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하얀 속옷같이 얇은 거적때기들만을 걸친 윤기는 정신이 없어 보였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어디 얕은 뭍에 빠지기라도 했었던지 무릎까지는 옷이 완전히 젖어 들어서 새하얀 살이 다 비추어 보이고 몸도 가늘게 떠는 것이 차디찬 밤바람을 온몸으로 다 받아내고 있는 탓인 게 분명했지.

 

“와아아아악!!! 아니!!! 이 친구야!!! 노. 놀랬잖아!!!”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볼수록 꼴이 말이 아니야. 입은 반쯤 벌어져서는 시선은 갈 곳을 잃고는 무언가를 중얼중얼 읊조리다가는 자기가 왜 여기 있는 줄 모르겠다고 하는 거. 석진인 마음속으로 몇 번을 다짐했거든? 절대로 백룡에게 복숭아에 관해서 얘기하지 않기로. 백룡은 짊어진 일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가여운 우리 복숭아, 지민이 풀 죽은 얼굴이 동동 떠다니면서 석진인 자기가 스스로 세웠던 규칙을 깨버리고는 윤기의 어깨를 붙잡고 그렇게 얘기했지.

 

“백룡, 왔으니까 내가 하는 말인데 요새 아랫마을이 좀 시끄러운 모양이야, 유난히 날이 더운 탓에 농사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아랫마을 사정을 잘 아는 아이가 하나 있으니 데리고 다니면서 이곳저곳 살펴봐 주는 것이 백룡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냐면서.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기는 너무 늦었으니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하고는 마땅히 따로 내어줄 잠자리가 없으니 같은 침상에 누워서는 둘 다 잠이 들지 못하고는 오늘 밤 유난히 밝은 달빛을 벗 삼아 밤이 긴 줄도 모르고 끝도 없는 상념들로 밤을 지새웠어. 


“아저씨! 아저씨!!”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잠이든 윤기와 석진이 두 사람 모두 다 곤한 잠에 빠져있는데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지. 그건 잔뜩 홍조가 올라온 지민이었지. 석진이가 잔뜩 흐트러진 머리를 긁적이면서 문을 여니까 지민이가 판판한 배로 석진이 손을 끌어 올리고는 싱글벙글 웃는 거야. 하품을 쩍-하면서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란이냐고 핀잔을 주던 석진이도 금세 표정이 환해져서는 오! 오! 오! 움직인다!! 해괴망측한 느낌이라고 손목을 주물럭거리면서도 한없이 들뜬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지.


“오늘도 평안한지?”

“네! 왜냐면. 청룡도 아저씨도 토끼도 전부 다 있으니까!”

 

석진인 홍조가 올라온 지민이 얼굴을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문질거리고 왼쪽 손은 지민이 두 손을 꼭 붙잡고는 정말 그거면 된 거냐고 물었어. 다정한 석진이의 손에 완전히 얼굴을 기대어 버린 지민인 정말로 그거면 됐다고 끄덕거리는데 어수선한 분위기에 덩달아 잠에서 깨어난 백룡이 잔뜩 풀어진 옷차림으로 휘청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 나오는 게 보였어. 지민인 낯선 사람의 기척에 잔뜩 경계를 했지.

 

“왜 그래? 뭐가 불편해? 어디 보자. 어디가 불편하기에 그래? 배가 아파?”

 

아무것도 모르는 석진이가 근심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배를 문지르니까 복숭아는 아예 석진이 품에 숨어들 듯이 고개를 파묻어버렸어. 석진인 품에 안긴 지민이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두리번거리다가 수선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윤기가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걸 알아챘지.

 

“아, 백룡. 왜 좀 더 자지 않고?”

“.. 그냥 좀 어수선해서.”

“미안, 손님이 와서. 아, 맞다 백룡! 이 친구가 내가 어제 말했던 친군데.”

 

은근히 지민이 등을 떠미는 석진인 그러면서도 움츠러든 지민이 귓가에 “괜찮아. 내 친구니까. 백룡이고 좋은 녀석이야.” 하고 속삭이면서 힘을 줬어. 쭈뼛쭈뼛하던 지민이도 고개를 숙인 상태로 눈만 굴리면서 백룡을 쳐다봤지. 별빛이 쏟아지는 것마냥 반짝이는 은하수 빛 머리카락 색이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하니까 백룡도 홀린 듯이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거야.

 

“왜 그렇게 나를 쳐다보지?”

“.......별빛 같아. 밤하늘 별 같아요. 머리가 별똥별 같이 반짝여요.”

 

윤기는 한 발짝 더 다가와서는 유난히도 작은 지민이의 손을 자기 머리 위에 올리고는 소원을 빌어보라면서 웃었어. 혹시나 이루어질지도 모르니까 속는 셈 치고 빌어보라는 윤기 말을 듣고는 지민은 두 손을 모아서 한참이나 눈을 감고 뜰 줄을 몰랐어. 그렇게 소원을 비는 지민이를 훔쳐보면서 미소를 짓는 윤기의 얼굴이 너무 온화하고, 평온해 보였지. 그런 두 사람을 보던 석진인 한숨을 푹 쉬고는 등을 떠밀어 내보냈어. 자기는 잠을 더 자야겠다면서 말이야. 운명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고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라면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얽혀버린 것이라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어색하게 둘만 남은 윤기랑 지민이는 나뭇가지에 맺혀있는 아침 이슬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먼 산만 바라보았지. 지민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천둥 번개 치듯 요란한 소리가 나고서야 윤기는 헛기침하면서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앞장을 섰어.

 

“뭘 먹지? 아침 이슬인가? 아니면….”

“아침엔 과. 과일이요.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과일 정도가 딱 좋아요.”

“정말 그거면 되는 거야?”

“네….”


백룡은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뒷짐을 지고 천천히 끝이 보이지 않은 숲속으로 사라져버렸어. 다시 돌아왔을 땐 품에 여러 가지 과일을 가득 안고 있었지. 지민인 생각보다 배가 많이 고팠었는지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부여잡고는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백룡을 쳐다봤어.

 

“저 그거 알아요! 자두! 맛이 좋아요. 달고 시기도 하고.”

“이런 맛이 좋은 과일도 빛깔 좋은 복숭아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복숭아는 그 빛깔만 곱고 향으로 사람을 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향과 빛깔만큼 몸에 좋은 과일이라, 나쁜 것들이 몸속에서 자라나는 것을 막아주고 피부와 안색을 좋게 만들어주어 궁에도 빼곡하게 복숭아나무들이 들어서 여름만 되면 매일같이 궁녀들이 직접 그것을 따서 아침 수라상에 빼지 않고 올리는 것이라며 백룡은 복숭아에 대해 열변을 토했어. 그걸 경청하던 지민인 그렇구나- 하고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그게 모두에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했지.

 

“왜 그렇게 얘기하지?”

“그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저는 먹을 수가 없어요. 생명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겐 독이 될 수도 있대요."

 

백룡은 슬쩍 지민이가 소중하게 쓰다듬는 판판한 배를 내려다보고는 잔뜩 찾아온 자줏빛의 과일, 샛노란 색을 띠는 과일을 옷에 빡빡 문질러서 닦아내고는 커다란 손톱으로 살살 껍질을 벗겨냈어. 뚝뚝 떨어지는 과즙들이 옷을 다 물들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는 한참을 그렇게 과일을 손질하더니 지민이에게 내미는 거. 지민인 고개를 꾸벅하고는 그걸 받아들고는 허겁지겁 먹었어. 윤기는 자기도 모르게 지민이 잘 먹는 거 보고는 피식 웃으면서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었지. 그러는 바람에 지민이는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마지막 남은 과일 하나를 윤기에게 내밀었어.

 

“백룡도 배고파요…? 내가 혼자 너무 먹는 것 같아.”

 

윤기는 사양하지 않고 지민이 손에 들린 과일에 입을 가져다 댔지. 한입이면 충분하다면서. 예상치 못한 백룡의 행동에 지민인 깜짝 놀라서 백룡이 그걸 한입 베어 물고 입가로 흘러내린 과즙을 혓바닥으로 슬쩍 훑는 걸 넋을 놓고 쳐다봤어. 그러면서 살짝 드러나는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말이야.


“그 이 때문에 다친 적 없어요?”

“음?”

 

자기는 가끔 급하게 먹다가 스스로 입술을 깨물어서 피를 보기도 하는데 백룡 이는 날카로워서 그런 실수라도 하면 진짜 진짜 크게 다치겠다면서 왜인지 자기가 걱정 근심이 가득해져서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물어오니까 백룡은 하하하 하고는 큰소리로 웃어버렸어.

 

“청룡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청룡을 알아요?”

 

지민인 얼굴이 환해져서는 청룡이 어수룩해 보여도 믿음직스럽다고 얘기하면서 백룡이 한입 크게 베어 물고 남은 과일을 야금야금 먹었어. 백룡도 자기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과일을 입에 넣는 지민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입가로 살짝 흘러내린 것을 옷소매로 훔쳐냈지.

 

“아….”

“해산하고 나면 내가 복숭아를 잔뜩 따서 너에게 대접을 해야겠어.”

 

그때쯤 되면 다 말라 들어갔던 복숭아나무에 푸릇한 나뭇잎들이 고개를 내밀지 않겠냐고, 그렇게 만들려면 같이 힘을 합쳐서 마을을 잘 돌봐야 하는 거라면서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앞장을 섰어. 지민인 손에 남은 끈적끈적한 것들을 패어진 바위에 고인 물로 닦아내고는 백룡을 따라나섰어.

윤기는 이맘때쯤이면 부드럽게 짓이겨져야 하는 땅들이 메말라 단단해져 버린 것을 확인했지. 땅의 상태가 모양이니 농사가 잘 될 리가는 없는 거야. 이유가 뭘까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걷고 또 걷다 보니 한참을 걷게 된 거지.

 

"자, 잠시만요. 숨이 차서…."

 

윤기는 지민이가 홑몸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리고는 너무 멀리, 또 혼자 너무 빠르게 걸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야 아차, 하고는 얼른 뒤돌아 한참이나 뒤처져서 가슴을 부여잡고 힘들어하는 지민이 쪽으로 다가갔어. 한쪽 팔로 단단하게 지민이 어깨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른 등을 쓸어내리면서 멋쩍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지민인 괜찮다는 말도 내뱉기 힘든지 그냥 살짝 미소만 지었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며 흙먼지를 뒤집어쓴 바짓단을 보면서 윤기는 말없이 지민이 앞에 넓더란 등을 내밀었어.

 

"타."

"......"

"어서."

"......."

 

괜찮다고, 조금만 숨을 돌리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고 거절해야 하는 거라는 건 머리론 아는데 선뜻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아서 지민인 망설이고 있었어.


‘이럴 때 아저씨는 뭐라고 할까?’

 

생각을 해보는데 우습게도 그 생각을 하니까 진짜 석진이가 옆에서

 

-어어? 뭘 생각하고 있어? 예끼! 내가 뭐라 그랬어 이 녀석아, 누가 너 좋으라고 그러는 줄 아느냐? 다~ 네 배 속에 있는 그 아이 때문이다! 사양은 사양한다!


그렇게 하나도 엄하지도 않으면서 엄한척하며 꾸중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 그래서 혼자 킥킥거리면서 웃었어. 그 소리에 진득하게 지민이가 업히기를 기다리던 윤기도 흘깃 뒤를 돌아봤다가는 지민이가 그걸 눈치채고 웃는 걸 멈추니까 자기도 고개를 돌리면서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지.

 

"왜 웃는지 안 물어봐요?

"..물어봐야 하나?"

"안 궁금한가 보다."

"너도 나처럼 오래 살다 보면 궁금한 게 많지 않아져."

"나는 오래 살아도 궁금할 것 같아요."

 

하늘의 새는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는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저 민들레 씨앗은 과연 어디에 내려앉는지, 산을 넘어 떨어져 가는 태양은 얼마나 뜨거운지, 또 사실은 태양이랑 달은 하나가 아닌지….

지민인 정말로 궁금한 게 많아 보였어. 그리고 그렇게 눈알을 도르륵 도르륵 굴리면서 더 또… 또… 하면서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지민이가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지.

 

"다른 건 몰라도 네가 전생에 하늘을 나는 것과 아주 가까운 것이었나 보다."

 

윤기는 이제는 지민이에게 업히라고 조금은 재촉하면서 자기 등을 두드려. 해가 떨어져 가니까 얼른 업히라고 얘기했지. 지민인 얼떨결에 그냥 업혀서 어깨에 작은 손을 살짝 얹듯이 올리니까 윤기가 “꽉 잡아라, 더 꽉 잡아, 그거 가지고는 안 돼, 더 꽉 잡아.” 그렇게 말했어. 지민인 어쩐지 엄하게 들리는 윤기 목소리에 긴장을 잔뜩 해서는 손끝에 힘을 꼬옥 주고 윤기 옷이 주름질 만큼 제법 세게 붙잡았지. 슬쩍 또 뒤를 돌아보던 윤기는 만족한 듯이 입꼬리만 살짝 올려서 웃고는 앞만 보고 속도를 높였어.

 

"어, 어…?"

 

앞머리가 바람에 아무렇게나 휘날리고 풀들이 사라락 소리를 내면서 다 누워버렸지. 공중으로 조금 몸이 뜨는 것을 느끼고는 지민인 눈을 꼭 감았어.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온몸을 휘감는 익숙하지 않은 뜨거운 온도와 눈부신 느낌에 눈을 뜨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큰 태양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가 가까이에 있었지. 신비하다 못해 두려운 느낌까지 드니까 지민인 윤기, 아니 백룡의 어깨에서 바동거렸어. 그때 백룡 목덜미와 어깨의 연한 비늘 조각들이 손톱에 찢겨서 뜯겨 나가버렸지. 윤기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잠시 쉬어가자며 석양이지는 것이 잘 보이는 산 중턱 큰 나무 아래 앉아서 떨어지는 해를 보는데 손톱에 긁혀서 패어버린 목덜미가 잘 보였지.

 

“..백룡은 진짜 어른인가 봐.”

“무슨 소리야?”

“나 같으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을 거야. 왜 아프다고 안 해요…?”

“안 아프니까, 참을 만하니까.”

“거짓말이야. 살이 다 패었잖아. 그게 어떻게 안 아파요?”

“보기에만 그래 안 아파.”

“어디 봐요…! 안 아플 리가 없어.”

 

지민인 윤기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는데 윤기는 그런 지민이 손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괜찮다, 그보다 자기 때문에 아이가 놀라지는 않았겠냐면서 정말 어른 같은 미소를 보이며 지민이를 안심시켰지. 그래도 계속 신경 쓰는 것 같으니까 한숨을 푹 쉬고는

 

“꼬맹이 네 말이 맞아. 어른은 이런 거로 안 아파.”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돌아가자면서 재촉하니까 지민이도 아무 말 없이 백룡을 따라서 걸었지. 이번엔 윤기가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걸으면서 자주 뒤를 돌아보고 멈춰 서서 지민이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다 가까워지면 다시 걷고를 반복했지. 지민이가 밖이 깜깜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지민이가 지내는 곳 주변만 뱅글뱅글 돌면서 지민이를 기다리던 태형이는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지민이에게 어디 다녀왔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매섭게 인상만 쓰고 자기 비단옷으로 지민이 옷에 묻은 흙만 털어냈어.

 

“왜 안 물어봐?

“뭐를.”

“화났어…?”

“아니.”

“거짓마알….”

“청룡은 그런 거로 화 안 내. 왜냐면 청룡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쳇, 그런 소리가 자꾸만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입술이 삐죽삐죽하는 청룡을 보고 지민이는 용들은 다들 거짓말쟁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고 뜻 모를 소리를 했지.

 

태형인 자기 기분이 엉망인 것에만 집중해있느라고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지민이의 기분을 지민이 옷을 털던 자기 푸른 비단옷에 맑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젖어 드는 것을 보고야 알아챘어.

 

“지민아? 고개 들어봐.”

“싫어.”

“쓰읍! 색시 아니…. 지민이 너…!”

 

지민이가 자꾸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니까 태형인 지민이 두 손을 붙잡고 자기를 보게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지민이가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지.

 

“아파…! 아파 아프다구!!”

“내가 너무 세게 붙잡았어? 울지 마! 어? 미안해….”

 

지민이가 엉엉 우니까 너무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세게 붙잡았던 지민이 손에 바람을 후후 불면서 미안하다고 얼굴을 비비다가 지민이 손끝에서 피가 몽글몽글 맺혀있는 걸 봤지. 날카로운 것이 손톱 밑에 박혀서 살을 파고든 것 같았어. 그걸 바늘로 빼내는 동안 지민인 계속 울었고. 그것도 아주 엉엉. 용들은 거짓말쟁이라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계속해대면서.

 

“자! 여기 뺐다! 이제 약초로 덮어놓고 하룻밤 자면 내일 아침이면 한~~개도 안 아파.”

 

태형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아주 쓴 약초를 잔뜩 찡그린 얼굴로 날카로운 송곳니로 잘근잘근 씹어서 연하게 만들어 다친 손가락을 덮어주는 동안에도 지민인 눈도 뜨지 않고 계속 울었어. 결국, 잠자리를 다 봐주고 불까지 꺼주고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을 침상에 누워서 울다가 태형이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곱게 탁상 위에 올려놓은 오팔 빛 비늘 조각하나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지쳐 잠이 들었지.

 

그날 밤 청룡은 밤새 입안에 쓴맛이 가시지 않아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입을 헹구고 누웠다 금세 다시 일어나 입을 헹구고 눕기를 한참. 보다 못한 시종이 가져다준 사탕수수를 질겅질겅 씹다가 잠이 들어서 아침에 일어났을 땐 단내에 모여들 벌레들에 밤새 잔뜩 물려서 얼굴이 퉁퉁 부어서 일어났어.

 

한편 백룡도,

 

“아 어디서 이렇게 비늘이 다 뜯겨서 왔어 어???”

“알 거 없고.”

“나 참나 아 어디서 다쳤는지 어? 말도 안 해줄 거면 왜 나를 찾아와서 이러시나? 혼자 약 바르고 다 하시지 왜?”

“..안 닿아.”

“뭐??”

“손이 안 닿잖아.”

 

그 소릴 들은 석진이가 기가 차서 구시렁거리다가는

 

“아이고 여기 모기가 앉았네! 여기도!” 하면서 부러 짝짝 소리가 나게 등짝을 때리는데도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냥 입맛만 쩝쩝 다시던 윤기는 아까 다친 걸 보고는 자기가 더 아픈 듯이 울먹거리는 지민이를 생각했어.

 

‘작은 손이 제법 맵던걸? 연약해 보이는 데 아니야 제법 야무진데도 있는 것 같아.’ 하고 실없이 웃다가


또,

‘어른은 이런 거로 안 아프다고? 참나.. 그런 말밖에 할 말이 없었냐? 그리고 순 거짓말쟁이구만.’ 하고 스스로 한심해 하면서 머리를 털었어.

 

그걸 지켜보던 석진인 고개를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하다가 백룡이 이렇게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이 굴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해 내고는 몰래 흐뭇한 미소를 짓지.

윤기가 뭘 실없이 웃냐고 하니까 그런 적이 없는 척을 하면서 되려 구박을 했지.

 

“아, 내가 자네 처야 뭐야? 왜 야밤에 와서 정신 사납게 이래! 근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백룡 자네 천년에 한번 태어나는 거야 천년을 사는 거야?”

“난들.”

“하긴 내가 모르는 걸 자네가 알 리가 있겠나? 근데 너무 아는 게 없는 거 아니야?”

 

그렇게 밤새 투닥거렸지.

 


 

32.

 


아침에 일어나보면은 어젯밤에 울고 싶은 만큼 울어서인지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한결 나아진 지민인 청룡이 어깨가 잔뜩 처져서는 자기 정말 잘 가라고 인사 안 해줄 거냐고 섭섭함이 잔뜩 묻어나는 말을 하고 돌아간 청룡 생각이 나. 그래서 오늘은 청룡이랑 오랜만에 시간을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어찌한 일인지 청룡은 너무너무 아파서 오늘은 얼굴도 못 보여준다고 돌아가라고 했지. 얼마나 아픈지 보자고 하는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절대로 얼굴은 못 보여준다고 하니까 지민인 이불 끝을 잡고 있는 태형이 손을 쓰다듬어주고 조금 삐져나온 머리통에 입도 맞춰주고 빨리 나으라고 인사를 하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어. 들판에서 강아지풀을 하나 꺾어서 흔들면서 걷다 보니 어디서부터 쫓아온 지 모를 고양이 한 마리가 그 강아지풀로 폴짝폴짝 뛰면서 놀아달라고 재롱을 부리고 있었지.

 

"이거?, 이거 가지고 싶어?"

"냐아아아옹~"

"안되는데에~? 나도 하나 밖에 없는데에~?"

"냐아아아아아오오옹."

 

고양인 지민이가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는 척하면서 강아지풀을 높게 드니까 재빠르게 고개까지 같이 그 손을 쫓아가다가 결국 일어나다시피 해서 두 손으로 그걸 잡으려고 노력했지. 지민인 그럼 줄까? 하고 내리는 척을 하다가 고양이 손에 거의 잡히도록 가까워지면 다시 높이 들고 옆으로, 위로 열심히도 그걸 움직이면서 장난을 걸었어. 강아지풀 하나로 그렇게 한동안 같이 놀다가 고양이가 손등을 핥고 일어나길래 지민이도 따라서 일어났지. 고양이는 한참을 앞서 뛰어갔다가 지민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다리털을 핥고 세수를 하다가 또 가까워지면 쏜살같이 뛰어서 앞으로 가.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익숙한 나무집 앞에 도착하게 되는 거야.

 

“아~저~씨~~~!”

“아니 이게 누구야?”

 

지민인 그때서부터는 아이처럼 팔짝팔짝 뛰어. 자꾸만 발에 걸리는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두 손으로 야무지게 들어 올리고는 달려가서 안기는데 멀리서부터 지민이가 그러면서 달려오는 게 보이는 석진인 잔뜩 긴장했어. 다치지 않게 잘 받아야 하는데, 쟤 생각보다 힘 쎈대, 밀리면 체면이 안 서는데!!! 결국엔 에라 모르겠다 다리에 힘 빡! 주고 버티는데도 거짓말 안 하고 땅에서 5cm는 발이 밀려버렸어.

 

“지민아….”

“바, 바람이 밀었어요…. 몸이 무거우니까 속도가 더 붙나봐요오….”

 

품 안에 안긴 채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창피해하는데 더 뭐라고 하겠어? 석진이도 더는 별말 안 하고 잘했다 잘했어 그러고 말았지. 등을 툭툭 두드려주는데 헤실헤실하게 웃고 있던 지민이는 석진이 품 안에 얼굴을 묻고는 웅얼거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힘드니까 석진이가 응? 뭐라고? 하는데 지민인 점점 더 목소리가 작아지는 거야. 그래서 결국 두 손으로 지민이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맞추는데 지민인 석진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비스듬하게 옆으로 시선을 맞추고는

 

“백룡은 괜찮아요…?”

“엉? 백룡?”

“네에.. 제가 어제 이케 손톱으로.. 그랬거든요.”

“아아아아, 그게 그렇게 생긴 상처구나.”

“나 이제 마을 내려가는 거 같이 안 할래요.. 미안해서 얼굴을 못 보겠어….”

“음, 그래?”

 

석진인 그제야 백룡이 입을 딱 다물고서는 상처의 출처를 알려주지 않았던 이유가 이해가 돼. 생각을 해봐. 일단 지민이를 등에 태웠다는 얘기고, 백룡이랑 같이 지내면서 백룡이 등에 누구를 태우는 건 진짜 쪼그만 애기 복숭아 키울 때 그때, 애기 재미있게 해준다고 그럴 때 밖에 못 본 광경이거든.

대체 시대가 어느 시댄데 등에 태워주고 둥가둥가해서 연애를 건단 말인가 허허, 석진인 혀를 끌끌 차는데 그리고 더 기막힌 건 그것도 제대로 못 해서 애 잔뜩 겁을 줘버렸어.

 

“아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근데 저 산골짜기 넘어 혼자 사시는 김 할머니 알지? 김 할머니가 끼니는 제대로 챙겨 잡수고 있는지 모르겠네, 할머니 혼자 사시는데 시꺼먼 남정네가 불쑥 들어오면 할머니 심장도 약하신데 괜찮을런가 모르겠네, 뭐 괜찮겠지 그지?”

“어,어...”

 

지민이가 고민에 빠지니까 석진인 속으로 엄청나게 웃음. 그게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지민이가 안 간다고 할 리가 없는 걸 알아서였지. 아니나 다를까 지민인 결심한 듯이 주먹을 꽉 쥐고 그럼 자기도 가겠다고 백룡한테는 자기가 안 간다고 했다는 거 비밀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석진이 입술에 짧은 손가락 들이밀면서 쉬이이이잇! 이에요!!

 

“쉬잇~! 알았다!”

“뭘 알았다는 거야.”

 

백룡이 딱 시간 맞춰서 어슬렁거리면서 걸어오는데 팔은 어정쩡하게 뒷짐을 진 품새가 너무 이상했어. 석진인 속으로 설마 설마 하면서 마을 일 봐주러 내려가면서 아침부터 꽃 같은 거 들고 와서 연애를 걸지는 않겠지.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게 뭐예요?”

“뭐긴 꽃이잖냐.”

“꽃이요…?”

“드..들꽃이다. 오다가 발에 치여서 주워왔다. 들꽃 얼마나 흔한지 알지?”

“내 발에는 안 치이던데….”

“싫으면 말고.”

“아, 아니에요! 예뻐요! 가질래요!!”

 

석진인 서툴게 연애 걸면서도 자기가 연애 걸고 있는 줄 모르는 애랑 연애 걸림 당하면서도 이게 연애 거는 건지 모르는 애랑 둘이 아기들 소꿉장난하는 거 보는 것 같아서 너무 웃겨. 끅끅대면서 옆에서 넘어갈 듯이 웃고 있었지. 백룡이 무섭게 째려보는 시선을 느끼고야 정색하고는 아, 그러면 나는 고서 탐구나 해야겠다 그러면서 빠져줬지.

 

“자자, 이건 백룡 약인데 혼자는 못 바르니까 지민이 네가 가지고 있다가 백룡이 아프다고 하면 발라주면 돼.”

 

이담부터 안 봐도 알겠지? 얼마나 자주 백룡이 길 가다 멈춰서 풀밭에 털썩 앉아서는 아 좀 아프네 하고 엄살을 부리고 그럼 지민이는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약 주섬주섬 꺼내서 발라주고 다 바르면 따가울까 봐 호호 불어주고 그랬을지. 해가 떨어질 때쯤 지민이가 석진이네 집 문 두드리면서 약이 다 떨어졌다고 약 좀 더 만들어주세요 하고 부탁하면 석진인 이게 일주일은 족히 바르고 남을 양인데…. 하고 갸우뚱하고 일단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어. 그러고 약초 물 달이면서 기다리라는 데서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지민이를 한번 흘깃 보면 손에는 꽃반지 같은 거 있고 주머니가 묵직해서 뭐가 들었냐고 물어보면 물가에서 예쁜 돌 잔뜩 주웠다고, 예쁜 돌 가지고 있으면 예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랬다면서 돌 만지작만지작하면서 웃어.

 

“그 돌 아니라도 꼬맹이 너 닮은 아이면 예쁠 텐데 뭐. 아, 뭐 반대면은 아니려나….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돌 찾아주나?”

“네???”

“어?? 아??? 아이고, 때마침 약초가 다 달여졌네! 그래? 아이고 바쁘다!!”

 

약을 받아서 집에 돌아온 지민이는 창가에 돌들을 다 꺼내서 줄을 맞춰놓고는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잠들었지. 잠이 들어선 오늘 물가에서 바지 밑단을 걷어 올리고 물에 들어가서 물이 너무 차다고 구시렁거리면서도 한참이나 열심히도 돌을 찾던 백룡을 만났어.


 


33.

 


다음날 지민이가 눈을 떴을 땐 엄한 표정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는 눈을 감고 있는 태형이와 마주했지. 언제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아침이라 탱탱 부었을 얼굴이 창피해서 돌아누워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어. 그 인기척을 느낀 태형인 눈을 뜨고는 이불 끝을 잡아 내리려고 했지.

 

"지민아, 짐 챙겨."

 

청룡은 등에 지고 온 커다란 바구니 같은 것에 지민이의 짐들을 하나씩 담기 시작했어. 탁상 위에 백룡의 비늘과 그 옆에 대 여섯 개의 만질만질한 예쁜 모양의 돌들도 한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보자기에 잘 싸서 집어 들었지.

 

"청룡…? 나 어디 가야 해?"

"응."

"어디로 가?"

"우리 집."

 

태형인 평소처럼 눈을 맞추고 웃어주지도 않고 말없이 그냥 계속 짐들을 챙겼어. 이건 태형이가 고집을 부릴 때 하는 행동이라는 걸 지민인 알고 있었지. 태형이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자기를 향한 애정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무턱대고 말리는 것보다 태형이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게 더 먼저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바쁘게 움직이는 태형이 팔을 살짝 붙잡고는 타이르듯이 얘기했어.

 

"청룡이랑 같이 지내면 나도 좋을 것 같아. 늘 말동무도 있고, 또 밤에 분명 잠도 잘 올 거야."

"..난 잘 안 올 것 같은데."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나만 생각할 순 없어. 혼인하지 않은 사람과 한 방에서 같이 지낼 수 없는 거 나 다 알아."

"지민아."

"청룡한테도 곤란한 일이고 분명 아버님도 싫어하실…."

"나랑 혼인하자."

 

태형인 드디어 바구니를 손에서 내려놓고는 지민이와 눈을 맞췄어. 흔들리지 않는 곧은 눈동자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진심이라는 걸 말하고 있었지. 태형인 지민이 가는 팔목을 잡아서 자기 가슴에 올려놨어. 쿵쾅쿵쾅 요란스럽게 뛰고 있는 것을 청룡의 심장을 느끼고 있자니 자기도 덩달아 가슴이 뛰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 지민인 팔을 풀어내려고 힘을 줬지만, 청룡은 그럴수록 미끄러져 나가려는 지민이 손을 더욱더 세게 잡았어.


"아..아파 청룡.."

"나도 아파."

 

혼자서 이렇게 떨어진 곳에 너를 지내게 하는 것도, 또 그래도 다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너를 지키고 있는데 네가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도, 곧 아비가 없는 아이를 낳아서 지금보다 훨씬 험한 세상을 살아야 할 네 미래를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아파서 더는 못하겠다고 얘기하는 태형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어. 고집스럽게 그 눈물을 닦아내지 않고 흘러내리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뒀지. 지민인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유로운 손으로 태형이의 눈가를 닦아줬어. 그리고 태형이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지. 바다가 들려오는 것처럼 넓고 편안해. 이 품 안에 기대면 언제라도 안심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

 

"청룡…. 난 청룡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진심이면 혼인해주면 되잖아."

"아니. 그건 청룡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아니야."

"거짓말!!

"지금도 이렇게 괴로워하잖아. 봐, 청룡의 가슴이 막 아프대…."

 

지민인 태형이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쓸어내리면서 위로해줬지. 태형인 아이처럼 울었어.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지민인 태형이를 꼭 끌어안고는 계속 자리를 지켰지. 지쳐버린 태형인 고개를 들고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아직 품에 안겨 있는 지민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잡았어. 천천히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여도 지민이 역시 그걸 피하지 않았지. 오히려 두 눈을 꼭 감았어. 이게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태형이의 자신을 향한 마음과 같은 종류의 애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시 거부해서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을 만큼 태형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큰 것은 사실이었어. 마침내 부드러운 입술이 마주 닿았을 때 지민이 눈앞에 무언가가 번쩍였어.

 

반짝이던 푸른빛의 꽃반지와 그 반지가 끼워진 자신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입을 맞추던 청룡의 모습.

 

-색시야,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게 내 소원이야.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시야가 흐릿해질 때 품 안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태형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민인 정신을 잃고 쓰러졌지. 얼마가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여전히 넓고 편안한 품 안에 안겨 있었지만 그건 청룡의 품이 아니었어. 입가로 끊임없이 단 것이 흘러 들어가고 있었고 지민인 정신이 드는 순간 사레가 들려서 콜록거리면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지.

 

"깨어났구나."

"..아저씨…."

"응?"

"나는 나쁜 사람이었나 봐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 맘을 아프게 하는…."

 

지민인 떠오른 기억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내내 울먹거렸어. 청룡에 대한 것들은 대부분 기억이 난다고 했어. 색시라고 부르면서 환하게 웃어주던 것. 같이 강에 들어가 물놀이도 하고 고기도 잡아먹었던 즐거운 기억 그리고 점점 청룡의 얼굴은 웃음을 잃어 몹시 괴롭고 힘들어 보여서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가슴이 아프다고 했어. 석진인 지민이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에 무척 놀랐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민이 얘기를 듣고 있었지. 그러면서도 백룡에 관한 것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지, 왜 모든 것을 다 알려달라고 하지 않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불안해 보이는 지민이를 보면서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침묵을 지켰어. 그리고 지민이가 백룡에 관한 일까지 떠올린다고 한들 백룡은 전혀 기억이 없는데 어쩌겠어? 사랑하는 사람이 자길 기억조차 못 한다니 그건 그것대로 괴로운 일이 될 테니까.


"한 번만 얘기 해줄 테니까 잘 들어. 내가 아는 너는…."

 

지민인 눈물을 닦아내고는 침까지 꿀꺽 삼키면서 긴장한 채로 석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어. 석진인 말을 해줄까 말까 하면서 장난을 치다가는 숨까지 참고 기다리는 지민이를 흘낏 보고는 에헴- 하고 목을 가다듬고 얘기했어.


"바보였어. 암 그렇고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목숨이랑 운명까지 다 내던져서 이렇게 보잘 것 없이 연약한 사람이 되기를 제 손으로 선택했는데 그게 바보가 아니면 뭐겠어? 석진인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하고 뿌듯해했어.

 

"........"


석진이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춰있던 지민인 고개를 숙이고 다시 몸을 들썩거리기 시작했어. 석진인 말이 너무 심했나 걱정스러운 생각에 미안하다고 고개를 좀 들어보라고 사과를 하고 쩔쩔매는데 지민인 울고 있는 게 아니라 웃고 있는 거였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으면서 석진이 가슴팍을 퍽퍽 쳤어.

 

"아! 아파 이 녀석아!"

"하하하 미안해요."

"뭐가 그렇게 웃겨서 눈물을 다 흘리면서 웃어?"

"그게…. 저는 바보니까…. 바보 엄마인 거네요?"

"아니, 말이 그렇게 되냐? 그건 좀…."

 

석진인 두 손을 모아서 싹싹 비는 시늉을 하면서 말을 잘못했다고 한 번만 봐 달라고 했어. 지민인 그런 석진이 손을 잡으면서 웃었지.

 

"나는 바보 엄마하고 아저씨는 그럼 바보 삼촌!"

"바보 삼촌?"

"응! 바보랑 친구 해주니까."

 

석진인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져서는 고개를 돌리고 미간을 찡그렸어. 삼촌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와닿았거든. 이 아이가 태어나면 이제 나를 삼촌- 하고 부르겠구나, 또 이 꼬맹이를 엄마- 라고 부르겠구나, 그걸 그려보게 되는 거야. 뒤뚱거리면서 두 손을 벌리고 달려오는 아이는 백룡을 닮았을까 아니면 복숭아 녀석을 닮았을까 몹시 기대가 돼. 꼬맹이 녀석을 닮았으면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더 예뻐해 주게 되지 않을까? 백룡 녀석을 닮았으면 놀려줘야겠다. 매일 같이 놀아주고 장난치고..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아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이상한 기분이었지.

지민인 오늘 일로 무척 놀라고 신경을 많이 썼었는지 배가 조금 아프다고 했어. 일어나면 배가 더 불편하고 아파서 힘들다고 했지. 석진인 청룡 곁에 지민이를 두는 것은 여러모로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민이와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는 안정을 취하는 것이 제일 먼저라는 판단하에 태형이가 싸놓았던 짐을 다 들고 지민이를 둘러업었어.

 

"아이쿠야…. 너 요새 좀 많이 먹었나 보다?"

"네에??? 아니거든요!!"

 

투덕거리면서 한참을 걷다 보니 해가 언덕을 넘어가고 어둑해지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어. 저녁은 매달 은 5냥을 받고 음식을 맡기는 아랫집 할머니가 해다가 주신 거로 해결하는데 며칠을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먹는 지민이를 보면서 다음엔 두 배로 얹어드리고 두사람 몫으로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다 생각했지. 지민인 청룡 땅에 지내면서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차마 부탁을 못 했었어. 토끼랑 청룡은 지민이가 아기 복숭아일 때만 생각하고 과일만 잔뜩 따다 줬던 거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매일 과일을 한 바구니씩 따다 가져다주는데 어떻게 다른 게 먹고 싶다는 얘기를 할 수가 있겠어. 천천히 국을 뜨던 석진인 과일만 너무 먹으면 아이가 지나치게 커지거나 몸이 상한다고 골고루 먹으라고 했지. 임부 몸에 좋은 음식들에 관한 책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어떤 음식들이 있었는지 쭉 적어서 내일 아랫집 할머니 집에 들러야겠다는 생각도 했어.

 

급하게 먹은 음식 때문에 결국 탈이 나버렸어. 배도 아프고 속이 좋지 않다고 하는 지민이 손도 따주고 등도 쓸어내리고 조금 나아진 후에는 손을 잡고 집 주변도 걸었지.


"너무 좋다!"

"뭐가 좋아? 얼마 전까지는 죽겠다고 데굴데굴 구르더니."

"언제 데굴데굴 굴렀다구…."

"너 자꾸 거짓말하고 그러면은 말 안 듣는 사고뭉치를 낳는다?"

 

지민인 꼭 잡은 석진이 손을 내려다보면서 참 따뜻하고 크다. 손을 들어서 볼도 부비고는 혼자서는 무서운 동물들이 튀어나올까 봐 밤에 산책할 생각도 못 했었는데 용이 손을 잡아주니까 호랑이도 무서워서 가까이 못 오니까 마음 놓고 걸어도 되겠다고 신이나 했지. 저녁 먹고 매일 매일 산책 나와요! 하면서 말이야. 석진인 또 지민일 놀릴 생각이 나서는 "그런데 말이야. 사실 호랑이는 나도 무서워? 호랑이가 사람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거든? 그리고 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 용으로 변하지를 못해서 말이지…." 하고 속삭였어.


"네에???!!"

 

지민인 그 소리를 듣고 석진이 등을 떠밀어서 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 그럼 어어어어- 하고 떠밀리던 석진인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대신 자기 도포를 벗어서 지민이 몸에 덮어주면서 이렇게 하면 사람 냄새는 나지 않고 용 냄새만 나니 호랑이도 그냥 지나갈 거라고 하던 산책을 마저 하고 가자며 먼저 앞서서 걸었어. 석진이 말이 농담인 줄 모르는 지민인 산책하는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 혹시 그래도 호랑이가 오나 안 오나 하고 말이야.

 

집에 돌아와선 있는 요들을 다 꺼내서 푹신하게 침상에 깔아주고는 자기는 연구해야 할 고서가 있다면서 호롱불을 켜고는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죽순, 콩.. 받아적느라고 지민이가 탁상에 얼굴을 걸치고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줄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어. 다른 책을 찾느라고 한쪽 손으로 탁상 끝머리를 더듬거리다가 지민이 얼굴을 만지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 늘 혼자 있던 게 익숙해져서 지민이가 있는 걸 잠시 잊었던 거야.

 

"아이고 깜짝이야!"

"잠이 안와요오…. 옛날얘기 해주세요."

"아, 가만 있어 보자…."

 

책을 찾다가 보니 오늘 지민이를 데리러 갔다가 거기 다 놓고 온 것을 그제야 깨달은 거야. 대충 기억나는 얘기들을 들려줄까 생각도 해봤는데 지민이 눈이 너무 초롱초롱해. 저런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날은 이야기가 다 끝나도록 잠들지 못하는 날이었어. 가끔 그럴 때는 옆에 누워 토닥거리면서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려주곤 했었지. 결국, 석진인 한숨을 푹 쉬고는 자기도 침대로 올라왔어.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던 지민인 먼저 잠에 빠져들어 가는 석진이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지.

 

"왜 안 자고."

"잠이 안 와요."

"아, 그나저나 너 말이야…. 청룡 일은 어떻게 하다 떠오른 거야?"

"그게…."

 

지민인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어. 거의 잠에 빠져가던 석진인 한쪽 눈만 떠서는 지민이 쪽을 힐끗 돌아봤지. 지민인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문질거리고 있었어. 음? 하고 눈썹 한쪽만 올리고 잠시 갸우뚱하던 석진인 금세 그 뜻을 알아채고는 한 손으로 지민이 볼을 쭉 늘렸지.

 

"욘석!"

"아아아 아파…."

"좀 아파야 해."

"청룡이 많이 슬퍼했어요…."

"그럼 뭐 아무나 다 슬퍼하면 입술로 위로를 해줄 테냐? 흑룡이건 토끼건 다??"

"흑룡…? 토끼…? 아니에요. 그런 거. 혼인하자고 하길래…."

"뭐? 혼인? 걘 아직도 혼인 타령이야? 그리고 넌 그럼 걔랑 혼인하려고 했단 말이냐?"

".............."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나 본데…."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잠깐….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요."

 

석진인 순간 아차 싶었어. 순간 자기도 모르게 네가 어떻게 백룡을 두고 다른 이와 혼인을 할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마음으로 꾸짖었던 것 같아. 지민인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작은 생명까지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서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잖아.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애정해 마지않는 이가 힘을 나눠주겠다면서 구혼해 오는 걸 뿌리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 분명해.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말이야.

 

"바보 같지 않아. 그런데 상대방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지. 그런 마음으로 충분한 것 같아?"

"아뇨…. 아저씨 말이 다 맞아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적적하지 않게 놀이 상대되어주는데도 충분하지 않단 말이냐? 참으로 섭섭하구나."

"아…. 아니에요!"

 

토라진 척을 하면서 돌아누우니까 지민인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면서 석진이 팔에 매달렸어. 고집스럽게 몸을 돌리지 않고 등만 보여주던 석진인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지.

 

"내 마음도 참으로 아프다!"

 

그러고는 다시 지민이를 마주 보고 돌아누워서는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눈만 껌뻑이는 지민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어. 코앞으로 얼굴이 다가와도 설마 석진이가 입을 맞추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지. 근데 석진이가 그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을 실행에 옮겼어.

 

쪼옥-

 

지민인 너무 놀라서 있는 힘을 다해 석진 가슴을 밀쳤고 무방비 상태로 있던 석진이 그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침상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어. 실험 정신이 투철하고 모르는 것을 알고 넘어가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전형적인 학자적 성향. 석진인 부끄럽지 않았어. 변명도 하지 않았지. 다만 자기가 세운 가설이 맞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했어. 강렬한 신체적 접촉이 시발점이 되어서 기억을 되돌리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가 봐. 그럼…. 설마 뭐 구질구질하고 신파적인.. 진실한 사랑의 입맞춤 이런 건가 싶은 생각도 드는데 그건 도무지 석진이가 스스로 실험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저씨가 이래서 저를 갖다 맡긴 거죠? 오늘은 밑에서 자요!"

"아이고 내 침대거든!"

"짐승!"

"그럼 내가 용인데 짐승이지 그럼 사람일라고!!" 


투덜거리면서 바닥에 웅크리고 누운 석진인 번쩍하고 머리를 스친 것이 있었어. 방금 지민이가 한 말. 백룡이 지민이를 맡기던 날 자기가 복숭아에게 했던 말.

 

-내가 아무리 자제력이 강한 용족의 정신적 지주라고 해도! 나는 청룡이나 흑룡, 토끼와 다를 바가 없는 사내라서 네가 여기 있을 수는 없어.

 

"자, 잠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네?"

"내가 너를.. 갖다 맡겼다고?"

"........"

"어디에! 내가 너를 어디에 왜 맡겼어?"

"...몰라요…. 머리가 아파요."

"조금만 기억을…."

"몰라! 아파…!"

 

석진이는 다급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아픈 머리를 감싼 지민이 두 팔을 흔들면서 재촉해버렸어. 그럴수록 지민인 무릎을 모으고 몸을 구부려서 무의식적으로 자기 배를 보호하려는 방어 자세를 취했지. 감정적으로 행동해서 지민이에게 상처를 입힌 석진인 어쩌면 이곳도 그가 지내기에 적절하지 않은 곳일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어. 그리고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진심으로 사죄를 했지. 용서해줄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다고 하고는 아 요새 무릎이 좀 안 좋은데, 내일은 걸어서 산책은 못가겠다. 아 이런 게 나이가 든다는 건가? 하고 구시렁대면서 거의 10초에 한 번씩 한쪽 눈을 떠서 지민이 쪽을 확인했어. 결국, 그 모습에 웃고야 마는 지민이었지.

 

"어? 웃었어? 그럼 용서한 거다?"

 

석진인 그대로 침상 위로 뛰어오르다시피 해서 지민이 옆에 누웠어. 머리를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표시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뱃속 아이도 놀라게 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서 배도 문지르면서 삼촌이 미안하다- 이런 거 담아두고 뱃속에서 나와서 삼촌만 보면 울고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서 말이야.

 

"우리 내일도 또 같이 걸어요. 나 밤바람 냄새가 너무 좋아."

"콧바람 들어가면 안 되는데 큰일 나는데?"

"어떻게 되는데요?"

"코가…. 근지러워."

 

말도 안 되는 농을 치고 낄낄거리고 혼자 웃으면 지민인 그게 뭐냐고 석진이 팔뚝을 퍽퍽 치고 한참을 그렇게 투덕거리다가 두 사람 다 금세 잠에 빠져들었어.

그날 밤 지민인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을 잡고는 꽃밭을 거니는 꿈을 꿨어. 아이의 오른손은 자신이 붙잡고 있고 왼손은 다른 누군가가 단단히 붙잡고 있었지.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석진이 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먼발치서 이쪽을 보면서 크게 손을 흔드는 사람, 그게 석진이었지. 그럼 아이의 왼손을 붙잡고 함께 걷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고개를 들어보면 햇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어.

 


-누구….


 

누구세요- 물어보려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목을 붙잡고 괴로워하면서 아- 아- 소리를 내보려고 하지만 나오지 않았지. 목이 아프고 무거운 느낌이 들어 아이의 손을 놓고 두 손으로 목을 붙잡고 꽃밭에 주저앉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지.


같은 시각 이른 시간부터 석진이의 집에 들이닥친 윤기는 집주인은 온데간데없고 침상에 낯선 형체의 움직임을 보고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않고 접근했어. 혹시 정체 모를 것에게 습격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설마 석진이가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뱃속에 들어가 있진 않겠지? 생각도 해보다 그런 늑대라면 덩치가 산만 해야 할 텐데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의 몸집이 너무 작아 보였어. 석진이보다 훨씬 왜소한 건 확실했지. 그걸 깨닫고 나니까 점점 긴장이 풀리기 시작해. 어쩌면 작은 야생동물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마침내 이불을 들춰냈을 때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잠에 빠진 지민일 발견했어.

 

슬슬 아침 해가 강렬해지고, 오전에도 후끈한 열기가 돌았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받으면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는 지민이의 얼굴 위로 윤기는 자기 팔을 들어 해를 가려줬어. 지민인 곧 몸부림치듯 움직이던 것이 멈추더니 누..구..누...구...세.. 누..구.. 하고 반복해서 웅얼거렸지.

 

"백룡."

"...........백룡."

 

감겨있던 두 눈이 조금씩 떠지고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얼굴이었지. 꿈이랑 같았어. 서서히 시야가 돌아오면서 자기를 내려다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새하얀 얼굴이 보였어. 별빛이 내리는 것 같은 회색 빛깔 머리카락까지도.

 

"안녕."


지민이 눈가로 맺혀있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지. 예상치 못한 아침 인사에 잇몸을 다 들어내 보이면서 웃던 윤기는 엄지손가락으로 지민이 눈가에 흘러내진 눈물을 닦아내 줬어. 다정한 손길에 마음이 진정된 지민인 다시 잠에 빠져들었지. 이번엔 냇가에 걸터앉아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는 물장구를 치는 즐거운 꿈을 꿨어.

 

- 아가!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

 

네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몸을 구부리고 얕은 물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엄청 집중해있는데 그게 너무 위험해 보이는 거야. 지민인 벌떡 일어나서 아이 쪽으로 가려는데 마음처럼 발이 빨리 움직여주지를 않았어. 물이 다리를 잡는 것처럼 느껴졌지.

 

-이것 바라~! 나 물꼬기 자바써!!

 

아이는 신이 나서 굽혔던 몸을 일으켜 자그마한 물고기가 담긴 손을 지민이 쪽으로 뻗으면서 환하게 웃었어. 그 미소가 어찌나 싱그러운지 바로 전에까지 안절부절못하고 물에 뛰어들기라도 할 듯이 안간힘을 다해 아이에게 다가가던 지민이도 멈춰 서서 같이 웃게 만들었지. 물고기가 손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까르르 소리를 내면서 웃는 아이의 머리 색이 너무 아름다웠어.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꽃 색보다도 아름다운 꽃분홍색. 넋을 놓고 아이를 쳐다보다 보니 아이 가까이 커다란 물결이 접근해오는 것이 보였지. 다 젖어버린 무거운 옷을 들고 재빨리 아이 쪽으로 다가 가보려고 하지만 이번엔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어.


-아, 안돼!!!


아이의 손에서 물고기가 빠져나가고 아이는 중심을 잃고 물속으로 사라지려던 순간. 그걸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던 지민인 두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어.

 

-이 녀석!

 

넘어지려는 아이를 낚아챈 커다란 그림자를 만났어. 옆구리에 발버둥을 치는 아이를 붙들고는 엄한 목소리로 꾸중을 하던 남자는 아직도 얼굴을 가린 손을 떼지 못하고 몸을 떨고 있는 지민이에게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림자가 짙어져 따갑던 햇볕이 그림자에 가려져 버렸지.

 

-어마!!! 이거바!!!

 

지민인 천천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서 별이 담긴 것처럼 반짝거리는 물이 가득 담긴 아이의 고사리손을 들여다봤어. 거기 자기 얼굴이 비쳐 보였지. 울고 있는 바보 같은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는데 머리가 아이의 머리카락 색과 같았어. 아이는 손에 담겨있던 물을 버리고 작은 손으로 지민이 두 뺨을 붙잡아선 가볍게 뽀뽀를 했어. 물이 차가웠던지 볼이 차가워졌지. 그렇게 즐거운 꿈을 뒤로하고 지민인 잠에서 깨어났어.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땐 거기엔 눈물을 닦아주던 백룡도 없고 꽃분홍색의 머리를 한 사랑스러운 아이도 없었지. 대신 석진이가 물에 적신 척으로 지민이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어. 온몸을 내리쬐는 햇볕 때문인지 식은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걸 보고는 급하게 적셔온 천으로 몸 구석구석을 닦아주고 있었던 거지. 지민인 분주하게 얼굴과 목의 땀을 닦아내던 석진이의 팔을 붙잡았어.

 

"..아저씨."

"무슨 땀을 이렇게나 흘려? 아직도 배가 아픈 게냐?"

 

배를 한번 쓰다듬은 지민인 "아들이에요." 하고 얘기했어. 석진인 눈이 동그래져서는 무슨 말이냐고 했겠지. 지민인 조금 지나면 분명 잊어버리고 말 꿈 이야기들을 털어놓았지. 함께 아이의 손을 붙잡고 걷던 사람, 너무 아름다워서 신비롭기까지 했던 아이의 꽃분홍색 머리칼.

 

"그냥 꿈이라기엔…."

"응, 너무 생생했어…. 그리고요. 신기하게 그 아이가 손에 물을 가득 담아서 보여줬는데…."

 

자기도 그 아이와 같은 꽃분홍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웃었지. 참 예뻤는데 아쉽다 하면서 말이야. 석진인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고 천의 물을 짜냈어.

 

"아 맞다, 백룡도 잠깐 봤었던 것 같은데…. 꿈이 아니라 진짜 같았어…."

"백룡?"


석진이가 손을 들어 가르치는 곳을 봤더니 거기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댄 채로 단잠에 빠져든 윤기가 있었지. 좁은 잠자리가 편하지 않아 일찍 잠에서 깬 석진이가 약초들을 캐러 간 사이 찾아온 윤기가 식은땀을 흘리며 잠이든 지민이 온몸을 닦아주고 있었던 거야. 석진이가 돌아온 인기척에 머쓱하게 물수건을 내려놓은 윤기는 별말 없이 잠시 눈 좀 붙이겠다고 하고 잠이 들었다고 했지. 지민인 벌떡 일어나 앉아서는 평화로운 표정으로 잠이든 윤기를 한참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어.

 

 

편안한 이야기를 씁니다.

렘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