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수인물인데 제 마음대로 수인에 대한 이런저런 설정을 넣었습니다.





금요일 교양수업이 끝난 후, 회식을 하자며 고깃집으로 끌고 가려는 팀원들을 뿌리친 승연은 급히 집으로 향했다. 습관적으로 들르던 피씨방이나 학교 앞 술집 출석 빈도를 확 줄인 지 몇 달. 살다시피 하던 작업실은 바닥에 먼지가 뽀얗게 쌓였고 웬만한 장비는 다 집으로 가져와 집에서 하는 곡 작업의 수가 훨씬 많아졌다. 이중 방음벽을 설치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작업 공간을 옮길 만큼 그곳에 붙어 있게 만든 그 원인을 떠올리며 승연은 서둘러 운전석에 올라 벨트를 맸다. 수업 하는 내내 울리던 언제 와? 학교 끝나고 바로 와? 하는 카톡 알림의 이유를 몰라 마음이 조금 급했다.


"우석아-. 나 왔어."


마중냥이까지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승연이 비밀번호를 치고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나면 멀리서라도 고개를 빼꼼 내밀었었는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다. 고양이로 변해서 옷장 안에 들어가 있나. 냉장고 위에 올라가서 자고 있는 건가. 우석아, 김우석? 나 왔는데 인사 안 해줘? 승연은 현관에서부터 우석을 애타게 부르며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승연주인. 나랑 얘기 좀 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동글동글한 뒤통수와 무언가 못마땅한 듯 투덜대는 익숙한 목소리. 승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요즘 수인 학교에서 유행하는 주말드라마를 꼬박 챙겨보더니 거기서 저런 사모님스러운 표정과 포즈를 배웠나. 퉁퉁 불어터진 볼을 한 우석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 승연을 노려보며 소파에 앉아있다.





승연의 호칭이 '승연주인'이 되었다 함은 우석이 평소와는 다른 기분 상태라는 걸 뜻했다. 원래 부르는 건 이름인 승연아, 몸에 좋지 않은 간식을 달라고 떼를 쓸 때 부르는 주인 정도이다. 승연주인은 마치 급식 시절 학원을 땡땡이치다 걸렸을 때 엄마가 무섭게 성까지 붙여 부르는 조승연!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되려나. 술에 꼴아 늦게 들어와 뺨을 비비는 철부지 남편을 타박하는 쪽에 더 가까울까.


"응, 우석아."


하지만 아무리 화를 내 봤자 김우석은 김우석이다. 승연은 나름 앙칼지게 저를 노려보는 고양이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 승연은 우석의 앞에 마주 앉아 팔짱 낀 팔을 살살 잡아 풀고 우석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내가 분명히 영어 공책 준비해 달랬지."

"응. 아침에 챙겨줬잖아. 공책이 마음에 안 들었어?"


까맣게 잊고 있다 아침에 생각난 바람에 급히 책장에 꽂힌 영어 -로 추정되는- 공책을 가방에 들려 보낸 터라 미안한 마음을 좀 가지고 있던 참이었는데. 공책의 그림이 너무 아동틱해서 성에 안 찼나. 우석은 요즘 부쩍 머리가 커지고 있는 중이었다. 막 승연의 집에 왔을 때 사준 어린이 고양이 용 장난감에 흥미를 잃은 점만 보아도 그러했다. 네 맘에 드는 걸로 다시 사주겠다고 말하려 입을 여는데 우석이 소파 앞에 놓인 제 책가방에서 주섬주섬 공책을 꺼내 승연의 눈앞에 펼친다.


"이것 좀 봐. 승연주인 눈엔 줄이 몇 개야?"

"줄이? 네 개지."

"잘 봐. 네 개야?"

"…엥? 다섯 개네?"

"……."

"아, 음악 공책이잖아, 이거."


제 책장에 왜 학생용 음악 공책이 꽂혀있던 건지는 집주인인 승연조차 알 수 없었다. 제가 작업에 쓰는 건 스프링이 달린 A4 노트였기 때문에 졸린 눈을 비비며 대충 펼쳐본 뒤 별 의심 없이 우석의 가방에 넣어줬던 게 틀린 선택이었나 보다. 잘못 가져간 공책으로라도 수업을 따라가려 했던 건지 오선지에 삐뚤빼뚤 쓰인 알파벳들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날 것 같다.


"미안해, 우석아. 아침이라 잠이 덜 깨서 실수했다."

"영어공책 주랬는데 음악공책을 주면 어떡해? 다들 줄이 네 개인데 나만 다섯 개였어."


입이 댓 발 나왔다. 딴엔 제 묘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한 아주 큰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반질반질하게 잘생긴 진지한 얼굴을 하고 하는 말이란 게 고작 공책 줄의 갯수라니. 그 간극이 너무 귀여워 승연은 당장이라도 우석을 품에 넣고 몸이 부서져라 껴안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하지만 여기서 그렇게 웃어 버리면 정말 크게 토라질 것 같아서. 승연은 올라가는 광대를 내리누르려 애쓰며 우석의 손을 붙잡고 조근조근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생님께 야단맞았어? 준비물 잘못 챙겨가서?"

"아니. 우리 선생님은 훌륭한 분이라 그런 걸로 야단 안 치셔."

"근데 왜 그렇게 뿔이 났지, 우리 우석이가?"

"…옆자리 똥개가 나한테 4랑 5랑 숫자도 못 세냐고 놀리잖아."

"아, 그 셰퍼드 친구?"

"걔 내 친구 아니거든?"


봐봐. 나는 이제 세 자릿수의 곱셈도 틀리지 않는 똑똑한 고양이인데 승연주인은 내가 그렇게 숫자 모르는 고양이 취급받았으면 좋겠어? 분해 죽겠다는 듯 쉴 새 없이 쫑알댄다. 제 짝인 셰퍼드 수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티격 대는지 수인학교가 끝나면 꼭 승연에게 와 한 마디씩 흉을 봐 왔던 우석이다. 그런 친구에게 놀림을 받았으니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승연의 손을 뿌리친 우석이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뭐? 그 나쁜 개가 우리 우석이를 놀렸어? 내가 가서 혼 내줘? 승연은 우석의 편을 들어주려 일부러 더 오버해 역정을 내며 우석과 눈을 맞췄다.


"잘못 챙겨줘서 미안해. 한 번만 봐주세요, 우석아."


그놈의 학교는 내가 매달 내는 돈이 얼마인데. 그런 자잘한 준비물 정도는 학교 측에서 알아서 준비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우석의 양 뺨을 마주 잡고 말랑한 볼을 조물조물대며 맘속으로 우석이 다니는 수인학교에 대한 원망을 조금 해 본다. 한글은 다 뗐고 이제 막 수인기초영어 수업에 들어가기 시작한, 냥춘기를 지나고 있는 제 고양이를 눈에 가득 담는다.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 누가 봐도 나 고양이 수인이에요, 알리고 있는 살짝 올라간 눈매가 사랑스럽다.


"츄르 먹을까요? 그러면 기분이 좀 풀릴까요?"

"……네가 그럴 줄 알고 벌써 두 개 까먹었어."


하지만 비싼 돈을 받아먹은 학교가 준비물 개별 준비라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조차 다 용서 가능할 만큼 우석의 귀여운 투정을 받아주는 이 순간은 행복하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삐치고, 제가 원할 때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으며 하루에 한 개만 먹기로 약속했던 츄르를 찬장에서 마음대로 꺼내 먹고. 그러면서도 거짓말은 못 해 조그만 목소리로 두 개 먹었다고 웅얼웅얼 고백하는, 이 제멋대로인 말썽쟁이 고양이를 사랑한다.




디어 마이 러블리 키티 1




첫 만남은 뻔했다. 몇 날 며칠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 온 길이 얼음으로 덮였던 추운 날. 승연은 새벽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몇 시간 내내 헤드셋을 끼고 큰 소리의 음악을 들어 귀가 피로했던 터라 하마터면 전봇대 근처 쓰레기 더미에서 나는 조그만 소리를 듣지 못할 뻔했다.

낑낑대는 게 처음엔 쥐새끼인 줄 알았다. 그렇다기엔 쓰레기 봉지가 바스락 대지 않고 얌전한데.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그날 따라 왠지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발견한 건 추위를 조금이라도 피해 보려는 듯 검은 봉지들 사이에 꼭 끼어있는 흰색 고양이. 날이 얼마나 추웠던지 겨우 내뱉는 숨결에 뿌연 김이 함께 따라나왔다. 숨이 옅은 고양이는 딱했지만, 눈을 뜨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차 아름다웠다. 그 뻔한 첫만남을 비현실적으로 특별하게 만들어 줄 만큼.


재빨리 안아 집으로 데려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계속 그곳에 두었다가는 그 추운 새벽을 넘기지 못했을 거다. 밤새도록 전기장판 속에 넣어 온몸을 마사지하고, 시간마다 알람을 맞춰 잘 먹지 못하는 사료를 조금씩 입에 흘려준 승연의 정성덕에 고양이는 기력을 되찾았다. 며칠이 지나자 우다다로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승연이 애지중지 진열해 놓은 미니언즈 피규어들을 와장창 무너뜨릴 만큼.

이를 바득바득 갈며 쓰러진 제 친구들을 정리하면서도 승연은 그 딱한 고양이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그 추운 새벽, 마침 이어폰을 꼽지 않고 있어 겨우 들을 수 있었던 작은 숨소리. 우리가 그렇게 만난 건 기적이고 아주 낭만적인 일이야. 승연은 고양이를 안아들고 그렇게 속삭였다. 이름을 낭만이로 지으며.


물론 며칠 후 웬 벌거벗은 다 큰 남자가 침대에서 자고있는 저를 흔들어 깨웠을 땐 경기를 일으키며 기절할 뻔했다. 겨우 베개 하나를 방패 삼아 방 코너에 붙어 나가라고 고성을 지르던 승연과, 처음 인간화 해 저도 제 몸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고 울먹이던 남자. 그 둘을 품은 방의 공기가 혼란으로 가득했다.

저 알몸 변태 새끼 신고를 하네 마네 한바탕 야단법석을 피우고 나서야 그 남자가 제가 주워온 고양이, 낭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수인은 개체 수가 적었고 값비싼 몸값 덕분에 분양 전 상태에서는 정부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그날 우석이 왜 길에서 죽어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낭만이가 보통 고양이가 아닌, 함께 살기 수 만 배 까다로운 수인이라고 해서 정부 보호소로 보내기엔 승연은 정이 많고 마음이 여렸다. 사실 그 잘생김과 예쁨을 동시에 가진 묘한 선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홀려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시작되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서로의 인생을 송두리 째 바꿔 놓을 둘의 동거가. 새침한 고양이 수인 김우석은 하루 아침에 얼빠 조승연 인생을 저당잡아버렸다. 그리고 함께의 시작이었던 겨울을 지나 계절은 어느새 몇 번 바뀌어 가을의 한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우석의 학교에 호출당했다. 참 나, 어이가 없네. 이 나이 먹고 학교에서 사고 친 사춘기 자녀를 둔 학부형의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정작 승연 본인은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 할 만한 잘못은 저지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처음에 우석이 짝과 시비가 붙었다는 담임선생님의 연락을 받았을 땐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 셰퍼드가 우리 고양이를 물어뜯기라도 했으면? 상처가 난 채 쓰러진 우석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이가 달달 떨리며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다친 쪽은 그 커다란 개였다. 늘 그렇듯 둘이 말싸움을 하다가 심기가 불편해진 우석이 손톱을 세워 셰퍼드의 뺨을 잔뜩 긁어놨다고. 흥분한 셰퍼드가 동물화해 우석을 덮치려 했을 때 교실에 있던 체격 좋은 선생님이 겨우 제압해 더 큰 싸움은 막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승연이 교무실에 도착했을 때 우석은 멀뚱하게 교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맞은 편엔 꽤 충격을 받은 건지 개로 변한 셰퍼드가 보호자에게 목줄을 잡힌 채 시무룩하게 바닥에 엎드려있다. 한쪽 뺨에 거즈를 덕지덕지 댄 상태로. 승연은 저를 발견하고 눈치를 보듯 눈을 도르륵 굴리는 우석을 지나 상대 쪽의 보호자 앞으로 갔다. 일단 사과를 하고 치료비와, 원한다면 위로금까지 지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먼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연 건 셰퍼드 옆에 서 있던 정장을 빼입은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 말씀드려 단단히 주의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예? 아, 저희 쪽도 죄송합니다."

"이렇게 자제력 없이 아무 데서나 모습 바꾸는 짐승으로 키운 적이 없는데."


그렇게 말한 남자는 한심하다는 듯 개를 내려다보며 쯔, 혀를 찼다. 그리고 곧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승연에게 건넸다.


XX 건설 비서실

비서실장 XXX.


아, 여기 그룹? 승연이 받아든 금박 명함엔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건설회사가 쓰여 있었다. 비싼 학비를 자랑하는 학교였기 때문에 고위집안의 수인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는데 그 회사 대표가 키우는 수인이 우석과 같은 반에 있다는 걸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셰퍼드는 제 보호자의 말을 듣고 더욱 기가 죽은 건지 바닥에 늘어뜨린 제 꼬리를 말아 엉덩이를 감쌌다.

그는 우석과 같은 수인이지만 가정 내 위치는 다른 듯했다. 사회가 변하면서 예전에는 집을 지키는 집사나, 심하면 하인 정도까지 취급 되던 수인의 사회적 위치도 높아진지 오래이다. 이제 수인은 보통의 애완동물 이상의 감정을 교류하는 가족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능력만 된다면 인간과 똑같이 대학을 다니고 직장도 구할 수 있었다.

수인은 워낙 개체 수가 적어 귀했고 기르는 데에도 큰 비용이 들었다. 때문에 수인을 키운다는 건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간혹 남에게 과시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족보있는 비싼 수인을 분양 받아 제 수행집사 노릇을 시키며 남들에게 보여주는 걸 즐기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수인에게 애정과 사랑을 주기 보다 수인이 어릴 때부터 제 입에 맞게 아주 엄격하게 교육했다. 저 셰퍼드도 그렇게 길러지는 수인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전후 상황을 알고 나니 축 처진 귀가 더욱 안쓰러워 보인다.


"김우석. 너도 미안하다고 해, 친구한테."

"……."

"네가 할퀴어서 친구 뺨에 피 났잖아. 얼른."


이 똥고양이가 고집은 어찌나 센지 꾹 다문 입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승연의 재촉에도 뾰로통한 채 손톱의 거스러미나 뜯는 척하는 우석을 보고 오히려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바삐 자리를 떠난 건 셰퍼드 보호자 쪽이었다. 승연은 결국 우석의 담임선생님께만 여러 차례 사과를 하고 집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씁, 팔 자꾸 내려간다."


겁을 줄 용도로 찾아 꺼내 온 드럼 스틱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자 위에서 꼼지락대던 손이 서로 떨어지고 팔이 귀에 바싹 붙는다. 무릎을 꿇리고 손을 드는 벌을 주기 시작한 지 십 분쯤 됐을까. 슬슬 우석의 짧은 참을성에 한계가 오는지 앞을 지키며 엄한 척, 무섭게 눈을 뜨고 있는 승연의 눈치를 보며 낑낑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팔 아파요, 승연아…."

"아프라고 벌주는데 아파야지. 네가 할퀴어서 볼 그렇게 된 친구는 얼마나 아팠겠어."


승연은 우석이 '착하고 올바른' 수인으로 자라는 걸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기적이면 좀 어때. 막무가내로 떼를 써도 승연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고양이일 뿐이다. 하지만 아까의 경우는,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우석은 제 덩치에 비해 힘이 셌고 길 생활 덕분인지 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까지 했다. 말싸움을 하다 짝의 얼굴을 손톱으로 난도질하다시피 했고 그에 흥분한 짝은 대형견으로 변해 우석을 공격하려 했다. 급히 달려온 선생님의 제지가 아니었다면 우석은 큰 상처를 입었을 게 분명했다. 심할 경우 목덜미가 너덜너덜해지게 물어뜯겼을 수도 있겠지.

우석에게 강약약강으로 살아가라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저렇게 이상한 포인트에서 강강약약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는 건 더욱 아니었다. 승연은 우석이 그런 위험한 상황을 겪는 걸 막고 싶었다. 적어도 함부로 적은 만들지 않는,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사회에서 제 몫을 해내는 수인이 되길 바랐다.


"나도 손목 아파. 아까 똥개가 확 잡았단 말야."

"친구한테 똥개라고 하지 마."


그 셰퍼드 분양가가 천 단위는 우습게 넘어가는데 똥개라니 우석아…. 이렇게 말했다간 너 나는 길고양이라서 띠껍냐? 너어 정말 누구 편이야! 또 난리난리를 칠 게 뻔하니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는 말이었지만.

제대로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벌을 계속 주려고 했는데. 늘 예쁘다 예쁘다만 해주는 평소와 다르게 차가운 승연의 태도가 서러운지 눈가가 점점 벌게지는 우석을 보니 자꾸 마음이 약해진다. 한 층 풀린 목소리로 팔 내리고 다리를 풀어도 좋다고 하자 승연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팔을 호다닥 내린 우석이 주먹으로 통통 저린 허벅지를 두드린다.


"내일 학교 가서 사과 다시 해."

"…왜 자꾸 나한테 사과하라고 해?"

"네가 잘못 했으니까 하라고 하지."

"걔가 먼저 시비 걸었어. 네가 만든 노래 들려줬는데 안 좋다고 했어."


우석은 승연의 작업물을 좋아했다. 가끔 가사에 쓰인 비속어의 뜻을 집요하게 물어 곤란하게 만들긴 했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며 항변을 하는데 그 이유가 저 때문이라니.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보통 때 같으면 제 노래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을 알못이다, 막귀다 정하고 비웃어 버리는 성격의 승연이지만 이번 만큼은 우석이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 답지도 않게 어른스러운 척 타일러 본다.


"그래도 친구 때리면 안 돼. 노래가 취향이 아닌가 보지."

"힙합 만이 국가에서 허용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했더니 비웃었단 말이야."


그런 말은… 비웃음당할 만 하단다 우석아. 제 노래를 들려주며 장난스레 했던 말을 밖에 나가서까지 했을 줄이야. 이래서 애들 앞에선 말조심해야 한다는 거구나. 무슨 거대 악의 무리에 저항이라도 하듯 자랑스럽게 말하는 우석이 어이가 없어 자꾸 헛웃음이 나올 것 같다. 


"그럼 너도 말로 싸워 이겨야지 우석아. 그런 사나운 종들한테 함부로 손톱 세우면 안 돼."

"왜? 내가 작고 싶어서 작은 종인 것도 아닌데."

"너 그럼 앞으로 성질날 때마다 그렇게 남 때릴 거야?"

"몰라. 봐서."


당연히 맞는 것보다야 때리는 게 백 배고 천 배고 낫지만, 이건 상황이 다르잖아. 그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가르치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어쩜 이렇게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하는 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우석의 태도에 승연도 슬슬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손 내밀어, 김우석."

"뭐어?"

"얼른."


매를 들 생각은 없었는데. 그제야 저는 잘못이 전혀 없다는 듯 당당하던 눈동자가 일렁인다. 우석이 잽싸게 손을 등 뒤로 가져가 숨기고 도리도리,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네가 자꾸 반성 안 하고 뻐팅기잖아. 빨리, 손."


가끔 앉혀 놓고 휴지를 찢어발겨 놓지 말아라, 고양이로 변했을 때 옷장에 들어가서 뒹굴지 말아라, 잔소리야 하지만 이런 식의 훈육은 처음이었다.


"너 만약에 교실에 체육 선생님 안 계셨으면 어쩔 뻔했어. 눈앞에서 걔 그렇게 변한 거 보고도 느끼는 거 없어?"

"……."

"그러다 크게 물려서 다쳤으면 어쩌게. 내가 너 다쳐서… 피 뚝뚝 흘리고 치료받는 꼴을 보게 해야겠어?"

"……."

"제발, 밖에선 네 멋대로 굴지 말고 성격 좀 죽여. 응? 우석아. 집에선 내가 다 받아주잖아."


말을 하면 할수록 속이 상해 언성이 높아지다가 이젠 제발 그러지 말라며 부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디 꿰매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게. 승연은 우석이 다쳐서 아파하는 꼴을 제 눈으로 볼 자신이 절대 없었다. 그런 가정도 하고 싶지 않았다. 중간엔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숨까지 한 번 골랐다. 승연의 진심에 우석도 뭔가 느끼긴 했는지 내내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꼭 말아 넣는다.


"손 이리 가져와."


그런 우석을 다시 재촉하며 드럼 스틱으로 제 앞을 가리켰다. 겁이 나는 건지 울먹이며 꾹 다문 입술이 잔뜩 삐쭉인다. 승연은 꾸물대며 다가오는 우석의 양손 끝을 잡아채 제 앞으로 당겼다.


"다섯 대 맞을 건데, 내일 학교 가서 사과한다고 약속하면 세 대로 줄여 줄 거야."

"승연아…."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말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울먹울먹 사과할 거야, 하는 우석이 안쓰러워 한숨을 한 번 푹 내쉰다. 본성이 독하지 않아 어차피 이렇게 나올 거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린 건지. 우석의 손 끝을 모아 고쳐잡은 승연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응, 착하다. 화난다고 친구 때리면 못 쓰는 거야."


제 손바닥 위로 올라온 막대기를 보고 우석이 눈을 질끈 감았다. 탁, 탁탁. 승연은 빠르게 세 번 우석의 손바닥 위로 매를 떨어뜨렸다. 정신적 충격 요법일 뿐이니 너무 아프지 않게 적당히 따끔할 정도만. 벌이 끝났단 의미로 승연은 손바닥을 잡아 살살 문질러 주었다. 이제 아직 뻐근할 어깨도 주물러주고 다리도 마사지해주고. 때려서 미안해요, 하고 손에 뽀뽀를 쪽쪽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펑-. 쥐고 있던 우석의 손이 사라졌다. 눈 앞에서 순식간에 고양이로 변한 우석은 승연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높은 부엌 찬장 위로 호다닥 뛰어 올라가 버린다.

에휴. 저거 엄청 삐쳤네.





*

"김우석. 계속 고양이로 있을 거야? 나 닭발 시켰는데?"


한밤중인데. 배도 고프지 않은 건지, 아니면 참고 있는 건지 고양이가 된 우석은 단 한 번 도 승연이 있는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속이 타는 건 승연이다. 결국 우석이 가장 좋아하는 닭발, 그것도 제일 매운맛을 시켜 우석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해본다.


"나 혼자 먹는다? 빨리 내려와. 식으면 맛없어."


일부러 작은 테이블을 거실로 가져와 펴 우석이 볼 수 있는 위치에 앉는다. 보란 듯이 한 개를 입에 물었다가, 양념만 쪽 빨아 먹고 그대로 뱉어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와 개매워. 쟤는 이런 매운 걸 어떻게 먹는 거야. 우석아, 닭발 이거 너무 매워서 난 못 먹는데. 정작 그 닭발의 주인은 여전히 저 위에서 시위 중이다. 결국 다음 건 입 근처에 가져갈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기분이 엉망이다.



고양이는 야행성 동물이라지만 낮에 수인학교를 다니는 우석은 승연과 생활 패턴이 얼추 비슷했다. 승연이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저도 고양이로 변해 승연의 얼굴 옆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그렇게 늘 있던 우석이 없으니 허전해 잠이 오지 않는다. 괜히 덮은 이불만 들춰 보며 오지 않는 우석의 존재를 계속해서 확인했다.


"내가 한 달에 지한테 쓰는 돈이 얼마인데 겨우 그거 가지고 삐쳐서 나를 혼자 재우고…."


보통 수인을 키운다고 하면 어린 시절부터 함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우석은 오랜 길 생활 덕에 승연의 집에 와서야 처음으로 인간화를 했던 만큼 많은 게 늦었다. 승연은 그런 우석을 예뻐하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길에서의 아픔을 잊을 만큼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나라고 혼내고 싶어서 혼냈겠냐고. 김우석 나쁜 놈, 내일 츄르 없어.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승연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우석이 제일 좋아하는 간식을 사재기하다 겨우 잠에 들었다.




품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에 선잠에서 깨어난다. 비몽사몽. 원래대로면 웬만한 기척엔 정신이 들지 않을 텐데. 우석이 없는 침대가 허전해서,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거다. 고개를 숙여 부스럭대는 가슴께를 내려다보자 어둠 속에서 얼핏 동그란 정수리가 보인다. 내 예쁜 고양이, 김우석. 우석이 팔을 모으고 승연의 품 안을 비집고 들어와 가슴팍에 얼굴을 부빈다. 승연은 우석 너머로 팔을 뻗어 침대 옆 무드등의 불을 켰다. 겨우 몇 시간 못봤을 뿐이지만 사람으로 변한 우석의 얼굴이 보고싶어서.


"나 없이 잠이 와, 주인?"

"아니.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는데 네가 와서 다시 깼어."


승연은 제 한 쪽 팔에 뺨을 뭉갠 채 웅얼대는 우석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폭신폭신 기분 좋아.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주다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훑어내리자 우석이 간지럽다며 움츠리면서도 킥킥대며 승연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 피아노라도 치듯, 한참을 승연의 가슴 위에 손가락 장난을 치던 우석이 고개를 들어 승연에게 물었다.


"승연아 우석이 미워?"


웃겨. 이 여우 같은 고양이. 동정심 유발인지 뭔지 제가 예쁜 걸 너무 잘 아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고양이라는 걸 아는 자기애 가득한 표정을 하고 저런 걸 묻는다. 우석은 제가 어떤 표정을 지으면 가장 예쁜지, 또 제 주인이 저를 얼마나 많이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오늘도 승연은, 이 뻔뻔한 눈을 한 사랑스러운 고양이의 속 보이는 질문에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다.


"아니. 나는 우석이 사랑하지."

"내가 자꾸 말썽만 부려서 미워할 거지."

"아니지. 네가 말썽을 부리든 안 부리든 나는 우석이만 사랑하지."


조금 더 가까이 붙고 싶어. 둘 사이에 조그만 틈이라도 남을까 승연은 우석을 제 몸쪽으로 세게 당겨 밀착시켰다. 이 위치면 조금 높은 내 심장과 조금 낮은 네 심장이 맞닿을 수 있을까. 하지만 곧 숨이 막힌다며 솜방망이로 가슴팍을 퐁퐁 쳐대는 우석 덕에 승연은 우석을 품에서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우석이 승연의 얼굴 가까이에 제 손바닥을 가져다 보여주며 칭얼대기 시작한다.


"나 너무 아팠어요. 호 해주세요."

"호 해줄 테니까 오늘은 사람으로 옆에서 잘래?"

"…좋아. 그러지 뭐."


아직 잘 때는 동물 상태가 편하다며 늘 고양이로 변해 잠을 청하는 우석이, 고맙게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옆에 붙어서 자라는 승연의 요청에 응한다. 승연은 멀쩡한 우석의 손바닥을 몇 번이고 소리 내 호호 불고 문질렀다. 사랑하는 나의 고양이. 평생을 품에 낀 채 사랑을 주고 보호해 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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