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방 김태형의 김부자 캐릭터에서 차용

'소유욕이 있어 내 물건에 이름 석자를 새긴다'


*집착/질투/애정/소유욕


* * *



구석진 곳에 있는 술집이었다. 어두운 조명에 넓지 않은 평수. 그럼에도 사람이 많아 시끌벅적했다. 


여주는 친구와 단둘이 앉아 얘기하고 있었다. 조명이 거의 닿지 않는 자리라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웃으며 얘기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본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안 받아?"

"응."


여주는 폰을 뒤집었다. 화면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진동이 울렸다. 그녀가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염색약 한 번 닿지 않은 머리가 찰랑였다. 이 머리도 김태형이 예쁘다고 해서 길렀던 거였다. 긴 생머리가 예쁘다고,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그냥 기르라고. 그래서 길렀던 건데. 


"김태형이야?"

"어."

"걔는 아까 전화해놓고 또 전화야? 얼마나 됐다고."

"10분 됐나."


여주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녀는 자꾸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쳐다보다 아예 꺼버렸다. 그러자 도리어 앞에 앉아 있던 남사친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하는 거야? 그러다 김태형 찾아오면 어떡하려고?"

"오라고 해. 오늘이야 말로 진짜 헤어질 거니까."

"너 나 만날 때마다 그 말 하는 거 알아?"

"진짜야. 매번 진심이었다고."

"그래봤자 못 헤어질 거면서, 맨날 말은."


친구는 그만 됐다는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선 앞에 있던 잔에 소주를 채웠다. 병을 가만히 바라보던 여주가 자신의 잔도 내밀었다. 친구는 주변을 슥 둘러보곤 뭐 어쩌겠냐는 듯 여주의 잔도 채워주었다. 병에 비치는 머리가 짧았다. 


"나 만나는 거 알면 걔 또 지랄할 텐데."

"알 바야? 오히려 그러라고 해. 그 편이 헤어지기 편할 테니까."

"나 이용하려는 거야?"


마주앉아 있던 친구가 웃었다. 벌써 15년된 그녀의 남사친, 김남준.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는 지금 꽤 유명한 모델이었다. 그래서 둘은 이렇게 인적 드문 곳에서 만나고 있는 거고. 아, 그렇게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하필 온 곳이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다니.


"그래, 뭐. 너라면 이용해도 좋아."

"진짜야?"

"다른 사람도 아닌 김여주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우리 사이에."


친구, 김남준이 픽 웃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여주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고 술을 단숨에 털어마셨다. 휴대폰을 끈 탓에 더 이상 진동이 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어쨌냐면은……."

"다시 그때 얘기 하는 거야? 중학교 때 체육 쌤 얘기는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다섯 번은……."

"아니거든? 이 얘기는 처음이라고! 들어봐봐!"


여주가 무슨 말을 하든 남준은 들어주기만 했다. 가끔 딴지를 걸어도 여주가 씩씩거리면 못 이기는 척 물러났다. 더 이상 아무 방해도 없자 두 사람은 대화에 몰입했다. 


테이블에 벌써 소주 두 병이 쌓였다. 여주는 기어코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아예 잠수 탄 이상 오늘 아예 끝장을 보려는 태세였다. 


"너 진짜 괜찮겠어?"


남준이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 역시 취기가 올라 눈이 조금 풀려 있었다. 취하면 흥분하는 타입인 여주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아 괜찮다니까! 김태형 걔는 이번 기회에 좀 알아야 돼. 내가 지 오랄 때 오고 가랄 때 가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


남준은 그녀가 테이블을 치면서 떨어질 뻔한 수저를 붙잡았다. 그는 비어버린 여주의 물잔을 채워주었다.


"그래, 넌 원래 그런 애잖아. 자유롭게 살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너도 진짜 그렇게 생각해? 헤어지는 게 맞는 거지?"


여주는 울분이 쌓인 얼굴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남준은 대답을 미루었다. 그녀는 그간 숨 막힐 듯한 김태형의 집착에 힘들어 하면서도, 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김태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여자친구가 조금이라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른 남자와 카톡만 해도 상대의 신상을 털 정도로. 비뚤어진 집착이 심했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진작에 헤어졌겠지만 교제 기간이 길어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언제부터 시작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금씩, 조금씩. 


그 관계가 벌써 3년.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헤어졌다가 만났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때문에 남준은 이번에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이렇게 호언장담 해놓고서 다시 만나는 꼴을 몇 번이나 거듭 봤으니까. 


아아, 그래. 말하자면 그거였다. 이제 서로에게 너무 물들어버려서 다른 색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야, 김남준. 어떻게 생각햐냐니까?!"


여주가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글쎄……"

남준의 시선이 잠깐 옆으로 향했다. 직원이 주문한 소주를 가져다 주었다. 남준은 자연스럽게 병을 한 바퀴 돌리고 뚜껑을 땄다. 


여주는 잔에 채워지는 소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잔에 닿던 남준의 손이 멈췄다. 그는 시선을 들어 여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너는 내가 김태형이랑 어떻게 됐으면 좋겠냐고. 넌 날 잘 알 거 아니야. 오랫동안 봤으니까. 내가 이 새끼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근데도 계속 만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아니면 그냥 이참에 확 잠수 타서 헤어질까?"

"……."


남준은 취기로 달아오른 여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한결 같이 그에게 1순위였다. 오늘도 스케줄을 취소하고 그녀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왔을 정도로.


하지만 눈앞에 있는 그녀는 지금 그의 마음을 제대로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차피 깨고 나면 기억도 못할 거면서. 


"나는……."

"응?"


여주가 두 손으로 턱을 괴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남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검은색 앞머리가 가늘게 뜬 두 눈을 아슬아슬 덮고 있었다. 


남준은 망설였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할 거라면 지금 얘기하는 게 낫지 않나? 혹여 흐릿하게라도 기억난다고 해도 발뺌하면 그만이니까. 


남준은 고민하다 소주잔을 입에 홱 털어넣었다. 쓴 맛을 넘어 이젠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여주와 함께 있으면 도통 취하질 않았다. 누가 그랬다. 누군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 있으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된다고.


내 취기를 빌려 고백하긴 글렀지만, 


"야, 사실은 있잖아……."


그녀의 취기를 빌리는 것 정도는 되지 않을까.


"지금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난……."

"김여주!"


그 순간 술집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코트를 입고 있던 남자는 급하게 달려 왔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테이블을 훑었다. 여주를 발견한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남준은 하던 말을 다시 속으로 삼켰다. 


아, 이번에도 글렀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의자 뒤로 등을 기댔다. 김태형은 저벅저벅 걸어와 여주의 팔을 잡아챘다.


"김여주. 나 봐."

"……이거 놔."


여주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 바람에 스테인리스 테이블이 거칠게 흔들렸다.


"함부로 잡지 마."


여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앞에 있던 김남준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주의 눈이 눈물이 핑 돌았다. 창피했다. 도대체 김남준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몇 번째야. 


태형은 남준을 흘겨보곤 여주에게 집중했다.


"나와. 나가서 얘기해."

"싫어. 여기 있을 거야. 너랑 절대 안 가."

"갑자기 또 왜 이러는데. 휴대폰도 꺼놓고. 너 진짜 나 불안하게 할래?"

"갑자기?"


여주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술기운에 충혈된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태형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넌 이게 갑자기라 생각해? 우리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더 이상은 싫어! 네가 나 뭐 하는지, 어디 가는지 하나하나 다 감시할 때마다 숨막혀 죽겠다고. 내가 왜 너한테 그렇게까지 해야 돼? 네 그 집착에 진짜 돌아버릴 것 같다고!"

"김여주."

"이제 지쳤어. 제발 나 좀 놔줘, 김태형……."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엉엉 울기 시작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남준은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태형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겨울인데도 흠뻑 젖은 머리에서 땀이 떨어졌다. 이 거리에 있던 술집들을 헤집으며 그녀를 찾아다닌 흔적이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를 내려다보다 남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누군가 인스타에 그를 보았다면서 올렸기에 찾을 수 있었지만.


팩트만 말하자면, 그는 김남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알기 훨씬 전부터 여주와 친했던 것도 그랬고, 아닌 척 하면서 잘난 척하는 꼴도 싫었다. 게다가 항상 여주와 싸우는 날엔 그가 있었다. 그와 만나기만 하면 여주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냥 친구라면서. 왜 항상 만날 때마다 애를 흔들어 놓는 건데. 


"가자, 김여주."

"안 간다고!"

"내가 다 잘못했어.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내 말은 듣고 결정해. 우리 얼굴도 안 보고 끝낼 정도는 아니잖아, 응?"


태형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달랬다. 여주도 울면서 감정이 가라앉았는지 조용히 몸을 떨기만 했다. 남준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무심히 내뱉었다.


"그래. 나가 봐. 여기서 계속 울어도 내가 뭐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니까."



"뭐? 야, 김남준."


여주가 옷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남준은 지금까지와 달리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여주는 허, 하며 황당해 했다. 계속 고민상담 해주던 놈 맞아? 배신감이 들었다. 술기운 때문에 더 격해져 있는지도 몰랐다. 태형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여주야."

"알았어. 간다고."


그녀는 거칠게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아깐 그렇게 헤어지라고 해놓고 막상 김태형이 나타나니까 모르는 척하시겠다? 


"너 진짜 짜증나, 김남준."


항상 그랬다. 늘 싸우면 지는 쪽은 남준이었다. 잘은 몰라도 그는 친구 이상으로 넘어오고 싶지 않아 했다. 연애 문제는 딱 너네끼리, 휘말리지 않을 정도로만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여주가 먼저 홱 돌아서서 나갔다. 태형도 그녀를 뒤따라갔다. 사람들이 수군대며 남아 있는 남준을 쳐다보았다. 남준은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의 마시지 않은 세 번째 소주병이 차가웠다. 남준은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이제 그 잔에는 그밖에 비치지 않았다. 


남준은 피곤한 눈으로 표면 가까이 흔들리는 술을 응시했다. 


"아직은 아니야."


저렇게 말하면서도, 김여주가 아직 김태형을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입으론 싫다고, 힘들다고 해도 둘이 같이 있으면 또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매번 이렇게 떨어뜨렸을 때 부추겨 놓는 거였는데. 지금 감정을 드러내기엔 너무 성급했나 보다. 오히려 김태형이 방금 전 타이밍에 나타나서 다행인 걸지도.


'너 진짜 짜증나.'


하고 그를 힘껏 노려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상관 없었다. 싸웠다 화해하기 좋은 구실은 친구만한 게 없으니까. 


남준은 아까와 달리 천천히 술을 마셨다. 어딘가 찢어졌는지 알코올이 들어가며 입안이 따끔거렸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느리게 술을 비운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좀 취기가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점점 몸이 나른해졌다. 입안의 고통조차 그리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남준은 이미 식어버린 안주를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엔 또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 * * 


"왜 또 저 자식이야."


바로 옆 골목으로 그녀를 데려간 태형이 내뱉은 첫 마디였다. 단둘이 남게 되자 여주의 눈시울이 다시 시큰거렸다. 


"네가 다 잘못했다며. 사과하는 거 아니었어?"


태형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자신 있게 말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그가 싫은데. 그녀를 속박하는 그가 정말이지 싫은데. 


얼굴만 보면 또 마음이 약해졌다. 원래 사랑이 다 이런 걸까.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면 자꾸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됐다. 이래서 안 보고 끝내려 했던 건데. 


"여주야."


태형이 그녀의 두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여주는 깍지를 끼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손이 워낙 커서 쉽지 않았다. 


"내 이름 부르지 마."

"여주야."


태형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붉은 얼굴이 금방이라도 다시 울어버릴 것 같았다. 태형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도 많이 힘들어 보였다. 여주는 자꾸 다른 쪽으로 생각하려는 마음을 계속 다잡으려 노력했다. 태형이 그녀에게 따지면 곧바로 맞받아칠 준비를 하는데, 그가 다음에 내뱉은 말은 책망이 아니었다.


(下편에서 계속)



여러 분야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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