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세탁소 2부



 



쩔어, 하고 수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내 저를 쳐다보고 있는 유림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담고서. 식탁위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육식'이 있었다. 스테이크. 와. 스테이크다. 이 여자, 정말, 정체가, 뭐지? 이거 스테이크? 이런게 그냥 집에서 뚝딱뚝딱 나오는거야? 요리는 또 언제 배웠대? 넋을 놓고 보다가 아차, 싶었다. 너무 놀란 티를 냈나싶어 괜스레 민망해졌다. 별로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막상 음식이 앞에 차려져 있으니 마침 배가고플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필 그 미친년집단이 황금같은 모의고사날 제 신경을 긁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경찰서만 안갔다 왔어도 오늘 하루종일 놀 수 있었는데 싶어서 더 분했다. 물론 경찰서가 아니었으면 유림의 집에 오지도 못했겠지만... 아 스테이크... 존나 맛있어 보인다...









"......"




"......"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먹지말라는 건지 먹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잖아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민은 아직 칼자루가 유림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왜 때렸냐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제 눈앞의 스테이크고 뭐고 모조리 그림의 떡이 될 것 같아서 수민은 진심으로 깊은 내적갈등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저 여자라면 충분히 스테이크고 뭐고 저를 하루종일 고문시킬 것이 분명했다.









사실 말을 하라면 할 수 있긴했다. 그러나 유림에겐 죽어도 말하기 싫었다. 파출소에 끌려들어가자마자 네 번째로 보는 경찰아저씨가 너 또 왔냐? 하고 묻길래 머리를 썼다. 다행히 미친년집단도 보호감찰이니 뭐니해서 말이 많은 애들이라서 어렵지 않게 둘러댈 수 있었다. 미성년자는 경위서 필수니까 쉽게 설명하라는 경찰아저씨의 말에, 저 미친년들이 우리 담임쌤을 욕했다고요, 하고 수민은 부러 착한척 순수한척 정의로운척 눈물연기까지 해가며 아직도 분한듯 주먹을 불끈 쥐며 희대의 여배우로 빙의했다.



 

 


 

"우리 선생님을 욕하는 것만은 제가 참을 수가 없어서요. 거기다 제 담임선생님은 털어서 먼지하나 안나오는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친세탁...아, 아니 조, 좋은 분이시란 말이에요."










평소 저 때문에 들락날락 한 담임선생이 유림이라는 걸 알아챈 경찰은 수민의 말에, 그렇지. 그 선생 아주 참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다 싶어 수민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저를 개과천선 시킨 다시 없을 은사님이세요, 부터 시작해 저같은 문제아들 갱생시키느라 시집도 못갔다구요! 그런분을 욕하니까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하고 서럽게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평소 경찰서에 올 때 마다 박카스며 자양강장제며 빈손으로 오지 않았던 유림의 센스도 수민의 연기에 가산점을 더해주었다. 덕분에 유림이 오기 전엔 경위서고 자시고 다 해결되긴 했지만 그래도 네 번째로 경찰서에 들어서는 유림을 보니 사실 미안하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화가나기도 해서 울컥, 저도 모르게 전학갈게요- 하고 말했던 수민이었다.










"말 안할꺼야?"




"말 했잖아요."




"....정수민."









아, 안돼... 하얗고 잘 빠진 손목에 걸려있던 베르사체 금장 시계줄을 푸는 유림을 보자마자 수민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유림의 눈치를 살폈다. 시계를 푼다는 것은...본격적으로 괴롭힐 준비를 한다는 유림만의 준비운동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수민이었다.









반년 전, 이틀 연속으로 수업을 쨌다가 엉덩이를 대라는 유림의 말에 수민은 이제 체벌도 학교폭력이라며 배째란 식으로 짝다리를 짚고 유림과 대치했다. 그리고 요즘같은 세상에 사랑의 매로 엉덩이를 때리는 교사가 어딨나 싶어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젊은 여교사면서 어떻게 체벌은 저토록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엉덩이 때리기라니. 그래, 설마 진짜 엉덩이를 때린다는 그 유치한 체벌을 감행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탈이었다. 수민은 유림이 그냥 저를 겁주려고 하는 행동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래서 저도 적당히 박자를 맞춰주며 반성문으로 넘어가야지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 때 갑자기 유림이 제 손목을 슬쩍 들어 시계를 풀었다. 이건 또 무슨 유치한 시츄에이션? 이 여자 영화 많이 보셨네. 무슨 시계를 풀어. 미치겠네 정말. 하, 하고 머리를 쓸어넘기는 수민은 시계를 풀며 생글생글 웃던 유림에게,










"헐... 뭐 주먹이라도 쓰시려구요?"









하고 빈정댔다가 1주일간 한의원에 찜질을 다녔다. 




키는 커도 허리며 다리가 날씬할 뿐만 아니라, 그래도 저보다 어른이고 맨날천날 정장이나 잘빠진 옷들에 구두와 모델워킹으로 완전무장한 여자가 싸움은 무슨 싸움이야 싶어 수민은 마음속으로 콧웃음을 쳤다. 아직 젊은 여교사라 요즘 애들과 동등한 체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게 우스워 수민은 어떻게 하면 마지못해 져주는 척을 할까 하고 고민하며 그래도 선생이니까,









"먼저 선빵 날리세요. 그래야 나중에 학교폭력이니 뭐니 선생님도 안 귀찮지...."









하고 깝죽거렸다가 말그대로 '개털렸다'. 




아흐, 선생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한번만, 봐, 주세, 요, 제발, 으, 허어어, 어어어...하는 소리가 텅 빈 도서관을 가득울렸다. 




보랏빛 멍이 오른 엉덩이는 보름이 지나도 색이 빠지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자를 이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이내 그 고민은 어떻게 하면 제발 저 미친세탁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로 바뀌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보름 내내 엉덩이가 화끈거려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앉아 있지도 못했다. 덕분에 수업을 째긴 커녕 얌전하고 진득한 모범생이 되어 자연스럽게 유림의 체벌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평화는 잠시였다. 체육시간 내내 엉덩이의 멍 때문에 벤치를 지키고 있던 저를 의아하게 생각하던 체육 선생이 유림에게 마침 수민의 이야기를 해주어 유림은 수민의 사정을 알게되었다.









수민은 제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유림이 알게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부디 저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다 사과까진 바라지 않으니까 다만 유림이 이제 저를 좀 놓아주길 바랬다. 그러나 얼마 안가 제 엉덩이 사정을 소상히 아뢰어 바친 오지랖 넓은 체육선생을 두고두고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체육선생은 다음과 같이 미주알고주알 미친세탁소 김유림에게 일러바쳤다.





 



"수민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있나봐요. 애가 체육활동을 전혀 못하더라구요. 원래 체육시간에 날아다니는 앤데... 벤치에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해서 계속 엎드려 누워있던데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누가보면 친언니라도 되는양 오지랖을 펼쳐 유림에게 저를 걱정해준 체육선생 덕에 수민은 엉덩이를 맞은 것 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을 겪었으니,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제 엉덩이를 까보인 일이었다.










"까."




"네?"




"엉덩이 까봐."




"미쳤어요?!"









더이상은 못참아, 하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문채 제 엉덩이를 비롯해 제몸에 손 하나라도 까딱하면 진짜 죽을 힘을 다해 반항 하려는 수민의 기세에 유림은 피식 웃더니 또 시계를 풀었다. 늘씬하고 도드라진 손목에 걸쳐진 베르사체 금장시계가 풀리는 그 장면이 보름전의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수민은 저도 모르게 조건반사적으로 하얗게 질렸다. 불타는 반항심은 지구온난화에 빙하가 녹듯 사라지고 저도 모르게 유림을 향해 등을 돌려, "어, 어느만큼 내릴까요 선생님...?"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던 수민이었다.





 


"...너 왜 아프다고 안했어?"




"안 아픈데요?"




"가방 챙겨서 나와."




"왜요?"




"병원가자."




"네?"




"아니다. 니 가방 내가 챙겨 올테니까. 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차 열쇠를 던져주는 유림의 표정이 지금껏 제가 봤던 유림의 표정중에선 없던 것들이라 수민은 짐짓 놀라고 말았다. 저 만큼 하얗게 질려서는 황급히 저를 데리고 근처 병원에 갔다가 그것도 모잘라서 찜질을 해야한다며 한의원까지 데리고 온 유림의 행동은 좀 과해보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보는 당황한 유림의 모습에 수민은 오히려 통쾌하기 보다는 묘한 감정을 느껴야했다. 제가 보기엔 그렇게 심한 멍은 아닌데... 그냥 색이 조금 더디게 빠지는 것 뿐인 것 같은데... 게다가 병원의 의사도 괜찮습니다, 진정하세요, 를 유림에게 얼마나 외쳐댔던가 말이다. 



조금 팔불출처럼 보이는 유림의 모습에 수민은 괜스레 민망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쉽게 멍이 안빠지는 거 보면 허약체질이라서 그런게 아닐까요? 얘가 평소에 잘 챙겨 먹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한의원에 앉자마자 평소에 그토록 말수가 적었던 유림은 온데간데 없고 저에대한 자세한 정보를 주르르 늘어놓는 유림을 보며 수민은 엉덩이의 통증에 눌려 따끔거리는 아픔에 눈을 꿈틀할 때보다 더 놀라운 표정으로 유림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물이나 영양제같은 것도 잘 챙겨먹지 못하고, 애가 잠은 많은데 여름엔 맥도 못추거든요. 더위를 잘 타는건지... 몸에 열이 많은 건지..."




수민은 저도 모르게 유림의 옆모습을 흘끔흘끔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잘알아? 아니, 왜 저렇게 말이 많아?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애가 아침을 자주 거른다. 운동신경은 좋은데 쉽게 지친다. 잠을 많이 잔다. 채소종류를 싫어해서 편식을 하는 편이다. 지난 1년동안 키는 2.5cm가 컸는데 몸무게는 2.5kg 줄었다. 여름엔 꼭 물에 빠진 병아리 같다. 요즘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해진 것 같다. 이 시기에 한약을 지어 먹이는게 나은게 아닌가. 살은 왜 안붙는지 모르겠다. 등등등...










그러나 수민은 근본적으로 저를 때린 유림의 공포스러운 힘이야말로 저를 이렇게 몰아넣은 결과가 아닌가 싶었다. 당신이 시계를 풀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거예요. 당신이 유림의 매를 아무도 없는 빈 도서관에서 때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꺼라구요!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 때의 유림은 제가 좀처럼 볼 수 없는 유림이었기 때문에 수민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저에대해 이렇게 소상히 꿰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고 낯간지럽지만 저를 걱정해주는 유림이, 그러니까, 수민으로서는, 매우 인정하기 싫었지만, 



음, 




그러니까,



싫지는 않았다.










제 이야기를 걱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한의사에게 주르르 늘어놓는 상황이 민망하고 부끄러워 수민은 어쩔 줄을 몰랐다. 진료의자가 꼭 유치원 학예회의 독무대라도 되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게다가 무슨 제 일거수 일투족을 저렇게 꿰뚫고있어? 뭐야 이 여자...싶어 괜히 귓바퀴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끝이 없는 유림의 걱정어린 말들에 마침내 한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그만 이야기 하셔도 좋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한참을 더 웃다가 이내 무언가를 빠르게 쓰며 말했다.




"요즘 보기드문 자매사이네요. 언니가 아주 동생을 끔찍히 생각하네." 









그리고 그 말은, 수민을 두 번 민망하게 만들었다. 아, 아닌데요. 여기 옆에 이 사람은 나를 매일 탈탈 털어 아주 그냥 세탁기 수준이 아니라 탈곡기 수준으로 빻아대는 사람인데- 하고 말은 못하고 달아오른 제 귓가를 의식해 괜스레 머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제 귓바퀴를 감추려 노력했다.




결국 수민은 1주일간 찜질을 다니는 것도 모잘라 녹용까지 먹게 되었다. 난 한약 안 먹어요, 아니 못 먹어요- 라고 제법 단호하게 말했지만, 말없이 저를 스윽 쳐다보며 그럼 아주 주옥되는 거야, 하는 표정의 유림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수민은 생애 처음으로 한약이라는 것을 먹었다. 일부러 안 먹으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집으로 하교할 때 마다 유림은 교무실에서 데워 온 녹용팩에 친히 빨대까지 꽂아주며, "다 마시기 전엔 출발 안 해." 라고 하며 수민을 고문시켰다. 심심찮게 교실에서 엄마가 챙겨줬다며 한약을 먹는 아이들을 봤지만 미친세탁소에게 그런 걸 받을 줄이야, 싶어 수민은 새삼 소름이 돋았다. 










"멍은 다 빠졌니?"









찜질과 녹용의 효과인지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순 없지만 확실히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급속히 빠지는 멍 덕분에 수민은 살만했다. 그것 봐,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거야- 하고 유림이 그 화려한 눈매를 게슴츠레 뜨며 저를 내려다보는 꼴을 봐야 했지만 어쨌든 사실이었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었다. 



"네에.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괜찮아요, 하고 돌아서려는데 대뜸 유림이,






 


"그럼 까봐. 검사해보자."









라고 말해서 수민은 또 한번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깐 것도 모잘라서 두 번이나 까는 건 있을 수 없어. 더이상 유림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저만 수치와 치욕을 느낄 수는 없다 싶어서 수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죽으면 죽었지 또 엉덩이를 까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고 했다.









"넌 엉덩이에 금 숨겨놨니? 멍이 얼마나 빠진..." 

 

 

"나, 나한테도 프라이... 프라이... 프... 프라이..."


"프라이버시."


"아, 그, 그거."


"으응- 그랬어? 우리 수민이가 프라이버시가 있었어어어?"




무슨 화려한 쥘부채가 촤르르륵- 접혀지는 것처럼 아주 인위적으로(그러나 그게 예쁘다는게 수민은 원통했다) 눈을 휘어뜨리며 제 뒷통수를 살살 쓸어만져주는 손길이라니. 꼭 아무리 날고 기어도 너는 내 애완견일 뿐이야- 하는 주인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손길이 아닐 수 없었다. 수민은 저도 모르게 한쪽어깨를 움찔 거리며 유림의 손을 쳐냈다.







"부끄러워 하긴."


"남의 엉덩이에 신경 끄세요."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나 시계풀게 하지마."









당신이 그렇게 말 안해도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꺼거든요? 아픈 건 둘째치고 병원이니 녹용이니... 그 한 달간은 무슨 팔불출 엄마에게 끌려다니는 유치원생 아이처럼 여겨져서 저도 얼마나 민망했던가.









그런데,


 


지금 저 미친세탁소가


 


또 시계를 풀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민은 그때의 아픈 추억을 떠올리고, 스테이크를 바라보고, 시계를 푸려는 유림을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고 외치듯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쌤을 가지고 장난치는게 싫었어요."




"무슨 소리야."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근데 그냥 기분이 나빠요."


"정수민. 알아듣게 설명..." 




"그냥 싫다구요. 당신이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







 

 

 

 


웹소설(GL) zezememe@naver.com

봄쌀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