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년만에 홀로 올라온 서울은 칙칙한 회색이었다.

3월답게 미세먼지는 펄펄 날리고 4주 연속 주말에만 내리는 비는 그 날도 어김없이 찾아왔으며, 토요일의 설렘을 꺾기 일쑤였다. 흩어지는 대화 소리, 에어팟 너머의 중간 정도의 볼륨, 밀물처럼 들어오는 인파들. 각색의 소음이 귀를 파고들었고, 서울이라는 걸 실감했다.

사적인 질문과 폐쇄적인 환경에 질렸기 때문에, 인파의 홍수에 휩쓸리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군중을 유영하듯이 미끄러지는 무관심을 그리워한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나를 지우는 이 도시가 반가웠다.

변덕쟁이 날씨로 유명한 멜버른과 이름만 들어본 한국의 어느 지방을 떠돌고 돌아 다시 서울에서 살기로 결심한 후, 처음으로 밟은 서울 땅이었다.

정착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기에, 고립된 곳에서 느낀 갑갑함을 풀고자 잠깐 올라온 것이었지만, 순간순간들이 너무나 좋았다. 

아, 살겠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무심하게 캡이 큰 모자를 푹 눌러쓰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어깨로 온전히 맞으며, 550일 동안 보지 못했던 민을 만났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까만 속눈썹이 눈을 삼킨 작은 민. 이제 그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눈물 어린 다짐을 했지만, 그의 눈을 본 순간 단단했던 벽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내 인생에서 민을 놓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모르겠다. 같은 고통을 겪은 관계는 특이한 애정으로 감싸져 있다. 우리 둘은 슬프도록 짙은 청보라 빛을 띠면서 각자의 인생을 브리핑했다. 버티기로 점철된 일상을 부시자고 작지만 강한 목소리로 도모도 하고, 까만 코미디를 흘리고 또 흘려 멀리서 보면 희극이 되게끔 가꾸기도 했다. 

좋다, 나쁘다로 가를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씹고 삼켰고, 그렇게 만남은 끝났다. 

칙칙하고 번잡한 오후 5시였다. 길 곳곳에는 더러운 물웅덩이가 고여있었고,  추가로 진통제를 한 알 먹었다. 지끈거리는 편두통과 함께 과거에 패인 상처를 치료해줬으면 바라는 마음으로. 


정은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며 미안하다 연락을 했다. 민과의 만남이 생각보다 길어져 택시를 늦게 탄 와중이라 그의 사과가 반가웠다. 금세 약속 시각은 5시 30분에서 40분으로 연장되었다. 먼저 도착해 화장실에 들른 사이 정이 뒤이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농담으로 시작해 장난으로 끝나는 관계니만큼, 화장실 문 뒤에 숨어서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는 그의 뒤통수를 멀찌감치 보다가 킥킥 웃음을 참고 스윽 나왔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그를 보고, 푸하하 웃어버렸다. 

여전하구나, 정아. 다소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살피는 동그란 네 눈. 

너무 반가웠어. 허당같지만 누구보다 용감한 너.

자리를 잡고 앉아 얼굴을 마주 보니 괜히 멋쩍고 민망해서 항상 그랬듯이 서로 욕을 주고받았다.


정에게 지은 죄가 있어, 응어리도 풀고 얼굴도 볼 겸 만난 자리는 대학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걸로 포문이 열렸다. 음식에 진심인 그는 밥을 먹을 때 고개를 숙이고 먹는 버릇이 있다. 그럼 나의 눈앞에 보이는 건 그의 정수리다. 현실로 돌아와 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는데, 또 그 정수리가 보이는 거다. 남의 두피를 보고 이렇게 가슴이 뭉클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여전한 정의 습관을 목격한 것이 참으로 반가웠다. 


두 번째 카페에서 그의 말을 들으며 미안함에 눈물이 흘렀다. 그를 힘들게 한 모든 것들에 화가 치솟았다가 혼자 스스로를 붙잡으며 끝을 낼 동안 난 아무것도 몰랐던 게 너무나 미안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해와 동떨어진 감정적인 리액션일 뿐이다 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화가 나던 슬프던 내가 느끼는 것은 그가 겪었던 것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걸 잘 알고 있지만 과거 그에게 무례했던 기억들이 몰아치면서 부끄러워졌다. 

원래가 서로 팔짱을 끼거나 친구끼리 할법한 스킨십이 일절 없던 사인지라 처음 정의 손을 잡으며 울면서 사과를 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냅킨뭉치를 턱 주고 손을 토닥여주던 그가 낯간지러운 행위가 좀처럼 어려운 우리 관계를 증명하는 것 같아 또 웃음이 터졌다. 


과거에 진하게 연을 맺었던 사람 두 명을 우다다 만나니, 요즘 감정의 파도가 바람 잘 새가 없다. 

난 감정이 없는 로봇인 줄로만 알았는데, 웬걸, 그냥 눈물로 이루어진 미련 많은 사람이다. 

약간의 자기애와 더불어.  



얼렁뚱땅 김제로의 진지하고 코믹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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