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연애 그런 게 별거인가. 남자 나이 열여덟살이면 사랑이나 연애 따위 한두번은 하기 마련이다. 언젠가 쉬는 시간에 우진과 친구들이 대휘의 자리에 모여 그들의 화려한 연애담을 늘어놓았었다. 대웅이가 사귀는 교회누나가 일주일 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는. 예중예고를 거쳐 음대 피아노를 전공해서 성가대의 반주를 맡아 하는 누나는 여리여리한 몸에 긴 머리, 늘 하얀 원피스만 입는다는 그 누나가 떠나기 전에 꼭 같이 잘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대웅이었다. 그래. 남들도 다 하는 연애, 남들도 다 겪는 실연을 자신도 한번 겪었을 뿐이다. 첫사랑이 생각보다 아프지만 대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야 하는 사이에 저 혼자만 질질 짜고 있는 건 너무 억울하고 못나보여서, 너 없이도 난 잘 산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대휘는 꿋꿋하게 버텼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대휘는 민현보다 먼저 눈을 돌렸다. 그 눈빛을 마주하다 저도 모르게 울게 될까 봐. 아니면 민현이 가장 좋아했던 모습으로 하하 웃어버릴까 봐.

 

먹는다고 먹는대도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창백한 얼굴이 까칠해지고 반짝반짝 빛나던 눈이 빛을 잃어가는 대휘가 걱정돼서 우진은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원으로 데리러 갈까 물었지만 대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도 물러서지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다그치지도 않는 우진을 보며 학원 문제집을 챙기던 대휘가 물었다.

 

“묻고 싶은 거 있어?”

 

우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마도 모든 걸 짐작하는 거겠지. 자신이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고 이유야 어떻든 지금은 거하게 차였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과묵해도 눈치가 빠른 우진이었다.

 

“그냥. 원래 내가 널 데리러 갔잖아.”

 

대휘는 우진을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원래...난 혼자 다녔어.”

 

누가 옆에 있는 건 좋은 것이다. 행복하고 사랑받는 기분도 들지만 대휘는 그런 것에 기대지 않기로 했다. 짧은 시간 민현을 만나면서 너무 민현에게 많이 기댄 것 같았다. 민현이 없다고 우진에게 기대고 싶진 않았다.

 

“대휘야...”

 

가방을 메고 방을 나서려는 대휘를 우진이 다시 붙잡았다. 응? 왜?

 

“너, 요즘 이상해. 아픈 뒤로...웃지도 않고 나한테 장난도 안치고.”

 

그랬나. 내가. 대휘는 잠시 생각했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우진과 무슨 상관인가. 대나무숲이라도 있으면 말하고 싶다. 나 아직 많이 아파요. 그러나 우진은 대휘의 대나무숲이 아니었다. 박우진. 그래 형아. 나 많이 아파. 대차게 까이고 나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했는데도 많이 아파. 됐냐? 알았으니까 속이 시원해? 근데 너한테 말했는데도 난 아직 아파...속으로 수십 번 우진에게 말했다. 나 힘들어. 나 아파. 쌤 다시 만나고 싶어. 근데 안 만나겠대. 짱 나. 형이 가서 좀 패줄래? 형 싸움 잘 한다며? 날치기범도 잡은 적 있다며? 그런데 패더라도 살살 패줘...

 

 

“우리만요?”

 

오래간만에 네 식구가 모두 모여 저녁을 먹는 주말, 아버지는 돌아오는 토요일이 우진 외할아버지의 생신이라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고 하셨다. 생각 같아서는 일본으로 가 한 일주일 온천도 하고 골프도 치고 싶었지만 우진이 고3이라 가까운 제주도로 2박3일 다녀오기로 결정했다는 거였다.

 

“휴가철이라 호텔 잡기가 힘들었어.”

“다행히 금요일에 종업식이라 1학기 학사일정도 끝났고.”

 

부부는 닮는다더니 새엄마와 아버지는 서로의 계획이 마음에 든다는 듯 마주보고 웃으셨다.

 

“대휘는요?”

 

정작 대휘는 어른들의 말에 아무 생각이 없이 깨작깨작 밥알을 세고 있는데 불만있는 사람은 우진이었다. 새엄마는 대휘를 한번 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새엄마의 허락이 있어 자신은 아버지와 사는 건데 새엄마로 하여금 변명을 하게 만들기도, 미안하게 만드는 것도 싫엇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렇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도 새엄마와 아버지는 자신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우진의 외가에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고3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면 이번엔 식사만 같이 하고 여행은 저 대학 결정된 다음에 가도 되잖아요.”

 

우진은 대휘만 혼자 두고 여행을 가는 게 싫었다. 요근래 대휘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면서도 입이 짧아 저렇게 밥알을 깨작거리고만 있는데 저런 대휘만 두고 어떻게 제주도를 간단 말인가. 부모님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대휘는 보이지도 않나 보다. 제 엄마야 대휘의 새엄마니 그렇다 치고 새아버지는 대휘의 친아빠인데 저렇게 무심해도 되나?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생신이시라는데.”

“그치? 이해해 줘서 고마워. 대휘야.”

 

그리고 무엇보다 대휘 본인이 가고 싶지 않았다. 새엄마가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는 다른 누구와 어느 곳도 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서울에 온지 두 달이 다 되가는 지금도 대휘는 그 분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왜 자신을 우진의 외할아버지에게 소개시키지 않은 걸까. 그 분들은 자신이 여기 사는 걸 알긴 아는 걸까. 결국 아버지도 대휘 자신이 뿌리내릴 수 있는 한 톨 모래알도 내줄 생각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서운하진 않다. 서운하다는 기분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민현과의 이별로 아직도 대휘는 아팠으니까. 그리고 대휘 역시 아버지와 정을 쌓기에 두달이란 시간은 아직 짧았고 두 달간 아버지의 얼굴을 본 횟수도 손에 꼽았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 때와 달라진 건 없고 나아진 건 더 없는 생활이었다.

 

불만과 걱정 가득한 얼굴로 우진이까지 세 식구가 제주로 출발하는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떠나고 혼자 남았을 때 대휘는 비로소 마음껏 멍하니 있을 수 있었다. 어린 아이도 봐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는 법이라 아무도 없는 지금 대휘는 겨우 버티고 있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밀려드는 잠에 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요 며칠 눈만 감으면 차갑게 돌아서던 민현이 떠올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눈을 뜨면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우진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대는 것도 지쳤고, 그래선 안된다고 다짐했지만 학원이 끝나면 저도 모르게 10여 분 서성이다 오는 버릇이 생겼다. 쉬고 싶다. 한 시간이라도 푹 자고 싶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어떻게 된 게 진짜 좋아했던 거면 자신에게 아프게 한 그 마지막 순간이 아닌 저를 보고 웃어주던 행복했던 순간을 더 기억해야하는데 어째 민현을 생각하면 자신에게 잘해주던 129가지의 모습보다 싸늘하게 돌아서던 마지막 모습만 떠올랐다. 그럼 우린 좋아했던 게 아닐까. 제 휴대폰에 쌓인 저를 기다리면서 먹으라고 민현이 보내주었던 자몽에이드며 딸리라떼며 온갖 음료와 디저트 기프티콘을 보면서 대휘는 밤새 울지 않으려고 뒤척이다 아침을 맞이하고 다크서클 내려와 충혈된 쾡한 눈으로 등교를 하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잠들었을까.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민현을 보며 그날은 차마 울지 못했던 대휘가 꿈 속에서는 엉엉 울다 잠에서 깬 건 갑자기 울린 휴대폰 소리 때문이었다. 저에게 전화 올 사람은 많지 않았고 저장된 번호 역시 많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더듬더듬 폰을 들었을 때 벨소리는 멈췄고 발신자는 역시 모르는 번호였다. 실망하는 것도 잠시 계속 울리는 벨소리에 대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기대와 다른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렸다.

 

- 이대휘 휴대폰 맞죠?

- 네. 그런데요...

 

귀에 익지만 언뜻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였다.

 

- 대휘야. 해순이모야.

- 아. 해순이모...아...안녕하셨어요?

 

겨우 기억해냈다. 할머니와 살 때 옆집에서 살던 해순이모였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대휘 생모의 친구여서 할머니를 늘 이모라 부르며 살갑게 지냈던 분이라 대휘 역시 그 분을 이모라고 불렀었다. 할머니집을 떠나온 지 겨우 석 달 여 만에 이렇게 해순이모의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할 줄이야. 떠나던 날, 인사하러 간 대휘를 꼬옥 안아주며 자주 전화하라고 수능 끝나면 놀러오라던 해순이모였다.

 

-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수능 끝나면 한번 내려가려고...

- ...지금 내려와야겠다. 아주머니가 많이 안 좋으셔.

- 네? 할머니가 왜요?

 

대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휘를 키우느라 쉬는 날도 없이 매일 식당에서 일하시던 할머니는 대휘 저만큼이나 마른 분으로 가끔 밤에 앓는 날이 있을지언정 제 기억으로는 크게 아픈 적 없는 분이셨다.

 

- 몰랐지? 너도?

- 이모...

 

대휘는 휴대폰을 끊고 정신없이 가방을 챙겼다. 당장 갈아입을 속옷과 옷 한 벌만 챙겨넣고 그동안 새엄마가 주신 용돈도 다 챙겼다. 처음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적응하느라 바빠, 시간이 좀 지난 후엔 고3이라서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지금은 제 슬픔에 겨워 할머니를 생각못했던 날들이 많았다. 아무리 그대로 그렇지 같이 살았던 그 때도 할머니가 많이 아프셨다는 걸 몰랐다니.

 

 

S시는 작은 지방도시인데다 휴가철이라 당장 출발하는 고속버스도 기차도 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인근 도시를 거쳐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표도 시간도 너무 걸릴 것 같았다. 이 순간 떠오른 사람은 민현이었다. 민현과 계속 만났더라면 민현은 자신을 도와 기꺼이 S시까지 동행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현에게 전화할 순 없었다. 민현은 이제 더 이상 대휘와 만날 수 없다고 차갑게 돌아섰다. 이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비록 혼인신고는 안했더라도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구서, 죽은 딸의 남편이었다. 한때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도 평상시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일도 말을 섞을 일이 없었지만 아버지에겐 알려야 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먼저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아버지는 받지 않았다. 우진의 외할아버지내외분과 새엄마, 그리고 아버지, 서류상으로나 모양새로나 완벽한 가족이 보내고 있을 행복한 시간을 또 대휘가 훼방놓기라도 한다는 듯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을 전화하고...또 전화하고....제발 아버지라도 아니 새엄마라도 전화 좀 받아주세요...절규하듯 대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폰번호를 눌렀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피아노연주가 들려왔다. 마치 대휘를 위로해주듯...이윽고 애타게 기다리던 신호음이 멈추자 대휘는 혹시라도 아버지가 끊을까 봐 빠르게 말했다.

 

- 아버지. 제발 전화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할머니가...할머니가 위독하시대요. 저도 편찮으신지 몰랐어요. 지금 바로 내려가야 하는데 버스도 기차도 다 매진이라...늦으면 할머니도 못 보면...아버지...저 할머니마저 돌아가시면 살 수 없어요. 아버지 듣고 계세요? 아버지...오시면 안돼요? 저랑 같이 가요..

- ...거기...어딘데...

- 고속터미널이요...

- ...금방 갈게. 울지 말고.

 

대휘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났나 보다. 울지 말라는 그 말에 눈물이 왈칵 터져 버렸다. 끕끕끕...소리도 못 내고 우는 대휘에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 미안해. 널 혼자 둬서...

 

마지막 말에 대휘는 뿌애앵하고 아기처럼 울어버렸다. 가방을 끌어안고 한손으론 휴대폰을 꼭 쥔 채 S시로 가는 버스 승차장에 앉아 아버지가 오길 기다리는 대휘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온다고 했으니까 아버지는 오실 거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대휘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와 주겠다는 아버지가 고마워 대휘는 울고 싶은 걸 입술을 깨문 채 참아냈다. 아버지가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 대휘가 절실하게 보고 싶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민현이었다. 민현이라면 이렇게 힘든 저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바로 할머니에게 데려다 줬을 것이다. 처음 K시까지 저를 데려다 준 것처럼.

 

“괜찮니?”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란 대휘가 뒤를 돌아봤다. 쌔앰...

 

“왜 여기에...”

 

대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민현을 올려봤다. 어떻게 민현이 여기에 있을까. 이 넓은 고터에서 민현을 만날거라곤 상상도 못한 채 벙찐 대휘의 품에서 가방을 받아들고 민현은 대휘의 손을 잡았다. 며칠 전 차갑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가자. 할머니한테.”

 

대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민현의 손을 꼭 쥐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민현 하나 뿐이었다.

 

 

가는 내내 대휘도 민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조수석에 앉아 여전히 가방을 끌어안고 울음을 참으며 덜덜 떠는 대휘와 그런 대휘의 손을 말없이 잡아주며 민현은 능숙한 솜씨로 차를 몰아 해순이모가 불러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대휘가 할머니가 입원하신 병실로 뛰어 갔을 때 병실 밖 복도에는 해순이모가 안절부절 못하며 대휘를 기다리고 있다 대휘가 나타나자 붙들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미안해. 대휘야. 니가 더 힘들 텐데.

 

할머니는 산소마스크를 낀 채 의식이 없으셨다. 고작 헤어진 지 석 달여 만에 그렇잖아도 마른 얼굴에 살이 다 빠져 피골이 상접한 할머니 얼굴을 보자마자 대휘는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눈 좀 떠 봐. 나 왔어. 대휘.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할머니를 두고 해순이모의 손에 끌려 담당의사를 만났을 때 의사는 대휘에게 청천벽력같은 말을 무감각하게 말했다.

 

오늘을 넘기기 힘드십니다. 병원에 오셨을 때 이미 늦으셨어요.

 

대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야 떠오른다. 늘 할머니가 한움큼씩 먹던 약들이. 나이가 들면 소화가 안된다고 웃던 할머니셨다. 어쩌면 할머니는 아셨던 게 아닐까. 당신의 병 때문에 대휘가 저의 장래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까 봐 할머니는 대휘를 아버지에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른 가족은 없나요? 어른이나...먼 친척이라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대휘는 다시금 아버지를 떠올렸다. 몇 시간 전부터 자신의 전화가 부재중 전화로 쌓이고 있었을 텐데 아직도 연락없는 아버지에게 대휘는 다시 전화를 했다. 지금 전화하면 아버지가 달려올까.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18년 만에 찾아온 아버지였다.

 

“전화 안 받아? 너희 아버지 해도해도 너무한다. 지선이도 그렇게 버리더니 너한테도 그런다니? 너, 밥은 제대로 얻어 먹긴 해? 여기 떠날 때보다 더 말라가는 거 알긴 안대?”

 

해순이모의 원망섞인 넋두리에도 대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껏 저를 키워준 할머니가 이지경이 되도록 몰랐다는 죄책감과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담당의의 말이 무서웠다.

 

할머니가 쓰러지던 날부터 지금까지 할머니의 곁을 지켰던 해순이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할테니 우선 집에 가 있으라고 할머니의 곁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대휘에게 해순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선생님이요.”

 

대휘의 말에 해순이모가 말없이 대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해순이모의 눈빛에 대휘가 지레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왜요...? 해순이모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마워서.”

“뭐가요?”

“이렇게 와 줘서. 그리고 널 많이 예뻐해주는 것 같아서. 간다. 이모.”

 

이뻐해주긴요, 우린 며칠 전에 헤어진 걸요. 다신 나 안만난대요. 근데 오늘은 왜 왔는지 모르겠어요...대휘는 더 이상 대꾸할 힘이 없어 나오지 않는 웃음을 애써 웃어보였다.

 

“괜찮니?”

 

비틀거리며 대휘가 병실로 돌아왔을 때 대휘 대신 할머니를 지키고 있던 민현이 대휘를 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연락하면 안 되는데...아버지한테 전화한다고 한 건데...미쳤나 봐요. 내가.”

 

대휘의 말에 대답도 않고 민현은 챙겨온 죽을 꺼내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에 세팅하더니 그런 제 모습을 서러움과 원망스러움, 그리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대휘의 손을 잡아 테이블 앞에 앉히고 손에 수저까지 쥐어주었다.

 

“아무것도 못 먹었지? 우선 먹고 있어. 의사선생님 만나고 올 테니.”

 

병실을 나서려는 민현을 지금 이 병실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휘가 다급하게 잡았다.

 

“천천히 먹어. 지난 번처럼 체하지 않게.“

 

민현이 대휘를 안심시키듯 어깨를 다독여주고 나가자 갑자기 나타난 민현에 벙쪘던 대휘는 비로소 안도감에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민현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대휘는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에게 전화한다고 수없이 번호를 눌렀지만 자신의 무의식은 민현을 더 애타게 기다렸으니까. 지금은 그저 민현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고 자신의 부름에 거절하지 않은 민현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민현이 오자 거짓말처럼 할머니의 의식이 돌아왔다.

 

 

“할머니. 나야. 대휘.”

 

그러나 할머니는 눈만 떴을 뿐 대답도 없이 대휘의 손만 꼭 쥐셨다. 어쩌면 그게 산소호흡기때문인 것 같아 대휘는 의식이 돌아왔다는 말에 바이탈싸인을 확인하러 온 의사에게 부탁해 호흡기를 잠깐이라도 떼어달라고 했다.

 

“잘 지내?”

“웅.”

“공부해야지 여기 오면 어떡해.”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지.”

 

할머니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서인지 너무 낮고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아 입가에 귀를 바짝 대고 들으며 대휘는 쥐고 있던 할머니의 말라서 앙상한 손을 얼굴에 대고 부빗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어미를 잃은 어린 강아지의 모습과도 같아 민현은 안쓰러워 동그란 머리며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K시 호텔에서 새벽에 온 문자가 떠올랐다. 휘야. 하던. 그 다정하고 따스한 부름에 민현은 잠깐 동안 오해를 하기도 했었는데. 왜 자신의 모든 기억은 기승전민현일까.

 

“왜 진작에 말 안했어?”

“우리 애기 속상하잖아.”

“할머니 아픈 것도 모르고...아버지한테 간다고 해서...미안해. 할머니...”

“할미가 미안하지. 진작 널 아버지한테 보냈어야 했는데...”

 

대휘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자꾸 눈물이 흘러 할머니의 손을 적셨다. 대휘의 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주려 애쓰던 할머니가 우는 대휘의 어깨를 다독이는 민현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황민현이라고 합니다.”

 

혹시 할머니도 해순이모처럼 민현을 이상하게 볼까 싶어 대휘가 얼른 말했다.

 

“우리 선생님.”

 

할머니는 민현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오래오래 바라봤다.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들을 확인하려는 듯.

 

“휘야. 할머니 물 좀.”

“물 마셔도 돼?”

 

대휘가 할머니의 손을 놓고 병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려 할 때였다.

 

“응. 그 물 말고 따뜻한 물.”

 

평소와 달리 이것저것 까다롭게 말하는 할머니의 말에 영문을 몰라 움직임을 멈춘 대휘에게 민현이 고개를 끄덕여 대휘를 내보냈다.

 

물병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온 대휘가 복도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다시 병실로 돌아와 조용히 문을 열었을 때였다. 할머니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민현의 곧고 넓고 듬직한 등이 보였다.

 

“...네. 감히 제가 대휘를 좋아해요. 저 보석같이 귀한 아이를. 그런데 제가 저 아이를 슬프게 만들었어요. 너무 소중해서 함부로 할 수 없어서. 그런데 다신 그러지 않으려구요. 어르신께 약속 드릴게요. 대휘 절대 울게 만들지 않을게요.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러니까 대휘는 걱정하지 마세요.”

 

연세가 드셔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 잘 못 알아듣는 할머니였는데도 어째서인지 조용조용한 민현의 말은 다 알아들었는지 고맙다고 웃으셨다.

 

“그럼, 민현군만 믿어요.”

 

가까이 가보니 민현은 할머니의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마치 대휘는 민현과 할머니의 약속을 못 들은 척 물병을 든 채 병실로 들어섰다. 할머니 물.

 

 

그 모습이 할머니의 마지막이었다. 대휘가 떠온 물을 맛있다는 듯 한 모금 마신 할머니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민현과 대휘의 손을 꼭 붙든 채 세상을 떠났고 대휘는 싸늘해진 할머니의 품에 고개를 묻고 오래오래 울었다. 그 동안 자신이 뿌리내렸던 단 한 명뿐인 가족이자 오직 자신만의 대지가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민현이 있어 외롭진 않았다. 사람의 생을 마무리하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절차들이 필요했다. 장례식장부터 병원비 정산, 부고, 화장장 계약까지 대휘가 했어야 할 모든 크고 작은 일을 민현이 뛰어다니며 다 해준 덕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대휘는 검은 양복을 입고 상주노릇만 하면 됐다. 아버지는 끝내 전화 한통화도 없었고 오지도 않으셨다. 해순이모 내외와 동네 사람들이 와 준 덕에 장례식장은 너무 허전하지 않았고 민현의 연락을 받고 찬원이와 대웅이, 담임쌤도 너무 늦지 않게 내려와 조문하고 대휘를 위로했다.

 

그래도 황쌤이 먼저 내려와서 다행이다. 고마워.

유가족은 대휘 혼자라 저는 조금만 더 있다 올라가겠습니다.

 

담임쌤은 할머니의 임종에 당황한 대휘가 담임인 줄 알고 전화한 게 부담임인 저였다는 민현의 말을 그대로 믿으며 조문을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 대휘야!!

 

우진에게 전화가 온 건 그 날 밤이었다.

 

- 미안해. 이제야 찬원이한테 연락받았어.

- ...괜찮아...

- 아...정말 미안해...네 곁에 있어줘야 하는데 아...오늘밤엔 가야 되는데...

 

미안하다며 우는 우진을 대휘가 연신 괜찮다고 위로해야 했다. 진짜 슬픈 사람은 대휘였지만 우진에게는 슬프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찬원이나 대웅이처럼 처음부터 친구였다면 좀 더 편했을까. 진짜 형이었으면 대휘 혼자 이곳에 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 ...우진아...길게 통화할 수가 없어...


화장장의 스케줄에 맞춰 발인은 새벽 일찍 시작됐다. 자정이 넘어가기 전 돌아가셔서 억지로 3일 장을 맞춘 격이었다. 화장장까지 함께 한 사람들은 해순이모와 아저씨를 비롯한 동네 어른들과 민현뿐이었다. 이젠 기대도 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끝내 오지 않으셨다.

 

화장장에 도착한 관이 화구 안으로 들어가고 한 시간도 안 돼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은 유골항아리를 받아 들었을 때까지 대휘는 이 모든 상황의 생경함에 멍해졌다. 아무리 말랐던 할머니라도 사람인데 고작 이 항아리 하나만큼의 부피와 질량이라니. 화장장 옆 봉안당에 마련된 자리에 할머니의 유골을 봉안하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났을 때는 7월 하순의 날씨에 날이 뜨거워지고 있을 때였다.

 

처음엔 할머니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아 차마 할머니의 앙상한 손을 놓치 못했던 것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꿈을 꾸듯 남의 장례식을 조문객으로 지켜보듯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아무런 감각없이 멍하게 있었다.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나고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준 분들에게 봉안당 근처에서 식사 대접까지 하고 인사를 드릴 때까지도. 목소리가 잠겨있었지만 대휘는 울진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돌아왔다. 저 없는 집을 지켰을 할머니처럼 할머니 없는 집으로 할머니 영정 하나만 든 채.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 저 대신 모든 일을 처리하느라 뛰어다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제 곁에 있어 준 민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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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휘라서 가능했습니다.





그대의 놀라운 힘이 나의 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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