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NSS 12 完: Command⌘ + S

🎧 로쿠 - 난 그대만 사랑하고요

강풍에 덜컹거리는 복도 끝 유리문을 힐끔거렸다. 위, 아래를 잠가놨는데도 이가 안 맞으니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저건 언제 고칠 생각이지. 나 영국 가기 전에도 저랬던 거 같은데. 재현은 걸음을 옮겼다. 바람은 미친듯이 불어도 광선처럼 햇살이 따스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복도 바닥을 응시했다.

스무살의 김여주는 지열이 이글거리는 걸 보며 날계란을 깨트려보고 싶다는 충동을 고백한 적 있었다. 바닥에서 기이하게 노릇노릇 익어가는 그걸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 같다고 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나아져야만 하는 기분에 대해 물은 적은 없었다.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는 건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응. 어디니?”

“지금 화병 들고 가고 있어요. 택시타고 갈게요.”

무용한 생각을 접었다. 손 안에 든 화병을 무심하게 안아들었다. 이촌동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택시를 호출했다. 삼촌이 부탁한 심부름을 완료하기 위해 졸업 전시회가 열린다는 이촌동의 한 홀로 이동했다. 소요 시간은 10분이었다. 재현은 뒷좌석에 몸을 푹 기대다가 허리를 세웠다.

주머니에 넣어둔 폰을 꺼내 김여주에게 카톡을 전송했다. 본가 갈 때 데려다 줄까. 몇 시에 갈 거야? 답장을 기다리며 제대로 영글지 못하고 바닥에 쌓인 마른 낙엽을 일별했다. 내릴 때 쯤 벌써 집에 도착했다는 회신이 도착했다. 이따 집 갈 때 전화할게. 끝으로 이어붙인 말은 언젠가 당연하게 누렸던 일상이 다시 손에 쥐여진 것처럼 웃음이 났다.

“와. 우리 때랑 스케일이 완전 다르네요.”

너른 홀에 들어서며 기함했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삼촌은 혼자 표류하는 부표같았다. 규모가 상당한 내부에 각기 다른 해석이 가미된 작품이 군데군데 전시됐다. 엉성하기 짝이 없던 모양새도 이젠 규칙을 갖췄다. 전시회 날짜는 보름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현수막엔 시기를 알리는 숫자가 인쇄됐다. 재현은 들고있던 화병을 내려뒀다. 사무실에 있던 걸 여기 어디에 두고 쓰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 물을 경황도 없이 즐비한 작품 중에 눈으로 쓱 훑어본 김여주의 작품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 비교적 가운데에 배치된 작품은 완성이 멀어보였던 지지난주에 비해 꽤 급작스러운 속도가 붙었는지 어느덧 위용있는 모습을 자랑했다. 그걸 멀찍이 살펴보다가 화병을 좀 안전한 구석으로 잠시 놓으라는 요청에 재현은 시선을 수습했다.

“화병은 왜요?”

“숙모가 예쁘대서 주문했는데 배송지를 내 방으로 해버렸어. 그거 오늘 들고 가야 돼.”

“아직도 화훼시장 가고 그러세요?”

“응. 곧 방학이잖니. 이제 같이 다녀야지.”

겨울 방학은 곧 졸업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졸전에 목매던 때가 떠올랐다. 한국에 있던 동기들은 하루 걸러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비관했다. 멋대로 연락해서 멋대로 통화를 매듭지었다. 대개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고백했고 그 옆의 친구도 비슷한 상황임을 밀고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코 앞이라는 카톡이 자주 왔다. 도착한 메세지엔 해방을 목전에 둔 가련한 미대생들의 절규가 활자에 배어나왔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제자들의 작품을 면밀히 훑어보던 삼촌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를 비켰다. 건성으로 보던 작품을 그제야 주의깊게 관람했다. 한 가지 희극을 가지고도 여러 해석이 난무했다. 누군 사랑을 포착했고 누군 배신을 용케도 끄집어냈으며 누군 희극이 아닌 비극의 전말을 전시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희망을 얘기하는 김여주의 작품은 주관적인 시각을 떼고도 가히 멋지다고 찬사할만 했다.

구조물이 크게 설치된 김여주 작품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자석을 사용하느라 쩔쩔매던 작품이 옆에 미니어처 모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밑으로 추락하려는 바퀴를 위에서 자석으로 끌어올린 작품의 완성도는 훌륭했다. 미니어처 위로 내리쬐어진 조명 덕분에 바퀴 뒤에 길게 진 그림자가 꼭 추락하려는 그걸 끌어올리는 듯했고.

희망 존재
무대미술과 김여주

단 두 단어가 적시된 작품명 아래로 설명이 공란이었다. 재현은 말이 없어졌다.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오빠가 죽으려고 했다는 말을 전하던 김여주의 표정이 문득 떠올라서. 울먹이는 눈가가 붉게 번져가는 표정엔 말로 다 담지 못할 아픔의 시간이 만져졌다. 재현을 보기 위해 영국에 왔던 김여주의 상태가 그리 건강해보이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꽉 끌어안은 몸이 평소보다 작게 느껴진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작품은 그 사람의 인생을 담기도 했다. 재현은 그제야 김여주에게 희망이 무엇이고 존재한다는 현상이 어떤 의미인지 해석했다. 존재하기 위해 희망을 붙잡고 버텼던 시간이 짐작됐다. 그 해석에는 통증이 수반됐다.

눈물을 참으려 마른 세수를 했다. 후회해봐야 다 지난 일이고. 어차피 돌아가도 똑같은 결과였을 거다. 재회를 지나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게 중요했다.

일부러 아빠가 집에 없는 시간을 택했다. 본가엔 엄마가 들여놓은 아기자기한 겨울 장식품으로 분위기가 한결 아늑해졌다. 숱한 고민을 쌓아두었던 내 방을 좀 낯설게 둘러봤다. 땅 속에 묻어둔 타임캡슐을 꺼낸 것처럼 불현듯 엄마의 계획을 떠올렸다. 내가 독립할 때 엄마는 이 방을 서재로 쓸 거라고 했지만 끝내 자신과의 약속을 미루고 오빠와 독일로 떠났다.

“여주야. 나와서 밥 먹어.”

노크 소리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언젠가 이 방이 엄마의 서재가 되길 바라며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졸전 때문에 바쁜 상태라 잠을 잘 못 잔다고 무념히 중얼거렸던 지난주의 통화는 상다리 부러질 정도의 화답으로 돌려받았다. 오빠는 전보다 미세하게 더 굳은 뻑뻑한 손을 움직이며 간신히 마디를 굽혀 수저와 젓가락을 정렬했다. 나는 바쁘게 밥그릇과 국그릇을 꾸준히 나르는 엄마를 지켜봤다.

우린 지난 일에 대해 굳이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았다. 넘기는 게 편했다. 애석하게도 가족은 그런 게 가능한 사이였다. 사과가 없이도 사과 받은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고, 사과를 하지 않아도 사과한 것처럼 자책의 마음을 지울 수 있었다. 상처를 주고도 주지 않은 척. 받고도 받지 않은 척. 곪아가는 사람이 있으면 곪아가는 줄 알았던 게 사실은 소리없이 잊혀지는 중인 사람도 있었다.

“독일엔 엄마 서재 같은 거 없어?”

“갑자기 서재?”

“엄마 원래 내 방 서재로 만든다고 했잖아.”

“…아, 그거.”

세 번째 국그릇에 국을 뜨던 엄마의 뒷모습이 멈칫했다. 뜸들이던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서재는 없어도 책장은 많이 있고, 새 책은 없어도 독일엔 낭만이 있다고.

“그거 아빠랑 떨어져 살아 그래.”

듣는 당사자가 없는데도 엄마는 말소리를 죽이고 속삭였다. 오빠가 옆에서 피식거렸다. 평화로웠다. 이질적인 평화였다. 엄마와 오빠가 맞은편 자리에 붙어 앉았다. 움직임이 더뎌 소화가 어려운 오빠를 위해 죽처럼 끓인 밥과 내 앞에 놓인 고슬고슬한 밥은 질감부터 차이가 도드라졌다. 죽을 받아먹던 오빠가 괜히 시비를 걸었다.

“너 이제 생선 가시 잘 발라먹냐.”

“내가 애야?”

“가시도 잘 못 바르는 게 가시 씹으면 입맛 떨어져서 밥 먹던 것도 안 먹었잖아.”

“그건 진짜 옛날이고. 요즘은 생선 가시 다 발라서 살만 나오거든.”

“챙겨먹긴 하나보네.”

세상은 갈수록 편리해졌다. 그러나 몸이 불편한 오빠에겐 한결같이 불편한 세상이었다. 오빠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인지했던 중학생 무렵에 나는 기꺼이 내 몫의 관심과 사랑까지 오빠에게 뺏겨도 무방한 동생이었다.

“팍팍 좀 먹어.”

“이제 먹기 시작했다. 잔소리가 꼭,”

정재현 같다는 말이 고스란히 먹혔다. 밥을 떠먹고 갈치 살을 발라 입에 넣으며 꼭꼭 씹었다. 엄마는 내 쪽을 힐끗 쳐다보다 태연하게 물었다.

“저번에 병원에 왔던 애. 로미오 맞지?”

“엄마는 걔를 아직도 로미오라 그래.”

“아직도 로미오처럼 생겼더라.”

“혹시라도 걔 앞에서 그런 말 하지마. 알았지?”

“만날 기회가 생길 건가봐?”

“아니 그냥… 하는 소리지.”

미심쩍다는 시선이 세트로 날아왔다. 무시한 채 본론으로 들어갈 타이밍을 쟀다. 결정난 사안을 알리는 건 빠를수록 좋았다.

“나 교수님이랑 얘기를 해봤는데.”

“미국?”

“응. 그냥 가려구.”

“괜찮겠어?”

“가서 더 배우고 일하고. 바쁘게 지내고 싶어. 그런 데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해. 대우도 나쁘진 않고.”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엄마와 다르게 오빠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잘 됐네. 하며 웃었다. 오빠가 그런 반응이니 엄마도 하려던 말을 뱉지 않고 삼켰다. 오빠에게 죽을 떠먹이며 조용히 생각을 이어갔다. 갑자기 사촌 언니가 미국에 있는 게 떠올랐는지 연락을 해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도 어렵지 않다고.

엄마가 무의식에 중얼거렸다. 아빠한테는, 하고 말을 잇다가 멈췄다. 천천히 들린 시선이 나를 마주봤다. 말 안 하고 갈 건지 묻는 눈과 대조된 입모양이 나지막이 움직였다.

“엄마가 말할게.”

“그래주면 고맙고.”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불안과 긴장이 사라진 자리엔 모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채워졌다. 그런 게 대체될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던 터라 나도 모르게 아빠 자리를 힐끔거렸다.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차곡차곡 넣는 엄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오빠 입에 포도를 넣어주며 하품을 참았다.

“내 졸업 전시회 꼭 와.”

“초대장도 없이?”

“무슨 생일파티 하냐.”

“다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지. 집안 서열 1위 반대를 무릅쓰고 당당하게 졸업. 맞잖아.”

“올 거야 말 거야.”

“갈게. 기어서라도.”

오빠의 얼굴에 난 흉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흔적만 남은 부위를 눈으로 더듬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삭막함을 견디고 겨우내 움트는 새싹처럼.

아빠가 올 시간이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숄을 두르고 어깨를 움츠린 엄마가 따라나왔다. 접힌 내 옷깃을 바로 잡아주며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 일러준 뒤 품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바래져가는 사진에는 한복 대신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있는, 이제 막 만 1세가 된 나의 얼굴이 담겨있었다.

“뭐야? 어디서 났어?”

“이모 전원생활 한다고 시골 내려가잖아. 짐 정리하다 보니까 이게 있었대.”

“대박… 볼살 봐. 돼지 같애.”

“그래도 예뻣어. 공주같이 키울 거라고 내가 얼마나 공들였는데.”

오빠도 아빠도 엄마도 없이. 오로지 내가 주인공인 사진이었다. 사진 작가가 꿈이었던 이모의 애정이 가득 담긴 한 컷이 내 손에 들어왔다.

“너 돌 때 붓 잡았어 여주야.”

“…그래?”

“오빠 머리 잡은 건 그 다음이었어. 니 오빠가 자꾸 그 옆에 케익을 만지려고 하니까.”

“…….”

“아빠가 너 붓 잡았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할아버지도.”

“…….”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할게.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해. 앞으로는 그런 것만 안고 살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고 싶은 곳만 가. 안 잡을게. 한마디 한마디가 처절하고 필사적으로 와닿았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사진을 가방에 넣고 손을 흔들었다.

“가는 날 정해지면 알려줄게.”

“꼭. 홀랑 가버리지 말고.”

엄마도 울지 않았다. 손 끝을 휘휘 저으며 어서 가라고 했다.

“얼마나 만나셨다고 했죠?”

“거의 10년이요.”

예술제가 거행됐다. 보통 가을 초입에 시작하는데 올해는 여러 이슈로 시기가 미뤄졌다. 정재현과 부스를 돌아다니다 타로를 봐준다는 곳으로 홀린듯이 들어간 건 단순히 장난이었다. 카드 한 장에 운명을 점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우리에게 떨어진 선고같았던 몇 년 전의 점궤가 틀리기를 바랐다.

“점궤도 그렇게 나와요. 영원한 사랑.”

“아.”

카드를 휙휙 뒤집은 심리학과 학우가 턱을 매만졌다. 골몰하는 기세더니 명쾌한 답만을 골라 내놨다.

“행복만 하셨나봐요.”

“그렇게 나와요?”

“중간에 헤어지는 것도 안 보이구. 네.”

“글쿤….”

정재현은 팔짱을 끼고 앉아 연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우린 부스 천막을 걷으며 나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다 맞진 않는구나. 내가 중얼거리자 정재현은 이럴 줄 알았다고 혀를 찼다. 이별 후 우리의 태도와 성향을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는 듯했던 그때의 그 친구가 화두에 올랐다.

“걔도 심리학과였다며.”

“응. 그랬지.”

“그때 타로 봐준 애도 사람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눈치껏 말한 거지.”

결과적으로 우린 서로에게 미련 가득한 사람이 됐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다는 건 다 뻥이었다. 헤어지고 생각을 안 하는 때가 없었다. 나도 그랬고 어쩌면 정재현도. 드레스를 피팅하는 동안 복받치는 마음으로 울음을 참았던 때도 있었다. 그 시절은 손에 잡히지 않은 먼 옛날처럼 아득해졌다.

“근데 그 친구 점집 차렸대.”

“누구. 그때 그 타로?”

“응. 신통하다고 소문 났다던데. 예약 두 달이나 밀려있고.”

“그런 거 믿지 마.”

어차피 그딴 건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겐 인간 나부랭이가 흘린 고작 한 마디에 불과하다고 했다. 정재현은 예전부터 사람을 잘 안 믿었다. 믿는다는 개념이 없었다. 누가 확정지어 말하는 주제에도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게 동조나 수긍의 의미는 아니었다. 주관이 뚜렷해서 신념도 확고했다. 정재현의 신념에 타인이 전하는 점궤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어깨가 붙들렸다. 정재현 쪽으로 확 끌어당겨졌다. 몸이 맞붙었다. 어수선한 인파를 뚫고 전진했다.

정재현의 김여주 맞춤형 케어서비스는 계속됐다. 맛집을 검색해 방문했고 생소한 연극을 관람했다. 짐꾼을 자처한 정재현은 등교할 땐 차를 가져와 나를 학교에 내려놨고 시들시들해진 파김치처럼 녹초가 된 저녁이면 나를 실어 집에 내려놨다. 그게 일주일 쯤 반복됐을 땐 집에 보내기가 싫었는데 또 안 보낼 수는 없었다. 같이 마트에 다녀와서도 짐만 놓고 가는 애를 잡을 수도 없고.

“야채는 야채 칸에.”

“나도 알아.”

“갈게. 내일은 아홉시 쯤?”

“응… 뭐. 잘가.”

있다가 가라는 말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정재현이 문 닫고 나간 자리를 허무하게 바라봤다. 그새 도인이 됐나. 자고 가겠다는 말을 안 하네. 삐딱해진 마음으로 폰을 들었다. 적은 문장까지 불퉁할 순 없어서 최대한 말을 고르면.

< 약속 있어서 일찍 갔어?

> 아니

> 다시 갈까?

찰떡같이 알아들은 정재현이 발길을 돌린다. 답장을 작성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또 메세지가 도착했다.

> 다시 갈게

5분도 안 되어 초인종이 눌렸다. 현관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가 문을 벌컥 열었다. 큰 손이 성급하게 뒤통수를 감싸안았다.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혼미한 정신과 막무가내로 들이차는 호흡이 서로의 감각을 두드렸다. 점막이 질척하게 마찰할 때마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정재현은 내 손을 잡아 제 목을 두르게 했다.

문 닫기는 소리가 늦게 들렸다. 뒤로 확 꺾인 목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손이 허리에 감겼다. 바람이 통할 틈도 없이 끌어안으며 뒤뚱뒤뚱 뒷걸음쳤다. 킥킥대는 웃음이 만발했다. 그럼에도 입술을 떼지 않고 밀착한 몸이 따뜻했다. 밤새 서로의 귀에 대고 별의별 말을 다 속삭이며 우리는 참 오래 참았다고 뻔뻔하게 웃었다.

홀의 까슬한 나무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있는 희지가 간신히 호흡하는 부둣가의 생선처럼 간헐적으로 몸을 들썩였다. 네 시간째 수정 부분을 해결하지 못해 거의 다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어깨를 흔들며 그만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안 그래도 바닥이 찼다. 미동이 없자 어깨를 잡아 돌렸다. 또 저항없이 돌아눕는다. 나가려고 코트를 챙겨입은 나를 보며 희지가 그제야 반응했다.

“어디 가?”

“친구랑 밥 먹을 건데 같이 갈래?”

“누구? 정재현 그 선배?”

“응. 너만 괜찮으면,”

“당연히 괜찮지!”

말허리가 댕강 잘렸다. 희지가 졸린 눈을 비비며 벌떡 일어났다. 그 재밌는 구경을 놓치면 나 연말까지 울어. 주섬주섬 패딩을 챙겨입고 내 옆에 딱 붙은 그녀에게 생기가 느껴졌다. 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재현이 멈칫했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내 팔짱을 꽉 끼고 있는 희지를 보며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희지는 고기를 한 덩이 먹을거라며 앞장섰지만 정작 향한 곳은 부대찌개 식당이었다.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밥이면 돼요.”

“고기면 더 좋지 않냐.”

“노노. 밥. 고기는 언니나 실컷 사주세요.”

“잘 먹이고 있어. 걱정마.”

접시에 부대찌개를 덜어주던 정재현은 콩나물을 오독오독 씹고 있는 나를 보며 국자를 내려놓고 밥 뚜껑을 열어줬다. 무념무상인 상태로 미원맛 가득한 줄기를 짓뭉개다 말고 햄 사리를 집어먹었다. 별안간 희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묘한 눈이 수사에 돌입한 반장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여태 정재현과의 일화를 앙큼하게 숨긴 속내에 대해 설핏 궁금해하지만 희지는 따로 묻지 않았다. 이제 그래도 무방하다는 신호를 받았는지 괜히 안 해도 될 말을 꺼낸다. 언니가 인기가 좀 많았어야지. 정재현 들으란듯이 중얼거렸다. 열띤 논쟁을 이어가보려는 태도가 보였다. 내 지인으로서 정재현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는 면모가 드러났다. 아울러 장난 좀 쳐보겠다며 드릉드릉 시동을 거는 것도 익숙했다.

“언니 좋아하는 애들 많았어요.”

“누구?”

“그 후배 있잖아. 연극부.”

“음….”

장단을 맞추기 애매했다. 희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를 좋아했던 애들은 딱 두 명이었으니 많진 않았던 거고 연극부 후배라는 사실만 정확했다. 자연스럽게 복기한 기억에는 음울한 분위기를 달고 살던 남자애의 왠지 모르게 침통하고 비통함이 느껴지는 표정이 어렴풋했다. 나에게 자신과 동족이라서 관심이 간다며 사람 할 말 잃게 만들었던 무례함이 기억났다. 그 뒤로 나는 멍청하게 웃고다녀서 희지가 미소의 강도를 조절해주기도 했다.

그런 애들은 하나같이 이성을 소재로 쓰거나 뮤즈로 삼아서 곤란했다. 나를 정거장 삼아 자신들의 예술 영감에 득이 되길 바랐지만 결국 나는 정거장도 못 됐다. 그냥 지나가는 풍경의 나무 1이 전부였다. 기대도 없는 기억은 차치하고 희지의 증언을 바로잡지는 못했다. 그럴 새도 없었다.

정재현의 말간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런 반응으로 심적 변화를 유추할 자신만의 판단 근거라도 있는 건지 희지는 나를 쟁취하려는 사람이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는 다소 과장된 말을 이어갔다.

“걔도 쫓아다니다가 포기했고 또 누구 있었지?”

“없었어.”

“아! 극작과. 걔는 막 언니 위해서 시도 써 왔잖아.”

“아니,”

얼마전 정재현과 관계 회복을 묻는 질문에 다시 만나는 건 아직 아니라는 내 대답이 희지의 전투력을 상승시켰다. 희지는 그런 미지근한 말이 어디 있냐고 의문했다. 명확히 요약할 수 없는 관계의 맥락이 혹여 미지근한 마음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정재현을 테스트하듯 떠봤다. 확실히 그 테스트는 효과가 있었지만 희지가 생각하는 효과와 다른 결을 지녔다.

멀뚱한 정재현 시선과 맞닿았다.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저작하던 정재현은 극작과인 누군가 나를 위해 시를 썼다는 말을 곱씹다가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차였나보네. 걔.”

되려 차분하게 가라앉는 정재현 얼굴엔 질투보단 의아함에 가까운 감정이 읽혔다. 어묵볶음을 씹던 희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다가 어느 기점에서 심각해졌다.

“언니… 그래서 찬 거였어?”

“아니 그 때 그 시가 좀….”

“그런 거 싫어하는구나.”

“야. 시에 사랑한다는 말이 몇 번이나 들어갔는데.”

“사랑한대?”

마지막 질문은 정재현이 가로챘다. 미간을 확 찌푸린 얼굴로 살벌하게 물었다. 반대로 희지의 표정이 환해졌다. 기대하던 반응이었는지 흘낏 보는 그녀 안면에 미소가 퍼졌다. 시는 감정을 가려야 마땅하건만 사랑이란 적나라한 단어를 몇 번이고 반복했으니 질리는 게 당연했다. 나는 질린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면 정재현은 단순 단어에 갑자기 토라졌다.

희지는 그때를 기회삼아 미끼를 문 정재현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검거 완료라는 눈알이 바쁘게 미끄러졌다. 질문은 중구난방이었다. 이끌어내고자 하는 답변의 목적이 안 보였다. 되는대로 뱉어냈다. 말리려던 나도 마음을 접었다.

“그럼 둘이 사귈 때 애정표현은 어떻게 했어요?”

“모쏠처럼 그런 걸 물어보네.”

“얼굴은 서사 가득 낭만주의가 따로 없으니까 궁금해서요.”

“뭐 사랑시라도 창작해서 읊을까?”

탁구공처럼 무심하게 주고 받는 대화를 듣기만 했다. 정재현은 갑자기 자기도 시를 쓸 수 있다고 자신감있게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끈적한 것들을 적어낼 수 있다고 했다. 그걸 질색하며 보는 내 표정을 뿌듯하게 관전하는 게 더 좋을 거라면서. 희지의 공격력도 정재현의 대책없고 실없는 말 앞에서는 떨어졌다.

다분히 공격이나 하려던 대상에게서 흥미를 잃은 희지가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퍼뜩 들었다. 적의가 사라진 눈에는 사회성이 깃든 동경의 시선이 일렁였다.

“아. 선배님.”

“…갑자기 선배님?”

“쓰셨던 편입 에세이요. 저도 좀 참고하면 안 될까요.”

“……아.”

김여주 지인 버프로 떨어질 콩고물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마치 목적은 그거였다는 양. 정재현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폰을 꺼내 메일함을 뒤졌다.

전시회를 이틀 앞두고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달래려 새벽에 서울을 떠났다. 정재현은 차를 가져왔고 나는 과일을 챙겼다. 가는 동안 잠을 떨어낼 군것질거리로 적합하지 않다는 건 출발한지 10분만에 깨달았다. 우린 가다 말고 근처 편의점에서 과자를 넉넉하게 샀다. 동이 트기 전 동해에 도착했고 일출을 보고난 후엔 백반을 먹고 바다 앞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잠에 취해 별말을 다 꺼냈다. 대개 사귀었던 시절을 회상했다. 우리의 일대기를 장황하게 설명하며 에피소드가 있던 지점마다 서로가 살핀 상대방의 표정과 그때 느낀 감정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늘어놨다. 약속이라도 한듯이 헤어졌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누가 제일 손해였는지 따위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얘기는 무용했다. 단지 서로 그리워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충분했다.

그리고 대망의 전시회가 열렸다. 작품을 보러 온 엄마와 오빠가 꽃을 한 다발씩 품에 들었다. 아빠는 바빠서 못 왔다고 전하는 엄마에게 괜찮다며 등을 어루만졌다. 엄마는 옆에 서 있는 정재현에게 로미오네, 하고 웃었다.

“오랜만이지 재현아.”

“안녕하셨어요.”

“응. 그대로네. 엄마는 잘 계시지?”

“네. 가끔 어머님 얘기도 하셨는데.”

“내가 여주 오빠랑 독일에 있느라 연락을 자주 못 했어.”

짧은 안부로 대화를 맺는 게 아쉬웠는지 우린 점심시간을 이용해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엄마나 오빠도 우리 관계를 암묵적으로 눈치채고 있는 느낌이었고. 그걸 말로 확인받진 않았지만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일종의 허락과도 같았다. 초대했던 다른 친구들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으며 자리는 일찍 마무리됐지만 오빠는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다.

전시회 첫째날에 고맙게도 방문해준 동창과 동기들 덕분에 정신이 없었다. 그때까지 아빠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나 선을 보라는 말도, 자책 대신 남탓하기에 유용했던 나를 향한 질타도 없었다. 나 역시 그 정도 거리감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헤어짐은 또 갑자기 오는 것이었고.

말도 없이 가서 미안해. 너 보면 공항에서 인사하고 그러는 거 못 견딜 거 같아서. 그래도 이제 우린 연락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도 있으니까 너무 아쉬워하진 마. 나도 너 생각하면서 잘 견딜게. 너도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고.

사랑해.

김여주가 미국으로 떠났다.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낸 김여주는 편지 하나를 남기고 집을 비웠다. 예견된 두 번째 헤어짐이었다. 이별이 아닌 단순한 헤어짐은 서운할 마음도 없었다. 편지를 놓고 사라진 걸 원망하지도 않았다. 달랑 한 장 남아있는 편지를 들고서 김여주를 찾아 나설까 하다가 관뒀다. 산타가 그려진 편지지를 고이 접어 지갑에 넣었다. 재현은 그 주 주말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집은 엉망이었다. 먼지가 잔뜩 쌓여 청소부터 시작했다. 오래 자리를 비웠던 재현을 반긴 동료들이 그날 저녁 집으로 찾아왔다. 파티가 시작됐다. 술을 마시고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느껴온 공허함이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재현은 베란다의 고리버들 의자 위로 세차게 떨어지는 비를 보며 무대 위를 바쁘게 뛰어다닐 김여주를 상상했다.

이젠 비가 와도 음울해지지 않는다. 무언가 기피하려 애쓰기 위해 거리로 나서지 않아도 된다. 일에 몰두하며 다른 곳에 정신을 던져낼 궁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김여주를 생각해도 된다는 것. 그리워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 보고 싶어하는 게 괴리감 아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마음에 안정을 불러왔다.

제자리로 돌아간 재현은 바빠졌다. 주어진 역할을 해냈다. 수면이 부족한 날엔 거의 쓰러져 잠들었지만 김여주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은 없었다. 김여주도 자신과 같은 상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웃음이 나왔다. 침대에 파묻혀 실실 웃었다. 전송되지 못한 메세지가 쌓여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삼촌으로부터 여주의 공연 소식을 들었다.

트렌디한 연출가 아래 김여주라는 이름이 있는 걸 눈으로 확인한 날엔 바보처럼 내내 웃었다. 아직 막내라 자기 주장을 내세울 경력은 아니라도 그 길로 가기 위한 첫 발자국이라는 걸 알았다. 재현은 고민 끝에 티켓을 예매했다. 미국행에 몸을 싣고 일곱 시간을 날아가 김여주가 참여했다는 공연을 봤다.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무대 뒤편에 있을 김여주에게 찬사를 보내듯 공연이 끝나고 기립박수 행렬에 합류했다.

거기서 김여주를 만나진 않았다. 몰래 본 공연을 뒤로하고 다시 영국에 돌아왔다. 그해 겨울 집으로 선물 하나가 도착했다. 재현에게 어울리는 색감의 비니 모자였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적힌 카드엔 정갈한 김여주의 필체가 적혔다.

그런 것들로 버텼다. 가끔 주고 받는 엽서나 선물이나 사진으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이라 소중한 것들이었다. 재현은 영국에서 흔하지 않은 하늘이 예쁜 날, 예전처럼 사진을 찍어 전송했다. 그에 김여주는 미국의 분주한 도시를 찍어 답장을 보냈다.

그러다보면 만남도 갑자기 오는 것이었다.

떨어져 지낸지 2년 째, 햇수로는 3년이 되던 해. 근처 공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선 재현의 앞으로 김여주가 멈춰 섰다. 여전히 서프라이즈는 허술했고 들켜버린 낯빛은 한껏 당황했다. 자기 존재 자체가 서프라이즈인 건 아나. 재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다 웃음이 터졌다.

“언제 왔어?”

“두 시간 전에.”

“짐은.”

“근처 호텔에.”

“뭐하러 호텔을 잡았어. 여기서 지내지.”

“아니 서프라이즈 하려고… 아.”

이마를 짚던 김여주가 별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선물한 비니를 쓰고 있는 재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재회는 언제나 뜬금없었지만 반갑다는 사실만은 선명했다.

한발짝 다가온 김여주가 중얼거리는 말은 사실 들리지도 않았다. 확 끌어안고 싶은 걸 참고 최대한 경청했다. 폰을 꺼내 비행기 티켓 예매창을 보여준 김여주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프라하에서 열리는 무대미술 박람회를 같이 가자는 거였다. 마침 재현이 긴 노고를 끝내고 휴식기에 들어간 때였다.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떡였다. 공원 가던 길인데 같이 걷자고 물었다. 김여주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싸리눈이 내렸다. 곧 굵어질 거라고 했다. 재현은 단번에 손을 잡았다. 긴 비행으로 눈꺼풀에 잠이 묻은 김여주가 툭툭 건들며 물었다.

“여기 어때? 살만해?”

“몇 년 째 적응 중. 말도 없이 어떻게 왔어.”

“나도 적응하려고.”

“적응?”

“면접 봤어.”

“…….”

걸음이 정지했다. 방문 서프라이즈는 실패했지만 다른 서프라이즈가 남았다.

“나 영국 아주 온 거야. 나도 이제 여기서 살게.”

“진짜야?”

“응.”

“너. 아니… 진짜? 진짜 여기서?”

“진짜라니까. 우리 같이 적응하자.”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았다. 자꾸 웃음이 피실피실 터졌다. 김여주는 미국에서 버티기 힘든 날마다 일기장을 펼쳐 재현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그렇게 해결되는 그리움이 한계선에 부딪혔다고 고백했다. 오로지 정재현과 함께하기 위해 그 긴 시간을 거쳐왔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면접은 빡세서 멘탈이 갈릴 뻔했다고.

“그럼 이제 같이 살까?”

“그러려고 왔다니까.”

손을 꽉 맞잡았다. 걸을수록 눈은 굵어졌고 거리가 화사하게 밝아졌다.

비로소 해피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