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있는 자가 사랑을 얻는다는 말은 살면서 한 번쯤 듣게 된다. 나 또한 그 말을 들었었고 언젠간 나도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용기는 생각보다 힘든 것이고 사랑이라는 어려운 공식에 대입하면 난제가 되어버린다. 또한 내가 용기 있게 고백해도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면 미제가 되어버린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아니, 이 문제를 난제라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님 미제로 봐야 하는 걸까.













좋아한다고 말해줘

by. NANA












어렵게 꺼낸 나의 속마음을 박지훈에게 전했다. 내 마음이 박지훈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좋아해' 이 석자를 정확하게 말했다. 제대로 말했으니 이제는 이해하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박지훈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눈치가 없었다. 




"뭐?"


"좋아한다고, 너를."




서툰 나의 고백이 끝나자 박지훈은 그냥 미소만 지었다. 그런 박지훈의 행동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알겠다는 긍정의 표시인 건가? 아니면 비웃는 건가? 차라리 말이라도 하면 답답하지 않을 텐데 박지훈은 그저 웃기만 했다. 박지훈의 미소에, 알 수 없는 그의 뜻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또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빨리 들어오라는 엄마의 전화가 왔다. 토마토가 된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박지훈이 밉기도 했고 얼른 이 상황을 탈출하고 싶어 말을 더듬으며 박지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ㄴ...나 가볼께, 조심히 가."


"진영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이어지는 박지훈의 말, 나도 좋아해. 박지훈에게서 나온 '좋아해' 그 세 단어가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놀라움에 고개를 돌렸고 박지훈에게 내 마음을 더 전달하려는 순간, 현실을 맛봤다.




"친구로서, 우정으로 좋아해, 나도."




'친구', '우정' 이라는 단어가 내 귀를 때려 박는다. 그리고 '나도' 라는 이 단어,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나는 떨리는 동공으로 박지훈을 쳐다봤다. 아 정말 얘는 진심이구나, 내가 우정 고백했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너무나 순진해 보이는 박지훈의 눈이, 그의 표정이 날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박지훈은 정말 순수하게 잔인하다. 그런 그에게 다시 내 마음을 고백하기엔 더 이상은 내가 못 버틸 것 같아서 박지훈의 잔인한 고백에 수긍했다.            



그래, 너가 맞아. 친구로서 너의 여자친구를 질투한 거야. 













"박지훈, 이선아랑 헤어졌대."



그때 이후, 나는 박지훈을 보지 않았고, 연락 또한 끊었다. 박지훈과의 왕래가 끊어진 지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반 애들의 얘기를 통해 결별 소식을 들었다. 몇몇 애들은 결국엔 또 재결합할 거라며 말했지만 이번엔 진짜라며 반박했다.




"박지훈이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대, 이선아가 그렇게 매달렸는데도."




박지훈이 먼저? 별일이네. 나는 남 얘기인 것처럼 듣고 생각했다. 박지훈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박지훈을 남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왜 헤어진 거지, 사이가 별로였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그 소식을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보다 소식이 빠른 이대휘에게 물어도 자기도 모른다고 말했다. 혹시 나 때문에 헤어졌나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너무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서 빠르게 접었다.


청소당번이라서 학교를 늦게 마쳤다. 애들은 방과 후 활동 중이거나 다 하교했는지 거리가 조용했다. 해도 막 지는 시간대라서, 조용한 거리와 노을은 나의 마음에 들기 쉬웠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하교하는 거라 기분 좋게 집에 가고 있었는데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뒤돌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지금 집가는 거야?"




오랜만에 보는 박지훈의 물음이, 그의 의도가 보여서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내가 예상대로 박지훈은 같이 하교하자고 말했고 나는 거기에 응했다. 박지훈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우리 둘의 사이에 벽이 생겼고 예상외로 그 벽은 단단했기 때문에 같이 가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다다르자 박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선아랑 헤어졌어."




알고 있었지만 그냥 모르는 척했다, 아는 척하면 더 어색한 상황이 될까 봐. 덤덤한 나의 반응에 박지훈은 당황스러웠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집도 다 왔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 보여서 들어갈게 라고 말하려는 순간, 박지훈이 내 손목을 잡았다. 내가 박지훈을 좋아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마음의 준비도 없이 심쿵을 하는 제스처를 잘 해서 좋아했다. 박지훈한테 느낀 설렘, 다시는 빠지지 않겠노라 하면서 연락도 끊은 건데. 나는 그걸 알면서도 왜 설레는 건데? 박지훈이 내 손목을 붙잡자 조용했던 마음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손목과 박지훈을 번갈아봤다. 박지훈은 내 손목을 잡은 채 말을 하려는 순간, 저쪽에서 민현이 형이 불렀다.




"진영아!"




해맑게 웃으며 오는 민현이 형이 내가 박지훈에게 또다시 빠질뻔한 걸 구해줘서 고마웠다. 서둘러 나는 박지훈에게서 손목을 뺐고 이 상황을 모르는 황민현은 웃으며 다가왔다. 박지훈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내 가보겠다며 나와 민현이 형에게 인사를 하고 갔다. 박지훈이 나에게 말하려고 했던 말이 뭘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민현이 형이 물었다. 아까 그 친구는 누구야? 나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친구요....친구."




어두워지는 나의 낯빛에 황민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진영아, 내일 시간 괜찮으면 영화 보러 갈래?"




갑자기 뜬금없는 데이트 신청에 나는 살짝 눈이 커진 채 민현이 형을 바라보았다. 나의 반응에 황민현은 고삼이라서 좀 그런가 흐하하 하고 웃었다. 힘들어하는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민현이 형의 배려가 보여서 나는 살짝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민현은 내일 야자 끝나면 전화하라고 말한 후 내일 보자며 집에 들어갔다. 나는 황민현이 들어간 현관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황민현은 바다 같은 사람이라고.



몇 시간 공부를 하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웠다. 이때가 생각이 제일 많아진다. 오늘 박지훈의 결별 소식, 오랜만에 만난 박지훈, 그리고 오랜만에 느낀 설렘… 온통 머릿속이 박지훈으로만 가득 찬다. 그리고 다시 생각나는 아까 박지훈의 모습, 황민현 때문에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말하려던 모습이 내 눈을 아른거려 강제로 그의 생각을 지웠다.













"어...? 박지훈?"



집 앞에 나오자 박지훈이 있었다. 설마 어제 때문에 나랑 같이 등교하려고 기다린 건가. 나는 한껏 박지훈을 경계했다. 역시나 나의 예상대로 박지훈은 어제 얘기 때문에 날 기다렸다고 말했다. 다시 박지훈이 입을 열려고 한순간 어제처럼 민현이 형이 나를 크게 불렀다.




"진영아!"




자꾸 어제부터 방해하는 황민현 때문에 박지훈은 짜증이 났는지 탐탁지 않는 표정을 지은 채 민현이 형에게 인사를 했다. 내가 이상하게 느낀 거일 수도 있지만 민현이 형도 박지훈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했지만 뭐, 내가 착각한 거겠지 하며 넘어갔다. 역까지 도착하는 내내 불편해 죽는 줄 알았다. 겨우 역에 도착해 황민현에게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하자 민현이 형은 강조하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진영아 오늘 영화 보는 거 잊지 말고, 야자 끝나고 전화해."




민현이 형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잊을뻔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한 뒤 다시 학교로 향했다. 역시나 등교하는 내내 박지훈이랑은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반에 다다르자 나는 박지훈에게 인사를 했다.




"수업 잘들어."


"저기, 진영아."




머뭇거리는 박지훈의 목소리에 자동으로 그를 쳐다봤다. 뭔가 안절부절해 보이는 박지훈이 나에게 물었다.




"그 형이랑 친해?"




대뜸 황민현과 나의 관계에 대해 묻자 나는 눈만 껌뻑껌뻑거렸다. 박지훈도 자기가 물어본 질문이 좀 그랬는지 아차차 하며 가보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대답했다.




"응, 가족끼리도 친해서."




알겠단 말 한마디 하고 박지훈은 자기 반으로 들어갔다. 내가 잘못 느낀 걸 수도 있는데 박지훈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야자가 끝나고 나는 학교를 나오면서 민현이 형에게 전화를 했다. 수신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빠르게 받았다. 나는 장난 식으로 내 전화를 기다렸냐는 듯 물었다. 그러자 황민현은 누구보다 스윗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진영이 전화인데.'

'영화관에서 만나자, 좀있다가 봐.'




내 전화라서 기다려진다는 황민현의 말, 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마음이 찡했다. 내가 너무 박지훈한테 상처를 받아서 이러는 건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영화관은 북적거렸다. 특히 커플들이 많았다. 다들 심야 데이트를 즐기러 오는구나. 사람 구경을 하고 있을 때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조금은 늦을 것 같다는 민현의 문자에 나는 남는 의자에 앉아 상영하는 영화를 검색했다. 이곳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6~7편의 영화,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눈이 가는 장르는 공포. 딱히 공포영화를 즐기진 않았지만 요즘 따라 스트레스를 받는 일들이 많아져서 이런 자극적인 영화가 당겼다. 저기서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는 황민현이 보였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씩 웃으며 민현이 형을 맞이했다.




"미안해, 차가 좀 막혀서."

"영화 정했어?"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며 묻는 황민현, 찰나의 순간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봤다.
만약 내가 박지훈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황민현 같은 사람을 좋아했을 거야.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을 해 피식 웃었다. 나의 미소에 황민현은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에게 고른 영화를 보여줬다.




"...ㅇ..이거?"




진영아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봐, 정말 이거 볼 거야?
재차 다시 물어보는 황민현은 백 프로 지금 겁먹었다. 잘 빨개지는 귀가 유독 더 빨개지고 차분한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이것들을 총합해서 보면 안 봐도 비디오지, 황민현은 공포영화를 무서워하는 거 같다.처음 보는 민현의 모습에 조금은 들떴다. 민현이 형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때까지 황민현은 나에게 든든하고 친절한 앞집 형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던 황민현의 이미지엔 '겁' 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자꾸 이걸 볼 거냐는 황민현의 물음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물었다.




"왜요? 저는 괜찮은데...설마 형, 이거 보기 무서워요?"




정콕을 찌른 나의 물음에 민현이 형은 살짝 움찔하더니 하하 웃으며 말했다.
에이, 진영이가 무서워서 잠 못 잘 거 같아서 그러는 거지.
쓸데없는 나의 걱정에 이런 거 안 무서워한다고 말했다. 당당한 나의 모습에 황민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진영이가 보고 싶어 하니까....그래..."




해탈한 표정으로 공포영화를 예매하는 황민현이 귀여워 보였다. 귀여운 걸 보면 참을 수 없는 나는 황민현을 안으며 고맙다며 말했다. 내가 안자 살짝 굳은 황민현은 이내 웃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힐끔 쳐다봤다. 힐끔 본 황민현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