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 Zeze

제논님 :)

드라큘라

Dracula
13




"시청자 여러분. 1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학가 연쇄살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피해자들은 온몸의 혈액이 모두 빠져나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죠. 이 끔찍한 범행의 범인뿐만 아니라 수법 또한 밝혀지지 않아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텔레비전이 검은 화면으로 변하며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뚝 끊긴다. 막 식사를 마친 태형이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고급스럽게 찰랑이는 소재의 티셔츠를 입은 태형의 왼팔 부근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팔랑였다. 윤기에게 잘려버린 왼팔 없이 살아가는데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망할 이 변종은 재생 능력도 없나. 태형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살생을 즐기는 뱀파이어에 의해 변한 태형은 그만큼이나 잔혹했다. 그러나 1년 전 광기에 미쳐있던 신생 때와는 달라졌다. 태형은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능숙하게 시체를 처리했고, 욕망을 절제하는 법을 배웠다. 오래된 뱀파이어들이 사용하는 능력까지 터득하기에는 아직 어렸지만.

드라큘라. 태형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윤기를 떠올렸다. 1년 전 사건은 매일 생각해도 질리지 않고 짜릿하기만 했다. 또다시 들끓는 분노에 태형이 목을 가볍게 돌렸다.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던 여주의 피를 향한 욕망보다는 윤기를 향한 복수심이 태형을 성장하게 만들었다.






"..."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태형이 인간일 때부터 피워왔던 담배를 습관적으로 입에 물었다.








여주가 일하는 영화관은 근방의 모든 곳과 비교해 봐도 제일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서울 대학가의 중심부에 위치하기도 했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적합했다. 한국대 졸업을 앞둔 여주가 취업 준비를 하며 영화관에 알바를 하기 시작한 이후로 매출은 더욱 증가했다. 알바생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한몫한 거였다.

한국대학교 교수진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여주를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지급을 제시하며 여주를 설득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여주의 대학원 진학 의지가 꺾였던 건 부친의 사망 때문이었다. 도서관에서 4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여주는 모친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그랬기에 여주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취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게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가정환경에 여주는 대학원 진학의 꿈을 포기했다.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넣은 여주는 바늘구멍보다 들어가기 힘들다는 대기업의 최종 면접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가장 빠른 표 두장이용~!"



여주가 담당하는 매표소에 은아가 발랄한 목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손님이 많아 꽤 지쳐있던 여주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옆에는 지민도 함께였다. 갑자기 웬일이야? 여주가 익숙하게 포스기를 두드리며 물었다.



"학교 앞에서 대기 타고 있었나 봐. 잡혀 왔어."



지민이 짜증이 역력한 표정으로 대신 답했다. 지민은 한국대학교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입학 전 실험실 적응을 이유로 벌써부터 대학원생의 삶을 사는 지민의 얼굴은 언제나 어두웠다. 중소기업에 단번에 취직해 완벽한 워라밸을 자랑하는 은아가 지민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다가 영화관까지 잡아 온 게 분명했다.



"십 분 뒤 영화 있는데 괜찮아?"

"끝나면 너 퇴근 시간이랑 비슷하지 않아?"

"맞아. 내가 좀 더 빨리 끝나는데 옷 갈아입고 하면 비슷할 것 같아."

"그럼 콜이지~!"



은아가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됐어. 여주가 은아의 카드를 못 본 체하고는 직원 할인을 적용해 티켓을 발권했다. 끝나고 매점 앞에서 보자. 여주가 티켓을 건네며 말했다. 은아가 좋아하며 지민을 질질 끌고 입장 줄을 섰다.

유니폼을 벗고 질끈 묶은 머리를 풀어 내린 여주가 탈의실을 나섰다. 매점 쪽으로 향하려는데 앞을 가로막은 건 같이 일하는 남직원이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같이 저녁을 먹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여주가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 말하며 거절했지만 남직원은 끈질겼다. 때마침 등장한 지민과 은아가 아니었더라면 꽤나 긴 실랑이를 벌일 뻔했다.



"근데 아까 그 남자 되게 잘생겼던데."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은아가 조금 전 여주에게 찝쩍거리던 남직원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잘생겼냐? 지민이 핀잔을 주었다. 여주가 마늘 치킨을 쿡 찔러 먹으며 남직원을 떠올렸다.



"글쎄. 내 스타일 아닌데."

"한여주 스타일 들어나 보자. 도대체 이상형이 어떤데?"



은아는 제 소꿉친구가 스물넷이 되도록 모태솔로라는 사실이 문득 화가 난 모양이었다. 또 시작이네. 지민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면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지.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던데?"

"이상한 사람 아니면 다 만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러다 언제 연애할래! 내가 여주 네 얼굴이었으면 쉬지 않고 연애했을 거야."

"얼굴로 연애하는 것도 아니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네. 지민이 여주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은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은아도 속이 상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걸 여주는 모르지 않았다. 작년 아버지를 잃은 뒤로 여주는 전과 같은 생기를 잃었다. 사교적인 성격 덕에 여전히 인기는 많았지만, 여주는 은아와 지민을 제외하고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연애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끌리지도 않는데 거짓 연애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평생 모태솔로로 늙어 죽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또 모르지? 회사 가면 괜찮은 사람이 있을 수도."



포기를 모르는 은아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여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여주 너, 나랑 약속 하나 해. 은아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여주가 들어나 보자는 표정으로 은아를 쳐다봤다.



"회사에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놓치지 않기로."

"..."

"아, 연애도 해봐야 느는 거란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여주가 웃음을 터트리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쯧쯧. 한여주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지민이 혀를 차며 맥주를 들이켜려다 여주의 얼굴을 잠깐 스쳐 간 공허함을 읽고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표정이 왜 그래?"



지민이 물었다. 아…. 여주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여주 무슨 일 있어? 은아가 여주 쪽으로 몸을 주욱 빼며 물었다. 그냥…. 여주가 포크로 마늘 치킨을 쿡쿡 찌르며 중얼거렸다. 친구들은 여주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다.



"어딘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야. 아빠 죽고 나서부터 그런 건 맞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아빠 때문은 아니야."



뭔지 모를 중요한 어떤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몇 날 며칠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았고, 허전했으며 형체 없는 무언가가 그리워 눈물까지 났다. 아주 이상하고 슬픈 감정이었다.



"상실감 같은 거 아닐까? 여주 너 아버님이랑 친했잖아. 그래서 그런 거겠지…."



은아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여주를 달랬다. 그게 아닌데…. 여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씁쓸한 표정을 애써 지워낸 여주가 맥주잔을 들었다. 그래, 별거 아니겠지. 짠! 여주가 눈치를 보고 있는 친구들의 잔에 제 것을 맞댔다. 여주의 마음과는 다르게 경쾌한 유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은 여주가 첫 출근을 하기 전 모친과 포옹을 했다. 우리 딸 잘 하고 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학원을 보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여주가 씩씩하게 웃으며 집을 나섰다.

최종 합격 연락을 받은 회사는 혈액암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치료제를 유통했고 직원 수도 엄청난 대기업 중의 대기업이었다. 역시 전체 수석은 다르다며 한국대 교수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다.

최종학력이 학사였던 여주는 학술팀 신입으로 채용되었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배우려는 햇병아리 여주의 태도에 입사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 이미 학술팀 모든 직원의 호감을 샀다.



일이 바빠 퇴근하면 눈을 붙이는데 정신없었던 출근 첫 주가 지나갔다. 팀실에 들어선 여주는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의아한 얼굴로 제 자리에 앉았다. 유일한 박사학위 소지자인 전 학술팀장이 해외지사로 발령이 난 이후로, 일주일이나 팀장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인수인계를 받은 후임이 돌연 잠적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대표가 직접 해외까지 가 새로운 유능한 인재를 스카우트했다고 했다. 여주는 컴퓨터를 켜며 어떤 사람이 팀장으로 올지 궁금해했다.






"..."

"..."



그리고 여주는 팀실로 들어서는 팀장을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슬한 사포로 문지르는 것처럼 짜릿했고, 머리는 누가 치고 지나간 것처럼 뎅 울렸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내부의 공기를 한순간에 바꿨다. 마치 모든 사람과 사물, 시간의 흐름까지도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고정된 시선을 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주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주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모든 감정이 그를 향해 소용돌이쳤다. 이게 첫눈에 반한 건가? 은아에게 해줄 말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잠시였다. 눈이 마주쳤다. 시선만으로 꽁꽁 묶여버리는 기분이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할 학술팀장 민윤기입니다. 일이 많이 밀렸으니 바로 업무 시작하겠습니다."



윤기는 제 할 말만 하고 팀장실로 향했다. 그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주가 주변을 둘러봤다. 여주가 느낀 감정은 다른 여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던 모양이었다. 참았던 숨을 팡 터트리는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아무래도 며칠은 주된 화제는 윤기일 것이 확실했다.




"..."



자리에 앉으려던 여주는 문득 팀장실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기의 시선이 여주를 향해있었다. 강렬한 그의 시선에 여주가 말을 잃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손끝이 떨려왔다. 한참이나 마주하던 시선은, 그가 블라인드를 닫으며 뚝 끊겼다.








선배들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온 여주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여주만 빼고 학술팀 직원 모두가 흡연자였다. 친해지려면 같이 담배라도 피워야 하나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건강까지 해치면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한여주라면 친해지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저, 안녕하세요. 학술팀 한여주씨 맞으시죠?"



선배들과 다른 엘리베이터를 탄 여주를 따라온 남직원이 말을 걸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여주가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별 영양가 없는 말을 이것저것 건네는 걸로 보아 여주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직원이 분명했다. 회사를 다녀도 여주의 인기는 대학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채용과 함께 여주의 소문이 퍼진 건 중·고등, 대학교에서 늘 겪어왔던 상황이었다. 여주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남직원이 계속해서 여주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그러나 여주는 막 닫히려는 문이 다시 열리고 들어온 윤기에게 시선을 뺏겼다. 여주가 먼저 묵례를 했다. 고개를 까딱인 윤기가 눌려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확인했다. 학술팀이 위치한 15층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윤기가 남직원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내려다봤다. 영업 1팀. 윤기가 손을 뻗어 12층을 눌렀다.



"소문은 익히 들었어요. 한국대 전체 수석이셨다면서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여주의 왼쪽에 선 남직원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귓가에 끊임없이 말소리가 흘러들어왔지만 여주의 온 신경은 윤기에게 쏠려있었다. 윤기는 여주의 오른쪽 대각선에 서 있었다. 그가 입은 정장은 태어날 때부터 그와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여주는 사람이 뒷모습만으로도 누군가를 홀릴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원래 영업팀이랑 학술팀이 같이 외근 나가는 경우도 정말 많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여주씨를 앞으로 볼 일이 굉장히 많을 것 같다는 뜻인데요. 그러니까,"

"12층입니다."



윤기가 낮은 목소리로 남직원의 말을 잘라냈다. 아, 그렇군요. 12층이네요. 남직원이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음에 또 봬요. 여주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주의 웃음에 남직원이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여주가 고개를 빼꼼 움직여 윤기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흰 피부, 붉은 입술, 칼로 깎은 듯한 옆선에서 느껴지는 냉랭한 분위기. 반나절 밖에 겪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성격을 알 것만 같았다. 앞으로 그와 함께할 회사 생활이 기대가 됐다.




"..."



1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윤기가 여주를 돌아봤다. 윤기의 옆얼굴을 훔쳐보던 여주가 흠칫 놀라 그대로 굳었다. 윤기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그의 표정에 여주가 시선을 피해야 하는 것도 잊고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정지 화면 같은 시간이 흐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려 했다. 어어, 여주가 손을 뻗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막아내려 했다. 윤기가 그보다 빠르게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문을 붙잡았다. 코앞에 다가온 윤기의 가슴팍에 여주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윤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묵직한 향이 났다. 분명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윤기가 반걸음 뒤로 물러서 여주가 내릴 수 있게 했다. 감사합니다…. 여주가 모기만 한 목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따라 내린 윤기가 먼저 팀실 방향으로 향했다. 여주가 조금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윤기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묵직한 향이 여주의 온몸을 휘감는 기분이었다. 단단히도 홀린 거였다.






기억 잃은 여주 앞에 다시 나타난 윤기,,, why?!

캠퍼스물에서 오피스물로 진화한 드라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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