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의 기분이 좋지 않다. 


 이유는 상트앙느호에서 있었던 그 일 때문에 레드가 그린에게서 도망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린이 잘한짓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나름 억울한 점을 들어본다면 레드는 원래부터 워낙 조용하고 덤덤하니까 이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성급하게 판단한 점이 있었다. 그만큼이나 레드는 평소에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날 그린이 레드를 억지로 안고 피부를 부볐을때 처음으로 레드의 감정이 보였었다. 화를내고 울었던 모습이 아직도 그린의 눈앞에 선했었다. 


 하지만 레드는 화를내도 워낙 무신경한 성격이였기에 한숨한번 쉬고 아무렇지않게 넘어갈 사람이였다. 그런데 그런 레드가 그렇게도 완강히 자신을 밀쳐냈다. 그 순간 그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었다. 거부가 주는 비참함은 생각보다 더 기분이 더러웠고 그린은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에 한숨을 내뱉었다. 손에 닿았던 그 짧은 순간이 찰나처럼 느껴질만큼 레드는 한순간에 자신에게서 도망갔다. 그리고 지독한 후회가 남았다.


 그때 너를 붙잡을걸.


 눈앞에서 사라진 레드를 붙잡지 못한 이유는 울던 레드를 정면으로 마주했을때 피어난 그린의 죄책감 때문이였을 것이다. 그걸 일찍 알았었다면 친구라는 변명에 숨어 너를 취하지 않았을텐데. 혹시라도 내가 진심을 말했다면 네가 도망가지 않았을까? 그럴거면 너에게 거짓말을 하지말걸. 내 앞에서 멀어지려는 너를 붙잡을걸.

 

 그린은 다시금 사라져서 보이지않는 레드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레드는 보이지 않았고 그 익숙한 상실감에 그린은 눈을 더 부릅떴다. 그린은 보이지않는 레드가 잡히지도 않아 속이 타들어갔었다. 예전부터 레드는 그랬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저 멀리로 사라져버렸다. 나의 실수로 레드가 다시한번 멀리 사라졌으니 다시 찾을 차례였다.


 다시 널 찾게된다면 그땐 꼭 널 붙잡아야 할텐데.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린은 자신이 없었다.




***




 보랏빛의 고귀함이 배어있는 작은마을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갈색시티를 벗어난 후 레드는 그 칠흙같이 깜깜한 돌산터널을 지나느라 자잘한 생체기를 잔뜩 달고있었다. 그런 레드의 앞장을 서는 갈색시티에서 만난 꼬부기는 리자드만큼이나 의욕이 앞서는 성격이였기에 돌산터널에서 마주친 트레이너들과의 승부에서 가장먼저 나섰다. 그 결과 돌산터널의 중간지점 정도에 다다랐을때 꼬부기는 어니부기로 진화했다.


 진화 후 지친 어니부기를 대신하여 리자드와 이상해풀, 피카츄까지 모두가 힘을내며 트레이너들과의 배틀을 승리로 이끌어갔을 때 돌산터널의 출구가 보였었다. 터널을 나갈 때까지 깜깜한 시야에 여러번 넘어지던 레드를 보며 혀를 끌끌 찬 이상해풀이 등줄기에서 덩굴을 꺼내 레드를 번쩍 들고 출구까지 향했다. 




 "!"




 그렇게 돌산터널을 막 빠져나왔을 즈음이였다. 여러 트레이너들을 상대하느라 조금 지친기색이 있던 리자드와 이상해풀은 터널을 빠져 나오자마자 어니부기의 뒤를이어 각각 리자몽과 이상해꽃으로 진화를 했다. 돋아난 날개를 펄럭이던 리자몽이 부산스럽게 레드 주변을 날아다녔다. 이상해꽃 역시 짙은 꽃향기를 풍기며 개화한 꽃에 햇빛을 쬐이고 있었다.


 그런 리자몽과 이상해꽃을 바라보던 어니부기는 아직은 한참이나 작아보이는 제 모습을 불만족스러워했다. 제게 풀이죽은 모습이 안타까워 레드가 어니부기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불쑥 다가온 리자몽이 레드의 앞길을 막았다. 진화를 마친 리자몽은 자꾸만 등에 레드를 태우고 날아가고 싶어했고 이상해꽃은 덩굴을 꺼내 자꾸만 날아가려는 리자몽의 발목을 붙잡았다. 진화후에 더 시끌벅적해진 분위기에 레드가 피실거리며 웃었다.


 결국 보라타운에 들어오기까지 요란해진 포켓몬들을 몬스터볼에 넣은 레드는 보라타운을 상징하는 푯말을 보고 그 작은 마을을 돌아보았다. 보라빛이 스며든 오묘한 분위기의 작은 마을이였다. 보라타운은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흘렀는데, 그에 뻐근한 몸이 유독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은 어느 지점을 지나자 경직되기 시작했다. 가까운 포켓센터로 가는동안 왜인지 모를 사람들의 한이 섞인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




 레드는 경직된 표정으로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을 쳐다보았다. 레드의 시선이 향한곳은 포켓몬타워였다. 짙푸른 기운이 침침하게 느껴지는 높은 건물에선 울음소리와 곡소리가 잔뜩 들렸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괜히 기분이 덩달아 울적해진 피카츄가 레드의 목덜미에 뺨을 부비며 울먹였다. 레드역시 기분이 오묘해지는것은 동감이였다.


 고개를 푹 숙인 레드가 삐뚫어진 모자를 바로 고쳐쓰고 포켓몬센터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포켓센터에 도착하고 몬스터볼에서 회복을 마친 포켓몬들을 꺼내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보라타운에 들어선 순간부터 레드의 포켓몬들은 모두가 풀이 죽어있었다. 돌산터널을 막 지났을때만 해도 활기찼었는데 갑자기 얘들이 왜이러지. 걱정되는 마음에 레드가 포켓몬들의 머리를 쓰다듬었으나 상태는 딱히 호전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있던 포켓몬센터의 간호사가 넌지시 말했다.




 "오시는길에 혹시 포켓몬타워를 보셨나요?"

 "...?"




 의아한 표정을 지은 레드가 간호사의 말을 되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보라타운은 처음이시군요? 그에 레드역시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는 그제서야 그 물음의 부연설명을 더했다.




 "보라타운은 작은마을이지만 랜드마크로 있는것이 바로 저기있는 포켓몬타워예요. 그리고 그곳은 죽은 포켓몬들의 안식과 명복을 빌어주는 납골당같은 곳이죠.. 그래서 그런지 포켓몬타워를 처음 본 타지역의 포켓몬들은 이렇게 기운이 떨어지는 경향이 없잖아 있답니다. 보아하니 포켓몬타워에 성묘하러 오신것은 아닌 것 같으신데.. 어떤이유로..."

 "......"

 "아, 여행중이시군요. 성묘하러 오신것이였다면 2층이상으로는 못올라 가실거라고 말씀드리려던 참이였어요."




 그녀의 말에 레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간호사는 음 하고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관광오신분께선 딱히 상관없는 이야기일테지만.. 그 사실 포켓몬타워가 최근 로켓단들에게 점령을 당한 상태에요. 그래서 2층 이상으로는 발도 못내딛는 수준이라서.. 성묘하러 먼곳에서 오신분들이 헛걸음을 하고계세요."




 로켓단?


 레드의 질문에 그녀는 로켓단이 포켓몬마피아라고 설명했다. 요즘 시대에 마피아라니. 현실과 동떨어져도 갑자기 기분이 팍 나빠진 레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저런 보라타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레드는 포켓몬센터를 나오자마자 포켓몬타워를 향했다. 그곳을 향할수록 발걸음이 바닥으로 푹푹 꺼지는 기분이였으나 레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때는 타워의 회색빛이 어두침침한 보라빛으로 물들어가는 저녁시간이 되어갈 즈음이였다.




***




 "..가디야... 왜 먼저 떠난거니.."

 "나와 함께해주던 우리 삐삐가 너무 그리워.. 보고싶어.."




 포켓몬타워의 1층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눈에서 눈물이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라타운은 여태껏 지나왔던 다른 마을들과는 다르게 가라앉은 심해와 같은 곳이였다. 슬퍼하는 사람들과 포켓몬들의 명복을 빌어주던 레드는 발걸음을 옮겨 윗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 순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키던 무녀가 레드를 붙잡았다.




 "이 위쪽으로는 사악한 기운이 깊기 때문에 올라가시면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돌아가시죠."

 "...."

 "..? 왜 그러시나요..? 꼭 올라가셔야 하실 이유라도..?"

 "...."

 "...네? 로켓단을요..?"




 얘가 지금 뭐라는거야?

무녀는 기가찬다는 표정으로 레드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것 같아 보이는 풋내기 10대 소년이 로켓단을 쫓아내려 왔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지려던 참이였다. 그녀는 좋게 말해 레드를 돌려보낼 생각이였으나 이 과묵한 소년은 생각보다 고집이 센 편이였다. 하지만 어린 소년의 고집대로  올려보내주기에는 위층은 너무나도 가혹한 곳이였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 겁없는 소년을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무표정의 소년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앞으로 주욱 나아갔다. 순간 마주친 소년의 눈에 몸이 굳어버린 그녀는 홀현히 위층으로 사라져가는 소년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소년의 눈빛은 놀라울 정도로 별 대수롭지 않아하는 눈빛이였다. 마주칠 상황이 얼마나 위험할지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앞으로 주욱 뻗어나가는 그 뒷모습이 얼마나 무모하게 보이는지, 결국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입을 꾸욱 다물었고 흐트러진 자세를 정돈했다. 


 위층에 즐비해 있는 무녀의 동료들은 모두 악령에게 영혼을 잠식당한 상태였었다. 아마 저 소년이 그녀들을 만날 것이 뻔한데.. 걱정이 되었다. 어려보이는 그 소년역시 잠식당할 까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년을 붙잡기위해 저 위로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양손을 간절히 모아 기도만을 올릴 뿐이였다. 하도 기도를 올릴 날의 연속이였기에 그녀의 손의 지문들이 닳아 있었다.




***




 "..당신에게 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바랄게요."




 악령에 빙의당한 무녀들과의 배틀은 층을 거듭할수록 그 횟수가 많아졌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타워의 내부를 돌아다니던 레드의 등 뒤로 그림자가 주욱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가 점점 새까맣게 타들어가는것에 이상한 의아심을 느낀 어니부기가 그림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순간 그림자에서 웃는얼굴의 형체가 둥실 떠올랐다.


 놀란 어니부기의 반응에 레드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웃는얼굴의 흔적은 보이지도 않았고 괜히 소름이 돋은 레드가 어니부기를 다독이고 꼬리의 불로 시야를 밝히던 리자몽에게 잠시 멈추라 하였다. 꽤 많은 계단을 올라왔고 지치기도 할 즈음이였다. 레드는 자꾸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어니부기를 걱정스러워했다.


 하지만 어니부기는 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있는곳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산터널보다도 더 기분이 나쁜 곳이였고, 진화가 뎌딘 제 상황을 아까부터 계속 의식하고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헛것을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드의 그림자에서 자꾸 무언가가 보였다. 어니부기는 레드가 걱정이 되었다. 자꾸만 레드의 그림자에 떠오르는 형상이 레드를 집어 삼킬듯이 커다랗게 덩치를 키워만 갔다.




 "..?"




 그리고 그 그림자가 어니부기에게도 드리워졌다. 레드는 우뚝 멈춘 어니부기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그에게 손을 뻗으며 달려갔다. 유난히 길게 드리워지던 어니부기의 그림자가 어니부기를 집어삼킬듯 덮쳐오고있었고 그 커다란 그림자와 눈이 마주쳤다.


 고우스트.


 고스트타입 포켓몬중 하나로 알고있는 고우스트는 위험한 포켓몬이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가스로 이루어진 그에게 붙잡히면 깨어날 수 없을수도 있다는 말이였다. 레드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고우스트의 가스탓에 몸이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어니부기에 정신을 냉정하게 차리기가 힘들었다. 혼란스러워진 상황속에 자신을 부르짖는 피카츄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고스트타입의 포켓몬들은 타인의 약점을 잘 알기에 그것을 교묘히 이용한단다.」


 「조심하렴, 그들은 마음에드는 것을 얻기위해 무엇이든 한단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조심하렴. 가장 교묘한 수법을 쓰는 녀석이니 약점을 휘둘러 너를 노릴지도 몰라.」


 관동에 떠도는 이야기가 왜 지금 갑자기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레드는 점점 검게 물들어 가려는 어니부기를 붙잡기 위해 손을 주욱 뻗으며 달려갔다. 그 순간 이였다. 새까맣게 물든 어니부기의 얼굴에 고우스트의 얼굴이 떠오르다가 가스가 되어 흩어져 버렸고 그에 레드가 눈을 의심하기도 전에 시야가 깜깜해져가기 시작했다. 공기가 사악 가라앉아 공간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어왔고 새까만 보랏빛을 띄는 그림자가 레드의 눈을 가린뒤 뒤에서 끌어당겨왔다.


 「보라타운의 포켓몬타워에는 고오스와 고우스트가 즐비해 있단다. 이들은 너를 곤란하게 할 장난을 칠지도 몰라.」


 「하지만 너의 그림자가 너보다 덩치가 커지고 혼자 움직인다면, 작은 아이야. 너는 냉큼 도망가렴. 도망가야 한단다.」


 「그 그림자가 널 너무나 사랑해서 너를 집어 삼킬지도 몰라.」


 「팬텀. 팬텀이란다. 어서 도망가렴.」


 팬텀.

아차싶은 순간에 이름이 떠오른 레드가 손을 뻗어 팬텀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본디 그림자는 형체를 잡을 수 없는 법이다. 새까만 시야에 팬텀의 웃는 얼굴만이 둥실 떠올랐다. 레드는 눈앞이 깜깜해져만 갔다. 




 "피카!"




 새까만 그림자속으로 사라져버린 레드를보며 울부짖던 피카츄의 앞에 고우스트에게 시달리고있는 어니부기가 보였다. 리자몽과 이상해꽃이 진화했던 순간부터 이상한 반응을 보이던 어니부기를 알고있던 피카츄는 이를 악물고 어니부기에게 울부짖었다. 함께했던 시간이 짧던 길던, 행복했던 시간을 함께 보냈던 말던, 레드에게 위험을 가져다준 원인이 어니부기임이 확실하기에 피카츄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피카츄에게 레드보다 소중한건 없었다. 설령 그게 '레드의 포켓몬들'에 포함되어있는 다른 동료들이라도 그들은 레드보다 소중하지 않았다. 그런 레드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분노탓에 온몸에 전기스파크가 튀던 피카츄는 어니부기를 향해 이를 악 물었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전기를 모은 피카츄는 처절한 울음소리와 함께 어니부기에게 전기를 쏘았다.


 그에 포켓몬타워의 전체가 들썩 했고 피카츄는 엉엉 울부짖다가 레드의 그림자위에 쓰러졌다. 전기스파크가 튀던 어니부기는 뒤로 넘어졌고 그제서야 걷혀들어간 고우스트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마비에 걸린 몸이 말을 듣지 안았지만 어니부기는 절뚝절뚝 걸어서 레드의 그림자에 다가갔다. 흔적만 남은 레드의 그림자탓에 어니부기의 억장이 무너졌다. 이 새까만곳 아래에 레드가 있었다.




***




 보라타운에 도착한 그린역시 그곳의 랜드마크인 포켓몬타워에 들렀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그린은  흐트러졌던 자신의 속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다가 커다란 굉음이 들린것에 흠칫 놀랐지만 말이다. 뭐지 싶던 그린이 걸음을 부지런히 옮겨 굉음이 들렸던곳을 찾아갔고 보이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뭐야?"




 안개사이를 지나가자 레드의 포켓몬들이 보였다. 레드도 근처에 있던건가 싶기도 하고, 역시 레드짓이였구나 싶어 픽 웃음이 나와 그린은 레드를 찾기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단걸 느끼기까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린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얼룩덜룩한 그림자 흔적 위에서 쓰러진 레드의 피카츄와 마비에 걸린체 울고있는 어니부기. 몬스터볼에서 나올생각조차 없는 이상해꽃과 평소의 소란스러움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무거운 표정을 짓고있는 리자몽까지.


 그리고 그림자흔적 위에 홀로남은 레드의 모자에 그린은 머릿속이 저릿하게 띵 울려왔다. 보라타운의 포켓몬타워와 간혹 마주쳤던 고스트타입 포켓몬들. 그리고 그림자 흔적과 홀로남은 레드의 포켓몬들. 보이지않는 레드. 믿고싶지 않은 현실파악에 그린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갔다.


 예전에 고스트타입 포켓몬에 대한 괴담들을 들은 기억이 있다. 팬텀이라고 하는 포켓몬이 마음에드는 트레이너를 만나면 그림자속으로 데리고 간다고. 어려서부터 포켓몬들이 유난히 따랐던 레드였기에 지금 이 상황도 영 말이 안되는 상황은 아니였다. 그게 그린의 울분을 터지게했다. 점점 옅어져서 사라지려는 그림자 자국을 손끝으로 긁던 그린이 이를 악 물었다.




 "... 너네는 멀리 떨어져있어."




 얼룩위에 쓰러진 피카츄를 어니부기에게 안겨준 그린이 레드의 포켓몬들을 멀리 떨어트렸고 자신의 몬스터볼 안에서 윤겔라를 꺼냈다. 윤겔라에게 강력한 싸이코파워를 분출시키자 타워안의 일부가 조금씩 일그러져가는게 보였고 그에 곳곳에 숨어있던 고오스와 고우스트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린에게 위협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물론 상성탓에 고스트타입 포켓몬들에게 데미지를 줄 수는 없지만 그들의 경계를 일그러트리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소란스러운 윤겔라의 훼방에 점점 옅어져가던 레드의 그림자가 선명해지기 시작했고 그 위로 불쾌해 보이는 팬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린이 손을뻗어 레드의 모자를 꼬옥 쥐고 이를 악 물었다.


 널 찾으러 갈거야.


 다짐을 되세기던 그린에게 바닥의 그림자가 손을뻗어 그를 밀어냈다. 소름끼치는 감촉이 느껴지자 그린이 숨을 헉 하고 들이삼켰다. 하지만 그린은 행위를 멈추지 않고 얼핏 보이는 그림자의 속에서 레드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그 넓은 관동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너를 찾아다녔는데, 이까짓 그림자 속에서 너를 못찾을리가 없지. 픽 웃은 그린이 그림자에 빨려들어가듯 몸을 집어넣어 손을 주욱 뻗었다.


 시커먼 보라빛 어둠속에서 빨간색은 보이지 않았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어져서 그린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레드의 존재를 확인하려 애를썼다. 손끝에도 닿지않는 레드에 애가 타들어가려 했으나 그린은 마음을 다잡았다. 갈색시티를 벗어났을 때 부터 도망가는 레드를 붙잡지 못했던것을 내내 후회했었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다짐은 생각보다 그린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린은 더 깊은 곳까지 손을 뻗었다.




 "..레드....!"




 적막속에 들리지 못할 소리를 지른 그린이 몸을던져 손을 뻗었다. 이 안에 레드가 있다. 만약 네가 여기있다는걸 알고있으면서도 너를 붙잡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평생을 두고 후회할것이 뻔하지. 아마 두번다시 너를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그 순간부터 후회했던거같아. 


 내 앞에서 사라지려고 하는 너를 그때 붙잡을걸.


 이번에 너를 못잡으면 넌 정말 내게서 평생토록 사라질 것 같아. 그러니 나는 지금 너를 붙잡을거야. 다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지금 내 손에 닿지 않지만 몇백분의 확률로 네가 내 손끝에 살짝이라도 닿는다면. 


 난 널 붙잡을거야.




 "내 손 잡아, 레드!"




***




 팬텀의 품에서 한참 뒤 정신을 차린 레드의 눈앞에 하얀 손이 절실하게 뻗어져왔다. 그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퍽 불쌍할 정도로 절박하게 뻗어진 손에 레드가 그 손을 잡으려 손을 뻗으려했다.




 "...?"




 하지만 몸에 옭아메어진 팬텀의 그림자가 레드를 놓아주려하지 않았다. 난감하지만 레드는 그를 벗어나려 약하게 몸부림을 치려했다. 하지만 그마저에도 상처받은 눈빛이 레드의 눈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그에 레드의 마음이 약해졌다. 너는 뭐가 그렇게 외로워서 이 어두운곳에 혼자 있었던것인지 묻고싶었지만 레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레드는 눈앞의 팬텀의 얼굴을 동정이 가득담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팬텀의 얼굴이 상처받은듯이 일그러졌다가 이내 곧 부서져내렸다. 레드는 눈앞에 뻗어진 흰 손을 향해 손을 뻗어 그 손을 마주잡았다. 약하게 마주잡은 레드에 화들짝 놀란 흰손은 이내 놓칠까봐 레드의 손을 더 강하게 잡고 끌어당기려했다.


 하지만 레드는 자신의 몸을 옭아멘 팬텀탓에 손길을 따라 그곳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으로 레드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고 이내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짓궂고 익살맞은 표정만 짓던 팬텀의 얼굴이 울고있었다. 새빨간 눈에서 흐르는 보라빛 눈물에 레드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레드는 몸에 힘이 주욱 빠졌다. 




***




 자신의 손을 맞잡은 레드에 그린은 한참을 끙끙대며 그를 끌어당기려 했으나 검게 일렁이며 타워 전체를 집어삼킬듯 꿀렁이던 그림자가 덩치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린의 몬스터볼 안에서 튀어나온 그린의 포켓몬들이 그린의 주변을 보호하며 위협을 가하는 고스트포켓몬들을 쫓아내려 애쓰는게 보였다. 하지만 머릿수에서 딸리다 보니 그세 지친듯 해 보였고 그에 그린의 윈디가 레드의 포켓몬들을 향해 짖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레드가 사라진 순간부터 레드의 포켓몬들은 기력을 다 했었다. 사기를 잃은 리자몽은 죽은 눈빛으로 레드가 사라진 그림자만 보며 침묵했고 피카츄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정도면 거의 정신을 차리고 싶지 않아하는게 분명했다. 몬스터볼 안에 들어가 나오지않는 이상해꽃의 볼 주변의 틈세로 이상해꽃의 독가루가 스물스물 세어나왔다. 이상해씨 시절부터 불안할 때 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이였고 모든상황을 멍하니보던 어니부기의 뺨에 나시의 잎날이 할퀴었다.


 


 "...."




 지친것인지 화가난 것인지 숨을 씩씩이던 나시가 어니부기에게 화를 내었다. 


 야. 네 주인 너 지키려다가 이렇게 된거잖아.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쿵 내려앉은 어니부기가 품에 안고있던 피카츄를 내려놓았다. 어니부기의 눈빛이 텅 비어버린것을 보고 나시는 혀를 쯧 차고 신경질을 부렸다. 바보같은 놈이다. 저런놈들한테 배틀에서 졌었다니. 




 "...."




 잎날에 할퀴어서 아린 뺨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어니부기의 어깨가 덜덜 떨려왔고 이내 큰소리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어니부기의 머릿속에 사색이 된 표정으로 손을 뻗으며 달려오던 레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던거지. 머릿속에서 레드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레드는 자신의 트레이너다. 그런 자신의 트레이너가 위험에 빠져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거지?


 숨을 헉헉이며 울던 어니부기가 비틀거리며 격렬하게 요동치는 레드의 그림자를 향해 한걸음씩 위태롭게 걸어갔다. 한걸음마다 발자국에 새겨지던 후회의 얼룩이 마치 레드가 사라진 그림자같이 느껴졌다. 레드가 자신에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왔는데 나는 뭘 하고있던거지. 어니부기의 비틀거리며 위태롭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포켓몬이 자신의 트레이너를 지키는건 당연한 이치였다. 눈물이 엉망으로 얼룩져갔지만 어니부기는 숨을 흡 들이삼키고 그림자를 향해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레드가 그랬듯이 자신이 레드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자신은 '레드의 포켓몬'이기 때문이였다. 각오와 함께 이를 악 문 어니부기가 높게 튀어오르고 강렬한 물줄기를 쏘기 시작했다.




 "..?! 무슨..!"




 레드의 손을 끌어당기던 그린은 깊은 심해같은 그림자 속에서 파란 물줄기가 일렁이는걸 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하고 의식하기도 전에 강하게 일렁이던 물줄기가 레드를 밖으로 밀어내려는듯 몰아치기 시작하는게 보였다. 그에 그린이 그 반동을 이용해 레드를 더 강하게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




 강한 물줄기를 그림자를 향해 쏘던 어니부기의 몸에 갑자기 물줄기와 함께 빛이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에 정신을 놓고있던 리자몽의 눈이 놀란듯 커졌고 흰 빛 사이에서 어니부기의 윤곽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시련을 극복할 때 마다 주어지는 결과의 값이였다.


 진화.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쏘던 물줄기가 하이드로펌프였다는 것을 어렷품 눈치 챌 즈음에서야 어니부기는 거북왕으로 진화했다. 그에 더욱 강해진 물줄기를 쏘던 거북왕에 반동으로 레드는 점점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림자 위로 팡 터지는 물줄기와 함께 레드가 그림자에서 빠져나왔다. 그린의 손을 꼭 움켜잡던 레드는 그린의 위로 넘어져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고 그린은 입꼬리를 간신히 주욱 올리고 레드의 젖은머리 위로 손에 꼭 쥐고있던 모자를 씌어주었다.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레드.."




***




 극적으로 레드가 그림자에서 벗어나자 울다가 거의 실신할뻔한 피카츄가 다시금 눈물을 쏟으며 레드에게 안겼다. 죽은 눈빛을 하고있던 리자몽도 레드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고, 이상해꽃도 볼에서 나와 레드의 상태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그리고 막 진화를 마친 거북왕에게 다가온 레드가 그의 턱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맞대었고 거북왕은 눈을 지긋이 감고 레드에게 응석을 부렸다. 겨우 안정을 되찾게 되자 윤겔라의 싸이코파워도 다 지워졌고 위협을 가하던 고스트포켓몬들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진정이 될때까지 그린은 레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몸한테 목숨을 빚진거 알지? 레드?


 뭐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이몸은 어른이니까.




 그걸 유난스럽게 쳐다보는 레드탓에 그린은 또 괜히 엄청나게 툴툴거렸지만 굳이 잡은 손을 놓진 않았다. 그리고 레드는 그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던 층을 벗어나려 발걸음을 옮겼으나 레드를 끌고갔던 그 팬텀이 레드의 발목을 잡았다. 레드는 그런 팬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한참을 발목을 잡던 팬텀은 결국 레드의 몬스터볼 안에 들어가서야 안정을 찾았고 레드는 타워의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엥? 뭐야, 저 꼬마들은?"

 



 꼭대기층에는 이곳 간호사가 말했던대로 로켓단들이 즐비해있었다. 로켓단과의 첫 대면은 썩 유쾌하지 않았고 그린과 레드는 한숨에 그곳에 있던 로켓단들을 쓸어버렸다. 당황한 로켓단들이 포켓몬타워를 벗어난 후 레드는 그곳 구석에 있던 노인을 발견했고 그와함께 타워를 빠져나왔다. 노인은 자신을 등나무노인이라 소개하였다.




 "아마 필요할 때가 있을테니.. 이걸 주마. 도와줘서 고마웠다."




 레드는 등나무노인에게 포켓몬피리를 받았고 지친몸을 이끌며 그린과 함께 포켓몬센터를 향해 갔다. 거의 그린에게 부축받다싶이 끌려가며 도착한 포켓몬센터에 지친 자신들의 포켓몬들의 회복을 맡긴 레드는 그린과 함께 방을 빌려 그곳에 들어가 주저앉았다. 애매하게 물이 마른 몸을 내내 찝찝해하던 레드는 금방 씻으러 욕실로 향했고 그린은 종일 레드의 손을 잡았던 자신의 왼손을 보고 귓바퀴를 붉혔다. 조금 유난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쪽팔림이 밀려왔다.


 침대에 몸을 던진 그린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혼자 이상한 감정에 끙끙대기를 몇분, 욕실에서 레드가 머리를 털며 나왔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린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순간 눈이 우뚝 마주치자 그린의 입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야, 진짜 몸 생각좀 해."




 너 그러다 진짜 일찍죽어.

진지한 말투에 굳은 표정을 짓던 레드가 간만에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한숨을 푹 내쉰 그린이 말을 이었다.




 "내일 시간 되면 잠시만 같이 태초마을에 가보자. 방금 네 포켓기어로 할아버지한테 연락왔었는데, 그 팬텀에대해 물어볼게 있나봐. 알았지?"




 그에 레드가 부시시해진 머리를 털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린의 옆에 풀썩 누웠다. 순간 얼굴에 열이 올라 그린이 입을 다물었다.


 너는 상트앙느호에서 그런일을 당하고도, 참 잘도..


 그러나 곧 눈을 지긋이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구나, 불편할까봐 그러는구나.


 사실 이런점이 레드다웠다. 안일하게 생각했지만 대충 알고있었다. 레드는 무심한게 아니라 타인을 향한 배려가 먼저 향하는 것이였다. 그런 상냥한점은 예전부터 알고있었다. 그것에 내 심장이 뛰었던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린이 손을 뻗어 레드의 눈 위를 가렸다. 순간 레드의 몸이 움찔거린걸 보고 침묵하던 그린이 낮게 속삭였다.




 "오늘은 일이 많았으니까 어서 자. 내일 일찍 태초마을로 출발할거니까 알고있고. 알았지?"

 "....."




 레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 위로 속눈썹이 감기는게 느껴졌고 그린도 레드를 따라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린과 레드는 보라타운에서 잠이 들었다.

다시 시작하는 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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