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온라인 모임에서 전주국제영화제 얘기가 나왔다. 이번에 현장을 다녀오신 분이 작품을 고르며 '실패'를 피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하셨다. 그 마음 알죠 알죠. 속으로 열심히 끄덕이는데 내게 마이크가 왔다. 덕복 님의 영화제 경험은 어땠어요? 침착하자... 여기서 버튼이 눌리는 순간 이 모임의 빌런이 된다. 최대한 간결한 대답을 골랐다. 그냥 예술적인 기분을 샀던 것 같아요. ‘실패’도 거기선 제법 맛이 좋아서.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간 영화제가 언제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2019년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였다. 점심시간마다 압구정 CGV에 가서 상영관에 미리 붙은 포스터를 보며 뱃속이 간지러운 기분에 취했다. 영화로운 계절이구나... 그러나 말 그대로 갔다 오기만 한 꼴이 됐다. 개막날 앓아누워 폐막식이 끝나고서야 기운을 차렸다. 크리스마스를 빼앗긴 심정이었다. 

그런데 웬걸, VOD나 보려고 티비를 틀었더니 며칠 전 막을 내린 서독제 단편 작품들이 ‘독점 무료' 딱지를 달고 풀려 있었다. 사흘에 걸쳐서 ‘방구석 서독제’를 열었다. 폐막작으로 이옥섭 감독의 <세 마리>를 보고 코를 팽 풀며, 피의 새로고침으로도 표를 못 구했던 작품을 공짜로 집에서 봤다는 게 얼떨떨했다.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방구석 영화제’를 열어야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봄에 전주, 가을에 부산에서 영화제가 열릴 즈음이면 부푼 마음으로 홈페이지가 열리길 기다린다. 다만 상영작과 시간표만 뻔질나게 읽었을 뿐 현장에는 한 번도 못 갔다. 학생 땐 돈이 없어서, 돈을 벌 땐 시간이 없어서, 돈을 벌어두고 시간이 생겼을 땐 구만리 여행길이 귀찮아서. 

가든 안 가든 영화제 일정을 짜는 것은 중요한 연례행사다. 언젠가 보게 될 작품을 미리 알아둘 목적도 있다. 평범한 관객 입장에서 영화제 출품작은 극장 개봉작보다 훨씬 고르기 어렵다. 가령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단편경쟁 대상을 받은 <동아>라는 작품을 보자. ‘동아는 운동화를 사고 싶다.’ 한 문장짜리 시놉시스로 내용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다음 주에 기획전으로 상영되는 이 영화를 보러 간다. 1) 심달기 배우가 주연이고 (이경미 감독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방석 사냥하는 ‘럭키’, 그 배우다.) 2) 그가 학생으로 나오는 작품은 모조리 보고 싶기 때문이다. 단편 영화는 딱 여기까지만 알아본다. 확률을 계산하여 배팅하는 주식이 아니라 오백 원 동전으로 날래게 긁어 ‘아!’ 혹은 ‘아~’ 하는 즉석 복권이거든.


연례행사는 이렇게 진행된다. 일단 작품을 고를 때 우선순위는 감독과 배우이다. 이옥섭, 구교환, 이주영과 이주영, 광화문시네마가 있다. 그 다음은 연기를 재미있게 본 배우들을 찾는다. 이정은, 김새벽, 강진아, 박종환, 안재홍, 이상희. 또는 이 판에서 요즘 뜬다는 배우들도 본다. 전여빈, 김혜준, 심달기. 이름을 샅샅이 찾은 뒤엔 제목이 희한하거나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아니 감독님 생각을 해보세요>) 시놉시스가 흥미로운 영화도 몇 담아본다. 

이제 상영 시간표와 엑셀을 띄워 놓고 일정을 만든다.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한 편을 보고 10분 뒤 해운대 메가박스에서 다음 상영이 있어도 댓츠 오케이다. 하지만 ‘진짜 갈 때’는 상영관을 최대한 한 곳으로 몰도록 머리를 더 쓴다.

인기 작품을 보러 가면 서너 명의 크루가 많다. 주로 ‘누구 님’이라고 부르며 ‘누구’ 부분을 작게 말하기도 하는 게 트위터 친구이신 것 같다. 영화가 끝나면 기념 뱃지와 라이터를 하나씩 산다. 이걸로 담배를 한 대 태워야 이 ‘인디한’ 무드가 완성될 것 같지만... 폐암이 무서워서 포기한다. 근처에서 아까 화면 속에 있던 배우가 담배를 태우고 있다. 시력이 나쁜데 시야각은 넓어서 관심 없는 척 몰래 구경한다. 영화 잘 봤고요. 속으로 얘기하고 홱 돌아서 지하철역으로 직진한다. 몇 달 뒤 영화가 정식 개봉하면 어쩐지 우쭐해진다. 영화제 표값 칠천 원에는 이러한 기분 값이 들어 있다. 


코로나19 이후로 많은 영화제가 온라인으로 방향을 돌렸다. 택배로 굿즈를 받고 집에서 작품을 감상했다. 맘에 드는 작품을 만났을 때 벅찬 기분은 얼추 따라가기도 했는데, 차이가 두드러지는 건 꽝을 뽑았을 때였다. 

단편 두세 편을 연달아 상영하는 회차가 있다.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이야기를 보며 상영관 공기에서 행간을 읽어보려 한다. 나만 재미없나? 그래도 이 부분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몇 분 남았을까... 마지막 영화가 끝나고 앞에 앉은 ‘누구 님’들이 멀뚱히 마주 보며 “뭘 본 거죠?” 하고 숨죽여 웃는 걸 보면 안도한다. 님들도 이해 못 하셨군요...

엊그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특별전을 보려고 플랫폼에 오천 원을 충전했다. 넷플릭스 보던 가락으로 ‘찜하기’ 목록에 잔뜩 담았다. 그중 첫 번째로 고른 영화는 재미가 없어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몇 개 없는 왓챠 평을 읽고, 감독 누구야... 구글에 이름을 찾았다가, 뭐로 이 노잼을 복구한담, 그런 궁리나 하면서 다음 편을 틀지 않고 드러누웠다. 원래 같았음 역시 개막작은 노잼이 제맛이지 했을 텐데. 배경 음악 없는 영화의 거친 공백이 관객들의 숨죽인 공기와 만날 때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옆집 배달 받는 소리 따위와 만날 때는 달랐다. 이 이 아니라고.


마지막 퇴고를 하는 지금은 무주에서 산골영화제가 열리는 중이고, 나는 집 앞 투썸 플레이스에 있다. 물론 그전에 무주로 가는 차편과 숙소를 찾고, 봐야 할 작품들은 정해 두었다. 안 갔을 뿐... 대신 영화제 얘길 하다 보니 뱃속이 간질거려 오랜만에 넷플릭스를 끄고 작은 영화관에 다녀왔다. 경희궁 옆 에무시네마에서 이번 전주에서 대상을 받은 <혼자 사는 사람들>을 봤다. 상영관엔 나 혼자였다. 이래서 장사가 되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불이 꺼지고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마스크 뒤로 입이 귀에 걸렸다. 이거잖어! 

연희동 라이카시네마, 종로 인디스페이스에서 어쩔 땐 혼자, 어쩔 땐 대여섯 명과 작은 영화를 보며 깨달았다. 작년부터 내가 잃어버렸던 건 해외여행보단 이 이었다.


에무시네마와 씨네큐브, 아트나인을 종종 찾아가며 나의 연례행사는 계속될 것이다. 코트를 꺼낼 때쯤이면 전주와 부산을 거쳐온 영화를 만나러 종로와 압구정을 오갈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열리는 영화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사진: <세 마리>, <동아> 스틸컷



오작동 치트키

집에서 맛볼 수 있는 영화제 작품으로 이경미 감독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을 추천할게요. 
이 맛이 더 궁금하시다면? 한여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만납시다.

시간 36
비용 퍼플레이 대여 2000원
언제 인류애를 상실한 수요일 저녁
간식 엄청나게 차가운 타이거 라들러 자몽맛


덕복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