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여린 향이 바람결에 흩날린다. 향을 따라 걷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연꽃으로 가득 들어찬 호수가 나온다. 어째선지 그리운 마음에 걸음을 하려 해도 그 풍경에 조금도 다가갈 수 없다. 마치 발에 묵직한 돌덩이라도 매어 놓은 것처럼. 어떻게 해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에 손을 뻗자, 차가운 손이 손목을 잡는다.

“헉!”

커다란 숨소리를 토해내며, 한 남자가 침상에서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꿈에서처럼, 하얗지만 굳건한 손이 남자의 손목을 쥐고 있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손목을 쥔 손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잠.”

숨을 살짝 몰아쉬며, 안도한 듯 입을 열었다. 남잠이라고 불린 하얀 옷의 남자는 그런 일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짧게 말했다.

“일어나.”

“…내가 일어나도 할 일이 없을 걸, 뭐.”

입을 삐죽 내밀며 남자가 대꾸했다.

“…….”

“너도 참 어지간하다.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구한 건 좋은데,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매일 아침 깨우러 찾아오고 말이야.”

“오늘은 의원 선생님이 오셔.”

남잠의 말에 침상 위의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달라질 거라곤 없단 말야. 약은 맛이 없고.”

“위영.”

“…아이고, 알았어. 알았어.”

귀찮다는 듯 위영은 손을 내저었다. 잠버릇이 험한지 옷의 앞섶은 이미 다 헤쳐져 그야말로 난봉꾼이 따로 없었다. 남잠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햇볕에 그을린 몸에 쏠렸던 시선을 위영의 얼굴로 옮겼다.

“옷.”

“옷이 왜?”

“단정치 않아.”

불평만 내뱉던 위영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고요한 호수 수면 위로 물결이 번지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번진다.

“단정치 않으면 큰일이라도 난대?”

“…….”

남잠이 입은 하얀 옷 끝을 위영의 손가락이 살짝 잡아끌었다.

“예를 들면, 어떤 벽창호 같은 남자의 마음이라든가?”

그럼에도 굳게 다물린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희롱하는 재미가 떨어진 듯 위영은 살포시 한숨을 쉬었다.

“나 참. 놀리는 재미가 없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얀 손이 다가와 위영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움직임이 하나 같이 빠르고 간결해 순식간에 위영은 난봉꾼에서 공자로 탈바꿈했다. 묶이지 않아 적당히 흘러내린 칠흑같은 머리카락을 제외하고.

“명문가의 공자님께서 이런 근본도 모르는 자를 총애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

“네가 내게 대체 무슨 은혜를 입었기에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수군거린다고.”

“상관없어.”

일부러 말을 꺼내긴 했지만, 내심 위영은 남잠의 그 말에 안도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자 놓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남잠이란 이 남자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고 있었고, 자신은 지금 이 침상 위에 있었다. 가지고 있던 것은 약간의 돈, 용도를 알 수 없는 환약, 초라한 나무 검집에 들어가 있지만, 검신(劍身)만큼은 우아한 검뿐이라고 했다. 몸에 큰 부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 하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둠 속에 갇힌 듯, 흐릿한 풍경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남잠이라고 부르라고 하던 남자는 자신이 위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 남잠 조차도 알고 있는 것은 위영이란 이름뿐이며, 우연히 저잣거리에서 만난 후 때때로 연통을 넣어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던 벗이라 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디에 사는지는 한 번도 이야기해준 적이 없다고 했다.

‘거짓말.’

확신은 없었지만, 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남잠의 가문은 척 보아도 권문세가였다.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정실이란 이름의 별채도 작은 크기가 아니었고, 가끔 거닐곤 하는 집은 그야말로 산 하나를 집으로 삼았다 해도 좋을 만큼 으리으리했다. 자신이 빌려 입고 있는 옷도 그저 그런 하찮은 옷이 아니었다. 그런 좋은 집안의 ‘공자’께서 근본도 모르는 사람을 벗으로 둘 리 없다. 그렇게 말한 것은 분명 자신의 신분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이들은 알아선 안 되는.

“배고파.”

복잡한 생각은 뒤로하고, 위영은 본능에 충실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남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탁자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미 준비해뒀어.”

“남잠! 아, 아니 함광군! 평생 따르겠습니다!”

굶주린 어린아이처럼 잽싸게 달려가는 위영을 바라보던 남잠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위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음식을 입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늘 하나 드리워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건강하고 장난도 치며 늘 웃음이 가득했던, 남잠이 알고 있는 ‘위영’의 얼굴이었다.


10년 전-. 채의진에서도 20리가량 떨어진 조그마한 마을.

“이 먼 곳까지 걸음을 해 주시다니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홍선생(冬烘先生)이라 불러도 그리 과하지 않을 노년의 훈장이 이제 겨우 지학(志學)을 넘겼을 것 같은 소년들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저희도 아직 수련하는 중이니 이런 인사는 과합니다.”

그중 단정하지만 다소 차가운 얼굴을 한 소년이 똑같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함광군 같은 분이 아직이라 하시면 이 늙은이는 대체…….”

“…….”

새하얀 얼굴은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귓불만큼은 홍매화처럼 붉게 물들었다. 함광군-남망기의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나서서 말했다.

“함광군은 그렇다 하더라도 저희 남가 자제들은 아직 갈 길이 먼 만큼 선생께 폐를 끼친 것이 아니라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그저 다행일 따름입니다.”

“허허, 이 작은 마을의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십니까. 오죽하면 함광군을 신선님이라고 부르며 따랐을까요.”

훈장의 공치사를 들으며 마음이 불편해진 남망기는 서둘러 인사를 마무리하고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왕사(王師)의 가문이기도 한 고소 남씨는 문무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해왔다. 정기적으로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외곽지역으로 내려보내 낮에는 시골 훈장들을 도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도적 떼나 마물(魔物)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순찰을 하도록 해 인망이 높았다.

“함광군, 이제 운심부지처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무리 중 하나가 불쑥 물어왔다.

“그러지요.”

그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여인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살려 주십시오! 제 아이를 살려주세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남망기가 빠르게 달려갔다. 흙이 잔뜩 묻은 옷을 입고 있는 젊은 여인이었다. 다 부르튼 손으로 사람들을 애원하듯 붙잡으며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고, 공자님! 도와주십시오!”

귀가 찢어질 듯 소리를 높이며 여자는 남망기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제…제 아이가……요괴에게 잡혀갔습니다!”

“어디입니까.”

여자는 더 말할 기운도 없는지 손으로 마을 밖을 가리켰다.

“…저, 저, 저…밖으로 나가시면 1리도 안 되어 사과나무가 보일 겁니다. 그 사과나무를 끼고 오른쪽으로 갔습니다. 부디, 우리 아이…아랑(阿琅)을…….”

남망기가 몸을 돌렸다.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새하얀 옷이 바람에 살포시 날렸다.

“제가 뒤따르겠으니, 이 부인을 부탁합니다. 요괴는 어찌 생겼고, 아랑은 어떤 옷을 입고 있습니까.”

“요, 요괴는 돼지머리를 하고, 그 사, 사람처럼 걸었습니다. 아랑은 여자아이 옷을 입고 있어요!”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망기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가 말한 대로 사과나무가 곧 눈에 들어왔고, 오른쪽 길은 산을 향하는 길이었다.

‘요괴는 금저(金猪)인가.’

금저라면 여자아이를 배필로 삼으려고 훔쳐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아직까지 무엇인지는 모르니 최대한 빨리 따라잡아야 했다. 걸음을 재촉하려 할 때 아이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남망기는 소리를 따라 발을 옮겼다. 그러자, 새까만 옷을 입고 두립(斗笠)을 쓴 남자가 아이를 들쳐메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비켜!”

날카로운 말투였다. 두립을 쓴 자의 뒤로 거센 회오리가 불어오고 있었다. 남망기는 품속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 회오리를 향해 날렸다. 그러자, 회오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반대방향으로 돌아갔다. 무언가의 술법인 듯했다. 악의는 느껴졌지만, 영력이 그리 센 사람의 술법은 아닌지 다시 날아오지는 않았다.

“…이야, 곱상한 얼굴로 제법이시네. 형씨.”

아이를 여전히 들쳐멘 채로 남자는 건들거리듯 말했다. 예의는 없었지만, 풍격은 한낱 떠돌이 협객 같지는 않았다.

“아이는.”

남망기가 묻자, 남자는 들쳐멘 아이를 슬쩍 올려다보고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답했다.

“너무 놀라서 기절했나 봐. 어느샌가 울음도 멈췄잖아. 하여간 고마워. 이 꼬맹이를 보호하면서 싸우기는 무리라 도망치는 게 다였거든. 저 금저 놈이 얼마나 술법을 많이 배워놨는지 말야. 게다가 울며불며 얼마나 버둥거려서 힘에 부쳤어.”

남자의 말투는 좀 거슬렸지만, 남망기는 일단 무시한 채로 손을 내밀었다.

“왜?”

“내가 데려가지.”

남자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내가 죽을 고생을 해서 애를 구해냈는데. 갑자기 나타난 곱상한 서생이 내 공을 채가면 되겠어? 보아하니 어느 세가 공자님이신 듯한데, 당장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이 사람이 노잣돈이라도 챙기게 해주시죠.”

요괴에 쫓기는 아이를 구하며 돈을 챙길 생각부터 하다니, 남망기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강한 힘을 가졌을수록 연약한 자를 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선(善)을 해치려 하는 것들을 물리치는 것은 의무였다.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남망기가 배운 도리라는 것이었다.

“…천박하군.”

“천박?”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네 세가 사람들처럼 고고하게 살아가면 누가 공짜로 밥을 준대? 굶어 죽는 것보다 살아남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을 천박하다 할 수 있나?”

“스승께 부끄럽지도 않은가.”

“스승? 그 스승이 세상과 담쌓고 곤륜산 상고시대 신들처럼 살다가 내가 이 꼴이 났는데 무슨 부끄러움이야. 부끄러울 거라면 제자를 아사하게 할 뻔한 스승이 부끄러워야지.”




 마도조사도 있었습니다-_-a 퇴마의 세계는 아니고 약간 무협의 세계정도로 이해해주시면 됩니다....라기엔 금저가 나왔네요..하하하(웃지마


 "선녀와 나무꾼"이라고 할까요. 기억을 잃은 무선이와 그런 무선이를 조용히 돌보는 망기의 이야기입니다. 기억이 바로 망기에게 있어선 날개옷입니다. 사실 출발은 샤오잔의 게임 광고를 보고 떠올렸는데(...) 무선이는 자객이고, 망기는 글에서처럼 명문세가의 공자님입니다. 


 안그래도 무선이 불쌍하다고 하면서 온갖 짠내 설정 다넣어놔서 좀 미안함은 있는데(...) 망기 데려갔으니까 됐잖니(아님) 


 제목인 창만판은 느리게 노래를 부른다는 뜻으로 속뜻으로는 일부러 일을 지연시킨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망기가 무선이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길 바란다는 뜻으로 쓴 제목입니다. 정말 너무나도 괴로운 기억이라면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죠. 


 이건 조금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롭지 않아요.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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