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자 상환일을 알리는 문자였다. 그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던 세현은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빚까지 갚느라 형편이 늘 빠듯했다.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연락조차 되질 않았다.

세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있을 때 또 한번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교수에게서 온 문자였다.

“정 조교, 어디가?”

“유 교수님 호출.”

세현은 교수의 문자를 받자마자 곧장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결혼식 이후 이주만의 호출이었다.

노크를 한 세현이 방으로 들어서자, 모니터를 보고 있던 교수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두고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세현은 그 미소를 본 순간 직감했다.

“나보다는 그래도 세현이가 이런 걸 잘 고를 것 같아서. 부탁 좀 해도 괜찮지?”

부인이 곧 생일이라는 말과 함께 교수는 부인의 선물을 세현에게 부탁해왔다. 결혼하자마자 첫 생일이니 잘 챙겨야겠지. 교수의 이런 심부름 정도는 익숙했다. 교수가 내민 카드를 받아 든 세현이 물끄러미 손에 쥔 카드를 내려다보다 그만 가보겠다며 방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세현아.”

“…….”

문고리를 잡은 세현에게 교수는 가까이 와보라고 손짓했다. 세현은 천천히 교수에게 다시 다가갔다. 서너 발자국 떨어져 있는 세현에게 조금 더 가까이 오라 손짓한 교수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선 세현의 뺨을 짧게 쓸었다. 교수는 세현의 한쪽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고, 교수의 손길이 닿았던 자신의 뺨을 세현은 카드를 쥔 손의 손등으로 문지르다가 교수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까 요새 바빠서 통 신경을 못 써준 것 같아 미안하네.”

“아니에요.”

“대학원은 다닐만 하고?”

“네.”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공부도 좋지만 밥은 잘 먹고 다녀야지.”

“…….”

“그 카드로 맛있는 것도 좀 사 먹고. 내가 사줘야 하는데, 요새 일이 많아서. 이해하지?”

“…저기, 교수님.”

세현의 부름에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교수는 기다려주었다. 교수는 언제나 다그치는 것 하나 없이 여유롭게 기다려주었다. 세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교수의 곁에서 조교 생활을 한지도 2년이 넘어가고, 이제 슬슬 취업도 해야 했다.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으려면 지금 벌이로는 빠듯했다. 뒤엉키는 생각 속에서 오로지 교수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러한 지난 시간을 곰곰이 반추하다 보니 자신이 정말로 미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졸업논문과 석사과정 졸업 예정이라는 타이틀이라도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인 걸까. 세현은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킨 채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밥은 잘 먹고 다녀요. 살은….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봐요. 저 원래 더위에 약하잖아요.”

“그래.”

교수가 세현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세현은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만 가보겠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막 세현이 입을 떼려던 참이었다. 그런 세현을 향해 교수가 운을 뗐다.

“그건 그렇고….”

천천히 입을 연 교수의 시선이 세현을 똑바로 주시했다.

“태경이랑은 많이 친한가 보더라.”

“네?”

교수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오자마자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 그날. 태경이 교수를 향해 보란 듯이 세현의 어깨를 끌어안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아무튼 우리 자주 봐요.’라고 내뱉은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그날 이후로 태경은 학과사무실에 틈만 나면 들어와 자신을 향해 빈정거리기 일쑤였다.

세현은 교수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찰나의 침묵이 묘하게 불편했다.

“아뇨. 별로 안 친해요.”

세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교수의 방을 빠져나와 잠시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이상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선물을 어떤 것을 사야하지. 교수가 준 카드를 손에 꽉 쥐며 세현은 생각에 잠겼다.

일단 꽃부터 배달시켜야 했다. 카드와 함께 교수가 적어준 쪽지를 펼쳤다. 여자가 일하는 곳의 주소일 것이다. 세현은 다시 학과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휴대폰으로 익숙하게 꽃집에 전화를 걸었다.

“보내는 사람은 저번이랑 똑같이 유영환으로 해주시고요. 카드는 생일 축하한다고 부탁드려요. 아, 사모님이세요. 꽃은….”

그 순간 세현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자 태경이 눈에 담겼다. 세현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어? 안녕하세요.”

갑자기 나타난 태경은 혼자가 아니었다. 제 주위에 친구들을 달고 나타난 태경은 가만히 세현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세현은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오는 무리를 향해 대충 고갯짓을 했다. “…꽃은 매번 주문하던 거로 부탁드릴게요.”라며 세현은 통화를 급히 마무리 지었다. 태경의 눈길은 빤히 그런 세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태경은 마치 ‘또 너냐?’라고 말하는 듯한 세현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경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곧 세현의 손에 쥔 카드에 머물렀다.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바지 주머니에 숨기듯 넣었다. 그리고서 뒤늦게 멋쩍은 기분에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며 목 뒤를 쓸어내렸다.

“바빠요?”

그제야 태경이 입을 열었다. 태경은 심드렁한 투로 물으면서 세현이 방심하는 사이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빼앗아 갔다. 세현이 당황해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내용을 확인한 태경이 가볍게 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세현의 통화 내용을 들었던 게 분명했다. 세현은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안 바쁘면 조교님도 같이 가요.”

태경은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구겨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으면서 세현을 향해 싱긋 웃었다. 태경과의 대화 속 갈피를 잡지 못한 세현이 미간을 구겼다.

“갑자기 어디를….”

“내 생일파티.”

“뭐?”

세현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태경의 친구들 또한 놀란 듯 태경을 쳐다봤다. 어색한 표정으로 “야, 강태경 지금 뭐하냐…. 갑자기 무슨….” 하고 한 명이 태경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태경은 어깨만 가볍게 으쓱해 보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술 마실 거예요.”

“…….”

“저번에 약속했잖아요, 우리.”

“너 혼자 했겠지.”

“…….”

“그리고 지금 바빠.”

태경은 바쁘다며 먼저 간다고 지나쳐 가려는 세현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여러 시선이 한꺼번에 꽂히자 세현은 당황스러웠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태경의 대담함에 세현은 갑자기 조마조마해져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게 친밀해 보이는 두 사람을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에 세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 단둘이 마시는 줄 알았구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서 왠지 미안해지네. 태경의 혼잣말 같이 이어지는 말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세현의 시선은 그런 태경의 가벼운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레 올라갔다. 어느덧 세현은 눈을 들어 태경을 올려다봤다. 내리깐 태경의 시선이 세현을 빤히 주시했다.

“내가 비밀도 지켜주는데, 이정도도 못 해줘요?”

태경은 어깨를 크게 으쓱해 보였다. “별 수 없네.” 태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상대방이 들어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태경의 얼굴이 아까워지더니 세현의 귓가로 태경의 숨이 닿았다. 숨이 닿은 곳부터 세현은 소름이 돋았다.

“자기야. 우리 바람피우기로 했잖아.”

“씨발….”

세현이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자 태경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불쾌하다는 세현의 시선에도 태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때요? 이제야 나랑 같이 술 마실 생각이 들어요?”

세현은 대꾸할 의지를 상실한 채 태경을 바라봤다. 태경은 그 얼굴을 마주하며 바람 빠지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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