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mama!milk - a piacere









1.

“ 상대적으로 오세훈 회장의 영향이 적은 자계열사 몇 개의 주식을 지속적으로 사들이고 있어요. 이게 그 증거고요. ”

 

 

 

지성은 이틀 안으로 겨우 시간을 맞춰 그의 연구소 근처로 찾아왔다. 연구소 내에서 마주하기엔 위험부담이 컸기에 점심시간에 차를 끌고 나간 설하가 근처 공영주차장에서 기다리던 그를 본인의 차로 불렀다. 지성이 넘겨준 패드 화면엔 오성열이 개인 명의로 조양의 자계열사의 주식들을 사들인 정황이 포착되어 있었다. 매수 기간은 꽤 오래전부터였고, 야금야금 사들였기에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조금씩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 제 생각엔, 사들인 자계열사의 본인 지분을 차차 늘려 오 회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갖는 게 우선 목적인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최종적으로 원하는 건... ”

“ 원하는 건. ”

“ 그룹 전권專權 찬탈. ”

 

 

 

뭐, 아직은 제 예상일 뿐이지만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법무부 장관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게다가 요즘 오 사장이 자주 만나는 지인 중엔 현직 판사들도 많으니까요. 아주 없는 확률이라곤 볼 수 없어요.

그 얘기를 들은 설하는 지성이 찾아낸 자료들을 꼼꼼히 훑으며 본인의 계정으로 옮겼다. 그러곤 휴대폰으로 뭔가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패드를 넘겨준다.

 

 

 

“ 이체했으니까 확인해봐. ”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계좌 잔액을 확인하던 지성은 생각보다 크게 들어온 액수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꾸벅 숙여 인사를 올린다.

 

 

 

“ 감사합니다, 소장님.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

 

 

 

패드를 가방에 챙겨 차에서 내린 그가 미련 없이 문을 닫고서 해맑은 얼굴로 다시 한번 그를 향해 상체를 깊게 숙인다. 안녕히 가십시오. 극존칭까지 쓰며 본인의 차로 향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설하는 여전히 지성의 차 아래에 붙어있는 GPS를 확인하며 연구소로 차를 몰았다.

 

 

 

 

 

 

 

 

 







 

 

 

 

2.

지우가 잠든 걸 확인한 후 거실로 나온 설하는 때마침 현관과 이어진 복도에서 걸어오는 세훈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 ..내일 진짜 얻어맞겠네. ”

 

 

 

또 얻어맞아? 재킷을 벗어 소파에 올려두던 세훈이 픽 웃으며 묻는다. 그러곤 본인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꿔놓은 후 거실 테이블에 대충 던져놓는다.

 

 

 

“ 저번에 말했던 형사, 며칠 안으로 지방 내려갈 거야. ”

“ 좌천이야? ”

“ 요즘 누가 좌천이라 그래, 그냥 리프레시 개념이지. 알아보니 형사 밥 15년이더라. 그간 열심히 일했으니 잠깐 쉬기도 해야지. ”

“ ...... ”

 

 

 

타이까지 풀어내던 세훈이 탐탁잖은 설하의 표정에 풀던 걸 멈추고 가까이 다가와 섰다.

 

 

 

“ 왜. 그냥 죽여버릴 걸 그랬나. ”

“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네. ”

“ 널 죽이는 것도 아닌데 심각할 필요 있나. ”

“ 진짜 나 사랑하는구나. ”

 

 

 

그러더니 뜬금없단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타이를 마저 풀어낸다.

 

 

 

“ 자꾸 묻는 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

 

 

 

셔츠 카라깃 단추 두어 개와 소맷단의 커프스 버튼도 차례대로 푼다. 그러곤 미세하게 눈동자가 흔들리는 설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바람 빠진 웃음 소릴 내며 그의 이마에 입술을 꾹 찍었다.

 

 

 

“ 사랑해. ”

“ ...... ”

“ 여자들은 이 말이 그렇게 듣고 싶나. ”

“ ...... ”

“ 말로 해서 증명이 되는 건 아닌데. ”

 

 

 

그래도 듣고 싶다면, 사랑해. 널 위해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닐 만큼. 설하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며 끌어당긴 세훈이 단번에 그의 숨을 삼켜버린다. 그러곤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밀려나던 설하가 다급히 벽을 붙잡아 보지만, 세훈은 보란 듯이 그의 손을 벽에서 떼어내 번쩍 안아 들었다. 성큼성큼 안방으로 향하는 걸음에 불안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설하는 끝내 포기하고서 목을 끌어안았다.

 

 

 

“ 네 와이프는 날 얼마나 죽이고 싶을까. ”

“ 그 사람이 정말 날 사랑해서 널 죽이고 싶은 걸까. ”

“ 100%는 아니어도 그 마음이 더 크긴 하겠지. ”

 

 

 

세훈이 푸흐흐, 어이없단 듯 웃는다.

 

 

 

“ 너 이렇게 순진해 빠져서 나랑 어떻게 뒹굴래. ”

“ 아니, 내 말이 맞아. ”

“ 아마 네 말이 틀릴 거야. ”

“ 확신해? ”

“ 왜 확신을 못 하겠어. 그 사람과 난 시작부터 틀렸는데. ”

 

 

 

분명 형사는 본인이 좌천당한 걸 알게 되면, 조양에서 사주한 짓이란 걸 눈치챌 게 뻔했다. 지금 같은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면 인터넷에 글 한 번 올리는 걸로 모든 판도를 뒤집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조양은 윤리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회장은 친척 동생과 불륜이란 뒷소문이 돌았고, 그 친척 동생은 까딱하다간 제 남편을 산에서 밀어 죽인 살인자로 감방에 들어갈 처지다. 또한 회장의 누나마저 친척 동생 남편과 불륜으로 아이를 낳고 마약까지 손댔으니, 어찌 보면 지금보다 더 최악일 순 없었다.

 

 

 

“ 나도 너 사랑해. ”

“ 지금이라도 나갈래? 조카 있는 집에서 소리 참기 힘들 텐데. ”

“ 근데 죽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커. ”

“ 너 배려하는 거야. 어린애도 자극적인 건 아니까. ”

“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데. ”

“ 못 죽여, 너. 생각보다 사랑이 커서. ”

“ 그것마저 확신하는구나. ”

 

 

 

낙엽 하나에도 조심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기에 형사의 입을 완전히 막기 위해선 여론의 흥미를 돌릴 자극제가 필요했다.

 

 

 

“ 그렇지 않다면 네가 이렇게 나랑 더럽게 놀겠어? ”

 

 

 

그럼, 그 불안한 사회적 윤리를 완전히 박살 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한 형사의 억울한 호소에 귀 기울일 새도 없을 만큼 모두가 달려들 만한 자극제가 새롭게 나타난다면?

 

 

 

“ ...... ”

 

 

 

몇 번의 정사 후 씻으러 들어간 공범의 발걸음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던 설하는 욕실 문이 닫히고 샤워기 물소리가 들리자마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가져왔다. 그러곤 곧장 누군가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 예, 소장님.

“ 내일 영상 올려. ”

- ...생각보다 이르네요?

“ 퍼지는 데에 얼마나 걸려. ”

- 영상 자체는 한국 사이트까지 3시간이면 퍼지고, 배우 파악은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지금 현재로썬, 오성열의 소아성애 영상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3.

오성열의 소아성애 영상이 외국 불법 포르노 사이트에 올려진 이후, 단 이틀 만에 엄청난 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거기에 지성의 익명 제보까지 더해져, 닷새도 채 되지 않아 언론에선 영상 속 인물이 조양건설의 오성열이란 걸 알아챘다.

 

 

 

 

 

 

 

 









 

 

 

4.

- 아가씨, 저번에 말씀하신 건 말입니다. 알아봤는데, 남자가 말한 게 사실입니다. 오설하씨가 아니에요.

 

 

 

물을 마시려던 희윤의 손이 멈칫한다. 남편의 오피스텔을 들락거리는 여자가 정말 설하가 아니란 걸 확인받자, 그는 새롭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 또 뭐 하는 년인데. ”

- 이름은 정지성. 나이는 서른여섯이고, 오세진 전 대표가 이끌던 조양 테크닉 연구소에서 오 대표 전담으로 일한 경력이 있습니다. 지금은 퇴직 상태고 아직 마땅한 소속이 없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 그런 사람이 왜 내 남편 오피스텔을 가. ”

- 자세한 건 저희도..

“ 언니, 그게 중요한 거잖아. 그래서 돈 받아 가는 거 아니에요? ”

-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왜 해. 일 깔끔하게 잘하던 사람이 요즘 왜 자꾸 내 속을 긁어, 왜!!

갑자기 터져 나오는 분노에 제 화를 누르지 못해 폭발해버린 희윤이 들고 있던 물잔을 테이블 위로 거칠게 내리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엄청난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난 유리잔은 그대로 흩어져 희윤의 고운 손을 파고들었고, 날카로운 파편들이 생가죽을 찌르고 긁어 테이블 위는 물에 번진 붉은 피로 엉망이었다.

 

 

 

- 죄송합니다, 아가씨.

“ ...... ”

- 저희도 노력했지만, 오 회장님 측에서 보안이 삼엄해 도저히 뚫을 수 없었습니다. 제 능력 부족입니다. 죄송합니다.

“ ...... ”

- ..괜찮으십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화를 낼 당사자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그 화를 애먼 이에게 분출해버렸다. 아무 관련 없는, 유일하게 제 편을 들어주던 이에게 말이다.

 

 

 

“ ...... ”

 

 

 

유리 파편이 깊게 박혀 손을 움찔거릴 때마다 고통은 동반되어 더욱 살가죽을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점점 붉고 넓게 퍼져가는 핏물을 말없이 바라보던 희윤은 제 분에 못 이겨 흘러내릴 것만 같던 눈물을 악착같이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꾸욱 짓이겨 뭉갰다.

 

 

 

“ ..내가 미안해요. 수고했어요. 끊을게요. ”

 

 

 

겨우 전화를 끊은 희윤은 힘을 가할수록 뿜어져 나오는 피에 그제야 얕은 탄식을 내뱉으며 아파했다. 너무 아팠다. 눈물이 고일 만큼 아렸다.

 

 

 

“ 하아아.... ”

 

 

 

그런데 이게 손바닥이 찢어져서 아픈 건지, 기어이 제 남편의 마음을 스스로 구걸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어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5.

“ 좀 더 먹어. ”

 

 

 

평소보다 늦게 퇴근했거늘, 아이는 그가 귀가할 때까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 구두를 벗던 그에게 다가온 아이는 괜히 긴장한 얼굴로 다녀오셨냐 인사하였고, 밥은 먹었냐는 그의 물음에 아이는 대답 대신 꼬르륵거리는 배고픈 소리로 답을 대신하였다. 왜 밥을 안 먹고 있었냐 다그치듯 묻는 그에게 아이는 이모도 아직 안 드셨을 것 같아서, 라는 주제넘는 대답을 해왔다.

낮에 가사도우미가 해놓고 간 반찬과 찬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차려준 것뿐인데 아이는 너무도 맛있게 밥을 비워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설하 역시 뒤늦게 식사를 이어갔고, 아이는 티끌이지만 그래도 밥을 먹는 그를 보며 애답지 않게 홀로 마음을 놓았다. 아이의 눈에도 보였던 것이다. 지금 설하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 ..이모. ”

“ 응. ”

 

 

 

더 먹으란 말에 수저를 꼭 쥐고 있던 아이가 그를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마주한다.

 

 

 

“ 저는 이모가 좋아요. ”

“ ...... ”

 

 

 

주양선이 제 친척 언니와 밖에서 낳은 아이.

그게 너다.

 

 

 

“ ..그래서 이모가 더 강해지셨으면 좋겠어요. ”

“ ...... ”

“ 저도 이모께 도움 되도록 노력할게요. ”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두려우면서도 괴로움을 이겨내려 무던히 애쓰는 이 역시 어쩌면 너일 수 있겠지. 별거 아닌 듯 말하면서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고갤 푹 숙이고 식사를 이어가는 아이의 조그마한 정수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조그마한 존재는 생각보다 강했다. 악을 쓰며 미워하고 온갖 폭력을 휘두르는 어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온전히 지켜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 밥이나 먹어. ”

 

 

 

그리고 그때, 예상 못 한 손님이 집으로 찾아와 대문을 두드렸다. 찾아올 이는 세훈 뿐인데, 항상 아이가 잠든 늦은 시각에 찾아온 터라 지금 시간에 그가 오기엔 너무 일렀다. 거실로 나와 대문 쪽 보안 화면을 살피니, 그 조그마한 화면 안엔 너무도 익숙한 이가 서 있었다.

 

 

 

“ ..... ”

 

 

 

아이는 본능적으로 제가 있어야 하면 안 될 거라 생각했는지 조용히 다 먹지 못한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에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릴 들은 설하는 아이를 멈춰 세웠다.

 

 

 

“ 지우야. 마저 먹어. ”

“ 그치만 손님이.. ”

“ 괜찮으니까 밥 먹어. ”

“ ...네, 이모. ”

 

 

 

설하는 대문 개폐 버튼을 누른 후 식탁으로 돌아와 불안한 얼굴로 밥을 꾸역꾸역 씹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본인의 식기를 싱크대에 치우고서 밥을 더 떠 와 아이의 자리에 놓아주었다.

 

 

 

“ 배고프면 더 먹어. 천천히 꼭꼭 씹고. ”

“ ...... ”

“ 정말 괜찮으니까, 편하게 먹어. ”

“ ...네, 이모. ”

 

 

 

제 아빠의 눈치를 보며 자라온 아이였기에 아이의 지금 상태가 심리적으로 얼마나 불안한 지 그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뻐할 수 없는 남의 자식이어도, 폭력적인 아이의 친부와 똑같이 행동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조그맣고 마른 아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며,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손님이 어서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 안녕, 언니. ”

 

 

 

그 손님은 현관 보안을 손수 풀고 들어왔고, 아이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고 있는 그를 똑바로 마주하며 인사했다. 아이는 뜻밖의 손님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인사해야지, 지우야. ”

 

 

 

아이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향은 부러지기 직전의 대나무처럼 불안정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지우야. 오랜만이다. 설하는 아이를 다시 의자에 앉히고서 향을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 서재에서 얘기하지. ”

 

 

 

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서재로 올라오자마자 책상 위에 올려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야. 두 번 다시 이 집에서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어코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니 어지간히 상황이 제 뜻대로 안 돌아가는구나 싶어 가벼운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 몇 년을 봐 왔을 텐데, 장현조가 어지간히 질이 안 좋나봐. ”

“ 누군가의 질을 따지기엔 나도 썩 상위품은 아니라서. ”

 

 

 

자리에 앉은 향은 긴 시간 절망에 허우적대느라 잔뜩 지쳐 보였다. 현조를 따라 이 집을 나갔을 때보다 더 초췌해져 있는 걸 두 눈으로 보니 그저 우스웠다.

 

 

 

“ 그러니 처음부터 안 따라갔으면 됐잖아. ”

“ 그랬다면 평생 도망치며 살았겠지. ”

“ 그것도 방법이야. ”

“ 아니. 이제야 알겠더라. 걘 날 도망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나도 도망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었어. ”

“ 영화 찍니? ”

“ ...... ”

“ 우습다. 너희 둘. ”

 

 

 

너무 우스워서 그저 같잖을 뿐이야.

 

 

 

“ 언니 도움이 필요해. 언니밖엔 없어서, 급해서 온 거야. ”

“ 난 네게 더는 원하는 게 없는데. ”

 

 

 

애초에 설하에겐 ‘부탁’을 받을 가정 따윈 세워져 있지 않았다. 그에겐 오직 ‘거래’만 존재할 뿐이었다. 내 도움을 받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걸 내놓으란 원초적인 접근에 향은 잠시 정적을 지키더니, 이내 예상했단 듯 피로감에 절어진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 잘 생각해봐. 내 부탁 들어줘야 할 텐데. ”

 

 

 

묘하게 협박조인 말투에 설하가 고갤 갸웃거린다. 내가 왜?

 

 

 

“ 그날, 언니가 양선 오빠 차 타고 강원도 간 날. ”

 

 

 

그날 마당에서 이 향이 주양선을 들먹였을 때, 입을 틀어막는 게 아니라 숨을 틀어막았어야 했는데. 또다시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 내가 봤잖아. ”

“ ...... ”

“ 언니 혼자 돌아온 거. 두 눈으로 똑똑히. ”

 

 

 

이 계집애부터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담배를 길게 빨아들인 그는 연기를 곧게 뱉어내며 향을 바라보았다. 향은 어느새 악만 남아 겨우 버티고 서있었다. 다시 한번 담배를 깊게 빤 설하가 이번엔 그 연기를 삼켜내며 마지막 모금을 마시고 재떨이에 지져 껐다.

 

 

 

“ 사랑이라도 하니. ”

“ 말 돌리지 말고. ”

“ 인정해. 구질구질하게 이런 식으로 자기 위로 하지 말고. ”

“ 그런 거 아니야. ”

“ 지금 네가 하는 행동 모든 게, ‘사랑’이 아니면 설명이 안 돼. ”

 

 

 

이에 향이 입술을 꽉 깨문다.

 

 

 

“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해. 어떻게 할 거야. 내 부탁 안 들어주면, 나 지금 당장이라도 그날 본 것들 기자들한테 다 풀고. ”

“ 그전에 네가 이 집을 안전히 나갈 수 있을 확률은 어떻게 될 것 같니. 네가 두 다리 멀쩡히 걸어 나갈 확률은. 내가 내 남편을 잡아먹었을 때처럼 이 테라스에서 널 밀어버릴 확률은 또 어떻고? ”

“ 나 가만히 안 당해. ”

“ 협박은 나도 하려면 얼마든지 해. 내가 지금 자꾸 웃는 건, ”

“ ...... ”

“ 네가 그 증거도 없는 같잖은 기억을 무기 삼아 날 협박하려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거야. 너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온 거니. ”

 

 

 

시계를 보니, 이미 아이가 충분히 밥을 다 먹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 네가 그걸 약점이라고 입에 올린 이상, 이젠 널 건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어졌어. ”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향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쏟아지듯 무릎을 꿇었다.

 


 

“ 부탁이야. 내가 이렇게 빌게. 현조 걔, 나 때문에 오빠 죽인 거야. 걔가 못나서 죽인 게 아니라, 제가 없는 곳에서 내가 또 위험해질까봐 불안하고 화가 나서,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언니, 내가 알아. 걔는 나 사랑해. ”

“ ...... ”

“ 나 도망치게 해주려고 매일 온몸이 부서져라 몽둥이로 쳐맞던 앤데, 나도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지. 그래야 사람이지. 언니가 이번만 도와준다면 나 백번 천번이고 무릎 꿇을 수 있어. ”

“ ...... ”

“ 내가 이렇게 빌게. 언니, 제발 나 좀 살려줘. ”

 

 

 

우리.

기어이 그들은 ‘우리’가 되어버렸다. 제 앞에 고꾸라져 엉엉 우는 그를 바라보던 설하는 차마 더는 비아냥거릴 수 없었다. 사랑이 아니라면서 아이처럼 울어버리는 향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답답해져 왔다.

 

 

 

“ 내가 널 도우면, 넌 뭘 내놓을래. ”

“ 다 줄게. ”

“ ...... ”

“ 내가 가진 거 다 줄게. ”

 

 

 

처참하다.

입 안에 남은 담배 냄새를 지우기 위해 알사탕 하나를 입에 넣어 와작와작 깨물어 먹던 그가 기어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묻는다.

 

 

 

“ 원하는 게 뭔데. ”

 

 

 

끝내 무릎까지 꿇고 있는 제 자신에게 수치스러움을 느껴버린 향은 피눈물을 흘리는 것마냥 실핏줄이 터져 눈동자가 온통 벌게진 채로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 증언 좀 해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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