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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 Tension 2

W.대니









“흐이잉-.”

“그만-. 뚝.”

“아아-. 나도 데려가아-.”



어쩌면 좋을까, 정말. 용선은 바닥에서 뒤집어지는 휘인을 힘겹게 안아 올렸다. 들썩이는 어깨 뒤로 오늘 날짜를 가리키는 달력의 빨간 숫자가 눈길을 이끈다. 한숨을 내쉰 용선이 한 팔만 겨우 끼워 넣은 자켓을, 들고 온 사람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휴일은 온전히 휘인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나날이 몸집을 불리는 계열사가 제 손길을 필요로 해도 휴일만큼은 꼭 휘인을 위해 쓰자 스스로 다짐했다. 그런데 결국 휘인의 서운함이 폭발해 버렸다.

부지 내의 부대시설 증축 및 새로운 생산 부지 선정 건으로 근래에 들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용선이 늘어지는 휘인을 끊임없이 달랬다. 게임도 싫다, 할아버지 품도 싫다, 친구 집도 싫다. 어떻게든 옆에 붙어 있으려고 떼를 쓰고 있었다. 울다 못해 헛구역질을 시작하면서 콜록거리기 시작한 휘인이 두 팔로 목을 꼭 끌어안았다.



“용이이-. 나 두고 가지 마아-.”



서럽게 우는 얼굴이 가지 말라는 말까지 토해낸다. 따끔거리는 느낌이 결국 용선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휘인의 가지 말라는 말은 소원을 빌기 전에 요술 램프를 문지르는 행위와 같았다. 그 말에 얽힌 가슴 아픈 사고를 생각하면 저만 두고 가지 말라는 휘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용선은 어깨에 파묻힌 작은 얼굴을 힘겹게 떼어냈다.



“그럼 가서 얌전히 있을 수 있어?”

“으응-.”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자마자 휘인이 그 위에 턱을 올린다. 엄지를 치켜들지 않았는데도 당연한 절차를 밟듯 휘인의 입술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찍혔다.

조카의 애교를 손에 가득 받고 작게 웃은 용선이 흠뻑 젖은 얼굴을 연달아 훔쳐냈다. 뻐끔, 뻐끔. 금세 미소를 되찾은 휘인이 손바닥에 대고 물고기처럼 뻐끔거린다. 휘어지는 눈에 달린 눈물을 마지막으로 닦아낸 용선이 고개를 살살 저었다.

정휘인, 애교 그만-.

 







* * *








진한 베이지색의 슬랙스 그리고 하얀 셔츠. 착장도 그렇지만 용선의 머리칼도 지난 시상식 때와 달리 어깨를 덮고 있었다. 한 손으로 휘인의 등을 토닥인 용선이 주의 사항을 재차 일러주었다.



“휘인아. 어디 갈 땐 이모나 여기 삼촌한테 꼭 말하고 가야 돼. 알겠지? 응?”

“으웅-.”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한 휘인이 핸드폰을 눈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용선은 그런 휘인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처음부터 핸드폰을 쥐여줄 걸 그랬다. 1시간 전에 생떼와 애교를 부렸던 조카는 온데간데없이, 품에는 이 자리에 억지로 끌려 나온 듯 보이는 아이만 있었다.

아무래도 휘인이 아니라 따라붙은 사람에게 주의를 줘야 할 것 같았다. 제법 묵직한 휘인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꼭 잡은 용선이 옆에 있는 수행 비서에게 눈치를 주었다.

도주, 도망, 탈주 등등 뭐든. 휘인이 동반자 없이 이곳을 벗어나려 한다면 즉시 붙잡고 연락하세요.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대화는 충분히 나눈 것 같았다. 남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에도 걱정을 놓지 못한 용선이 좁은 보폭으로 열심히 따라오는 휘인을 내려다보았다.

배를 내밀면서까지 뒤집어지는 통에 손은 잡고 나왔는데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사고는 제 선에서 해결하면 그만이지만, 혹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건 휘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상처는 제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와 다르게 걱정을 앞세운 용선이 비서를 떨어뜨려 놓고 짧은 심호흡을 시작했다. 비즈니스가 이뤄질 수도 있지만, 목적은 그저 얼굴을 비추고 K그룹의 참석을 알리는 것이었다. 당당한 발걸음과 자꾸만 옆으로 새는 발걸음이 동시에 휘황찬란한 곳으로 들어갔다.


스타트업, 벤처기업, 대기업, 정부 기관 등 각자 있는 곳의 얼굴이라는 사람들이 모인 작은 파티였다. 발을 들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몇몇 사람들이 인사를 올린다. 휘인을 보이는 곳에 놓고 악수를 나눈 용선이 예의상 짧은 인사말을 건넸다.

이야기의 주제는 예상했던 것처럼 가족을 떠나지 않았다. 지주 회사의 회장인 아버지 말고도 형제들이 다양한 사업 부문에서 높은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보는 얼굴마다 그들의 안부를 묻기에 앵무새처럼 일관된 답을 내어주었다. 이따금씩 어린 조카에게 넘어가는 질문을 과감히 쳐낸 용선이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금부터는 찾아다녀야 하는 얼굴이었다. 보다 나이가 많아서, 비즈니스적으로 관계가 깊어서, 현 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서. 이유는 다양했다.

툴툴대는 휘인을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얼굴을 비췄던 용선이 이번에도 어느 한 사람 앞에 멈춰 서서 움직임이 없는 작은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휘인아.



“아이참. 이거 보고 이짜나!”

“이모랑 얘기하러 가?”

“이야, 많이 컸네-. 아빠랑 똑 닮았어. 요고-.”



시야 끝에서 투박한 손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끝이 크게 부풀린 볼에 곧 닿을 것 같았다. 미소를 띤 용선이 좀 더 내린 손으로 휘인의 목덜미를 힘주어 눌렀다. 다가오던 남자의 손이 아욱, 소리를 낸 휘인을 크게 비켜나갔다.

일부러 보란 듯이 피해주었다. 그 누구든, 손길에 어떠한 의도를 담고 있든 휘인을 함부로 만지지 않았으면 했다. 아이가 원해서 하면 모를까, 강제성을 띠는 스킨십은 스스로 좋고 싫음을 명확히 표현하기 전까지 절대로 시키지 않을 셈이었다. 휘인의 의사가 담기지 않은 손길을 옆으로 밀어낸 용선이 남자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둘이 인사는 좀 그런가?”



그렇지만 이쪽으로 오란 건 아니었는데. 휘인을 벗어난 남자의 손이 어깨 위로 올라갔다. 셔츠가 좀 더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그란 얼굴에 뜬 미소는 여전했다. 뜬금없는 말보다 주무르듯 쓰다듬는 움직임에 무게를 둔 용선이 손을 들었다. 거둬내려는 목적으로 힘을 싣자마자, 어깨에 걸려 있던 손이 다른 손에 먹혔다. 등 뒤에서 나타난 익숙한 목소리가 용선의 관심을 낚아챘다.



“못할 이유는 없죠. 잘 지내셨어요?”



이 자리에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갑작스러운 별이의 등장에 용선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럼 잘 지냈지-. 문 대표 덕분에 돈 좀 벌었는데 말이야.”

“별이!”

“에이, 다 대표님 안목이죠. 제가 한 게 있나요. 또 좋은 거 하나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저 잠깐.”

“그래, 그래.”



인사를 더 나누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럴 새도 없었다. 휘인이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래를 가리키자마자 남자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순순히 물러났다. 뒷모습을 보자마자 얼굴을 굳힌 별이가 아니꼽다는 시선을 날렸다.

사람을 봐가면서 추태를 부려야지. 저 새끼는 이제 대표가 하기 싫어서 저러나.

그러나 굳은 얼굴은 오래가지 않았다. 별이는 축 늘어지는 옷자락에 곧바로 웃음꽃을 피웠다. 별이의 팔이 아래로 훌쩍 내려갔다.



“휘인아-.”

“형부우!”

“우리 휘인이 얼굴 좀 보자-. 잘 지냈어?”

“아니이-. 휘이니 심심해써. 이모가, 요옹이이가아….”



손가락 하나를 노골적으로 뻗은 휘인이 그간의 만행을 일러바친다. 당당한 몸짓과 달리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리는 휘인에 넓은 품이 크게 들썩였다.



“픕.”

“저, 정휘인.”



하마터면 터질 뻔한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낸 별이가 휘인을 고쳐 안았다. 흘러내릴 뻔한 짧은 두 팔이 목에 단단히 감겼다. 별이는 당황한 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다. 말을 더듬은 용선이 손부채질로 열을 식히기 시작한다. 감당키 힘든지 결국 등까지 돌려버리는 작은 몸에 별이의 입꼬리가 솟아올랐다.

코앞에 휘인이 있는데도 옮겨간 시선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얼굴을 붙잡고 살살 흔드는 휘인에도 시야에 우드 베이지색의 중단발을 담은 별이가 입술 끝을 당겨 물었다.



“귀엽네….”

“휘이니?!”

“응? 아, 그럼-. 우리 휘인이 귀엽지-.”



그렇지, 우리 휘인이 귀엽지. 귀여운데…. 아…. 용선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첫마디를 캐치해낸 순간부터 열심히 걸었던 자기 암시가 실패로 돌아갔다.

티가 나게 늦었던 별이의 반응이었다. 작은 소리가 어느 방향으로 날아왔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조카를 칭찬하는 말에도 얼굴의 열을 쉽사리 내리지 못한 용선이 곧 녹아 없어질 것 같은 귓불을 매만졌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이 온단 얘기가 있었나. 아니구나. 스타트업과 벤처가 있는 자리라면 당연히 올 텐데. 휘인에게 정신이 팔려 별이에게 따라붙는 단어들을 간과했다.

두 사람을 언제까지고 등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동그랗게 만 입술 새로 숨을 길게 밀어낸 용선이 또 한 번의 손부채질을 끝으로 혼비백산한 정신을 추슬렀다.



“벼리-.”

“응?”

“용이이-.”

“…응?”



바닥으로 내려온 휘인이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미 달아난 전적이 있는 정신이 더 먼 곳으로 날아갔다.



“화해해-.”



단순히 휘인의 부름에 응했을 뿐인데 몇 년 전 잃어버렸던 온기가 손가락에 얽혔다. 그 온기의 주인이 별이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뻣뻣하게 굳은 용선이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별이를 바라보았다.

예상에도 없었던 스킨십이 네 개의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켰다. 표정 관리가 안 될 만큼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먼저 손을 당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데 합쳐진 두 사람의 체온이 멈춰 버린 시간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온도를 높여갔다.



“사과, 사과….”

“…….”

“…….”

“그응데-. 누가 잘못해써어? 벼리 형부?”



화해를 제안하며 사과란 단어를 꺼냈던 휘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가 종국엔 별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싸움의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보금자리를 떠난 사람은 명백히 별이였다. 그러니까 잘못한 사람은 형부가 아닐까. 단순하게 생각한 휘인이 별이를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어, 어…. 그, 내,”



반면에 휘인에게 지목당한 별이는 한 음절씩 끊으며 말을 더듬었다가 입이 크게 벌어지기 전에 바보 같은 짓을 그만두었다. 여기서 잘못을 인정하면 과오가 덮어질까. 후회를 끊어낼 수 있을까. 잘못했다 말하면, 내가 잘못했다 빌면 우리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설프게 굽어있는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편 별이가 용선을 먼저 감쌌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데?’

‘오늘 2억 3천 날렸어.’

‘좋은 경험 했네.’

‘와아, 나 심장. 느껴져? 느껴져?’

‘그깟 2억에도 이렇게 떠는데 너 나랑 결혼 생활은 어떻게 하니?’

‘아, 이건 설레는 게 아니! 잖, 아….’



끝을 알면서도 왜 감정을 숨기고, 매 순간 머뭇거렸을까. 그 당시엔 돈을 끌어당기고 인맥을 넓혀가던 때였다. 자존심을 굽히는 일은 밥 먹기보다 쉬웠고 양치질보다 빈번했다. 그런데 정작 용선의 앞에서는 한 번도 굽힌 적이 없었다. 도리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기만 했다.

용선이 손안에서 꿈틀거린다. 그대로 손목을 비틀어 빠져나가는 용선에 별이가 씁쓸한 미소를 올렸다.



“휘인이 좀 부탁할게.”

“그래.”



발걸음부터 뗀 용선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난다. 두 손으로 휘인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별이가 걱정 말고 다녀오라는 듯 내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계속해서 비추던 시선이 휘인에게 돌아간 순간,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붉게 물든 귀가 모습을 몰래 드러냈다.








* * *

 







호들갑 떨지 마.

용선은 속으로 같은 말을 반복해서 외치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들어간 지 30분도 채 안 돼서, 그것도 휘인을 두고 홀로 나오니 대기하던 비서가 발 빠르게 달라붙는다. 고개를 두어 번 젓는 것으로 제자리에 돌려보낸 용선이 파티 장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찾았다.

별이의 온기가 손끝에서 가시질 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리 크지 않은 힘에 갇혀 있었던 용선이 주시하는 얼굴을 떨쳐내자마자 자리에 멈춰 섰다. 꺾인 복도에는 소리를 내는 이도, 보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가까운 벽에 기대선 용선이 팔짱을 낀 채 숨을 크게 들이켰다. 새하얀 셔츠가 전에 비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서로 등을 돌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날을 포함해도 별이와 마주친 날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스케줄이 겹치지 않도록 밑에서 눈치껏 조정을 했다. 마주쳐야만 하는 날에는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난 시상식 때처럼 대화도, 인사도 일절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손을 잡았다. 왜?

잠깐이나마 별이에게 내줬던 손을 밖으로 꺼낸 용선이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날들과 오늘을 나란히 두고 다른 점을 찾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 이유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이미 저쪽에선 충분히 예상한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럼 뭐가 있을까. 시간을 갖고 차분히 생각하던 용선이 이내 납득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휘인이가 있었구나.


그저 감정의 골이 깊은 다툼으로 알고 있는 휘인이 오늘 그 사람과 제 사이에 있었다. 계산된 행동이 난무하는 당시에도 휘인만은 제 혈육처럼 끔찍하게 생각했던 별이였다. 그러니까 화해를 종용하는 아이에 마지못해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닐까. 다른 추측을 할 것도 없이 첫 번째로 낸 결론이 정체된 열을 빠르게 날려 보냈다.

생각해보면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용선은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고작 악수 하나에 흔들렸던 모습을 들킬까, 가장 먼 곳으로 도망쳤던 건데 꼴이 조금 우습게 되었다.

나온 김에 차림새나 점검해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면 항상 신경 쓰곤 했던 행동이 별이를 만나면서부터 엉망이 된 탓이었다. 어깨 위로 신체의 어디를 얼마나 지분거렸는지. 흐트러진 머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목적지를 바꾸지 않은 용선이 걸음을 마저 옮겼다. 선으로 이루어진 여자가 눈길을 이끈다. 당연하게 그 밑을 지나쳤던 용선이 느닷없이 길을 가로막는 입간판을 보고 자리에 멈춰 섰다.



‘청소 중’



청소, 중? 아니나 다를까 문을 거칠게 여닫는 소리가 일대를 울리기 시작했다. 입간판을 재차 읽어내린 용선이 발소리를 죽인 채 뒤로 물러났다. 참석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 시간에, 그 층의 화장실을 이렇게 경우 없이 청소를 한다…. 숱한 경험과 촉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주위에서 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비밀스러운 공간에 단둘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용선이 복도 한가운데서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넌 바람이나 잘 잡아. 문 대표 여자 좋아하잖아. 꼬시는 건 내가 해. 괜찮아, 아무도 없어.”



난데없는 상황임은 확실했다. 이 사람까지 목소리로 뛰어드는 것을 보면.



‘당신이 하자는 결혼할게.’



앙칼진 목소리와 확신에 찼던 목소리.



“몇억 그거, 걔한텐 껌도 아니네요-.”

‘그러니까 50억, 꽂아줘요.’



안 주면 말고 식으로 구걸하는 자와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바랐던 사람. 별이를 언급한 여자에게 별이를 겹쳐 보고 있던 용선이 비웃음을 흘렸다. 

사람이라는 것 외에 공통점을 찾아볼 수가 없네. 이건 뭐, 종자 자체가 다른데?

자연스레 비교가 되었다. 한때 제 사람이었던 사람은 피와 시간을 쏟아서 얻어낸 돈을, 보란 듯이 생전 처음 일군 회사의 주식으로 손에 쥐여 주었다.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던 돈은 그렇게 뜻밖의 작은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그런데 이쪽은 절실함부터 보이지 않는다. 돈이 돈을 부른다고 하지만, 거저 얻은 것처럼 보이는 돈도 어쨌거나 누군가는 피땀을 흘려 벌어들인 돈이었다. 그런데 설설 기어도 모자랄 판에 이런 태도로, 심지어 투자금을 그냥 받아 삼키겠다? 본디 투자라는 것이 불확실한 수익률과 원금 손실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그건 될성부른 떡잎을 고른 후의 얘기였다.

어디서 겁도 없이. 투자라는 명목으로 등 치려는 애기를 벽 건너편에 둔 용선이 벌어진 셔츠 앞섬 사이로 뜨끈한 목을 매만졌다.



“걱정 말라니까? 걔 예쁜 여자들한테 잘 줘. 아, 물론, 돈.”

“…….”

“몸까지 바라기엔 그 여자 눈치가 좀 보이네. 뭐, 상관없나? 하긴 이미 헤어졌는데 자기가 뭔 할 말이 있어?”



용선은 뒤를 더 들어볼 것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저급한 대화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굳이 피해를 사서 입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문제의 화장실에서 멀리 떨어진 용선이 파티 장소와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에 몸을 기댔다. 아까와는 다른 열기가 용선을 덮쳤다.

몇 분쯤 흘렀을까, 걸어 나왔던 곳에서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마주 보자마자 움찔하는 여자에게 싱긋 웃어준 용선이 예의상 건넨 눈인사 끝에 다시금 화장실로 향했다. 역시나 청소 중이라는 입간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용선은 사진을 찍는 것처럼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여자를 떠올렸다. 외모로 보면 20대. 인맥과 돈을 바라고 그 사람을 잡으려는 거라면…. 스타트업, 쪽인가?



“…….”



돌아선 용선이 별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귀띔은 안 해줘도 되겠지.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니까. 실패를 경험으로 삼던 예전과 달랐다. 지금의 별이는 될 것 같은 새싹을 제법 능숙하게 골라내는 투자자였다. 제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그 눈에 걸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몸까지 바라기엔 그 여자 눈치가 좀 보이네. 뭐, 상관없나?’



생각할수록 기분이 좀 그렇네. 긴 시간 끝에 뛰쳐나왔던 장소를 다시 찾은 용선이 눈꺼풀 위를 가볍게 눌렀다.

떠오르는 말은 많았지만 입을 열자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탓에 당사자 입장에선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관계였지만 남들 눈에는 이미 끝난, 아무 사이도 아닌 ‘남남’이었다.

애먼 곳에 흘려보낸 시간이 길었다. 자리를 벗어난 사이에 인사를 나누지 못한 얼굴들이 많이 나타났다. 인사를 가능한 짧게 마친 용선이 중간중간 한숨을 내쉬며 휘인을 찾아 나섰다.

키가 작으니까 임시 보호자를 찾는 게 빠르려나. 악수를 하면서도 주변을 흘끔거리고 있을까, 용선은 스탠딩 테이블에 반쯤 엎드린 별이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보고 들은 것을 일러주지 않아도 잘 거르겠지 싶었던 얼굴이 턱을 괸 자세로 조금 전의 그 여자를 바라보면서 씩 웃고 있었다.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는 휘인과 손장난으로 놀아주면서도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별이였다. 앞사람의 어깨 너머에서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발견한 용선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사람을 느릿하게 번갈아 보았다.



‘걔 예쁜 여자들한테 잘 줘.’



순전히 의아함이었다. 비스듬히 날아간 시선이 별이의 환심을 사려는 여자에게 꽂혔다. 조금 전에 듣고 왔던 여자의 말에도, 현재 저 사람의 태도에도 거짓이 없다면.


못 본 새 눈이 많이 낮아졌네. 문별이. 투자자가 그럼 못 쓰는데.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또각또각, 소리가 세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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