힘들고 불쾌한 일을 겪었는데 씩씩하고 용기 있게 나온 것도 호가다워서 다행이다 싶었다. 호가는 감정을 꽤 추스른 얼굴로 카이에게 다시 천천히 설명했다.


“기숙사에 가서 방문증 끊고, 내 방이랑 이름 이야기 하면 돼 넌 학생이니까 학생증 보여주면 간단해. 그리고 방에 가서...”

“아예 짐 싸들고 나와도 되는데.”


카이의 말에 호가는 잠시 멈칫 했다.


“그래도 한참이나 살았는데, 대충 들고 나오기엔 짐이 많을 거야.”

“그럼 내일이나 모레 가도 돼요.”

“너 주말에도 아르바이트 있잖아.”

“몇 시간도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일단은 몇 가지 짐만 가져다 줘. 어차피 학교는 가야 하니까.”

“알겠어요.”




그리고 그 놈들 낯짝을 보면 반쯤 죽여 놓고 오겠다고 생각하고 카이는 집을 나섰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 약간 시간이 비는 틈을 타서 기숙사로 향했다. 호가의 방에 들어가서 짐을 챙기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카이는 대답하지 않고 호가가 부탁한 것들로 가방을 마저 채우고 한 바퀴 돌아봤다. 짐이 많다고 했지만 그래봤자 기숙사인지라 주말에 한두 번 들르면 몽땅 빼올 수 있을 듯 했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방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어?”


문이 열리고 카이가 나오자 상대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은 멍과 상처로 온통 얼룩이었다. 카이는 그가 누구인지 금세 깨달았다. 이 새끼잖아! 그리고 옆방 문이 열렸다. 안에서 빼꼼 나온 얼굴에도 밴드가 잔뜩 붙어 있었고 팔에도 상처와 붕대투성이였다. 대충 상황이 파악되었다. 진짜로 호가는 3대 1로 붙어서 이긴 셈이다. 카이가 멀쩡한 데를 골라서 몇 대 때려 줘야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나온 붕대가 말을 걸었다.


“너 혹시 호가 친구냐?”

“그런데?”

“호가 지금 어디...”


사실 카이는 그 입에서 호가 이름이 불리는 것도 짜증이 났다.


“내가 그걸 말할 거 같냐?”


카이가 날카롭게 대꾸하는데 옆방 문 뒤쪽에서 또 하나의 얼굴이 나왔다. 역시 얼굴에 상처가 몇 개 있었고, 팔은 더 가관이었다. 두꺼운 석고 깁스를 해서 목에 걸고 있는 걸 보는 순간 카이는 잠깐 멍했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의자를 휘둘렀다더니 제대로 들어맞은 모양이네. 당해도 싸다-란 표정이 너무 역력했는지 그쪽은 시선을 돌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호가의 상처를 봤을 때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도 화가 나서 일을 저지른 놈들을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호가는 호가 스스로 자기 일을 잘 처리한다. 약한 사람도 아니고 숨는 사람도 아니다. 카이는 자기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호가가 더 마음이 다치지 않길 바라며 옆에서 격려하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너넨 진짜 죽을 줄 알아.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들이 뭐라 말하는 걸 뒤로 넘기고 기숙사를 나왔다. 마음이 시원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왔다. 아르바이트 시간을 생각하면 빠듯하지만 챙겨온 물건도 전해주고 싶었고 호가가 학교에 가기로 한 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일단, 학교 쪽에서도 조사를 하겠다고 했는데,”

“조사? 뭘 조사해요?”

“뭐- 학교 입장에선 사실여부를 확인은 해봐야 할 테니까.”

“대충 넘어가거나 이러는 건 아니겠죠? 조사가 제대로 되긴 하는 거겠죠?”

“음... 그때 같은 층 근처 방이라던가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보고 들은 건 있을 테니까, 그 정도면 어떻게든 될 거야. 학교에서도 신고하라고 하더라구. 그래서 그것도 했어.”

“고생했어요. 하루 종일.”


싫은 일이었을 텐데. 카이는 호가를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서 어깨를 두드렸다.


“힘든 일이었을 텐데 잘했어요. 잘 될 거예요. 혹시 내가 뭔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줘요.”

“지금도 너무 잘해주고 있는 걸.”

“그래요? 그럼 저녁은 뭐예요?”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으려고 해서 카이가 또 농담을 하자 호가가 팍 웃었다.


“상해 요리 마음에 들었나보네.”

“뭐 쫌 심심하고 그렇긴 해도.”

“무한 음식이 너무 매운 거 아냐?”

“맛있다는 이야기였어요. 원래는 단 거 잘 못 먹는데, 상해 요리 달큰하긴 해도 담백해서 다 맛있어요.”


카이가 싱긋 웃자 호가도 따라서 웃었다.


“원래는 새우 요리 하고 싶었는데 여기 왜 바다도 없어? 북경 생각보다 별로야.”


그 말에 카이는 크게 웃었다.


“무한에도 없어요, 바다.”

“진짜? 에~ 실망이야.”

“대신 커다란 호수가 있어요.”

“아아~ 들은 것도 같아.”

“나중에 무한에 오면 거기도 구경시켜 줄게요.”

“상해에 오면 강이랑 바다도 보여줄게. 유람선도 있어 커다란 걸로.”

“오, 그거 재미있겠다. 그거 타요.”

“그래 좋아.”

“또 뭐할 수 있는데요?”

“상해에서 어디 가고 싶은데?”

“음... 선배네 집?”

“어어~ 집이 뭐 볼 게 있다고.”

“선배도 우리 서점 궁금하다면서요. 그거랑 비슷한 거죠.”

“그런가.”


호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웃어넘겼다.


“그런데 카이, 아르바이트 늦는 거 아냐?”

“아아아, 늦었다! 늦었네! 어어~ 저 다녀올게요.”

“응, 다녀와. 그리고...”


막 바쁘게 뛰쳐나가려던 카이는 머뭇거리는 호가의 말에 발을 멈췄다. 호가는 얼른 문 앞으로 왔다.


“당분간, 잘 부탁할게. 고...”


고맙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카이는 얼른 말했다.


“생각난 게 나여서 고마워요. 솔직히 선배랑 같이 있게 되어서 기뻐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 그래요.”


그리고 얼굴이 새빨갛게 된 걸 들키기 전에 얼른 문을 닫고 달려 나왔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호가가 학교에 다시 가기 시작했다. 둘이 나란히 교문에 들어서는 걸 본 몇몇이 더러 신기해하기도 했지만 아는 사이여도 놀랍지 않은 선후배인 터라 별 일 없이 지나쳤다. 가장 신나 했던 건 ‘연출과의 왕자님’을 꺅꺅대며 좋아하던 왕카이와 같은 학년 여학생들이었다. 교문에서부터 학과 건물에 들어서서 2층에 올라가는 동안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호가와 카이의 수업이 달라서 호가는 2층에 카이는 4층에서 수업이 있었다. 호가가 2층에서 멈추며 카이랑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둘이 멈춰 서자 갑자기 복도가 갤러리들로 꽉 찼다. 왕카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용감한 한두 명이 카이에게 말을 걸었다.


“너, 왕자님이랑 친했어?”

“둘이 같이 다녀?”

“아는 사이라고 말 안 했잖아!”


잘생긴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나 줘라-라는 말을 동기들 사이에 유행시키며 꽤 예쁘다는 연기과의 학생들과도 형제처럼 지내는 왕카이에게 흥미를 잃었던 여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옆에 서 있으니 다 들려서 어쩔 줄 모르던 호가는 카이와 인사를 하지 못해 머뭇대다가 겨우 말을 건넸다.


“그럼 카이, 나는 저쪽 강의실이라서.”

“그래요. 이따 봐요.”


호가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려는데 카이는 늘 그렇듯이 크게 생각하지 않고 물었다.


“근데 오늘 저녁은 뭐에요?”


호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주위가 난리가 나서 카이도 호가도 깜짝 놀랐다.


“아, 아직 정하진 않았는데 그냥 만두나 면 사갈까 했어. 괜찮아?”


주변의 반응에 당황한 호가는 조그맣게 말했다. 왕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아니면 내가 뭐 사갈까요?”

“아니야, 카이는 늦잖아. 저기.......”


카이와 호가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주위 분위기가 너무 끓어올라서 도저히 대화할 수 있는 분이기가 아니었다. 호가는 결국 포기하고서 가려는데 카이가 손목을 잡더니 계단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어디, 어디 가는 건데?”


호가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묻자 왕카이는 뒤를 확 돌아봤다. 당당하게 검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우더니 갤러리들에게 말했다.


“따라오지 마.”


소리 없는 아우성이 물결쳤다.


“멀리서 구경도 안 돼.”

“치사하다.”


누군가 말하자 왕카이가 손가락으로 쿡쿡 가리켰다.


“절대 안 돼.”


그리고 호가의 손목을 잡은 채로 쿵쾅쿵쾅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할 말이 있던 건 아냐. 괜찮은데.”

“애들이 귀찮게 굴면 이야기해요.”

“괜찮아.”

“엄청 시끄럽고 끈질길 거예요.”

“카이 잘생기고 다정하니까 인기 많아서 그래.”


호가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카이는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어떻게든 선배랑 말 터보려고 기회를 노리다가 이제 쫌 아는 척 하려고 할 테니까 전부 무시해요. 무조건. 내가 소개해주려고 한 사람 한 명도 없어요. 알겠죠?”

“어... 응.”

“내 이름 팔아도 절대 안 돼요.”

“알았어. 그런데...”

“그런데-도 안 돼요.”

“아, 알겠어.”






“다녀왔습니다.”


왕카이는 크게 말하면서 문을 열었다. 호가가 얼른 튀어나왔다.


“고생했어. 어........”


갑자기 호가가 쭈뼛거리면서 우물거리다 카이가 이상하다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자 겨우 말했다.


“저녀... 어 그러니까, 씻고... 나올래? 아니면 저녁...부터 줄까?”

“그거 3번은 없어요?”


새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 색이 되어갔다.


“바!바...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냥 물어본 건데 왜 그래요?”


실실 웃으면서 말하자 호가도 입을 삐죽거렸다.


“누가 잘 왔다고 반겨주니까 좋아서 그래요. 몰랐는데, 혼자 지내는 거 쓸쓸했나 봐요.”

“그래?”


눈이 금세 부드럽게 펴져서 상냥한 얼굴이 되었다. 카이는 그 얼굴을 더 보고 싶었지만 일단 대충 씻고 나오기로 했다. 뭔가 음식 냄새가 났다. 집에서 뭘 해먹을 시간도 없어서 호가가 온 후로 요리한 음식 냄새가 나는 게 즐겁기도 했다.


“어~ 이게 다... 선배가 했어요?”

“이걸 어떻게 해. 사와서 찌기만 했어. 내가 한 건 이거야.”


푹 파인 그릇에 가득 담긴 면과 야채를 볶은 것을 가리켰다.


“어, 진짜 만두네.”

“무한은 뭐 먹는지 몰라서. 이거 교자는 상해식이야. 가끔 기숙사에서 해먹기도 했거든.”

“그런 것도 팔아요?”

“좀 떨어진 가게지만 있더라구. 맛이 그럴 듯 해.”

“오~ 맛있어 보여요.”

“넌 매운 거 좋아하는 거 같아서 만두는 매운 거랑 먹으라고...”

“아, 그래서 이렇게 맛있는 냄새 났구나.”


조그마한 탁자 가득히 빈틈없이 빼곡히 접시가 차 있었다. 혼자 먹는 양이 아닌 걸 알고는 왕카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 먹고 여태 기다렸어요? 지금 거의 열신데?”

“나도 늦게 들어왔어. 수업 빠지고 그랬으니까 할 거도 많고.”

“배고프지 않았어요?”


사실 배가 고파서 아까 저녁부터 먹겠냐 물어보려 한 건데 분위기만 오묘~해졌다. 호가는 괜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넌 이렇게 매일 늦게 오면서 매일 늦게 먹어?”

“사실 아무 때나 때우고 그랬는데 선배랑 같이 먹는 건 좋네요.”

“하긴 혼자 먹으면 아무렇게나 먹게 되니까. 나도 너 아니면 이런 거 해먹을 일 없고.”

“그래요? 요리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기숙사에서 그렇게 요리 할 순 없고. 귀찮기도 하니까.”

“그럼, 나 때문에 만드는 거예요?”


불편할 텐데 하지 않아도 돼요-라고 말하려고 한 건데 호가가 약간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정색을 했다.


“공짜로 얹혀사는데 이런 거라도 하게 해 줘.”

“좋아서 한 이야긴데. 귀찮으면 안 해도 되지만요.”

“그냥 머리도 식힐 겸 괜찮은 것 같아.”

“그럼 해주세요. 공짜로 얻어먹을 거니까 대신 여기서 지내주시고~”


호가의 말을 돌려 말해줘서 호가는 좀 찡한 기분이 들었다.













카이는 들어오다가 매트리스 위에 엎드린 호가가 뭘 열심히 쓰는 걸 보고 목을 쭉 뺐다.


“어?”


그림자에 화들짝 놀란 호가가 쭈뼛거리면서 노트를 슬금슬금 옆으로 치웠다.


“미안. 보면 안 되는 거였어요?”

“아니, 아냐. 아니지. 그런 건 아냐.”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 걸 보며 카이는 호가의 머리를 살짝 문지르며 웃었다.


“아닌 거 알았으니까 그렇게 정색하지 말아요.”

“정색이 아니라~ 영화 이야기니까 당연히, 너는 봐도 되지.”

“그런 거예요?”

“응, 장면 몇 개가 떠올라서.”

“오~ 그래요?”


호가는 조금 긴장한 채로 노트를 펼쳤다.


“좀 봐볼래?”


호가가 카이를 전격적으로 캐스팅(이라고 카이가 말해서 호가도 실없이 웃었다)한 이후로 몇 번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딱히 영화판에 대해 아는 것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이 길에 뛰어든 카이와 달리 호가는 생각이 꽤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광고를 찍으면서 얻은 실질적 경험이 합쳐진 거였구나 싶었다.


“어떤 거 같아?”

“좋은데요? 선배가 다른 느낌으로 찍을 수도 있겠지만 딱 드는 생각은 일단 좋아요.”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


장면은 주인공이 그동안 환각 같은 걸로 여기던 다른 차원의 자신과 만나는 장면이다.


“근데 이런 장면은 어떻게 찍어요? 나랑 내가 만나는 거 아니에요? CG 할 수도 없잖아.”

“대부분 숏-리버스 숏으로 찍으면 되고 간단한 편집으로 한 프레임에 넣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있으니까 몇 컷만 넣으면 나머진 괜찮을 거야.”

“그런데요......”


카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호가가 내려놓은 연필을 들었다.


“이거 꼭 1인 2역이어야 해요?”

“어?”

“나라고는 하지만 다른 차원의 나라면서요. 얼굴이 꼭 같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도 너무 다른 사람이면 다른 차원의 자기 자신이라고 인정이 안 되잖아. 아마 이 인물도 안 되고 보는 사람들도 안 될 거야.”

“그런 건 표정이나 동작이나 말투 같은 거로 좀 커버할 수 있지 않아요? 왜 옛날 이야기들에 나오는 대역 장군 같은 거처럼. 얼핏 봐서 비슷할 부분이 있으면 되잖아요.”

“물론, 그런 방법도 있겠지만 굳이......”

“어설픈 트릭 쓰는 거보단 그게 나을 수도 있지 않아요?”

“음...... 근데 또 마땅한 배우도 없고.”

“선배 있잖아요.”

“뭐?”

“선배가 하면 되겠네. 딱 적당하지 않아요? 이 시나리오의 진짜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시나리오 속에서는 주인공보다도 다른 차원 쪽이 먼저 알고 메시지를 전해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선배랑 나- 구도랑 비슷하지 않아요?”

“어...... 말도 안 돼. 내가 무슨 연기야!”

“에이, 지난 번엔 같이 나오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건 그냥 작은 역으로... 나오겠단.......”

“난 이게 딱 선배한테 적역일 것 같아요.”

“안 돼, 못해.”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 말고 생각해 봐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CG 어차피 안 되는 저예산 영화에서 쓸 만한 아이디어지 않아요?”

“반드시 얼굴이 같을 필요는 없다는 건 참신한 느낌이긴 해.”

“그쵸?”


왕카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호가는 어딘가 휘말렸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한 번 고려해 보겠다는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기말고사를 준비해야하는 시간이 곧 다가왔다. 호가는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일주일쯤 빠진 일로 크게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더 공부에 집중했다. 북경으로 유학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아서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사실 호가는 수석으로 입학한 덕에 일정 성적만 나온다면 기숙사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번에 나오게 되었지만 학비와 기숙사비를 장학금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북경으로 학교를 올 수 있었다. 평소보다도 더 늦은 시각에 왕카이가 들어왔다. 일부러 도서관에서 호가의 자리를 찾아와 오늘은 늦을 테니 기다리지 말라고 말해줘서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늦은 건 처음이라서 걱정하고 있었다.


“많이 늦었네. 피곤하지. 저녁은?”

“오늘은 모임 있던 거라서 거기서 먹었어요. 그거 때문에 늦은 거구요.”

“이렇게 늦게까지 모임을 했어?”


그냥 술 자리 같은 느낌이 아니어서 물었다. 학비 벌기에 바쁜 왕카이는 그 흔한 동아리 하나 들지 않은 상태라서 더 그랬다.


“무대연기과 교수님이 엄청난 기말 테스트를 걸었거든요.”

“무대연기 교수님?”

“원래부터 악명 높았대요. 짧은 기간 주고서 뭐 시키거나 엄청 하드하게 체력단련 이런거부터 훈련시키고.”

“그래?”

“갑자기 기말 시험으로 조별 연극을 준비하라잖아요.”

“지금? 이제 와서?”

“그러니까요. 대신 최소 1막이고 시간은 20분에서 30분 정도.”

“그래도 그걸 이제 와서 어떻게 준비해?”

“시험 날짜도 좀 늦췄죠. 그럭저럭 3주는 되니까 못할 건 없는데......”


카이는 괜히 관자놀이를 비비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무대 구성까진 아니더라도 간단한 의상이나 소품은 준비하라는데 그거도 미치겠고, 이러면 되는 애들은 최소 뒷배경 색이라도 칠해올 테니 다들 눈치 볼 테고......”

“아아! 너네 학년 셰익스피어 한다더니 그게 그거였구나.”

“소문 쫙 퍼졌죠? 2~3주 만에 의상이랑 소품 준비해서 셰익스피어 30분이라니.”

“선배들 붙들고 죽는 소리 하는 후배들 벌써 있더라고. 영화과에도 다 알려졌어.”

“그래요?”

“아! 그래서 뭐를 빌려주네 어쩌네 그런 말 아까 했던 거구나.”

“당장 오늘부터 다들 난리였을 거예요. 안 봐도 뻔하죠. 아니~ 이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 꽤 고생이네. 셰익스피어면 대본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늦었어요. 대략적인 상의하고 대본 받아왔어요.”

“그래? 너네는 뭐하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이요.”


카이는 가방을 뒤적여서 대본을 꺼내서 호가에게 넘겨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종이 위에 영문으로 Romeo and Juliet이라고 적혀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네? 20분 정도만 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일단은 다 봐야 뭐가 잘 되는지 아니까요.”

“그건 그렇겠네.”


호가는 내심 궁금해하던 걸 이제야 물었다.


“카이, 카이는 무슨 역이야?”


왕카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으면서 눈썹을 찡긋거렸다.


“로미오.”


너무 자신만만한 얼굴에 호가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긴 다른 역을 시키기도 그렇네.”

“그렇죠.”

“뭐가 자기 입으로 그렇죠야!”

“사실이잖아요.”


넉살좋게 킬킬대는 통에 호가와 카이는 한참 웃었다.


“혹시 내가 뭐 도울 거 있으면 말해. 나도 다른 동기들한테 물어보고 그럴 테니까.”

“네. 아, 그런데 다른 거 말고 연습이나 도와주세요. 아르바이트 때문에 연습 시간이 제대로 나올지 모르겠거든요.”

“그렇겠네. 근데 내가 연습을 어떻게 도와?”

“아참, 시험 기간이니 그것도 어렵겠네.”

“아냐아냐.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연습을 도와주는 게 어떻게 하나 싶어서.”

“그냥 대본 같이 봐주면 돼요. 상대역 대사까지 다 외워야 하는데 시간 너무 없으니까 들으면서 외우려고요.”

“그래? 그런 거면 할 수 있지.”


“시험 공부 해야하는 거 아니까 너무 무리하진 말고 쉬는 틈 날 때만 도와주세요.”














“너무나 가치 없는 이 손으로 제가 만일 이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라면, 제 입술은 곧바로 얼굴 붉힌 두 순례자처럼 부드러운 키스로 거친 흔적 지우려는 고상한 죄를 짓겠지요.”


싯구를 옮긴 것이기에 다소 뻣뻣한 느낌이지만 우아함이 깃든 말투로 카이가 대사를 읊어나갔다. 눈을 마주치자 호가는 헐레벌떡 시선을 대본으로 떨구며 다음 대사를 읽었다.


“순례자님, 경건함을 이렇게 공손하게 보여 주는 그 손에게 너무 잘못하십니다. 성자상도 순례자가 만져 보는 손이 있고 맞붙인 두 손은 순례자의 키스인데요.”

“성자상도 순례자도 입술은 있지 않습니까?”

호가는 또 허둥지둥 다음 대사를 읽었다.

“예, 순례자님. 기도에 써야 하는 입술이죠.”

“그렇다면 성자여, 입술로 손의 일을 합시다. 기도를- 허락해 주세요, 믿음이 절망 되지 않도록.”

“성자상은 기도는 허락하나 움직이진 못해요.”

“그렇다면 기도하는 동안에 움직이지 말아요.”


카이가 나직하게 속삭이면서 가까이 다가오자 호가는 화들짝 놀랐다. 대본에도 ‘그녀에게 키스 한다’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는 살짝 몸을 기울이는 시늉만 하고 다시 몸을 뗐다.


“이렇게 내 죄는 그대의 입술로 씻겼소.”


호가는 자기의 상상에 민망해서 흠흠- 목을 가다듬고 다음 대사를 읽었다.


“그렇다면 내 입술로 죄가 옮겨 왔군요.”

“내 입술에서요? 오, 다시 죄를 저지르라는 달콤한 재촉이네요! 내 죄를 돌려주세요.”


‘그녀에게 다시 키스 한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아까와 같을 거라 생각해서 맹하니 있던 호가 앞으로 바짝 왕카이가 다가왔다.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서 호가는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떴다. 거의 닿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카이가 딱 멈추고 장난스레 자기 입술을 붙였다 떼어서 ‘쪽!’ 소리를 내고 뒤로 물러갔다. 호가는 핀잔을 주려다 저절로 대사 다음을 읽었다.


“키스를 배우게 됐네요!”

“오~ 방금 거 감정 좋은데요?”

“참 내.”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이게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무려 로미오와 줄리엣. 그나마 로미오가 친구들과 있는 장면은 읽으면서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나는 장면이 되자 호가는 괜히 쑥스러웠다.


“연극하면 진짜 키스해?”

“당연하죠.”

“연습 때도 하는 거야?”

“어떨 거 같아요?”

“배우들은 정말 대단하구나. 난 아마 얼굴 새빨개지고 눈도 못 마주칠 거야.”

“아직 키스신은 안 해봤잖아요.”

“어휴-”


호가가 고개를 흔들흔들하자 왕카이가 큰 소리로 웃었다. 공부 중에 잠깐 쉰다고 호가가 매트리스 위에 엎드려서 보니 왕카이가 대본을 들고 있는 게 보여서 연극 연습 중이냐고 물었다가 프롬프터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왕카이가 상대역 대사만 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앞에부터 책 읽듯 하고 있었는데 정작 줄리엣이 되자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참 대사 좋구나.”

“마음에 들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대본은 처음 읽어 봐. 다른 비극은 몇 개 읽었는데 다 좋았거든. 그런데 이것도 좋네.”

“선배는 다른 건 뭐가 좋았는데요?”

“음... 햄릿.”

“오~ 뭐가 좋았어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도 당연히 좋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게 좋았어. 약해지고 울고 미칠 정도로 괴로워하는 게. 누구나 단숨에 결심하고 앞만 보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죠.”

“흔들리고 무섭기도 하고 힘들었을 텐데 열심히 생각하고 또 해서 자기의 결심을 밟아나갔으니까- 좋다고 생각해.”

“선배한테 잘 어울리네요.”

“아....... 어... 카이는 뭐가 좋아?”

“저도 햄릿이요. 그리고 리처드 3세를 시험 때문에 읽었는데 그것도 좋더라고요.”


갑자기 호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카이를 지그시 바라봐서 의아했다.


“왜요?”

“어떻게 보면 악당 같은 역인데, 카이 어울릴 것 같기도 해서. 와, 멋지겠다.”


마치 눈부신 것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카이는 울컥해졌다.


“사실, 궁금한 게 있었어요.”

“궁금한 거?”

“나한테 처음 출연 요청하러 왔을 때 내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죠?”


호가는 헙-하면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으... 그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아니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아니라...... 그게 그 말이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줘서 되게 좋았어요. 자신감이 솟아났다니까요.”


카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호가는 여전히 얼굴이 빨개진 채였다.


“그런데도 가끔 또 궁금해지더라고요. 내 어디가, 단순히 정말로 얼굴 그냥 모양만 말하는 건 아닐 거 아녜요. 내 어디가 선배 마음에 들었던 걸까, 어떤 게 좋은 배우로의 재목으로 보였을까 궁금했어요.”


카이의 말이 진지하게 이어지자 호가는 얼굴을 붉힌 채로도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딱 봤을 때 느낌이 너무 좋았어. 반듯하고 좋은 인상이기도 했지만 웃...는 얼굴을 보니까 여름 태양 아래 서 있는 기분이었어.”


호가의 눈이 생각에 빠져들고 카이는 그런 호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왕...이라면 좋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폭군 리처드 3세예요?”


살짝 웃음기 어린 말투로 묻자 호가도 부스스 웃었다.


“단순히 폭군은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 많이 생겼잖아. 분명히 그런 선택을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이야기가 있고 의미가 있을 거야.”

“악인으로 보통 묘사되잖아요. 굉장히 추한 생김새에.......”

“역사상 패자니까.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물론 나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저 자기 뜻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 일방적인 시선으로만 평가되었으니까. 근데 시대나 상황같은 게 있잖아. 왜 그런 선택을 했을지 궁금해. 그에게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카이같은 당당하고 바른 사람이 표현해주면 멋질...... 멋지다고 하면 좀 그런가? 설득력 있을 것 같아. 조용하지만 힘이 있으니까.”

“내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어?”

“그냥 본 것만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그게 그러니까......”


호가는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입을 멍하니 벌린 채로 눈을 껌뻑거렸다. 난처해서 어쩔 줄 모르는 호가를 위해 카이는 시원하게 대신 나서줬다. 손을 내밀자 호가가 의아하게 보다가 악수를 청하는 모양새라는 걸 깨닫고 얼른 손을 잡았다. 카이가 씩씩하게 맞잡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선배의 멋진 악당, 이유 있는 왕이 되어 드리죠.”


좀 부끄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와중에 설레기까지 해서 호가는 그냥 웃고 말았다.
















“정말요? 오~ 좋겠네요.”


시험이 끝이라는 말에 왕카이는 젓가락까지 멈추고 엄청 부러운 얼굴을 했다.


“저도 챙겨주느라 공부 제대로 못하고 불편하게 했죠?”

“아냐. 기숙사보다 맘 편해서 좋았어. 다음 학년엔 아예 기숙사를 나왔으면 하는 생각도 했어.”

“참, 선배는 기숙사까지 원래 학교에서 주는 거였죠?”

“거의 매년 다 다니기도 했으니까 4학년은 좀 빠져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 나도 4학년들이 기숙사 버티고 있으면 불편했으니까.”

“선배는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요.”

“그거야 카이가 잘해서 그렇지. 카이는 아직 시험 남은 거지?”

“네. 교양도 하나 남고 전공 두 개.......”

“연극 남은 거지?”

“네. 그게 젤 마지막이라서 더 부담 돼요. 다음 주에나 할 거고. 어휴~ 내일 시험 두 개 마치면 내내 그거에 매달려야 할 걸요. 다들 제대로 맞춰보지도 못한 거니까.”

“연습 별로 못했어?”

“전 좀 힘들긴 했어요.”

“내가... 뭐라도..... 도와줄 건 없어?”

“나중에 대사나 맞춰주세요. 어, 근데 선배 집엔 언제 가요?”

“아, 그게-”


호가가 자세를 갑자기 가다듬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미안, 오늘 시험 끝났는데 며칠 더 신세져야 할 것 같아.”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카이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짐은 그동안 거의 다 빼와서 기숙사에서 가져나올 건 없구. 부피가 좀 되는 걸 여기도 두고 다른 데도 좀 맡기고 했는데... 그걸 다 집으로 보내면 개강 때 또 가져와야 하니까, 방학 기간에 둘 곳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이번엔 카이가 정말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봐서 호가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왜?”

“여기 두면 되잖아요. 뭘 둘 데를 찾아요?”

“그치만 네가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데......”

“네? 내가 뭘요?”

“고향,에 혹시 가는 거야?”

“아무래도 그건 무리예요. 무한에선 일을 하더라도 대도시처럼 벌 수가 없어서 방학 동안에도 계속 일해야 하거든요. 몇 달은 종일 일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일자라로 구해야죠.”

“그럼 북경에 있을 거야?”

“지난 번 방학에도 못 가긴 했는데,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부모님껜 이미 전화 드렸어요.”

“서운하시겠네.”

“선배는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네요.”

“나도 지난 방학 땐 못 내려갔거든. 일 년 만에 가는 거니까 반가워하시지.”

“겨울엔 안 갔어요?”

“응. 나도 잠깐 아르바이트도 하고 촬영도 하고.”

“아아, 그랬겠네요. 이번에 고향에 가면 거기서도 뭐 찍어올 예정이에요?”

“음, 그것도 그렇고. 나도 아르바이트로 광고 쪽 다시 일하려고. 그렇지 않아도 집에 연락온 것도 있다고 하고.”

“와! 그럼 광고 또 찍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구 그냥 엑스트라 겸 스태프 같은 거야. 그래 봬도 엑스트라로 나가면 그냥 일만 하는 거보다 훨씬 많이 받.......”


호가가 말을 중간에 멈췄지만 카이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여상하게 받아넘겼다.


“그럼 잘 됐네요. 촬영장 같은 거에 아르바이트 가는 애들도 더러 있긴 하더라구요.”

“........무한도 못 가는데, 상해는 너무 멀지?”

“네?”

“북경에는 나도 아는 데가 거의 없거든. 나도 지난 겨울에 일 해봤는데 차라리 상해에서 광고 찍는 게 훨씬 나으니까 가려고 하는 거라서... 너도 이런 광고 일 알려주면 좋을 텐데 북경엔 아는 데가 없고.......”

“괜찮아요. 근데 광고 나가는 게 수입이 좀 괜찮아요?”

“그럼. 나 광고비 계속 어머니가 관리하시고 용돈만 주시는 건데도 중고학교 내내 반 친구들보다 부자였는 걸.”


해맑게 배시시 웃었다.


“그럼 나도 상해에 가서 선배 연줄 좀 이용할까요?”

“어! 정말 그럴래?”


카이는 농담 삼아 말했다가 반색하는 호가 때문에 도리어 놀랐다.


“얘기 꺼내보려 한 건데, 상해 너무 멀고 갑자기 오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해서.”

“하긴 전 상해에 연고가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있잖아.”


대뜸 대답이 나왔다.


“여기 계약 곧 끝이긴 한데 보통 방학 중에 좀 여유는 주거든요. 새로 계약할 건지 아니면 옮길 건지. 계약 연장하면 되니까 북경엔 지낼 데가 있는 건데 상해에는 지낼 데가 없어요, 저. 선배가 거둬주는 거 아니면 못 가요.”


약간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호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집 크지는 않지만 너 한 명 정도라면 와서 지내도 돼.”

“잠깐만요, 지금 이야기 너무, 어- 선배, 정말이에요?”

“대신 상해 오가는 비용이 드니까 권하기 쉬운 건 아니야. 카이가 북경에서 얼마 버는지도 나 잘 모르고. 그런데 상해에 오면 지내고 먹고 하는 건 우리 집에서 해결하면 되고, 일할 곳도 있으니까 괜찮다면.......”

“갈래요. 나 진짜 가도 돼요?”


말해놓고 보니 중간에 말 끊고 너무 크게 외친건가 싶어서 왕카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호가의 얼굴엔 미미하게 기쁜 기색이 돌았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좋아. 부모님껜 말해둘게. 시험 끝나고 가면 되지?”

“네, 연극... 아 그거 너무 늦게 끝나서 선배 오래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먼저 가도 되긴 하는데.”

“괜찮아. 나도 그정도는 있어도 돼.”


어쩐지 말투가 벌써 들떴다. 카이도 설레는 기분이었다.


“나야 같이 가는 게 덜 민망하고요. 선배 부모님께도 괜찮을지 걱정되는데~”

“민망할 게 뭐가 있어. 내가 이렇게 계속 신세졌는걸. 부모님께 자세히는 말 못했지만 기숙사에서 나온 건 알고 계시거든. 나오려면 말씀은 드려야 하니까. 후배한테 신세지고 있다고 했더니 인사하게 데려오라고 하시긴 벌써 하셨는걸. 못 갈 거라고 그랬는데 같이 간다고 하면 좋아하실 거야.”

“며칠 놀러가는 게 아니라 방학 내내 신세질 거니까요. 진짜- 괜찮으려나 모르겠네요.”

“나 혼자인 거보다 북적댄다고 좋아하실 걸.”

“하긴 선배 없어서 부모님은 서운하시겠어요.”

“그러셨지. 그러니까 같이 가면 더 좋아하실 거야. 걱정하지 마.”

“선배랑 같이 방학 보내는 것도 좋고요.”


솔직하게 전해오는 말에 마음이 떨렸다. 호가는 살짝 시선을 피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물었다.


“상해 와 본 적 없다고 했지?”

“네. 처음이에요.”

“마음에 들 거야. 좋은 곳이야.”

“궁금하네요.”

“좋은 곳도 많고, 볼 것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고, 재밌는 것도 많아. 좋아하게 될 거야.”

“상해 홍보 대사 같은 데요?”

“그리고 나도 있고.”


장난치듯 덧붙이자 카이가 즐겁게 웃었다.


“그 이유가 제일 마음에 드네요.”











天很藍 風很淡
파란 하늘 부드러운 바람
你的笑容很‌溫暖
너의 따뜻한 웃는 얼굴
有你在身邊
네가 곁에 있어서
這幸福原來如此‌單
행복이 이렇게 쉬운 거였구나



‌一刻永遠
일각영원: 그대와 영원히

왕개호가 Love potion Project
The fourth : 왕개호가





랑야방/호가/왕카이/정왕종주/카이호가 필모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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