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심청구가 말처럼 쉬운게 아니에요.  왜 원심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를 법리적으로 풀어 증명해야해요.더군다나 원심판결을 부정하는 피고인의 입장을 그리 곱게 봐주지 않을거고.. 그리고 1108 같은 경우에도 죄가 없는건 아니잖아?"


석진의 말에 정국은 작게 한숨을 내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 네. 허위 자백이요. 우리 누나도 그게 걸린다고 하더라구요."


" 네. 단단히 대비해야할거에요.  허위자백은 곧 공무집행방해죄니까. 나라에서도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상..벌금으로 끝내긴 어려울거거고... 심지어 1심처럼 사건을 충분히 살피고 증거나 주장을 정리할 시간 따위도 안 줄테고.."

" 네. 어렵네요..제가 할 수 있는건 또 뭐가 있을까요?"



재심에 관련해서 정국은 늘 간절해보인다. 석진은 그런 정국을 위해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 듯 종이와 펜을 들고 설명을 이었다.



" 원심에서 주장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정리가 빠르게 가능한 재심변호사를 수임하는게 중요하죠. 근데 변호사가 본인 누나라면서? "


" 네. "


" 그럼 그건 해결 됐네. 믿을만하겠어. 그리고 또 중요한건 상대방 검사의 특성도 중요하겠죠. 검사 입장에서도 지금 사법부의 수사가 틀림을 인정하고 들어가야하는데 그렇다면 최대한 1108의 죄를 성립시키는게 본인에게 유리할거에요. 그러니 1108의 무죄는 원하지 않을겁니다.  변호사 만큼이나 검사도 승률이 중요해요. 저도 검사할적에 옳고 그름을 크게 따지지 않았습니다. 제 승률만 따졌지. 그러니 검사가 어떤 검사인지 알아보고 준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떤 검사인지 알고 있나요?"



석진의 물음에 정국은 누나에게 살짝 전해들은 검사의 이름이 떠올린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한 이름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불현 듯 스치는 이름에 빠르게 답했다.


" 서울 중앙지검 민 검사님이라고 들었어요."


정국의 말에 석진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이내 입술을 슬쩍 깨물어낸다. 정국은 그런 석진을 보며 물었다.


" 아시는 분이에요?"


석진은 대답을 망설이듯 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 로스쿨 때 내 후배예요."


정국은 이내 곤란한 듯 턱을 긁적였다.  석진의 후배라는 민 검사는 자신이 죽어도 꼭 이겨야할 누나의 상대다. 정국이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라 곤란해하자 석진은 다시한번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내 후배는 절대 거짓된 재판을 하는 애는 아니에요."

" 저희 한테 유리한 검사님일까요? 우리는 거짓을 연기해야하는데요.."


 정국이 작은 한숨과 함께 마른 세수를 한다. 이번 재판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거짓된 자백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온 지민이 모든걸 바로 잡기 위해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지민이 무죄를 받기위해서는 조금의 거짓말은 필요했다. 

팔성파 조직내부 갈등으로 인한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해야만 지민의 무죄가 성립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여기서 '어쩔 수 없이', '강제로'라는 말은  거짓이다. 

조직내부의 갈등은 맞다해도 사실 협박과 강제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민이 자발적으로 모든 죄를 떠안고 허위자백을 한 것이 맞는사실이지만 이걸 밝히게 된다면 지민은 '공무집행방해'라는 죄명으로 벌금과 짧은 징역은 각오해야한다. 정국의 누나는 이걸 막기 위해 재판에서 강제성 허위자백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변호를 준비중이다.



" 병아리 형님이 그렇게 하겠대요?"

" 그렇게 해야죠! 그래야만 본인 무죄가 성립되는데 그렇게 안하는 멍청이가 어딨겠어요 "



정국이 발끈하듯 말하자 석진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 생각보다 멍청해보이던데..."

" 불길한 소리는 하지마시죠..."

" 재판에는 무조건이라는 말은 없으니 어떤 상황이든 대비는 해놓으세요. 만약 허위자백 인정 하면 어떡할거에요?"



석진의 말에 정국은 생각만 해도 화가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나랑은 다신 볼 일 없을 것 같네요."



석진이 의외라는 듯 살짝 놀라 입을 오므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 왜? 징역 기다리기 싫어서?"

" 아뇨. 기다리는건 상관 없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떠오르는 옛 생각에 정국의 표정이 스르륵 굳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 상의 없이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내리는거... 전...정말 싫거든요."


 생각만해도 싫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는 정국을 보며 석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 이제 일어날까요? "


석진의 말에 정국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일이면 석진의 출소 날이다. 정국은 지민의 재심이 얼마 남지 않아서 석진의 출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것이 미안했다. 이런저런 법적인 문제에 대해 자문을 많이 얻은 만큼 고마운 사람이다. 정국은 담담히 석진에게 감사인사를 전한다. 



" 그동안 감사했어요. 김 검사님."

" 얻어 먹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

" 이제 내일이면 못 만나겠네요."



정국의 말에 석진은 길게 한숨을 포옥 내쉰다. 그동안 있었던 마음 고생과 나가서 새롭게 싸워나가야할 미래에 대한 걱정의 한숨이다. 


" 1108 재심 때 만나뵙죠. 재판 구경갈게요.나가면 백수라 할게 없거든요"



농담처럼 한 석진의 말에는 제법 아픔이 느껴진다. 정국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자 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국은 석진을 방으로 안내하기 위해 함께 자리를 나섰다.



" 그러고보니 1108은 인맥이 참 좋은 사람이야. 전 주임님 같은 후배가 어딨어."



인맥이라는 말에 정국은 살짝 멈칫하더니 푸흐흐 웃어버린다.



" 본인이 들었음 기겁할 이야기네요."

" 왜요? 인맥 좋은거 대한민국에서 칭찬아닌가..?"

" 본인은 엄청 싫어해요. 인맥으로 자기 삶이 좌지 우지 되는거."

" 싫어도 어쩔 수 없지. 그건 받아들여야지. 어짜피 인간은 관계의 동물인데. 그 끈을 어찌 쥐고 갈지 놓고 갈지를 잘 판단해야하는 거지.."


 

맞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만들어가든 만들어가지 않든 인맥은 결국 내가 쥔 끈이다. 그걸 놓고 마는 것은 나의 결정이고 그 결정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 인맥으로 바뀌어져있을 인생, 그건 결국 나의 책임이다.


정국은 철장 문을 덜커덩 열었다. 석진이 들어간다. 정국은  조용히 구석에서 책을 읽고있는 지민을 바라본다. 다시 철장 문이 닫히고 정국은 일부러 발걸음을 크게 몇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재빠르게 다시금 뒤로 걸어와 철장문을 바라본다. 그러자 마주친 눈. 지민이 흠칫 놀라 다시 고개를 숙인다. 정국은 푸시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아냈다. 늘 이런식이다. 


 자신이 이 방에 올 때마다 거들떠도 보지 않는 지민으로 인해 기분이 상한 적이 많았는데 며칠전 석진에게 전해들었다. 자신이 이 방에 왔다가 떠나면 은근슬쩍 철장 쪽으로 걸어가서는 슬쩍 보고 간단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얼마나 간지러웠는지 모른다. 정국은 그런 간지러움을 자신의 직장에서 느낀다 생각하니 참으로 웃겼지만 공간이 무엇이 중요할까. 그런 기분을 느낄 상대가 중요한거지. 정국은 뚫어지게 책을 내려다보는 지민을 보며 피식 웃다가 결국 철장을 툭툭 두드린다. 


" 1108 "


정국의 목소리에 모든 수형자들이 하던걸 멈추고 철장을 바라본다. 


" 우편."


 철장사이로 정국이 손가락에 꽂은 우편하나를 보이며 흔들자  지민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철장 앞으로 다가간다. 정국은 그 철장 사이로 재심 확정 날짜가 적힌  우편 하나를 건넨다. 지민이 우편의 끄트머리를 잡아들었다. 정국은 장난 치 듯 우편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결국 지민은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린다. 정국은  피식 웃는 지민의 손끝을 톡치면서 우편을 잡은 손에 힘을 푼다.



" 꽉 쥐세요. 이번 기회 놓치면 끝입니다."





깜장

w.제제브



재판장의 공기는 무겁다. 검사와 변호사는 서로의 말을 끊고 끊으며 말의 이었다.


" 형사 절차에서 허위 자백은 무고한 사람이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내용 이나 위조된 내용을 고의로 진술하는 것. 이러한 자백은 자발적 또는 강제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합니다. 현재 사법부에서도 허위 자백으로 인한 오판 사례들이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어 이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곧바로 잡아야합니다." 



 검사석에 있는 남자는 꽤나 설렁설렁한 말투라 한들 변호인이 말하는 자그마한 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반박한다. 


" 방금 말씀하셨듯이 허위 자백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발생합니다. 그 중 피고인은 강제적인 요인에 의해 허위 자백을 했다는 점을 참고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피고인의 자백을 듣고 오점이 많은 것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에서 충분히 제대로 된 조사를 준비하지 않은 점은 충분히 사법부에서도 고려해야할 문제이고, 피고인이 허위 자백에 대해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고 재심을 신청 한 점을 인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변호인석에 서서 피고인을 대변하는 그녀의 말투는 강단있고 거침이 없다. 



" 제발...."


배심원석에 앉은 정국은 지민의 무죄 판결을 위해 무릎 위 두 손을 모은 채 간절히 빌었다. 그 옆에 앉아있는 석진은 윤기의 모습을 보며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자신의 예전 모습을 떠올린다. 


 하나의 재판장 아래에서 모두가 다른 생각을 펼친다. 지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인의 재판이다. 그러니 이 재심이 잘 되길 바란다. 하지만 정국이 잘 되길 바라는 방향과는 조금은 달랐다. 검사와 변호사의 말이 오고 갈 수록 지민의 손에는 불안한 듯 땀이 베여온다.


" 마지막으로 피고인, 재판장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일어나서 최후진술 간단하게 하세요. "



뜨겁던 재판장의 흐름은 몇몇 증인과 춘봉(봉이)의 인정으로 지민의 무죄에 많이 기울었다. 여기서 문제는 허위 자백에 대한 건이었다.  허위 자백은 강제성이 성립될 때 벌금이나 무죄로 처리될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민의 최후 진술이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최대한 억울하게, 최대한 강제로 어쩔 수 없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얘기하는 것이 판사의 판단에 많은 지장을 끼우칠 것이다. 


" 피고인 할 말 없습니까?"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지민을 보며 다시 묻자 초조해진 변호인이 지민의 팔을 톡톡 치며 일어나라 눈빛을 보냈고 그제서야 지민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 저는.."


지민이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은 피고인 석의 지민에게로 향한다. 정국 또한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려 새파란 죄수복을 입고 서있는 지민을 바라본다. 지민이 아주 느리게 침을 삼켜냈다. 모으고 있는 두 손이 교차해있고 시간이 흘러갈 수록 불안한 듯 끄트머리 살을 톡톡 뜯어낸다. 


 정국은 그러한 지민의 작은 행동에도 마음이 불안했다. 그가 허위 자백을 인정해야할 이유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자신과 그려내기로 약속한 미래에 대한 답변이라 생각한다. 지민이 최후로 진술할 수 있는 시간은  초조하게 흐르고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재판장 입구 문 끝쪽에 앉은 날카로운 형의 얼굴이 보였다. 지민은 고개를 들어 느리게 입을 열었다.


" 허위자백.. 인정합니다."


지민의 갈라지고 느린 담담한 말 한마디. 그 한마디에 재판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 잘못했습니다..선처해주신다면 열심히 살겠습니다."



 지민은 마지막으로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고개 숙여 인사한다. 


" ...... "


정국은 굳은 듯 재판장을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를 벅차고 재판장을 나가버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민은 입술을 꾸욱 깨문채 고개를 숙여냈다. 탕탕탕- 판사봉을 두드리는 판사의 말에 재판은 끝이 났다.


공무집행방해죄 직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을 방해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재판의 결과 였다.





-


" 축하해. 민 검사"

" 덕분이죠."

" 내가 한게 뭐있어."

"  재판 끝나고 기분이 좆같지 않게 해줬잖아요."


나지막이 말하는 윤기의 말에 석진은 푸흐흐 웃으며 자판기에서 뽑아 낸 종이컵 안 커피를 홀짝인다. 윤기는 그런 석진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 선배 그런 커피 먹는거 처음 보네. "

" 거기 살다 나와봐. 별의 별게 다 맛있어."

" 어쨌든 고생했어요. 이제는 뭐 어떻게 살려구요."

" 야, 인마. 이제 방금 나온 사람한테 그렇게 뼈 때리는 질문 해도 되냐?"

" 왜 이제서야 고민한척 해요? 1년내내 고민했을거면서. 누구보다 철저하고 계획적인 사람인데 내가 선배를 모르나?"


윤기의 말에 석진은 피식 웃고선 말했다.


" 그 계획을 버리는게 계획이야 인마."

" 많이 변했네 선배? "



살짝 놀랍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윤기를 보며 석진 또한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 계획대로 흘러가는게 인생인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옛날에는 신념하나 믿고 사는 니가 틀려 보였거든? 나는 너랑 달라서 재판의 옳고 그름보다 승률만 따져댔고..."

" 그래서 나보다 많이 돈벌고 빨리 부장검사 됐잖아요."

" 야, 빨리 될지는 몰랐으나 지금봐라....아예 검사도 못하잖니  "

" ...... "

" 깜빵에서 썩고보니 알겠더라. 니말이 맞아. 그냥 흘러가는대로 내 신념믿고 살면 언젠간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거."


묵묵히 석진의 말을 들은 윤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말했다.


" 내가 이 일하면서 가장 먼저한게 인맥정리 였거든요? 어릴 때 아주 잠깐 스치 듯 만난 별 갖잖은 것들도 여기서 만나면 인맥을 운운하는게 아주 뭣같아서..."

" 이해해. 잘 된 사람만이 느낀 수 있는 뭣 같음이지."

" 그래도 인간이니까 내 사람도 필요하죠. 그래서 그 인간들중 쭉정이들을 아주 잘 걸러내야하는데..그게 참 어려워.."


윤기가 손바닥을 반으로 가르 듯 뒤집어 엎는 행동을 보며 석진 또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윤기는 주먹 쥔 손을 펼쳐내더니 말한다.


" 내가 몇 없는 인맥을 쥐고 있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선배예요."

" 어이쿠야..영광이네."

"  내가 이 재심 맡을지 말지 많이 고민했거든요. 어짜피 질 게임 누가 합니까? 그래도 박지민씨가 허위 자백은 인정할 거라 얘기해준 선배 말에 긴가민가했지만.. 그냥 선배만 믿고 재심 맡았죠."

" 그래. 알아. 별로 안 맡고 싶은 재판일텐데 괜히 나 믿고 뛰어들어서 조마조마 했을테니 미안해."

" 결과가 좋잖아. 문제될거 없어요."

" 그래. "

" 근데 박지민씨가 허위 자백 인정할거는 어떻게 알았어요? 난 솔직히 형이 무조건 인정 할거라 했어도 못 믿는게 컸어. 본인의 죄를 무죄로 덮을 기회인데 인정하기가 쉬운건 아니니까. "

" 군대동기보다 깜빵동기가 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냐. 거기서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니 하루종일 갇혀서 얘기하다보면 진솔한 마음들이 오가게 되더라고..  "




석진은 알고 있었다. 지민이 허위 자백을 인정할 것이란걸. 늘 본인에게 날을 세우던 지민이지만 많은 밤을 지새우며 대화를 하던 순간 지민은 석진에게서 날을 거둔다. 날을 걷은 지민은 한 없이 약해보였다.


지민은 자신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늘 엮여있는 형과 팔성파로 인해 벗어나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정국은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이상이라 놓기가 힘들다고 했다.

어릴때는 겁이나서  정국을 놓쳤었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민은 괴로운 듯 석진에게 물었다. 자신의 현실을 아주 깨끗하게 정리해서 버리고 늘 꿈꾸던 이상에 뛰어들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거냐고. 

석진이 내린 결론은 허위 자백을 인정하는 것.  지민이 허위 자백을 강제로 당했다고 얘기 했을때 물론 본인은 무죄가 성립될 지언정 팔성파에 많은 피해가 갈 것이란걸 안다. 지민의 형을 건드려서 좋을 건 없어보였다. 

지민은 결국 석진의 의견대로 형과 딜을 했다. 팔성파에 피해가 없게 허위 자백을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인생에 더이상 터치하지 않고 평생 모르는 사람으로 가족의 연을 끊을 것.



" 결국 박지민씨는 현실도 놓고 꿈도 놓은거네? "


 석진의 얘기를 듣던 윤기가 묻자 석진은 마지막 커피 한방울 까지 마시고는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툭하고 골인 시킨다.


" 꿈은 다시 꾸면 되잖아. " 


윤기 또한 종이컵을 툭하고 골인 시키고는 말했다.


" 꿈도 타이밍이죠"





***


형과의 면회가 있었다. 다짜고짜 면회를 와서 하는 말이라고는 재산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자신으로 인해서 먹고 살았으니 모든 재산을 포기하라는 형의 말에 지민은 어이가 없었지만 알겠다고 했다. 그말을 끝으로 형은 더이상의 말없이 면회를 끝내고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허무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좋아하는 사람과의 미래만 그려나가면 된다는 생각에 후련하기도 했다.  

담당교도관과 함께 방으로 이동하면서도 여러 교도관을 만났다. 지민은 눈을 굴려 정국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며칠째 정국은 보이지 않는다. 


" 들어가세요"


담당 교도관이 철장문을 열었는데도 불구하지 않고 멍하니 서있는 지민을 슬쩍 밀며 말하자 지민은 다급히 뒤를 돌아 교도관에 묻는다.


" 교도관님"

" 네?"

" 그... 전 주임님은 왜 안오세요?"

" 전 주임 그동안 월차 엄청 아끼더니 이번에 한꺼번에 쓰고 휴가 냈는데?"

" 아... "

" 나도 월차나 아껴봐야겠어~~ 거의 일주일 가까이 휴가라니 좋겠다...여자친구랑 여행이라도 가나?"


철장 문을 철컹 닫아내며 " 좋겠다~" 만 남발하는 교도관을 보며 지민은 멍하니 문을 등진 채 서있는다. 지민은 재심이 끝난 뒤 운동시간에 정국을 만났다. 지민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 말을 걸었을 때 정국은 머리가 많이 아프니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지민을 스쳐 지나갔다. 지민은 정국이 속상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또 한번의 배신감을 느꼈을 것도 이해하고 그 마음을 풀기 위해 그날 밤을 뒤척이며 다음날 만나서 할 얘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정리했다. 하지만  정국의 갑작스런 긴 휴가로 인해 그 숙제같은 대화는 기한 없이 미루어졌다. 


" 하...."


지민은 한숨과 함께 벽에 기대 앉아 멍하니 창가를 바라본다. 오늘따라 유독 단단하게 내려박힌 철장들이 한없이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


원예 작업시간이다. 지민은 열리는 철장 문으로 나와 벽에 기대 서려다 며칠만에 보이는 정국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멈칫한다.


" 벽에 붙으세요!"


다른 교도관이 멀뚱히 홀로 서있는 지민을 보며 소리치자 지민은 그제야 걸음을 옮겨 벽에 기대섰고 손을 머리에 올린다. 정국이 서있는 사람들을 차례대로 수색한다.  지민은 점점 다가오는 자신의  순서에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인 채 벽을 마주한다. 기분이 이상했다. 밤마다  머릿속으로 연습했던  말들을 수없이 되새길수록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하다. 하지만 간만에 정국을 마주할 생각에  기분은 묘하게 설렌다. 곧 정국이 지민의 뒤에선다. 툭툭툭 정국의 손이 지민의 허리와 주머니를 훑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 뒤로."


지민이 빠르게 몸을 돌리자 정국의 얼굴을 마주한다. 기다린 얼굴인다. 지민의 정국의 얼굴을 살핀다. 조금은 수척해보이기도 하고 말라보이기도 하다. 짧은 며칠동안 보지 않아서 일까 묘하게 다른 얼굴인 정국을 뚫어지게 마주한 지민의 눈길에도 정국은 살짝 시선을 내리며 지민의 눈을 피한 채 몸수색을 마친다.


" ...... "


결국 한마디도 못한 채 정국은 옆 사람에게로 갔다. 지민의 시선 또한 움직인다. 자신을 보며 굳어있던 얼굴이 씨익 펴지더니 옆의 수형자에게 농담을 건넨다.



" 밥 혼자 다드세요?"

" 아씨...아니거든요?!"

" 아니기는 맞구만."


정국이 씨익 웃으며 옆의 수형자의 뱃살을 꾸욱 누르고는 다시 이동한다. 지민은 차례차례 이동하며 걸음을 옮기는 정국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조용히 앞으로 고개를 돌린다. 


" ...... "


느낌이 싸하다. 재판 결과에 화를 내고 속상해할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차갑게 굴거라곤 예상하지 못해 마음이 이상했다.

 

" 하....뭐하나 쉬운게 없네.."


왜 정국이 이해하고 넘어줄거라고 생각했을까.지민은 예상치 못한 정국의 행동에 온 머리가 지끈거려 중얼중얼 혼잣말을 내뱉고는 아파오눈 관자놀이를 두어번 누른다. 그래 내 잘못이 크니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자. 라는 생각과 함께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따른다.




-


못본 사이  해바라기가 활짝 폈다. 지민은 그 화분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멀뚱히 들고 서서 천천히 주변을 살핀다. 늘 자신의 주변에서 맴돌던 정국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눈을 씻고 찾기도 힘들어서 차마 말을 걸 틈이 없다.


" 전 주임님!"


마침 옆에 있던 작업 반장이 정국을 부르자 지민은 정국과 얘기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후다닥 작업반장에게로 달려간다.


툭 -

그러다 실수로 화분을 떨어뜨렸다. 발 밑에 흐뜨러져있는 꽃과 흙을 보며 지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주워담자 옆에 있던 작업 반장도 당황한 듯 자리에 앉아 지민의 화분에 흙을 주워 옮겨준다.


" 에고고.. 해바라기 모양이 꺾였네..."


" ....."


떨어질때의 충격으로 살짝 꺾여 버린 해바라기 줄기를 손으로 쥐어 잡는 지민의 뒤로 정국이 다가온다. 정국은 쭈그려앉아서 해바라기를 다시 다듬고 있는 지민을 슬쩍 보고는 반장에게 말을 건다.


" 반장님, 불렀어요?"

" 아..예. 다른게 아니고 이번에 비료가 부족해서"

" 네. 신청해둘테니 수첩에 작성해주세요."

" 네. 지금 바로 작성해올게요!"


작업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첩을 가지러 가자 정국과 지민 둘만 남았다. 찰나의 마주친 시선을 정국은 조용히 피하고는 아무 말 없이 뒤를 돈다. 지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정국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자 정국의 걸음이 멈춘다. 


" 얘기 좀 하자."


 자신을 돌아 보는 정국의 얼굴이 낯설게도 차가워 지민은 슬그머니 손을 놓는다. 그리고 몸을 휙 돌려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앞장 서서 걸어가던 지민이 벤치에 꺾여버린 해바라기를 조심히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는다. 한발짝 멀리서 서있는 정국을 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앉아봐봐."


지민의 말에 정국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마지못한 듯 벤치 끝자락에 털썩 앉는다. 평소와 달리 묘하게 거리를 두 듯 앉는 정국을 보며 지민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 휴가 갔었나?"


어떤 말부터 꺼내야할지 몰라 나온 질문이다. 정국은 쏟아지는 햇볕을 가리기위해 올렸던 손바닥을 툭 내린다. 그리고 아주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 할 말이 뭔데.. "

" ...... "


자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다짜고짜 할 말을 하라는 듯한 정국의 말에 지민은 얼은 듯 말을 망설인다. 정국은 발 밑에 돌을 툭 건드리며 낮게 말했다.


" 빨리 말해라.. 내.. 바쁘다."

" 재판..미안하다."


지민이 망설임 끝에 단도직입적으로 사과하자 정국은 빠르게 답했다.


" 개안타."


괜찮다는 다소 성의없고 짧고 간결한 대답에 지민이 고개를 돌려 정국을 바라본다. 둘의 눈이 마주했다. 지민은 밤새 머릿속으로 정리했던 말들을 시작했다.


" 허위자백 강제로 했다고 하면은 우리 햄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니도 위험할 수 있고... 나는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니한테 말 안한거는...."


" 개안타."


지민의 말을 끊으며 괜찮다 반복해 말하는 정국을 보며 지민은 나지막이 묻는다.


" 내랑 말 안할거가"

" 얘기 하고 싶지가 않다."


정국의 말에 지민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 알겠다..그럼 기다릴게. 얘기할 마음 생길때 말해도."

" 그럴 필요없다."


정국의 단호한 답에 지민이 놀란 듯 정국을 바라본다.


" 무슨 뜻인데."

" 이번에 선배 겪어보니 뭐든 혼자 결정하는 스타일인거 다시 한번 정확히 알았고 그게 본인 스타일이라면 난 바꾸고 싶은 맘없다.  "


 담담히 말하는  정국의 말투에 지민은 아무 말 없이 정국을 바라본다. 정국은 그런 지민의 눈을 한참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 더이상 할말 없음 갈게 "

" 할말이야 많지. 무슨 말을 해야 니가 마음이 풀릴지 몰라서 그러는거지.."

" 내 마음 풀고 자시고 할 것 도 없다니까. "


지민은 자리에 서있는 정국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다.


" 어쩌자는건데 "

" 말 그대로다. "

" ....... "

" 앞으로도 선배 쪼대로 살아라."


정국이 서서 지민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고는 정국에게 말한다.


" 앉아봐 "

" 싫다. "

" 내가 다시 설명할게. 그러니까 일단 앉아봐."



정국이 아무 말 없이 뒤를 돌며 걸음을 옮기자 지민이 다급히 일어나 정국을 붙잡는다. 정국은 그런 지민의 손을 뿌리치며 말한다.


" 잡지마라! 할 말있었음 재판 전에 했어야지 사람 빙시 만들고 나니 좋드나"

" 그러니까 좀 들어보라고!"

" 들을 가치도 없다."

" 하...좀 들어보고..!"

" 됐다고! 뭘 생각하든 선배 니는 내가 상처 받을건 계산안한다이가!"

" 야, 전정국."

" 그 재판장에서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


정국의 마지막 말에 지민의 표정이 단번에 굳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 진심이가."

" 그래 지금도, 옛날도 나는 선배 앞에서 단 한번도 진심이 아닌 말한적 없다.."


 정국의 목소리가 떨린다.  지민은 그런 정국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결국 옆에 있던 화분을 바닥으로 내 던지고는 자리를 떠난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화분이 바닥에 널브러져있다. 바닥에 엉망으로 떨어져있는 해바라기를 보던 정국이 멀어져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욕을 뱉어냈다. 휴가 내내 방구석에 쳐박혀 울어서 더이상 나올 눈물도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또다시 코끝이 시큰해진다.






깜장 이미지

 



제제브표 사투리


1. 내 마음 풀고 자시고 할 것 도 없다니까= 내 마음 풀 이유도 없다. (자시고는 앞의 말을 부정하는 표현)


2.  쪼대로 살아라= 멋대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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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질문...?


1.지민이는 왜 저럴까?

원래 어릴 때 만난 동생은 커서도 뭔가 엄청 어려보이는거 알죠? 지민이에게 정국이는 아무리 멋진 성인이 되었어도 동생 같이 보이고 자신으로 인해 정국이에게 무언가 불똥이 튀는게 지민이는 젤 무서울거에요.그래서 " 내가 우리 형때매 허위자백 인정할게 " 라고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혼자 멋대로 이게 서로에게 좋을거야라고 판단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건 개인적 생각인데 부산남자들 중 이런 사람 좀 많은것 같은데..예를들면...우리아빠..우리삼촌...내 친구덜....ㅋㅋㅋ 특히 우리 아부지는 이사도 혼자 결정하시고 우리엄마랑 저는 이사하는 날 처음 집에 가봤다지요...ㅋㅋ)


2. 석진이는 왜 정국이에게 말 안해줬을까?

정국이랑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많이 나왔지만 글에서 나온 것 처럼 지민이와 있는 생활이 더 많으니 지민이 입장을 더 생각해줬을테고 지민의 말을 정국에게 말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을거에여. 또 윤기가 친한 후배니 윤기가 유리했음 하는 마음과 전직 검사로써 지민이 거짓 재판을 하지 않았음 하는 마음도 있겠죠.


3. 그래서 국민은 서로 언제 삽질을 멈추나요?

남의 연애를 훔쳐보는 재미는 그들이 함께 삽질하며 산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는거라 생각하는편....허허허. 일단 정국이는 많이 애탔으니 지민이가 현실때문에 힘든거 말고 정국이때매 좀 애타는걸 제가 보고팠어용 ㅎ


짧게나마 글 설명해보았어요!ㅎㅎ 그럼 다음편은 완결로 만나요!(아마도?)♡ 담편은 빨리올게요 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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