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도 미야노 사무소는 평화롭지 못하다. 공안에서 어김없이 급한 과업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뢰인 공안 씨는 지금 내 옆에서 통화로 쉴 틈 없이 지시를 내리고 있다. 끊임없이 끼어드는 잡음, 시시각각 조여 오는 압박. 최악의 작업 환경 속에서 나는 유의미한 정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뭐 좀 나온 거 있어요?”

통화를 마친 그가 내 의자에 손을 얹으며 바싹 다가왔다.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젓자 안타까운 한숨이 따라붙었다. 내 마음도 덩달아 일렁였다. 분석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이미 내 손을 떠나 분석 프로그램에 달려 있었지만 나는 공연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애가 탔다.

공안에서 다루는 사건이란 늘 촌각을 지체할 수 없을 만큼 급박하지만 오늘은 의미가 남달랐다. 모 종교 단체에서 수일 내에 계획 테러를 일으키리라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는 이틀 전. 정보의 출처는 해당 단체에 잠입 중인 스파이, 즉 후루야 레이의 협력자였다. 협력자는 삼엄한 보안을 뚫고 다만 테러의 가능성만을 전했다. 구체적인 일시와 장소는 오리무중이었다.

다행히 공안은 후루야의 협력자 외에도 여러 루트를 통해 단체를 오랫동안 감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테러 수법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정확한 일시와 장소에 맞춰 경비 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전부 헛수고라는 점이었다. 섣불리 눈에 띄게 행동했다가는 이쪽 패가 전부 읽혀버린다. 최악의 경우, 정보 누설을 의심한 단체가 대대적인 숙청을 일으켜 그의 협력자를 해칠 우려도 있었다. 후루야 씨가 오늘따라 유난히 초조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몸 사리고 있다가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볼 것이 뻔했다.

“저기, 공안은 지하철 내 폭탄 테러로 짐작하고 있는 거지? 그럼 지금부터라도 경비 체제를 갖추는 게 좋지 않을까.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우선이잖아.”

테러가 수일 내로 일어난다는 정보에서부터 이틀이나 흘러버린 지금, 테러는 당장 1시간 뒤, 30분 뒤, 10분 뒤에 일어난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테러로 인한 피해 규모는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이 사건으로 야기될 사회적 혼란까지 고려하면 결코 사사로이 정리될 수 없었다.

“아아. 안 그래도 위쪽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모양이에요. 경비에 필요한 구실은 적당히 내세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는 말을 더 잇지 않고 침묵했다.

설령 이번 테러를 막는대도 다음 테러는 더 치밀해질 뿐이라든가, 그래서 당장 급한 불을 끈대도 더 큰불이 기다릴 뿐이라든가. 그런 딜레마는 나도 알고 그도 알고 공안의 수뇌부도 알았다. 그러나 당장 일어날 피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미래에 펼쳐질 일은 전부 불확실할 뿐이며 결과론적인 옳고 그름은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나마 덜 불확실한 정보에 기대어 판단하고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확실한 정보란, 수일 내에 지하철 폭탄 테러로 최소 몇십 명의 사상자가 나오리라는 점이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타당한 선택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을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목숨을 걸고 계획 테러의 정보를 전한 그의 협력자. 후루야 씨는 향후 그의 안녕 또한 시민의 생명과 맞먹게, 어쩌면 더 무겁게 고려하여 선택을 내리고 싶은 것이다.

“이대로 테러 시도조차 없었던 것처럼 유야무야 넘어가 버리면 그 친구는 공을 세우긴커녕 제 정체가 들통나 불명예스럽게 쫓겨난 꼴이 돼요. 적어도 테러를 시도했다는 정확한 물증을 잡은 다음이라야 그 친구 체면도 서고, 최악의 경우도 막을 수 있는데…….”

“협력자를 위하는 당신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목숨 걸어 전한 정보가 자기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 건 그 사람도 바라지 않을 거야. 이번 일로 자기 입장이 곤란해진대도… 그쯤이야 정보를 전한 시점에서 각오한 바겠지.”

내뱉은 말은 내가 생각해도 냉혹하리만치 단호했다. 후루야 씨도 다소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떠 나를 바라보았다. 협력자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단언한 이유는 거창한 철학이 있어서도, 숭고한 신념이 있어서도 아니다. 예컨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기는 불가피하다는 명제조차 내 판단 근거는 아니었다. 다만 나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지 협력자의 입장에서 상상해 보았을 뿐이다.

나 하나의 희생으로 다수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목숨을 저버릴 의향이 있다. 한낱 일반인인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물며 곧은 신념으로 적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제 목숨 하나를 아까워할까.

“……방금 한 말.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서 나온 대답이죠?”

아. 방심했다. 후루야 씨는 관찰력이 상상 이상으로 예리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그는 생각보다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어떨 때는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곤란할 정도로.

“맞아. 역시 예리하시네요, 후루야 씨.”

“알면 알수록 알기 쉬운 사람이라서요, 시호 씨는.”

그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눈을 계속 마주치기 부담스러워 나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후루야 씨라도 그럴 거잖아? 대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고.”

연애하기 전에는 단순히 바쁜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후루야 씨는 알면 알수록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였다. 정의를 추구하는 직업인 경찰에는 딱 알맞은 심성이다. 본인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않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다소의 희생이 발생한들 딱히 괘념치 않았다. 설령 그 희생양이 제 목숨이 될지라도.

“그렇죠. 그 정도 각오는 한 상태에서 하루하루 임무에 임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내 협력자가 그리 쉽게 이번 사안에 목숨을 걸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고요.”

“…….”

“그 친구는 나를 믿고서 정보를 넘긴 겁니다. 시민의 안전과 생명은 물론 본인의 안위 또한 내가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나는 그 신뢰에 부응해야 해요. 그러니까 아직은 쉬운 길로 타협할 수 없어요.”

평소와 같은 말투인데도 은근한 박력이 느껴졌다. 말에 이끌리듯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의 눈동자가 고요히 빛났다. 시간의 흐름이 잠시 느려지는 착각 속에서 무언가가 목덜미를 감쌌다. 의자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어느새 내려와 있었다.

“다른 단서는 없는지 찾아보고 올게요. 뭐든 좋으니까 도움이 될 만한 결과가 나오면 바로 연락해요.”

목뒤를 간질이는 손길에 정신이 팔린 사이, 입술에 가벼운 촉감이 내려앉았다. 뒤늦게 움찔하는 나를 보고 그가 낮게 웃었다. 연락을 주라는 뜻으로 스마트폰을 흔들어 보인 후루야 씨는 그대로 뒤돌아 문밖을 나섰다.

분석 프로그램은 여전히 팽팽 돌아갔고 나는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뜻 없이 입술을 매만졌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순간은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었다.


2.

볼을 할퀴는 바람이 차가웠다. 나는 코트를 여미며 걸음을 빨리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선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바깥 공기와 확연히 다른 훈훈한 온기가 끼쳤다. 안경을 끼고 있었다면 금세 김이 서렸을 것이다.

“타루헤이 데워서 한 병이랑 닭고기 두부조림 하나.”

“알겠습니다. 날도 추운데 냄비 요리는 어때요?”

“좋네요. 그것도 주세요.”

퇴근길에 종종 들르는 선술집. 정확히는 술 생각이 날 때마다 찾아오는 곳이다. 매일없이 들르지는 않아도 벌써 몇 년에 걸쳐 왕래한 가게다 보니 자연스레 주인과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여자 혼자서 선술집을 찾는 경우는 드물지만 유미 씨에게 이끌려 처음 술맛을 알게 된 내게 이곳은 고향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사무실에서 가까워 퇴근 후에 가볍게 한잔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사실 이 근방에는 위스키나 칵테일을 취급하는 바도 많지만 나는 그런 곳보다 이런 선술집이 훨씬 친근하고 좋았다. 언젠가 후루야 씨에게 그렇게 고백했더니 바람직한 취향이라며 칭찬해 주었다.

후루야 씨를 마지막으로 본 지 2주가 되어 간다. 그동안 뉴스를 유심히 챙겨 봤지만 다행히 도쿄 어디에도 테러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테러가 완벽히 예방된 건지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뿐인지 명확히 알 수 없어 마음은 늘 불안했다. 분석 프로그램은 여전히 팽팽 돌아갔으나 유의미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연락할 명분도 없었다. 그렇게 2주. 12월도 벌써 중순에 접어들었다.

“데운 타루헤이랑 닭고기 두부조림 먼저 드릴게요.”

술병과 술잔, 그리고 아담한 그릇이 놓였다. 이어서 주인은 주문하신 모둠꼬치입니다, 하고 나와 멀찍이 떨어진 옆자리 손님에게 음식을 내놓았다. 모둠꼬치라. 처음 후루야 씨를 이끌고 이 가게를 찾아온 날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든 꼬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게 벌써 1년도 더 지난 일이라니. 시간도 참 빠르다 싶었다.

1년 가까이 알고 지낸 연인 후루야 레이는 때때로 저돌적이면서도 한없이 고루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고루해진 데는 내 탓도 있었다. 그에게 고백받은 작년 크리스마스. 곧바로 자정이 지나 날짜를 넘겨버린 12월 26일의 새벽.

그날, 아픈 그를 호기롭게 내 집까지 끌고 온 것은 좋았다. 얼떨결에 키스하고 고백을 받은 것까지 마냥 완벽했다. 혹시 이게 꿈은 아닐까 내 볼을 꼬집어 봤을 정도로. 하지만 그날 밤 분위기에 취해, 이끄는 손길에, 못 이기듯 침대에 들어선 일은 밑도 끝도 없는 실수였다.

나는 시종일관 굳어 있었다. 머릿속은 유미 씨에게 전수받은 스킬로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하나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 사이에 후루야 씨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조금도 젖지 못했다. 미안해요, 실은 이런 거 처음이에요, 여태까지 모습은 다 그럴싸한 연기였어요. 그렇게 입 밖에 내지 않아도 그는 단박에 눈치챈 듯 보였다. 마치 오랜 의문이 풀린 것처럼 한껏 후련한 그의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후루야 씨는 말없이 나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다음 날 우리는 사이좋게 감기에 걸려 콜록거렸다. 그는 점심까지 얻어먹고 출근했지만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 이후 후루야 씨는 시간을 들여 내 손을 잡고, 뜸을 들여 입을 맞추고, 애지중지 공들여 나를 안았다. 후루야 씨는 그만큼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아직껏 가벼운 키스에도 움찔움찔 떠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청주를 쫄쫄 따른다. 한 잔을 들이켜자 타이밍 좋게 1인분의 모츠나베가 나왔다. 국물을 후후 불어 한 입 삼키면 속까지 뜨거운 기운이 퍼졌다. 몸이 뜨거운 국물을 반기는 걸 보니 정말 한겨울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청주를 한 잔 더 느릿하게 들이켜자 금세 취기가 돌았다. 술에 강한 편은 아니라서 평소에는 속도를 조절하며 마시는데, 오늘은 어쩐지 취하고 싶었다.

술 한 병을 끝까지 비우고 비틀비틀 미닫이문을 나섰다. 여전히 찬 바람이 불었다. 속을 덥혔기 때문인지 아까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것 말고는 전부 그대로였다. 구름도 달도 뜨지 않은 청명한 하늘, 겉옷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 지금이 방금과 같고 오늘이 어제와 같았다. 하루하루는 특별한 것도 없이 가만가만 흘러갔다.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꺼내어 뉴스를 확인한다. 다행히 지하철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속보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순탄한 일상. 이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을까.

하아. 숨을 내쉬면 입김이 뽀얗게 피어올랐다.

후루야 씨가 보고 싶었다.


3.

며칠 뒤 마스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출국을 앞두고 정신이 없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들은 바 있는 가족 여행이었다. 가족 모두가 크리스마스에 맞춰 아카이 씨가 있는 뉴욕에 놀러 간다. 가족에는 당연히 유미 씨도 포함되었다. 나도 그때 넌지시 권유받았지만 완곡히 거절했다. 마스미는 슈 오빠 때문이냐며 조심스레 물었고 나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반쯤은 맞았고 반쯤은 틀렸다.

살면서 아카이 씨의 얼굴을 절대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다. 다만 온 세상이 행복한 크리스마스에 서로 웃으며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그와 대면해야 한다면 그때는 내 삶이 아주 힘들었으면 좋겠다고 종종 생각한다. 그러면 분풀이로나마 그의 뺨을 내리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럼 시호 언니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뭐 해?]

“나? 글쎄…….”

허망한 대답에 마스미도 나도 잠시 침묵했다.

[무슨 대답이 그래? 후루야 씨는?]

“바쁘지 않을까.”

그저 바쁘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솔직히 이제는 슬슬 걱정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뜸한 적은 없었다. 가뜩이나 이번 사건은 후루야 씨의 협력자가 연관되어 있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협력자를 구하려고 또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그러다 일이 잘못되어 다치지는 않았을까.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자꾸 생각이 나쁜 쪽으로만 흘렀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 너야말로 뉴욕에서 재미있게 놀다 와.”

마스미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어영부영 전화를 끊었다. 괜히 우울한 얘기로 가족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의 가족 여행이란 평생 경험해 본 적이 없지만, 왜인지 그날은 무탈하게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고 의미 없이 최근 통화 기록을 뒤적였다. 마스미, 유미 씨, 쿠도 군, 그리고 몇몇 의뢰인의 번호를 지나서야 후루야 씨의 이름이 나타났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전화를 걸 수 있는데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니터에는 여전히 분석 프로그램이 떠 있다. 역시나 도움이 될 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후루야 씨가 데이터를 넘길 때부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 말했으니 크게 마음 쓸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결과가 나와 봤자 지금은 아무 소용도 없을지 모르고. 그런데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내 쓸데없는 고집 때문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무작정 전화해서 애정을 보채는 여자가 되기는 싫었다. 하다못해 사소한 성과라도 전해 주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야속하게도 그런 일은 2주도 넘게 일어나지 않았고, 이대로라면 용건도 없이 연락할 수 없었다. 이래서야 사귀기 전 사례를 핑계로 데이트할 때와 뭐가 다르냐 싶지만.

연인이란 무엇일까. 하다 하다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든다. 후루야 씨도 나도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만한 가족은 없었다. 과연 연인이란 가족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관계일까? 연인 관계는 대개 유일무이하고 배타적이라서, 그리고 후루야 씨는 나의 첫 연인이라서. 적어도 나에게 그 사람은 한없이 소중하고 특별했다. 그래서 당연히 후루야 씨도 나를 가장 특별히 여기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그날 그가 협력자에게 지닌 신뢰를 깨닫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공안 경찰과 협력자. 서로 형제애에 가까운 유대감을 품는다고 듣기야 했지만 막상 후루야 씨에게 그런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상대가 구해 주리라 믿고 제 목숨을 거는 협력자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대를 구하려고 제 목숨을 거는 공안 경찰.

나라면 목숨을 걸면서까지 후루야 씨를 믿을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후루야 씨는 나를 그만큼 믿어 줄까?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그를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분하고 속이 끓는다. 그래서 더더욱 보고 싶어도 연락할 수 없었다. 지금은 연락해 봤자 그를 방해할 뿐이다. 도움은커녕 짐만 되는 연인은 분명 미움받을 거야. 그에게 미움받으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견딜 수 없을걸.

연인이란 무엇일까.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상대? 당연하다는 듯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는 사람? 나열해 보니 어쩐지 볼품없고 한심하기만 했다. 강렬한 끌림, 운명적인 만남, 로맨틱한 약속. 연인 관계를 둘러싼 그 모든 환상이 한낱 종잇장처럼 펄럭이며 바람에 실려 간다. 환상이 흩날려 사라진 곳에는, 그러나 여전히 갈증이 남았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았다.

후루야 씨가 보고 싶었다.


4.

그동안 미뤄 놓은 의뢰를 정신없이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바깥세상에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그것도 분석 결과를 받은 의뢰인이 감사 메시지 끝에 ‘메리 크리스마스’를 적어 놓아서 알았다. 무심코 날짜를 확인하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속이 텅 빈 냉장고가 떠올랐다. 요 며칠은 퇴근하자마자 집에 틀어박혀 저녁은 늘 만들어 먹었다. 어제 마침 재료가 똑 떨어져 오늘은 밖에서 끼니를 때우려고 했지만. 보나 마나 가는 곳마다 사람이 붐비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그냥 굶을까. 그러기에는 아침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다. 막상 굶겠다고 생각하니 위장이 요란하게 울렸다. 시각은 9시 26분. 지금부터 마트에서 장을 보기에도 애매했다. 꼼짝없이 식당행이구나. 벽걸이에 걸어 둔 코트를 걸치고 목도리를 둘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패딩을 입고 나올 걸 그랬다.

그렇게 두 번째로 들른 식당까지 허탕을 쳤다. 그 많은 사람이 어디 숨어 있었나 싶게 가는 곳마다 북적였다. 문을 열고 터덜터덜 밖으로 나오면 눈앞에 무언가 아른거렸다. 하나, 둘, 셋, 넷. 눈송이였다. 배고픔도 잠시 잊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눈송이는 다시 하늘로 빨려 올라가듯 나긋나긋 휘날렸다. 내일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겠구나. 마음이 울적해졌다.

결국 돌고 돌아 선술집을 향했다. 설마 허름한 선술집마저 만석이랴 싶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막연한 희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금방 자리가 날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는 주인에게 다음에 오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우습지만 오늘 같은 날에 멍청히 서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오기를 부린 끝에 다시 눈 내리는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눈송이가 굵어졌다.

어쩔 수 없이 편의점을 향했다. 편의점은 번화가에 있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여기저기를 전전하느라 얼얼해진 코를 훌쩍이며 가방을 고쳐 멨다. 점점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인파가 몰렸다. 간간이 술기운 섞인 웃음소리도 들렸다. 시끌벅적한 밤공기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졌다. 주위가 밝고 환해지자 마음은 거꾸로 침전을 거듭했다. 걸음걸음이 괜스레 무겁고 처량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쨍한 형광등에 눈이 부셨다. 크리스마스에는 편의점도 호황인지라 매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 금실이 둘린 트리와 새빨간 산타 모자로 장식된 매대는 본래 알록달록한 케이크로 볼 만했겠지. 지금은 거의 다 팔려 제일 큰 5호 크기의 딸기 케이크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혼자서는 절대 해치울 수 없는 양이다. 압도적인 크기에 일찌감치 케이크는 포기하고 도시락 코너를 향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계산을 마친 계란말이 샌드위치와 녹차 한 병을 봉투에 넣으며 알바생이 말했다. 구김살 없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축복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얼마만큼 행복한 사람일까. 나는 차마 같은 말을 돌려주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다시금 밤기운에 스며든다. 집까지 걸어갈 생각에 벌써 막막했다. 내디딘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불현듯 눈물이 핑 돌고 콧날이 시큰거렸다. 날이 추워서 그렇다고 변명하듯 목도리를 추어올렸다. 당황해서 서두른 걸음이 앗 하는 사이에 꼬였다. 몸이 휘우듬하게 쏠린다. 재빨리 중심을 다잡았지만 누가 보지는 않았을까 괜히 주위를 살폈다.

남들은 관심도 없이 지나쳐 가건만 저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바보 같고 또 바보 같다. 평지에서 삐끗해 넘어질 뻔한 것도, 이 추운 날에 코트밖에 걸치지 않은 것도, 차디찬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게 된 것도.

지나가는 사람의 행복에 볼썽사나운 질투를 느끼는 것도, 끝끝내 후루야 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도, 그래서 연락 한 번을 못 하고 오늘까지 감감무소식인 것도. 전부 다 한심하고 처량하고 우울했다. 차라리 세상도 행복하지 않았더라면 이렇듯 박탈감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온 세상이 나를 따돌리며 멀어져 간다. 저마다 산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설렘 속에서 오직 나만이 우두커니 동떨어져 있었다.

“시호 씨.”

잡다한 소음을 뚫고 목소리는 선명히 와 닿았다. 환청이면 어떡하지, 걱정하면서도 몸은 솔직하게 뒤돌았다. 정말로 후루야 레이였다.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내달아 그의 목에 매달렸다. 뒤꿈치를 들어 모자란 키 차이를 메운다. 간신히 닿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는 적잖이 당황한 듯 몸을 굳혔으나 이내 순순히 나를 받아들였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서로 포개지며 맞물렸다. 아쉬운 듯 떨어지다 이끌려서 맞붙기를 여러 번, 슬슬 혀끝이 움직이려 할 때 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사람들이 쳐다봐요.”

“……그럼 안 돼?”

그가 휘둥그레져서는 눈을 깜빡였다. 곧이어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더니 그가 롱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내렸다.

“춥죠? 들어와요.”

그가 패딩을 활짝 펼쳤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시금 패딩이 나를 감싸면 후루야 씨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또 콧날이 시큰거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잘 지냈어요?”

“…응. 잘 지냈어.”

그러나 울먹거림은 감추지 못했다. 달래듯이 그가 내 등을 토닥였다. 일정하게 두드리는 손길은 감정을 더 부추길 뿐이라서 나는 품 안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시호 씨가 먼저 키스해 주기는 처음이네요.”

“그래?”

“응. 너무 좋았어.”

“그럼 더 해 줄까?”

가슴팍에 묻은 고개를 조금만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실까.”

“그냥. 당신이 원하는 건 다 해 주고 싶어서.”

“…알았다. 유미 씨한테 또 이상한 작업 멘트 배워 온 거죠?”

그런 거 아닌데. 괜히 시무룩해서 입술을 삐죽였다. 분수에도 안 맞는 작업 멘트 같은 게 아니다. 나는 진심이었다. 연인으로서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내가 갈구하는 만큼 그도 욕망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숭고한 헌신을 하고 싶다든가, 그런 아름다운 마음씨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에게 도움을 주는 만큼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이 곧 그가 받고 싶은 사랑이라면. 필요가 일치하기에 더는 조건을 붙이지 않아도 괜찮다면. 당신과 내가 먼 길을 돌지 않고 그저 입맞춤으로 존재를 긍정할 수 있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한 기적이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지름길을 탐한다. 그리고 연인이란 사랑을 체험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얼마나 오래 기다려 왔든. 그와 나는 사소한 접촉만으로 금세 특별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하기 싫어?”

“설마요.”

내가 먼저 다가갔고 그도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내가 장난치듯 물러났다.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사이에 재차 다가서고는 또 물러났다. 단단히 약이 올랐는지 후루야 씨가 내 턱을 넓게 붙잡았다. 그대로 돌진. 도망칠 곳도 없이 입술을 잡아먹혔다. 아까와 다르게 혀가 미끄러지듯 얽혔다. 내심 놀라서 눈동자를 굴리면 여기저기서 힐끗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조금 전만 해도 세상과 동떨어진 듯했던 분리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던 나와 세계가, 한데 녹아들어 지복의 순간을 맞이한다. 지금 입을 맞추는 후루야 씨도, 붐비는 거리의 행인들도, 어깨에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하나도. 전부 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시간도 공간도 의미를 잃어 모든 것이 이어졌다. 원래 네가 나였던 것처럼. 원래 내가 너였던 것처럼.

짧은 입맞춤은 그러나 영원 같았다. 아직껏 황홀경에 빠진 내 볼을 그가 엄지로 톡톡 두드렸다.

“저 봉투는 또 뭐예요. 버리는 거예요?”

“응? 아… 아니, 내 저녁이야.”

“저녁?”

그가 품에서 나를 놓아주고 내팽개쳐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그가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이걸로 저녁이 돼요?”

“그럼 어떡해. 식당마다 사람이 꽉꽉 찼는데.”

“그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되지. 안 되겠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아, 그러면…….”

나를 잡아 이끄는 손을 거꾸로 붙잡아 당겼다. 바보같이 넘어질 뻔한 지점을 지나 딸랑거리는 편의점 문을 열었다. 알바생이 조건반사적으로 인사하려다 나를 보고 멈칫했다. 방금 나간 사람이 또 무슨 일이지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옆에 선 후루야 씨를 보고 혼자 납득한 듯 빙그레 웃었다.

“이 딸기 케이크. 먹고 싶어.”

“괜찮은데… 케이크로 되겠어요?”

“응. 집에서 같이 먹어 줄 거지?”

“그럼 치사하게 혼자 먹으려고?”

그가 마지막 남은 5호짜리 딸기 케이크를 번쩍 들었다. 이로써 케이크는 품절. 계산을 마치자 알바생이 변함없이 축복을 건네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저 후루야 씨가 곁에 돌아와 주었을 뿐인데, 이번에는 나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었다.

“당신도 메리 크리스마스.”■


날개와다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