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이름으로


12. 은백의 숲 (下)


written by. 은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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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오의 시선이 츠키시마의 어두운 얼굴에 잠시 머무르다 떨어졌다. 히나타가 사라진 이후 그의 태도가 미묘히 달라졌다. 언젠가 사라진 그 애를 걱정하느냐 물었지만 이렇다 할 답도 주지 않았다. 그 당시를 회상하던 쿠로오가 제 입술에서 장죽을 떼며 물었다. 

“내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말해. 물어볼 것이 있어 부른 거잖아?” 

후. 쿠로오가 내뱉은 연기가 그들 사이를 가르고 피어올랐다. 맞는 말이다. 태연한 얼굴로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쿠로오의 얼굴 위로 츠키시마의 눈길이 닿았다. 

“아시겠지요. 그 ‘은백의 숲’에 나타난 사람이요.” 

“‘은백의 주인’ 말이야?” 

“네. 헌데… 이번 은백의 주인은 대체 무슨 능력을 갖고 있기에 선대의 주인처럼 모습을 보이길 거부하는 걸까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츠키시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잊고 있었던 두통이 인 탓이다. 숨을 한 번 고른 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사실 이것이 그가 쿠로오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그 은백의 주인에 대해 묻기 위해 날 부른 것은 아닌 모양이야. 그래, 그럼 뭐지? 은백의 숲에 나타난 인간이 더 있었던가? 히나타와 스가와라 말고도?” 

쿠로오가 기댔던 몸을 앞으로 바짝 당기며 물었다. 그도 동부의 관리인이니 일전에 긴급 회의에서 츠키시마 케이가 질책을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 사단이 나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가, 하며 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속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었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부러 이전의 츠키시마와 현재의 츠키시마를 비교한다. 

“…이렇게나 달라졌는데, 제가 알고 있었던 정의가 맞지 않는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서두를 잘라낸 언어가 흔들린다. 그걸 아는 지 모르는 지, 유리알 너머로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장죽의 끝을 응시했다. 그러다 매끈한 대나무 대를 타고 올라가 저를 보고 있는 쿠로오의 눈을 보며 그가 줄 대답을 기다렸다. 펴 놓은 서책의 끄트머리를 매만지던 손 끝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긴장하다니, 그 북부의 관리인이? 진지한 얼굴의 츠키시마 앞에서 대놓고 폭소할 수 없는 노릇이라 큼, 하고 연신 목을 가다듬는다. 오래지 않아 장죽을 내려 놓은 그가 바로 옆에 놓아둔 사기그릇 안에 탁탁 털어 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알고 있는 지식은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전부’다. 시간은 변하고 정보들은 달라지는데 매번 바뀌는 지식이 영원할 거라 생각해?” 

“지식은 그렇게 금방 변하지 않습니다! 정의와 지식은 오랜 세월을.” 

말을 마저 이어가려는 츠키시마를 쿠로오가 손을 들어 막았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어찌 보면 웃는 듯했고, 조롱을 닮아 있었다. 

“네가 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선계에서 가장 풍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데 어찌 단언하지? 츠키시마 케이,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 

“이래서야,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북부가 선계에서 고립되어 있대도, 알 건 알아야 하지 않겠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털어낸 장죽을 들고 일어섰다.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북부의 관리인.” 

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도 없었다. 대리석에 딱딱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음 뒤로 문이 열린다. 말없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츠키시마는 어쩐지 쿠로오가 화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기억 속에도 늘 웃는 낯이던 그가 화를 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만큼 그 자신이 오만했던 것일까.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고심하던 그의 귓가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잠시간의 상념에서 벗어난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도 복잡했던가. 

지식의 뒤틀림. 기실 쿠로오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다. 사내는 제 눈 앞에 펼쳐진 서책을 바라보았다. 까만 활자로 유려히 써 내려간 과거의 기록들. 그가 모를 선대의 관리인부터, 현재 그에게로 전승된 기억과 정보들. 쿠로오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을 천천히 되짚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지식은 변한다. 세상 만물의 지식을 소유한다 해서 모두 정답이 아니란 것을. 돌연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인정한다. 서책을 덮으며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숲이 잡힌다. 이미 변화는 일어났는데, 부정한 자신이 오만했다. 그가 써 내려갔던 기록은 달라졌고 세계가, 은백의 숲이 그들을 인정했는데 저는 지나간 기억들을 믿으며 그럴 리 없다 생각했었다. 멍청하게도. 

자신을 까 내리는 짓만큼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츠키시마의 세상은 변했고 관리인으로서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무표정한 시선은 여전히 숲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지난번에 만났던 늑대를 떠올린다. 곧이어 그의 곁에 있을 주홍의 소년을 허공에 그렸다. 쿵, 쿵 뛰어 대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 애를, 그 소년을 만나야 했다. 

 

꽤 쌓인 눈길 위에 발이 푹푹 파인다. 몇 날 며칠을 돌아보아도 회색 빛 털 한 가닥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사내는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나무 위에 쌓인 눈가지들이 풍성했다. 제 눈 앞에 펼쳐진 푸른 결계로 둘러싼 백색 세상을 보며 히나타를 생각하고, 은백의 주인을 떠올렸다. 

‘대체 은백의 주인이 가진 능력은 뭐지?’ 

아주 오래 전 존재했던, 마지막 주인이 가진 능력은 아무도 모른다. 은백의 주인이 마지막으로 활동했을 당시 있었던 선대의 관리인조차 알지 못했던 이능. 왜 그는 관리인에게, 타인에게 제 능력을 숨겼던 것일까. 선대의 관리인이 묻지 못했기에 현대의 관리인인 츠키시마에게 내려오지 못했던 정보. 

어쨌거나 알 방법은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며, 중요한 것은 새로 나타난 은백의 주인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히나타’다. 꼭 찾아내서 해야할 말이 있었다. 묻고 싶은 것도 있었고. 

그리 생각할 무렵 발 소리가 들렸다. 츠키시마의 고개가 홱 하니 돌아갔다. 그가 바라고 기다려왔던 은빛 늑대와의 만남.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살을 에일 것 같던 눈폭풍도 없었다. 수인의 모습이었다 이내 인간의 모습으로 화한 늑대가 물었다. 일전에 사용했던 전음이 아닌 단정한 목소리였다. 

“왜 계속 찾아오십니까?” 

“그 사람을, 아니… 히나타와 함께 있다면 만나게 해주시겠습니까?” 

“…….” 

“그 사람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 그럽니다.” 

그의 심중을 가늠하듯 스가와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군요. 가볍게 수긍한 그가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간다. 새하얀 백의를 입은 스가와라에게선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백색 숲 사이로 스가와라의 그림자가 스며든다. 그 모습을 보며 망연히 생각했다. 

‘거절인가.’ 

돌연 스가와라가 다시 츠키시마를 돌아보았다. 무감한 시선이 마주친다. 의아하게 생각할 틈도 없이 스가와라가 입을 열었다. 

“가죠.” 

“네, 가겠습니다!” 

늑대가 말을 취소할까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두껍게 신은 장화 안으로 눈이 스며 들었지만 느낄 새도 없었다. 그가 허락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은백의 숲, 은회색 늑대, 그리고 히나타. 이 셋 사이에 얽힌 진실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히나타 쇼요, 은백의 숲, 은회색 늑대. 

그렇게 사라진 히나타는 멀쩡히 살아서 은백의 숲 속에 자신만의 성을 꾸려 나갔다. 그토록 붉게 빛나던 적안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시체처럼 창백했던 피부에서 벗어나 생기 있는 피부, 발간 입술, 노을빛 머리카락은 극히 지상세계에 거주하는 인간의 모습과 흡사해 그가 ‘이세의 반요’라는 것을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또한 히나타가 자각하면서 누이에게 전음을 날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세의 히나타 가는, 히나타에게 있어 가문의 이름으로만 남았다. 이세에 있을 히나타의 누이는 히나타와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다. 

흠, 흠. 히나타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전음을 날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누이에게 처음으로 보내는 연락이었다. 그 날, 나츠가 자신에게 말했던 그 애절하고 안타까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누이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누이.” 

“누구냐? 먼저 밝혀라.” 

전음이 잘 갔는지 금방 답이 들려왔다. 나츠를 ‘누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임에도 나츠는 하나뿐인 오라비가 전음을 날릴 수 있게 된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던지라, 감히 히나타 가의 수장을 가벼이 말하는 상대에게 날선 목소리로 정체를 밝히라 요구해왔다. 한 가문의, 한 나라의 최상위에 군림해 있는 자의 당연한 태도였다. 

“나츠.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내가 너의 오라비인 것을.” 

“오라버니? 어찌하여 전음을…….” 

당혹스러운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히나타는 쿡쿡 웃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내어보는 웃음소리다. 바로 옆에서 나츠가 있는 듯, 오라비임을 재차 확인하려는 목소리는 가까이 들려왔다. 어찌 된 일이냐 물어오는 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어머니는 여전하신지, 아버지는 장정하신지……. 하지만 그가 누이에게 해줄 말은 하나였다. 

“나츠, 부탁이 있어.” 

오랜 고민이었다. 자각한 이후로 이세의 인간들처럼 피를 탐할 수 없게 된 몸이, 과연 히나타 가의 이름을 받을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은 ‘아니다’였다.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누이에게는 달갑지 않을 부탁임을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나츠에게 말해야만 했다. 누이와 자신에게 득이 되면 되었지 절대 해가 되지 않을 부탁을. 

“어떤 부탁을 하려고…….” 

나츠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어렵게 꺼내는 히나타의 마음을 안 것처럼. 

“히나타 가의 수장, 그러니까… 너의 이름으로 ‘히나타 쇼요’를 가문에서 지워줘.” 

“오라버니!” 

경악에 가까운 외침을 뱉으며 히나타를 부른 나츠가 신음을 내뱉었다. 잠시 말을 아낀 나츠가 만남을 청했다. 만나자는 말을 예상하지 못한 히나타는 입을 다물었다. 

“만날 수 없는 모양이야. 그렇지, 오라버니? 이상하다 생각했어. 대체 나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뭐야? 위치 추적을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오라버닌 지금 내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어. 가령… 선계나, 천상계. 혹은 은백의 숲.” 

나츠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지금 히나타는 선계에서 자의로 나와 은백의 숲 깊숙이 들어와 생활하고 있었다. 자각하기 전에는 제 운명대로 자연스럽게 주어진 생을 살 것이라 생각했었다. 츠키시마의 곁에서 애정을 바라고, 그 애정이 제 생명을 갉아먹는대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각오했다. 예상했음에도 드러난 진실은 생각 외로 히나타를 상처 입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리라 했던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다. 

은백의 숲. 

제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며 히나타는 웃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얻은 댓가가 고귀하고 영광된 자리라니,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 히나타는 제 손바닥 위에 둥둥 떠 있는 푸른 구체를 응시했다. 누이의 말대로 자신은 은백의 숲에 있었다. 이세의 인간이라면 머물 수 없는 공간. 히나타는 손 위의 푸른 빛을 허공에 쏘아 올렸다. 

“맞아. 나는 지금 은백의 숲에 있어. 나츠, 너와 나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거야. 나는 이 곳에서 내 운명을 찾았으니까. 내가 가진 힘은 너에게 독이니 그리 말하는 거야.” 

그가 쏘아 올린 푸른 빛이 넓게 퍼지며 웅웅거렸다. 자신이 만들어 낸 푸른 막을 보며 히나타는 곧 다시 들려올 나츠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오라버니, 더 이상 뱀파이어가 아니게 됐구나.” 

맞지? 확신을 담아 물어오는 나츠에게 침묵으로 답했다. 자각하기 전 과거의 그라면 상상도 못했을 능력은 이세의 인간에게 독이었으니 히나타의 말대로 히나타와 나츠는 아예 반대편에 서 있는 셈이다. 정확한 것은 없었으나 히나타는 은연중에 눈치챘다. 자신을 향한 명칭과 언어, 그리고 피 속에 존재하는 조각난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와 불완전했던 히나타의 존재성을 완성했으니. 하지만 히나타 쇼요란 인간의 몸 속에 들어있는 붉은 피는 확실히 뱀파이어의 것이고, 잘게 부서졌던 기억에 얽혀 있는 순수성은 그가 혼혈이 아님을 증명함과 동시에 그가 더 이상 이세의 인간으로 살 수 없음을 말해 왔다. 이 복잡한 얘기를 어찌 얘기해 줄 수 있을까. 히나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말해 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어.” 

“…….” 

오라비의 거짓을 눈치챘는지, 아닌지 그는 모른다. 상냥한 누이는 “알겠다”며 수긍했으므로 진실 위에 거짓이 한 겹 덮어졌을 뿐이다. 이윽고 정적이 찾아든 세상에 서로의 숨소리가 오르골처럼 울렸다. 한참이나……. 

다정하고 온건한 침묵을 먼저 깬 나츠가 선언하듯 말했다. 

“‘히나타 쇼요’의 존재는 ‘히나타 가’에서 지워질 것이나 ‘히나타 쇼요’의 이름만큼은 가문에 길이 남을 것이다. 허니, 언젠가 그대가 찾아와 무엇인가를 바란다면 나 히나타 나츠가 가문의 이름을, 수장의 이름을 걸고 모든 것을 이뤄줄 것이다. 이 언약은 ‘히나타 나츠’의 생 안에서 유효하다.” 

하나 뿐인 오라비를 위해 히나타 가의 수장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언. 모든 것을 지워 달라는 히나타 쇼요의 요구를 반만 수용하겠다 하는 누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히나타 가의 수장이여.” 

이로써 히나타 쇼요의 존재는 히나타 가에서 완전히 지워졌으나 그가 존재했음을 증명하기 위한 이름이 남아서 히나타 가의 계보에 새로이 적히리라. 

나츠의 언약이 발동된 듯 후— 내뱉는 첫 숨과 함께 제 몸을 감싸던 마지막 족쇄가 철컹, 하고 풀렸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세의 정점에 서 있는 가문, ‘히나타 가’. 한 때 그 가문의 장자였던 ‘히나타 쇼요’는, 동족들에게 배척 받았던 이세의 반요이며 괴물이라 불렸던 소년은 사라졌다. 

잠시 막혔던 호흡을 길게 내쉬자 작은 몸을 애탄 것처럼 빙빙 맴돌던 기운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히나타는 허공에 산란하는 오색의 빛깔을 지닌 빛들을 눈을 비비며 끝까지 바라보았다. 찬란한 빛의 향연이었다. 

사랑스럽고 고결한 빛들이 히나타의 세상에 반짝이며 퍼진다. 부드럽게 내려앉는 조각들이 마치 빛을 품은 함박눈처럼 보였다. 소년의 세상은 이토록이나 완벽하고, 순결하고, 아름답다. 히나타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사선을 그리듯 움직였다. 이 이상의 찬연함은 없을 것만 같았다. 

“…다음에도 연락할 수 있지, 오라버니?” 

꿈길을 거닐던 정신이 너머에 들려오는 누이의 목소리에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다. 다음이라. 이제 자신과 나츠를 묶을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다정한 누이는 저를 오라비라 부르며 다음을 기약했다. 나츠……. 사랑하는 누이의 이름을 입 안에 굴리던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응.” 

허공에, 나츠의 귓가에 히나타의 밝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리는 끊겨졌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전승받은 기억에 새겨진 의무들을 차례대로 떠올리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제 것이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의무가 히나타를 완전하게 만들었음을 안다. 세계, 은백의 숲, 그리고 제게 주어진 이능.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가 히나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오늘도 그는 몸을 움직였다. 

“좋아, 결계는 끝났고 또 뭐해야 하지……. 호수에 가서 인간세상을 봐야 한다고 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호수로 가기 위해 겉옷을 제 어깨에 걸쳤다. 스가와라가 구해다 준 옷은 제법 따뜻했다. 털옷을 여미고 의식을 흩뿌리며 스가와라의 행방을 뒤쫓았다. 숲의 너머에서 기척이 들려 잠시 정찰을 나간다던 스가와라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리 생각할 무렵 매섭게 몰아치는 눈폭풍을 보았다. 전례가 없는 기상변화에 히나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쇼요.” 

스가와라의 전음이었다. 

“쇼요, 숲에 방문자가 찾아 왔어.” 

방문자? 히나타의 고개가 살풋 기울었다. 이 순도 높은 정화의 기운을 버텨낼 인간은 없다. 더군다나 이 은백의 숲에 찾아올 인간 또한 없는데. 

“누군데?” 

“…….” 

답지 않게 말을 아끼는 스가와라를 채근했다. 히나타의 한 쪽 눈썹이 슬쩍 올라간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입을 다물었다. 겨울의 빙설을 닮은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어쩔 때는 다정했다가, 어쩔 때는 차가웠던 그 눈동자가. 그가 마지막으로 이 새하얀 세상을 보호하기 전 숲이 유일하게 허락한 인간이. 그래, 츠키시마 케이라면 가능한 얘기다. 그를 떠올리자 숲 전체가 공명하듯 몸을 떨었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설익은 슬픔이 찾아 들면서 백설 같은 얼굴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미소를 지워낸 히나타가 거절의 언어를 입에 담았다. 

“보지 않을래.” 

“…너의 뜻이 그러하다면.” 

전음이 끊기고 스가와라와 같이 있을 사내에게서 억지로 의식을 털어낸 히나타가 푸른 안개로 가득한 호수가 있을 방향을 보며 걸었다. 발끝에, 손끝에 시들기 시작했던 것들이 생명력을 얻고 돋아나기 시작했다. 깊은 곳으로 향해갈수록 흐릿한 인영이 시선 끝에 채였다. 결 좋은 회색 털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쇼요.” 

히나타의 인기척을 느낀 그가 온 몸에 가득 묻은 눈을 털어내며 곧장 인간의 모습으로 화해 히나타의 곁으로 다가왔다. 호수가 있는 정원의 입구에서 마주한 둘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히나타보다 한두 뼘은 큰 스가와라가 턱을 매만지며 말을 골랐다. 

“언젠간 만나야 해. 쇼요가 이 숲의 주인이고, 그가 북부의 관리인인 이상.” 

“…….” 

“그 사람에게서 받아야 할 것이 있잖아.”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지 않나. 말을 끝낸 스가와라가 몸을 물렸다. 히나타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자의 배려였다. 드러난 길 위를 걸으며 스가와라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코 끝에 청량한 냄새가 스치고 안개에 가려진 금홍의 눈동자가 고요히 호수 너머를 응시했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 없다. 히나타가 손을 뻗어 물을 휘저었다. 이윽고 보여지는 인간들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으나 그 위로 흐릿하게 떠오르는 한 인형(人形)에 인상을 찌푸렸다. 또 다시, 츠키시마 케이로 흘러가는 생각이었다. 

스가와라는 제 앞에서 깨끗한 호수 안에 손을 넣은 채 생각에 잠긴 소년의 등을 바라보았다. 

히나타 쇼요가 은백의 숲을 지배하는 주인이듯이, 스가와라는 주인의 곁에서 보필하는 영물이다. 처음 만났을 당시 스가와라가 히나타에게서 느꼈던 강렬한 감각은 잠들어 있던 신수의 본능이었다. 히나타가 제 이름을 부름으로써 조각난 기억에 걸린 제약이 해금되면서 ‘은백의 주인’을 은연중에 알아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수십번의 환생과 수 천 번의 강을 건너서 찾아낸 진짜 주인. 이 아름다운 성을, 이 작은 세계를, 가장 고결한 힘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주인에게 츠키시마 케이와 만나라 했다. 

그도 안다. 히나타의 신수이기에 주인의 감정도 느끼고 있으니 히나타가 츠키시마를 향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나타의 역린이나 다름없는 ‘츠키시마 케이’란 이름을 히나타의 앞에 떠밀었다. 만나, 그리고 해결하라고.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선명하게 느껴지는 동요를 보며 입술을 사려 물었다.  

 

한 번 뿐일거라 생각했다. 자신을 찾는 건. 스가와라의 전음과 짧은 물안개가 선사하는 환상 속에서 츠키시마를 보았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그를 찾듯 두꺼운 모피를 겹겹이 입은 사내가 눈길 위를 걷고 있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작은 중얼거림 속에는 꼭 ‘히나타’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처음에는 북부의 관리인으로서 은백의 주인과 접선하기 위해 숲 속에 발을 들인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도 못한 제 이름을 들었을 때 느꼈던 기분은 말도 못하게 복잡했다.  

서늘한 눈의 향을 가득 묻히며 돌아온 스가와라의 숨소리가 히나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들어 아스라하게 퍼지는 물안개를 흩뿌린 히나타가 스가와라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무감했다. 

“다음에 만날 때, 그 때는… 북부의 관리인을 데려와도 돼.” 

그가 나를, 이 은백의 주인을 만나기 원한다면 빨리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라며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깊은 고민 끝에, 히나타가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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