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윈은 아직 이야기가 남았을 처럼 불을 밝히고 있는 별의 어항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류가 나면서 꺼졌기 때문에 인식이 안되었나? 확실하게 오늘치의 이야기를 읽었던 카즈윈은 어째서 어항의 불이 밝혀져 있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어항에 고정되어 있는 시선은 핸드폰으로 향하고 다시 거실로 향했다. 눈빛에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안방으로 돌아온 카즈윈은 침대에 걸터앉은채 핸드폰의 전원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1분, 혹은 2분. 카즈윈은 저도 모르는 사이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시선은 여전히 방문너머로 비쳐들어오는 환한 어항의 불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편히 뉘여진 몸은 조금더 안락한 자세를 찾기 위해 꿈틀거리며 침대위를 유영했다. 

포근한 침구가 뺨에 닿았고 카즈윈은 이유모를 미련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잘까. 카즈윈은 핸드폰도 기계인데 오류정도는 일어날 수 있는 거라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려했지만 이유도, 근본도 없는 알 수 없는 집착이 그의 수면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피곤한데. 카즈윈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손을 뻗어 핸드폰을 끌어당겼다. 

뜨끈뜨끈하면서도 매끄러운 철제 프레임 가장자리에 톡 튀어나온 버튼이 느껴졌다. 

이번에 켜지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자. 카즈윈은 거의 잠들 생각으로 핸드폰을 베개 밑으로 쑤셔넣으며 전원을 눌렀고 잠시 뒤 그의 베개 아래서 드륵 하고 얕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있던 카즈윈은 베개밑면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카즈윈은 한숨과 함께 돌아누웠다. 핸드폰에서 전원이 켜질때만 나는 특유의 진동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화면은 틀림없이 신시엘라크사의 로고가 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카즈윈의 예상과는 달리 화면에는 핸드폰은 오류가 났던 어플의 메세지 창이 그대로 띄워져 있었다. 


다른점이 있다면 띄워진 메세지창 속에 처음보는 매듭무늬가 있었다는 것 정도. 

카즈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매듭무늬를 이루는 선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뱀이었다. 디자인적으로 간략화된 뱀의 머리는 꼬리라고 구분하기도 힘든 매듭의 끄트머리를 문채 마름모꼴의 복잡한 매듭무늬의 내부를 순환하고 있었다. 

이런 무늬를 뭐라고 하지? 켈틱? 카즈윈은 이 아이콘이 오류를 표시하는 아이콘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아까부터 다시 발열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반절정도 차 있었던 베터리는 붉은 빛으로 깜빡이고 있었고 핸드폰은 한겨울 갓 구워낸 고구마마냥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대기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에 응답하듯 메세지창에는 조각난 기록을 불러오는 중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역시 오류였나. 카즈윈은 핸드폰의 충천기가 분리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한번 읽으면 다시는 열람할 수 없는 어플의 특성상 지금 전원이 끊어진다면 다시는 이 조각난 기록인지 뭔지를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한 신중한 행동에도 카즈윈은 결정적인 단서를 놓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흔들림이었다. 

거실을 밝히는 어항의 불빛중 일부가 미세하게 일렁거리는 그림자를 내비치고 있었고 보글거리는 작은 소리들이 백색가전들의 특유의 낮고 지속적인 소음속에 파묻혀 버렸다. 

만약 카즈윈이 거실에서 핸드폰을 충전했더라면 메세지창에 기록을 불러온다는 문구가 뜨는 동시에 어항 속 별에서부터 수많은 기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카즈윈은 거실쪽을 내다볼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카즈윈이 알지 못하는 사이 어항은 격렬한 고요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 모든 이변이 정지한 것은 카즈윈의 핸드폰에 새로운 문자들이 떠오른 직후였다. 


00:00:01 카즈윈은 갑작스럽게 떠오른 숫자들을 바라보며 슬쩍 스크롤을 내렸다. 숫자 아래 첫 문장이 보였다. 

이어지는 문자들은 모두 자간과 줄높이가 이상하게 설정되어 읽기가 조금 불편했지만 글씨가 깨어진 것은 아니었다. 카즈윈은 첫문장이 화면에 드러나는 동시에 카운트다운, 혹은 스톱워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뭔지 모를 조급함을 느꼈다. 딱 한번만 읽을 수 있다던가, 갑자기 이야기가 갱신된다던가. 

영문모를 스톱워치까지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 어플의 제작자는 여러의미로 사람을 조급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했다. 

카즈윈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시간을 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게 이러한 측정을 할때면 빨리 끝내면 끝낼 수록 좋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카즈윈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대신 아예 외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본편처럼 긴 글이라면 조금 곤란하지만 대게 이런식으로 나오는 글들은 아마도..

‘외전’.. 카즈윈은 몸을 반쯤 굴린 뒤 몸을 반쯤 일으켰다. 

화면을 응시하는 눈이 맹금류의 그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방금전까지 집착을 버리고 잠이나 자야겠다며 이불속을 파고들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모를 날카롭고 진지한 눈빛이었다. 카즈윈은 윗입술을 살짝 핥으며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눈은 금방 빛의 세기에 적응되었고 카즈윈은 마치 업무시간처럼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손끝을 굴리는 동시에 은청색 눈동자가 빠르게 화면을 훑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했던 거래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거래였다.] 
[밀레시안은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저울 위에 올렸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었다.] 
[이해가 있었지만 신뢰가 없었다.] 
[영원은 있었지만 자유는 없었다.] 
[미래가 결정되었을 때 그 남은 날들은 믿음으로 채울 수 밖에 없었다.] 
[믿음으로 기반된 유예된 날들이 이어졌었다.] 
[밀레시안은 언제나 답을 위해 증명해야 했고 언제나 그 과정을 설명해야 했다.] 
[그 믿음은 이따금씩 동경의 색깔을 띄었고 그 믿음은 이따금씩 구원의 소리로 울렸다.] 
[그 믿음은 이따금씩 나란히 서는 발걸음이었으며 그 믿음은 이따금씩 친애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믿음을 기다렸다.] 
[수많은 믿음들 중에 밀레시안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믿음은 이름이었고 마음이었으며 명예였고 육신이었다.] 
[밀레시안은 눈 앞에 나타난 이계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이 거래의 대가는 낙원이었다.] 

카즈윈이 문장을 모두 읽은 것은 1분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실수가 있었다면 내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스크롤을 크게 크게 내렸다는것 정도. 

내용이 이정도로 짧을줄 몰랐던 카즈윈은 얼마내리지 않아 페이지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랐고 낙원이었다. 라고 쓰여진 마지막 문장 옆에 반짝이는 직선의 짧은 줄을 발견했다. 

글자의 높이와 똑같은 직선모양의 아이콘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질감을 느끼기 어려운 짧은 패턴의 불빛이었다. 

텍스트 커서? 카즈윈의 의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깜빡이는 커서가 옆으로 한 칸 움직였다. 

마침표를 하나 건네띄고 낙원이었다 라는 문구를 지우기 시작한 텍스트커서는 빠른 속도로 문장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고 스크롤바는 점차 짧아지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더이상 짧아질 것이 없었던 스크롤바가 사라지고 가장 윗 페이지로 올라왔을때 카즈윈은 스톱워치처럼 정방향으로 올라가던 숫자들이 언제부터인가 다시 카운트 다운이 되어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문장이 지워지기 시작하고 나서부터겠지. 문장이 지워지는 속도는 카즈윈이 읽어내려가던 속도보다 빨랐고 어느새 마지막 문장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시계에는 아직도 20여초가 남아있었다. 카즈윈은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거래였다.. 라는 문장의 끝에 멈춰선 커서를 바라보았다. 


낙원이었다. 라는 문장의 온점을 남기고 지워낸 탓에 공정하지 못한 거래의 문장 끝은 어쩐지 미련과 후회감이 가득한 느낌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시간은 한자릿수로 줄어들었고 커서는 천천히 문장의 중간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후회가 가득한, 그럼에도 차마 포기할(지워낼) 수 없었던. 

거꾸로 돌아가던 시계는 멈춰섰고 카즈윈은 문장의 일부가 지워지고 남은 00:00:00의 문장을 바라보았다. 남겨진 것은[그것은 공정한 거래였다.] 의 한 문장뿐이었다. 

세계와 세계를 맞바꾼 거래였기에 깨어진 이름의 주인은 기쁘게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메세지창은 카즈윈이 그러한 내막에 대해 해아려볼 시간도 주지 않고 사라졌고 화면에는 내일 올라왔어야할 다음 이야기가 올라와 있었다. 

이벤트성이건 정식 카운트건 어플안에 내장된 시계가 0이라는 조건을 채웠으니 다음 화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이런 피말리는 연출의 1+1이벤트는 더이상 사양이라고 생각하며 메모장 어플을 불러왔다. 

뒷내용은 얼마 읽지 못했지만 일단 앞부분은 어느정도 외워놓았던 조각난 기록을 적어넣기 위해서였다. 

카즈윈은 어차피 지워진 문장들이 무슨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연출과 함께 굳이 ‘외전’을 등장시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줄거리와 동떨어진 외전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카즈윈은 기억나는 문장과 부분적인 단어, 뉘양스등을 기록한 뒤 핸드폰을 뒤집어 엎었다. 어두운곳에서 밝고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이 너무 피로해진 탓이었다. 

머릿속 한 구석에 방금 막 올라온 따끈따끈한 최신화가 궁금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카즈윈의 눈에는 이미 졸음기가 가득했다. 

내일도 출근이 있었고 읽지 않은 이야기가 어디론가 사라질리도 없었다. 카즈윈은 뿌옇게 흐려져가는 시야 너머로 거실에서 비쳐들어오는 불빛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꼬르륵 거리는 물거품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카즈윈은 둔하게 울려오는 냉장고 소리를 들으며 깊은 수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조용하던 안방에 작은 진동소리가 울렸고 이내 엎어진 핸드폰과 침대의 틈새사이에 불빛이 밝혀졌다. 

시작 로고와 함께 재부팅이 완료된 핸드폰은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경고음을 울리다가 충전기가 연결되었다는 화면으로 바뀌는등 홀로 요란을 떨었고 이내 천천히 수면모드로 전환되었다. 

핸드폰의 불빛이 줄어드는 동안 어항의 물거품도 줄어들었고 이내 요동치던 수면도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모든 것은 카즈윈이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카즈윈이 다음 이야기를 읽은 것은 여전히 퇴근 후 집에 돌아오는 시간대의 일이었다. 

카즈윈은 자신이 제법 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퇴근후 기분전환을 위한 취미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누구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설명할 의무도 없었지만 카즈윈은 그렇게해서라도 이야기에 빠져드는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구분하고 싶었다. 

솔직하지 못하긴.. 어딘가 먼곳에 있는 어느 곱슬머리 상관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미 퇴근한 카즈윈에게는 들리지 않을 푸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카즈윈은 자신을 절제하는 것에 익숙한 환경속에서 자라났고 그렇게 훈련받았다. 

인내심과 자제심, 끈기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평소와 같은 패턴, 평소와 같은 시간. 카즈윈은 스스로의 충동을 잘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 무슨일 있었어? 너네 팀원들 얼굴이 하나같이 하얗게 질려있던데. 라는 옆부서 동료의 메세지에 짧게 답장을 보내며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온 카즈윈은 맥주대신 탄산수를 한 병따며 테이블 앞에 주저앉았다. 

맛으로 먹기보다는 입에서 톡톡튀는 청량감있는 탄산을 위한 맥주의 대체안이었다. 


카즈윈의 ‘취미’에 대한 경계는 단순히 소설을 읽는 시간만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생각하는 것. 카즈윈은 점점 세를 불려가고 있는 냉장고 속의 군것질거리들을 경계했고 왔다갔다하기 매번 사러가기 귀찮았던 캔맥주들의 박스구매를 고민했다. 

매주 일정했던 수건 빨래의 양이 조금 줄었다던가 무거운 것이 싫어 지갑조차 얇은 것으로 가지고 다니던 카즈윈의 자켓 안에 보조베터리가 들어있다던가. 

카즈윈의 생활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고 이제는 주변 사람들마저 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카즈윈은 옆부서 동료가 보낸 그래? 별일 아니면 됐어. 드라마 즐겁게 봐. 라는 답장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지만 따로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모두 점심에 있었던 사소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오해였다. 


카즈윈이 날마다 칼퇴근을 하던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타부서의 직원중 한 명이 용기있게 카즈윈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 그 오해의 시작이었다. 

헤루인 팀장님.. 혹시 요즘 챙겨보는 드라마 있으세요? 질문을 한 타 부서의 직원은 루나사 팀에 들어온지 얼마 안된 신입 직원이었다. 

비록 신입이라 하더라도 정보과 소속이었던 그녀가 카즈윈의 위험도를 모를리 없었건만 그녀는 대담하게도 신입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카즈윈에게 질문을 걸어왔다. 

무해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녀의 얼굴 위에는 35%의 투명도의 루나사 팀장을 겹쳐져 있었다. 

카즈윈은 아무것도 못들은 척 눈을 가늘게 흘기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의 냉담한 반응에도 신입 루나사 직원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도 이 반응은 루나사 팀장의 계산내의 반응이었다. 

외근이 많은 카즈윈 팀이 사내식당을 이용할 확률과 입맛까다로운 카즈윈이 어슬렁거리며 식당으로 내려올 확률, 그리고 그 확률을 더욱 높일 수 있는 특별 메뉴가 추가되는 시점. 

결전의 날은 왔다. 루나사의 팀장은 결의에 가득찬 표정으로 식권을 내밀며 신입직원에게 특수한 임무를 하달했다.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수요일이었으며 매달 바뀌는 특산품 소비촉진 이벤트의 마지막 주였다.


대다수의 직원들은 비가오는 날이면 밖에서 사먹는 것 보다 사내식당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고 그중에는 늘 식권이 남아도는 카즈윈의 팀원들도 끼어있었다. 

수요일은 카즈윈이 그나마 마음에 들어하는 고등어 스테이크가 나오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번달 특산품은 개암버섯. 루나사의 팀장은 지난 팀장급 회식자리에서 소금간만 살짝 더하여 부드럽게 쪄낸 개암버섯 찜이 카즈윈의 공략포인트라는 것을 확인했다며 이번 공략 확률은 98%라고 확신했다.

신입 사원은 자신의 사수에게 이거 미연시에요? 라고 물었다. 

그녀의 선임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히든몬스터 레이드 뛴다고 생각해. 

고개를 슥 돌리는 카즈윈을 보며 신입직원은 사수의 표현이 정확했음을 확인했다.

고개를 돌린 카즈윈이 이제 막 찜기에서 나온 개암버섯찜을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한번 더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엑스트라 턴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짜로 찌른다면 신입이고 뭐고 할것없이 당장 둘러매쳐져서 식당바닥에 거꾸로 매다 꽂히겠지만 신입 직원은 호신술의 ㅎ도 경계심도 ㄱ도 모르는 루나사였다. 게다가 카즈윈이 가장 껄끄러워 하는 어린 신입 직원.

카즈윈은 개암버섯찜의 순번을 기다리는, 그러면서도 루나사의 그 (끈질긴) 인간의 입김이 닿은 것이 분명한 질문을 던진 분명한 어린 직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무슨임무를 수행중인지 완전히 망각해버린 루나사의 신입은 갓 나온 따끈따끈한 버섯냄새에 정신이 팔린채 제 멍하니 찜통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은 요리그릇을 옮기는 트레이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이내 카즈윈의 손끝에서 멈춰섰다. 

신입직원은 겨우 자신이 아직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카즈윈을 올려다보았다. 

카즈윈은 이미 제 몫의 그릇을 챙긴뒤 몸을 돌려서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시려나? 그녀는 사수가 말했던 안전이 제일. 사람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조언을 떠올리고 어색하게 버섯찜으로 시선을 내렸다. 안되면 그냥 빠지라는 소리였다. 

신입직원이 자신의 버섯찜을 챙겨가는 동안 카즈윈은 버섯찜 대기줄에서 한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며 고민했다. 

이대로 떠나가는 것이 카즈윈의 평소 패턴이었지만 루나사는 공과 사는 구별하지 못하더라도 0과 null에는 예민한 인간들이었다. 

이대로 온건히 물러난다면 루나사는 또다시 다음기회를 노릴것이고 이는 결국 루나사의 집착을 허락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결국 카즈윈은 (자의적 지원으로) 이용당했을 뿐인 신입 직원을 울리지 않는 선에서 루나사에게 경고를 보내야겠다고 결론내렸다. 

그렇게 카즈윈은 뒤로 돌아서서는 막 버섯찜을 들고 대기줄을 벗어나려는 어린 직원에게 다가갔다. 

카즈윈은 고개를 슬쩍 기울여 신입의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였다. 

비슷해. 갑작스럽고도 온화한 목소리에 어린 직원은 네? 하고 되물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카즈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흐르듯이 움직여 어린 직원의 트레이에 있던 버섯찜을 가져갔고 곧 다른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었다. 

루나사의 신입은 자신이 뭐에 당했는지 알지도 못한채 멍하니 카즈윈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한참 뒤에야 자신이 정보값을 강제징수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신입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채 자신의 사수에게 돌아갔다.

사수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막내에게 조용히 자신의 디저트 푸딩을 양보해주었고 보고를 들은 루나사의 팀장은 미친듯이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루나사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인 상부는 버섯찜 기간을 일주일 더 연장시켜 주었다.


카즈윈의 모호한 대답으로 루나사에서는 잠시 내부토의의 시간을 가졌지만 더이상의 정보수집은 무리라고 판단내렸다.

조사대상인 수리부엉이가 병아리의 식판까지 노리는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으니 다음에는 또 어떤 잔혹한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게 그 이유였다.

덕분에 루나사의 신입은 가는 곳 마다 간식이며 주전부리를 잔뜩 얻어먹으며 동정아닌 동정을 받았지만 반은 쓴웃음이었고 반은 유쾌한 소식을 가져다 준것에 대한 답례에 가까웠다.

제 팀장의 소식을 남의 입에서 듣게된 카즈윈의 팀원들은 소문의 진위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어버렸지만 카즈윈은 깔끔하게 그들을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오늘 일찍 퇴근할건데 뭐 다른 보고사항 없지? 카즈윈의 제안아닌 선언에 대부분의 팀원들은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팀원은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하얗게 질려있었다.

카즈윈은 별다른 사항이 없는 것을 체크한뒤 퇴근했고 남은 팀원들은 의자를 밀쳐내다시피 내던져버리며 하얗게 얼굴이 질렸던 팀원의 뒤로 모여들었다.

카즈윈의 팀에서 가장 드라마를 즐겨보는 드라마 매니아의 자리였다.

모든 동료들의 기대를 한 눈에 받으며 드라마 메신저클럽에 접속한 매니아 팀원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올렸다.

오늘 뭐 중요한 드라마 있나요? 잠시 뒤 여러명의 클럽원들이 각양각색의 드라마를 추천하며 오늘 방영되는 티비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빈도수로 추천되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오늘 조정기간 486 막방회에요. 조정기간486은 조정기간 4주, 6주, 8주 후에 뵙겠습니다의 약자로 도덕과 윤리의 끝자락을 달리는 논픽션 이론법률관련 재현드라마였다.

사안이 심각할 수록 조정기간이 짧다는 것이 특징인 이 드라마는 하나같이 막장시나리오를 달린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루나사는 또 책상을 두드렸고 헤루인은 비명을 질렀다.

카즈윈은 차 한번 막히는 일 없이 집에 일찍 잘 도착했다.



2019.05.09

https://twitter.com/teclatia_con/status/1126269957006708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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