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 난 쪽창을 보았다. 작은 유리 너머로 빗방울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다.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았다. 꼭 그것과 같은 방울들이 톡톡 튀고 있다. 샛노란 기름이 끓어오르면서 뻐끔거리는 광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홀에선 요란한 탄식과 프리킥에 실패한 키커를 욕하는 목소리가 터진다. 후드에 달린 타이머에서는 삐삐삐, 하고 알람이 비명을 질렀고 주방 바깥에서는 전화기가 일제히 울렸다.

덜컥. 네, 태양맨션 101동 304호요? 아, 좀 전에 출발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가람통닭입니다. 예, 예. 반반으로 세 마리요. 예. 카드결제요. 무 많이! 알겠습니다.

수많은 소리가 켜켜이 쌓여간다. 그것들은 제가 서 있는 곳과 그 너머를 분리하고 있다. 바로 근처의 소음들마저 현실감이 없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여도 변하는 것은 없고 오직 눈앞에서 끓고 있는 열기만이 진짜 같다.

시선을 돌리자 전화기 너머의 상대를 향해 굽실거리는 고모부가 보였다. 재연은 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노랗고 투명한 액체 위로 열기가 일렁였다. 저 비굴하고 잽싼 목소리는 여기에 닿자마자 톡톡 튀겨지고 말 것이다. 그 생각을 자각하자마자 몸이 멈칫거렸다. 팔을 천천히 쓸어내리자 어느새인가 자잘한 소름이 돋아 있었다.

숨을 천천히 내쉰 재연은 손을 뻗어 타이머를 끄고 통닭을 건져냈다. 닭의 껍질 위로 맺힌 기름이 자글자글 끓다가 뚝뚝 흘러내렸다. 한쪽에서 빼 든 칼의 나무 손잡이는 기름을 오래도록 먹어 이젠 그냥도 번들거렸다. 재연은 능숙한 손짓으로 통닭을 토막 냈다. 큼직한 칼 아래 닭은 툭툭 잘려나갔다.

동네 주민들은 재연의 손놀림을 볼 때마다 몸집은 땅콩만 한 게 손끝은 야무지네 하고 와르르 웃었다. 그 농담은 하나도 재미없었지만, 뒤에 버티고 선 고모부의 눈길이 무서워 어설프게 웃었던 날이 떠오른다. 재연은 묵묵히 튀긴 닭을 잘라냈다.

「오리지널이요.」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큼큼하게 낸 소리는 턱턱 막혀 울리는 것 같았다. 물속… 아니, 기름일까. 기름 속에 잠겨 말하는 것처럼. 일평생 그랬다. 그랬기에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모부가 오리지널 치킨이 담긴 상자를 밖으로 채갔으므로 들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몇 번 그런 움직임이 반복되자 한쪽에 쌓여 있던 닭이 점차 바닥을 보였다. 재연의 지휘 아래, 닭들은 얌전히 튀김옷을 입고서 기름 속에서 얼마간 헤엄치다 툭툭 잘려 곱게 포장되었다. 이 열기 그득하고 답답한 주방은 완벽하게 재연의 손아귀 안에 있는 공간이었다.

이번엔 닭 위로 양념을 쏟아부었다. 갓 튀겨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 위로 붉고 끈적이는 양념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주걱으로 그것들을 뒤섞으니 양념이 바삭한 튀김옷 위로 얹혀 배어 들어간다. 닭이 흘리는 피 같다. 재연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며 상자에 포일을 한 겹 깔았다. 양념치킨을 그냥 담으면 상자가 습기에 젖어 찢어지거나 달라붙기 쉬우니까. 바삭거리는 은빛의 카펫 위로 붉은 몸뚱이들이 하나둘 누여진다.

양념치킨까지 밀어 내보내고 나자 고모부가 좁은 주방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제 다 됐다.」

주문 전화가 뜸해졌으니 이제 좀 쉬라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홀 바깥의 시계를 보았다. 짧은 바늘은 1과 2의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네.」

재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 한 편의 간이의자 위에 앉았다. 간이의자의 꺼먼 상판은 기름이 튀고 닦이고를 반복한 끝에 매끈하고 반들거리고 있었다. 기름. 기름기. 재연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양손에 자르르 광택이 맴돈다. 코를 킁킁거려 보았지만 이미 기름내에 무뎌질 대로 무뎌진 후각은 잘 반응하지 않았다. 재연은 제 손을 양 무릎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분주하게 끓고 울리고 움직이던 모든 주방의 부속품들이 정적에 잠긴다. 작고 밭은 숨을 내쉬며 휴식을 취한다. 바로 그때였다.

딸랑!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재연의 몸이 움찔 떨렸다. 고모부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셔츠를 입은 여자가 고개를 불쑥 디밀고서 입을 열었다. 가게 안으로는 몸이 다 들어오지도 않은 채였다.

“저기요, 요 아래 삼거리 주유소인데요. 치킨 여섯 마리만 포장해주세요.”

순간 재연은 머리에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방 바깥을 내다보았다. 문 사이로 머리를 들이민 실루엣이 보였다. 여자의 얼굴은 어둑한 가게 불빛 탓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만, 그 소리만 선명하게 귀까지 헤엄쳐왔다. 선명하게.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재연은 선명했던 그 목소리를 곱씹었다. 속으로 몇 번을 중얼거리고 맛본다. 저기요, 요 아래, 삼거리. 주유소인데요. 치킨. 여섯 마리. 하나씩 떼어 입안에 단어를 굴려본다. 한글을, 말을 처음으로 떼는 사람처럼 같은 단어를 중얼거린다. 별 것 아닌 글자들이 꼭 카라멜처럼 녹아 끈적하게 혀에 달라붙는다. 여자의 목소리는 달았고 자꾸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다시 듣고 싶었다.

재연이 넋을 놓고 있는 동안 문이 열린 틈새로 흐릿한 빗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고모부가 「여섯 마리?」 하고 되물었지만, 여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문을 홀랑 닫았다. 문에 달린 종이 또다시 요란하게 울리자 고모부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도 넋을 놓고, 뭐 하고 서 있어? 얼른 여섯 마리 올려.」

재연은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불쾌감을 목도했다. 순순히 기름에 치킨을 넣자 지글거리는 기포가 요란하게 터져댔다. 후드 위의 타이머를 맞추고 미리 접어둔 상자를 꺼내왔다. 소포장 된 깨소금과 나무젓가락을 얼마간 봉지에 담고 칼과 도마를 다시 꺼내올 때쯤 타이머가 울린다. 미리 한 번 튀겨놓은 닭은 금세 바삭해져서 되돌아왔다. 칼을 들어 고기를 자르며 생각했다. 그 여자의 목소리만이 나에게 선명한 이유는 뭘까? 툭툭 잘려나가는 살코기와 뼈 아래 함께 토막 난 생각이 아무렇게나 뒹군다. 물끄러미 시선을 내려 본 뼈의 단면은 조금 까맸다.



*



포장까지 마친 후에도 여자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다 식게 뒀다가 맛없다고 욕하려 하는 게 분명하다고 투덜거리는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그는 어느 소국의 왕처럼 강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가서 좀 찾아봐. 근처에 있나.」

「네.」

재연은 가게를 벗어났다. 등 뒤로 욕설을 뱉는 목소리 몇 마디가 제멋대로 구겨져 굴러갔다. 잰걸음으로 가게를 벗어나자 덜 후덥지근하고, 기름지지 않은 숨이 저를 반긴다. 그랬는데도, 여전히. 숨을 쉴 때면 호흡기로 기름이 파도치듯 밀려오는 착각이 든다. 재연은 숨을 짧게 끊어 쉬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재연은 가게의 건너편에서 사그라지고 있는 붉고 조그만 빛을 보았다. 빛은 흐릿한 연기에 휩싸여 있다. 몇 걸음을 뛰어 처마 아래로 건너갔다. 비는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고 몇 방울은 재연의 등을 툭툭 두들겨 자국을 멋대로 남겼다.

“어, 치킨 다 됐니?”

가까이 다가가자 선명하고 밝은 목소리가 먼저 달려 나온다. 다시금 몸을 파들 떨다가, 재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서 재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자는 담배를 비벼 껐다. 배고프다고 투덜거리며 먼저 나아가는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동그란 뒷머리. 달랑거리는 머리카락 끝이 시야를 간지럽힌다.

투덜거리고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는 재연에게 여과 없이 들려왔다. 그래서, 자꾸 벌어지려는 입을 힘을 주어 다물었다. 지금까지 재연에게 세상의 모든 목소리는 효력이 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뭐든지 그녀를 괴롭히거나 깔보거나 조롱하는 소리였기 때문에. 좁은 시골 마을에서 구성원 전체에게 바닥으로 인식된 여자아이는 귀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간혹 있는, 나쁜 뜻 없이 접근한 이들마저 목소리에 동정이며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재연은 오히려 그게 더 불편했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감정을 갖지도 말아야지.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비쳐 보이는 부채감은 되려 사람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그랬기 때문에ㅡ 아무런 감정 없이 제 의사만 전해오는 목소리는, 큰 충격이었다. 사람의 말을 처음 듣는 아기가 그러했을까? 문명을 처음 접한 원시인이 그랬을까. 특별할 것 없을 단어와 문장이 재연에게만큼은 세상 무엇보다 특별했다.

여자의 곧은 등을 바라보며 그가 내뱉은 말을 하나둘 되새긴다. 혀가 어느 모양으로 구부러졌고 입이 어떤 형태로 벌려졌는지 천천히 떠올린다. 머릿속에서도 그 형태는 소리를 만들어내어 재연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딸랑ㅡ

그러다가 다시 들려온 종소리에 재연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눈을 깜빡이며 가게로 들어섰다. 고모부는 어서 가져가라는 듯 치킨들을 몽땅 홀 테이블 위로 늘어놓아 둔 상태였다. 여자가 내민 카드를 고모부가 긁는 동안 재연은 그 치킨들을 보았다. 차가 있지 않다면 혼자 들고 가기에는 힘들 텐데. 비도 오고. 그리고 카드를 받아 든 여자도 그제야 그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난처한 눈으로 봉지를 보다가 고모부를 향해 입을 뗀다.

“저, 혹시 지금 배달은 안 되나요?”

고모부는 퉁명스레 대답한다.

「아가씨. 지금 시계를 봐요. 몇 시인가. 벌써 두 시가 다 되었잖아. 평일은 열두 시면 배달원이 퇴근해. 그리고 요즘 같은 장마철엔 더 일찍 들여보낸다고.」

이 치킨집은 번화가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한갓진 곳에 자리 잡고 동네 장사를 하는 집이었다. 오늘처럼 축구 경기가 있지 않은 이상 늘 오던 동네 주민들만 오곤 하는 그런 가게. 그런 곳이니 새벽까지 배달원을 상주시켜봐야 인건비만 나갈 뿐이다. 고모부는 그렇게 대꾸하더니 흘끔 눈알을 굴린다.

「야, 네가 좀 들어드려라.」

손님이니 무시하긴 어렵고 자기가 가긴 싫었던 모양이지. 그에게 떠밀린 재연이 여자의 코앞에 멈춰 섰다. 재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치킨 봉지를 있는 대로 쥐었다. 여섯 개 모두는 힘들었지만 네 개까진 들 수 있었다. 여자는 그 모습을 말없이 보더니 남은 두 봉지를 한 손에 쥐어 들고 가게를 나섰다.

다시 나선 거리는 검고 어둡기만 했다. 비 내리는 새벽의 동네는 고요했고 가끔 개 짖는 소리만 멀리서 났다. 주홍빛 가로등이 머리 위에 달처럼 떠 있었고 재연과 여자는 길어지고 짧아지는 그림자를 보며 묵묵히 걸었다. 우산을 기울여 씌워주는 여자에게서 어딘가 친숙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우산에 빗방울이 부딪혀 올 때마다 토독 토독 하는 소리가 물안개처럼 흐릿하게 났다. 재연은 꼭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매일 거기서 일해?”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질문이 실례가 되지는 않을지 염려하는 어투였다. 그런 감정마저도 어쩐지 역겹지 않고 찌릿했다. 어째서지? 곰곰이 생각해보다 동정 따위의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걱정이 어린 말투여서 그럴까 싶은 생각을 했다. 단순히 그 이유일까? 이해는 잘 안 되었지만, 재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들지는 않아?”

여자가 이렇게 신경 쓰는 건 아마 재연의 몸집이 작고 왜소해 어려 보이는 탓인 데다, 눈앞에서 밀쳐지고 무시당하는 모습을 봐서 그럴 것이었다. 비 내리는 새벽 2시에ㅡ 어둑한 길의 심부름을 거리낌 없이 보내려는 모습마저 보기도 했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재연은 이 여자가 외지인일 것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 조그만 동네에서 고모부와 둘이 살며 수탈당하는 재연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수탈收奪. 그 말이 어쩜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도둑맞았으며 현재까지도 매여 있지 않은가. 재연은 대답 없이 고개를 들었다. 어둡고 먹구름이 낀 시골 하늘 위로 별빛이 드문드문 비쳤다. 재연이 대답이 없자 여자는 한 마디를 더 물었다.

“혹시 내가 불편하면 말 걸지 말까?”

“……아니요.”

재연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답을 내뱉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눈이 댕그랗게 커졌다. 여자가 놀라서는 왜 그러느냐고 되물었지만, 재연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나에 대해 불쌍함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래? 내가 마음이 편안해서 그런 거야? 하도 말을 안 하려 해 벙어리 소리까지 듣는 처지에서는 놀라고 기함할 일이었다. 이 여자가 뭐기에? 머릿속이 털실 뭉치처럼 엉켜 들었다. 입을 열어 몇 마디를 더 내어 본다. 아, 아아ㅡ 그래도 변화는 없다. 힐끗 옆을 보니 재연을 기다려주는 모양인지 곁에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자는 더 채근하거나 입을 열지 않고 가만가만 들여다보아 주기만 했다. 손끝에 걸린 봉지에서 온기가 사그라지고 있었지만 둘 중 누구도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아니에요.”

다시 목소리를 내어도 그래. 재연은 고개를 올려 여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동공을 감추었다가 드러내는 동안, 그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여자 역시 재연과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여자의 까만 눈동자 안에 가로등의 주황 불빛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복숭아뼈 부근에 빗물이 몇 방울씩 튀어 흘렀다. 이제 빗소리만 자욱하게 주위에 가득했다.

“괜찮아?”

여자는 그저 그렇게 물었다.

“네.”

재연은 대답했다.



*



주유소에서 나는 불빛이 저 멀리 신기루처럼 보였다. 그 사이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져 한 걸음도 제대로 떼기가 힘들었다. 재연과 여자는 길 위에서 빗줄기에 갇히다시피 했다. 한참을 우왕좌왕하던 끝에 재연이 길가에 있던 버려진 집으로 여자를 끌어당겼다. 아주 잠깐,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까지만. 젖어 질척거리는 마당에 둘의 발자국이 나란히 새겨졌다가 빗줄기에 씻겨 내려갔다.

버려진 집은 낡고 녹슨 양철 슬레이트 지붕을 가지고 있었고, 우산 하나보다는 튼튼하게 비를 막아주었다. 재연과 여자는 먼지 쌓인 마루 위를 손으로 대충 쓸어내고 앉았다. 눈앞에서 비가 장대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와, 이번 장마는 비 제대로 오네.”

여자가 묶었던 머리를 풀어 물기를 털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재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은 한 해 내내 가물어 작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어두운 얼굴로 농협 직원과 수매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동네 어른들이 떠올랐다.

“이번 해에는 가물 걱정은 없을 것 같아.”

여자는 그렇게 말을 건네고는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여 왔다. 조금 가까워진 눈동자가 빤히 재연의 얼굴을 더듬어보고 있다.

“혹시 아까는, 왜 놀랐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재연은 그 표정들과 물감에 풀린 것처럼 번져가는 시야를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불편하면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가볍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발끝에서 가볍게 튀기며 구르는 빗방울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기름방울이 튀는 것처럼 보였다. 재연은 더듬더듬 입을 뗐다. 손아귀에는 잔뜩 힘이 들어간 채였다.

“저, 저한테서 기름 냄새나지 않아요?”

“아니? 안 나.”

긴장이 무색하게도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그러는 나야말로 안 나니? 나도 같은 기름밥 먹는 처지인데.”

여자는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었다. 빵야 빵야, 하는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주유하는 것을 두고 총 쏜다는 표현을 하는 모양이다. 주유기 끄트머리가 딱 그런 생김새라고.

“…안 나요.”

재연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시선을 내려 본 발끝에서 무엇인지 모를 것이 자글자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상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고 목소리는 예상보다 빠르게 내뱉어졌다.

“저는 평소엔 다, 그냥. 기름 속에 빠져 사는 기분이고.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다 그 안에 갇혀 있다고만 여겼거든요. 다 답답하고.”

“응.”

“그런데 어,….”

순간 말이 막힌 모습에 여자가 눈치 빠르게 웃었다. 언니라고 불러.

“……네. 언니, 가 말씀하시는데… 평소랑은 달라서. 언니한테 말하는 것도 느낌이 달라서요.”

재연은 제 부족한 말솜씨가 그날 유독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제 속내를 처음으로 드러내 보는데 어쩜 이렇게 더듬더듬, 두서라고는 없이. 이렇게 모자라게. 그러나 그 모든 걱정 앞에 선 여자는 가만히 눈을 마주쳐왔다.

“그거, 나는 같이 기름밥 먹는 사람이라 그런가?”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쾌활하게 웃었다.

“그, 왜. 똑같이 기름 속에 있는 사람이라 잘 통하는 걸 거야. 나도 차에 주유기 꽂아주면서 이거에 빠져서 콱 죽어버리겠다는 생각 많이 했거든.”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꽤 신빙성이 있다고 재연은 생각했다. 그런 재연의 생각을 눈치라도 챘는지 여자가 허벅지에 손을 쓱 닦더니 내민다.

“빠져 죽어도, 혼자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인사라도 하자. 우리. 웃어 보이는 여자의 이가 유독 희었다. 바닥의 액체는 이제 끓지 않는다. 빗방울이 가볍고 경쾌하게 튀고만 있다. 재연은 시선을 바닥에서 여자에게로 돌렸다. 여자가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지었다.

나는 주유소에서 일하는 최지우. 너는?

재연이요. 양재연.

쥔 손은 비를 오래 맞았어도 차갑지 않았다. 살갗에 느껴지는 희미한 온기에 재연은 어째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지우는 역시 이 동네 사람은 아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여행 중인데, 하필 오토바이가 고장 나서 고치는 동안 머무르기로 했다고 했다. 오래된 오토바이라 부품을 조달해 오는 데만 몇 주가 걸린다고 했다. 본래 사는 집은 이 동네에서 꼬박 두 시간을 운전해서 가야 한다고. 그리고 재연은 네 번째 만남에서 그렇게 되물었다.

“두 시간이면 어떻게든 갈 수 있지 않아요?”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이었다. 재연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하게 스며들어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휴대전화도 없고 일도 매일같이 새벽에야 끝나니 둘이 만나는 것은 이렇듯 다 늦은 새벽녘이었다. 치킨을 사러 몇 번을 더 찾아온 지우와 눈인사를 하는 그 날이면 어김없이 이 집에서 다시 만났다. 장마는 길어졌고 둘이 만나는 날에는 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뭐야? 날 보내고 싶어?”

지우가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재연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런 게 아니라….”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내가 뭐라고? 고작 몇 번 만났을 뿐인 아무것도 아닌 여자애가 어떻게. 지우는 뒷말을 더 듣지는 않은 채 재연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머리통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어이구, 우리 재연이. 어쩔까. 응? 나, 가지 말고 여기서 쭉 살까?”

그 말에 심장이 덜컹 떨어져 내린다.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여기서 쭉 살아줄 수 있어요? 안 그럴 거잖아. 재연은 심장까지 스며드는 옅은 온기에 어쩔 줄 몰랐다. 끊어, 내야 하는데.

일이 조금이라도 한가할 때면 처음으로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지우도 그럴까 생각하면 마음은 차게 식어 내린다. 생각해보면 지우는 늘 빙글빙글 웃고 있고 쾌활하게 인사해왔다. 스스럼없이 손을 뻗었고 대화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게 제게만일까. 마음 위로 장맛비가 쏟아져 내린다. 지우는 그저, 어린 왕자의 별에 불시착한 조종사 같은 손님일 뿐이니까. 오토바이가 다 고쳐지고 나면 그의 별로 되돌아가고 말 거니까.

가야 하잖아요. 차마 뱉지 못한 말이 가슴 한편에 돌덩이처럼 얹혀 숨을 탁 막는다. 조용한 마당에 빗소리만 요란했다.



*



지우는 모든 것이 능숙했다. 날이 춥다며 몸을 꼭 안아주고 보듬어 줄 때도, 입술이 파리하다며 부드럽고 따뜻한 제 것을 가져다 댈 때도. 재연이 생각하기에 억지스러운 부분이라고는 없었고 모든 것이 지우의 말대로 되었다. 몸은 금세 따뜻해졌고 입술은 빠르게 혈색을 되찾았으니까. 이상하다거나 잘못됐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재연은 그 체온에 침식되어 갔다.

몇 번을 닿아도 갈증이 나고 빗물처럼 차오르는 잔잔하고 끈질긴 온기가 온몸을 뒤덮고 잠식해간다. 아무런 대가 없이 다가온 온기는 재연에게만큼은 그 어느 것보다도 소중했고 뜨거웠다. 데일 걸 알면서도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제가 매일같이 기름에 튀기는 닭이 이런 기분을 느낄까? 이렇게 뜨거울까. 더울까. 기름이 끓어 넘칠 때 같은 토도독 하는 소리가 누여진 재연의 머리맡에서 났다.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지우에게 휘감겨 체온을 나누는 동안 재연은 아무 생각도 갖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지기만 했다. 지우의 잠긴 목소리는 이제 빗소리와는 섞이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재연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해도 될까?”

재연은 무엇을 묻는지 모를 만큼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로 제게 다가온 고모부의 팔에 칼을 꽂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처럼 징그럽게 느껴지지는 않았고 단지 더 깊고 내밀한 온기를 향해 계단을 밟아간다는 기분만 들 뿐이었다. 재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주위가 따뜻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지우가 손을 뻗고 입을 움직이고 숨을 건넬 때면, 온도를 느끼는 신경이 몽땅 한곳에 엉겨 붙어 그곳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숨이 거칠어지고 격해질수록 박동은 빨라졌고 열이 올랐다.

달뜬 숨이 몰아치고 벅차올라 컥컥 숨을 토해낼 때. 그때 재연은 비로소 호흡하는 기분을 느꼈다. 끊어 쉬는 숨이 아니라, 길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 깊은 곳까지 축축한 공기가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



지우와 있는 시간은 환상 속에 떨어진 것 같았다. 몸을 부대끼고 있을 때도, 손을 잡고 한 우산 아래서 걸어 다닐 때도, 단순히 이야기를 나눌 때도. 꼭 꿈결 같다고 재연은 생각했다. 이 생활이 언제까지나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되돌아봤을 때 소중한 기억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너는 뭘 좋아해?”

“언니….”

“끼 부리니?”

“아니, 정말인데….”

“그럼 질문을 바꿔서. 뭐 해보고 싶은 거 있어?”

“강아지? 강아지 키우고 싶어요.”

“키워 본 적 없어?”

“고모부는 개가 보이면 보신탕집에 연락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라서요.”

“아…, 음. 응. 그랬구나.”

“언니는요?”

“난… 나도 강아지나 키울까!”

머리칼을 거칠지만 아프지 않게 헤집는 손길. 다정한 웃음과 조용하고 나직한 대화. 늘 주위는 어두웠고 별이라곤 보이지 않는 흐린 하늘이었다.

“좋아요. 강아지 귀엽겠다.”

“귀엽지. 나는 이미 한 마리 키우는 기분이지만?”

“네?”

습한 공기와 질척거리도록 다 젖어버린 땅, 내리꽂히는 비. 그리고 끊임없이 퍼지는 무수한 동심원들. 주변을 흐릿하게 메우는 물안개…


유달리 장마는 길어지고 있었다.



*



술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얼굴이 대뜸 일그러진다.

「요즘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냐? 딴 놈이랑 눈이라도 맞았어?」

고모부가 불쾌한 얼굴로 으르댔다. 재연은 얼른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다. 몇 년간 학대당하면서 고모부의 화에 대응하는 태도를 몸으로 익힌 탓이다.

「이 잡것!」

휘둘러지는 팔을 피하면 더 혼났는데, 가만히 더 맞아야 하는데. 재연은 눈을 꽉 감고 팔을 들어 올렸다.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곳저곳에 두들겨지는 주먹이 묵직해 신음이 절로 났다.

그렇게 때리고 있으면서도 그는 점점 머리에 화가 들어차는 모양이었다. 가게 문 앞에 달린 팻말을 CLOSE로 돌려놓고서는 기세등등하게 다가왔다.

「교육을 해 주지 않으면 이렇게 기어올라, 응?」

그가 허리띠를 움켜쥐고 풀어내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머리에 열이 오른 탓인지 그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의 손끝에서 쩔그럭하는 소리만 계속 났다.

그 광경을 보면서 재연은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이든지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재연은 벌벌 떨었다. 이대로 있으면 난 분명히. 이대로는 안 돼. 채찍같은 허리띠에 맞아 죽든지, 아니면 그렇게… 되고 말 거야. 안 돼…… 머리가 싸늘해졌다.

재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격노로 일그러진 고모부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다리가 풀리고 얼굴이 눈물에 젖어 들었다. 시야가 부옇게 변해갔다. 싫어, 안 돼.

「개 같은 년.」

씹어뱉는 목소리에 이어, 이윽고 덜걱하는 소리가 났다. 재연은 허리띠의 버클이 풀리는 그 순간 몸을 돌려 가게를 뛰쳐나갔다. 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거역할 수 없는 자리를 벗어나려는 착각이 들어 온몸이 묵직했다. 기름 속에서 걷는 것처럼 걸음걸음마다 힘이 들고 다리가 뻑뻑했다.

그래도 재연은 달렸다. 재연의 발걸음마다 고모부의 외침이 족쇄가 되어 달라붙는다. 재연은 빗줄기를 헤치고 헐떡이며 뛰어갔다. 어느새 길 위에 남겨진 것은 혼자였고 눈앞에 뻗어진 길은 버려진 집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치킨 한 마리 주세요.」

여느 때처럼 앞뒤 가릴 것 없이 가게 문을 열어젖힌 지우는 이상함을 느꼈다. 테이블이며 의자는 몽땅 바닥을 나뒹굴고 있고 주인은 씩씩거리며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흘끔 저를 보더니 침을 퉤 뱉는다. 보아하니 장사할 기세는 아닌지라 지우는 몸을 돌렸다. 얼결에 들여다본 주방 안에 재연은 없었다.

「뭐야, 오늘은 치킨 안 먹나 봐?」

주유소에 돌아오자 지우의 빈손이 눈에 띈 모양이다. 투실투실한 살집의 사장이 허허 웃으며 물어보았다. 지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예, 오늘은 별로 안 당기네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구멍이라도 난 마냥 비가 들어붓고 있다.

「비가 와서 그런가.」

사장은 근래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드물다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허허 웃었다. 장마는 너무 길어져 홍수 피해를 대비하고 있을 정도였고 외지인인 지우래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사장이 바라본 그는 그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여유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존재도 못 될 이런 계집아이. 남의 집에 얹혀 식비를 축낼 뿐인 기생충.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치킨을 튀기고 잘라내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한 년. 일생을 들어온 제 수식어라고는 그런 것 따위밖에 없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흐른다.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 눈물에 젖은 게 비에 젖은 것보단 나을까? 재연은 자신의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 아니면 비에 젖은 게 차라리 나을까.

멍하게 마당을 보다 맨발로 마루에서 내려섰다. 젖은 흙 따위가 발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금세 찬 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린다. 눈을 감고 가만히 비를 맞았다. 조그만 물줄기들이 쉴 새 없이 몸을 두들긴다. 생각이 비워진다. 그저 그렇게 서 있다. 제 몸에 밴 냄새가 다 씻겨지도록. 가슴 속에 들어앉은 응어리들이 풀어지도록. 다 흘려보낼 수 있도록…….



*



“재연아.”

거친 숨소리와 달음박질 소리보다 그 말만이 먼저 들렸다. 목소리는 곱고 차분했다. 재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설움에 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머리칼부터 옷자락까지도 비슷한 물방울을 뚝뚝 뱉어냈다. 지우는 한숨을 삼켰다. 비를 얼마나 맞은 거야. 입술은 새파랬고 낯빛은 창백했다. 핏기라고는 전혀 없는 게 꼭 까놓은 달걀 같았다.

“이리 와.”

팔을 벌려 재연을 안았다. 어떻게 얘가 소리 내어 울지를 않지. 울고 있는데 저렇게 고요하게 눈물만 뚝뚝 흘려. 어떻게. 제가 가슴이 다 아팠다. 뛰어오느라 빗물에 젖은 옷이 재연을 안으면서 잔뜩 축축해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괜찮아.”

괜찮아, 재연아. 괜찮아. 조심스럽게 토닥이는 손길에 재연은 눈물을 더 흘렸다. 조금씩 격해지는 숨을 억누르느라 끅, 끅 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났다. 지우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가만 손으로 토닥이기만 했다.



*



어렴풋하게 정신이 들었다. 문 건너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조금 옅어진 소리를 들어보니 비가 이제 소강상태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지우가 꼬마전구며 담요를 갖다 두어 나름 아지트처럼 변한 모습이 눈에 비쳤다.

담요를 좀 더 단단하게 두르고 몸을 일으켰다. 몸 이곳저곳이 쑤시고 아래에서부터 뭉근히 더운 열기와 통증이 퍼졌다. 입술을 매만지니 붓고 부르터 있었다. 지우가 나누어주었던 열기가 몸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묘한 감정에 재연은 몸을 떨었다.

팔을 뻗어 기울어진 문을 바깥으로 젖혔다.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지우는 담배를 빗물 웅덩이로 튕겨 버리고 몸을 돌렸다.

“일어났어?”

“네.”

“옷은 젖어서 안에 널어두었어. 좀 마르면 입자.”

“네.”

어쩐지 낯이 뜨끈뜨끈했다. 미소 짓는 지우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까? 맨몸에 담요만 둘둘 두르고 있는 말라깽이라니. 지우는 물티슈를 꺼내 입술이며 손가락을 닦더니 재연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침 인사야. 저 서양 가면 다 이렇게 해.”

부러 가볍게 웃는 소리에 심장이 얹혀 가볍게 콩콩 뛰었다.

“네.”

재연도 고개를 올려 지우의 볼에 입을 맞췄다. 놀라 눈이 동그래진 지우의 표정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재연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서양… 인사요. 심장이 잘못된 것처럼 둥둥 울렸다.



*



“재연아, 나랑 같이 안 갈래?”

어느 날 지우는 재연의 머리맡에 팔을 괴어주며 그렇게 물었다. 단단한 팔을 베고서 웅크린 재연이 흠칫 몸을 떨었다. 지우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라고는 없었기에 더 그랬다. 재연은 지우의 말을 외우듯이 따라 중얼거렸다. 같이, 안. 갈래…. 그리고는 느릿하게 되물었다.

“어디를 가요?”

재연은 조금 시선을 내리깔며 물었다. 실은 지우가 어떤 대답을 할지 다 알고 있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 구인 공고가 동네 전봇대마다 새로 붙은 걸 이미 다 본 참이었다. 지우가 정말로 떠날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우는,

“나 이제 돌아가려고 해.”

지우는 그렇게 속삭였다. 두 시간 너머에 있는 도시, 내가 태어났던 곳으로.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잔잔했다. 그러나 내용만은 관계의 종말에 다가서는 것이어서 재연은 잠은커녕 감히 눈을 깜빡거리기도 힘들었다.

오토바이도 다 고쳐졌고, 이 마을도 좋지만. 이제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실은 진작 다 고쳐졌는데 조금씩 미룬다는 게 벌써 이렇게 된 거지. 지우는 웃었다. 그리고 조금 진지한 얼굴로 낯빛을 바꾸어 말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진지한 마음으로 아끼는지 100% 장담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네 고모부 같은 사람과 널 단둘이 버려둘 수도 없어.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제 그 끈적이는 기름 바깥에서 깊게 숨 쉬고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니 나와 함께 떠나지 않을래?”

내 집으로. 네가 동의한다면 우리 집이 될 곳으로. …강아지를 키울 수 있는 곳으로.

지우의 눈동자와 목소리는 결연함이 가득 맺혀 있어서 참으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재연은 영영 그것을 잊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언제고 마음속에 묻어두었다가 오래 묵은 보석처럼 꺼내어 볼 것이라는 사실도.



*



어둠에 잠긴 마당에 빗줄기 쏟아지는 소리만 고요하게 내려앉는다. 재연은 온기가 사라진 빈집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 이 집의 정의는 ‘버려진 집’이 되었다. 서늘함이 가득 고인 집을 둘러보다가 마루에 걸터앉는다.

‘재연아.’

‘네.’

‘미안해.’

지우는 그저 사과했다. 그러면서 담담하고 가지런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의 들뜨고 밝은 웃음과는 사뭇 달랐다. 그랬기에 재연은 정말로 이 사람은 이제 떠나는구나 하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끝이 다가왔다는 사실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명확하게 저를 조여오고 있었다.

재연은 지우에게서 느껴지곤 했던 자신과는 다른 기름 냄새를 맡으려 코를 킁킁댔지만, 곧 그만두었다. 울어서 코가 막힌 건지, 비의 축축한 냄새에 덮인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코가 무뎌지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지우에게서 나는 기름 냄새가 옅어지고 있었다.

‘이제 가요?’

재연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기름에 번들거리지 않았다. 지우를 만나는 날이면 깨끗하게 닦고 나오는 탓이었다. 지우는 꼭 빗소리같이 흐릿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사이 조금 목이 잠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응, 이제.’

새벽, 지우의 오토바이 소리가 고요한 동네를 길게 찢었다. 소음과 희끄무레한 꽁무니만을 보이며 작아지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봤더란다. 재연은 손을 들어 그 등 위로 손가락을 뻗었다. 마치 그 등을 밀어주듯이. 앞으로 나아가라 응원하듯이.



*



지우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지방도에서 조금 큰 국도로 합류하는 국면이었다. 차들이 하나둘 거세게 달리고 있었다. 비는 점점 그쳐가고 있었고 보기 드물게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직선으로 곧게 뻗는 햇빛을 보면서 지우는 어쩐지 숨이 턱 막혀 눈을 깜빡였다. 금세 눈물이 고여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바람이 오토바이 옆을 지나며 공기를 찢어댔고 온몸이 거센 역풍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흐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다 지우는 졸음쉼터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몸보다 정신이 지쳐 움직이기 힘들었다. 벤치에 앉아 숨을 길게 내 쉬고는 주머니를 더듬거려 담뱃갑을 찾아냈다. 습관적으로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마저 라이터를 찾는데, 혀끝에서 묘한 맛이 느껴졌다. 평소의 그 아릿한 니코틴 향이 아니었다.

“뭐야.”

입에 문 것을 빼서 보니 담배가 아니었다. 무슨 종이를 돌돌 말아둔 것인 듯했다. 황급히 남은 담배를 보자 모두 같은 꼴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야. 지우는 라이터를 찾던 손도 팽개친 채 담뱃갑을 뒤집어엎었다. 가늘고 긴, 돌돌 말린 종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쳐 들었더니 웬 글자들이 꼬불꼬불 기어가고 있다.

‘고마웠어요.’

‘담배는 금연하는 게 좋아요.’

‘건강 챙겨요.’

그런 것들이 한 갑 가득이었다. 지우는 황망한 얼굴로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저 자신도 못 챙기는 주제에. 뭐가 어쩌고 저째.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애써 치워두고 마음 구석에 돌돌 말아두었던 재연의 목소리가 펼쳐져 맴돈다. 재연은 보기 드물게 웃어보였다. 꼭 그런 말을 할 때, 어쩜 그렇게. 웃을 수가 있었지.

‘여기서 도망치면 내 삶이 너무 억울해요. 할 수 있는 데까지 발버둥 쳐보고 싶어요.’

다 언니 덕분이에요. 언니가 날 그저 보듬어줘서 이런 생각을 했어. 그렇게 말하는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 손을 잡아 줄 수 없었다. 재연의 낯빛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정말로 그렇게 결정했다는 표정이었다. 그 앞에서 지우는,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문득 지우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 네 여보세요, 최지우 씨 연락처 맞나요?

“네, 맞아요.”

- 아, 카페에 분양 신청해주셔서 연락 드렸어요.

전화 너머의 상대는 조금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 중성화 수술은 했고요, 학대받다가 얼마 전에 길거리에 버려졌어요. 아이가 나이가 좀 있어서 입양이 안 될까 봐 걱정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흔쾌히 데려가겠다 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분양 책임비도 확인 되었구요.

지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강아지.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곧 데리러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나이 많은 강아지를 키워보는 건 처음이라 걱정도 되네요. 그래도 곧 적응할 수 있겠죠? 지우의 물음에 상대는 긍정했다. 또랑또랑한 눈망울이 어여쁜 아이라고 했다. 조용해서 아쉬울 수도 있으시겠지만, 많이 애정을 베풀어주시면 곧 환하게 웃으면서 뛰어다닐 겁니다. 정말요.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한 먹구름 사이로 조금씩 비쳐보이는 하늘이, 야속할 정도로 파랗다. 지우는 담배 대신 '좋아해요.'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숨을 느릿하게 들이마셨다. 싸구려 볼펜의 잉크 맛이 살짝 배어나는 기분이었다. *

@nynyp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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