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밖으로 나와 우산을 폈을 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모든 것을 지루해하는 눈으로 휴대폰을 바라본다. 저장해놓지 않은 번호임을 확인하고 바로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른다. 인상을 한번 찌푸리곤 눈앞에 내리는 비를 확인한다. 굳이 손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눈앞의 비가 얼마나 세차게 내리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손을 내밀어 비의 세기를 가늠해 본다. 순식간에 젖어든 손과 옷소매, 손을 거둔 그는 여전히 지루한 듯한 눈으로 몇 초쯤을 더 가만히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와 도로를 지나는 차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생각한다 ‘비가 정말 너무 많이 내리네.’라고. 휴대폰 벨소리가 또다시 울린다. 또 알지 못하는 번호에서 오는 스팸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은 그였지만 갑자기 심장이 저린 느낌이 든다. 기억 속 무언가가 그의 가슴속 무언가를 쥐어짜 낸다. 잠시 멈춰 선 그는 그럴 리 없다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다. 휴대폰 화면에 보이는 것은 언젠가부터 잊으리라고 다짐하고, 잊고 있었던 전화번호다. 망설임과 불안함, 떨림, 두근거림과 같은 감정들이 그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친다.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는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 현재야.”

 

“…”

 

“… 잘 지냈어?”

 

“…”

 

“나... 도현이야.”

 

“…”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나랑 한번 만나주면 안 될까...?”


“…”




듣고 싶지 않았던 익숙한 목소리에 현재는 전화를 끊는다. 분명 자신이 잘못 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뒤돌아선다. 집을 향해서 걸어가던 다리는 평소보다 한층 무겁게 한걸음 한걸음을 내디딘다. 제법 취한 상태임을 망각한 채 그는 자신이 나왔던 가게, 호스트바를 향해서 걸어간다.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로 온 몸에 힘이 빠져 좀비라도 된 듯 온몸을 질질 끌면서 가게 앞으로 다시 걸어간다.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를 배웅했던 앳된 얼굴의 사내가 놀란 채 젖어버린 그를 부축한다. 어딘가 이상한 것을 보고 넋 나간 사람처럼 얼굴에 미소를 띤 현재는 자신을 부축하는 사내를 보며 말한다. 

 


“수건 좀...”



#

 

 

퀭한 눈으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현재는 어젯밤 다시 가게로 들어온 후 아직까지 한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마감시간이 다 된 지금까지도 밖은 비가 세차게 내린다. 가게 안은 종업원들과 바텐더가 가게를 정리하고 있다.

영업시간 동안 받은 팁을 공평하게 나눠 담은 가게의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종업원들과 바텐더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그에게로 다가간다. 어제부터 얌전히 이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그는 놀랍다기보다는 조금 소름 끼치는 느낌이다.

 

 

“오늘 회사는 안 가?”

 

“…”

 

“이제 슬슬 집에 들어가자. 응?”

 

“…”

 

“무슨 일인지 말을 하던가... 어제부터 그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어떻게 해. 아무리 단골이라도... 이러면 진상이야.”

 

“… 도현이가 한국 왔대.”

 

“어제 이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가게 영업이 얼마나... 어? 뭐라고?”

 

“나한테 할 말이 있대.”

 

“…”

 

“한번 만나자고 하더라고...”

 

“…”

 

“어떻게 해야 될까...”


“…”


“…”

 

“… 그래도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떨까?”

 

“…”

 

“전 남친 그거 는 오빠 버리고 잠수 탄 시점에서 쓰레기보다 못한 놈이긴 하지만 한 대라도 박아주려면 일단 만나야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일단 만나.”

 

“…”

 

“가만히 있어서 해결될 건 없어. 알지?”

 

 

사장이 한 사내를 시켜 현재의 그를 일으켜 세운다. 어제 그를 다시 마주해준 그 사내다. 살짝 비틀거린 그는 천천히 몸의 균형을 잡는다. 자신보다 작은 체구의 사내에게 기대 가게 밖을 향해서 한 발짝씩 내디딘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싫어서 제대로 걸어보려 하지만 피곤함을 뒤따라온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그를 잔뜩 흔들고 있어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결국 그는 사장에게 부탁을 해서 자신의 부축하는 사내와 함께 집으로 가기로 한다.

조금씩 몸에 힘을 주어 굽은 허리를 펴 제대로 걸어보려고 하지만 고개를 살짝 들수록 그를 괴롭히는 메스꺼움의 그 강도를 높인다. 먹구름과 새벽빛의 아름다운 어우러짐,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의 빛이 수놓아진 거리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회사는 출근 안 하세요?”



“어?”



“오늘... 반차라도 내세요?”



“… 아니.”



“무리하지 마시지... 어제 진짜 많이 드셨어요. 제가 본 형 모습 중에 역대급.”



“괜찮아... 숙취가 별건가... 샤워하고 그러면 대충 괜찮아지겠지.”



“…”



“…”



“숙취가 아니라 아직 취하신 거 같아요.”



“쪼끄만 게 뭘 알아.”



“…”



“미안, 이런 말 싫어한다고 했었지...”



“네, 근데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평소에는 절대 안 하던 말도 하시면서.”



“응, 괜찮아... 아... 아닌가. 집까지 혼자서 가지도 못하니까...”



“…”



“저기 미안한데 나 집 안까지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



“네.” 

 

 

#

 


현재의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현관을 지나 천천히 그의 침실로 향한다. 사내는 그를 눕히고 바로 집을 나설 생각이었지만 처음으로 사내를 원하는 눈과 손길을 보이는 현재를 거절할 순 없었다.

거칠면서도 뜨거운 시간이 지난 후, 현재는 누워있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인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있다. 금방이라도 토를 쏟아낼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은 느낌. 하체를 찌르는 고통. 그 역겨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그는 눈을 감고 있을 수 조차 없다. 바로 옆에 누워 그런 그를 바라보는 사내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현재를 바라본다. 


“괜찮아요?”


“뭐가? 아, 응 괜찮아.”


“…”


“…”


“…”


“왜?”


“아니... 처음이라서요.”


“뭐가...? 이게? 너 그런대서 일하면서 이런 게 처ㅇ...”


“아니, 아니. 그거 말고요. 저랑 하고 형처럼 그렇게 멀쩡히 있는 걸 처음 본다고요.”


“… 넌 내가 지금 멀쩡해 보여?”


“아뇨, 근데 저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이 상태에서 입 밖에 못 움직이는 건 너 때문이기도 한 거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어디가 다행이야, 난 죽을 것 같은데.”


“형이 먼저 꼬셨잖아요.”


“그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현재는 한 숨을 깊게 내쉬고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지끈 거리는 머리와 자꾸만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지만 그는 욕실을 향해서 걸어간다. 비틀거리는 그가 걱정된 사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만 “같이 토하기 싫으면 따라오지마.”라는 말에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든다.

겨우겨우 욕실에 도착해 마주한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그는 바로 샤워 부스에 물을 틀고 그 안으로 직행한다. 자그마한 소리에도 울리는 머리에 마치 마약이라도 한듯 조금씩 일렁이는 시야는 결국 그가 얼굴을 변기 앞으로 보내게 만든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온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도저히 눈뜨고는 못 볼 색감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그것을 본 그는 역겨움에 한 번 더 몸 속의 것들을 쏟아낸다. 조금 후, 더 이상 쏟아낼 것이 없어진 그는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겨우겨우 팔을 뻗어 치약과 칫솔을 챙겨 다시 샤워 부스 밑으로 기어간 현재는 따뜻한 물을 맞으며 노곤함과 편안함 속에서 예전 일을 떠올린다.

 

꼭 오늘처럼 비가 며칠째 연속으로 오던 날들 중 하루였었다. 보통 때와 같이 상사에게 적당히 깨지고, 그 와중에도 조금씩 기뻐할 일이 있는 그런 날. 도현과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다던가, 싸웠다던가 하는 그런 것은 없었다. 현재가 느끼기엔 그저 그런 평범한 날들 중 하나였다.

다른 것 없는 하루 속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때는 그가 퇴근길을 헤쳐 집에 도착했을 때 느낀 한기에서부터 시작이었다. 모든 불이 꺼져 있는 집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머릿속에 생겨난 걱정들을 애써 부정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형광등을 킨 후, 평소라면 자신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 있어야 할 도현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소파로 몸을 던졌다. 그리곤 휴대폰을 들어 자신의 애인의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지만 현재의 애인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을 느끼던 현재의 눈앞 테이블에 편지 봉투가 올려져 있었다. 편지를 본 순간 몸이 굳었다. 애써 부정하던 걱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걱정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걱정들은 마치 예전부터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런 상황을 기다렸었던 듯 모든 경우의 수를 그의 머릿속에 펼쳐줬다. 같은 자세로 소파에 누워 있던 그는 조금 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멈추게 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은 그는 심히 당황해했고, 편지에 적힌 글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애인의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또 애인에게 수백통도 넘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애인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그 후로 한 번도 그의 애인인 도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심지어 그의 가족에게서도 그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현재는 천천히 눈을 뜬다. 한 숨을 크게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반사적으로 세면대에 뱉은 치약의 거품에 붉은기가 돈다. 양치를 했음에도 느껴지는 비릿함에 불쾌감을 느끼곤 몸을 구석구석 씻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도현의 생각이 들지만 머리를 흔든다던가, 다른 중요한 생각을 하면서 애써 그 기억을 밀어낸다. 지금 그가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 밖에 없다.

조금 후 현재가 욕실에서 나온다. 그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홀리듯 휴대폰을 집어든 그는 익숙한 번호를 확인한다. 어젯밤 걸려왔었던 그 번호. 도현의 번호. 그는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

 

“…”

 

“안녕.”

 

“어.”

 

“혹시 오늘 시간 돼?”

 

“안돼.”

 

“알겠어...”

 

“…”

 

“혹시... 한가한 날 생기면 문자라도 남겨줘.”

 

“…”

 

“끊는다.”

 

“잠깐만.”

 

“…”

 

“왜 이제 와서 날 보고 싶은 거야? 대화 정도는 전화로 해도 되잖아.”

 

“…”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고, 몇 년 동안 연락 하나 없다가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냐고.”

 

“…”

 

“할 말 없어?”

 

“… 나도 내가 잠수탄 건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해.”

 

“…”

 

“용서 받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

 

“하지만 너한테 사과는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래. 그리고 전화로 하고 싶진 않아.”

 

“…”

 

“그리고 꼭 마주보고 해야 될 이야기도 있거든.”

 

“끊을게.”

 

 

현재는 전화를 끊는다. 그에게는 시간이 이렇게 지났음에도 아직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멍하니 앞을 보다 몸을 스치는 찬 기운에 정신을 차린다. 역겨움이 몰려든다. 그는 다시 욕실로 뛰어 들어가 변기에 얼굴을 박는다. 아무리 토해내도 투명한 침말고는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등에서부터 갑작스레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고개를 돌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내가 그의 들을 문질러 주고 있다. 눈물을 가득 품은 채 그는 사내를 향해 살짝 웃어보인다.

욕실에서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원래 이렇게까지 방음이 안됐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신이 다른 방에 있을 때 누가 샤워하는 것을 듣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기에 알 수가 없다. 한 숨을 내쉬고 천천히 다리를 움직인다. 홧김에 한번 더 사내와 침대로 뛰어든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던 상황이라고 합리화를 하기 시작한다. 

지치고 울적한 마음이기에 오늘따라 좀 따뜻하거나 화사한 느낌의 옷을 입고 싶지만 방을 가득 채운 옷들 중에서 검은색이나 회색을 벗어나는 옷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과 자신의 옷들에게 안타까운 미소를 보내고 평소와 같은 옷을 집는다. 옷을 입으면서 그는 생각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도현에게 욕 짓거리를 내뱉고, 그와 만나서 주먹다짐을 하는 그런 짓을 하면 창피할까?'라고.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은 아무리 해도, 어떻게 해도 도현에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단지 창피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도현에게는 그럴 수 없다.

이런 자신이 한심한 그는 자신을 비웃는다. 그리고 도현을 향해야 할 욕을 자신에게로 쏟아낸다. 그러다 자신에게 욕을 한다한들 바뀌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허망한 웃음을 내뱉는다. 마치 예전 도현이 말없이 사라지고 잠수를 타버린 그때와 지금의 자신이 비슷한 심리라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한다. 

자신을 탓하다가, 또 다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리곤 괜찮아졌다가 다시 자신을 탓하는 감정의 기복. 그건 아마도 그가 도현을 정말 너무나 사랑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그의 행동이 그저 그 자신보다 도현을 더 우위에 두고 살았다는 것 밖에 증명하지 않는다. 현재는 심호흡을 하고 감정의 동요를 최대한 억눌러 본다. 이미 도현은 말도 없이 떠났었고, 한참동안 사라져 있다 이제 와서 나타났으니 도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감정도 죄책감도 느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뇐다.

숨을 크게 들이 쉬고 옷을 마저 다 갈아입는다. 여전히 몸은 피곤하고 무겁지만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또렷하게 만든 후 거실로 나간 현재는 욕실에서 나온 사내와 눈을 마주친다. 그는 사내에게 미소를 보인다. 사내는 아직 젖은 머리칼에 몸을 제대로 다 닦지도 않았지만 현재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그를 껴안는다.



“나 옷 젖어.”


“그럼 밀어내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네가 상처받을 거 같아서.”


“에이, 몸 파는 놈이 무슨 그런 일에 상처를 받는다고.”


“혹시 모르지...”


“나 내일모레까지 쉬는데 계속 있어도 돼요?”


“그래, 나 때문에 고생도 했잖아.”


“고마워요, 형.”


“너무 어지럽ㅎ... 아니다.”


“?”


“카드 줄까?”


“네?”


“옷이랑 화장품 같은 거 내 거 써도 되고 새로 사도 돼.”


“형 돈 많았었나?”


“…”


“?”


“아니면 어떻게 내가 일주일 중에 4일 넘게 호스트바에 가겠냐.”


“아...”



그는 자신을 안은 사내를 한번 꽉 껴안고 뗴어낸다. 그리곤 그의 손에 카드를 쥐어준 후 현관을 향해서 걸어간다. 비록 여전히 조금 어지럽고 허리부터 발 끝까지 고통이 느껴지지만 왠지 모르게 괜찮은 날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리 도현이라는 파문이 일어나도 이제는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현관을 나선다 

 

 

#

 

 

인테리어에 홀려 멍하니 카페를 지켜보던 현재는 곧 정신을 차리고 한걸음을 내디딘다. 카페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휴대폰과 주변을 확인하며 도현을 확인한다. 현재는 결국 도현과 만나기로 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사과를 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누군가 그를 억지로 도현과 다시 만나게 하려고 했기도 해서.

아직 자리를 잡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을 확인한다. 조금 늦을 거 같다는 도현의 문자다. 조금 실망한 듯한 그는 눈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을 풀고 자리를 잡는다.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가방을 내려놓고 카운터로 향한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주문한 차를 기다리고 있는 그는 창 밖을 바라본다. 지금 이게 잘하는 짓인가 걱정하면서도 자신에게서 도현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떼어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자신에게 큰 일부였던 도현을 다시 만나는 것이 스스로에게 아무렇지 않기를 빌지만, 그것은 도현과 마주하지 않을 때의 일이고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좀처럼 쉽지 않다. 전화벨이 울린다. 순간 깜짝 놀란 그는 전화번호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는다. 


 

“여, 여보세요?”

 

“뭐야 왜 이렇게 당황했어요?”

 

“어? 내가 뭘...”

 

“…”

 

“왜?”

 

“같이 갈 걸 그랬나?”

 

“왜?”

 

“걱정되니까 그렇죠?”

 

“내가 애도 아니고...”

 

“그분한테 다시 연락하기 전까지 보기 싫다고 떼쓰고 난리 쳤잖아요.” 

 

“…”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이 필요하다고 하면 바로 달려가 줄 테니까.”

 

“겉 멋만 들어서...”


“그 겉 멋만 든 어린애한테 설득당해서 그분이랑 다시 만나려는 거면서.” 


“… 끊는다.”


“네.”

 

 

휴대폰을 귀에서 뗀다. 평소와는 달라야 할 오늘, 평소 같은 대화를 하니 왠지 모르게 긴장한다. 시간이 지나는 것을 알 수록 점점 더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문다. 긴장할 때면 늘 나오는 버릇이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입술을 깨무는 행동은 도현과 관련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그가 이렇게 입술을 깨물면 주변의 누구든 늘 깜짝 놀라게 하거나, 주의를 주는 등 그의 행동을 멈추려 했지만, 도현만큼은 그의 행동을 당장 멈추려 하지 않았다. 도현은 그저 지그시 바라봐주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어느새 현재의 긴장은 사라져 있었다. 그는 그런 자상함 때문에 도현에게 마음을 열었었다.

갑작스럽게 피어난 과거의 기억은 예전 도현과 가졌던 수많은 추억들을 이끌고 온다. 그게 좋았던 기억이든, 나빴던 기억이든. 그게 어떤 종류의 기억이든 상관은 없다. 현재는 얼굴에 은은하게 미소를 띤다. 너무 잠수 이별을 당한 그날과 그 이후 아프게 가슴만 짜내던 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도현과 보냈던 많은 날들은 제법 의미 있었던 아름다웠던 날들이었다. 그 모든 시간을 단지 철없었던 날의 행동 하나로 모두 부정한다면 그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주문한 차가 나온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기다리던 그는 조금 지겨워져 가방에서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책을 꺼낸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잡생각 때문에 책에 집중이 잘 되진 않지만 애써 눈을 책 속 문장들에 고정시켜본다. 6장쯤을 넘겼을 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의 잠금을 푼다. 그리고 그때 도현에게서 문자가 날아온다. 

 

 

-어디야?

 

 

올 것이 왔지만, 더 준비할 것도 없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렇게까지 놀란 적은 그렇게 많지 않다. 현재는 고개를 들어 입구 쪽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입구 쪽에는 자신이 기억하는 도현의 모습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저 키가 좀 큰 여성이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있을 뿐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여성. 그 모습을 본 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도현에게 문자를 보낸다. 하지만 그의 문자를 확인하는 남자는 카페 안에도, 카페 밖에도 어디에도 없다. 입구 쪽에 있는 여성은 갑자기 휴대폰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입술을 살짝 깨문다. 무언가를 예상한 듯 불길한 느낌에 휩싸인 그는 애써 다른 걱정을 하며 자신의 안 좋은 예상을 잊어보려 한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키가 큰 여성이 현재에게로 점점 다가간다. 살짝 고개를 들어 여성을 확인한 그는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여성의 행동을 보고 초조해진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뇐다. 아직 마음이 남아있던 아니든 간에 이런 상황은 그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도현은 재빨리 자신의 짐을 가방에 욱여넣고 허둥지둥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때문에 애써 세팅한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다. 그가 옆 의자에 놔뒀던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들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부른다. 

 

 

“유현재.”

 

“…”

 

“현재 맞지? 넌 여전히 그대로네.”

 

“…”

 

“…”

 

“누구...”

 

“나... 도현이야.”

 

 

손에 들고 있던 외투와 가방을 떨어뜨린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역시나 예상하는 것과 실제로 듣는 것은 차이가 크다.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고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다시 확인한다. 어깨 밑까지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과 화장기 있는 얼굴, 굴곡진 몸매 등. 기억 속 도현의 모습은 눈앞 어디에도 없다. 아니, 기억 속 모습은커녕 아예 성별이 다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 위로 쓰러지듯 앉는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 자꾸만 실소가 나오려 한다. 어지럽고 메슥거리는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이 환상이게 믿게 만들지만 앞에서 맞은편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는 도현은 틀림없는 현실이다.

입술을 살짝 깨문다. 언젠가 재회를 할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그게 어떤 재회 일지 상상한 적도 참 많았었지만,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서도 이런 재회를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고, 억울하고, 또 화가 차오른다. 그는 피곤함이 배어 있던 눈을 버리고, 매서운 눈으로 악의를 가득 품은 채 도현을 째려본다. 잔뜩 품어버린 증오심은 아까까지 했던 모든 생각들의 존재감을 없애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

 

“…”

 

“…”

 

“…”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

 

“난... 그렇게 잘 지내지는 못했어.”

 

“…”

 

“아무 말도 없이 떠나놓고 이렇게 말하는 건 실례겠지...”

 

“어.”

 

“…”

 

“저기.”


“응.”


“나 갈래.”


“어?”


“갈 거라고.”

 

“혹시... 내가 이런 모습이라서 그런 거야...?”

 

“… 모르겠어.”


“…”


“넌... 항상 이런 식이 구나, 적어도 한 마디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 


“…”


“갈게.”

 

 

그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한 번도 도현과 눈을 마주하지 않는다. 눈을 마주하는 순간 어떤 말이 자기 입 밖으로 나올지, 어떤 감정이 분출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빠르게 외투와 가방을 챙기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다. 걸음이 빠르다. 도현은 떠나가는 현재를 바라보다 그에게 문자를 하나 날리고는 주문한 음료를 가지러 카운터로 향한다. 많은 기대를 하고 그를 만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이런 반응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도현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죄책감과 분노가 엉킨 현재의 마음은 끝없이 열을 일으킨다. 카페 밖으로 나온 그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임에도 외투를 걸치지 않는다. 뒤통수가 따갑다. 혹시 도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다시 돌아갈 생각도, 뒤를 돌아볼 생각도 없다. 점점 더 빠르게 걸어간다. 조금씩 조금씩 속도가 빨리지던 그는 결국 뛰기 시작한다. 주말 낮,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이 길에서 이렇게 급박하게 뛰어가는 사람은 현재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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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가 도현과 마주한 지 벌써 삼주가 지났다. 도현과 만난 이후 그의 눈은 더 피곤해졌고, 그의 몸은 더욱 지쳐 보인다. 단지 그의 겉만 그런 티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풍기는 아우라는 그를 포함한 주변 공기마저 우울하게 바꾼다. 마치 자신과 주변을 모두 우울함으로 물들이려 하는 듯 보일 정도다. 지금 현재의 모습은 피폐함 그 자체다. 아마 도현이 잠수 이별을 해버린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소파에 누워있는 모습이 마치 죽은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런 때일수록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거나,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다른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어떤 것을 하던 도현이 생각날 것 같기에, 그는 차라리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끔찍한 시간 속에서 우울함과 함께 살다 세상을 떠나기를 빈다. 

벨소리가 울린다. 저 멀리 바닥에 있는 휴대폰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들어 휴대폰을 바라본다. 아마도 또 그 사람 일 것이다. 이름 뒤에 있는 별표가 인상적이다. 이렇게 저장했던 기억은 없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배게에 얼굴을 파묻는다. 

벌써 며칠째 전화를 걸어오는 건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스토커가 그에게 집착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당연히 스토커는 아니다. 단지 그를 걱정하고, 이런 모습의 현재라도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며칠 전 술에 취해 잠자리를 연속으로 두 번이나 같이 했던 그 사내. 어느 순간부터 제 집 드나들듯 현재의 집을 드나들고, 하기도 싫은 것들을 자꾸만 시키는, 귀찮고 힘들고 피곤한 일들만 골라서 하게 만드는 사람. 그렇다고 해서 현재가 사내의 말을 듣는 것은 아니다. “고맙지만 됐어.”, “안 할래.”, “안 먹을래.”, “안 갈래.” 같은 말로 항상 사내를 밀어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을 사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반항할 힘조차 없는 그는 결국 사내의 말을 듣게 된다. 조금 이상한 사람이다. 이런 우울한 사람을 챙기는 것은 반복하면 누구라도 떨어질 만 한니까.

벌써부터 사내의 목소리로 하는 잔소리가 귀에 들린다. 대체 왜 자신에게 집착을 하는 건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서 사내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는 몸을 돌린다. 그리곤 몸을 일으킨다. 폐인과 같은 모습이지만 그는 바로 욕실로 가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떨어져 있는 휴대폰을 줍고 사내에게 문자를 먼저 보낸다.



-이제 너 싫으니까 오지마.



이 정도면 됐으리라 항상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만의 생각이다. 곧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그는 깜짝 놀란다. 심장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한다. 도현과 만난 이후부터 이렇게 갑작스러운 것에 몇 배는 더 놀라게 됐다. 그는 천천히 현관문 앞으로 걸어간다. 현관문 밖을 확인하지 않고 가는 것은 밖에 누가 와 있을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관문 앞에서 서서 구부정한 자세로 잠시 고민한다. '이 문을 열어주는 게 맞는 일인가?' 하는 고민에 빠진다. 곧 그 고민을 한 번에 없애 버리는 문을 크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그는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가 지른 신음소리에 조금 후 현관문이 열린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를 바라본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있지만 사내가 어떻게 자신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냐는 물음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에요!”


“…”


“뭐야... 넘어졌어요?”


“어떻게... 어떻게 열었어?”


“형이 알려줬잖아요.”


“내가...? 언제?”



조금 후,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는 그의 주변을 사내가 열심히 걸어 다니며 청소를 하고 있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불을 켜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잠옷을 입은 채, 굵은 천의 가운을 이불 삼아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TV에 시선을 고정한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살짝 땀을 흘려 반짝한 사내의 얼굴에 창 밖 햇빛이 비친다. 현재는 TV를 끄고 그런 사내를 바라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사내는 눈을 마주하면서도 조금 부끄러운지 잠깐씩 시선을 돌리거나 실없는 소리를 한다. 몸을 일으키고 가운을 벗은 그가 사내에게로 다가간다. 그런 행동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사내는 다가오는 현재를 잡아 욕실로 밀어 넣는다. 수염이 자라나 있는, 부스스한 머리에 퀭한 눈이 싫은 것이 아니다. 사내가 좋아하는 현재의 모습은 조금 지금과는 조금 다른, 부드러운 우울함과 주도적인 무너짐, 가벼운 피곤함이기에 사내는 그를 욕실에 가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상태도 사내가 제법 좋아하는 상태이긴 하다. 그를 자신의 멋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뭐야... 어쩌라고.”


“씻고 나오라고.”


“이젠 반말도 하네...”


“존대를 받을 행동을 해야 존대를 하지.”


“…”


“빨리 씻어요, 어디 갈 거니까.” 


“싫어...”


“저번처럼 내가 들어가서 억지로 씻겨?”


“너 진짜 맨날 멋대로 왜 그러는 거야...”


“그냥...”



“좋아하니까.”라는 말을 삼킨 사내는 현재가 누워 있던 소파로 몸을 던져 그가 입고 있던 가운이나 배고 있었던 배게를 품 안에 안고 눈을 감는다. 역한 냄새나 비위생적인 무늬는 없다. 괜한 소리를 자꾸만 하고 싶은 사내였지만 지금 그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하기에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가 다시 원래의 그로 돌아왔을 때 주변 환경이나, 그 스스로에게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예전의 환경을 남기고 그를 챙겨주는 것. 다만, 사내는 이런 자신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낀다. 할 일 없이 몸이나 팔고, 그 일로 번 돈을 남을 위해서는 조금도 쓴 적 없는 지금의 자신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게 싫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스스로가 사람 하나 때문에 너무 바뀐 것 같아 이질감을 느끼는 것뿐이다. 

욕실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끊겼다. 사내는 눈을 뜬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잠깐 잠에 든 것인지 생각하다 품 안에 있는 배게와 가운을 소파 위에 내려놓는다. 곧 욕실에서 샤워 가운만을 걸친 현재가 아까까지와는 다른 말끔하고 조금은 정상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다 씻었어...”


“마트 갈래요?”


“마트?”


“응, 나 오늘 쉬는데 술이나 마시자고요.”


“술 마시려고 이렇게 청소해준 거야...?”


“…”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네.”



자신의 순수한 의도를 애써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 조차 없이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사내는 현재가 던진 말을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랜만에 그와 함께 외출을 한다는 사실에 미소를 보인다. 

손에 잡히는 칙칙한 옷을 대충 껴입었지만 전신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는 한다. 평소보다 많이 내려온 짙은 다크서클, 눈까지 내려온 앞머리, 창백한 피부. 욕실에서 봤을 때보다 더 수척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모습을 확인만 할 뿐, 아무렇지 않게 거실로 나온다. 

이것저것 사다 보니 짐이 꽤나 무거워졌지만 옆에서 자신이 들고 있는 것보다 배는 되는 짐을 가볍게 드는 사내가 있기에 현재는 마음을 놓는다. '자기가 가자고 했으니 저 정도 고생은...'같은 이기적인 생각을 품다가도 괜히 미안해져 살짝 사내에게 붙어 짐을 같이 들어주려 하지만 몸과 마음에 조금의 힘도 들어가지 않는 그가 들기에는 너무 무겁다. 그는 다시 사내에게서 떨어진다. 착잡해진 표정으로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다가도 사내의 갑작스러운 스킨십으로 다시 적당한 침울한 얼굴로 돌아온다. 

언제 잠들었던 건지 알 수 없다. 사방이 어두운 걸 보면 아직 아침이 오지는 않은 듯 하다. 주변에 손을 더듬으며 휴대폰을 집어 옅은 불빛에 의지해 주변을 둘러본다. 여러 개의 빈 술병들과 먹다 남은 안주들 그리고 소파에 누워 얌전히 자고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사내에게 온갖 말들을 쏟아내고. 술이 깬 후 떠올리면 창피할만한 많은 일들을 한 것 같지만 지금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약간의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남아 있지만 그는 몸을 가누며 천천히 일어난다. 한 손에 든 휴대폰의 불빛이 비틀대는 것이 그렇게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듯 보인다. 겨우겨우 도착한 화장실 안에서 변기에 얼굴을 박고 있는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휴대폰을 확인한다. 사내와 술을 마시는 동안 봤던 것. 기억의 파편들이 아직 다 맞춰지지 않아 있지만 휴대폰에 더해진 도현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휴대폰 화면의 제일 위, 팝업창을 확인한다. 수많은 알림이 떠 있다. 그 중 하나, 저장하지 않은 번호에서 온 문자가 눈에 띈다. 저장하지 않았음에도 아는 번호.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술로 인해 잠시 떠나보냈던 우울함을 다시 품는다.

머리를 붙잡고 바닥만 쳐다보다 한 숨을 깊게, 여러번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머릿속이 언제쯤 괜찮아질지, 마음이 언제쯤 정상적이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많은 생각들이 아니라 그저 잠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화장실에서 나와 자신이 깼던 자리로 다시 걸어가 자신의 몸을 눕힌다. 그리곤 손에서 휴대폰을 떠나보내고 눈을 감는다. 깨어나면 도현이라는 이름과 지금의 감정들이 사라지길 바라면서.

 

 

#

 

 

어떻게 보낸 지 모를 휴일을 지나 찾아온 평일에 적응한 척 행동한다. 사실은 그렇게 달라지지 마음가짐은 여전히 머릿속에 '죽고 싶다.', '술 마시고 싶어.', '자고 싶어.' 같은 말들을 만들어내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평범한 척, 부지런한 척을 한다. 그래도 가끔씩은 불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아직 확인하지 않은 도현으로부터 온 문자 때문이다. 여전히 문자를 확인하지는 않는다.   

도현에게서 연락이 더 오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조금씩 도현의 존재를 넘기고 있는 지금, 휴대폰이 다시 한번 울린다. 도현이다. 전화가 아니라 문자인 것이 다행이지만 이것 조차 현재에게는 호흡이 멈출 정도로 큰 파문이다. 낯빛이 변하고, 잔뜩 움츠러든 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자신의 입술을 씹어대다 혀 끝에서 피 맛이 느껴질 때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변기 옆에 앉아 몸을 잔뜩 움츠린 그는 누구라도 좋으니 지금 당장 자신에게서 도현을 사라지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빈다. 그게 안된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객사하고 몇십 년 뒤쯤 도현이 한 참 잊혀졌을 때 연락이 오면 좋겠다던가, 어떤 큰 범죄 사건에 연루돼 TV에 나와 그의 지인이라서 인터뷰당하는 그런 일이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들을 이어가던 현재는 한 숨을 깊게 내쉰다. 

현재는 눈을 감고 도현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이제는 잘 그려지지 않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하게 도현을 생각하면 예전의 모습도, 지금의 모습도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그려진다. 이제는 그런 존재가 됐음에도 왜 도현이 자신을 이렇게 흔들 수 있는지 스스로가 한심하고 비참하게 느껴진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가 된 도현. 그렇게 생각하기 더욱 무거운 무기력함이 그를 감싼다. 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몸을 일으킬 수 없다. 그는 휴대폰을 든다. 그리곤 자판을 누른다.

점심시간 후 찾아온 졸음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겨우 참아내며 타자를 두드린다. 겨우 진정된 마음에 포만감을 더하니 이보다 더한 수면제는 없다. 귀에 들리는 타자 소리는 그에게 적당한 자장가가 된다. 하지만 그는 눈에 힘을 주고 최대한 졸음을 떨쳐내기 위해 애쓴다. 물론, 겨우 그 정도로 졸음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너무도 귀여운 생각이다.

결국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얕게 한숨을 내쉰 그는 졸음을 달아내고자 살짝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본다. 조금이나마 흥미로운 일을 찾는다. 물론, 회사에서 그런 일을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같은 상황이어서 동료와 눈을 마주친 민망함에 졸음을 쫓는 경우가 많다. 현재 또한 그렇다. 덕분에 필사적으로 졸음을 쫓는 일은 필요 없어지지만, 대신 이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들이 필요해진다.

멍한 눈으로 변한 현재의 머릿속에는 저녁으로 뭘 먹어야 할지, 오늘도 사내를 찾거나 불러 술을 마셔야 할지, 슬슬 나올 공과금이 얼마인지 계산하는 잡스러운 것들로 머리를 채운다. 당연하게도 그런 생각들은 방금 쫓은 졸음에게는 좋은 양분이 된다. 다시금 찾아온 졸음이 그의 눈꺼풀을 무겁게 만든다. 지겹고 반복되는 생각을 그만해야 된다는 것쯤은 알지만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자신과 비슷한 상태이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 않는다. 

졸음과 상상 사이에서 고개를 흔들어 대며 두 곳을 넘나들던 머릿속에는 문득 휴일의 일들이 떠오른다. 사내와 도현, 그리고 휴대폰과 자신의 모습들이 한대 섞여 마주하기 힘든 상상을 만들어 낸다. 조금 후 그는 인상을 구기다 언제 졸았냐는 듯 눈을 뜨고 제 할 일을 시작한다.

휴대폰이 울린다. 화장실에서 보냈었던 문자에 대한 답이 왔다. 그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문자를 읽고 단답으로 대답한다. 사람들의 소리보다 기계들의 소리가 더 큰 사무실에서 그는 다시 프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침울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주변의 공기를 물들이지만 비니즈스적인 관계인 이 사무실의 사람들은 그런 위화감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일로도 버겁기 때문에.



#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보다 동시에 음료에 입을 댄다. 다른 것은 현재는 음료를 마실 때 음료에 시선을 두고 상대는 현재에게 시선을 두는 것이다. 곧 다시 눈을 마주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두 사람의 차이는 그것이다. 

이대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점점 입과 마음이 굳어 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헤어지겠지만 두 사람은 섣불리 입을 떼지 않는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지만 시계의 숫자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두 사람이 다시 음료에 입을 가져다 댄다. 카페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바뀐다. 드디어 뭔가를 말하려는 듯 현재가 도현과 눈을 맞추며 숨을 들이마신다. 



“애인은 있어?”


“…”


“첫 말로는 이상했나?”


“약간...”


“뭐라도 말은 해야 될 것 같아서.”


“나도 그랬어, 근데 막상 입 밖으로 내뱉기가 쉽지 않네.”


“뭐... 우리가 사실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할 만큼 마지막이 좋진 않았으니까.” 


“…”


“아... 꼽주려고 한 말은 아니야.”


“그런 순수함에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네, 내가 잘못했으니까.” 


“뭐... 부정은 안 할게.”


“그래.”



두 사람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돈다. 약간씩 돌아오는 피부빛은 아직까지도 정적이 말과 말 사이에 끼는 이 분위기에 비해서는 이르다고 생각되지만 그리 신경 쓸 일은 되지 않는다. 

몇 마디의 말과 몇 번의 웃음, 두 사람은 추억을 떠올리거나 두 사람이 같이 아는 지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여전히 현재에게는 차가움이, 도현에게는 머뭇거림이 남아있긴 하지만. 

조금 더 오늘 만난 목적과 먼 대화를 이어가던 두 사람. 현재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대화 사이에 찾아온 정적을 틈타 입을 연다. 왜 자신이 먼저 이 꺼려지는 이야기를 꺼내야 되냐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오늘 만나자고 도현을 부른 건 자신이기에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저기.”


“왜?”


“궁금한 게 있어.”


“…”


“너도 오늘 가볍게 만나려던 건 아니라고 예상했을 테니까...” 


“…”


“사실 우리 계속 이렇게 의미 없는 대화를 할 순 없잖아.”


“그렇지.”


“…”


“난...”


“너...”


“…”


“…”


“…”


“먼저 말해.”


“너부터 말해.”


“…”


“…”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나한테 왜 그랬어?”


“…”


“전에 너 보고 되게 많은 생각을 했는데... 네 입으로 들어야 될 것 같아서. 나 혼자서는 결론이 안나. 네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 그게 어떤 답이든.” 


“…”


“…”


“사실은... 그때쯤에는 너보다 내가 더 중요했던 시기 같아. 내가 여자로 느껴진 건 정말 오래전 부 터지만 너를 사랑해서, 네가 남자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계속 그렇게 너랑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내가 널 떠났을 때는... 그때는 너보다 내가 중요했어.” 


“그러니까 날 덜 사랑했을 때, 날 떠났단 거네.”


“… 응.”


“치사하네.”


“그리고 개X끼고.”


“나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자기 편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거고.” 


“그래... 그렇지.”


“난 그때쯤에 좀 많은 걸 하려고 생각했었는데.” 


“…”


“왜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결혼이나 아이를 낳고 사는 그런 거.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혹시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


“이러면 죄책감이 좀 더 느껴지려나.”


“응...”


“네가 좀 더 마음이 아팠으면 좋겠지만... 이제 그만할게. 왜냐하면 네가 이제 나를 잊었으면 하거든.”


“…”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지? 나도 그래. 솔직히 널 더 못 잊은 것도 나일 텐데.” 


“그건...”


“확신할 수 있어. 넌 지금 심장 위에 손을 올려 둘 수 있어?”


“…”


“난 못하겠어. 아직도 내가 널 보면서 심장을 두근거리면 어쩌나 싶어서.”


“…”


“실은 아는 사람이 어떻게 되든 내 감정을 전달하고 제대로 끝내라고 했거든.”


“…”


“아 너무 무겁게 분위기 잡지는 마. 그냥... 형식적인 거니까. 왜 그... 우린 제대로 된 이별을 못했잖아. 그래서 지금 하려는 거야. 네가 나한테 헤어져 달라고 하면 내가 받아들이는.”


“지금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돼.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 정도는 해줄 거지?” 


“…”


“근데 그전에...” 



잠시 말을 멈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차가움도 따듯함도 없는 벽과 같은 딱딱함. 심장은 빠르게 쿵쾅거리고, 자꾸만 막히는 목구멍을 열려고 애쓰는 것을 숨기기 위한 방책이다.

도현은 계속해서 눈을 마주하기 위해서 애쓰지만 죄책감을 넘어선 감정이 계속해서 가슴을 옥죈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꿋꿋하게 버텨보는 것이지만, 쉽지가 않다. 현재의 한마디, 차가운 눈빛 같은 것들이 스칠 때마다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은 후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 분명 자신이 잘못했기에 충분히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과 마주하고 지금 이 시간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가혹한 시간이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입을 닫고 있는 것뿐. 

고개를 돌려 가방을 뒤적거리던 현재는 뭔가를 꺼낸다. 두 사람에게는 아주 익숙한 액세서리들이다. 커플이랍시고 맞췄지만 한 번도 둘이 같이 낀 적은 없는 반지, 팔찌 같은 것들. 그래도 몇 년의 세월이 지났기에 흠집 같은 것들이 있을 법하지만 모두 처음 샀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만큼 소중히 했었던 건지 아니면 그만큼 착용하지 않았던 건지 알 수 없다. 

도현은 당황한다. 갑자기 이런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의미가 담겨 있는 물건들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나누는 모습.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당장 현재를 말리고 싶지만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자신과 그는 이미 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눈앞의 상대가 기억하는 자신은 지금의 자신도 아니다. 식은땀이 나고, 살짝은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듯하다. 온몸이 욱신 거리기 시작한다. 만약 이 고통이 수술의 여파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변명 같은 타이밍이다. 

쌍으로 이루어진 액세서리들을 하나씩 챙겨서 서로의 앞에 놔둔다. 멍한 얼굴로 여전히 말이 없는 도현은 현재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이건 왜...”


“내가 혼자 다 들고 있을 순 없잖아.”


“…”


“팔던... 끼던 자유야. 그냥 네 몫을 주는 거니까.”


“…”


“그리고 이거. 보증금.”


“이럴 필요는 없ㄴ...”


“이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


“라기보다는 이제는 내 집이니까.”


“…”


“완전히 헤어져야지.”


“꼭 지금 그래야 될까...”


“?”


“아니...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딱히 갑작스러울 것도 없지 않아? 몇 년이 지났는데.”


“…”


“나도 내 삶을 살아야 하고, 너도 네 삶을 살아야지.”


“그렇긴 하지...”


“그럼 이제... 말해줘.”


“뭘?”


“여태 내가 한 말 안 들었어? 헤어져달라고 해달라고.”


“…”


“…”


“…”


“뭐해.”


“ㅎ... 헤어져줘, 나랑”


“그래. 우린 이제 끝이야.”


“…”


“…”


“…”


“네가... 가끔 아프길 바래, 날 생각하길 바래, 이 순간을 계속 후회하길 바래,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길 바래... 그리고... 그리고...”


“…”


“아, 생각 안나. 너만 보면 해주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있었는데... 됐어, 이쯤이면 되겠지.”


“미안해.”


“…”


“그때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떠나서 정말 미안... 네 감정은 생각도 안 하고 나만 생각해서 정말.... 미안해.”


“그래, 고마워.”


“…”


“…”


“그럼 우린 이제 끝이고, 평생 남인 건가...?”


“나중에 전화해. 친구는 돼줄게.”


“… 고마워.”


“그래도 예의상 한 2주 정도는 연락 하지 마, 알겠지.”


“응, 그럴게.”


“갈게, 누가 기다려서.”


“잘 가, 다음에 봐.”


“그래, 2주 뒤에 봐.”



모든 것을 털어낸 듯 시원하게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난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에 준 힘을 풀지도 않는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카페 밖에서 자신과 도현을 지켜보던 사내에게로 걸어간다. 



#



퇴근을 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다.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지 않았음에도 굵고 강한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다. 이끌리듯 하늘을 바라본다. 먹구름들 사이로 보이는 노을의 붉은빛이 회색빛과 잘 어우러져 있다. 잠시 넋을 놓고 이 묘한 풍경을 지켜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한 발을 내디딘다. 지금이라도 출발을 해야 버스를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카락과 어깨부터 젖어간다. 젖어들어가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집으로 가는 동안 축축함 속에서 불쾌감을 느낄 생각을 하니 인상이 찌푸려진다. 

몇 걸음을 더 내디뎠을 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제발 상사는 아니길 빌면서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 잠시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옮긴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의외의 인물이다. 



“왜?”


“전화받고 처음 뱉는 말이 왜예요?” 


“아니... 갑자기 왜 전화했나 해서. 무슨 일 있어?”


“비도 오고 그러길래 마중 나왔는데 어디예요?” 


“마중?”


“네, 저 오늘 차 있거든요.”


“차?”


“네.”


“…”


“…”


“…”


“?”


“빨리 전화하지... 나 지금 다 젖었단 말이야.”


“상관없는데.”


“…”


“그래서 지금 어딘데요?”


“나... 지금... 여기 어디지?”


“…”


“아니, 그게 갑자기 전화 와서 비 피하려고 아무 데나 들어왔지.”


“형이 와요. 회사 앞이니까.”


“그럼 나 더 젖는데?”


“뭐... 어떻게 수건이라도 깔고 기다릴 테니까...”


“알겠어.”



전화를 끊은 현재는 아직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이미 잔뜩 젖어버렸지만 몸이 젖는 것을 걱정하며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얼마쯤 뛰지도 않았을 때 우산을 쓰고서도 젖어있는 사내가 현재와 똑같이 가쁜 숨을 내쉬며 뛰어오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발견하고는 자리에 멈춰 선다. 거친 숨소리가 빗소리보다 크게 들린다.



“왜 뛰어왔어요.”


“그러는 넌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뛰어와.”


“그냥이요.”


“…”


“…”


“가자.”


“네.”


“우산 쓰고도 이렇게 젖었냐.”


“형 때문인데.”


“…”


“잠깐 편의점 들려도 되죠? 이 카드로 수건 사야 될 것 같아서.”


“그래, 들리자.”



길거리에 고인 물웅덩이는 노을의 붉은빛을 반사한다. 찰팍 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까이 붙은 두 사람은 제일 가까이 보이는 편의점으로 향한다. 현재는 살짝 사내의 얼굴을 바라본다. 딱 그 나이대 사람이 할 것 같은 말을 하는 사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에게 계속 말을 건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앞으로 한동안은 사내 때문에 울적하고 싶어도 울적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사내와 발을 맞춰 걷는다.



?

몇 달 만에 돌아온 것 치고는 상당히 부족하고 볼품없는 작품일지도 모르지만 잘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타자에 손이 안 올라가는 게 아니라 글이 안 써지더라고요. 머리가 굳은 건지, 그 짧은 생각도 끝이 온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진짜 노트북 앞에서 안 떠나고 쓰다 보니 다시 이렇게 단편 정도는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좋은 작품으로 계속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아직 남아계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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