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하늘령


+) 모브동식 요소 있음

+) 문장이 썰체로 이어집니다.


스물 하고도 하나. 동식은 너무 너덜거리게 지쳐있어. 도망치듯 입대한 외부로부터 차단 된 군대란 환경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기도 했는데. 가끔 있는 질 낮고 사람 괴롭히길 좋아하는 선임한테 예전 같으면 들이박았을 동식이가. 20살 그날 이후로는 폭력에 미리 겁에 질려서. 아무 대응을 못하는 거. 딱 보니 허우대 있고 깡 있어 보였던 동식이가 순간 눈빛 바뀌면 움찔거리던 선임은 더 누르려고 기를 쓰고. 의무반에서 남들 쉴 때도 따로 보일러실이나 창고 같은 곳에 끌려가 얼차려 받고 두들겨 맞아. 좀만 참으면 되겠지.. 생각하고 견뎌보려는데 어느 날은 그 정도가 심하다 싶을 때. 폭행 장면 신임장교에게 딱 걸려.


얼마 전에 임관해서 왔다는 저보다 대 여섯정도 위로 보이는 젊은 남자 얼굴이 서늘해. 왜 보고 안하고 맞고만 있었냐는 말에 동식이는 묵묵부답이다가. 그냥.. 모른 척 해주시면 안됩니까. 귀찮은 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하는 거. 그런 동식이 얼굴 빤 보던 장교가 나중에는 따로 이동시켜줘서 태권도단증도 따고, 따로 장교 심부름 같은 일 하면서 조금은 편해지는 동시기. 어린놈이 남들 다 따는 컴퓨터 자격증 하나 없냐고 잔소리를 하더니. 군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집어넣고 시켜주는 얼굴만 서늘하고 은근 다정한 그 장교가 동식이도 좀 의지가 되고.


한번은 장교 사무 업무 보조하고 있던 동식이 배에서 꼬르르륵.. 소리가 났는데. 끔벅 눈 마주치더니 얼굴 화르르 발갛게 타버린 동식이 보고 눈하나 깜짝 안하던 그 장교가 본인 출출하니 라면하나 끓여 오래. 계란 풀고 파 탁탁 썰고. 장교용 라면 기깔나게 끓여서 갔더니 안보여. 뭐지 했는데 급한 일 생겼다고 그 라면은 이동식 일병 먹으라는 짧은 메모만. 저 같은 사병 출신들은 라면 봉지에 더운 물 넓은 뽀글이도 감사한 일인데. 웬일이냐. 허겁지겁 배룰 채웠던 어린 날의 동식이고. 그런 일 몇 번 더 있었지만. 그저 뭐 보기보다 사람 참 따뜻하네 했던 거지. 


- 나중에 제대하고 한번 얼굴보자. 


이런 말도 하길래 지나가는 말인줄 알고 씨익 웃으며 이쪽으론 오줌도 안 쌀거지 말입니다. 충성! 하고 장난스럽게 동식이가 말할 때. 그때 겨우 자식이.. 하며 툭, 뒤집어쓴 군모를 툭 쳤던 장교였어. 이름이.. 한... 뭐였는데. 


여튼 이젠 흐릿해. 기억이 안나거든.


...


그러다 나중에 한주원이랑 강원도에서 지나가는 일 있었는데. 잠깐 친척형이 이 부대에서 근무하는데 들른다는 거야. 외가쪽이긴 한데, 이름이 저랑 비슷한 한중원이랬나. 아 그래? 닮았어요 한경위랑? 하고 물었더니. 어릴 때 그 형이랑 다니면 저랑 부자냐고 물었다네. 아버지쪽도 아닌데. 어머니쪽 친척인데 성도 같고, 이름도 비슷하고. 인연이네. 한경위랑, 오 궁금하다 하고 동식이 웃는데 문열고 들어오는 사람 보니까 딱 떠오르잖아



- 한소위님?

- 이동식...?



마주해서 멍해진 두 사람 보고, 주원이만 인상 구기는 거지. 어떻게 아십니까 두분..? 하는데 한소위가 씨익 웃어.

언제 적 한소위냐고. 이제는 대대장이란 말에 아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어서 동식이도 웃고. 어쩜 연락한번을 없었느냐고. 아쉬웠다는 말에.. 사느라 바빠 그랬습니다. 그러는 한소위님도 뭐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 같은 사병이야 널린 건데. 하는데 한소위가 그러지. 안널렸다고 너 같은 사람은 아마 평생 기억에 남았을 거라고. 어쩐지 낯 뜨거워지는 대답에 머리 뒤를 긁는데. 

한주원 지금 매우 기분 별로. 두 사람 모두 본인이 여기 가운데 있다는 걸 잊은 듯함. 


- 형, 바쁘지 않아? 그만 가봐야하는 거 아냐?


주원이 말에 크게 아쉬운 눈으로 한소위가 동식이 팔을 잡아. 지금 어디사냐는 물음에, 만양.. 동식이 대답하니까. 아 거기서 아직 살고 있었냐고 해. 뭐야 한소위 기억력 끝내주네 이런 것도 기억해? 속으로 생각하는데 나중에 본인 휴무 맞춰서 한번 들르겠다는 거야. 그러죠. 못다한 이야기도 있으니 그때 회포푸시죠 소위님. 사람 좋게 동식이가 인사하고 번호 넘겨주고 돌아서 나오는데 한주원 얼굴은 이제 얼음골이야. 냉기가 철철이야. 얜 또 왜 이리 기분이 저조해..? 싶은 동식이 너털 웃으며 툭 장난을 거는데 곰곰이 생각에 빠져 한주원 대답도 느릿해


- 그나저나 한소위님 여전히 잘생겼네. 우리 도련님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 안닮았습니다

- 응?

- 하나도


무슨 소리야. 너 딱 이십년만 나이 들면 딱 저 얼굴 같을텐데. 싶었지만 애써 그런 말은 꾹 삼키지. 그 한소위님 아까 보니 반지가 없던데 설마 결혼 안하신건가? 툭 말하는데 주원이가 어쩐지 대답하기 싫은 눈치로 머뭇하더니.


- .. 이혼한 지 꽤 된 걸로 압니다. 

- 아, 그렇구나

- 그게 왜 궁금합니까?


주원의 말에 동식은 죄지은 기분이 들어서 눈을 피해.  

주원의 사촌형인 중원은 집안에서 억지로 정략 맺은 사람이랑 결혼해서 몇 년 지내더니 이혼한다고 해서 한동안 외가쪽이 발칵 뒤집혔지. 어른들 말씀 크게 거역하는 법 없던 형이? 했더니 나중에 주원이만 따로 불러 바에서 그랬지. 


주원아 사실... 형 게이다. 애초에 결혼도 하면 안 되었던 건데 욕심이었어. 


그 말이 왠지 주원이 머리 속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어. 남의 성적취향이야 주원이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릴 때 꽤 사이좋았던 형이고. 이 형 집에서는 따로 대를 이을 사람도 없으니. 알면 난리겠군, 주원은 그때 그 정도 생각만 했던 거 같아. 술에 취해 그때 형이 그랬지. 몰랐었는데. 아니겠지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 사랑이었나보다. 하면서 군에서 만났던 유난히 마음이 쓰이고 눈에 밟히던 사람 이야기를 형이 했었잖아. 어쩜 그렇게 꿋꿋하게 잘 참고. 그럼에도 사람이 따뜻했는지 모른다고. 장난기어린 미소도.. 생각난다고. 무뚝뚝하던 형이 흘리는 말에 뒤늦은 첫사랑이 유난스럽네 했거든


- 바보 같이 놓치고 나서 후회야 형은?

- 그러게 말이다. 그땐 알지도 못하구서..

- .. 인연이면 또 만나겠지.

- 인연?

- 그래. 한국말에 있잖아. 인연, 운명. 나중에 만나면.. 그땐 잘 좀 해봐


주원이 그때 말한 건 순전히 그저 형을 위로하고 싶어서 대충 말했던 거였어.



...



집에 돌아온 동식도 한편 기분이 묘해. 이십대 초반은.. 사실 동식에게 드문드문한 기억이야. 사람이 너무 힘들면 그 시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잖아. 스물 초반 언저리. 그때 동식이가 그랬어. 숨 좀 쉬고 살려고 아등바등했지만 다시 또 공포와 외로움이 겹쳐 저를 누르던 때. 그리고 한소위는 그 드문 기억에서 유난히 그래, 따뜻한 기억이야. 


부대에서 도망친 중대장 개를 잡으러 부대원이 동원되었을 때. 이 똥개때문에 뭔 개고생이냐고 부대원들이 짜증부릴 때. 동식이는 어린 녀석 산에서 고생 많았다 싶어 제 물을 나눠줬거든. 그리고 한소위는 비어버린 동식이 수통을 제 것과 바꿔줬었어


- 보면, 이동식 일병은 본인보다 다른 곳에 쉽게 정신이 뺏기는 거 같군


- 꼭 그렇진 않습니다, 이거 소위님건데 저 주셔도 됩니까


- 신경쓰지마. ... 본인이나 신경써. 자네가 그렇게 본인을 안챙기니까. .. 내가 신경 쓰이잖나.


그 말을 하고 어쩐지 골이 난 얼굴이 지금 생각해보니. 아 그래 딱 스물 일곱, 지금의 한주원 얼굴과 판박이였구나. 잊고 살 때는 몰랐는데 과거 기억을 되살려보니까 그랬어. 저를 살피고, 어디서 지켜본지 불쑥 튀어나오던 때. 못마땅한 듯 시선을 구기다가 묵묵히 챙겨주며 보던 얼굴. 왜 몰랐을까 싶을만큼 한주원과 닮았었네. 그 생각을 하니 어라, 이상하게 가슴이 좀.. 울렁거려.


그러고보니 항상 강원도에서 밥 먹고, 만난 뒤에 도착하면 안부 전화했던 한주원은.. 이상하게 오늘따라 연락이 없네. 그 생각하면서 휴대폰 보는데. 모르는 번호가 하나 떠. 아. 기억난다. 이거..


- 한소위님?


- 잠깐, 통화 괜찮습니까?



...



이상하게 주원은 그날 이후로 기분이 계속 저조해. 아니겠지, 아닐거야 싶은데. 이상하게 찝찝하잖아. 그래 혹시나 형은 몰라도 이동식씨는. 아니잖아. 주원은 생각해. 지금까지 지켜본 이동식은 글쎄 딱히 드러내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여성과만 연애해왔다고 들었거든. 그러니까 제 사촌형은 혹시나 이동식을 그렇게 보더라도. 이동식은.. 아니지.

그 생각을 하는데 안심이 되는 한편, 또 이상하게 가슴이 욱신거리네. 답답하고. 이런 느낌이 반복 되서 동식에게는 연락도 못하고 있어. 공연히 성질을 부릴 것만 같아서. 이제야 겨우 단둘이 얼굴을 보고 편하게 대화를 하며 밥을 나눠먹는 사이가 된 건데. 동식과 사이가 틀어질 일.. 만들고 싶지 않아

혹시나 둘 사이가 제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면.. 하는 가능성은 애써 지워. 이동식씨가? 그럴리가 없지. 단단하게 생각하며 스스로 비뚜룸 입꼬리를 올리는거야. 만약. 이동식이 조금이라도. 그런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 아마? 거기까지 생각하고 주원은 창백해져.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던 일이었지만. 이동식이 남자와 관계가 가능한 사람이었다면. 가능성이 있다면. ... 그건 제 자리여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던 거야. 내가... 그렇게 보고있었던 건가. 그 사람을? 타인보다 더 특별하고 가깝게 여기긴 했지. 유대감.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고. 문득 생각나고. 궁금했지


하지만 그게..., 어쩐지 머리가 혼잡해. 누구와도 이렇게 가까워지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 없고. 가장 특별한 이의 자리를 욕심내본 일이 없어. 한주원에게는. 가끔 홀린 듯 동식을 훔쳐보게 될때도. 워낙. 그냥.. 좀 사람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했지


어느 때처럼 갑자기 숨이 가빠와. 주원은 어지럽고 심장이 뛰는 속도에 어쩔 줄 몰라해. 그러다 눈에 닿은 게.. 아 최근에 피했던 술. 버리는 걸 잊었던 위스키병. 잘근 입술을 깨물던 주원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 병을 집어 들어. 



...



얼마 지나지 않아 형에게 연락이 왔어. 잠깐 시간 낼 수 있냐는 말에 주원은 약속을 정하고 장소로 나가. 강원도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호텔 바. 거기에... 형과 함께 동식이 있네. 이동식씨가 여기 왜? 근처에 올 일이 있다면 언제나 제게 연락이 했을 동식이. 말도 없이 사촌형과 나란히 앉아있는게 좀 의아하지. 


- 술 좀 시킬까?

- 아 한경위는 술..


아버지 사건을 알고 나서 의식적으로 주원은 술을 좀 많이 줄였어. 동식도 그걸 알고 있었고. 반주겸 분위기 맞추는 게 아니면 바에서 독주를 마시는 일은 이제 드물었지. 동식은 그걸 알고 주원이 술 대신 다른 걸 먹을건지 물어와. 주원은 기분 나쁜 두근거림에 고개를 저어.


- 마시죠. 오랜만에


몇 잔의 술이 오가고. 프라이빗한 자리라 사람들 시선이 없는 곳에서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거리를 가늠해보며 주원은 시선을 가늘게 떠. 슬쩍 주원이 고개를 틀 때 동식의 팔을 가볍게 쓸어 쥐는 사촌형의 모습과. 수줍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적이다 목선이 드러나는 이동식의 얼굴 같은 것.


- 주원아. 고맙다


그리고, 형이 웃는거지. 동식의 쓸어내리던 팔을 내려 손을 꽉 쥔 채. 슬쩍 붉어져있는 동식의 얼굴과 행복한 듯 함박 웃는 형의 얼굴을 번갈아봐. 


- 기억나지. 예전에.. 말했던 내 첫사랑.

- 아, 소위님..


불편한 듯 동식이 들썩거려. 그러면서 손끝이 꼬물거리고.


- 그, 나이먹고 좀 쑥쓰럽긴 한데. 그래도 .. 한경위에게는 말해야할 거 같아서요. 만양 얘들한테도 조만간 이야기하려고.

- ..그렇습니까?

- 우리 여기, 강원도에서 함께 살기로 했어.


꾹, 잔을 쥔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주원이야. 이동식이 만양을 떠난다고? 그렇게 설득해도 싫다던 고향이 편하다며 실실 웃던 그 이동식이.  주원은 한숨 대신 술잔을 넘겨.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을 맞춰.


- 잘된 일이네요. 


그래 잘된 거지. 이동식에게. 제 형에게. 그런데.. 나는, 한주원에게도 그런가. 주원은 쓰리게 웃으며 입가를 닦아내.

동식을 바래다주겠다며 차를 빼러간 사이, 동식과 나란 히 선 주원은 찬찬히 동식을 바라봐. 전에 없이 사람이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저에게는 소장님 기일 때나 되어 웃던 그 햇살 같은 웃음을 물고 있는 이동식을.




- 쉬운 일이었군요

- 네?

-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였네요. 그쵸?

- 한경위?


그래. 그런 거였네. 중얼거리는 한주원을 동식이 걱정스레 봐. 평소보다 마시는 거 같더니.. 한경위 취했구나? 걱정스런 마음에 슬쩍 등에 손을 올리는데 훽, 몸을 틀어버리는 주원이야. 이 어린남자는 아직도 제 몸에 손대는 걸 꺼려하지. 어색하게 웃으며 동식이. 아 미안, 하고 사과를 하는데. 비틀 주원의 몸이 흔들린다 싶더니. 콱. 동식의 어깨를 쥐며 얼굴이 가까워져. 


- 한.. 주원?

- 어디가 좋았습니까?

- 무슨..

-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 취했어요. 당신..

- 대답해요


- 내가 그걸 ..

- 말 해, 이동식. 대체 왜.


한경위 진짜 왜 이러지. 제가 힘을 풀면 당장에라도 바닥에 쓰러질 거 같아. 동식은 다리에 힘을 주고 주위를 둘러봐. 제 애인이 어디서 오고 있진 않은가 생각하며. 알았으면.., 내가...진작 알았으면..  중얼거리는 한주원의 술주정을 버티면서. 좀 정신 차려봐요 한경위. 하고 상체를 끌어올리는데. 잡혔다. 멱살을. 아. 한주원 손 힘 여전하네. 멱살맛 오랜만이다 아주. 동식도 오랜만에 두 눈에 힘을 줘. 귀엽다 예쁘다 했더니 어른 멱살을 턱턱 잡고 아무리 오랜만에 취했다고 이러면..., 비꼬면서 혼내는 동식의 말은 곧 사라져. 그러니까 꽉 잡아 끌려간 한주원의 입술로. 


정지. 그리고 숨 멎음


입술로 두들겨 맞는 기분이야. 폭력적으로 누르고 입술을 삼키며, 새를 벌리더니 밀치려는 제 팔까지 붙잡고 꺽은 한주원이야. 유도 했다더니 힘 쓰네 이 새끼가. 이리저리 고개를 트는데도 빠르게 따라붙어. 취한 줄 알았더니 순발력도 좋네 이 개새끼가. 동식은 아웅다웅 몸싸움을 하다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위-아래 입술을 물어뜯기고 나서야. 퍽, 한주원의 매끈한 볼에 주먹을 날렸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좀 더 시간을 지체 했으면 숨이 막혀 죽을 거 같았거든.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는 동식과 맞아서 터진 입술을 닦는 주원이야. 둘 사이에 헉헉대는 숨소리만 들려와.



- 한주원.. 진짜 마음 같아서 몇 대 더 패주고 싶은데. 내가 참는거야.

- ....


- 당신 형봐서라도. 너 이러면 안되는거야. 

- 이동식씨.. 나는.


- 오늘 당신 이러는 이유, 나 안물어볼겁니다. 그러니까 설명하지마요. 한주원도.


선을 그었어. 동식이. 여기까지라고. 주원에게. 알 수 있었지.

멀리서 동식을 태우기 위한 차가 다가오는 게 보여. 아직 바닥에 주저 앉아있는 주원에게서 동식이 고개를 돌려.


-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경위. 그리고 오늘일.. 서로 또 이야기하지 맙시다. 


서둘러 차문을 열고, 동식을 태운 차가 사라져. 


동식은 따끔거리는 입술을 쓸어보다가 괜찮냐고 묻는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허락을 구하듯 잠시 동식을 바라보는 중원의 시선을 보다가 동식이 슬쩍 미소를 지었어. 동식의 허락에 중원의 팔이 뻗어와 흐트러진 동식의 구겨진 셔츠 깃을 정리해주고, 슬쩍 볼을 매만지고 떠나. 다정하고 안온한 온기. 그래. 동식은 이거면 된다고 생각해.


급하게 저를 몰아붙이며 몸을 뒤채던 거친 한주원의 날카로운 손길이나. 거부하며 흔들어도 저를 잡고 놓지 않던 뜨거운 입술. 애절하게 보는 눈동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맛봐야했던 한주원의 짜디짠 눈물 같은 건. 지금의 이동식에게는 너무나 과한거야. 동식은 눈이 까맣고 깊은, 중원의 손을 잡아



...



모든 일은 빠르게 진행됐어. 동식이 만양의 집을 내놓고, 강원도로 거처를 옮기는 것도 계획했던 대로 착착. 워낙에 동네에서 소문이 안 좋았던 집이라 안나가도 상관없다 하는 마음에 부동산에 내놓은 거였는데. 순식간에 계약 체결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렸지. 아 그럼 이제 정말 떠나는구나.


동식은 대부분의 짐을 옮기고, 버릴 것만 남겨둔 만양의 오래된 집을 한번 손으로 쓸어봐. 마당에 신경 써 오래된 풀을 베어 버리고, 고장 난 장식을 치우긴 했지만. 차마 새로운 걸 심거나 들이진 못했던 황량한 만양의 집.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좋은 새 주인 만나서 좋은 걸로 가득 채워라.


동식이 떠난다는 소식에 만양 사람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 거기다.. 강원도에 간다고? 처음 그 말을 들은 지훈이가 그랬지. 


- 동식이형 그럼 강원도 가서, 한경위님이랑 사는 거예요?

- 뭐? 무슨 소리야. 내가 왜 한경위랑 살아?

- 그거야..


지훈이 말을 더 잇기 전에 재이가 쿡 옆구리를 찔러 조용히 시켜. 동식은 조용해진 자리에 그제야 중원의 이야기를 꺼내. 오래전에 끊긴 줄 알았던 인연을 새로 만나게 되었고, 만나서 이야기 나누다 보니 좋은 사람이라 좋은 마음이 생겼다고. 그 사람도 저도 나이가 많아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결정했다고.


잠자코 동식의 말을 듣고 있던 지화는 그저, 동식이 너만 좋으면 된 거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니. 그래 그거면 된 거지. 지화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아. 떠나기 전에 소개 시켜주고 싶었다는 동식의 말에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 머뭇하다 동식이 덧붙였어


- 아 그리고 그 사람.., 한경위랑 사촌이야


지훈이가 잔을 놓치고, 입 밖으로 주스를 줄줄 흘렸어. 

그 짓을 지금 .. 지훈이가 또 하고 있는거야. 만양 정육점에 중훈이 들어서 깍듯하게 인사를 하자마자. 큼, 목을 가다듬던 지훈이가 이번엔 사이다를 입 밖으로 줄줄흘려. 야 드러운놈아 하고 지화가 물수건을 건넸지.


- 아니, 타임머신 인가..


중얼거리며 지훈이 중훈의 얼굴을 흘끔거려. 사실 지화도, 그리고 재이도 말은 안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거야. 사촌이라도 저 정도로 닮을 수 있나. 세월이 남긴 눈빛과 조금 보이는 희끗한 머리색만 다를 뿐. 동식을 보는 시선도 말없이 젓가락질을 하다 손을 닦는 습관도 비슷하잖아.


- 야 네들 말도 없이 사람 얼굴을 그렇게 보냐, 민망하게


결국 어색함을 깬 건 동식이었고, 아아 네. 그 .. 반갑습니다 하며 지화가 먼저 잔을 건넸지. 몇 잔의 술과 음식이 들어가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지훈이는 ' 와 운명이네요 ' 하고 박수를 쳤지.


-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말을 하며 중원이 슬쩍 동식을 살피고 허벅지위에 올려둔 손을 슬쩍 어루만져. 그때부터 사귀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하는 지훈이 말에 중원이 그저 빙긋 웃어. 그때 저도 입 밖에 낸 적 없지만, 아마 고백했어도 동식이 받아줬을까 싶다고. 남들이라면 한번 의심해볼만한 마음을, 동식이는 순수하게 호의로만 기억하고 있었으니. 중원의 말에 동식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지. 맞다. 남들은 차별대우라고 질투할 만한 배려를 받았으면서도 그 당시에는 그저 몰랐지. 가끔 떠오를 때도 그런 식으로 생각 해본적이 없었고.


- 그럼 지금은? 동식이 형 왜 달라진 거예요?


지훈이의 물음에 동식이 웃어


- 그거야..., 


하다 멈칫하는 거지. 글쎄. 왜 달라졌냐는 물음에 뭐라 답하려 했던 거지. 왜 그때는 몰랐던 그 마음이, 지금에는 선명하게 느껴졌지. 마치 익숙한 것처럼.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알 수 있었을까. 잠시 멍한 동식의 표정에 지화가 다시 잔을 채우고, 흐름은 이어져.


자리가 파할 때쯤에는 마치 하나뿐인 형 시집보내는 기분이 든다며 울먹거리는 지훈이를 떼어내느라 고생했지. 대리를 기다리며 잠시 남은 동식을 보고, 재이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다 물어


- 아저씨.. 행복해요?

- 재이야?


- 미안, 그냥.. 어. 확인하고 싶어서

- 좋은 사람이야


응. 그래 보여요. 한번 본 것뿐이지만. 진지하고. 진중하고. 오래 곁을 지켜줄 거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어. 중원은. 다만 재이는.. 아까 지훈이의 물음에 멈칫하던 동식이 마음에 걸리는 거야. 왜 아저씨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거 같은지. 재이는 그게.. 누구인지 왜 알 것만 같은지. 이렇게 빨리 동식이 떠나려는 이유와 다른 사람 곁에 정착하려는 이유가 .. 어쩌면 그 사람때문은 아닌지. 재이는 저도 괜히 마음이 불편해. 하지만 먼저 알은 체는 하지 않으려 해




- 아저씨, 집 없어도.. 만양 자주 와요

- 그래도 돼? 재워 줄거야?

- 무슨 소리야. 당연하지. 여기 아저씨 고향이야.



...



강원도에서 중원과의 삶은, 정말이지 편안했어. 관사에서 생활하며 따로 집을 둔 적이 없다든 중원은 동식과의 생활을 위해 전원주택을 샀어. 물론 그 안에 집기와 살림 등은 동식도 함께 골랐고. 집안 어른이라고 소개할만한 사람은 동식도 없었고(몇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제외) 중원도 집안과는 거의 절연하다 시피 한 사람이었거든.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지. 이혼하고도 재혼하라, 아이라도 낳는게 어떠냐는 권유를 중원이 어떤 식으로 물리쳤을지 말야. 


아침에 눈을 뜨면 단정하게 눈을 감고 있는 중원의 얼굴이 보여. 그러면 그게 안심이 돼. 곧 얼마 안되 눈을 뜬 중원이 슬며시 웃고. 저에게 허락을 구하듯 시선을 대고 있는 사람이고. 아주 천천히 입술을 대고 뒷목을 쓸어내리며 따뜻한 숨을 나눠 마시는 일. 이제는 일상이고 익숙해졌어. 한동안 군 작전 때문에 오래 중원이 자리를 비워야 할 때가 있긴 했어. 그럼 중원은 몇 일전부터 걱정스럽고 미안한 얼굴을 했지. 



- 혼자 둬서 미안해, 동식아


중원의 말에 동식이 웃음을 터트려. 이보세요. 나도 마흔이 넘었어요. 무슨 아이 다루듯 그래. 혼자 집 잘보고, 심심하면 근처 여행도 다니고 할 테니 걱정 마요.. 형, 동식의 말에 중원이 또 빙긋 웃었지. 그래 이제는 소위님, 이동식씨가 아니라 동식아, 형이라고 부르며 지내. 


동식의 과거를 어떻게 들었던 건지. 어느 밤에 중원이 잠든 동식의 머리맡에서 뚝뚝 눈물을 떨궈낸 일도 있었어. 모른 척 했지만 내심 동식도 놀랐지. 저 때문에 마음아파 눈물을 흘리는 이 무뚝뚝하고 다정한 남자가 제 머리칼을 쓰는 걸 느끼며 꾹 입술을 깨물었어. 그 뒤로 중원은 더 혼자 동식을 두는 게 싫은듯해


제 직장과 욕심으로 만양에서 너무 급히 동식이 연고도 없는 강원도로 넘어와 혹시 외롭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거 같고. 그런 중원의 마음을 알아서 동식은 그 앞에서 더 씩씩해보이려 해.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긴 거지


- 한주원씨?

- 오랜만입니다. 이동식씨


- 당신이 왜 여기

- 형이.. 부탁 해서요


얼마만이지. 중원과 시작하고 한참동안 주원을 본 적이 없었어. 가끔 주원이 이야기를 하는 중원의 말도 모른척 했더니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는 일도 없었고. 만양에 들러서 잠깐씩 밥을 먹고 올 때도. 그래 주원이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덕에 모른 척 지냈었단 말야. 그런데 이렇게 꽤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된 것을 걱정한 중원이. 이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어. 


- .. 불편하시면, 형에게는 제가 다시 말하겠습니다.


그렇게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와서는 그런 말을 하는거야. 솔직히 좀.. 불편하긴 하네요. 동식의 말에 주원이 시선을 맞춰와. 그리고 그 시선을 동식이 빠르게 피해.


- 이동식씨가 저 불편해하는 이유.., 형에게 이야기한적 있습니까?

- 뭐? 지금 그게 할 소리야?


- .. 그래서였군요. 형이 당신을 저에게 부탁할리가 없는데. 

- ... 이봐요


-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자기 생선가게를 도둑 고양이게 맡기겠습니까?


오랜만에 또 동식의 눈에 힘이 들어가. 아무렇지 않은 척. 그게 이상하게 한주원 앞에서는 잘 되질 않았어. 그걸 알고 그 틈을 기어이 저 어린 녀석이 비집어 들어와 도발을 해대는거야. 꾹, 입술을 한번 물었다 뗀 동식이 빙긋 웃어


- 여전히 건방지고 상콤해 우리 도련님. 그래요. 들어와요. 형에게 보여줍시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다는 거


집 안에 들어와 휴대폰을 켜보니 그제야 주원이가 얼마간 지낼 거란 이야기를 하는 중원의 문자 연락이 보여. 요즘 둘이 전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이 본인 탓 같아 염려되었다며. 사실 요즘 주원이가 조금 염려 되서 혼자 두기 걱정된다고. 부탁한다는 말. 그러니까 이건 주원에게 동식을, 동식에게 주원을 부탁하는 상황이었던거야. 


바보 같은 사람이, 아.. 형 이게 무슨 짓이야. 못마땅하게 눈썹을 구긴 동식이 작게 한숨을 쉬어. 둘이 지내기에 충분히 넓고 창을 바다 쪽으로 크게 낸 거실을 지나. 이층에 있는 게스트룸으로 주원이를 안내해. 깔끔하게 정돈되고 미니멀한 가구만 있는 게스트룸으로 가기 위해선 중원과 동식의 방을 지나쳐야하지. 열린 문틈 사이로 커다란 침대를 보고 잠깐 주원의 발걸음이 멈춰. 그걸 알지만 동식은 앞서 걸어 게스트룸 문을 열었지.


- 여기서 지내면 됩니다. 뭐.. 집안 살림은 봐주시는 분 따로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요

- 네, 고맙습니다


동식이 문을 닫고 나가고 트렁크를 벽 한 켠에 세워둔 뒤 주원은 털썩 침대에 주저앉아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 무표정을 가장했지만 사실 차에서 내려, 벨을 누르고 심장이 얼마나 뛰었는지 몰라. 이것도 그 사람을 볼 핑계가 될 거란 생각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스스로가 얼마나 하찮았는지. 


저를 보며 구겨지는 이동식의 얼굴을 보면서도. 저는.. 그저 오랜만에 본 그 사람 얼굴에 심장이 또 세차게 뛰기만 했고. 모진소리를 해서 기어이 성질을 긁어놓고 그와 형이 지내는 터에까지 발을 들이밀고서는. ... 아까 누가 봐도 함께 지내는 방안 커다란 침대를 보는 순간 피가 차갑게 식었어


어쩌면 저처럼 비워진 자리가 있진 않을까 기대했었나. 그러나 이동식처럼 따뜻한 온기와 생활감만 가득 찬 이곳은 빈자리 따위 느껴지지 않아. 제가 동식을 보지 못하는 동안 몸서리치던 그 추운 자리 같은 건. 여기 없어. 가슴을 다 헤집는 일이 될걸 알면서 온 거야. 이동식이 보고 싶어서.


...



이틀 정도는 마주쳐도 별다른 말없이 스쳐버리곤 했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 특히 이동식은 천성이 사람에 관심이 많은데다, 마지막이 좀 어그러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주원을 미워하진 않잖아. 멍하니 거실 쪽 창 쇼파에 앉아 있는 주원에게 차를 한잔 가져다 줬더니 눈이 동그래져. 새삼


- 휴직했단 이야긴 들었어요,.. 어디서 지내요. 요즘에.


그래 중원을 통해 간간히 소식은 들었지. 갑자기 휴직을 하고 자취를 감췄단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저도 모르게 한주원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어쩌나 망설이던 밤들. 다잡았지. 제 연락이 어린 녀석 더 혼란하게 할지도 몰라서. 


- 거의.. 집에서 지냅니다.


그 말을 하고 한주원은 동식이 건네 준 차를 한모금하고 내려놓아. 곁눈질하며 살피는게 아니라 이렇게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또 숨이 은은하게 막히는 거 같은 긴장감이 들어. 


- 젊은 사람이 밖도 다니고 하지. 뭐 재밌다고 집에만 있어요?

- 그러게요.


빙긋, 사심 없이 웃고 마는 한주원 얼굴에 잠시 멈칫하지. 알고 있었지만.. 너무 닮았지. 중원과 주원은. 


- 그러고보니 여기 와서도 하루에 한번 잠깐 나갔다 오는 것 말고.. 거의 방안에만 있던대 한주원씨

- .. 저 보이면 이동식씨가 불편할까 싶어서요.


무슨, 숨이 콱 막히지. 또. 그제야 동식은 주원을 찬찬히 살펴. 끼니를 제대로 챙기긴 하는 건가. 잠은 어떻게  자는 걸까. 대체 그 골방에 갇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던 걸까. 생각보다 더.. 한주원이 괜찮은 거 같지가 않잖아. 이런 걸 바란 적은 없어. 


- 하루에 한끼는..., 나랑 같이해요.

- 네?


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하는 주원의 볼이 쑥 내려있어. 젊은 애 얼굴이 저게 다 뭐람. 


- 혼자 먹으면 맛없잖아


동식의 말에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눈동자를 비켜서 자리를 피하고. 주원은 그런 동식의 뒷모습만 보지.



...



오랜 만에 중원과 통화를 했어. 잠깐 동식이 화가난건 아닌지 살피던 중원은 괜찮다는 동식의 말에 풀어졌지


- 주원이는.. 좀 어때 보여, 동식아?

- 글쎄. 전보다 좀.. 조용해진 거 같긴 한데


머리를 긁적거리며 동식은 코너에 마주보고 있는, 게스트룸의 불빛이 일렁거리는 걸 봐. 저 게스트룸의 불빛은 언제나 밤늦게까지 환해. 제 방 침실 스탠드가 꺼지고 나서야 뒤늦게 꺼지곤 하지. 그래도 괜찮아 질거야.

동식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해. 한주원이 어떤 녀석인데. 흔들릴 지언정 꺽일 녀석은 아니지. 그래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 질 일이야. 동식은 생각하지. 


- 미안해, 나한테.. 주원이는 유난히 좀 마음 쓰이는 녀석이라서.

- 알지, 형.. 내가 왜 몰라.


- 다른 사람들은 나랑 주원이가 닮았다는데.


통화 속 건너편 중원의 낮은 목소리에 동식이 귀를 기울여.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생각했어. 주원이가.. 사촌 누나(주원의 모친)를 너무 닮은 거 같다고 느꼈어. 그래서 가끔 좀 불안해져. 녀석이 .. 제 엄마를 따르진 않을까 싶어서, 중원의 말에 동식의 입가가 굳어. 


- 그런 생각하지 마, 형



시간이 늦은 밤이라. 동식은 제 방 스탠드 불을 먼저 껐지. 저 게스트룸 속 녀석이 좀 일찍 잠들길 바라면서. 그리고 중원과의 통화도 마무리했어. 아닐거야. 아니지. 생각하는데. 중원의 통화를 되짚어보니 이상한 장면이 자꾸만 스치잖아. 끼니를 제때 챙기지 않고 내내 어딘가 가라앉아있어 보이던 주원이. 아침에 일어나 어딜 다녀오는지 잠깐 차가 움직인 흔적은 있었지만. 별다르게 외출은 없었던 주원이. 고심하다 동식은 아직 꺼지지 않은 게스트룸의 불빛이 일렁거리는 걸 다시 봐.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심장이 왜 이리 쿵쿵 뛰는건지. 침이 말라와.


뻗은 팔이 한참을 허공에 머물러. 주원이 있는 방문을 잡지 못하고 몇 번을 망설이지. 안쪽에서는 주원이 틀어놓은 듯 한 클래식 음악만 옅게 흘러나와. 별다른 움직임이나 커다란 소리도 없어. 잠든 걸 수도 있다.. 싶지만 그러기엔 일정하게 꺼지던 불이 아직 환하잖아. 노크를 하는게 맞겠지만.


끼이이익. 긴소리를 내며 문이 안으로 밀려. 꺼지는 촛불처럼 흐릿하던 간접등, 늘어져있는 기다란 몸이 보여. 몽롱해보이는 반쯤 감긴 시선이. 쇼파에 푹 묻혀 다리만 바닥으로 길게 늘어져있고. 


- 한주원...?


그의 다리 아래, 굴러다니는 수많은 위스키 병들이.


동식이 다가가 주원의 어깨를 짚어보지만 반쯤 가라앉은 눈이 쉽게 뜨이질 않아. 한주원. 야 정신차려봐. 야. 동식이 소리치자 잠깐 뜨였던 눈이 다시 감기고. 푸흐.. 뜨거운 숨이 터져. 독주향이 가득한. 아침마다 깔끔했던 주원의 방을 떠올려. 아무도 모르게 아침에 빈병을 치우고, 또 술을 사왔던 거야


아직도 잔을 꽉 쥐고 있는 주원의 손에서 겨우 술잔을 빼앗아. 동식은 겨우 비틀거리는 한주원의 몸을 침대에 던지듯 눕혀. 화가 나지. 너무. 이게.. 지금 다 뭐야. 와르르 가져온 봉투에 빈병을 쓸어 담고, 카펫까지 흐른 술을 신경질적으로 북북 닦다가 끌어안고 세탁실로 집어 던져놨어.


저 눈이 아침마다 붉게 충혈된 걸, 그저 모른 척 했더랬지. 평소보다 국물을 찾는 것도 나이들어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그랬는데. 젖은 수건을 가져와 가만히 침대에 기대듯 누운 주원을 내려봐. 그리고 술에 잔뜩 졸아든 얼굴을 닦아내고 손을 닦아. 안주도 없이. 술만 들이부은. 빠져버린 한주원.


동식은 저도 모르게 제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단 걸 알아. 이정도로 속이 상할줄 몰랐는데. 주원이 어깨를 붙잡아 마구 흔들며 소리 지르고 싶은걸 겨우 참고 있어. 너 왜 이래, 왜 이러고 살아. 이러라고... 내가. 숨을 거칠게 들이켜 삼키는데 주원의 눈이 뜬게 보여.


- 왜 웁니까


주원의 물음에도 동식은 대답 없이 제 눈물을 소매로 벅벅 닦아내고. 주원의 얼굴은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줘. 


- 중원 형이 나쁜 사람이면 좋았을텐데..

- ...


- 알아요, 당신도. 형도..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 .. 미워할 건 나뿐이더라고요

- 한주원.. 그런 말이 어딨어

- 그러게요. 참 이상하죠. 나도 알아.


몇 일간 지켜본 이동식이, 너무.. 편안하고 좋아보였어. 그걸 지켜보는 게 또 좋은데 가슴한편이 시려서. 하루, 하루만 더 견뎌보려던 게 사실 쉽진 않았어. 바람만 불어쳤던 이동식의 인생에, 제가 아는 중원이라면 든든한 가림막이 되어주겠지. 반면 한주원은..,그래 동식을 흔들 또다른 바람 일뿐이야


저를 잘 떠나보내야, 어쩌면 동식에게는 진짜 평안이 올거야.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저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과거들이. 동식에게 좋을 일이 없어. 어차피 떠나줘야 할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 옷자락이라도 붙잡아 흔들고 싶어질 때가 있었던 거야. 왜 안되냐고. 저는 정말 안되는거냐고.


저를 조심스레 쓸고 닦아내며 울음을 참는 동식의 얼굴을 보니 또 알게 되는거지. 내가 흔들면, 흔들리고, 잡으면 어쩌면 뒤돌아볼지도 모르는 이동식은 여전하네. 나만 보면 당신은.. 슬프네. 그걸 알면서 내 욕심으로 또 잡고 싶어지는 이기적인 마음은 어쩌면 좋을지 저도 모르겠어. 


- 나, 이제 갈게요


지쳐버린 눈으로 한주원이 잡고 있는 동식의 손을 놔. 그 몸짓에 덜컹 동식은 겁이 들어차. 퍼뜩 시선을 맞추는데 한주원은 이제 웃고 있어. 그게 더 무서워.


- 어디로 갈 건데

- .. 네?


- 어디 갈건데. 

- 이동식씨.. 그게.


- 말해요. 어디있을건지. 누구랑 있을건지. 그래야. 내가..


안심이 될 거 같아. 그러니까..


- 한주원은.. 나한테서 사라지지 않을 거랬잖아.

- ...

- 그랬잖아요, 기억 안나요?

주원이 고개를 끄덕여.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이건 이동식, 본인의 욕심이란걸 알아. 어디서든 한주원이 안전하다는 걸. 알고 싶어. 잘지내고 있단 걸. 그래야.. 내가. 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동식을 보던 주원이 슬며시 손을 뻗어서 젖은 그의 볼을 쓸어. 형 옆에서는 내내 웃기만 하더니, 제가 온 뒤로 동식의 볼은 내내 울음으로 젖는 거 같아. 


- 저는..., 지금 만양에 있습니다.

- 뭐?


- 만양 이동식씨 집, .. 제가 샀거든요


동식이 떠나온 만양의 집에, 한주원이 있다니.

동식이 떠난 빈 둥지에, 한주원이 몸을 틀었어. 이미 빈 자리라는걸 알면서도. 주원은 별수 없었어. 제가 이동식의 집에서 나오는 걸 본 만양 사람들의 눈이 커다래졌지만. 겨우 부탁해서 동식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 했지. 가끔.. 만양 정육점에 들러 동식의 소식을 듣고. 그의 흔적을 찾아서 걸었어.


자신의 집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던 한주원의 삶에. 그나마 집과 가장 가까웠던건 만양이었고, 그가 있는 이곳이어서. 이동식이 버리려고 두고 간 걸 알면서도 그가 쓰던 쇼파와 몇 집기들은 그대로 집안에 다시 뒀어. 그가 웅크린 쇼파 위로 저도 몸을 웅크려보고. 걸터앉은 부서진 계단에 주저앉아보고. 새벽녘에는 고치지 않은 보일러탓인지 한기가 몸에 들어 이를 딱딱 부딫혀가며 잠에서 깬 적도 있어. 그렇게 지내다보니 좀 알겠더라고. 얼마나 추웠을까. 당신은. 허전했을까. 이 텅 빈 집이. 차라리 잘된 일인데. 당신이 여길 떠나기로 해서. 왜 나는 당연히 당신이 여기에 계속 있을 것 같았지.


- 그러니까, 이동식씨 저는 거기에 있습니다. 


주원은 동식의 두 손을 잡고 조심스레 만지작거려. 떠난 당신이 어쩌면 다시 찾지 않을 장소란 걸 알아서. 숨어든 곳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그러니까. 


- 거기에.. 있을 겁니다. 저는.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게스트룸은 다시 깨끗했고, 처음부터 빈자리였던 것처럼 주원의 차도 사라져있어. 

간밤에 무슨 일이 이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바다는 고요해. 폭풍이 한차례 몰아친거 같은데. 거짓말 같기도 하고. 흔적조차 남질 않았어. 모두 가져간 거 같아. 한주원이.


중원이 돌아왔어. 산속에 오래 있었는지 몸 가득 숲향기를 품고서 동식을 꼭 끌어안았지. 그의 품에 안겨서 동식은 오래 고개를 묻었어. 제 맘속을 할퀴고 간 주원을 모두 잊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날 밤은. 조금 더 동식이 적극적이었어. 허락 전에는 다가오지 않는 중원이었고. 그날 밤은 중원이 묻기 전에 동식이 먼저 그의 배에 타고 올랐어. 이렇게나 적극적인 동식은 처음이라 당황하는 시선이면서 금세 연인의 눈에는 욕망으로 짙은 어둠이 몰렸어. 그런데 그 색이 동식에게는 지난 몇 일간 보았던 익숙한 색이어서. 마지막엔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가리고 말았지. 괴로워져서.


동식의 마음을 모르는 중원은 그저 아침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가득 띠고 뒤에서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왔어. 차가운 바람에 목이 잠겨있을 동식의 목을 축이도록. 뒤에서 끌어안는 중원의 품에 안겨 동식도 깜박 깜박 눈을 감았지. 그리고 창밖 시선 끝에.. 게스트룸이 담겼어. 주원이 한동안 머물던 곳. 

물끄러미 동식의 시선이 닿는 곳을 함께보던 중원은 고개를 내려 동식의 볼에 제 얼굴을 가져다대고 부볐어. 한동안 혼자 두어서 미안하다는 중원의 말에 동식은 고개를 흔들며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 하고 싶은 건 없어? 먹고 싶은 거나, 가고 싶은 곳은 동식아?


중원의 말에 문득 만양.., 대답하려다 동식이 꾹 입을 닫아. 아니, 그런 거 없어. 하며 고개를 틀어 다시 차를 마시는 동식이야. 그리고 중원은 그런 동식의 옆 얼굴을 빤히 바라보지.



...



얼마의 시간이 또 흘렀어. 바깥쪽 텃밭에서 자라는 잎을 만지작거리던 동식은 평소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는 중원의 목소리를 들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건지. 평소보다 많이 크고 거칠은 중원의 고함소리에 좀 놀라기도 했어. 


- 그만 좀 하세요, 아버지!! 누나에 이어서 주원이까지!!


주원이? 저도 모르게 동식은 주춤 중원에게 다가서. 텃밭 쪽에서 동식이 나오는 걸 본 중원이 시뻘개진 얼굴에 당황이 어려. 그리고 곧 전화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나서 다가오지.


- 무슨.. 일인데, 형. 

- 별거 아냐. 집안일이야

- .. 주원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동식의 말에 중원의 눈이 서글퍼. 핏줄에 미친 사람들이라며.., 중원은 이야기해줘. 저에게서 끝까지 자식을 얻지 못할 거 같자. 집안에서 후계로 주원이 이야기가 나오는 거 같다고. 주원이는 한가쪽, 경찰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무심했다가 일련의 사건을 겪고 휴직중이니. 차라리 이쪽 집안일을 배우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지. 그런데 중원은 겪어봤잖아. 그런 식으로 시작해서 후계나 승계이야기 나오면 곧, 정략혼 이야기도 나올 거라는 걸. 알지.

아, 동식은 어색하게 굳어. 그래. 한주원. 지금은.. 경찰일.. 안하고 있지. 깜박 눈을 감았다 뜨는 동식의 손을 중원이 잡아


- 걱정 하지마 동식아

- 응?

- 주원이는..,


나처럼 후회하며 살게 하지 않을거야 절대. 동식에게 약속하듯 중원이 웃어. 그 미더운 든든한 웃음에 동식은 어쩐지 가슴이 또 술렁거리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는 동식의 입술에 먼저 다가와 중원이 가볍게 입술을 마주 대. 요즘 중원은 동식의 허락 없이 불쑥 이렇게 스킨십을 하곤 해


어쩐지 조급하고, 불안이 섞인 급한 몸의 뒤채임. 그럴 때 동식은 흠칫, 몸을 떨어. .. 이럴때의 중원은 너무 비슷하니까. 그 아이와. 애써 고개를 털어내며 동식은 중원의 손을 꼭 잡아. 자신이 잡고 있는 손의 온기를 잊지 않으려고 확인하듯이. 


...


좀 보자는 중원의 연락이 연달아야.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도 힘들어져서. 주원은 결국에 저를 찾아오겠다는 중원에게 제 주소지를 알려줬어. 만양...? 하고 되묻는 형의 물음에 어쩐지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그저 여기서 좋은 기억이 많아 좀 지내고 있다고 둘러댔지. 마땅히 좋은 가게는 기억이 나질 않아서.


- 여길 오셨다구요? 한주원씨?


재이가 허리에 손을 홀리고 혀를 차지만. 진짜.. 맛좋고 편한 가게를 떠올려보니 여긴 걸 어쩌겠어. 반찬이 세팅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중원을 기다리는 동안. 죄지은 사람처럼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주원을 재이가 보고 혀를 차.


- 뭐야? 여기가 정육점이야 경찰서야? 한주원씨 고개 좀 들어요


어색하게 입술을 비튼 주원의 손이 덜덜 떨려와. 중원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은 좀 남았지. 주원은 앞에 놓인 빈 소주병을 가만 보다가 유리 글라스에 가득 꼴꼴 따라. 그리고 벌컥,


- 미쳤니 너 진짜?


반도 마시기 전에 홱 빼았겼지. 올려다보니 도끼눈을 뜬 재이가 씩씩거리고 있어. 너라니..  일단 반말은 뒤로 하고라도 주원은 다시 저 술잔을 받고 싶어. 인상을 찌푸리는 주원 앞에 훅, 앞머리를 불어 올린 재이가 앉아.


- 내가 웬만하면 그냥 두고 보려는데,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요? 당신 이러는 거 보면 꼭 몇 년 전 아저씨 같아, 똑같은 짓하고 있다고. 죄책감 뒤집어쓴 얼굴 말야


꾹 입술을 말아문 주원이 고개를 떨구지. 만양 내려와서 동식의 집에서 칩거하는 걸 가장 먼저 들켰던 건 재이였어. 한주원씨가 왜 거기서 나오지...? 하며 못마땅하게 눈을 굴리던 재이는. 동식이 뒤처리를 부탁하고간 남은 짐을 모조리 주원이 주워서 들어갔다는 걸 알고도 별말을 하지 않았었지


그러다 한동안 너무 주원이 나오지 않았을 때 동식처럼 잠그지 않은 대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서 반찬이나 죽같은 걸 두고 간 일이 있었지. 뒤치닥거리가 끝날 줄 알았더니, 내 업보가 남은 모양이네. 하고 혀를 차던 재이를 돌려보내려했지만. 당신 이러고 있는 거 그럼 아저씨에게 말해도 되나? 해서 아 무말도 못했었던 주원이었고. 


그 뒤로. 한번은 지훈이가, 드물게 지화가 한주원을 들여다보고 가곤했어. 그렇게.. 살았던 거 같아. 이동식이 떠난 빈자리에서, 한주원은 이동식을 들여다보곤 했던 사람들 곁에 기대서 지낸 거 같아. 겨우 그렇게 살았었는데. 얼마 전 동식을 보고 와서 알았잖아. 이건 사는 게 아니었구나. 나는 그저 이동식 대신 이 자리에서 가만히 누워 .. 겨우 죽은 듯이 숨만 쉬고 살려고 했었구나. 유치한 새끼.. 스스로 자조하고 웃었어. 시위하는 거였지 뭐. 당신 때문에 나 이렇게 아프다. 스치듯 보고라도 .. 불쌍해서라도 좀 돌아와라. 하고 싶었던 거야. 어린놈의 새끼.


재이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한주원의 초라한 머리꼭지를 바라봐. 시간두면.. 정말 괜찮아지는걸까. 이대로 이 남자 그냥 둬도 괜찮은 걸까. 아저씨..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묻고 싶어져. 최근에 동식이 연락왔을 때 재이는 동식의 목소리가 푹 가라앉아있던 걸 떠올려. 한주원 좀.. 지켜봐달라고 했지. 


제 마음이 죄 같아서 스러져가고 있는 한주원을 보고 있지나. 재이는 순리대로 두려던, 손대지 않으려던 결심이 흔들려. 정말 죄라고 생각해요 한주원..? 내가 보기엔 아닌데 말이야. 


- 예전에 아저씨가 사귀는 사람 데리고 인사하러 왔었어요. 여기 이 자리에.

- .. 그랬습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 동식 아저씨가 남자를 사귈 줄은 정말 몰랐다. 뭐 시간이 흘러서 시대가 바뀌었다곤 해도. 아저씨가 다른 사람, 그것도 남자의 호의를 알고.. 받아들이는 게 순식간어서 다들 놀랐다고요. 


- 한주원씨 생각은 어때요? 아저씨가.. 달라진 이유가 뭔거 같아요?

- 글쎄요..


지훈이가 물었을 때, 동식 아저씨도 대답 못하더라. 아니.. 알았는데. 입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겠지. 동식 아저씨 마음, 바꾼 거. 어쩌면 남자도.. 특별한 관계가 되어 사귀는 사이가 되고. 곁에 있어도 좋을지 모른다란 마음 들게 했던 거. 내 생각엔 말야. 


- 그런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 있었던 거야


당사자들은 몰랐겠지..., 뭐 나름 특별한 사정에 가려져서. 차마 고려해보지 않았겠지. 너무 분명한데. 사실은 말이야. 하다못해 그 오지훈도. 알았을걸. 동식 아저씨가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생긴다면 나는.. 그 사람이 아닐까 싶었거든.


재이의 말에 내내 죄책감에 잠겼던 주원의 눈이 반짝 떠올라


- 당신 예뻐서 이런 말 해주는 거 아니예요, 나는. 어찌되었건 동식 아저씨 쪽으로 팔이 굽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아저씨가 행복하면, 다 좋아. 그런데... 당신 꼴 이러는 거보니. 아닌 거 같아. 아닐 거 같아.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재이가 자리에서 일어섰어. 문을 열고 중원이 들어와.


고기를 시키고, 술을 마시겠냐고 묻는 중원의 말에 시선을 맞추던 주원이 고개를 저어. 취하지 않아야해. 이제는. 그럴 이유가 생겼어. 주원은 생각해. 중원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몸은 괜찮은 거냐 등의 안부를 물어와. 찬찬히 주원은 제 앞의 형을 바라봐. 저를 닮았던 중원은 이제.. 동식을 닮았어


좀 무뚝뚝하던 얼굴 표정이 살짝 풀어지고, 웃음을 짓는 입꼬리 한쪽이 올라가는 게.. 동식을 떠올리게 해.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표정까지 닮을 정도 였던거야.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은 어느새. 술렁거리며 올라오는 불안에 술로 다시 시선이 갔지만 주원은 스스로를 다잡아. 주먹을 꾹 쥐고 심호흡해.


짐작한대로 중원은 외가 이야기를 꺼내지. 주원이 적당히 끊어낼 수 있는 일인데도 혹시 싶어서 달려온 사촌형인거야. 저처럼 집안에 매어서 시간을 보내고 괴로워할까 싶었던 거지. 집안의 인정 따위 사실 주원은 진작에 신경 쓰지 않고 살잖아. 동식을 만난 이후로는 쭉. 한사람의 인정만 필요했어.


- 걱정 하지마 형, 나 복직할거고. 결혼할 일도 없어.

- 그래, 다행이다 주원아, 정말..


-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형.

- 뭐? 정말이야? 아니 언제부터...


주원의 말에 함박 웃던 중원이 멈칫거려. 진지하게 저를 보고 있는 주원이 눈빛이. 그러니까. 어디서 본 눈빛이거든. 다 늦은 첫사랑에 아팠던 때, 왜 몰랐을까. 찬찬히 들여다보면 진작 알아챘을 일. 주원이 눈빛이 흔들리지 않아. 저가 예전에 그를 다시 만나면 다시는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그때처럼. 가만히 둘은 시선을 마주대고 있어. 불판에서 다 익은 고기가 새카맣게 타도록, 시간이 지나도록.


- 주원아, 너..

- 맞아, 나 이동식씨 좋아해


그 말을 하고 후련한 듯 주원이 함박 웃어. 꽉. 중원은 제 손안의 잔을 쥐지. 지끈거리고 머리가 아프고, 앞이 아찔해져. 숨을 천천히 고르고. 물어.


- 동식이도... 널 좋아해?

- 뭐?


주원이 제 물음에 황당하단 듯 이맛살을 구겨.


- ., 형은 이동식씨 마음에 확신이 없어?


중원은 어쩐지 대답할 수 없어


...


주원과 만남을 정리하고 중원은 강원도로 돌아와. 하루쯤 만양, 주원의 머무는 곳에서 자고 오려했지만. 그 장소가 동식이 집이었단 걸 알고 나서는 그 마음이 싹 사라졌지. 어떻게.. 이럴수가. 그럼 얼마 전 제가 주원이를 저와 동식이 집에 보냈던 일은.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손이 떨리는데.


별스럽지 않아보였던 동식이, 어쩐지 그때이후로 좀 이상하게 잠을 설치던 일. 게스트룸을 가만 살피던 시선. 전에 없이 주원이 소식에 촉각을 세우던 게 전부 떠오르잖아. 하아..., 숨을 내쉬는데 차는 동식과의 집 앞에 도착했지만 내릴 수가 없어. 불이 켜져 있는 방만 올려다보지.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당당하게 제 감정을 고백하는 주원이에게. ... 동식이도 널 좋아하는지 물었던 걸까. 자신도 모르게 그랬어. 그래.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야. 가끔 저를 바라보는 동식의 눈이, 얼굴을 쓸어 쥐고 품에 안아 등을 쓸어내리는 손짓에서. 이질감이 들 때가 있었거든. .. 그가 보는 게 내가 맞나.


가만히 먼저 잠이 깨어 저를 내려다보는 동식의 시선을 처음 느꼈을 때는 생각이 없었는데. 반복되는 어느 순간 생각이 들었던 거야. 너무 오래.. 지켜보고 있는 동식이. 잠든 제 얼굴을 쓸어보며 한숨을 쉬는 것이. 이상했던 거야. .. 예전에 그를 놓치고 후회가 남았던 그때의 제 숨소리 같아서 말야.


어쩌면 그러니까 남들은 주원이가 저를 닮았다고 하지만 말야. 이동식에게는... 제가 주원이를 닮은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드니 더 숨이 막혀. 푹 핸들에 고개를 처박은 중원이야. 모른 척 할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생각해봐. 이동식은 저를 떠나지 않을거야. 알 수 있어. 만양을 떠날 때 동식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어. 놀라울 정도로 동식은 전부 버렸거든.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전부 새로 채울 거라고 하면서 말끔한 얼굴로 웃었으니까. 돌아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얼굴. 그리고 내민 제 손을 꽉 잡았던 온기. 그건 진짜였어. 그래. 그 결심은. 의심할 나위가 없지. 


- 형...?


똑똑 창문을 두들기고 부르는 목소리에 중원은 고개를 들어. 하루 자고 오기로 하지 않았어? 여기서.. 뭐하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응? 저를 챙기는 동식의 말에 중원은 말을 삼켜. 가만히 그를 품에 끌어안아. 이제 너무 익숙한 제 품안에. 이걸 놓고 싶지 않아. 역시.


괜찮지 않을까. 그냥 모른 척. 품안에 있는 동식을 믿어보면. 그러면.., 그렇게 얼마의 시간 뒤에 고개를 떼어내고 중원이 웃어. 그리고 동식이 마주 웃지.


- 참, 이야기 잘했어? 한주원 어때?


이전 같으면 웃으며 대답했을 중원이 그 동식의 질문에 덜컥, 굳어. 가슴이 콱 막혀.


- 복직.. 할거래. 걱정할 필요.. 없을 거 같아.


중원의 말에 동식이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려. 그래? 복직한대 한주원? 다행이다. 정말.. 하고서 웃지. 중원은 그 뒤에 들은 말은 전하지 않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던가, 그게.. 동식이 너라던가 하는 말은 말야. 그래. 모른 척. 나는 그렇게 살래. 중원은 눈을 감기로 하지. 젊은 주원은.. 그래 또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니니까. 두번째 온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스스로 핑계를 대면서. 제 손을 잡은 옆의 동식만 지키려고 마음 먹어. 


집안에 들어와 몇 마디를 주고받다 동식이 다시 주원이 말을 꺼내. 실은..


- 만양에 좀 다녀올까봐

- 뭐...? 동식이 네가 거길 왜.


불쾌함을 참을 수가 없어. 딱딱하게 굳은 중원의 표정을 동식은 알아차리지 못한 거 같아. 


- 저번에 보니까.. 주원이, 한경위가 술을.. 마시더라. 

- 술? 지금.. 술이라고 했어? 동식아?


중원은 아까 술 한모금도 대지 않던 주원을 떠올려. 제 앞에서는 마시지 않았는데..., 그런데 문득 주원이 엄마의 얼굴이 스치지. 말갛고 창백한 표정. 그러다 어느 날 붉어져 충혈 되었던 무언가에 잠겨버린 두 눈. 그 눈이 닮았지. 중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 심각.. 해?

- 위스키병이... 여럿이었어. 그것도 매일. 여기 온동안도 그랬어. 복직하기로 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좀.. 보고 오고 싶어서.

- 굳이 네가?


중원의 말에 이번에는 동식의 눈이 동그래져. 당연히 다녀오라, 살펴주어 고맙다 대답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좀 의외긴 해서. 


- 응. 왜? 내가 보면 안 될 이유가.. 있어?

- 그건.. 아니지만. 둘이 같이 지내게?

- 새삼, 형은 얼마 전에도 같이 있었는데. 게다가 파트너였고. 싸우기라도 할까봐?


중원은 또 대답할 수 없어



...



언젠가의 한주원처럼 동식도 커다란 트렁크를 싣고 만양으로 달리고 있지.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기로 한 지금. 심경이 복잡해. 한주원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어. 내심 중원이 빤히 보는 걸 알고 있었지만. 괜찮을 거라는 적장한 말을 믿고 지내기에. 그 날, 한주원은 어딘가 망가져있어 보였잖아

거기다 만양에 있다니. 이동식이 두고 온 집안에서 지낸다니.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은거야. 한동안 잔잔한 삶에 잊고 지냈던 기분 나쁜 불안과 울렁거림. 그리고 한주원이 동식을 사로잡았어. 그래서 아마 곁에 있는 중원에게 집중하는 것이 흐려졌나 몰라. 주원에게 가서 당분간 지내겠다는 이야기와 거의 동시에 중원의 외국출장이 결정되었거든. 

그런 일은 종종 있었는데. 오히려 동식이 혼자 있는 것보다 만양에서 지내고 오는 걸 전 같으면 환영했을 중원이. 자신이 떠나는 날 전까지는 동식에게 함께 있어달라고 했어. 실은 온통 신경이 만양쪽으로 쏠려 있었지만 동식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고 마지막 날, 건네받은 것이 동식의 마음을 또 한번 무겁게 하는 거지. 차안 글러브 박스에 고이 모셔둔 반지. .. 반지라니, 따로 그런 걸 챙기는 성격이 동식도 중원도 아니었거든.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군에서 일하고 있는 중원이 갑자기 반지를 끼고 나타나면 관심의 대상이 될 일이이라

아무 날도 아닌데 내밀어진 반지에 동식은 눈만 깜박였지


- 형...?

-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나는 생각하고 있었어. 쭉.

- 내가 생각하는.. 뜻 맞아?


중원이 웃었어. 돌아오면 대답을 듣고 싶다 했어. 이왕이면 그 반지가 동식의 손에 끼워져 있으면 기쁠 거 같다고 했지. 그래. 그랬는데.., 막상 저 반지를 받은 동식은 주저 없이 제 손에 끼우기가 망설여졌어. 거기다 저를 기다리고 있을게 빤한 한주원 앞에서. 반지 끼운 손을 보인다는 게.. 어쩐지 꺼려졌어. 입 밖에도 내지 못하게 했지만 어쩌면 제 모습을 보고 한주원이 더 무너져 내리면 어쩌지란 생각도 들었고. 솔직하게는. 무언가 무서웠어. 저 반지의 무게가.


만양에서 따로 숙소를 잡으려 했지. 그런데 오히려 중원이 설득했어. 주원이 집이 동식이 네 고향집이라며, 주원이도 괜찮다고 했어. 가서 머물다 와. 뭐 하러 번거롭게 따로 숙소를 잡으려고 해 동식아 궁금하잖아. 그래서 가는 거잖아. 중원의 말에 동식은 따로 말을 보탤 수 없었지. 거기서 피하는 게 오히려 더 의식하고 있는 거 같고. 저를 믿는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중원에게 못할 짓을 하는 거 같아서. 동식이 고개를 끄덕였지. 중원이 준 반지를 품에 안고, 주원에게 갈 트렁크를 끌고. 


그동안 재이에게 별다른 말이 없었으니. 사고는 없는 거 같지만 한주원이 만양 제 옛집에서 술독에 빠져있을 모습이 자꾸 그려져서. 일단은 다른 걸 생각하기가 어려웠어. 그리고 도착한 만양 제 집 앞에서. 


- 한주원?

- 왔어요? 


하얀색 반팔티만 걸치고 한참 몸을 움직인 주원이 환하게 웃으며 동식을 맞이해. 짐을 받아들고 마당으로 익숙하게 안내하는 주원이지. 따라 들어선 집 마당에는 색색의 꽃.


- 이게.. 다 뭐예요?

- 아, 마당에 뭐 좀 심고 있었어요. 알록달록. 괜찮죠? 

- 한경위가.. 이런 데 취미가 있었어요?

- 글쎄. 뭐 내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뭐 이것저것 해보고 싶더라고. 구경 시켜줄까요?


티없이 웃고 있는 한주원 얼굴이 그저 맑아, 동식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거렸지


동식이 예전에 쓰던 방을 게스트룸으로 안내받았어. 한바탕 리모델링이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야. 그저 하나하나, 사람 손으로 직접 개조되고 꾸며진 소품들. 이런 것들만 바뀌어도 집안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는 거였구나. 동식은 새삼 놀라워. 모든 공간이 한주원 같고, 조금은 더 따뜻해진 거 같아.


동식은 오래된 흔적이 남은 집안 기둥을 한번 쓸어봐. 예전에.. 그러니까 흔하게 하던, 아버지가 저와 유연이의 키를 재주던 그 기둥 흔적. 그대로야. 가장 먼저 없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뒤에서 온 주원이 웰컴드링크를 동식에게 건네 줘.


- 크게 바꾸진 않으려고요. 집도 흔적이니까


오래되고 바랜 커튼이 달렸던 곳에는 블라인드가 설치되어있어. 동식의 게스트룸 블라인드를 걷어주며, 주원은 또 웃어. 저애가 저렇게 자주 웃는 애였던가. 이 집처럼 익숙하면서 어딘가 낯설은 기분이 들어.  


- 하루 한끼 정도 식사는 나랑 같이. 괜찮죠?

- 그... 불편하지 않겠어요?

- 나? 전혀. 좋죠


식사시간에 보자며 나가던 주원이 한마디를 더 해. 


- 아, 지하실은 가지 말아요


지하실...? 되묻는 동식에게 또 한번 주원이 웃어보였지. 응. 거기 아직 공사가 덜 됐거든요. 오늘은 나랑 먹어요. 내일부터는 뭐. 만양 사람들도 보러 다니시고. 하며 동식의 대답도 듣기 전에 주원은 휙 사라졌어.


신기루 같아


사실 동식은 함께 지내는 동안 주원을 설득하려고 했어. 이 집은 다시 내놓거나, 저에게 다시 팔더라도. 정리하라고 할 참이었어. 복직한다면 강원도로 가야 할테니. 아니 너 정도면 서울에 어차피 본거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첫 식사 때 예전에 못 먹어보지 않았냐며 양갈비 구이를 내놓고 썰던 주원에게 넌지시 물었지. 돌아오는 대답은,


- 아 형에게 못 들었나봐요. 복직할건데. 강원도로 가진 않아요. 문주서에 신청해뒀습니다.

- 문주...? 만양에 계속 남겠단 소리예요?


입맛이 뚝 떨어져 동식은 썰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놨어. 이제 저 빙글거리는 얼굴이 꼴보기 싫어지려해


자주 곁들이던 와인대신 스파클링 음료가 담긴 잔을 빙글거리며 주원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동식에게 몸을 기울여


- 여기가.. 꽤 재밌거든요. 이동식씨도 알잖아요.

- 한경위

- 아 정말. 이러려고 온 거예요 이동식씨? 너무 뻔하잖아. 나 괜찮은가, 그럼 만양에서 쫓아내고, 그 뒤 네 삶을 살라?


동식은 이제 서글퍼. 고집스러운 얼굴에 예전 같으면 다시 주먹이라도 날려 줬을텐데. 마음 다치게 한 것도 모자라, 더 이상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제 맘을 왜 몰라줄까.


- 내가 괜찮아지면 이동식씨는..?

- 무슨..

- 다시 갈건가요? 안심할 수 있어요? 아 한주원이 잘 지내니 나도 내 행복을 찾아가자?


빙긋 웃으며 주원이 스파클링 음료를 단숨에 쭉 들이켜. 꿈틀, 동식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바라봐. 아닌걸 아는데. 저게 예전에 한주원이 정신 못차리던 그 독주 같아 보이잖아. 그래. 어쩌면 한주원 말이 맞아. 자신은 못 믿을거야. 한주원이 괜찮은 건지, 정말인지. 계속 의심하겠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 이게.. 한주원의 답이야? 제 몸 깍아 불살라서.. 내 발목 잡아보겠다?

- 그렇게 표현하지 말아요. 무섭잖아.

- 야

- 잠시 그럴까 싶었죠. 그런데.. 마음 고쳐먹었어. 나 하나 망가져야, 그 옆에서 당신마저 망가지면 무슨 소용이야.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어요. 걱정 마.


다 먹은 건가요? 웃으며 그릇을 치우는 주원의 등을 보며 동식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겨. 담배 생각이 간절해져. 강원도에서 중원과 지내며, 자연스레 술담배를 하지 않는 중원을 따라 동식도 거의 담배를 끊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몹시 답답해지는 거야. 


- 우리 아직 시간 많잖아요, 가서 쉬어요 이동식씨


아니면 나랑 좀 더 어울려 줄건가? 빙긋 웃으며 다가온 주원이 슬쩍 손목을 쓸어내려. 휙, 그 손을 떼치고 잠시 노려본 동식은 먼저 몸을 돌려 이층 계단을 올라. 제 뒷모습을 빤히 주원이 쳐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져. 끈적하고 타들어가는 기분. 실수였나 여기온건. 동식은 잘근 입술을 물어.


...


다음 날은 밖으로 일찍 나와 거의 온종일 만양의 길을 헤맸어.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조금씩 바뀐 가게의 풍경 같은 것들.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한 지화와 약속을 정하고 문주서 근처로 가니 뭔가 더 기분이 착잡해. 즐겨 찾던 국밥집에 마주 앉아, 이놈의 국밥 지겹지도 않냐 툴툴대는 지화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조금 웃음이 났지. 만양을 떠나며 의식적으로 내내 피했던 한주원 이야기를 안할 수 없었지. 그래, 지금 한주원집에서 지내..? 지화는 그 말을 뱉고 흠, 대답이 없어. 


- 뭐 얼마간 좀 위태해보이긴 했지만, 많이 좋아진거 같던데

- 한경위가..? 좋아진거라고?

- 응. 전에는 더 가관이었지


지훈이가 신고 받고 갈대숲에서 한주원 끌고 나온 적도 있었고, 그냥 주취자인가 했더니 얼굴이 익숙해서 한참 봤었다 야. 지화의 말에 동식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 


- 왜. 말 안했어? 지화야 그런 일 있었으면

- 알면? 돌아오게?


- 지화야..

- 이 꼴, 저 꼴 안보려고 간 거 아니었어? 그랬잖아 이동식


동식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삼켜. 몰랐어. 몰랐지. 한주원이 이렇게까지.. 알았으면, 알았다면.., 


- 싫었잖아, 너

- ...

- 달라지는 거, 바뀌는 거. 그래서 도망친 거잖아. ..그거 아는데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냐. 그냥 저 어린놈 하나 망가지는거 보고 마는거지.


알았지. 지화는. 제 친구가 강원도에서 어린 한주원과 만나고 온 뒤에 앓듯이 쉬는 한숨을, 달 훤한 밤에 까닭 없이 서성거리는 이유를. 그러다 순식간에 모든 걸 내던지고 누군가를 동앗줄 삼아 후루룩 떠나버린 이유를.


제 발등 찍은 것처럼 얼굴을 구기는 이동식의 모습을, 어쩌면 미리서 알았지.



...



한주원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어. 그날은 피하듯 지훈이 자취방에서 하루를 꼬박 보냈지. 늦은 오후가 기울어져서 집에 들어갔더니, 여전히 맑은 얼굴로 한주원이 바라봐


- 벌써부터 외박을 하시고, 약속 잘 안지키는 거 알았지만 너무 하네요 이동식씨

- .. 지랄


동식은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왔지. 그럼에도 한주원은 너털 웃고, 정원일을 하느라 끼웠던 장갑을 빼내. 당신 술 마신 거 같은데.. 해장은? 콩나물국 끓여줄까요. 나 잘해요. 


한주원이 끓여준 따끈한 콩나물국을 한모금 떴지. 술기운은 이미 달아난지 오래인데 속이 까끌거려. 저는 이미 점심을 먹었다면서 한주원은 제 앞에 가만 앉아서 턱을 괴고 동식을 보고있지.


- 먹지도 않으면서, 뭐 하러 앉아서 봅니까


시비조로 뚱한 동식의 말에도, 빙긋 웃기만 해.


- 좋아하는 사람 입에 뭐 들어가는 거 보면 배부르다더니. 진짜네요.

- ....


동식은 달칵 숟가락을 내려놔. 이게 진짜. 냉수만 필요한 순간이야 지금은.


벌컥 냉수잔만 들이키고 놀보는 동식의 시선을 그저 받으면서 주원은 여유롭기만 해. 마당에 먹을만한 걸 길러볼까 싶은데 이동식씨는 뭐가 좋아요? 상추나.. 고추? 아니면 오이 같은 것도 좋으려나. 


-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 응? 자주 올 거잖아요 앞으로, 아냐?


- 뭐?

- 당신 나 확인하러 올 거니까


꾹, 입술을 깨물며 동식은 계속 주원을 노려봐. 한경위.. , 다시 부르는데 주원이 부드럽게 턱짓으로 이층에 까닥여


- 협탁 위에 반지, 왜 아직 안했어요?

- ... 그걸 어떻게

- 너무 딱 올려놔서. 나 보라고 둔 줄 알았는데. 형이 준건가요? 취향이 그렇더라고. 좀 올드해.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동식을 질끈 눈을 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 그만해요.

- 형이 그러더라고, 끝까지 자긴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 ..뭐?

- 몰랐어요? 나 형한테 말했어. 이동식씨 좋아한다고. 그런데. 지금 봐. 내 품안에 당신을 떠밀었잖아.


- 무슨 소리 하는거야.

- 믿는 단거지


오만한건 집안 내력 인가봐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주원이 빙긋 웃어. 


- 형은 나도, 당신도. 포기할 마음 없는거야. 그러니.. 지금 우리가 여기 함께 있는 거예요. 

- 믿는 사람이 무슨 잘못이야.

- 맞아요, 믿음은 죄가 없지. 그런데 기억 안나요? 이동식씨 사람은, 머리 검은 짐승이 믿을만 하던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한주원의 숨결이 동식의 얼굴 앞에 흩뿌려져, 당신은 나 얼마나 믿습니까. 스스로는요..? 믿을 만 하던가요? 찌르르, 검은 욕망이 가득한 눈빛. 익숙하고 최초로 느낄때 동식을 몸서리치게 하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주원이 마주 대와. 손가락 하나가 뻗어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진작에 걸렸어야 할 반지가 없는 동식의 네 번째 손가락을 감싸고 느른하고 천천히, 쓸어내리고 올리는 주원의 손짓이 반복돼. 그것 뿐. 손가락 하나가 매만져지는 것뿐이었는데 발가벗은 전신이 순식간에 한주원의 손아귀에서 훑어졌다 내팽개쳐지는 기분이 들어. 후두둑, 동식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쳐


당장에 더 다가와 동식의 목덜미를 잡아챌 거 같은 눈을 하던 주원은 의외로 동식이 뒤로 물러서자 다가서지 않아. 그저 겁에 질린 건 동식뿐. 주춤주춤. 동식은 도망치듯 이층계단을 밟고 올라가 게스트룸의 문을 닫고 달깍, 잠궜어. 쳐들어오는 이도 없는데 마음의 문을 누군가 세차게 때린 거같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떨림을 겨우 진정시킨 동식은 그제야 삼일이 지나는 동안 중원이 연락하나 없다는 걸 알아. 무슨 마음으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인지. 어렴풋하게 그의 마음을 알 듯해. 정리하고 돌아와 주길 바라는거야. 중원은. 한주원을. 어설픈 마음을.


제.. 마음을, 동식은 협탁 위에 놓아둔. 중원의 반지를 다시 열어서 쥐어봐. 이렇게 진지하고 무거운 마음일줄은.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한걸까. 문득 행복하냐 묻는 재이와, 도망친거잖아 하던 지화와, ..스스로를 믿느냐는 주원의 말들이 동시에 들려와. 괴로워져. 동식은 다시 동그랗게 몸을 웅크려.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흐릿해져. 아직도.. 가끔은 이런 날들이 찾아와. 상처는 흔적으로 남아.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특별한 어떤 날에는 이렇게 몽롱한 고통에 잠겨. 만양의 집에서 동식은 온전히 지금 그 고통에 잠겨있어. .. 강원도에서 중원의 곁에서는 그럴 수 없었어. 다 버렸으니까. 잊은 거였으니까


중원의 곁에서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슬며시 일어나 오랫동안 드라이브를 했지. 답답해서 다녀왔다는 말을 하며 돌아온 동식을 포옹해줬지만 그도 알았겠지. 온전히 그의 곁에서 아파할 수 없는 동식을. 아직은 입 밖에 낼 수 없는 기억들을. 

젖은 속눈썹이 무거워. 뜨기를 포기하고 한참을 감고 있어



...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걸까.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고 난 뒤,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동식이 문을 열어.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을 여니.. 복도 계단에 음영 진 그림자가 보여.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지. 동식은 그 그림자도 저를 보고 있다는 걸 느껴. 그저 가만히. 오랫동안 거기 있던 것처럼.

그래, 너는 거기에 있구나. 계속 사라지지 않고. 풀썩, 쓰러지듯 앞으로 쏟아지는 동식을 받쳐들어. 그 그림자에 푹 잠기듯 익숙한 어둠에 동식은 몸에 힘을 빼고 던져. 끝이 없는 그림자는 커다랗게 몸을 키워 안아들지.


꿈이었나, 아침에 깨었을 때 동식은 침대 위였어. 블라인드가 젖혀있었지.


샤워하고 주원이 차려놓은 듯한 미음같은 누룽지를 몇 번 떠먹었지. 아직 조용한 아침에 계단 문을 여니, 스치듯 보던 정원이 눈에 들어와. 이것저것 심어놓은 알록달록한 생기 가득한 꽃, 난쟁이 정원 장식. 저건 영국산인가 싶어. 그리고 정말 심을 건지 갈아놓은 텃밭 한 귀퉁이.


제 집이라더니.. 찬찬히 뜯어보면 강원도에서 동식이 꾸며놓았던 텃밭모양이랑 비슷해. 주원의 취향이 아닌 정감있던 소품도 가만히 지켜보니 동식의 취향이었어. 한주원은.. 여기 저와 자신의 집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거야. 도련님 하는 짓 좀 봐. 동식은 피식 새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그러다 동식의 시선이 지하실 쪽으로 향하지. 공사 중이라고.. 했지만 특별한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어. 여기 머문 지 일주일째. 저문은 그대로 잠겨 있었던거 같아. 그전엔 의식적으로 궁금해 하지 않으려했는데. 이젠 좀 봐야겠다 싶어. 손잡이를 잡고 흔들다 동식은 좌우로 고개를 돌려. 묵직한 돌을 들어올려.


깡깡. 소리를 내며 손잡이를 몇 번이나 내리쳐. 맨손에 쥐고 내리친 탓에 손끝이 벗겨졌지만 개의치 않아. 몇 번을 반복해 돌로 손잡이를 내리치자 철이 휘어지는 소리가 들려.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바깥쪽으로 밀리고. 아직 빛이 들어오지 않은 곳의 먼지에 콜록, 동식이 기침을 해.


반 계단을 내려가면 익숙한 지하실이. 거기에서 동식은 말문이 막혀. 가운데 가만히 가운데 서있는 지금.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 ... 봐버렸네.


언제 온 건지 주원의 목소리가 들려. 그 쪽으로 고개를 틀었어. 설명을 요구하는 동식의 눈빛에 주원은 말이 없어. 그저 삐거덕, 동식이 오래전 버린 쇼파 위에 익숙하게 몸을 구겨 넣는 한주원만 있어. 


- 가끔, 여기 와서 자요. 예전 당신처럼.


동식이 내다버린 모든 것들이 여기에 있어. 쇼파부터 시작해서 낡은 담요까지. 거기에.. 한주원이 있어. 버려진 것처럼. 동식에게서.


힘 없이 쇼파 한 켠에 주저앉은 동식을 뒤에서 주원이 끌어안아. 여기서, 당신처럼 지내면서 알았어요. 이동식씨.. 당신은 그동안 전쟁 속에서 산 거라는 걸. 뒤에서 제 머리칼에 입술을 묻고 중얼거리는 주원이 말을 들으며 동식은 가만히 눈을 감아. 있죠, 이동식씨..,


-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바람 한 점 없는 평화 같은 거 만족 못해요. 알아요? 당신은 결국에 필요한 거야, 고통이든. 상처든. 그게 당신에게는 줄곧 삶이었으니까. 


주원이 긴 팔을 뻗어 동식을 더 제게로 끌어안아. 그러니까 당신은, 


- 나 같은 사람이 딱 이예요. 이동식씨. 


당신을 나만큼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



중원이 마지막 결재 서류에 막 사인을 한 직 후, 노크소리와 함께 서무를 보는 장교병이 경례를 붙인다. 썼던 안경을 내려놓은 중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 나 없는 동안 부대 살림 하느라 수고 많았어.

- 아닙니다! 중령님! 무사히 복귀하셔서 다행입니다.


- 그래 당분간 내가 더 신경쓸게. 박소위. 

- 저.. 중령님, 밖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마칠 시간이긴 하지만 부대까지 중원의 손님이 오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중원 곁에서 그의 일을 챙기던 박소위의 눈에도 호기심이 가득하다.


- 아, 알아. 만나기로 한 사람 있어서. 오늘 나 먼저 나가봐도 되겠지?


빙긋, 웃는 중원의 미소는 너무 뜻밖이라 잠시 멍하던 박소위가 경례를 붙인다.


보통 운전병이 귀가까지 함께 보좌하지만, 오늘은 고개를 젓는 중원이 부대 끝 앞에 햇볕을 비스듬히 보고 선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든다. 중원을 발견한 남자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띠며, 그에게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긴 시간동안 이렇게 직장 근처까지 온 일은 없었다.


- 밥은?

- 아, 형이랑 먹으려고. 기다렸지.


살갑게 웃는 동식의 미소에 중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만 가면 여기 탕집있어. 거기 국수도 팔고. 저번에 동식이 네가 흘리며 말한 거 있잖아.


- 생선국수?

- 그래, 그거. 가자. 아직 식당 문 열었을거야


중원의 안내로 찾은 식당은 부대와 아주 가깝다


의자에 한쪽 팔을 걸치고 뜨거운 그릇을 휘휘 젓가락으로 젓는 동식의 머리꼭지를 물끄러미 중원이 본다. 어때, 묻는 중원의 말에 빙긋 웃는다. 맛있지 뭐. 대답하는 동식의 말에 그제야 중원도 젓가락을 든다.


- 진작 데리고 올걸 그랬다.

- ... 형 직장 근처잖아

- 그러게, 그게 뭐라고 눈치를 봤었는지


눈을 내리깔았던 동식이 고개를 든다. 동식의 시선을 느꼈을 중원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국수의 절반을 순식간에 비웠다. 이거 먹고 뭐할까, 아 저번에 장교들 이야기 들으니까 여기 근처 카페가.., 이야기를 건네며 젓가락질을 하는 중원의 손가락에 반지가 반짝인다. 

동식은 그 반지에 시선을 둔다.


카페에 자리를 이동해 중원이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한잔씩 들고 테라스로 이동한다. 멀리 야경이 보이는 조용한 자리.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고. 동식은 제 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있잖아, 형..,


- 주원이랑 잤니, 동식아?


놀라 퍼뜩, 동식이 고개를 든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아냐, 형 아니야. 저도 모르게 뻗은 손으로 동식이 중원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제야 중원은 저와 달리 아무것도 끼워지지 않은 동식의 손과 붉어진 손끝을 본다. 


- 미안, 나도 별거 없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 나도 모르게. 다녀와서 네 짐도 없이 비어버린 집을 보니까.. ,


사실 비워져버린 짐이래야 옷가지 몇 가지와 신발 정도뿐이었다. 잠시 떠날 때처럼. 동식은 아무것도 제 것이 아니었다는 듯 대부분 건드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중원은 알았다. 떠났구나, 동식이. 그럼.. 만양에 있나. 아직도 주원과? 돌아올 때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몇 차례 만남을 피한 건 중원이다.


동식에게서 나올 말을 들을 자신이 없어서 출장 후 업무가 바쁘단 말로 피하고, 피하기를 얼마간. 동식이 다시 연락해왔다. 저가 만나러 오겠다고.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달라고. 그 말에 충동적으로 부대 앞으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다. 


- 나.. 옥천에 있어, 형. 주원이랑 그런 거 아냐


그런 일 없었어, 믿어줘. 더듬거리며 말하는 동식의 얼굴이 그새 또 살이 내려있었다. 괴로울 걸.. 알았지. 알고 그 아이에게 보낸 것은 중원이다. 옥천, 그래 옥천에 있구나. 만양의 모든 것을 정리한 동식이 유일하게 남겨 둔 하나가 옥천의 별장이었다. 부친 같던 전 직장상사가 남겨준 곳, 도피처. 최후의 보루 같은 장소라는 걸 중원도 알았다, 그곳이 저를 피해 도망칠 곳이 될 줄은 몰랐다. 아니 피하려 던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겠지.


- 주원이가.., 만양에 있어. 형.

- ....

- 내가 버려둔 곳에. 그걸 전부 끌어안고 그 얘가, 나는 형. 그러니까 나는.


도저히 그 얘를 거기 혼자 둘 수가 없어서. 괴로운 듯 찌푸리던 동식의 숨이 작게 헐떡인다. 

중원은 제 손위에 살며시 올린 동식의 손을 꽈악, 잡아쥔다. 그 악력에 헐떡이던 동식이 젖은 눈을 들었다. 알았다, 대충은 동식이 어떤 마음으로 저를 택하고, 손을 잡았는지를. 


동식의 밤외출이 길어질 때. 고민하다 살며시 동식의 고향 친구인 지화에게 연락을 넣었고, 그가 말해주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을지, 버텨왔을지. 저가 동식의 지나온 시간에 먹먹했다. 잠든 머리맡에서 동식이 안쓰러워서, 가슴이 시려서. 이를 문채 울기도 했다. 그리고.. 많이 놀랐다. 주원이가 벌인 일에 대해 대충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동식의 모든 것에 그 얘가 깊숙이 관여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시겠지만, 저와 눈을 마주친 오지화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었다.


- 동식이가, 중년의 위기 그런 건 아닐거고요. 중원씨도 그러진 않겠지만요.

- .... 아닙니다.

- 걔가 그렇게 다 버리고 가는 거


제가 예전에, 이십대 초반에 그 비슷한 짓을 한번 해봐서 알거든요? 짧게 한숨을 쉰 지화가 중원과 눈을 마주쳤다.


- 걘 지가 뭘 버리고 가는 줄도 모를 거예요, 그저..  중원씨만 보고싶은 거예요. 당신이 주는 것만요.

- 제가.. 주는 것이요?

- 안정감, 고요함, .. 그런 거요


그제야 알았다, 동식은 원래 허벅지 통증으로 진통제를 달고 사는 사람이고, 바람이 차게 부는 날에 훌쩍 사라져 지하실에 몇 일간 처박히기도 하고, 쉬는 날엔 산꼭대기까지 미친 듯 내달리며 제 몸을 학대해오며 살았던 이라고. 


- 동식이 그래서 그런 거예요, 모른 척, 다 잊은 척 해도.. 습관이라서.


제가 동식이에게 어떻게..., 턱을 쓸어쥐고 심각해진 중원에게 지화는 고개를 까닥였다. 원하는 거 주세요. 동식이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그렇게 살게 해요. / 알아채지 못하다뇨? 중원의 말에 지화는 어쩐지 꾹 입을 다물었다. 


중원도 알았다. 동식이 제게 바라는 것은 그저 모른 척 해주는 일이라는 걸.

중원은 처음 동식을 보았을 때를 떠올린다. 


피딱지를 입가에 달고, 부어오른 뺨을 하고도 멍한 눈동자. 이곳에 있으나, 여기에 없는 사람. 그게 동식이었다. 부당함을 왜 견디고만 있냐는 중원의 물음에. 모른 척 해달라고 덤덤하게 부탁했던 어리고 지친 목소리. 그래,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거다. 

다시 만나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한눈에 알아봤지만 그때의 동식이 아닌 것만 같아서 한참을 자리에 굳어 봤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지기도 했지만, 동식의 눈이 그때와 달리 반짝거려서. 지금 생각하니 그 반짝거리고 따뜻한 눈이 주원을 보고 있어서. 중원은 처음부터 알았다. 이 극에서 제가 이방인인걸


그럼에도 모른 척 동식을 기다리면, 아마 천천히 그는 다시 제게로 발을 틀 것이다. 무풍지대로. 중원에게로. 느리게나마 향할 것이다. 주원과 저의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다. 어린 녀석은 조급하고, 갈망하지만. 저는 기다릴 줄 안다. 오래도록 은은하게 옆을 데울 줄 안다. 

지금은 열기에 놀라 동식이 몸을 피한 것뿐이다. 하지만, 중원과 주원이 꼭 같은 것이 있다. 절반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과거와 미래로 나누는 일. 지금의 동식을 어디에서도 발붙이지 못하도록 양 극단에서 잡고 있는 것이 저희 둘이라는 걸 알면서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일은. 하지 못한다. 


- 동식아, 나 좋아하니?


이 나이를 먹고 입에 올리게 될 줄은 몰랐던 철 없는 질문, 그러나 계속해서 궁금하던 걸 중원은 물었다. 파핫, 소리를 내며 동식의 입이 벌어져 웃었다.


- 당연하지, 형. 나 형 좋아해. ... 정말 좋아해. 

- 그래, 그럼 있잖아 주원이는?


- 형?

- 그래, 알아. 너 주원이랑 안잔 거, 그런데... 자고 싶었니?


중원의 질문에 질끈, 동식이 눈을 감는다. 이제와 동식이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 


- 형, 한주원은... 나한테.

- ...

- 그냥 주원이야. 한주원.


어떠한 정의도 설명도 할 수 없는, 동식에게는 그저 한주원이다. 그 말을 들은 것으로 중원에게는 답이 되었다. 중원은 천천히 동식의 손을 놓았다.


- 동식아, 나는 신경 쓰여

- 형..? 

- 네가.. 너무 신경이 쓰여.


주원이가 아니라, 이동식 네가. 너는 그때도, 지금도. 너 스스로를 챙기질 않아. 결국에.. 곁에 있는 사람이 먼저 알아차리게 하지. 지금도 그런거야. 네가 몰라도, 나는 알 수 밖에 없는 거야. 네 마음을. 


- 고마웠어, 동식아.


중원이 말했다, 그저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곁에 머물 순 없는 거라고. 



...



- 아저씨 자주 좀 오라니까, 이게 얼마만이에요? 얼굴 까먹겠어?

- 우리 재이 더 예뻐진 거 같네


- 형, 나는요? 나는

- 우리 오지훈은 똑같이 실없고

- 너무해요! 누나보다 형이 더 미워



- 어라, 가만있는 친누나는 왜 자극하실까. 오경장.

- 앗, 오경위님 언제 오셨습니까?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화에게 경례를 붙인 지훈이 히죽 웃는다. 그런 지훈을 흘깃 노려본 지화가, 싱글 웃는 동식 앞에 털썩 앉는다.


- 이똥식? 얼굴 귀하다? 

- 값이 올랐어. 지화야, 못들었어?


샐쭉거리는 동식의 어깨를 가볍게 친 지화가 웃는다. 옥천에선 뭐 먹고 사니? 붕어랑 같이 떡밥만 먹고 사는 거 아냐? 지화의 말에 잘먹고 잘삽니다 하는 너스레를 떠는 동식은 이제 한결 편해 보인다.


- 그러니까, 문주서가 난리야. 이또라이 가고 한또라이왔다고. 

- 진짜 요즘 한경위님 보면..


지화의 말에 동의하며 지훈이가 고개를 절레 젓는다. 딱, 만양 파출소때 동식이형 같다니까요? 저번에는 눈이 도는 걸 코앞에서 보는데. 저 그 날 페리카나 사장님 혈압으로 실려 가는 줄 알았잖아요? 어찌나 따박따박, 더해. 동식이형 보다 더 독해. 지훈이의 뒷담화에도 자리에 웃음이 터진다.


- 오늘 근무길 망정이지, 한주원씨 있었으면 지훈이 입담 터지는 것도 못보고 아쉬워서 어쩔 뻔 했대?


끓고 있는 김치찌개에 고깃덩이를 더 넣으며 재이가 웃는다. 지훈이 웃으며 찌개를 젓는다. 


그래도 좋아요 요즘 한경위님은 그래도 뭐랄까. 냄새가 나. 사람냄새.

어이구 문주서 또라이 사냥개가 한주원인줄 알았더니, 냄새를 맡고 다니셨어? 오지훈이? 지화의 놀림에도 잠시 입술만 삐죽이는 지훈이다.


- 그래서 동식이형 오늘 자고 갈 거죠?

- 그래야지. 시간도 늦었고

- 나랑 자요, 나 자취방 이사해서 이제 투룸이야, 구경 와요 응?



- 이동식씨는 선약 있는데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의자에서 펄쩍 지훈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뭡니까, 오경장 죄지었습니까? 왜 그렇게 놀랍니까. 찬바람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한주원의 말에 지훈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런 주원에게 옆자리 좌석을 빼주며 동식이 갸웃 고개를 기울인다.


- 그러게 발 저리네. 지훈이.


- 치사해요, 동식이형 안 그래도 가끔 오는데. 왜 매번 올 때마다 한경위님집에서만 자요?

- 억울하면, 오경장도 집을 사둬요. 이동식씨가 좋아할 만한 걸로

- 와, 누나.. 들었어? 한경위님 말하는 거봐.


자, 그만. 매상 더 올리실 거 아니면 다들 그만 가시죠? 재이의 중재에 자리가 파한다.


...


함께 나란히 만양의 집까지 걸으며 적당히 술기운이 오른 동식은 기분 좋은 미소를 걸고 있다. 어쩐지 뚱해 보이는 제 옆의 남자에게 농을 쳐본다.


- 지훈이한테 좀 잘해줘요. 걘 그래도 한경위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대

- 그런데도 이동식씨를 제일 좋아한다고 그럽니다. 눌러줘야 해요.

- 어이구


나이도 또래면서 형 노릇 하는 겁니까 한경위? 동생 좀 귀여워해주지. 사람이 야박하게.., 동식의 말에 뚝 주원의 걸음이 멈춘다.


- 오경장이 귀엽습니까? 이동식씨 눈에?

- 응? 귀엽잖아요 지훈이, 서글서글하고 애교도 많고


- 언젠 제가 귀엽댔잖아요

- 내가?


언제..., 아 그때. 세상에 언제 적 일이야. 어이없는 과거의 기억 소환에 동식이 헛웃음을 친다. 그렇게 기억도 못하는 다정함 뿌리고 다니시면 안 됩니다. 뾰루퉁한 주원의 말에. 어쭈? 싶어지는 동식이다. 


- 그러는 경위님은, 기억 안나요? '이경사님 마음에 조금도 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랬잖아.

- 기억.. 안나는데요

- 기억력 좋으시다며?

- 저도 이제 나이 앞자리가, 3자입니다. 이동식씨.

- 까부네. 한주원씨


누구 앞에서 지금 나이로 주름잡아요? 아직 얼굴도 팽팽한 양반이. 삐죽한 동식의 말에도, 좀 더 나이 먹은 한주원은 어쩐지 능글맞아졌다 예전의 그 나이대 이동식처럼 장난스럽기도 하다.


- 알만큼만 안단 소립니다

- 어이구, 그러세요? 잘난 한경위님 뭘 알고, 뭘 모르십니까?


동식의 말에, 주원이 시선을 맞춰온다. 장난기가 담겨 반짝거리지만 한편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 이동식씨가 만양에 돌아오지 않는 이유, 가끔은 이렇게 꼬박 들러 저와 집을 둘러보고 가는 이유, 모른 척 이렇게 손을 잡는 건 괜찮지만


그렇게 말하며 주원이 옆에서 팔을 뻗어와, 가볍게 동식의 손바닥을 스친다. 그리고 동식이 의식하기 전에 손가락을 마주 잡아 끼운 채다. 차마.. 그 손을 떼질 못하고 머뭇거리며 보는 동식을 향해 빙긋 웃는다. 그의 시선이 동식의 얼굴과 입술가로 머문다.


- 아직은.. 당신에게 키스 할 수 없는 이유요.

- ....


만양의 집 앞 가로등은 아직도 고치질 않은 모양이다. 어두운 음영이 반이 넘게 가려진 한주원의 얼굴에 절반의 달빛만 비춘다. .. 그 이유가 뭔데, 동식의 말에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도 어쩌면 한쪽만 비틀려있을 것이다.


- 헤어지질 못했잖아.

- ...

- 내가, 분노 걔와. 당신도.. 알고 있었죠?


모든 것이 끝나고 강원도에 날 만나러왔던 당신은 몇 번이나 확인했던 겁니다. 한주원이, 아직도, 분노와 헤어지지 못했다는 걸.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했겠죠. 당신에게 상처준 일들, 바꿀 수 없는 과거 속에서 내가 분노하고, 스스로를 미워하는 거 멈추지 못할 거라고 생각 했잖아요 당신 그래서,


- 도망간 거잖아요


조금 더 닿고 싶은 마음이 틈 없이 맞닿은 손바닥에서 전해진다. 뜨겁게 박동하는 오목한 손바닥이 맞물려, 천천히 살갗이 비벼지고 위로하듯 쓰다듬어진다. 


- 나도 이별 중입니다

- ... 그래요.

- 그러니까 지금은, 이걸로 만족 할게요


당신은. 내가 나를 용서하는 만큼. 딱 그만큼 당신을 내게 허락 할테니까. 

동식이 내민 손으로 주원이 반쯤 고개를 기울여 기댄다. 바람에 식어 차가운 주원의 뺨을 엄지로 쓸어보다, 마주친 까만 눈을 천천히 감는 주원을 본다. 그는 가려둔 제 마음이, 다시 기우는 것을 느낀다. 동식은 달처럼 둥글고 환한 주원의 뺨에 기꺼이 입을 맞췄다. 






+) 원동력님의 그림 연성, 갓갓 함께 봐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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