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뮈엘은 퍽 여상스러운 태도로 주인의 침소에 들었다. 낮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가게를 떠나기에 오늘은 취침 인사를 건너뛰지 않을까 했더니만 그사이 생각 정리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협탁 위에 독하지 않은 사과주와 유리잔 두 개를 올리고 조용히 의자를 끌어와 앉는 모습에 미르엘라는 오늘 밤이 길어질 것을 예감했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을 지킨 채 술잔을 주고받았다. 사과주 특유의 톡 쏘는 맛과 향이 혀를 타고 넘어간다.

 

어찌 보면 핏빛이 아니라 잘 익은 사과의 빛깔이기도 한 홍채의 악마는 술잔이 다 빌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천하께서는 악마가 계약자에게서 무엇을 취한다고 헤아리십니까.”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줄곧 곱씹어오던 질문이었으므로 미르엘라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다만 자신 없이 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뮈엘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씁쓸함이 감돌았으나 억지로 지어낸 것 같지는 않았다.

 

 

“틀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올바른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역시 어렵네.”

 

 

어깨를 으쓱이는 미르엘라를 잠자코 바라보던 뮈엘은 이 정적이 지겨워지기 전에 다시금 말문을 뗐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 악마의 넋에는 그러한 의지가 없어 인간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약자들이 쉬이 죄를 지을 도리밖에 없지요. 사람은커녕 사물조차 아낄 의지가 없는 자에게 타인의 삶이나 세상의 도덕률 따위가 중요할 리 있겠습니까.”

 

 

미르엘라는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외부세계를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의 부재. 결과만 두고 따졌을 때 아무런 차이가 없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분명 사랑의 부재와는 달랐다. 의지만 있다면 제 자신이 아닌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잖은가. 그러므로 악마가 인간과의 계약을 통하여 무엇인가 사랑하게 된다면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다. 비록 인간에게서 취한 의지는 단발성인지라 악마로서는 계약 한 번만으론 부족하다지만.

 

 

“천하께서 정확히 답을 짚어내지 못하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주어진 단서가 너무 부족했잖습니까.”

 

 

악마가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언제인가 사랑을 머금고 되뇌었을 입술로.

 

 

“제 넋의 주인 중에서 그 이치를 똑바로 꿰뚫어내신 분은 제가 첫 번째로 곁에서 모신 주인뿐이지요.”

 

 

자신이 과연 몇 번째일지는 모르나 마지막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는 미르엘라는 뮈엘의 회상을 방해하지 않았다. 타다 남은 재를 뒤집어 쓴 듯한 잿빛 머리의 악마는 어쩐지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고,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그분은 아주…… 외로운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뮈엘은 잠시 창문 너머의 보이지 않는 달을 찾듯 고개를 돌리고는 힘없이 조소했다.

 

 

“그러고 보니 이 지독한 고해도 오늘로써 끝이겠군요.”

 

 

고해. 악마에게서 들으리라 여긴 적 없는 단어에 마왕은 살짝 아연해졌으나 굳이 드러내 대화를 끊지는 않았다.

 

미르엘라는 뮈엘이 궁금했고, 뮈엘이 이야기하는 그의 옛 주인이 궁금했다. 결국 그 역시 미르엘라와 같은 넋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서로 동일한 사람도, 동일한 삶도 아니지만 그들의 차이는 시대와 주변 환경 따위의 조건에 의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제 첫 주인께서는 참으로 외로이 생을 보내셨습니다. 그분 곁에는 오직 저뿐이었고…… 제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뮈엘의 옛 왕이 제 종을 가장 명확히 파악해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뮈엘이 자신의 모든 순간을 바쳐 모셨으므로 늘 그 곁에 있던 주인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붉은 눈동자를 내리깐 악마가 천천히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그의 마지막 왕은 어째서인지 뮈엘이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이쯤에서 왜 그랬느냐는 물음을 듣고는 해서 미리 답해드리자면, 비로소 쟁취한 자리이니 오로지 저만이 천하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입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그밖에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몸소 나서 해드렸습니다. 그것만이 저의 무한한 기쁨이었으니까요.”

 

 

감정이 격앙된 듯, 문장을 흘려보내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으나 이내 예의 침착한 어조를 되찾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나, 천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제 대부분은 다른 이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다.”

 

 

뮈엘이 리칸과 류가 머무는 아래층을 일별하자 미르엘라도 그 우애 좋은 마인 남매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고는 그들이 미르엘라를 위하여 해준 작금의 노력을 죄다 스스로 도맡아 하였다던 과거의 뮈엘을 상상한다.

 

 

“저는 제 넋의 주인께 전부를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인의 임종을 앞두고 장난처럼 물었던 질문에 돌아온 그 정답이, 그분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저를 바꿔놓았습니다. 정작 모든 것을 읽히고 나자, 그러니까 저를 읽어내고야 만 그분께서 이윽고 떠나버리는 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마왕의 충성스러운 종이 문득 내리깐 두 눈을 들어 미르엘라를 똑바르게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뜬 별을 찾아내듯 신중하고도 진지한 눈빛으로.

 

 

“저는 매번 새로운 주인을 배웠고 또 알아갔습니다. 제가 찾아가면 언제나 이렇게 당신 곁에 남도록 해주시는 은혜 덕택이겠지요. 그러나 천하의 넋을 담은 그릇은 늘 저를 떠나셨고, 새 그릇을 찾았을 땐 저에 대해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당연한 이치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못내 애석하더군요. 맨손으로 바다를 퍼 담으려 하는 얼간이처럼…….”

 

 

그래서 주인을 더 가까이서 보필할 다른 사람들을 부러 구해왔다고 한다. 새로운 ‘미르엘라’를 발견할 때마다. 몇 십 년이고, 몇 백 년이고.

 

어차피 주인의 몸이 죽고 나면 모든 기억이 사라질 터이니 차라리 제 주인으로 하여금 종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게끔 하자고. 어차피 잊을 거라면 처음부터 꿰뚫지도 못하게.

 

 

“그런데 저도 모르게 어느덧 지쳤던 모양입니다. 이 삶도 죽음도 아닌 시간을 기어코 붙들고 있던 주제에, 제 마지막 주인이 되겠다던 천하의 말씀에 구태여 심장이 뛰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을 보면.”

 

 

이제야 겨우 제게 약속된 순간이 도래했는지도 모른다는 중얼거림이 허심탄회하게 이어졌다.

 

미르엘라의 눈에는 이 악마가 인간처럼 보였다. 지나치게 오래 산 악마이기에 그렇다 하였던가.

 

그리하여 아직은 젊고 어린 마계의 주인은 하릴없이 팔을 뻗어 낡고 지친 넋의 마른 어깨를 쓰다듬듯 도닥였다. 그것만이 현재의 미르엘라가 뮈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안이었다.

 

뮈엘은 제 어깨에 살포시 올라온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 위에 제 손을 찰나처럼 감싸더니 금세 부드럽게 잡아 내려놓았다.

 

 

“……그래도 사람을 사랑한 악마치고 상당히 끈질기게 버틴 편이랍니다. 자격도 없이 감히 살아 숨 쉬는 것을 사랑하는 넋은 그만큼 쉽게 닳기 마련인지라.”

 

 

무엇인가 사랑할 수 있는 의지를 얻게 된 악마들은 열락을 맛본 대가로 자연히 번뇌를 배운다고 한다. 그것은 악마로서의 강함으로 이어지는 한편, 어느 순간 임계점에 다다르면 모순적이게도 그의 넋은 더 이상 마계에 속하지 아니하게 된다.

 

그제야 미르엘라가 참았던 숨을 내쉬듯 입을 떼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구나……, 인간으로.”

 

 

만물을 오직 스스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

 

 

“맞습니다. 어떤 인간들의 넋이 악마가 되듯이.”

 

 

모든 악마 위에 마땅히 군림하는 주인은 조금은 착잡한 심정으로 눈앞의 악마를 응시했다. 그의 추측이 맞았다. 악마들이 한때 인간이었다면, 더 이상 악마가 아니게 될 넋은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 살아가리라. 그래서 뮈엘에게 다시는 자신의 악마가 되지 않도록 늘 사람다워지라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뮈엘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미르엘라는 이 악마가 뚫고 지나온 기나긴 세월을 가늠해보았다.

 

 

“그러니 다음 생에는 천하의 넋과 제 넋이 우연찮게 한날한시에 태어난 소꿉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저는 천하의 이번 그릇이 쇠하여 바스러지는 순간, 함께 떠나기로 결정했거든요. 어쩌면 한 번도 스쳐지나가지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만…….”

 

 

마치 그 아득한 상상을 흩어놓으려는 것처럼, 뮈엘이 싱거운 우스갯소리를 내뱉듯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천하의 바람대로 사람스럽게 살아낼 저에게는 반드시 또 다음의 삶이 주어질 것이며, 살아만 있다면 언제인가 천하의 넋을 품은 자와 다시금 만날 기회가 있을 터이니.”

 

 

끝끝내 소멸과 이별이 정해진, 동시에 탄생과 재회가 기약된 존재란 저토록 눈부시다.

 

기이하게도 사람의 아름다움을 악마에게서 발견하고 만 미르엘라는 뮈엘을 따라 입매를 끌어올려 보였다. 그렇다면 악마가 되지 않으려 사람답게 살아 왔고, 살아 있으며, 살아갈 그 수많은 인간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어쩌면 우린 자매가 될지도 모르겠네.”

“모녀가 될 수도 있고요.”

“쌍둥이는 어때?”

“나쁘지 않군요.”

 

 

주거니 받거니 농담을 꺼내자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한층 누그러진다.

 

짐짓 숨을 깊게 들이쉰 뮈엘은 기척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르엘라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꼭 그들의 첫 만남처럼.

 

 

“저는 오직 마계의 주인에게 충성을 바친 넋……. 태초부터 지금까지 존속되어 온 이 천지 사이, 오로지 천하만이 이 비천한 넋의 최후를 손에 쥐실 것입니다.”

 

 

미르엘라는 그를 천천히 올려다보는 악마의 두 눈을 올곧게 지켜본다.

 

 

“이 몸은 천하의 그릇이 낡아 깨어질 때까지 천하의 소유 아래 있을 터이며…… 그동안만큼은, 설령 바랄지언정,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눈앞에 계신 천하와는 감히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되지 못할 줄을 압니다. 어차피 오랜 세월 방치되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지금의 제 사랑은 결국 그 무엇도 될 수 없고요.”

 

 

곧이어 뮈엘은 내일의 봄 소풍을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머나먼 미래에 대한 상상을 기도문처럼 나직이 읊는다.

 

자신이 훗날 미르엘라의 친구가 된다면 언제든 다녀갈 수 있는 쉼터가 되어줄 것이고, 미르엘라의 연인이 된다면 미르엘라를 멋대로 조각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지켜낼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며, 미르엘라의 어버이가 된다면 가장 튼튼한 지지대가 되어주겠노라고.

 

 

“제가 인간이 되면 저를 돌아봐주실 테지요……. 그렇지요?”

 

 

제법 살가운 표정으로 뮈엘의 목소리를 귀 담아 듣던 미르엘라는 이 물음에는 확답을 줄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꼭 내게 와, 뮈엘. 그땐 같이 사람이 되는 거야. 좋은 사람은 못 되어도 나쁜 사람은 되지 말자. 그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우리가 그저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그렇게 또다시 악마에게 뻗어진 손에는 그 악마로서의 마지막 약속이 맺어진다. 뮈엘의 최후는 전부 미르엘라의 것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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