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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그리 넓지 않았는데도 온통 먼지가 굴러다니고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적어도 연구원이자 탐사팀장인 김씨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그는 굉장히 오랫동안 샤워를 하며 온수를 만끽한 다음, 정말 순식간에 비누칠을 끝내고 대충 머리를 말리며 나왔다. 적적해서 틀어놓은 홀로 TV에서는 잠시 얼핏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1주일만 지나서 보면 어디에도 쓸 곳이 없는 물건들만 골라서 파는 광고들이 지나간 뒤, 그가 집을 떠나기 전이랑 전혀 다른 앵커가 뉴스를 전달하고 있었다.

“......다음 뉴스입니다. 외우주에서 발견된 기술, 통칭 E(Extraterrestrial)-테크놀로지에 의해 현존하는 모든 인류의 질병의 발생 기작이 해명되었고, 앞으로는...”

꿈 같은 이야기였다. 물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당연하게도, 저건 김씨가 찾아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암흑의 진공을 아광속으로 몇 개월이나 항행해, 이미 주인들이 떠난 ‘빈 집’들을 열심히 뒤지는 것이 그와 동료들의 일이었다. 마치 전쟁터라도 되는 것처럼 박살난 폐허 속에서 간신히 현존 인류와 유사해 보이는 방식의 저장장치를 찾아냈을 때의 전율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지만, 이미 지난 일일 뿐이었다. 그는 처음 저걸 찾아내서 귀환했을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게 전부인가?”

아직까지도 선한, 그 콧수염 뚱땡이의 얼굴이 팀장의 뇌리에 떠올랐다. 물론 그의 배는 단순히 기름이 아니고, 수많은 눈먼 돈이 끼어 있었다. 그의 머리 뒤에는 <한국 5차산업 미래 외우주항행 프로젝트>라는 그럴싸한 문구가 마찬가지로 돈을 많이 주고 만들었을 법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로고와 함께 수놓아져 있었다.

“네.”

그는 그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정수리 한가운데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물론 뭘 가지고 와도 좋은 소리를 들으리라는 생각은 한 적도 없었다. 애초에 프로젝트 시작부터가 큰 일이었으니까. 책상 위에 있는 보고서 두께가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사실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얇은 두께는 아니었다. 다만 위에서 원하는 정보가 들어있지 않았을 뿐이지.

“장난하나?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건 없나?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건?”

“하지만 단장님, 이것만으로도 굉장한 가치가 있고……무엇보다도 인류 이전에 고대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너희 먹물들은 맨날 그런 소리만 하지. 연구는 어차피 계 같은 거라서 사람들이 쌓아올린 것에 대단한 발견이 나타난다는 둥…… 그렇게 열심히 연구비를 떼먹고 뱃속으로 죄다 처넣잖아? 그래, 그게 그런 가치가 있다고 치자.”

5차 산업혁명은 우주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열심히 부추기던 정부의 높은 양반이었다. 물론 탁상 위에 앉아서 반쯤 사기나 다름없는 무작위 조합으로 눈먼 돈이나 빨아먹고 있는 작자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가 코미디였지만, 어쨌건 그는 단장 같은 머리 아래가 아니면 달려있을 수 없는 사지, 더 나쁘게 말하면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아니…단장님. 애초에 산업화 같은 이야기는…”

“아니는 무슨 아니! 당장 써먹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야? 이딴 일에 돈을 투자하도록 장관님을 설득한 내 잘못이네. 이젠 우린 끝장이야…모두 끝장이라고!”

“단장님!”

“프로젝트는 취소다, 취소!”

“애미 뒤진 씨발새끼…”

김씨는 쌍욕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탈탈 털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들이 물기와 뒤섞여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다행히 책임을 떠넘기기만 좋아하는 그 돼지보다 지위도 권력도 받는 돈도 하잘것없는 여럿이 가서 싹싹 빌며 월급에서 떼서 뇌물까지 찔러준 결과 몇 년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외우주항행의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그들은 밤도 낮도 없는 분석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가 지금 보고 있는 것 같은 뉴스였고, 또 김씨의 몸 여기저기에 나 있는 발진 자국이었다. 오늘도 쑤시는데다 방금 뉴스가 별로 즐겁지 않은 기억을 휘저어 일으킨 탓에 그는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또 다음 뉴스입니다. 최근 E-테크놀로지의 발표와 함께, 수많은 종교단체들이 신의 존재가 증명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앵커가 말한 다른 뉴스에 그는 머리를 말리다 말고 텔레비전 밑의 서랍장을 걷어찼다. 그리고 엄지발가락에 격심한 통증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고통으로 살짝 혼미해진 눈으로 쳐다본 발가락은 다행히도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발톱도 깨지지 않아 멀쩡했다. 다만 아플 뿐.

“......은 드디어 인류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수많은 질병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수많은 불경한 자들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빚으신 자비로운 존재가 내린 것이 아니고서 무엇이냐며 기자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물론 만기일에 쫓겨 급히 제출한 보고서이긴 했지만, 이게 만일 이런 결과를 낳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김씨는 절대로 보고서 같은 건 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자신을 먹여살리고 있는 알량한 돈과 자식이 자신들을 부양해줄 것이라 철썩같이 믿는 부모 얼굴과 상당히 오래 저울질해야 했겠지만. 계속해서 뉴스에서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며 김씨는 서랍장 위의 매끈한 검은 표면에 비친, 발진으로 흉해진 얼굴을 눈치챘다.

“어차피 얼굴로 벌어먹는 직종도 아닌데 뭐……”

아무도 없는데 혼자 넋두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는 끔찍하게도 자신이 혐오하는 이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이 소위 말하는 E-테크놀로지라는 것에 모종의 기대를 품고 있다는 점에 자기혐오의 하강나선에 빠졌다. 그리고 자신이 수년간 돌아다녔던 우주의 진공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차디찬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쓰러지듯이 누워 꿈도 없이 깊은 잠에 들었다.

*

여전히 격무에 시달리며 오늘도 야근이었고, 김씨는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물론 형광등 아래에 비친 그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었으나, 얼굴의 발진 자국은 이제 찾아볼 수도 없이 말끔해졌다. 사실 그 발표가 있었던지 수년, 이제 대상포진은 다른 수많은 질병과 다름없이 구제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자리를 잃거나, 혹은 그 문헌을 해석해서 앞다투어 새로운 연구를 발표하는 것으로 부와 명성을 얻었다. 테이블 위의 전화가 울렸고, 김씨는 3초도 채 되지 않아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건너편으로 누군가가 분노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수화기가 울렸다.

“예, 예. 장관님. 김ㅇㅇ입니다. 예, 그때까지는 꼭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예.”

물론 김씨처럼 삶이 그렇게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튼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달리 없었고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나갈만큼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작성하고 있는 문서의 제목은 ‘한국 5차산업 미래 외우주항행단 프로젝트 예산계획서’였다. 그 아래에는 수많은 이름이 들어간 명단과 막대한 액수의 돈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김씨가 하는 일은 그때와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이제 뒤통수에 그 홀로그램 엠블렘을 둔 채로 비싼 책상 뒤에서 일하게 되었다. 물론 전 단장은 모든 공로가 자신 덕분이었다고 열심히 떠들고 다녔고, 마찬가지로 자기 같은 기생충들이 우글거리는 다른 단체에 더 높고 그럴싸한 직위로 임전되었다. 그 뒤의 소식은 김씨로서는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더 역겨운 점은 이 자리에 앉아보고서야 전 단장이 얼마나 태업하면서 얼마를 해처먹었는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심판 같은 게 내려지지 않았는지 싫어도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는 와중, 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완전히 사색이 된 팀장 하나가 들어왔다.

“단장님, 최상…최 연구원이 패닉 상태에 빠졌는데요……”

김 단장이 그 이름을 듣고 떠올린 얼굴은 패닉 같은 것이랑은 제일 거리가 멀 것 같은 무사태평한 표정이었다.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었고, 학위 과정에서도 간접적으로 체험했을지도 모르는 국가 연구소 일정의 빡빡함이 그에게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병가 내고 쉬라 그래…어차피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잖아?”

“그게 아니고……”

팀장은 뭔가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단장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일이 터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팀장의 인도 하에 연구동으로 향했다.

연구동은 단장이 있을 적에 비해서 넓어졌을 뿐, 장비 수준은 거의 그때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늘 그렇듯, 인력으로 때울 수 있다면 때워버리는 어딘가의 나쁜 습관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뭔가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팀장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홍해라도 된 것처럼 좌우로 갈라섰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바닥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최 연구원이었다.

“이히히…헤헤헤…모델…모델……”

패닉은 점잖게 표현한 것이었고, 오히려 그는 고대의 사육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광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니면, H.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목격하고 살아남은 것만 같았다.

“단장님.”

“아, 씨발, 좆됐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단장은 애써 못 들은 척 했다.

“대체 뭔 일이야?”

“그게요, 상진이…...최 연구원이 데이터 분석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요, 자기 파트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저렇게……”

연구동의 구석 벽에는 ‘축! 제 2 E문서 발견!’ 이라는 문구와 함께 크게 인쇄된 단체사진, 그리고 아크릴 케이스에 예쁘게 모셔져 있는 또 다른 외계문명 저장장치의 사진이 순서대로 붙여져 있었다. 그 옆에는 이전에 발견한 유물이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크고 멋진 다이어그램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단장은 불쾌한 기시감을 느꼈다. 물론 그 때보다는 상황이 조금 나았다. 이게 다 그 염병할 E-테크놀로지 덕분이었다.

“말고 본 사람 있어?”

“그게, 이게 일종의 문서화되어서 대뇌와 연산체계에 간섭해 파괴하는 문서병기일 가능성이 있어서……”

다들 최 연구원의 패닉이 전염되었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사례는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었다. 보고되었다고 해봐야 음모론자들과 호사가들의 소위 말하는 유튜브 채널에서나 떠들어댄 내용이었고, 실제로 밝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켜봐……”

“단장님!”

“야, 누가 말려봐!”

“어차피 이게 진짜 그거더라도 책임지는 건 나잖아?! 비켜!”

김 단장은 최 연구원의 컴퓨터를 기세 좋게 켰다. 시간상 한참 전에 잠겼는지 ‘올바른 패스워드를 입력하십시오’라는 경고창만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그 점이 오히려 김 단장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패스워드 뭐야?”

“1q2w3e4r요……”

“야, 보안 보안 노래를 부르는 놈들이 패스워드 하나를 이렇게 쓰고 있으면 어떻게 해?! 아주 자식 손주들한테도 물려주겠다…”

“저번 달에는 1q2w3e4r!이었는걸요.”

“됐다…너희들에게 물어본 내 잘못이지.”

모두가 단장이 예의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모습을 숨죽이고 쳐다봤다. 단장은 모니터에 코를 박으려다가, 슬슬 오고 있는 노안 때문인지 뒤쪽으로 고개를 쭈욱 빼고는 바탕화면에 띄워져 있는 문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흐…음……”

단장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졌다. 그리고 주변에서 두려워하는지 기대하는지 알 수 없는대로, 그는 문서를 보다 말고 휘청이며 바닥에 엎어져서 헛구역질을 했다. 술렁거림이 짧은 비명과 패닉으로 변했다.

“야, 누가 구급차 좀 불러!”

“됐어…괜찮아…아직은.”

단장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어나서 파일을 저장하고, 압축한 다음 자기 메일로 보내고는 컴퓨터를 꺼 버렸다.

“양 팀장.”

“네.”

“상진이 컴퓨터는 내 자리에다 갖다주고, 이 프로젝트는 일단 중지다. 알겠어?”

보통이라면 다들 격하게 들고 일어났을테지만, 모두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상진이 좀 잘 돌봐줘. 안 그러면 내가 갈거야.”

“예……”

양 팀장이 싫은 티를 팍팍 냈다. 반응으로 봐서는 최 연구원은 아주 극진히 대접받을 것이었다. 다른 연구원이 본체를 분리해서 단장을 따라 쭐레쭐레 걷는 가운데,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자리로, 그리고 멀리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며 들어온 구급대원들이 최 연구원을 들것에 싣고 나갔다. 다소의 불안한 분위기만 제외하고는, 연구동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반쯤 액체화된 공기가 흐르는 것 같은 권태로운 분위기로 돌아왔다.

*

아직까지도 환자복을 입은 채로, 최 연구원이 병원을 거닐고 있었다. 분명히 외상은 하나도 없었지만 파리해 보이는 것이, 아직도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한편, 그 옆에는 김 단장이 함께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커피 컵 두 개를 함께 들고다니고 있었는데, 이 날씨에도 김이 하나도 올라오질 않는데다 거의 줄어들지 않았었다.

“단장님, 겁나 부담스럽거든요……”

“너 잘못되면 누가 제일 먼저 좆되는 줄 아냐? 나거든?”

“그거…보셨어요?”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단장은 정색했다. 그는 한참을 최 연구원과 마주보고 있다가, 못 이기겠다는 양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 내용이 사실일까요? 아무리 봐도 인……”

최 연구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단장이 입을 막고 주변을 둘러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 시간의 이 장소에는 그들 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해부, 각종 실험, 유전자 조작…됐다. 여기까지만 하자.”

둘 다 속이 몹시 안 좋은 것 같은 표정이 된 가운데, 최 연구원은 자신이 괜히 또 기억의 흙탕물을 휘저어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단장은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면서 옆에 있는 축대 밑으로 몸을 던지려는 맹렬한 충동에 저항하다가, 간신히 큰 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아니, 사과는 내가 해야지.”

그들은 그 의미를 곱씹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편해지는 방법은 수도 없이 있었다. 단지 망각하고 누군가에게 생각 자체를 맡겨버린다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그럴 수 없게 만들어진 인간들이었다.

“이 일 말이다……”

“알고 있어요.”

단장은 최 연구원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도 그런 종류의 일이겠지. 맛집 블로그가 협찬을 받는 방법이라던가, 화장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던가.”

“뒷일은 어떻게 하시게요?”

“글쎄다? 지금까지 딱히 계획대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 없어요?”

최 연구원의 말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사실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부쩍 늘어난 퇴직자들. 최 연구원도 알고 있었다. 병원의 벽이 부드러운 곳에 누가 새로 들어왔는지도. 그야 복도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지금도 이 모양이었다. 만일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인류의 밝은 미래’와 ‘인류를 빚으신 자비로운 신’. 그들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진상을 알게 된 다음에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단장의 안에서 음습한 쾌감 같은 것이 밀고 올라왔다가 간신히 가라앉았다.

“역시, 다들 근본은 근본이라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를 못하네요. 패스워드라도 조금 더 복잡하게 설정해 놨으면 나았으려나……”

“그래. 그게 문제인갑다.”

단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 연구원도 쓴웃음을 짓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단장은 지금이라도 배가 터져라 웃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미 최 연구원도 자신도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와중, 병원 현수막에 ‘E-Therapy 도입 10주년 기념 행사’라는 플래카드가 강풍을 받아 펄럭이는 가운데, 환자들이 서 있는 곳 주변에서 시궁쥐 하나가 뭔가 먹을 것이라도 있는지 들쑤시다가 인기척이 나자 잽싸게 사라졌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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