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쉴 수 없어서 해안가를 달리던 

무수한 밤과 새벽을 떠올린다.






21 스타팅 블럭






"일주일이나?"


차두리가 허억, 하고 숨을 들이마신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이해할 수 없음'이 가득했다.


"그 정도 사고치고 일주일 구금이면 많이 봐준 거지. 피해가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다행이야."


독고오공이 보던 서류를 탁 덮으며 말한다. 실제로 그 말이 맞긴 맞았다. 차두리는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인다. 별수 없단 걸 알지만, 속이 상했다.


"그냥 아무 일 없이 돌아온 걸로 좀 봐주지."


"그게 그렇게 되나. 군에서 묻는다고 쳐도 정부에서 난리 칠 걸."


독고오공은 제가 속한 D구역의 사람들을 잘 알았다. 본래 군 조직을 이용할 생각밖에 없는 정부놈들이 반, 생존을 위해 고개를 돌린 녀석들이 반. 그러니 '일주일 구금' 정도면 나름 잘 봐준 징계에 속했다. 오히려 너무 잘 봐줘서 이상할 정도로.


"그래도 면회는 되겠지? 이따 가서 보고 오자."


차두리가 책상에 엎드리며 푸우 한숨을 쉰다. 독고오공은 픽 웃으며 차두리의 머리를 복복 쓰다듬는다. 그런 복잡한 사정까지 이 단순하고 귀여운 애한테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넌 그거 언제 다 낫는대? 한동안 현장은 못 가겠네."


차두리가 마주 앉은 차하나를 흘긋 보며 말한다. 차하나는 시말서를 적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반쯤 나가버린 오른쪽 발목과 아예 부서진 왼쪽 팔 중 어디를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균형 있게 조각났지. 딱 반반... 아!"


꾹꾹 참던 차하나가 옆에 있던 종이를 돌돌 말아 차두리의 머리를 통 내리쳤다. '통'보다는 '퍽'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독고오공은 아닌 척 큭큭 웃는다.


"아이 저게 진짜... 너 팔 부러진 거 진짜 맞아? 전보다 더 힘이 센데?"


"네가 전보다 더 나대는 건 아닌지 잘 생각해봐, 두리야."


차하나가 이를 꽉 깨물고 싱긋 웃는다. 독고오공은 입이 삐주욱 나온 차두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우리가 참자. 지금 남친 옥살이 중이라 심기가 불편하셔."


"으-. 짜증."


"파트너인 나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갈궈지고 있잖아. 이것 봐봐. 보고서가 이만큼..."


순간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느껴진다. 차하나가 독고오공을 빤히 쳐다본다. 견적을 분석 중임에 틀림없다. 독고오공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꾹 다문다. 한 마디만 더 했다간 똑같이 조각날 뻔했다. 차하나는 한참 독고오공과 차두리를 빤히 보다 다시 서류 더미로 시선을 옮긴다. 독고오공과 차두리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조각나지 않으려면 일이나 열심히 해야 했다.


사각, 사각. 종이 위에 펜이 닿는 소음이 잔잔하게 침묵을 채운다. 그 사이로 간간이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은 탓에 서서히 좀이 쑤신다. 차두리는 스르륵 고개를 들고 하품을 한다. 깜박깜박 눈을 감았다가 뜨자 창가의 햇살이 시야에 들어온다. 창밖은 여느 여름처럼 일렁인다. 저 멀리 파도가 잔잔해진 모래사장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피실피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지금이 좋았다. 만약 이게 스쳐 가는 평화일지라도. 이 뒤로 우리가 다시 달려 나가야 한다고 해도. 이 순간이 그 모든 걸 버티게 해줄 것이다. 이 잠깐의 기억이 우리를, 숨 쉬게 할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






태풍 하나가 지나갔다고 여름이 끝난 건 아니다. 아직 장마조차 다 지나가지 않았다. 달려야 하는 순간은 '항상'이다. 지키고 싶은 걸 손에 쥔 채로 숨을 고른다는 건 반쯤 미친 일이다.


'팀장님 파트너, 연구소 출신 아닙니까?'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차하나는 멈추어 선다. 밑에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다 막연히 화가 났다. 비슷한 일을 본 적이 있다. '많이 봐준' 징계라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상태가 좋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이미 도망갔는데 어떻게 하느냐. 이유는 많았다. 명목은 '배려'였다. 제가 들어갔던 그 어떤 조사보다 빠르게 끝났다. 속도는 때론 많은 걸 보지 못하게 한다. 그냥 묻혀버린 마음. 말하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던 순간들. 계속 맴돌았다.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제 파트너도 연구소 출신이었습니다.'


속이 뒤틀린다. 차하나는 손으로 입을 살짝 막는다. 조사실이든, D구역 정부 청사든, 하다못해 사령관 실이든. 어디로든 자신을 불렀어야 했다. 뭐든 알아내면 바로 보고하라며 으름장을 놓을 땐 언제고. 제 발로 기어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 일에 대해선 닥치고 조용히 있길 바라는 건가.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다. 아니, 싫다.


곱씹을수록 싫은 전제들만 떠오른다. D구역 1팀 팀장, 그것도 '폭주 사건 조사'라는 임무를 할당받은 사람의 옛 파트너가 폭주를 한 거다. 그럼 그걸 쥐 잡듯 잡고 늘어져도 모자랄 인간들인데.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니.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해줄 테니 조용히 돌아오란 속내가 너무도 투명하다. 정부는 폭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다 알고 있다면, 뭘 가장 숨기고 싶을까. 뭘 그렇게 숨기고 싶어서 이따위로 입을 막는 걸까.


"...하..."


차하나가 길게 한숨을 쉰다. 저 아래의 아득한 깜깜함이 눈에 들어온다. 가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은. 그걸 알면서 여기까지 온 게 바보 같았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스스로가 막막했다. 별수 없이 눈만 꾹 감아버린다.


"...뭐해?"


불쑥 튀어나오는 익숙한 목소리. 차하나가 동그랗게 눈을 뜬다.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독고오공이 어둠 속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오공아."


"어. 나 네 파트너 보러 갔다가 바로 짤리고 오는 길. 가봤자 소용 없을 거니까 그 발로 그만 돌아다니고 일이나 마저 하지 그래."


독고오공이 차하나의 다친 발을 보며 턱짓한다. 파트너로 지낸 시간이 길어야만 상대를 잘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상대가 나와 동류인 경우엔, 지낸 시간이 짧아도 대충 속이 보인다. 독고오공과 차하나는 그런 의미에선 '동류'에 속했다.


"데려다줘?"


독고오공이 묻는다. 차하나는 말 없이 독고오공을 빤히 응시한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이라 입이 근질거리는 눈치다. 이런 상태의 차하나를 강제로 들어서 사무실에 앉혀 놓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독고오공은 뒷덜미를 긁적이며 픽 웃는다.


"너 말이야. 왜 차두리네 형이면서 권세모랑 파트너였는지 알 거 같아."


"...무슨 뜻이야?"


"신중한 척하는데 은근 아무 데나 들이박고 다니는 거, 완전 너잖아?"


"..."


"가만히 있으면 이틀이라는데. 차라리 누워있어라, 제발."


난 다친 파트너 수발들어줄 만큼 착하진 않아, 하나야. 독고오공이 어깨를 으쓱인다. 말이 좋아 이틀이지 사실 더 누워있어도 모자란 부상이었다.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이었으면 회복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그런 상태인 주제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게 참 누구들이랑 똑같았다. 차하나는 여전히 말없이 독고오공을 빤히 응시한다. 독고오공은 차하나의 시선이 자신의 한쪽 손에 꽂혀있음을 알아챈다. 그래, 넌 이 상황에서도 이게 궁금하다 이거지. 독고오공이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난 먼저 들어간다. 당장은 할 것도 없고 잠이나 자야겠다."


독고오공이 차하나에게 눈짓한다. 차하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독고오공을 따라 발을 옮긴다. 발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린다. 치료를 받았다지만 아직도 걸음을 절고 있는 거다. 독고오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너무 닮아서 자꾸 눈에 밟힌다. 이럴 거면 도와달라고 하던가. 죽어도 그건 싫단 거지. 꾸역꾸역 입 닫고 있는 게 누구랑 똑같네.


"에휴..."


한숨이 난다. 차하나가 일부러 탁탁 소리를 내며 걷는다. 그것마저 누구랑 똑같다. 독고오공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걷는다. 차하나는 그 뒤를 바쁘게 따라온다. 멀리서 보면 조금 우스운 꼴이었다.






끼이익··· 탁. 기숙사 방문이 닫힌다. 닫힌 커튼 사이로 초저녁의 노을이 새어 들어온다.


"그래서, 알아낸 건?"


문이 닫히기 무섭게 차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독고오공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 기울인다. 시선이 침대에 가 닿는다. 내내 겨우 이런 거나 신경 쓰고 있었다니. 차하나는 자신의 현 파트너가 늘 '생각보다' 멋대로임을 알았다. 그게 자신과 닮은 종류의 '멋대로'인 것도 알았고. 별 말 없이 차하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는다.


"이제 됐어?"


차하나가 묻자 독고오공이 픽 웃는다. 문득 어른들은 차하나의 이런 면을 좋아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차하나는 상대가 원하는 걸 능숙하게 알아내고 기막힌 타이밍에 이루어준다. 설사 그게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게 이루어졌을 때 자신에게 이득이 있다면 기꺼이. 그런 점이 차하나를 여기에 묶어두는 거다. 그런 점이 우리를···.


"오공."


차하나가 독고오공을 부른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독고오공은 주머니 속에서 손을 꺼낸다. 그리곤 차하나에게 내민다. 말아쥔 손이 짠 하고 펴진다.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짜증난 목소리의 차하나. 얼굴을 파삭 찌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차하나. 독고오공이 큭큭 웃는다. 차하나는 다치지 않은 쪽 발로 독고오공의 정강이를 찬다. 독고오공은 짧게 신음을 뱉으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뭐 느껴지는 거, 없어?"


독고오공이 묻는다. 웃느라 말이 끊긴다. 차하나는 이를 악물고 답한다. 없어. 당연한 말이다. 얼음 계열의 이능력을 가지지 않은 차하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독고오공은 제 손 끝을 차하나의 손등에 톡 가져다 댄다. 한기가 소르륵 올라온다.


"못 들어가게 하길래, 짜증 나서 냉동실 만들었지."


"야. 그럼 세모는?"


"뭐 어때, 다친 곳엔 얼음찜질 아냐?"


"이게,"


차하나가 다시 발을 들자 독고오공이 슥 옆으로 비켜 선다. 너 이러려고 나 앉힌 거지. 차하나가 독고오공을 노려본다. 독고오공은 맞은편 침대에 털썩 걸터앉는다. 하도 웃어서 숨이 찬지 긴 숨을 내쉬면서. 차하나는 그런 독고오공을 이글이글 노려본다. 자신을 완전히 속였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뭔가 알아낸 게 있을 텐데, 그걸 꼭 바로 말하지 않고 이따위 장난을 친 뒤에 말한다는 사실이 짜증 나는 거였다.


"근데 이상한 게 있더라고."


예상대로. 독고오공은 금세 표정을 바꾸곤 목소리를 깐다. 차하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길게 한숨을 쉰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턱짓하자 독고오공이 큼큼 헛기침을 한다.


"기억을 지운 흔적이 있었어."


독고오공이 손을 쥐었다가 편다. 제가 펼친 이능력과 '다른 누군가'가 펼쳐놓은 이능력이 충돌하던 감각을 되새긴다.


"아예 다 지워버리려는 정도는 아니야. 그냥... 아주 일부분만 손을 댔어."


"일부분..."


"게다가 저항 흔적이 거의 없어. 권세모 정도면 아무리 부상 상태여도 충분히 밀어낼 수 있었을 텐데."


차하나는 입술 끝을 꾹 깨문다. 저항하지 않았다는 말이 목에 걸린 듯 따끔거린다. 세모는 왜 기억을 지우는데 가만히 있었을까? 폭주의 원인을 밝혀주길 바랐으면서. 어쩌면 폭주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것도 있었을 텐데. 물론 우리가 이미 알아냈다고는 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게 있었을 수도 있는데. 왜 그걸 가만히···. 생각이 줄줄 이어지다 어느 곳에 다다라 뚝, 하고 잘려 나간다. 차하나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난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이 툭 튀어나온다.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 말에 독고오공이 고개를 까딱 기울인다.


"뭐라고?"


"...기억을 지우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야. 납득하면 받아들이는 애니까. 근데, 대체 왜?"


차하나가 중얼거린다. 약간의 확신을 얻은 듯 아까보다 목소리가 조금 커진다. 차하나는 손톱 끝을 잘근잘근 문다. 권세모는 가끔 무모하지만 생각이 없는 편은 아니다.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다. 동시에 권세모는 일부러 기억까지 지워가며 제게 뭘 숨길 애가 아니다. 그럴 사람이 못 된다. 만약 그걸 아는 게, 제게 해롭지 않고서야.


"...아."


맞다. 차하나가 작게 탄식한다. 권세모라면. 차하나가 고개를 든다. 권세모라면 제가 위험해질 것 같단 생각이 들면 얼마든지 자신의 기억 따위는 지우고도 남을 사람이다. 충분히, 그럴 만큼 권세모는 차하나를 사랑한다.


"세모한테 가 봐야겠어."


차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독고오공은 곧바로 차하나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 세운다.


"못 들어가. 차두리도 나도 다 면회 불가야. 게다가 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안 되면 그때 다른 방법을 찾아볼 거야."


차하나가 단호하게 말한다. 독고오공은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차하나의 손을 놓는다. 이렇게 나올 걸 예상 못 한 건 아닌데, 생각보다 더 멋대로다. 이런 상태의 차하나는 절대, 절대로 막을 수 없다.


"그럼 다녀와서 다시 얘기 해.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작전 회의라도 좀 하고 움직이자."


또 혼자 움직이다가 어디 들이박고 조각 나지 말고. 그랬다간 내가 권세모한테 죽을 거 같으니까. 독고오공이 말한다. 차하나는 이를 꽉 깨문 채 싱긋 웃는다. 내가 살다 살다 오공이 너한테 이런 걱정도 들어보고. 재밌는 일이야, 그치? 차하나가 독고오공의 어깨를 꽈악 주무른다. 독고오공은 얼굴을 찡그리며 픽 웃는다. 잘 다녀와, 하나야. 장난 섞인 말투였지만 그래도 진심은 진심이었다.


탁, 방문이 닫힌다. 차하나는 문에 기대 심호흡한다. 발아래로 그림자가 길어져 있다. 어느새 해가 다 진 모양이다. 고개를 들자 복도 창 너머로 검푸른 저녁 하늘이 보인다.


숨을 쉴 수 없어서 해안가를 달리던 무수한 밤과 새벽을 떠올린다.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던 낮들을 떠올린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세운 뼈들을 생각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가시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도, 그럼에도 달려야 했고, 숨 쉬어야 했고 중심을 잡아야 했다. 덮어놓고 숨긴다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딴 식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보여주고 싶다. 차하나는 다시 깊게 호흡한다. 모래를 뒤집어쓰고 엉망이 된다고 해도, 파헤쳐야 하는 일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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