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적어도 오늘 그런 일은 없었을 거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릴리가 로라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차분해진 로라가 보다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 이 시간이 되도록 뭘 하다 오신 거예요?"

질문을 하면서 로라는 겉에서 꿰매어 다시 풀기 좋게 해둔 부분의 실을 잘라서 릴리가 옷 벗는 걸 도왔다. 얇고 자루처럼 큰 내의만 입은 릴리에게 몸을 닦을 물수건을 건넨 로라가 어떻게 하면 릴리의 옷을 소생시킬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처지상 동부 옷은 수량에 한계가 있었고 중서부의 옷은 아주 아랫사람이 입는 옷이 아니고서는 전부 허리가 너무 잘록해서 허리 부분을 최대한 늘려도 한계가 있다 보니 겉옷만 어떻게든 맞추고 안에 입은 옷은 대충 몸만 들어가면 어떻게든 입어야 했다. 허리가 들어가게 하자니 다른 부분이 다 컸다. 옷을 지어 입자니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여럿에게 신세를 져야 했다. 로라가 애써서 부족하진 않게 준비하더라도 넉넉할 만큼 수급하는 건 불가능했다.

위의 이유로 릴리가 입을 수 있는 옷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동부에서 가져온 얼마 있지도 않은 옷을 돌려 입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단벌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중서부에서 구할 수 있는 괜찮은 수준의 옷들은 남성복마저 허리가 잘록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렇다고 여성복 중에 그나마 허리둘레가 괜찮은 임부복 같은 걸 구해 입자니 그것도 형태가 좀 안 맞았다. 게다가 특수한 의상은 쓰이는 옷감이나 전체적인 디자인이 일반적인 중서부의 복식과 다르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목적 전도다.

베르타 그로홀름 부인의 옷 선물은 무척 귀중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걸 합해도 로라가 보기엔 한참 부족했지만 말이다. 그런 로라의 속도 모르고 릴리가 즐겁게 나불거렸다.

"필리엔의 방에서 술로 몸을 좀 데우고 그대로 쓰러트려서 뜨으거운 밤을 보내려-다가 그만두고 밖으로 나갔거든. 왜냐곤 묻지 마 아무튼 그렇게 됐어. 필리엔이랑 같이 언덕 위로 가서 별도 보고 하늘도 좀 날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다 왔지."

로라는 자연스럽게 들어간 부자연스러운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었다. 보다 중요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얘기만 하셨는데 옷은 왜 이렇게 됐죠……?"

"송충이가 들어가서? 정확히는 송충이가 들어간 줄 착각해서."

릴리는 사실만 말했지만 듣는 입장에선 헛소리가 따로 없었다. 로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릴리가 하는 허튼 소리에 신경을 꺼버린 로라가 옷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뫼니엘 이카트에게 부탁해 겨우 받아온 귀한 실내복을 허락하에 힘들게 고쳐놓은 것인데 무슨 짓을 했는지 등판이 아주 속 시원히 갈라져 있었다. 로라의 피땀 어린 정성도 함께 찢어진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해야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이게 무슨 짓이람. 다행히 일자로 찢어진 터라 어떻게 잘 안 보이게 기우고 긴 머리를 늘어트려 가리면…….

로라는 옷을 살리는 걸 포기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이런 꼴이 된 걸 의심받지 않고 처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릴리는 뭐에 취했는지 혼자 신나서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는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도 춤 비슷한 걸 흐느적대며 추더니 로라가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얌전해졌다. 침대에 누운 후에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웅얼거리더니만 곧 스르륵 잠들었다. 

로라는 자신의 사고뭉치 술꾼 아가씨의 뒤처리를 하게 된 자신의 신세를 속으로 한탄하며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그걸 봐주거나 공감해줄 사람이 없었다. 로라는 릴리가 벗은 옷을 구석에 넣어놓은 뒤 입바람으로 촛불을 껐다. 복도를 지나치지 않고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문을 통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아침까지 푹 곯아떨어졌다.




릴리가 머물고 있는 이카트 저택의 방은 지금 짐더미로 한가득이었다. 릴리는 잔뜩 꾸려놓은 짐을 보며 묘한 감상에 빠졌다. 릴리가 쓰는 방을 채우고 있는 건 전부 릴리의 물건이었다. 그냥 지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전부 꺼내 늘어놓으니 생각 외로 양이 어마어마했다. 생일 때 받은 선물은 아예 처음부터 추려서 반 이상 다 줄였는데도 이 상황이라니.

이렇게 짐을 쌓아놓은 이유는 이제 이 방을 비울 것이기 때문이다. 릴리는 이제 이 방이 필요 없다. 곧 떠날 것이다. 그러면 온갖 상자며 트렁크며 꾸려놓은 짐으로 가득한 방이 텅 비게 되겠지. 비록 지금은 갑갑하게 보일 정도로 공간을 채우고 있지만 말이다.

처음 중서부에 왔을 때 그들은 아주 기본적인 것만 지니고 있었다. 도중에 짐을 다 잃어버리는 바람에 몸만 건져서 검은숲을 헤매다 겨우 진실의 제단이 있는 곳으로 가 빛의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여장을 꾸린 탓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짐이 언제 이렇게 늘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자가 증식이라도 하나?

꾸려놓은 짐으로 가득한 내부에서 시선을 돌려 릴리가 창밖을 보았다. 지금 이카트 저택은 앞마당이고 뒷마당이고 할 것 없이 정신 없이 북적거렸다. 수레와 짐꾼들이 오가고 들고나는 걸 파악하고 지휘하느라 뫼니엘과 리르먼도 바빴다. 

집에 있는 누군가가 전쟁터로 떠나는 것은 실무적인 측면에서 긴 여행을 떠나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필리엔을 포함한 이카트의 군사가 지금 떠나는 건 황제를 알현하러 중부로 향하는 것이지만 중부에 들렀다가 곧바로 서부로 갈 예정이니 그냥 전쟁터로 간다고 해도 틀리진 않았다. 그래서 서부로 갈 준비와 중부로 갈 준비를 한 번에 하느라 더 정신이 없기도 했다. 

릴리는 며칠 전에 복도를 지나는 뫼니엘이 서부에서 필요할 것 중에 중부에서 수급하는 게 나은 것들을 추려내려고 목록들을 중얼거리며 지나가는 걸 우연히 목격했었다. 뫼니엘은 릴리가 거기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무서운 장면이었다. 

릴리와 로라는 필리엔을 포함한 이카트의 군사들이 중부로 가는 길에 동행하기로 했다. 두 사람만 동부로 향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따로 호위를 빼서 보내기에도 부담스러운 차에 이카트의 군사들이 이동하는 것에 도중까지 함께하는 건 썩 괜찮은 방법이었다. 어차피 서부로 가기 전까진 전투 상황이 벌어질 일도 없으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여로라고 할 수 있었다.

중부는 중서부와도 동부와도 맞닿아 있었다. 릴리와 로라는 중서부에서 중부까지 동행하다가 중부의 안전한 곳에서 미리 연락해 동부에서 보낸 이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호위와 함께 동부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최근엔 릴리와 로라도 짐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하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도중에 베르타의 끝내주는 송별회에 참석까지 하느라 더 바빴다. 릴리는 거기서 원래 모르던 사람을 수십명을 새로 소개 받았는데, 아무래도 베르타가 주위 사람들에게 릴리를 대현자와 가까운 사이인 대단한 마법사 정도로 떠들고 다닌 것 같았다. 

마당에 흩뿌린 콩에 달려드는 새들처럼 사람들이 어찌나 몰려드는지, 밤이 늦도록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덕분에 당일에 재밌게 논 것과 별개로 무척 피곤해서 릴리도 로라도 다음날 오전까지는 완전히 뻗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준비할 시간이 줄어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베르타 그로홀름이니 어쩌랴. 받은 것도 많아서 그냥 빚을 갚는 걸로 여기기로 했다. 베르타가 튼튼하고 괜찮은 마차를 공수해줘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조금은 영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 열어준 송별회를 베풀듯이 여기는 건 좀 황당한 소리 같겠지만, 베르타가 주관한 연회가 성공적인 건 베르타의 공으로 돌아가니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렀다고 하기엔 너무 많이 덜컹 거리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시간은 잘만 흘러서 결국 떠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일이면 떠나는 날인데 그렇고 그런 의미로 충동적인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고 말하기엔 릴리는 필리엔을 너무 사랑했다. 하지만 밤늦은 시간까지 필리엔의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포기할 수 없었다. 

필리엔은 오해를 살 거라며 만류했지만 당연하게도 릴리에겐 통하지 않았다. 릴리에게 안타까운 일은 그것이 오해라는 것 하나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필리엔의 방으로 찾아간 릴리의 손에 술병이 들려 있었던 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만 해두자. 과실주는 달콤하고 음주는 사람의 자제력을 약화했다. 마주 앉았던 두 사람이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가 살짝 상기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둘 다 대화가 이어지던 중이었다는 것도 잊고 입술을 붙이고 빨고 비비다 혀와 타액을 섞어대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소리다.

릴리가 심술로 짓궂게 지분거리는 통에 필리엔이 자기 방을 뛰쳐나가려고 하는 일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하자면 마지막 밤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밤새 서로를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며 온기를 나누었다. 옷은 한 겹도 벗지 않았으나 릴리는 이가 연인 간에 마음을 나누기에 충분한 행위라는 걸 인정했다.

"떠나기 전에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는데……."

물론 미련이 철철 넘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전 지금도 충분히 좋아요. 릴리는 어때요?"

릴리는 아주 오랜만에, 필리엔이 곰인지 여우인지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답은 하나였다.

"필리엔은 언제나 최고예요."

릴리는 구름을 걷고 지상으로 쏟아지는 햇볕처럼 필리엔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소년처럼 수줍고 행복한 미소였다. 그걸 보는 순간 릴리는 자신이 달라져 있음을 새삼 느꼈다. 이 여린 남자를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릴리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말을 제대로 알아 듣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기분 좋은 얼굴로 히죽거리던 필리엔은 술기운이 오르는지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 필리엔이 평화로운 숨소리를 내며 잠드는 걸 릴리가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릴리는 자신의 옆에서 누워 잠든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쓸며 생각에 잠겼다. 태생이 그러했던 터라 릴리 그레이스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마법이란 것을 현실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 남자에게 끌리고 그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일처럼 느껴졌다. 

진짜 마법은 이렇듯 사람을 달라지게 만들고 일어나지 않을 일을 발생시키는 법이지.

자신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이 사람일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릴리는 색이 오른 입술에서 손을 떼었다. 필리엔은 릴리를 파란 하늘에 뜬 깃털구름과 같이 가볍게 만들었다가도 동시에 노도하는 태풍처럼 거칠게 만들었다. 마음이 한없이 잘게 분해되는 것 같다가도 단단하게 응집하는 것도 같았다. 한순간에 무력감과 전능감을 오갔다. 

릴리는 필리엔이 깨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온기는 따스하고 입술은 부드러우며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하는 연인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릴리의 마음은 한계 없이 행복했으나 때때로 끝을 모르도록 절망스러워 화가 났다. 이상할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 들끓어 심정이 피로할 지경이었다. 

릴리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며 겉옷을 걸치고 필리엔의 방을 나섰다. 이제는 익숙한 길을 따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데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고장 난 것처럼 덜컥 멈춰선 릴리를 보고 그도 제법 놀란 것 같았다. 모두 잠들어 고요한 밤중에 계단에서 갑자기 사람과 마주치면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하지만 완전히 굳어버린 릴리와 달리 좀 놀란 정도였는지 그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잠이 안 오더군요."

리르먼이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을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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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때문에 속 터지는 로라와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뫼니엘, 미련을 못 버리는 릴리, 잠 못 드는 리르먼, 그리고 더 길어지는 게 두려워 베르타의 송별회를 스킵해버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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