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_사계절

지금까지 쓴 글에서 계절을 묘사하는 대목들을 꼭지별로 모아 보았습니다.

계절 풍경을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자신이 각 계절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는지 모아 놓고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들도 있어서, 발췌만으로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 !! 




봄은 마른 산수국 덤불 속에 숨어 있나 싶더니 죽은 나비 날개처럼 메마른 지난해 헛꽃을 곧 개나리 새움이 뒤덮었다. 산야가 노랗게 불타 지나가고서는 들풀들이 앞다투어 새파랗게 피었다. 

산야는 무성해졌고 칠엽수며 박달나무가 산에는 푸르게, 명아주와 솔나물이 길가에는 자라서 휘끗휘끗 바람에 춤추었다. 더운 해가 식물을 키웠다. 열매는 익고 홀씨가 풀풀 날았다. 


그 해에, 호수가 범람해, 항구만 활기를 띠고 마을은 수초며 생선을 소금에 절여서 쌀과 바꾸어 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고 하는데 제가 마을에 들렀을 때는 홍수가 났던 시기로부터도 두 달이 지난 후라 뻘로 변한 망루 근처가 원래 꽃밭이었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유채 꽃이 샛노랗게 만발했다고 하는데, 이듬해에는 그렇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했지요. 


봄은 자발없는 손님처럼 뭇 집의 문을 두드렸다. 아지랑이 피는 길가로 지난달 붙인 입춘첩 종이가 팔랑거렸다. 낮 볕이 옷 위로 흐를 때 다붓하니 따스하므로 사람들은 옷차림에서 발목을 드러냈다. 봄은 꽃망울처럼 울컥였다. 성밖으로 흐르는 강물이 부풀어 연둣빛이었다. 평야는 선뜻 새움에 몸을 내주었고 헐벗은 가지들이 어려지기 시작했다. 


얼음이 깨지고 물이 흘렀다. 집안에 꾸며 놓은 수로가 살얼음이 되고 아래로 졸졸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부엌살림을 맡아 보는 나이든 종들은 겨우내 묻어 두었던 독을 꺼내다가 씻고 말리고 햇볕에 널 때가 가까웠다고 말했다. 기와 아래로는 고드름 대신 땅에 물 패인 자국이 다시 나기 시작했고, 겉대문과 안대문 사이 숲에 늙은 침엽과 마른 가지들 사이로 연둣빛이 삐죽삐죽거려 때를 못 벗은 척 계절을 낯설어했다. 


사방은 연둣빛이었다. 

첫 번째 대문과 두 번째 대문 사이의 뜰이, 양편에 숲을 거느리고 건물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른 그 뜰이 이제껏 본 적 없는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발밑에는 자잘하게 풀꽃이 가득했다. 흰앵초, 애기봄맞이, 미나리아재비, 춘춘이 말했던 봄까치풀도 있다. 

멀리는 나무들이 온통 자라 여리고도 두텁게 삐죽거렸다. 잡풀과 기르는 풀이 분별 없이 무성했다. 오른쪽의 한편에는 누군가 홀씨를 불어날렸던 것인지 떨어진 동전이 햇살에 반짝이는 것처럼 노오란 민들레들이 밭처럼 자라고 있었다. 저것들이 모두 다시 씨를 뿌리면 몇 해 안에 근처는 죄다 민들레 천지가 될 것이었다.


봄 산이 불그스름한 살굿빛, 새로 트는 싹의 연둣빛, 물 오른 연한 가지 빛깔로 물들고 사이사이 낀 안개가 경계를 번져뜨려 무더기 무더기로 엉기어 서 있었다.

겨우내 마른풀이 옆으로 굴러떨어져내리고 사이사이에서 비죽이 새 나무들이 돋는 산길이었다. 노루귀와 세바람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잘 다져진 산길은 흙먼지를 피워올리지 않았다.


곤륜산의 봄은 이 즈음에도 아직까지 늦어, 산 속에는 봉오리만 매단 큰 꽃들과 아직 피어 있는 생강나무 꽃, 얼음 깨치고 물 졸졸 흐르는 소리, 새 소리, 겨우내 쌓인 낙엽이 봄비에 젖는 냄새들이 난다. 기암절벽이 움츠러들었다가 물기를 품고 부풀기 시작하며 구름이 세력을 불려 봉우리마다 소매를 걸친다.


구름 너머에서 해가 드러나고 모습을 감추고 하면서 빛과 그림자가 그들 위로 계속 흘러갔다. 날은 그 하루 중 가장 따뜻한 때를 넘어가며 드문드문 빛이 하라 씨와 자신의 어깨 위로 떨어지고, 몇몇 꽃들이 움츠러들어 모양을 바꾸는 것을 에이치는 보면서 이런 봄날에 대해 생각했다. 


이따금 도로로 서행하는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상록수는 색 바랜 짙은 초록에서 엷은 초록으로 변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트레이를 반납하고 돌아오는데 하늘을 올려다보니 파랗더군요. 저는 쇼핑백을 쥐고 길을 가다가 멈춰서 있었고, 새 소리가 어디서 재잘재잘 들렸습니다.




여름


여름이 깊었다. 츠쿠바 산도 맨션 주변도 매미 울음소리가 가득해졌다. 짙은 녹음에 햇볕이 내리쬐고 무더위가 밀려오는 계절이었다. 아오바 씨는 방충 약을 샀다. 문틀이 오래된 베란다와 창턱에 약을 쳐 두면 며칠에 한 번씩 크고 작은 벌레들의 시체를 치워야 했다. 소라 쨩은 방학을 했다.


날씨가 좋으니 점심 식사를 뒷마당의 바깥에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요리장이 제안해 하얀 꽃무늬 테이블보를 비늘 잎 야자나무 그늘 아래 깔고 음식을 차릴 때에, 날이 너무 덥다고 땀을 훔치며 일하는 정원사가 정원의 구조물들 위로 얼음처럼 청량한 물을 호스로 뿌려 그것들이 햇볕 아래에 산란하는 때에, 마루를 닦는 것도 쉬면서 하자고 허드렛일을 하는 사용인들이 현관그늘에 주저앉아서 찌는 듯한 날을 이기려고 생 오렌지 즙을 짠 주스를 하나씩 마시는 때에, 아가씨는 더위를 먹은 어린 새처럼 축 늘어져 꺼질 것처럼 깜박이는 눈을 그늘 지우고 있었다.


자주 열어 두곤 하던 창문 밖으로는 바닐라 덩굴이 또 기어올랐다. 마구 쏟아붓는 여름비에 웃자란 풀들은 상근하는 정원사 한 사람으로는 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매 해 태풍 철이 지나고 인부들을 불러다가 하는 보수도 하지 않아 유리창과 벽돌들이 오 년치의 시간으로 뒤덮였다. 


젊은이들이 몰려다니는 복잡한 주말 오후의 거리를 빠져나오고 세타가야의 주택가를 지나는 동안 새파랗게 높던 하늘의 빛깔이 서서히 무심한 남보라로 물들고 있었다. 색채가 강하던 여름 하늘은 그 빛을 산란시키는 광원에서부터 멀어져 갈수록 마치 보이지 않는 습기의 분자가 용해되어 구름을 탄 물처럼 혼탁한 남색, 이를테면 마치 물떼새의 깃에 그럭저럭 색채를 먹인 회색과 같이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6월의 햇볕은 지독히도 밝아 생기 가득한 녹음이 풋내나는 가지의 생장을 분별없이 자랑하며 병실의 창 안으로 비쳐들어왔다. 고요하고도 소란스러웠다.


해가 내리쬐는 여름이었다. 열도를 관통한다던 태풍도 몇 개째 비켜가서 본도는 적막할 정도의 더위에 빠져들었다. 폭력처럼 진한 햇살 아래 빌딩은 달아오르고, 이따금씩 비구름에 관한 희망을 담은 뉴스가 들려와도 창공을 덮은 열 너머로 소요는 먼 태평양 해상의 일이었다. 사이타마의 기상 관측소에서는 일 최고 기온이 39도가 넘었다고 했다. 

 

드리운 처마 그늘 너머로 해가 선명한 연둣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열기가 통로의 경계선 안까지 울렁울렁 침범하려는 한낮. 삼잎 무늬 소매에 이따금씩 햇살의 파편이 내리쬐는 늦여름이었다.




가을

 

난타이 산 산정에서는 간토 평야를 물들인 가을이 휘황하게 내려다보였다. 가까운 산에서 꿀에 담가 나온 것 같은 너도밤나무와 붉은 단풍이 상록수와 어우러져 부챗살처럼 층층이 색채를 펼치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논밭은 아침에 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황량한 느낌이라고는 없이 빼곡하게 짜여 햇가마니 같은 황금색이었다. 마침 날씨도 좋았다. 청명한 하늘이 끝도 없이 이어져 점층된 공기가 안개처럼 대지의 끝을 흐렸다. 바람과 거리로 인해 들판도 멀리 보이는 산세도 녹아들어 지평선은 아득히 흰색이었다.


추분도 지나서 낮이 짧아지는 시기가 오고 있었다. 한낮은 아직까지도 더위를 기억하면서 지나간 계절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었지만 날마다 일러지는 일몰은 피할 수 없는 절기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카바타 마을은 남서쪽으로 츠쿠바 산을 끼고 있어 해가 더 빨리 넘어갔다. 오후 5시 정도만 되면 하늘은 이른 저녁의 짙은 색으로 물들 기미가 보이고, 아침저녁으로 해에 자줏빛이 된다고 해서 시호(紫峰)라는 별칭을 가진 츠쿠바 산 능선은 장려한 노을의 옷을 입을 준비를 한다.

완만한 봉우리는 기우는 해에 붉은 색으로 물들다가 해가 넘어가는 순간에는 일시적인 역광이 되어, 능선에 보이는 나무들이 삐죽삐죽한 검은 윤곽을 나타내며 불타고, 이윽고 빠르게 어두워지는 산정 근처 하늘이 마치 연소와 소화까지의 과정 같았다.

아오바 씨네 맨션에서 가장 잘 보이는 풍경도 이것이었다. 복도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길 건너 공터인데, 여기는 몇 년째 무슨 건축 분쟁 때문에 허허벌판이었다. 2층만 되어도 키 낮은 억새풀은 조망에 아무 영향이 없고, 이어지는 밭이나 집들도 전부 바닥에 납작 붙어 있었다.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면 매번 산이 보였고 일몰은 맨션 전체를 새빨간 주홍색으로 물들였다.


산을 낀 도로에는 키 큰 전나무들이 쓸쓸하고 숱 적은 검은 잎들로 하늘을 가리고, 참빗살나무는 갈색으로 물들인 이파리들을 떨어뜨려 드문드문 열매만 단 채 지기 시작한 땅거미 속에서 스산했다.


그리고, 다자이 씨는 스와자카의 외딴 술집을 나와 큰길로 걸어올라갑니다. 아직 묻히지 않은 쓰루미 강둑을 따라 길을 걸으면 은행 잎이 바닥에 떨어져 온통 바스락거립니다. 여행객들은 공원이며 정원을 간다고 색색깔로 차려입고 하구로 가는데, 오직 다자이 씨만은 자색과 감색의 무늬 없는 하오리를 걸친 채 언덕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람들 사이를 홀로 스쳐지나가는 그 모습이 마치 흰 밥알 속의 검은 콩처럼 외따로입니다.

다자이 씨는 비질이 되지 않은 언덕의 돌 계단을 밟고 올라갑니다. 올해의 새로 떨어진 단풍이 알록달록 내려앉고 작년의 소나무 잎도 있습니다. 나막신 굽으로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낙엽으로 된 언덕의 융단은 두터웠습니다. 언덕 위까지 다 올라가면 숨이 찬 것처럼 다자이 씨는 등정이 끝난 주변 광경을 둘러봅니다. 파란 하늘 아래, 빙글빙글 팔랑팔랑 가을은 절경입니다.




겨울


눈이 무척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내일 적설량을 전하는 뉴스에서 쌓인 눈 위로 자를 꽂으면, 수십 센티미터나 푹 들어가는 장면이 절로 떠오릅니다. 기차가 멈추지나 않을지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걱정입니다.


창 밖을 바라보면, 하늘에는 찢어질 것처럼 매서운 추위로 팽팽한 구름이 띠 모양으로 당겨져 있었어. 병원 20층에 위치한 특실에서는 건너편 호수가 잘 내려다보였는데 수 갈래로 길게 늘어진 얇은 이불보 같은 구름들은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않아서 하늘과 얼어붙은 땅 사이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바람이 길게 부는 밤이었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찬 기단도 하나의 덩어리니까 거대한 양의 물이 몰려오는 모습으로는 파도가 치듯 이 창공에도 북극의 공기가 밀려내려와 구름, 은하수, 별자리 위에 모래 무늬를 그렸을 것이다. 얇고 높은 권운은 눈에 바래는 모시인 듯 단층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휘우우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와 가슴을 저미는 것처럼 채워 주었을 것이다.


크지 않은 두 겹짜리 유리창을 드르륵 열면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는 연말의 밤이 내다보였다. 거리의 불빛들은 운행하는 차들이 전선처럼 흐르고 하늘은 새까맣게 맑았다. 이브는 눈 예보가 있다고 하던가? 보이지 않는 저 어딘가에서 눈구름이 만들어지고 있다면 그 먼지를 다 가져가서 지금 도시의 이 하늘은 별이 보이도록 깨끗한 것 같았다.

이튿날은 일어나자 얇은 축복이라도 온 세상에 내린 것처럼 비단만한 두께로 반짝반짝하는 눈이 길바닥이며 화단과 창문을 온통 덮고 있었다. 밤새 조금 내리다 절묘하게 멎었는지 눈 구름은 흐리도록 풍성하게 드리웠지만 아직까지 더 쏟아내지는 않고 있었으며, 와타루는 태어나서 처음 겨울을 보는 것처럼 그것을 바라보다가 조용한 오전 아침의 식사 불을 올렸다.


포근하다고 해도 제법 떨어진 기온이었다. 아침에 얇게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얼어, 중세 벽화처럼 여러 줄기로 햇볕이 내리쬐면 바닥과 온갖 표면들이 황금이 고인 듯 반짝거렸다. 길을 걸으면 발밑에서는 굳은 설탕막이 부서지는 것처럼 파삭파삭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스미 백은 우지 본가로 돌아와 법당이 있는 언덕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장막을 치는 나무 기둥들이 차밭 사이사이에 우뚝 서 있고 기둥에 맨 천이 나부꼈다. 겨울 차밭은 별이 뜨는 밤하늘 아래서 이듬해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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