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그드가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쓸었다. 리르먼도 아는, 어릴 때부터 있던 습관이었다. 랑그드는 생각에 빠지거나 고민을 하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시간이 실제로는 무척 짧다는 걸 알면서도 리르먼은 초조함을 느꼈다.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군."

"아니, 좋아. 비스코샤 가문에서 이카트 군사들을 먹일 군량을 대도록 하지. 정확한 숫자는 맞춰봐야 알겠지만 그리 적지는 않을 거야."

리르먼은 잠시 말을 잊었다. 이렇게 쉽게? 게다가 랑그드가 허언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빼놓고 봤을 때, 이렇게 금방 확언할 정도라면 리르먼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상태라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비스코샤 백작이나 랑그드가 이걸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참 반가운 이야기인데……."

"떨떠름하지? 날 초대할 때 입씨름 제법 할 각오를 했을 텐데 말이야."

여전히 서늘한 낯을 한 랑그드가 비소했다. 그 말대로였다. 리르먼 쪽에서 너무 노골적이긴 했다. 몇 년이 넘도록 얼굴도 안 본 사이에 친교만을 목적으로 초대할 리도 없거니와 지금 시기가 딱 그럴 시기이기도 했다. 이카트 가문이 지닌 것과 부족한 것쯤은 비스코샤에서도 다 알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안드는 좁은 세상이었다. 어차피 그들 같은 사람들은 상대의 저택에 있는 은 식기 숫자마저 알법한 자들 아닌가. 오래된 가문들은 서로 얽혀 있고, 수준이 비슷한 자들끼린 어떤 방식으로든 얽히게 되어 있었다. 원하지 않더라도 결국 그렇게 된다. 리르먼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 예상이 틀리지 않아."

"어련하겠냐. 그런데 넌 원래부터 수 쓰고 끼 부리고 속이고 눙치고 이런 일은 영 재능이 없었거든. 그런 걸 안 해도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 이건 좋은 의미로 한 말이야."

랑그드가 그렇게 말하며 아무렴 어떠냐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어느새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가볍게 여기는 젊고 오만하며 진지함이 결여된 방탕한 귀족 자제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궁금할 테니 말해주자면, 비스코샤 백작께서도 전쟁에 숟가락 얹으실 생각이 좀 커졌거든."

랑그드는 어릴 때부터 제 아버지를 비스코샤 백작이라 칭하곤 했다. 본인 앞에서야 그러지 않겠지만 리르먼 앞에선 늘 그렇게 불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르메르 자작의 알랑거림에 넘어가 정당한 제 몫을 형부에게 과도하게 넘겨준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다.

"너희 가문은 원래 그런 쪽엔 관심 두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마음을 바꿀 일이라도 있었던가?"

"일이야 뭐가 있겠어. 백색 저택이 움직였으니 조금 늦게라도 끼어보려는 노력이지. 아, 백작님의 머리숱이 더 줄어들 미래가 벌써 훤하네."

중서부에서 백색 저택은 라그랑시에 공작가의 저택을 의미했다. 그동안 조용히 있던 공작이 전쟁에 발을 들였으니 비스코샤 백작도 거기에 한 줄 올려볼 생각이 든 것 같았다. 공작가에 선을 하나 대보려는 생각이 반, 성공 가능성이 높고 위험부담이 많이 줄어든 투자 기회를 잡기 위한 마음이 반 정도겠지. 실제로도 공작이 함께 한 출정에서 나쁘지 않은 성과를 보기도 했다.

"예전부터 위험부담을 좋아하지 않으셨지. 안정성 있는 사업을 건실하게 운영해오셨으니까."

"남자답지 못한 거야."

그렇게 말하며 랑그드는 숱이 많아서 정돈을 해도 멋대로인 금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랑그드의 부친인 비스코샤 백작은 자신이 물려받은 자산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만족하는 성미였다. 어릴 때부터 랑그드는 그 점을 못마땅해 했다. 남자답지 못하게 비겁하다는 식이었다. 랑그드가 어린 시절에 리르먼을 향해 삐딱한 마음을 먹은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랑그드는 이카트의 가풍을 낭만화해서 부러워했으니까. 

하지만 리르먼은 비스코샤 백작이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사람이거나 비스코샤가 기사 가문이었으면 랑그드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에 관한 것이지 성향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비스코샤 백작은 괜찮은 관리자였으니 능력의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가 부자 간의 문제를 상담해주는 자리는 아니니까. 본인도 원치 않을 것이고.

"그래도 한시름 놨어. 사실 꽤 오래 설득해야 할 거라 예상했거든."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그렇게 말하며 랑그드가 히죽 웃었다. 

오늘 만남을 대비해 비스코샤 백작가의 최근 동태를 따로 알아본 바에 따르자면 실제로 장남인 랑그드의 입김이 강해지긴 한 걸로 파악되었다. 비스코샤 백작도 정말로 사위에게 가문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는지 아들이 장성하자 슬쩍 핵심적인 부분을 몰아주고 있다 했으니 가문 안에서 랑그드의 지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이번 건이 쉽게 된 것도 그의 도움일 가능성이 있었다.

"술 고르기 힘들어지겠군."

리르먼의 말에 랑그드가 기분 좋게 웃었다.

"나도 소문은 들었거든. 네 동생- 필리엔이랬나. 걔가 이번에 큰 사고를 쳤다던데. 병사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하,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완전히 꼬맹이였는데 갑자기 무슨 영웅 같은 존재가 되어 나타나다니."

리르먼은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머금느라 대답이 아주 약간 지체되었다. 그 정도면 혹시나 새어 나갈지 모를 머릿속 잡음을 가라앉힐 정도는 되었다.

"나 대신 애써줬지."

"그리고 그 동생이 내 사촌을 완전히 짓뭉개 놓았지. 말 그대로, 얼굴을 짓뭉개 놨던데."

이건 예상치 못한 얘기였다. 리르먼이 찻잔을 내려놓는 척 시간을 번 뒤 랑그드를 보았다. 

"표정을 보니 진짜 몰랐나 보네."

"전혀 몰랐어. 별다른 얘기는 없었거든."

"나 같으면 건방진 놈들을 혼내줬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떠들어댔을 텐데, 피는 어디 안 가는지 형제끼리도 닮았다니까." 

그때는 리르먼도 어렸다. 필리엔을 붙잡아 괴롭힌 랑그드에게 주먹질은 해도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끼리 사이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일처럼 그렇게 넘어가 버렸다. 지금 랑그드는 그때 일을 이야기하는 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어쨌든 거기에 관해서라면 난 별로 유감 없어. 그 멍청한 녀석은 나도 안 좋아해서 말이야. 비스코샤 백작은 불쌍한 조카를 두들겨 팬 게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너에게도 잘 됐지."

리르먼은 별 얘기를 붙이지 않았다. 랑그드가 유감이 없다고 하는 얘기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랑그드도 그걸로 문제를 만들지는 않겠노라 슬쩍 얘기한 것이니 당장에 걸림돌이 될 것도 아니었다. 물론 나중에 랑그드가 편의를 봐주지 않았느냐며 다른 걸 요구할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은 넘어가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리르먼은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

랑그드가 실실 웃었다.

"격세지감을 남의 동생으로 느끼네. 어쨌든 여러모로 네 동생 덕분에 비스코샤 백작도 쉽게 결정했지. 나쁘지 않은 투자라고 말이야."

"그랬군."

리르먼은 잠깐 시선을 내려 찻잔을 보았다. 랑그드가 차를 마시고 새콤하고 뭉근하게 단맛이 나는 건과일이 들어간 스콘을 먹었다. 리르먼은 표정이 굳을까 봐 일부러 입꼬리를 조금 당겨 올렸다. 비겁한 건 자신이었다. 

랑그드는 필리엔을 언급하는 데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리르먼은 동생을 위한다면서 그 애를 괴롭힌 사람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원수로 여기거나 랑그드의 말대로 남자답게 명예를 앞세우지는 못할 망정 밀알 몇 수레에 이번에도 쉽게 동생을 팔았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르먼은 자신이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랑그드와 척을 지는 건 바보 같은 화풀이에 불과했다. 이카트 가문을 위해 보내는 인내와 노력이 결국은 제 동생의 앞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마저 들었으나, 지금 리르먼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리르먼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건 당장의 화풀이보다 중요했다.

랑그드는 옅은 침묵 속에 적당한 온도가 된 차를 쭉 마시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우리끼리 할 말은 다 했으니 나는 이만 일어나지. 이래 보여도 바쁜 몸이거든. 그럴듯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랑그드가 장난스럽게 술이나 마시고 놀 거라는 손짓을 해 보이고는 가벼운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르먼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을 써줘서 고맙네.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 기쁘군."

"별말씀을. 배웅하러 나오지 않아도 돼. 나가는 길 정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차 잘 마셨다."

"그래. 다음에 또 보지."

랑그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숫자를 맞추기 위해 몇 번은 더 봐야 할 것이다. 오늘은 의사를 타진한 정도라 랑그드로 충분했지만 이후에는 비스코샤 백작이 직접 움직일 터였다. 물론 자신 다음으로 아들을 훈련하기 위해 랑그드가 도맡게 할 가능성도 있었다. 리르먼과 직접적인 친분도 있으니 말이다.

인사 후에 그대로 훌쩍 응접실을 나가려는 것 같던 랑그드가 뭔가 할 말이 생각난 것처럼 살짝 멈칫했다. 그는 버릇처럼 검지로 제 입술을 살짝 눌렀다가 그냥 내렸다.

"그래. 우리도 이제 어린 나이는 아니잖냐."

원래 떠올린 말은 그게 아니거나 길게 이어진 생각의 끄트머리만 입 밖으로 꺼낸 것 같은 말이었다. 리르먼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랑그드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리르먼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리르먼은 어쩐지 그가 건드린 어깨가 실재보다 훨씬 무거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차가 식고 스콘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도록 리르먼은 한참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릴리는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에 일어나 로라에 의해 먹이고 씻기고 입혀진 모습으로 자기 생일을 맞이했다. 이른 시간부터 베르타가 보낸 선물이 한가득이었다. 짧은 시간인데도 소식이 전해졌는지 별다른 교류가 없던 사람에게서 온 축하도 있었다. 건너건너 아는 정도였는데 각별히 동부에 관심이 있던 이거나 건너는 다리에 있는 쪽에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소문도 빠르고 손도 빠른 자들이었다.

릴리의 방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이 저택 안에는 멀고도 가까운, 평소엔 그리 교류가 잦지 않은 손님들이 여럿이라 이카트 저택은 릴리의 생일이 아니어도 이미 충분히 바빴다. 릴리는 바쁜 이들을 더욱 바쁘게 만들며 제법 신경 써서 풍성하게 차린 점심을 들었다. 

신선한 버터와 부드러운 빵에 살진 거위 간을 갈아 얇은 반죽으로 감싸 구운 파테 한 조각을 먹은 뒤, 겉면을 구워 익힌 뒤 따로 오븐에 구운 채소와 훈제하지 않은 신선한 돼지고기와 함께 향신료 묶음을 넣은 과일주에 넣고 끓인 소 정강이살을 먹었다. 버터를 바른 속이 포슬한 감자와 향긋한 셀러리 조금, 소금과 기름으로 맛을 낸 자주색 당근, 높지 않은 온도의 기름에 오래 익힌 오리 다리, 껍질이 바삭하고 중앙이 터벅터벅하지 않도록 알맞게 구운 오리 가슴살도 조금씩 먹었다. 

장기간 머무는 손님의 생일이라니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도 있겠지만 지금 뫼니엘과 리르먼, 필리엔이 있는 만찬장에서 벌어지고 있을 친족들의 식사를 위해 마련한 걸 조금씩 더한 덕분에 상상할 수 없이 다양한 음식을 한 번에 맛볼 수 있었다. 로라는 모든 음식을 아주 조금씩 먹고 금방 만족했다. 

릴리는 만찬 아닌 만찬을 마치고 포만감과 약간의 술기운 속에서 로라와 함께 제 앞으로 온 선물을 열어보았다. 아침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리르먼이 보낸 선물도 릴리 손에 들어왔는데, 릴리는 화려한 레이스로 만들어진 베일이 예식에 쓰는 거라는 걸 알고 좀 웃었다. 정말 급하게 준비하느라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이쪽으로 돌린 게 분명했다. 

전리품을 어떻게 나누고 앞으로는 또 어떻게 할지 서로 간에 논의할 것이 많은지 세 가족을 포함한 이카트 가문 구성원들이 참여하고 있는 만찬은 풍성한 식사를 다 마치고도 남을 정도로 꽤 지난 시간까지 이어졌다. 투자를 회수하고 이 기회에 제 위치를 드높이고자 하는 이들이 많을 테니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만찬과 회의가 길어지는 사이에 선물만 미리 보냈던 베르타 본인이 들이닥쳤다. 베르타는 반쯤 비명처럼 호들갑을 떨며 릴리의 드레스를 칭찬해서 로라의 콧대를 높아지게 만들었다. 릴리는 딱맞는 옷걸이 노릇을 하며 한참을 서거나 돌거나 왔다갔다 해야 했다.

자신의 제종제 손에 들려 선물을 또 가져온 베르타는 본인의 건강과 미모의 비결을 전수해 준다며 요거트와 차갑게 만든 과일을 먹이고 수다를 잔뜩 떨다가 발포주를 직접 뜯어 카펫에 굉장한 얼룩을 만들어냈다. 딜란이 재빠르게 수습하며 욕을 직접 하는 걸 제외한 모든 걸 선보이는 진기명기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잠시 뒤에 리르먼이 열린 문을 똑똑 두드렸다. 리르먼은 필리엔은 일이 있어 잠시 뒤에 올 거라며 일단은 자신으로 만족하라는 너스레를 떨었다. 

리르먼과 베르타는 사실상 초면이었다. 본인을 배경의 무생물이라 주장하는 딜란과 정석적으로 고아한 귀부인처럼 리르먼의 인사를 받는 베르타를 보고 릴리가 킥킥대는 걸 리르먼이 조금 이상한 눈으로 봤지만 로라도 입꼬리만 올려 보였을 뿐 아무도 설명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겪으면 알 것이다. 

풀어놓은 포장을 대충 치워 자리를 만들어 리르먼을 앉혀놓은 채 신나게 웃고 떠들고 마시다 보니 필리엔이 쭈뼛거리며 릴리의 방으로 왔다. 필리엔은 축하의 말과 함께 선물과 꽃다발을 가지고 왔는데 놀랍게도 그가 가져온 선물 중 하나가 대현자가 보낸 것이라 말함으로써 베르타를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다. 

마법사들끼리는 다들 아는 사이고 친하다는 기괴한 설정이 생기는 걸 뜯어말린 릴리는 베르타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옅은 푸른 빛과 진한 붉은 빛이 섞인 분홍과 흰색 꽃다발을 로라에게 맡기고 대현자가 필리엔 편으로 보낸 선물을 먼저 뜯어보았다. 작은 상자 안에는 보석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보석이라는 게 조금 비범했다. 브로치나 반지 같은 걸로 만들지 않은 원형 덩어리였던 것이다. 필리엔도 내용물은 모르고 받아 온 것 같았다. 베르타가 거기에 이상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바람에 릴리는 그냥 원석을 주고받는 게 마법사들끼리의 신비로운 관습인 걸로 만들어버렸다.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베르타의 관심은 원석을 감싸고 있던 진주색 비단에 적힌 대현자의 친필로 옮겨갔다. 릴리는 그런 건 자칭이든 타칭이든 어지간한 학자라는 자들 서재에 잔뜩 있다고 했다가 베르타에게 분위기 깨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은색 잉크로 비단에 적힌 유려한 필체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필요가 곧 당신을 찾아올 겁니다.' 점쟁이가 말해주는 운세 같은 말이었다. 뜻을 알 수 없었다는 얘기다. 

리르먼은 베르타에게 저택을 구경시키는 겸 잠시 걷자고 제안하며 자연스럽게 로라까지 데리고 나가려고 했으나 릴리가 막았다. 여섯 사람은 릴리의 주장으로 가벼운 산책이 아니라 아예 축제가 끝물인 거리로 나갔다. 베르타는 뙤약볕에 나가는 걸 질색했지만 결국 동행했다. 



-


안 맞는데다 악연까지 있는 사람과 계속 얼굴 보면서 지내기 정말 싫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죠. 리르먼은 본인이 은근 말 낮추고 있는 거 스스로 알런지?ㅋㅋㅋ 

참고로 랑그드의 사촌은 릴리와 필리엔이 부두에서 저택으로 돌아올 때 마주친 중서부남 3인방 중에 하나입니다. 필리엔이 쉬어갈 장소로 그곳을 떠올린 건 그에 따른 연상 작용이었을 겁니다.

필리엔이 리르먼보다 늦게 나타난 건 잠깐 세필리아를 보고 오느라 그렇습니다. 가는 김에 릴리 생선도 받아옴.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