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까지는 가을 재록 '낙엽의 행방'에 실렸습니다! ++






아아, 참을 수 없어요. 이 마음을 고백한다면 내일 우주는 어떻게 되어버릴까요. 찬란하게 빛날까요. 아니면 눈부시게 터져버릴까요. 


하지만 눈물로 젖은 우주는 터지지도 사라지지도 무엇도 변한 것도 없이 그저 어제와 똑같이 다를 것 하나 없는 모습으로 와버리고 말았지 뭐예요.




*




소녀는 양손으로 자신 몫의 머그를 감싸쥐었다. 아카아시는 재촉하지 않고 소녀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소녀는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가지런한 청록색 눈동자는 항상 다정한 편이었다. 그게 특별히 누구에게 더 다정했는지 알고 있었는데.



“있지, 아카아시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니, 있었는데.”

“아.”



소녀는 갑작스러운 화제에 조금 당황한 것 같은 아카아시의 표정을 보고서 작게 만족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가을이 다가오는 시기였다. 나뭇잎들이 색색깔의 옷을 덧입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어깨엔 보드라운 겉옷이 눈에 띈다. 


소녀는 침묵 속에서 김이 오르는 머그잔을 바라보았다. 그 머그잔 너머에는 아카아시 케이지가 부드럽지만 꼿꼿한 자세로 앉아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눈을 꾹 문질렀다. 요 며칠 계속 울어대어 퉁퉁 부었다가 풀어졌다 반복하는 눈이었다.  


본래 지금 이 시간, 아카아시가 저의 선배와 만나기로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서 이 시간으로 약속을 잡았다. 아카아시는 곤란한 듯한 얼굴을 했지만 소녀는 아카아시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제 선배의 일로 급히 가야할 때마다 그의 학급당번 일을 대신 해 준건 소녀였다. 소녀는 손가락 네 개를 펼치기만 하면 되었다. 소녀가 아카아시의 일을 대신 해주었던 게 4번이었다. 아카아시는 당황한 듯 했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매일매일 나를 보러 우리반에 오니까, 나는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웃으면 햇살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학년도 다른 교실까지 와서 떠드는데도 그게 밉지 않았다. 분명히 선배인데도 표정만 보자면 어린 아이들의 보물상자가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고 어색한 듯 미안한 듯 웃으며 그녀를 부르면, 그녀는 그 순간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된 기분이었다. 



“아…….”

“정말 너무 굉장한 착각이었지만 말야.”



한 번은 그가, 그녀 혼자서 즐겨 마시던 음료를 어떻게 알았는지 건네주었다. 소녀는 그것을 받아들었던 그 날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책상 위에 올려두고서 매일매일 꽃을 접어 곁을 장식해두었더랬다. 마음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고서 겨우 인사를 하면 상대는 조금도 개의치않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해주었다. 


그가 그저 모두에게 똑같이 밝은 모습인 것을 알았다. 그래도 좋았다. 2학년과 3학년은 건물도 다른데 매번 만나러 와주었다. 학생회 부회장인 그녀에게 볼일이 있다며 왔으면서도 와서 하는 건 대단치도 않은 이야기 뿐이었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지치지 않고 와주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무엇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만 웃는 얼굴에 눈이 이끌렸고 마음이 홀렸다. 모든 행동 하나 하나에 의미를 두게 되었다. 별다른 이야기도 하지 않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오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는 어떻게 알았던 걸까. 왜 굳이 부끄러워하는데도, 눈을 마주쳐서는……. 


사랑노래가 모두 자신의 이야기로 들렸다. 갓 딴 꽃의 꿀처럼 달콤했다. 눈을 마주치면 갑자기 어디에도 없던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심장에서 새싹이 돋는 것처럼 간지러웠고 그 새싹이 뿌리를 내리며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입에서 마침내 꽃이 피어났고 소녀는 그 꽃봉오리가 움트는 것과 동시에 고백을 토해내고 말았다.


좋아해요! 


소녀가 상상했던 다음날의 우주는 온통 꽃잎이 지천에 날리고 있었다. 영원히 회전 목마를 타는 것처럼 어지러울 것 같기도 했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정해져있었다. 어쩌면 무지개빛 복숭아 주스를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몰라. 


다음날의 우주가 오지 않기를 바라게 될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상대는 한껏 곤혹스럽고 미안한 얼굴로 사과의 말을 하고서 먼저 등을 돌렸고 세상은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천둥번개가 치거나 비라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고 그저 황량한 바람만 한 번 그녀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다음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신에게 기도했지만 소녀는 신의 일이란 기도를 무시하는 것인 게 분명하다는 확신만 얻었다. 세상은 그녀의 비애도 슬픔도 모르는 채 너무나 멀쩡히 굴러갔고


그녀의 고백을 들었던 사람은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녀의 교실에 찾아왔다. 


소녀는 알았다.


학생회 부회장인 그녀에게 용건이 있다는 말은 정말로 핑계였던 것이다. 



*



어처구니 없는 착각인 것을 그 때 알았다. 그의 시선과 마음의 궤적이 너무나 분명해서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왜 몰랐지, 소녀는 그 날 밤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부끄러워서 하루종일 열이 오른 채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수는 어떻게 알았는지도 뒤늦게 알았다. 그의 일로 매번 반에서 바쁘게 사라지는 아카아시가 사과의 뜻으로 건네주라 했던 것이었다. 그는 소녀가 그 음료수를 정말로 좋아해서 즐겨 마시는 줄도 알지 못했다. 소녀는 그 날 밤에 캔을 송곳으로 따서 버렸다. 접었던 종이 꽃은 가스렌지의 불에 태우다가 부모님께 혼이 나서 소녀는 이제 상대를 미워하기까지 하게 되었다. 


상대가 꼬박꼬박 후배의 교실에 왔던 것, 되지도 않는 어색한 말씨로 부회장에게 볼일이 있다는 핑계, 매번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뜻이 담겼던 음료수까지도 모두 단 한사람을 위해서였고 그게 그녀는 아니었다. 


소녀는 턱을 괴고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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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_mi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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