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강간 묘사가 있음.




1.


퀸젯은 빠른 속도로 비행하고 있었다. 브리핑을 끝낸 캡틴 아메리카는 새롭게 구성된 스트라이크 팀을 쭉 둘러보았다. 긴장하고 경직된 얼굴들 너머의 퀸젯 구석에서 무표정하게 손질한 무기를 하나하나 장착하고 있는 버키가 보였다. 스티브는 약하게 숨을 내쉬며 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준비시키고, 버키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버키가 코드 네임 윈터 솔져로 어벤져스에 합류한 것은 꽤 시간이 흐른 일이었지만, 그는 거의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버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효율적이어도 철저하게 비협조적이었다. 작전도 결국 버키의 단독행동을 염두에 두고 짜였다.
스티브는 이토록 벽을 만들고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버키를 볼 때마다 때때로, 그가 사람들을 좋아해서 시끄럽게 둘러싸이는 것을 좋아했던 때를 생각했다. 버키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걸 너무도 당연하게 해치우곤 했기 때문에 스티브도 그것을 당연히 생각했다. 이제 버키는 아무도 옆에 오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누군가 가까이 오는 기척에 버키가 잠시 손을 멈칫했다가 곧 침착하게 허벅지의 홀스터에 칼집을 넣었다. 스티브는 말없이 버키가 앉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둘 다 덩치가 좋아서 엉덩이를 바짝 붙이자 어깨가 겹쳐졌다. 그 자세로 스티브가 낮게 소곤거렸다.


“돌아가면 델리에 가자.”


버키가 약간 고개를 들었다. 아무 표정 없이 차가웠던 얼굴이 스티브를 향해 희미한 웃음으로 물들었다.


“카네기? 얼마 전에도 갔잖아.”
“그래도 맛있잖아. 난 이번엔 스트로베리 먹을 거야.”
“뉴욕 토박이라면서 그런 관광객이나 찾는 가게를 좋아하냐.”
“좋은 건 좋은 거지.”


스티브가 으쓱거리며 대답하자, 버키가 눈으로 주변을 쓱 훑더니 아무도 이쪽에 시선을 주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기울여 스티브에게 키스했다. 장난스럽고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붉고 연한 과육 같은 입술끼리 뭉그러지듯 꾹 눌렸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스티브는 눈만 둥그렇게 뜨고 굳어버렸다. 버키는 입술을 가까이 댈 무렵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뜨며 양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작게 입을 벌린 버키가 혀끝만 빼꼼하게 내밀어 스티브의 입술을 핥았다. 그것만으로도 스티브는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턱을 당겨 빠져나갔다.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행각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 몰라?”


재빨리 고개까지 돌려 주변을 확인한 스티브가 투덜거렸지만 버키는 작게 웃기만 했다.


“아무도 못 봤어.”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 아무데서나…….”


제대로 말을 끝내지 못하고 어물거린 스티브가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썼다. 버키의 애정은 스티브를 때때로 당혹하게 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맞닿았던 입술이 아직도 다른 사람의 감촉으로 얇게 달아올라 있어서 스티브는 무심코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듯 눌렀다.


“아무튼 잘 따라오기나 해.”


짐짓 노려보자 버키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너나 잘해.”


버키에겐 으름장을 놓았지만, 스티브는 사실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이번 임무는 슈퍼솔져가 둘이나 투입될 만큼 까다롭지도 않았고, 인질도 없었으니까. 전투라기보다 제압에 가까웠다. 슈퍼솔져 혈청에 대한 연구를 하던 연구소였기 때문에 주의를 더욱 기울인 것뿐이었다. 지금은 연구를 위임했던 군에서도 비리의 온상으로 주목받은 데다 무차별적인 동물실험이 밝혀져 PETA(동물보호협회, 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의 공격까지 이어지자 버린 패가 되어 떨어져 나왔지만, 한때 이 연구소로 엄청난 자금과 인재들, 그리고 물론 스티브의 혈액과 일부 남아있는 브루스 배너의 연구 자료까지도 꾸역꾸역 밀어 넣어졌었다.
제일 먼저 스트라이크 팀이 넓게 산개해 1층부터 차례로 연구원들을 제압하고 연구 자료와 샘플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정작 여기서 무슨 짓을 꾸몄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스트라이크 팀의 발목을 잡으며 자신들의 연구를 지키려했다. 그들에게는 갑작스럽게 무장단체가 나타나 연구원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연구 자료와 실험체를 압수해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스트라이크 팀이 산개하며 하나하나 제압하는 동안, 스티브와 버키는 빠른 속도로 가장 중요한 실험실로 향했다. 그들이 데이터를 지워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기 전에 습격해 데이터를 지켜야 했다. 표면적으로는 모르모트를 이용해 실험 중인 것으로 밝혀져 있지만 실제로는 영장류도 동원되었고, 최근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기까지 했다. 스티브는 마리아 힐을 비롯한 다른 현대의 사람들만큼 인체실험에 메스꺼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들보다 더욱 심하게 반발을 느꼈다. 밝고 깨끗한 현대식 건물 안에서조차 하이드라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소모품처럼 대하며 그들의 권리를 모두 짓밟는 실험이 이어지는 것이 스티브를 지치고 피곤하게 했다.
스티브와 뒤에서 그를 엄호하는 버키는 곧 지하의 거대한 실험실에 도착했다. 실험실 앞은 소독실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게 위해서는 키와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해독에 시간이 걸리겠다고 온 무전에 스티브는 망설임 없이 키패드를 망가뜨리고 힘으로 강제로 소독실의 문을 열었다. 소독약이 분사되어 소독실을 뿌옇게 물들였다.


“조용히 간다고 하지 않았어?”


버키가 작게 빈정거리듯 속삭였다.


“이만하면 조용히 왔지.”


스티브는 대꾸하며 손을 휘저어 분사되는 소독약을 흐트러뜨렸다. 굳게 닫힌 실험실 창문 너머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스티브는 버키에게 눈짓해 실험실의 두터운 쇠문을 한 짝씩 잡았다. 버키의 왼팔에서 낮은 구동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단숨에 문이 비틀리듯 잡아당겨져 벌어졌다. 스티브가 방패를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섰고 버키도 총을 겨누며 그 뒤를 따랐다.
중앙에는 거대한 둥근 수조처럼 생긴 인큐베이터 여섯 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인큐베이터는 크기가 균일했고, 그 크기는 다른 어떤 동물도 아닌 인간을 넣기 위한 크기였다. 맨 끝의 한 개의 인큐베이터에만 옅은 형광 녹색의 물질이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장치 때문인지 그 안에선 때때로 작은 기포가 올라왔다. 늘어선 십 수 개의 모니터는 모두 켜져 있었다. 스티브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사람의 기척을 느꼈었지만 숨을 곳이 분명히 없는데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찾아볼 테니까 백업부터 해.”


버키가 말하고 스티브에게서 떨어졌다. 스티브는 곧 하나의 컴퓨터 앞에 서서 가져온 드라이브를 꽂았다. 스티브는 해킹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현대의 과학기술은 단순히 드라이브를 꽂는 것만으로도 자동으로 해킹해 자료를 긁어들여 백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고, 덕택에 스티브도 스파이로 충분히 활동할 수 있었다. 곧 방화벽이 깨지고 자료가 화면에 표시되었다. 스티브가 키보드를 두드려 모두를 백업하고 원 자료를 모두 파괴하도록 설정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버키는 스티브에게서도 신경을 끊지 않고 경계하며 수색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실험실에 딸린 다른 연구실은 없는 듯 했지만 버키는 신중하게 살폈다. 비밀 연구실 따위는 끔찍하게 많이 돌아다녔던 탓에 대강은 있을 만한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주변을 살피던 버키는 벽 너머에서 울리는 엔진소리에 흠칫 몸을 돌렸다.
거의 동시에 한쪽 벽을 부수며 트럭이 돌진해왔다. 한순간 시멘트 덩어리와 먼지가 시야에 가득해졌다. 짧은 순간, 버키는 피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깨닫고 두 팔로 가드 하듯 앞을 십자로 막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트럭이 버키를 들이받았다.
버키의 몸이 뒤로 날아가 모니터에 부딪쳤다. 스티브가 새파랗게 질려 방패를 집어 들고 달려왔다. 트럭 안에는 스티브가 언뜻 창을 통해 봤던 박사가 부들부들 떨며 핸들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버키를 들이받은 순간 두터운 차체를 뚫고 선명하게 그 반동을 느끼고 무심코 브레이크를 밟아 멈췄던 것이다. 그러나 옆에서 스티브가 달려오자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박사가 발을 다시 액셀러레이터에 가져다 대고 있는 힘껏 밟았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버키가 꿈틀거리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래서, 스티브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버키를 밀쳐내는 것.
버키를 옆으로 밀쳐내고 스티브와 스티브의 방패가 트럭의 돌진을 받아냈다. 방패가 트럭의 범퍼와 강렬하게 충돌하며 둔중한 소리를 냈다. 스티브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박사는 망설이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만을 밟아댔다. 트럭은 그대로 스티브를 밀며 실험실을 가로질렀다.
스티브의 등이 인큐베이터에 부딪쳤다. 더 이상 앞으로 돌진하지 못해 막힌 트럭의 바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며 스티브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인큐베이터와 트럭 사이에 눌린 스티브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박사는 액셀러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아 그럴 만한 틈을 주지 않았다. 스티브가 간신히 버텨내며 몸을 비틀었을 때, 등 뒤에서 자그마하게 빠직 하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스티브는 다시 한 번 몸을 빼내려고 하며 방패를 비스듬히 들었다.


“음……!”


트럭의 힘을 받아내는 온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등뼈가 으스러질 듯한 고통에 스티브의 입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버키가 힘겹게 정신을 차리고 바닥을 긁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서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가늠하자마자 버키는 바로 허벅지의 홀스터에서 나이프를 꺼내들어 박사에게 던졌다. 무시무시한 힘으로 날아간 나이프는 차 유리를 깨고 박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악!”


박사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머리에 박힌 나이프에 손을 댔다가 그대로 절명했다. 그 순간까지도 박사의 발은 액셀러레이터에서 떨어지지 않아 미친 듯이 바퀴가 구르고 있었다.


“젠장!”


이를 갈듯이 중얼거리며 버키가 일어서려고 바르작거렸다. 뇌진탕인지 눈앞이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스티브가, 버키는 필사적으로 팔꿈치로 일어서려고 바르작거리며 스티브가 있는 쪽을 살폈다.
스티브는 이를 악물고 방패로 제어를 잃고 휘청거리는 트럭을 있는 힘껏 밀어내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인큐베이터가 더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큰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렸다. 그 안에 채워져 있던 형광 녹색의 액체가 함께 쏟아져 스티브와 트럭을 덮쳤다.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와 함께 약품이 닿는 곳마다 불투명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닥을 녹였다. 녹색 약품에 닿은 트럭조차도 불길에 처넣어진 듯 녹아내렸다. 스티브는 정면으로 그 약품을 뒤집어써 연기 탓에 보이지조차 않았다.


“스티브!”







*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어떤 것부터 듣고 싶어요?”


브루스 배너는 피곤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배너는 홀로그램의 푸른 색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아주 침착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낯선 대화에 잔뜩 경계하고 있는 버키는 그의 안에서 번뜩이며 일어났다가 간신히 잠재워지는 분노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배너의 분노에 버키는 금세 더욱더 불안해졌다. 쏟아진 약품에 맞은 스티브는 유니폼이 녹았을 뿐 겉으로는 상처가 없었는데도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어벤져스 훈련소로 싣고 돌아와 검사가 이어지는 긴 시간동안 버키는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나쁜 소식부터.”


버키가 나직하게 말하자 배너가 난폭하게 웃음 지었다.


“캡틴이 뒤집어쓴 약품에 대해서 말인데, 내가 알고 있는 연구에서 파생된 게 맞아요. 내 쪽으로 급하게 연락이 올 만 했었죠.”


간접적으로 헐크를 만들어낸 실패한 슈퍼 혈청 연구라는 걸 언급한 배너였지만, 버키는 알아듣지 못하고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왜 나쁜 소식인지 머리를 굴렸다.


“그게 나쁜 소식인가요?”


주저하는 버키의 목소리에 배너는 그제야 조금 화를 풀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기 힘든 법이었다.


“미안해요, 내가 자의식 과잉이라. 음, 더 쉽게 이야기하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을 알고 있습니까?”


버키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비슷한 일이 스티브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한 것처럼 스티브의 몸속에서도 전혀 다른 누군가가 세포를 변형하며 생겨나고 있는 거죠. 제 친구처럼 날뛰는 녀석일지 아니면 더 얌전할지는 모르지만.”
“지킬 박사는 원래 이중적인 사람이었잖아요. 스티브에게 그만한 악은 없어요.”


버키가 단호하게 말하자 배너가 비웃듯이 크게 웃었다.


“그럼 내게 헐크가 될 만큼의 분노가 원래부터 있다고 생각해요?”
“…….”
“압니다, 캡틴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바르고, 바르게 살려고 하죠. 그렇지만 인간인 이상 그 마음속에 악은 분명히 존재하고, 악이 단 한 방울이라도 존재하는 이상 그것이 쉼 없이 부풀어 올라 원래의 자신을 밀어내고 또 다른 자신으로서 몸을 지배할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소위 슈퍼 혈청 연구란 그런 거죠. 한 가지만이 너무 비대해져서, 그것이 하나의 인격이 되어 다른 것을 모두 잃고 마는 것.”


버키의 머릿속에 언뜻 무서운 광경이 떠올랐다. 비슷한 이야기를 누군가 했었다. 기억은 흐리고 단순한 사진처럼 한순간의 광경만을 보여주었다. 지옥의 불길처럼 아래에서 솟구치는 붉은 화염, 반대편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가죽이 벗겨진 붉은 얼굴. “인간성을 잃는 걸 두려워하지 마, 캡틴.” 버키는 한순간 그 이미지에 매몰되어 저도 모르게 홱 옆에 있는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병실의 침대에 누운 스티브는 약간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누워 있었다. 버키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또 안정되지 않은 연구라서, 다른 사람이라면 비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렸을 텐데……. 캡틴이라서 버티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캡틴이기 때문에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왜 불행이죠?”
“그가 가장 강한 군인이기 때문이죠. 적이 된다면 상대하기 가장 힘들 테니까.”


‘적’. 버키는 주의 깊게 배너의 단어 선택을 귀담아 들으며 물었다.


“좋은 소식은?”
“스티브가 곧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버키가 길게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 순서로 들으니까 별로 좋은 소식 같지 않네요. ‘하이드’로 깨어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죠. 그렇게 깨어난다면 가능한 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가둬놓는 게 좋을 거예요. 어떻게든 그 안에서 처리해야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민간인을 공격하게 되면…… 날 보면 알 테죠. 돌이킬 수 없습니다.”


푸른 화면의 배너는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

뉴스나 신문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떠들어대는 헐크는, 괴물이고 존재해서는 안 될 끔찍한 실험의 피조물이었다. 닥터 브루스 배너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게 있었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도 그 사람을 헐크에 달려있는 부속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버키는 어벤져스 훈련소에 와서야 브루스 배너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조금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닻을 내린 배처럼 안간힘을 쓰며 그 자리에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 어느 신문에서도 그런 브루스 배너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오로지 헐크의 이름과 행적이 전시되어 브루스 배너를 내리누를 뿐이었다.
버키는 그런 식으로 캡틴 아메리카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생각해보곤 불쾌와 분노로 어금니를 꽉 물었다. 좋은 의미로도 캡틴 아메리카는 이미 지나치게 유명했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나쁜 의미가 덧붙여진다면 헐크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주변 모두가 그를 물어뜯고 상상해온 영웅이 아니라며 끌어내려 진흙탕에 밀어 넣겠지. 스티브는 거기에 굴하지 않겠지만 상당히 힘들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남들의 말이 아닌 자신의 행동에 상처를 받고 자책하게 될 것이다. 헐크가 한 일을 되돌아보는 배너처럼. 그 모습을 상상한 버키가 몸서리쳤다.
배너는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의 얼굴엔 이제 침착한 분노보다는 다른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후회.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남들이 받아들이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에 분노는 어울리는 감정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버키가 낮게 대답했다. 배너가 위로하듯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하이드가 나왔다고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을 끌고 있으면 스티브 로저스로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완전히 고착해버릴 정도로 유전자 변이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약품으로만 흡수되었으니까.”


버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너는 연구소장과 얘기를 해보겠다며 영상을 껐다. 배너의 피로한 얼굴과 실험실을 비추던 홀로그램 대신, 병실의 베이지색 벽이 보였다.
버키는 고개를 돌려 미동 없이 누워 있는 스티브를 보며 배너가 베풀어주는 약간의 호의를 생각했다. 배너는 이미 두어 번 정도 버키와 통화하며 가감 없이 스티브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사실 아무런 이득이 없는 행위였다. 약품의 연구와 스티브 로저스의 상태에 관해서 알기 위해선 연구소장과만 연락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배너는 당연한 일을 한다는 것처럼 따로 시간을 내서 버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버키는 생각하다가 머리가 지끈거려 한 손을 이마에 대고 찡그렸다. 대가 없는 호의는 낯설고 불안했다. 게다가 버키는 스티브를 사이에 둔 대화가 아닌 다이렉트로 자신에게 향하는 대화가 어색했다.
어색하고 불안한 와중에도 버키는 배너의 모습과 목소리가 사라진 후에야 자신이 말에 목말랐고, 대화에 굶주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달간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아도 불편하다거나 외롭다고 생각하거나 한 적이 없었다. 스티브와 함께하고 나서, 보통의 인간처럼 욕구가 자라나 버렸다. 하지만 대화하고 싶은 상대는 아무 말이 없다. 가위로 싹둑 잘라낸 듯 현실과 유리된 공간에서는 링거액이 떨어지는 소리와 스티브의 몸을 체크하는 기계의 구동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반복될 뿐이었다. 두려움에 온 몸이 움츠려들었다. 버키는 두 손으로 자신의 팔을 교차해 잡아 웅크린 채 한참을 떨다가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티브…….”


마치 그 부름을 들은 것처럼 이불 위에서 스티브의 손가락이 작게 움찔거렸다. 버키가 간신히 뻣뻣한 고개를 들어 스티브의 얼굴을 들여다 본 순간, 스티브의 속눈썹이 움찔거리며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버키가 황급히 침대에 바짝 붙었다.


“깼어?”


너스 콜.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단어에 버키가 허둥지둥 스티브의 손 옆에 놓인 너스 콜을 눌렀다. 너스 콜을 누르는 기쁨과 안도로 떨리는 손을 스티브가 더듬거리며 자신의 손으로 덮으며 꽉 잡았다.


“괜찮아. 병실이야. 아무 일 없어.”


버키는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스티브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스티브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무리 하지 마, 스……”


스티브의 얼굴을 본 버키는 강렬한 위화감에 혼란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천천히 벌렸다. 얼굴은 몰라 볼 수가 없는 스티브 얼굴 그대로였지만, 그 위에 떠오르는 표정은 전혀 달랐다. 스티브가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비열하고 잔인한 표정. 맑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는 불길처럼 붉게 물들어 번들거렸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버키가 입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하이드>…….”















디마온에 나오려던 원고인데 시빌워 이후로 설정이 많이 바뀌어서 그냥 빨리 공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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