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편린을 받게 된 용은 그 창이 곧 저 아이의 상태를 말하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이를 향해 의식을 약간 집중하면 상태창이 떠올랐고, 반대로 그에게 평범한 시선이 닿으면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치고는 참으로 고된 시작이 아닌가. 하긴, 신이란 것들이 다 그렇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고난과 시련을 손수 내리며 신자들의 믿음을 항상 확인하려 하는 족속들이니. 에븐은 신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믿음과 애정은 없는 편이었다. 그가 비록 사명받은 자라 할 지라도.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에븐이 천천히 몸을 기울여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인간과 살이 맞닿은 기억이라고는 그들의 목을 뎅겅 뎅겅 발톱으로 날려 버렸던 적밖에 없던 에븐이라 안은 모습이 엉성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가벼워.’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것을 안고 있는 지 조차 눈치 채지 못할 만큼 형편없이 가벼운 무게였다. 죽어가는 아이의 시간이 에븐의 심장으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쿵…쿵…보통 인간의 박동소리보다 느릿하고 굼뜬 반쯤 얼은 심장이 곧 기능이 정지 할 듯 아슬아슬한 상태로 움직였다. 초침소리보다 느린 그 움직임은 점차 속도가 감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힘없이 축 처지는 몸뚱이를 마나로 단단히 고정시킨 에븐은 창공을 활주해 엘릭서의 샘으로 향했다. 실제 엘릭서가 고여있는 샘은 아니었고, 과거에 에븐이 골드 드래곤의 피와 뼈를 이용해 만든 치유의 샘이었다.


***


서본 마운틴아래 평야를 중심으로 군락을 이루는 도도시티에서 자지 않고 남서쪽으로 마차로 일주일을 가면 나오는 유메스의 숲. 그 한가운데에는 엘릭서의 샘이 존재하고 있다.


골드 드래곤을 숭배하고 사랑했던 유메스들이 모여 살았던 그 숲은 이제 유메스들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열일곱번의 석양이 유메스 숲을 덮을 정도로 긴 시간 끝에 에븐은 골드 드래곤을 해치울 수 있었다. 금빛의 용은 붉은 바람이 자신의 몸을 감쌌던 처음부터 그의 운명을 알았다. 그러니 용은 작은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하늘로 긴 마지막 비행을 시작했다. 에븐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그것을 날카롭게 쫓았다.


-유메스들의 기억을 지워 줄 수 있나?


간신히 두 용만이 들어갈 수 있을정도로 좁은 아공간을 만들어 낸 결과로 골드 드래곤의 죽음은 조금 더 앞당겨졌다. 에븐의 발톱이 자신의 심장을 뚫기 전에 힘겹게 뱉은 말이었다. 기억을 지우는 것 쯤은 에븐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살려달라는 부탁도 아닌 고작 유메스들의 기억을 지워달라는 것에 에븐은 더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 유메스는 내 가족이다. 용에게 가족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 나의 죽음을 알면 숲은 울음소리만 가득하겠지.

-넌 이상한 용이야… 유메스를 그렇게 아끼는 용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 고작 작은 유메스들이 그렇게 중요해?

-하하… 유메스라서 중요한게 아냐.

-…?

에븐은 그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 어린 용이여.

- 어려? 너와 나의 탄생은 같다는 것을 잊었나봐?


한쪽 입매를 비뚜름히 기울이며 에븐이 빈정거렸다. 모든 용의 알이 대지에 닿은 순간과 껍질을 깨고 빛을 본 시각이 동일하다는 것은 그들의 피에 새겨진 긴 기록이었다.


- 삶의 시간이 같다고 해서 성장이 같지는 않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어 본 적이 있나?

- 아니.

- 그래. 언젠가는 알게 될 지도 모르지. 나는 유메스의 녹색 빛을 하늘로 올려 보냈으며, 그들의 영혼을 별로 인도했고, 남은 유메스들의 울음을 함께했다. 수많은 유메스의 죽음을 겪어왔지만 슬픔만은 희석되지 않아. 눈물없는 죽음은 없으므로. 그러나 그 끝으로부터 남은 이들은 자란다. 때로는 작별로부터 배우는 것이 있음을… 유메스와 나는 알고 있다.


긴 말을 내뱉은 금빛의 용은 점점 지쳐가고 있는지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 그러면 너의 죽음 또한 나쁜 것이 아니잖아. 왜 유메스의 기억을 지우려 하지?

- 하하하….맞는 말이지. 그런데 나는 유메스의 보호자이기도 해서… 이기적인 부모라서 말이야. 내 품에서 보낼 준비가 안되어있거든. 나를 모르는 세상을 유메스들은 겪어 본 적이 없어.

- 그러니까, 너는 너의 죽음을 알려주기 싫구나. 아이들에게.

- 유메스들을 고아로 만들 수는 없거든.

- …

모든 용은 태어나부터 고아였고, 에븐은 평생을 사랑한적도 사랑을 받은 적도 없었으므로 그 심정을 헤아릴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가슴 속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그 무언의 슬픔이 에븐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골드 드래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에븐 또한 감사의 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 한 용의 죽음은 그렇게, 그의 자식들은 영원히 모를 사실이 되었다.


에븐의 붉은 마나가 유메스의 숲을 비단이 어루만지듯 천천히 내려앉았다. 불투명한 마나의 천은 그들의 밤을 루비색으로 물들였고, 황금용의 부재로 불안한 유메스들의 불안을 가속화 시켰다. 작은 유메스들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골드 드래곤은? 어디있어?


유메스들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나의 시간들이여. 잠든 그 순간까지도 평온을 노래했던 친우들이여, 어린 잎사귀보다 약하고 부드러우며 마른 고목보다 단단한 뿌리 깊은 자식들이여. 오만의 북극성 아래에서 태어난 나의 황금 열매들이여. 잊는 것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 영원히 너희는 나의 부재를 모르고 내 사랑아래 삶을 마치겠지. 유메스들의 날개짓은 황금의 가지 아래서 이어질지어다.]


골드 드래곤의 유언이 숲 아래에 조용히 울려퍼졌다. 붉은 파동은 금빛을 머금고 물결쳐 유메스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짐과 동시에 망각을 선사했다. 녹음빛 홍채는 용이 남긴 언어를 고스란히 가슴에 품었다. 그들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가 다시 맑아졌을때 유메스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눈 앞의 붉은 용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을 뿐이었다.


- 용이다!

- 붉어!

- 빨간 용은 처음 봐!

- 골드에게 알려야 할까?

- 골드는 지금 자고 있잖아

- 맞다 맞아! 긴 여름 잠을 깨우면 안된다고 했어.

- 넌 누구니?


어린 유메스들은 겁이 없었다. 투명하고 빛을 한껏 머금은 날개를 움직이며 에븐의 곁으로 날아가 볼을 콕콕 찔렀다. 그 위험한 호기심은 어떤 짓을 해도 받아줬던 골드드래곤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틀림없었다. 유메스들을 손바닥 위에 부드럽게 올린 에븐이 작은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 에븐. 아무것도 아닌 용이야.


난 너희의 보호자도 아니고 골드의 친구도 아니야. 형제도 아니지. 그저 그의 유언을 옮겨준 대리인일뿐. 오히려 너희들의 증오를 받을 자야. 에븐은 뒷 말을 힘겹게 삼켰다.


- 반가워, 에븐! 자주 놀러와!


유메스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밝게 웃으며 합창했다. 에븐의 고운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에븐은 그 뒤로 다신 숲을 찾지 않았다.


황금의 부재동안 유메스들은 불안해 하지 않았다. 용들의 계절잠은 다른 생물보다 긴 경우가 많았으며 유메스들에게는 종종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감히 누가 용의 가호아래 일구어진 땅을 침범할 이가 존재할 것인가? 유메스들은 평화가 계속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안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간들의 날붙이가 유메스들을 향했다. 결계를 비집고 피를 머금은 손들이 숲에 흔적을 남겼다.


유메스의 고기는 매우 맛이 좋다.


라는 미식가의 단 한줄때문에.


유메스들은 비록 인간과의 의사소통이 되지는 않았지만 어린이 만큼의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연구에서 밝혀진지 오래였다. 유메스들에게도 문화와 전통, 역사가 존재한다고 인간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실이 무엇이 중요한가?


인간의 욕심은 늙은 독사보다 강하고 지독했으며 날카로웠다. 유메스들은 별다른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화살에 몸뚱이가 꿰뚫렸다. 유메스는 자신들이 무엇을 당하는지 모르고 그 순간까지도 용의 잠이 방해될까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을 꾹 다물었을 뿐이었다.


에븐은 그 모든 상황이 지나고 나서야 유메스의 숲으로 향했다. 인간사에 워낙 관심이 없던 에븐은 어떤 일이 그 땅에 벌어졌는지 알 지 못한채 숲으로 날개를 펼쳤다. 입구에서부터 들어와야 할 어린 유메스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에븐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상했다.


정말이지 이상한 날이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소름끼치는 적막만 존재한 숲이었다.


숲 안쪽으로 점점 다가가자, 그 끔찍한 학살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어린 유메스들은 산채로 잡혀 귀족과 황제들의 식탁에 오르게 되었고 늙어 고기로는 지나치게 질긴 노년의 유메스들의 시체가 숲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 인간들은 한마리의 유메스라도 더 많이 얻기 위해 아주 깊숙한 곳까지 칼을 휘둘렀다.


과거 비슷한 일을 했던 이를 에븐은 알고 있다. 그때의 에븐은 어떤 생각이었던가? 죽어가는 인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에븐은 인간을 탓할 자격이 없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후회를 하기에는 용의 삶에 남겨진 피의 발자국이 지나치게 많았다. 오만한 용은 그만큼 자신을 저주했을 뿐이다.


숨을 크게 내쉰 에븐은 모든 유메스의 시체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유메스의 피는 여린 새싹빛이라 그것의 불길과 유해 또한 숲의 색을 가졌다. 녹색의 잿가루들은 에븐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가 미련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허공에 날아가는 유메스들의 초록빛의 입자들은 도도시티 사람들에게 보일만큼 느리고 고요했으며, 오만의 북극성보다 더 반짝였었다.


밤의 장막이 걷힐 시각, 에븐은 아공간에서 금빛 용의 몸을 숲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시간이 비껴간 용의 시체는 곧 눈을 떠 날아오를 듯 생생함이 가득했다.


황금의 비늘은 숲 너머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조각을 반사시켰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빛은 사랑을 머금고 살아남은 이 없는 슬픔의 대지 곳곳에 퍼져나갔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비추겠다는 듯 부드럽게 뻗어나가는 그 빛의 현상을 에븐은 감히 막을 수 없었다.


누군가의 애정이 담긴 손길은 그림자 없는 땅을 만들었고, 일출보다 더 선명하고 찬란한 빛줄기는 막힘없이 뻗어나갔다. 에븐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동굴속까지 도달한 그것은 바위 틈 사이에 숨어 덜덜 떨고 있는 유메스의 혼들을 발견했다. 소리 없는 울음을 내뱉으며 영혼들은 빛의 품에 안겼다. 그것들을 한참이나 어루만지고 나서야 빛은 혼들과 함께 사라졌다.


에븐은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는 평소와 같이 불길을 머금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에븐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맨 눈으로 맞이한 황금의 빛과, 눈꺼풀 위에 새겨진 녹색의 울음은 더이상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숲을 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았지만 그것에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싫거나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에븐은 결계를 만들었다.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이 땅을 밟지 못하게.


용의 장례는 끝나지 않았다. 에븐에게 남겨진 부탁은 더이상 없었지만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가 빠져 나간후 남은 용의 피와 살, 뼈는 에븐의 지휘아래 금빛을 머금은 투명한 액체로 정제되었다. 에븐의 손끝은 용과 그의 자식들이 노래했던 땅의 한 가운데를 향했다. 거대한 물덩이는 곧 터질 듯 아슬한 모습으로 공중을 부유하며 이동했다. 세밀하게 유메스들이 바닥에 새겨져 있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빈 샘. 그 샘 가운데에는 유메스들을 웃으며 바라보는 골드 드래곤 석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살아 있을 적에는 이 샘도 마르지 않았을 터였다. 그것을 채워 줄 이는 이제 존재 하지 않았으므로 에븐이 남은 일을 해야 했다. 바닥에 내려앉은 용의 물은 샘을 천천히 적셔나가기 시작했다. 가볍게 흔들리는 수면은 햇빛을 수백개의 조각으로 만들어 반사시켰고, 에븐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에븐이 용으로 만들었던 것은 치유의 물이었다. 닿으면 바로 낫는 그런 물이 아닌, 생명의 활력을 도와주는 물. 회복을 빠르게 돕고, 자가치유를 북돋아주는 힘을 줄 수 있는 물. 그것이 바로 에븐이 본 금색 용의 본질이었다. 유메스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힘. 무엇이든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 자신을 찾을때 언제든지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탓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으며, 그저 사랑만 주는 자.


에븐이 알게 된 한 용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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