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계기 혹은 짐작이 불안함을 스칠 때엔 그것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지 마지막으로 신이 내려주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주워들은 말을 지금 제임스는 아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2차에서 파하고 집에 갔어야 했어. 이 녀석이랑 단둘이 바를 온게 잘못이지. 제임스는 제 손목의 시계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곧 이어 단 둘이 앉은 바 위의 술을 바라보았다. 제임슨 18년산. 제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름만큼 괜찮은 술이라며 적당히 찾아 먹던 그 한 병이 이미 동이 나서 나뒹굴고 있었다. 저만치 밀어버린 그 술병을 놔두고 바로 앞에 반 뼘만큼의 술이 담겨있는 또 다른 술병을 바라보았다. 글렌피딕 21년산. 맛도 좋고 가장 좋아하는 술이지만 무엇보다 라벨에 붙은 수사슴이 멋지지. 하지만 저걸 주문하지 말았어야 했어. 제길, 마지막 기회였어. 집에 돌아가라는 계시였지. 제임스는 아까부터 자신이 참으로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애꿎은 주변만 자꾸 훑어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야 절친한 친구가 아마 수 십 번에 몇 번을 반복하는 – 누군가는 신세한탄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넋두리라고 말하며, 통 틀어 고민상담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무한으로 반복되고 있는 – 술주정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 뿐. 그러나 별 소용없는 짓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쪼르르륵. 시리우스가 기어코는 흐느적거리는 긴 손가락으로 술병을 휘어잡고는 방금 막 비운 잔에 또 다시 술을 채워가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맛있는 술인데……. 사실 이십대 초반이 술 맛을 안다면 얼마나 알까 싶었지만, 제임스는 문득 술에 푹 절어져 물인지 알코올인지 구분할 기력도 없는 주제에 입안으로 샷 잔을 들이대는 시리우스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또 시작이군. 도대체 몇 번째냐. 제임스는 술잔을 바 위에 내려놓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는 시리우스의 손끝을 보았다. 마음속으로 숫자까지 세기 시작 했다. 하나, 그리고 둘까지 세었을 때 술잔을 만지던 시리우스의 손이 조금 들어 올려지고 – 그리고 셋,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쳐졌다. 완벽하군. 이젠 타이밍도 잴 수 있어.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던 제임스는 곧 이어 또 다시 어기적어기적 손을 뻗는 시리우스에게서 얼마 남지 않은 수사슴 표 양주병을 사수했다. 무어라 입을 열어 불만 불평을 쏟으려는 시리우스를 본 척도 하지 않으며, 남은 술을 모조리 자신의 잔에 부어버린 제임스는 곧이어 조금 한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너네는 참 쉬운 걸 가지고 난리들이야.”

“쉬운 거? 그래! 쉽지! 쉽기는 정말 쉽지! 그런데 그 쉬운 걸 안하잖아?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이 말도 도대체 몇 번이나 했을까. 이젠 횟수를 세어 보기조차 귀찮을 정도였다. 절친한 친구와 친구 둘이 붙어먹고 지낸다는 거야 꽤나 오래 전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결혼한 본인이 아니었으면 타인이 듣기에 꽤나 짜증날 법한 이유들로 사소하게 싸우는 꼴이라니. 제임스는 또다시 앓는 듯 한숨을 쉬었다. 십대 애들도 몇 년을 사귀면 그런 걸 이유랍시고 싸우진 않겠다고. 제임스는 신음같이 중얼거리며 자신 앞의 빈 술잔을 죽일 듯 노려보는 시리우스에게 말했다.

 

“너네 그 정도로 같이 지냈거나 하면 서로 어디서 뭘 하든 알아서 잘 하겠거니 하지 않아? 야, 릴리만 봐도 내가 그냥 너 아니면 리무스랑 있다고 이야기만 하면 그냥 그러려니 한단 말야.”

“몰아 붙여? 누가? 아니야. 기본이 안 되어있는 거라고. 연락 하는 게 뭐 대수야? 어? 대수냐고, 어?”

 

쪽팔리니까 그런 소리 제발 크게 지르지 마라. 얼굴만 들이대면 당장 사진 찍어 돈이라도 벌 수 있는 그런 얼굴 가지고.

제임스는 급기야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푹푹 나오는 숨을 삼켰다. 다시 한 번 시계를 본다. 새벽 세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런 시간까지 용케도 술집에 앉아 술을 먹을 수 있는 건 그나마 이 곳이 단골 가게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민폐라는 것은 피할 수 없으련만. 제임스는 ‘천하에서 내가 제일 잘나가고 있소’ 라고 도장이라도 밖아 둔 것만 같은 잘생긴 제 친구가 지금 현재 그의 연인이자 그 이전에 서로에게 절친한 친구사이인 누군가 때문에 이리도 생난리를 치며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웠다. 그 이유로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끌려나와 함께 술 상대를 빙자한 일방적인 주정뱅이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자신이 순간 억울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간도 쓸개도 빼줄 친구라지만 이정도면 악연에 웬수 급은 되겠네. 쿵, 쿵, 쿵, 시리우스는 뭐가 그리 억울한지 바의 모서리 위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쿵쿵 가볍게 찍어대기까지 했다. 이제는 말릴 기운도 없을 지경이다. 제임스는 그저 만취한 친구의 모습에 혀만 끌끌 차대며 말했다.

 

“머리에 호박이라도 들었냐, 바보야. 그냥 리무스가 관심이 없다는 게 아니라……. 너도 리무스에게 네가 뭐 하고 있는지 말 안한 것뿐이잖아. 안 봐도 뻔하네, 너 또 그냥 혼자 뚱해 있다가 기분 안 좋다고 야밤에 나 불러낸 거잖아. 리무스는 그걸 알겠냐, 엉?”

“……네 말대로 라면 나갈 때 어디 가냐고 정도는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니냐?”

“아, 진짜 좀. 말했지 안 봐도 뻔하다고. 리무스는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네가 뭔가 기분이 안 좋아서 어딘가로 나갔겠지 했을 거 아니야!!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 말은 안하더라도 분명 나 만나고 있는 것 정도는 훤하게 꿰차고 있겠다. 그런데 너 어제도 리무스 집에 있었냐……. 지치지도 않냐.”

“그러니까!! 같이 살자고 했을 때 말이라도 잘 들으면 모르는 거잖아!!! 이러나저러나 아무런 상관 안 하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아오! 이……!”

 

술만 먹으면 머리가 나빠지는 것일지도 – 라고 굳게 믿고 싶다. 제임스는 진심으로 꾹꾹 눌러 참으며 결국 별로 끝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던 제 앞의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알싸하게 내려가는 첫 맛 뒤에 찾아오는 달콤한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제임스는 술잔을 탁! 내려놓고는 말했다.

 

“십년 넘게 한 인간이랑 붙어 지내게 되면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게 당연한 거지 이 등신아! 리무스가 문제가 아니라 나도 그런데!! 평소랑 다르게라도 행동하던가!!”

“뭘 다르게 하라는 건데?”

 

반쯤은 뭉그러진 발음으로 되묻는 시리우스의 말에 순간 제임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생각해보니 뭘 해야 다른 거냐.

제임스는 안경 너머로 눈만 도르륵 굴렸다. 생각해보니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리무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또한 시리우스를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들이 너무 익숙해서 그 외의 것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제임스는 진심으로 궁금한 듯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리우스의 시선을 피해 웅얼거리며 입가를 가렸다. 뭘 다르게 하라고? 다시 도르륵, 제 정신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잘생긴 친구의 옆얼굴을 본다. 그래, 이럴 거면 차라리 아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나 스스로 해보라지.

 

“……전화 해 보던가.”

“뭐?”

“전화 해 보라고. 오늘 다른데서 혼자 술 먹느라 안 들어갈 거라고.”

“그걸 왜해? 어차피 너랑 술 먹는 거라고 생각할 텐데.”

 

이 즈음 되면 정말 한 대 치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래, 잘 알고 있으면서 이런단 말이지? 답답한 놈. 제임스는 제 손으로 시리우스의 외투 주머니 안을 뒤져 휴대폰을 코앞까지 들이대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해.”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사실 머릿속에 한가지의 생각이 다급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이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누가 말해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생각이었으나 제임스는 애써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 이미 기회를 놓쳐서 이 시간까지 이 곳에 눌러 붙어 앉아 이 끝나지 않는 쳇바퀴 같은 게이커플 싸움(이라기 보단 한쪽의 일방적인 토라짐)을 바라보느니, 거대한 후폭풍을 맞이하며 귀환하리. 제임스는 저도 모르게 초조해지는 기분으로 어눌하게 전화번호를 누르는 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뚜르르, 순식간에 찾아 온 정적 속에서 시리우스는 이제 얼굴을 지탱하기도 힘든 듯 반쯤은 상체를 걸친 채 비스듬히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시리우스의 휴대폰으로 귀를 기울인 제임스의 귓가에서 신호음이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부드러운 어조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피곤함에 절어 있는건, 아마도 지금 전화를 건 시간 때문임이 분명하겠지만 – 저도 모르게 리무스! 이 자식 좀 데려가! 라고 외칠 뻔 했던 것을 다급하게 꾹 참으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시리우스를 재촉하듯 바라보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리우스는 한참을 입을 달싹이다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한마디 한마디를 흘리기 시작했다.

 

“야……. 나 오늘 밖에서 밤 샐 거다.”

 

제임스는 순간 상체를 바짝 일으켜 저도 모르게 시리우스가 꼭 붙은 휴대폰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듣는 것인지 뭔지도 모를 만큼 조용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혼자서 술 퍼먹느라 못 들어가니까, 그렇게 알아.”

 

취해서 꼬부라진 혀 치고는 제법 단호하고 또렷하게 흘리는 그 말에, 휴대폰 너머로 작은 한숨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잠시간의 침묵을 깬 그 조용한 목소리는 처음 전화를 받을 때와는 별 반 다르지 않게, 목소리 주인의 성격을 대변하듯 천천히 흘러나왔다.

 

– 그런 거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돼……. 자고 아침에 연락해.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리우스는 그대로 굳어버린 듯 했다. 아이고, 이런. 그렇지, 이 커플이었지. 리무스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니지, 얘가 문젠가? 아니야, 걔가 문젠가? 제임스는 이제 고민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원망인지 아리송함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눈빛을 가득 담아 시리우스가 휙 돌아보는 것을 모른 척 고개 돌렸다. 조심스레 특정 대상이 없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냥 적당히 먹고 잠 잘 자라는 말이었을 거야…….”

 

이런 젠장, 릴리 보고 싶다. 진짜 격하게 보고 싶다. 이윽고 무어라 외칠 기세로 주먹을 꽉 쥐는 시리우스의 손을 얼핏 본 듯 했다. 소리 지르려나? 그건 진짜 민폐야. 어쨌든 무슨 행동을 하건 말리기 위해 제임스가 손을 뻗었을 때, 만취한 상태의 몸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박력으로 의자를 박차며 시리우스가 일어났다.

 

“이런 제길! 그러니까 날 뭐로 보는 거야!”

 

결국 소리를 내질러 버리고는 계산대를 향해 카드를 집어 던지고는 옷을 꿰어 입으며 문을 열고 나가는 그 뒷모습을 제임스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술집 가장 안쪽의 단 둘이 앉은 바에서 문 바깥까지 마치 마법사처럼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재빨리 사라져버린 시리우스를 보니 덩그러니 버려진 제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어디로 갔을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도 이내 머리가 아픈 기분에 헛웃음만 흘렸다. 그가 갈 곳은 뻔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게 뭐야. 도대체. 난 저 녀석에게 사과를 받아야 하나, 아님 내가 리무스에게 사과를 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마시자. 아무리 생각해도 술값까지 자신이 계산하기엔 억울했다. 남는 게 없는 장사다. 술 두병으론 감당하기엔 너무 싼 거 아닌가. 이 짓을 벌써 십년 넘게 지켜보고, 당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제임스는 카운터 바닥에 떨어진 시리우스의 카드를 주워들었다.

 



***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고함과, 그보다는 무언가를 내리치는 소리에 리무스는 부스스 눈을 떴다. 어둑한 거실의 벽 끝에 걸린 시계가 새벽 세시 사십분이 넘어가고 있음을 알렸다. 잠깐 전화가 온 이후로 깜빡 소파위에서 잠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잠결이었나……. 어설프게 소파에서 잠든 탓인지 몸은 불편했으나 그보다는 피곤함이 더 먼저인 것 같았다. 침실로 몸을 옮길 생각도 없이 그대로 몸을 비스듬히 뉘이며 잠들려는 찰나에, 잠결 같았던 소음이 또다시 찾아왔다. 야! 문 열어! 야!! 몇 가지의 욕설도 섞인 것 같았다. 내리치는 소리는 아마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는지 불규칙적으로 둔탁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아 리무스는 살풋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상관하지 않는다면야 상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시간상 여러모로 끼칠 민폐라는 것과 – 리무스는 조금 망설이면서도 결국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관으로 가까이 갈수록 벽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부서져라 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반복하는, 문 너머의 상황이 가히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잠금을 풀고, 걸쇠 빗장을 풀 땐 조금 멈칫하기까지 했다. 이걸 풀어두고 열어야 하나. 잠가야 하나? 결국 리무스는 빗장을 빼는 것을 관두고 다시 채웠다. 문을 여는 소리라도 듣길 했는지 문 밖의 소란은 잠잠해 진 채로 씨근거리는 숨소리만 가깝게 들릴 뿐이었다. 괜찮겠지. 리무스는 메마른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쥐며 비틀어 열었다. 누구세요, 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열리는 문은 아주 조금의 틈만 내보이고는 덜컥, 하며 걸리고 말았다. 그 작은 틈 사이로. 거리의 노란 조명을 등 뒤에 두고 그림자를 지며 서 있는, 자신보다 한 뼘 정도는 큰 상대를 잠깐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조금 입을 열어 리무스, 라고 중얼거리는 듯 했다. 리무스는 대답 없이 그저 그렇게 그 틈 사이로 시리우스의 얼굴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큰 손의 손바닥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듯 문지르다가도, 이윽고 두 손 모두 다 열리지 않은 문고리에 얹혀졌다. 무게까지 더해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힘이 무시무시했기에 리무스는 있는 힘껏, 아까까지는 괜찮을지도 싶었던 생각을 급하게 바꾸고는 어깨로 밀어 문을 도로 닫아버리고 말았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무언가가 문에 기대서 쿵쿵 거리며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는 부딪히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리무스는 문을 밀어대느라 뜻하지 않게 힘썼던 어깨를 끙끙거리며 문질렀다. 일단은 숨도 못 쉬게 술내를 팍팍 풍기며 등장한, 제 연인이긴 하지만 지금은 술에 절어버린 개의 상태로 방문한 주정뱅이를 어떻게든 수습하긴 해야 할 터였다. 리무스는 문가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저대로 잠들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뭉게진 발음이 굵직하게 문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느릿하게 한마디를 내뱉을 때 마다 잔뜩 절어버린 술이 혀 놀림을 방해하는 듯, 시리우스는 멋대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무언가처럼 제대로 발음되지 않는 제 자신의 혀에 조금 짜증을 내는 듯 했다. 저 한마디를 내 뱉어놓고 한참동안 꾸물거리며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목구멍을 타고 오는 술의 열기에 숨을 뱉는 듯 했다.

 

“내가 같이 살자고 했잖아!!”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람. 뜬금없다는 게 도통 전혀 모를 소리도 아니었다. 이미 너무 많이 들어서 답해야할 대답까지도 자동적으로 나올 말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에 또 다시 튀어나온 다는 것이 뜬금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리무스는 지금 현재 시리우스가 술에 취했다는 것과, 그 때문에 감정이 격해져있다는 것을 감안해 그냥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할 말이 이게 다 끝이 아니라는 듯 시리우스는 또 다시 웅얼거렸다. 젠장 할, 이런, 씨……. 적당한 말이 제대로 운용되지 않는 불만을 그저 손쉽게 내뱉을 수 있는 욕설로 대신 표현하던 시리우스는 답답한지 연신 뒤통수건 이마건 낡은 현관문에 박아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 리무스, 너 말야……. 내가…… 귀찮아?”

 

나 혼자 난리 치고 나 혼자 이렇게 매달리고 넌 그냥 받아주는 거야?

시리우스. 리무스가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애초부터 작게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듯 했다. 아까 전 까지는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어물정거리던 입술을 잘도 움직여 계속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귓가에 단어가 뭉개져 온 몸을 타고 들려왔다. 결국 리무스는 새벽부터 온갖 소란을 피우며 찾아온 그를 타박하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잠자코 그의 말들을 들어주기로 했다. 느릿하게, 하지만 넘쳐나게, 쥐어짜듯, 하지만 어렵지는 않게. 고해성사를 하듯 그렇게 말들이 흘러들어왔다.

 

“야……. 솔직히 생각을 해봐. 나 같은 놈이 쫓아다녀서, 그래, 네 성격상 그게 좀 귀찮겠지. 어? 그럼 귀찮다고 말해야 할 거 아냐, 한 번도 그렇게 말 해준 적 없으니까, 난 그냥 계속 말하게 되잖아. 어? 솔직히 너무 한 거 아니냐? 야, 나 거짓말 하는 거 아니거든? 젠장, 진짜 맨날 진심으로 하는 이야긴데 그거 하나 못 들어 주고 너는, 대답도……. 절대 안하고……. 내가 같이 살자고 하면 뭐 너한테 돈을 달라고 그러냐 뭘 하라고 하냐, 그냥 같이 살자는데 그게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일이냐. 솔직히 나 같은 사람 어디 가서 볼래, 응? 내가 십년 넘게, 친구를, 좋다고 쫓아다니는데, 너 어디 가서 나 같은 놈 만나봤냐? 응? 야……. 대답해 봐……. 네가 대학 가기 전까지는 그런 거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해서 얌전히 기다린 거잖아, 안 그래? 이제 와서 아직은 아니라니 그딴 소리가 어디 있어!! 내가 몇 년을 말 했냐, 어? 너 이러다 진짜 후회한다, 응? 그리고, 어, 내가 연락 안 했다고. 그렇다고 그렇게 매정하게, 뭐? 연락 안 해도 된다고? 야, 사귀는 사람끼리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게, 내가 남이야? 내가 지금 이러고 있다가 떠나면, 너 혼자 어떻게 살 건데? 나 없어도 괜찮은가보다? 그런 거야?”

 

무언가 또 할 말이 있는 듯 시리우스가 숨을 훅 들이마셨다. 엄청나게 마셔댔구나…….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는 리무스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시리우스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리무스! 그렇게 외치며 시리우스는 오른손으로 굳게 닫힌 현관문을 팡팡 내리쳤다.

 

“야, 야, 자러갔냐? 어?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인간적으로 나 그냥 이렇게 놔두면 너, 너 진짜 편하게 잘 줄 아냐고. 야 문 열어! 얼굴 보고 이야기 해! 야!!! 야!!!”

 

이젠 정말 안 되겠다. 리무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현관문의 빗장을 모두 풀고 문을 열어 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기다란 상체는 촛불에 일렁이는 그림자 마냥 흔들거리고 있었다. 알코올 냄새가 훅 다가와 조금 인상을 썼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림자 진 얼굴 위에 잠시 놀란 듯 크게 떠지는 은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일단 들어와……. 라고 한껏 피곤함이 담긴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시리우스의 큰 손이 리무스의 양 어깨를 짚었다. 힘주어 끌어당기고는 가느다란 목덜미와 쇄골의 틈바구니 사이로 제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푹푹 거리며 내쉬는 숨이 뜨거웠다. 아까까지 미친 듯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그저 감격에 못 겨워 얼굴을 부비는 강아지의 꼴이었다. 어쨌든 더운 밤공기와 알코올 냄새가 불편해, 있는 힘껏 시리우스를 밀어내려던 리무스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곧 온 몸의 힘을 풀었다. 시리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조금 마주치자 술기에 번들거리는 안광이 비쳤다. 그 안광은 조금씩 가깝게 다가오는 듯 천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온 몸에 술 취한 자의 흐느적거리는 무게가 여과 없이 받쳐 오는 기분에 리무스는 속수무책으로 엎어지고 있었다. 쿵, 하고, 머리를 부딪친 것은 아니었지만 등골을 타고 싸르르 전달된 통증에 리무스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으로 어깨를 치며 몸을 비틀었지만 축 늘어진 시리우스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보기 보다는 온몸을 비트는 리무스를 대신해 옭아매듯 꽉 붙들어대고 있다는 게 맞았다. 이대로 눌러 붙어 버리듯 꼼짝없이 밤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찔하게 스쳐지나가, 다급하게 시리우스를 부르며 밀어내 보려한들 시리우스는 그 고집만큼이나 센 힘으로 리무스의 어깨를 누르며 상체를 조금 들어 일어섰다. 어느새 어깨를 움켜쥔 손이 흘러내리듯 미끄러져 리무스의 셔츠를 움켜쥐고 있었다. 한 손은 등 뒤로 돌아가 거의 숫제 끌어안는 꼴이었다. 이미 그 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입술이 열렸다.

 

“리무스…… 열렸, 나왔네……. 나오……, 나,”

“시리우스?”

“나올 것 같아…….”

 

이런 젠장! 리무스는 평소에 절대 올릴 리가 없는 단어를 읊조렸다. 그리고 곧 피하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가슴팍 아래로 고개를 수그린 시리우스의 어깨가 들썩이며, 차마 듣기엔 더럽고도 민망한 그 소리가 작은 주택의 공간을 울렸다. 우웨에에에에에엑!!!

 



***



 

– 그럴 줄 알았다. 차마 못 말려서 미안.

“네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야.”

– 그래도, 같이 마신 나도 잘못이 있는 거야.

 

이른 아침부터 리무스의 선잠을 깨운 것은 제임스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으며 부스스 일어난 리무스는 아직까지도 제임스와의 통화를 끊지 않으며 간단한 아침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임스 또한 피곤함에 가득 절은 듯 한 까슬한 목소리였다. 방금 막 일어났거나, 혹은 밤을 샜을 것 만 같았지만 딱히 묻지는 않았다.

 

– 그래서, 그 녀석은?

“자고 있어.”

– 뭔 짓을…… 한건 아니겠지.

“글쎄. 평소와 같았어.”

 

좀 민폐를 끼쳤지. 그 한마디에 수화기 너머로 제임스가 끙끙거리며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려왔다. 네 탓이 아니래도. 그냥 우리끼리의 문제인데. 리무스는 그저 지나가듯 중얼거렸지만 제임스는 그 지나가듯 중얼거린 한마디에 매달려 억울함을 토로하듯 말했다.

 

– 어이구……. 어제 시리우스가 너랑 전화 통화하고 순식간에 워프 뛴 걸 봤어야 했다. 솔직히 내가 들어도 살벌하긴 했어. 야 그거 누가 들으면 그냥 차버리는 것 같은 대화였다고.

 

알고 있었는 걸, 너랑 술 먹는걸……. 걱정 할 것도 없었으니까. 리무스는 결국 쓴 웃음을 삼키며 제임스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제임스는 딱히 남의 일, 특히나 연애사에 관해서는 크게 참견하는 법이 없었다. 술주정 이전에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그저 잘 모르는 타인이었다면 껄끄러웠을지도 모를, 전날 제 연인과 함께 있던 인물이 바로 제임스였기에 이런 통화도 가능한 것이었다. 늘어지는 하품소리 끝에 제임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그냥 평소랑 다르게 해보라고 했던 것뿐이야. 그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민폐였다면 할 말 없지만. 그냥 내 생각인데, 리무스. 너넨 서로를 잘 알기도 하지만 그만큼 또 모르는 게 많잖아. 가끔은 다르게 대해줘야 그 차이를 알지. 안 그래?

 

그런 걸까. 리무스는 무언가가 끓고 있는 냄비를 천천히 휘저으며 작게 수긍했다. 어찌 되었든 제임스는 커플들의 작은 다툼 이전에 십년은 족히 넘은 친구로서의 걱정이 더 크다는 것을 리무스는 잘 알고 있었다.

 

– 그렇다고 너무 뭐라 그러진 말고. 하기사 네가 누구한테 뭐라고 할 성격은 아니지만.

“응, 괜찮아.”

– 그래 아무튼, 둘이 적당히 하고 나중에 셋이서 술이나 먹자. 끊는다!

 

제임스와의 통화를 끝내고 나서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두었을 무렵, 부엌 귀퉁이 어딘가에서 시리우스가 비척거리며 걸어 나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찡그린 표정,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등 뒤로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것만 같은 알코올의 오오라가 보이는 것 같았지만 아침 햇살을 맞이하며 걸어 나오는 모습은 얼굴값을 어디 버리지 못할 근사한 폼으로까지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리무스는 그런 시리우스를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시리우스는 가까이 다가 오려다가도 멈춘 듯 했다. 그는 곧 이어 평소보단 조심스럽게 낡고 작은 주택의 공간을 휘둘러보았다. 어디까지나 밥 먹듯이 찾아와 이제는 제 집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작고 낡았지만 깔끔하고 아담한 리무스의 집이었다. 시리우스는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머리는 아프고, 속은 뒤집어질 것 같고, 무엇보다 미친 듯이 목이 마르고. 입고 왔던 옷은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상체는 고스란히 벗어둔 상태로 바지만 입고 잠든 자신이었다. 리무스의 입에선 잘 잤냐는 한마디조차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는 듯, 식탁 위에 접시가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먹어. 작은 목소리엔 억양이 없었지만 시리우스는 그 한마디에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후다닥 식탁 위에 앉았다. 스프인가……? 술을 마신 다음날이기에 부드러운 것 아니면 무언가를 제대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제 생각을 해 준건가 싶어 힐끗 리무스를 바라보았지만 리무스는 묵묵히 말없이 등을 돌린 채로 뒷정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젯밤에 뭐가 어떻게 돼서 여기까지 와서 아침을 맞이하는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어제 술을 마신 이유가 제 자신이 혼자 뛰쳐나가 기분 나빴던 것을 풀려고 했던 것도 있으니, 어색함 보다는 잘 된 일인가 싶어 묵묵히 식사를 하기로 하고 스푼을 들었을 때였다. 그제야 제대로 접시위에 담긴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게 된 시리우스는 순간 따끔하고 뜨겁게 느껴지는 목구멍 너머로 차마 리무스에게 말을 걸 수가 없어 옅은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시원하게 넘길 물 한잔도 없이 덩그러니 야채 몇 조각을 두고 담긴 노오란 스프 같았던 그것은 가까이서 맡아보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강렬한 향신료의 풍미를 여과 없이 흘리고 있는 카레였다. 그것도 상당히 맵고 매캐하게 느껴지는……. 시리우스가 잠시 스푼을 쥐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등을 돌린 리무스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깨끗한 유리잔에 물을 따르고, 그것을 리무스 제 자신의 입술 너머로 넘기며 그는 천천히 말했다.

 

“안 먹을 거야?”

“야……. 물도 안주냐.”

“너 어제 새벽 네시가 거의 다 될 때 여기 왔어.”

 

그게 뭐 한두번이었나……. 그보다 물좀.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머쓱하게 뒷 목만 주무르며 침묵을 지키는 시리우스에게, 리무스는 한숨을 작게 흘리며 다시 한 번 물을 한 모금 넘겼다.

 

“그 시간에 문 두드리면서 소리 지르고 욕도 하고.”

 

그건 좀 민폐긴 했겠네. 하지만 시리우스는 그 것 보다 좀 더 애달프고 고달픈 눈으로 리무스가 쥐고 있는 물잔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내 옷 위에 토하고, 네 옷도 당연하고, 바닥에도 토해서 오늘 아침에 모두 세탁 맡겨야 해.”

 

으. 시리우스는 그제야 감탄사인지 뭔지 모를 미안함이 담긴 한 마디를 흘리며 조금 고개를 숙이고는 힐끗 리무스를 바라보았다. 리무스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치 한 두 번 보는 일이 아닌 양, 아무렇지 않은 그 모습에 갑자기 어제 욱했던 자신의 모습과도 겹쳐 또다시 화가 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은 죄가 있어 지금은 그저 넘겨야지, 시리우스는 천천히 눈앞의 카레를 스푼으로 떠서는 목구멍으로 넘겼다. 메마른 목으로 카레는 부드럽게 넘어갔으나 그 느낌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뜨겁고 목말랐다. 일부러 줬을 것이 뻔 하지만 뭐 어떻게 불만을 표할 수도 없었다. 그런 시리우스의 모습을 쳐다보지도 않고, 리무스는 잠시 제 집의 천장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도 했다.

차라리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박을 주던지, 술을 먹지 말라고 하던가, 세탁비용을 청구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하며 마음 편히 마무리라도 지어보일 수 있겠건만. 시리우스는 거의 겨자를 숫제 퍼먹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카레를 넘기며 고문 아닌 고문을 스스로 인내했다. 스푼으로 겨우겨우 접시 가장자리를 긁으며 또 다시 카레를 퍼 올릴 때, 리무스가 말했다.

 

“그리고 말야. 나 그렇게 인기 없진 않아.”

“뭐?”

“너 말고도 고백한 사람 많아. 너랑 똑같은 내용으로.”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꾸역꾸역 카레와 함께 넘긴 시리우스였다. 도대체 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했기에 뜬금없이 저런 소리가 리무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인가,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어떤 자식이야, 아니, 어떤 여자야? 누구야? 넘어가는 카레의 매캐한 향내도 신경 쓸 겨를 없이 시리우스는 무시무시하게 번들거리는 안광을 내비치며 리무스를 노려보았다. 누가 보면 시비라도 걸 거는 것만 같은 그 모습에도 리무스는 태연히 자신이 다 마신 물 잔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 할 뿐이었다.

 

“야, 야! 너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거짓말이지!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떤 자식이야? 누군데? 지가 뭔데 나랑 똑같, 야, 잠깐만, 고백은 그래도 내가 먼저 한 거지? 그런 거지? 야, 너 설마 내가 남들이랑 똑같은 말해서 여태까지 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거냐? 야, 나는-”

“시리우스.”

 

먹던 것이 다 튀어나갈 정도로 역정을 내던 시리우스는 리무스의 조용한 말에 입을 다물고 애꿎은 스푼만 부여잡았다. 리무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것은 아니어도 그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옅은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닿을 듯 생생하게 스쳐온 기분이 들었다. 리무스는 마치 잘 잤냐는 듯 평이한 어조로 시리우스에게 물었다.

 

“너, 나를 좋아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그동안 너한테 몇 번이나……”

“넌 같이 살자는 이야기만 했지, 그런 고백은 안했잖아.”

“내가 언제-”

 

-언제나, 그랬구나. 시리우스는 순간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리무스를 바라보았다. 리무스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빈 물 잔이며 요리후의 흔적들을 다시 정리하는 듯 했지만 시리우스는 하던 식사를 계속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없었다. 어째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술 먹고 부린 추태의 벌로 치기엔 시리우스의 입장에선 퍽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차라리 반성문을 백 줄씩 열장 채우라는 일이 더 나을 법도 했다. 그런 일이야 학창시절 때 지겹도록 많이 해봤지만 차라리 그 지겨운 일이 더 괜찮을 일이었다. 시리우스는 다급하게 스푼을 내려놓고 뒷정리를 하며 물을 틀어둔 리무스의 뒤에 바짝 붙었다.

 

“너 그럼, 내가 뭐 그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이거야?”

“저리가, 시리우스. 아직 술 냄새 나.”

“야, 대답은 해야지, 야!”

“세탁소 갔다 와야 해. 침대 뒷정리나 좀 해줄래?”

“너 오늘따라 왜 그래? 어? 평소랑 다르잖아! 어?”

 

제 할 일을 하던 리무스의 저도 모르게 등 뒤에 바짝 붙어 떨어질 줄 모르며 쉴 새 없이 시리우스가 떠들었다. 진짜지? 내가 그놈들이랑 다르단 것만 보여주면 되는 거냐?

글쎄. 리무스는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다급해진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온 집안을 흔들었다. 너랑 나는 그냥 그렇게 익숙해지곤 하니까. 사실은 시리우스도 알고 있을 터였다. 리무스 또한 시리우스를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기에 서로가 모르는 부분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

 

“야, 지금 말할게! 나 너 좋아해! 같이 살자!”

 

리무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이런 건 싫어. 웃음을 감추고 그저 무표정으로 마주한 얼굴에 시리우스가 팔을 뻗었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제정신으로 품에 끌어안은 그가 마치 주문처럼 속사포같이 빠르게 말했다. 좋아해, 같이 살자, 아무도 못 건드리 게.

리무스는 제임스를 떠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 좀 많은 걱정을 했을 절친한 친구에게 이번엔 제 자신이 술을 사줘야겠다. 낯간지럽게만 느껴지는 단어가 계속해서 시리우스의 입을 타고 흘렀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 한마디를 그저 솔직하게 내뱉지 못하며, 리무스는 결국 푸스스 웃음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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