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녁이형, 축하해요!”
“와씨, 형! 진짜 대박이야. 얼마를 오른 거야~,”
“역-시 이진혁. 넌 꼭 데뷔해야돼.”

쏟아지는 축하에 정신이 없었다. 일부의 질투나 원망이 섞여있을 지는 몰라도, 모두의 축하는 다 진심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가, 푸하하 웃음이 터졌다. 역시 짬바~! 티오피 대박이야. 형들 진짜 멋있어요. 촬영은 끝났지만 모두 쉬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떨어진 연습생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X부활전을 준비해야 했고, 살아남은 연습생들 역시 점점 더 조여오는 긴장감에 쉽게 퍼질 수가 없었다.

“자, 자. 다들 고생했습니다. 30위까지는 내일까지 촬영 없어요. 합숙소에서 짐 챙길 거 챙겨서 외출했다가, 모레 오전 10시까지 입소해주시면 됩니다. X부활전 준비하는 친구들은 연습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제2연습실로 이동해주세요-!”

담당 FD는 촬영 종료를 알리며 아예 아이들을 스튜디오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얘들아 제발 좀. 마음은 알겠는데 우리도 일 좀 하자.

“아빠아아아아! 축하축하해요오오.”

우르르 복도로 쏟아지는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는 진혁의 품 안으로 진우가 덥썩 날듯이 안겼다. 아이구 우리 해남이, 고생했어 축하해. 잘 했어. 진혁은 진우를 한번 힘 주어 안았다 놓고, 다시 쏟아지는 아이들 사이를 두리번거렸다. 그 사이에도 축하해, 잘 했어, 어어 고마워, 축하와 감사가 끊이지 않고 왁자왁자하게 오갔다.

“우석이 못 봤어?”
“어, 형 방금 여기 있지 않았어요?”

분명 좀 전까지 곁에 있었는데, 요란한 축하와 왁자지껄함이 조금 지나고 나자 우석이 보이지 않았다. 합숙소에 먼저 갔나… 그러고 보니 순위발표가 끝난 이후부터 영 웃음기가 없었던 것 같은데.

“이지녀기이- 인간승리! 축하한다!”
“어어 고마워 너도 잘해라. 근데 우석이 못 봤어?”

“형 축하해요, 그리고 진짜 고마워요.”
“야 고맙긴 무슨…, 혹시 우석이 봤어? 유리 형, 우석이 못 봤어?”

오가는 축하 속에서 진혁은 내내 우석을 찾았다. 괜히 맘이 급해져 합숙소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그 긴 다리로 겅중겅중 빠른 걸음을 걸어 우석이 쓰는 방에 도착했다. 불은 꺼져 있었고, 우석의 침대에는 대충 벗어 던져둔 자켓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열린 캐비닛을 보니 샤워실에 간 모양이었다. 뭔 일이여……. 우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복도로 나왔다. 그냥, 마음이 영 싱숭생숭한가.

왜 아니겠어, 저도 그랬다. 노력했고, 열심히 했고, 잘 했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 어안이 벙벙했다. 우르르 쏟아지는 축하 속에서도 이게 진짜 내 것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저도 그러니, 우석이야 오죽할까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진혁은 일단 우석을 찾아 헤메는 것을 그만하기로 했다. 어차피 매니저 형 오면 같이 나가야 되는데 뭐.


프로듀스 X 101 두번째 순위발표식 :: 이렇게 착한 너를 내가 만나

Written by Heroric


사람이 벌써 반절도 넘게 줄어든 탓일까, 합숙소 안은 왁자지껄한데도 이전보다 훨씬 조용했다. 샤워까진 귀찮아 대충 메이크업만 지운 진혁은 옷을 갈아입고 짐을 다 챙겨 우석의 방으로 향했다. 우서가아아아.

제일 먼저 와 샤워부터 한 모양인지, 뽀얗고 말간 우석은 어, 왔어. 고개만 한 번 돌려 진혁을 보고는 마저 짐을 챙겼다. 커다란 백팩 하나를 대충 내려놓고 건너편 빈 침대에 털썩 누운 진혁은 가만히 천정 – 정확히는 2층 침대의 아래지만 – 을 보는 듯 했다가, 이히힉, 웃으면서 허공으로 발을 굴렀다. 우석은 침대 위에 반듯하게 개어 놓은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가방에 넣으며 진혁의 말에 조근조근 대꾸를 했다.

“으아, 나 진짜. 아까 너무 쫄려가지구.”
“뭘 쫄려, 베네핏 받은 거 있었는데.”
“아니이, 진짜 막 발표나는데 점점……, 아휴.”
“잘 했어 너.”

달칵, 가방 버클을 채우는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양, 진혁은 벌떡 일어나 우석을 제 품에 안았다. 알지, 잘했지. 근데 너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진혁을 등 뒤에 단 채 말 없이 가방 매무새를 정리하는 우석의 손 끝을 보다, 진혁은 기어이 우석을 돌려 세웠다. 야, 너 왜그러냐고.

“그냥, 좀 피곤해. 피곤해서 그래.”

일렁이는 진혁의 눈을 빤히 보던 우석은 결국 픽 웃고 말았다. 진짜 괜찮아. 그냥 머리도 좀 아프고…….

“열 나? 약 타다 줄까?”

아프다는 말 한마디에 또 금세 울상이 된다. 큰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가, 우석의 이마를 짚었다가, 안절부절 못하는 진혁의 목을 이번에는 우석이 끌어안았다. 어어, 놀라 잠깐 굳어버린 진혁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파묻은 우석은 진혁의 목에 두른 팔을 움직여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잘 했다, 이진혁…….”
“…….”
“너는. 잘 할 줄 알았어.”

낮고 조곤조곤한 우석의 목소리. 우석을 제 품에 꼭 가둬 안은 진혁의 얼굴은 가득 웃음이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인지 모를 안도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야, 근데 나 잘했으면 상 좀 줘라.”

응? 고개를 들어 동그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우석을 마주보며 진혁은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나, 뽀뽀.

“아, 미쳤나봐, 카메라 어디서 돌아갈 줄 알고.”
“지금 카메라 안 돌아가거든?”
“어허이. 형 언제 오냐구 전화나 해 봐.”
“아 진짜, 뽀뽀 한번만 해 줘라. 나 잘했잖아아-. 나 진짜 열심히 했잖아아-.”

다른 연습생들이 보면 기함을 할 광경이었다. 이렇게 큰 키로 우뚝 솟은 김진혁이, 한 줌 거리도 안 될 김우석의 옷 끄트머리를 잡은 채 입을 부우 내밀고 팔을 붕붕 휘젓고 있었으니.

“지녁아빠아아, 우석아빠아, 안 가요?”

진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방 문 안으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진우의 뒤로 도현이 따라 들어왔다. 어어, 너희도 지금 가? 응, 짐 다 쌌어요. 형들 얼굴 보고 가려구. 우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형, 짐 다 쌌는데 응, 응. 바로 내려갈게요. 어, 진혁이 같이 있어. 아마 픽업 온 매니저 형의 전화인 듯 했다.

우석이 제 가방에 손을 뻗는 것보다 진혁이 조금 더 빨랐다. 제 가방과 우석의 것까지 한 손에 가뿐히 들고, 문가에 서서 헤헤 웃는 도현의 어깨에 다른 팔을 걸치며 방문을 나섰다. 올, 너네 진짜 키가 매일 큰다? 아, 형만큼 크고 싶은데. 클 거야, 나도 고딩때 훅 컸음. 아 진짜요?

진혁은 가방 두 개를 들고 도현과 나란히 걷고, 뒤에 남은 진우는 무슨 일인지 머뭇머뭇 우석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해남이 오늘 너무 잘 했어. 우석이 진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혀엉, 하고 덥썩 안기는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 같았다. 형 진짜… 고마워요. 근데 고맙다는 말을 못 한 거 같아서. 고마워요. 나 때문에 힘들었잖아….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는 진혁에게 눈짓으로 먼저 가라는 신호를 하고, 우석은 허리를 굽혀 진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우리 해남이. 네가 잘 한 거야. 잘 따라와줘서 고마워. 너무 기특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웃는 진우를 보며 우석은 웃었다. 얼른 가자, 엄마아빠 엄청 기다리고 계실 거야. 전화는 드렸어?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진혁과 도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얼른 가자. 동생을 다독여 데리고 나서는 우석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웃음기가 걷혀 있었다.

-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내내 헤드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우석에게 진혁은 말 한마디를 붙이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 큰 눈으로 빤히 보다 이것 저것 장난을 걸고도 남았을텐데, 정말 어디 많이 아픈가. 원래도 하얀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잡을까, 말까. 팔걸이에 걸쳐 미동도 없는 우석의 손을 보며, 진혁은 괜히 몇 번이고 마른 침을 삼켰다. 첫사랑과 처음 손 잡는 어린 애도 아니고, 분위기가 그랬다. 괜히 긴장되고.

에라 모르겠다. 진혁이 우석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자, 우석은 느릿하게 감은 눈을 떴다. 헤헤, 웃는 진혁을 빤히 보다가 흐릿한 미소를 품은 채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진혁이 잡은 손을 끌어 고쳐 쥐자, 우석도 제 손에 힘을 주어 진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손을 꼭 잡고, 진혁도 긴장이 풀린 탓인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혁아. 이진혁.”

제 뺨을 톡톡 두드리는 손끝.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감긴 눈을 얼핏 뜨니, 코 앞에 우석의 얼굴이 있었다. 으응, 잠이 덜 깨 마른 세수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알았다. 제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어서, 우석은 내내 손이 잡힌 채로 두 시간을 올라왔다는 걸.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손바닥이 축축했다. 차는 벌써 서울역에 도착했다.

“…?!”

우석은 제 가방을 들고 내리며 진혁의 입에 제 입술을 한번 꾹 눌렀다. 잠이 덜 깨 어버버 하는 사이 차 밖으로 내린 우석이 선물, 입 모양으로만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 형, 저 모레 아침 차로 올라와요. 응, 표 시간 보낼게요. 매니저 형에게 인사를 하고 총총 멀어지는 우석의 뒷모습을 보며 진혁은 눈만 껌뻑였다. 아, 진짜 김우석…….

“너네 싸웠냐?”

제 입술에 와 닿은 여운을 다 느끼기도 전에, 매니저 형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 싸워? 누가요, 우리가? 왜? 물음표만 오조오억개 띄우고 있는 진혁의 얼굴을 본 매니저는 아니다,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쟤 영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어? 둘이 일이등 했대서 엄청 신나있을 줄 알았더니.”
“그냥 좀 피곤하대요. 하, 진짜 심적으로…, 장난 아니야 진짜.”
“너네 집 먼저 가기엔 쟤 차 시간이 애매해서. 근데 차 좀 막힌다 야. 한숨 더 자고 있어.”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의자에 뒤로 기대 앉았다. 잠이 좀 깨고, 이제야 실감이 좀 난다. 엄마 나 이등했어……. 포지션 평가 연습할 때 진짜 진짜 죽고싶었는데. 생각해보면 그 때도 김우석 덕분에 살았었다. 다 보내고 연습실에서 안무 짜고 있는데 자다 깬 차림으로 나타난 김우석은, 존재 자체로 위로였다. 적어도 그 앞에서 쪽팔리는 무대를 하고 싶진 않았다.

“안 잤어?”
“자다 깼어. 애들이 아직 너 여기 있대서.”
“더 자지, 왜 왔어.”
“나도 연습할거야.”

우석은 막 꺼내 왔는지 물방우리 송글송글 맺힌 물병 하나를 진혁에게 툭 던지고 거울 앞 모서리에 앉아 리시버를 귀에 꽂았다. 벙찐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진혁을 향해 훠이훠이, 하던 거 하라고 손짓하더니 이내 손에 들린 가사에 집중하며 으음, 흐으음, 간간히 바람소리 같은 허밍을 했다.

그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새벽 세시가 넘어 불 꺼진 트레이닝 센터. 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너와 나. 꽉 막혀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가던 안무가 술술 풀렸다.

“석아, 이거 한번만 봐 주…….”

고개를 돌리자, 우석은 어느 새 가사지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아, 침대에서 편히 자지. 그런데 또 너무 곤히 자는 게 미안해 깨울 수도 없었다. 어쩌지. 꺠우자니 망설여지고, 그대로 두자니 찬 바닥에서 자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지 싶어 십 분도 넘게 그 앞에서 꺠울까 말까,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딩동. 메시지가 와, 진혁은 기억에서 현실로 되돌아왔다. 앞뒤를 자른 도현의 메시지에 진혁은 조금 당황했다.

- 오늘 어디가요?
- 잉? 뭔 소리여.
- 비밀 지킬게. 나한테만 말해줘요.

얘가 무슨 소리여. 진혁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신음이 다 가기도 전에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 진짜 엄청 비밀인가보네.
“아니이,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집에 가는 길인데. 우석이 서울역에 아까 내려주고.”
- 에, 진짜여?
“응, 누가 나 어디 간대?”
- 잘못 들었나, 아까 우석이형 통화하는 거 얼핏 들었는데 너무 궁금해서. 엿들을라고 그런 건 아닌데 들렸어요. 그래서 우석이형한테 물어보면 엿들었다구 혼날 거 같아서.
“우석이? 무슨 통화?”
- 아까 발표식 끝나고, 집에 전화하는 거 같았는데… 오늘 못 내려간다구. 일 있다구.
“우석이가?”
- 응, 그래서 나는 당연히 형이랑 어디 가는 줄 알았지. 잘못 들었나…….
“어어, 석이는 대전 내려갔구, 나도 지금 집에 다 와 가는데.”
- 형, 나 엄마가 불러요. 밥 먹으래. 이따 톡할게요!

전화가 끊어지고, 진혁은 도르륵 눈을 굴렸다. 전화. 서울역. 내내 이상하던 김우석.

“형, 우석이 몇시 차 탔지?”

물어보며 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울리던 전화벨은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하는 안내 멘트로 금세 넘어갔다. 이건 상대방이 일부러 끊은 거다.

- 지금 전화 못 받아. 미안.

바로 날아온 메시지. 너 지금 어디야. 진혁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1은 바로 사라졌는데 답이 없다.

너 집에 간 거 맞아? 두 번째 질문에는 1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을 리가 없었다. 괜히 문제를 만들 수 없어서 슬그머니 매니저 형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 낌새도 못 챈 것 같았다.

그리고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가 엄마 아빠랑 저녁을 먹고, 합숙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그러는 와중에 틈틈히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봤지만 메신저는 1이 사라지지 않았고, 전화는 꺼져 있는 느낌이었다. 어서 씻으라는 엄마의 채근에 욕실에 들어가면서도 폰을 쥐고 들어갔다. 어쩐지 계속 이상했는데. 순위발표식 결과에 너무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제대로 캐치하질 못 했다. 띠링, 머리를 감는 중에도 메시지 알람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 별 일 아니야. 걱정 말고 잘 자. 모레 보자.

이런 식으로 딱딱하게 문자를 보내는 애가 아닌데. 무슨 일이지. 그러다 번뜩 생각이 났다. 우리 숙소, 지금 비어 있을 텐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진혁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 시간에 어디 가냐는 부모님의 질문에 무슨 말같지도 않은 핑계를 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도로까지 숨이 차게 내달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탔다.

-

비밀번호를 누르고 숙소에 들어서자, 불은 다 꺼진 집 안쪽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우석아, 조용히 이름을 부르며 들어서니 거실에서는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훅 났다. 음소거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TV, 쇼파 아래 멍하니 쪼그려 앉아 있는 우석, 그리고 이미 빈 소주병이 네다섯 개.

“김우석. 너 무슨 일인데.”
“…….”
“우신아.”
“어떻게 알았어?”

니가 좀 이상하게 굴었어야지. 우석은 다시 물잔에 콸콸 소주를 부으며 다른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야, 나 그냥 좀 혼자 있게.

하다못해 과자 한 봉도 없이 소주만 하나 가득. 진혁은 당장 울화가 치미는 걸 꾹 누르고 우석 앞에 앉았다.

“우신아. 왜 그래.”
“…가라고.”

이미 취기가 오른 얼굴, 동그란 눈매 끝이 신경질적이었다. 하아, 진혁이 깊게 한숨을 뱉었다.

“너 이런데 내가 어떻게 가. 너 여기 혼자 두고 가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좀.”
“오늘은 나 좀… 혼자 있겠다고. 너랑 있는 거 불편해.”

불편해? 그 한 마디에 진혁의 눈이 사납게 떠졌다가, 술잔을 꽉 쥐다 못해 손 끝이 하얘진 우석의 손으로 시선이 갔다.

“…….”
“…….”

한참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 정적을 깨고 먼저 움직인 건 우석이었다. 깊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하고, 제 손에 들린 술잔을 벌컥벌컥 마셔 비웠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아마 편의점에서 하나 사 온 모양이었다.

음소거로 켜 진 TV 화면이 다채롭게 깜빡거리며 하얀 우석의 얼굴을 다양한 색으로 물들였다. 우석은 아주 천천히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종이컵에 비벼 껐다. 그 모양새를 지켜만 보던 진혁은 맨 손으로 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말 안 할 거면, 나도 술이나 마시자.”

진혁은 포기했다는 듯 컵 하나를 가져와 앉았다. 물잔에 반 정도 소주를 따르고, 에라 모르겠다. 한 번에 잔을 비웠다. 그런 진혁을 표정 없이 바라보던 우석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진혁을 불렀다.

“이진혁.”
“어?”
“그만하자.”
“뭐?”

그만하자고, 우리…. 세우고 앉은 무릎 위로 우석의 목이 툭 떨어졌다. 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뒷통수만 보여주면서, 그만하잔다.

“헤어지자고?”
“…….”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나 보고 얘기해.”
“…….”
“석아…,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우석이 다시 번뜩 고개를 들었다. 물기 가득한 눈으로 진혁을 쏘아보았다.

진혁은 팔로 제 몸을 밀어 우석 바로 앞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당황이 가시지 않은 큰 눈이 얼렁였다. 코 끝이 욱씬거리고,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

“내가, 뭘,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야. 내가….”

한 단어씩 뚝뚝 목소리가 끊어졌다. 떨리는 목소리에 우석은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잘못?”

하, 우석이 실소를 터트렸다. 너 잘못한 거 없어. 우석이 다시 담배에 손을 뻗었다. 말리는 진혁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 내고, 불을 붙였다.

“근데 왜 이래. 갑자기. 뭘 그만해.”
“니가 이러는 게 싫어.”
“내가 뭘.”
“끝도 없이 착한 거.”
“나 안 착해.”
“나쁜새끼.”

미안해…. 끝이 흐려지는 진혁의 목소리에 반대로 우석의 목소리가 팩 하고 틀어졌다.


“사과 좀 하지마, 넌 왜 맨날 미안하대? 왜 맨날 나만 이상한 놈 만들어?!”

우석은 취기가 훅 오른 것 같았다. 늘 또렷하던 발음이 어눌했다.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게 우기는 것도, 짜증을 내는 것도 처음이라 진혁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대체 무슨 실수를 했나, 머리 속으로는 온통 지난 시간을 되감고 있었다.

우석이 휘청 자리에서 일어나, 진혁도 따라 일어섰다. 부축하는 진혁의 손을 쳐 내고 우석은 비척비척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 한 대가 간절해, 진혁은 쩝 입맛을 다셨다.

안절부절 못 하고 우석을 기다리다가, 왜 이렇게 안 나와. 진혁은 혹시나 싶어 화장실 문을 열었다. 우석은 또 욕실 모서리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기척을 느끼고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진혁은 얼른 우석에게로 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았다. 우신아,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사과할 수 있게 해줘.

저를 노려보던 우석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너무 의외였다.

“…미안해.”

미안하단 말과 동시에, 우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에 당황한 진혁은 어쩔 줄을 몰랐다. 왜, 왜 그래. 우신아, 우석아, 석아. 내가 어? 내가 뭐 잘못했는데 그래. 응? 내가 다 잘할게. 미안해 진짜. 왜 그래, 야 너 왜 울고 그래……. 일단 달래주고 싶은데, 손을 뻗기만 하면 저를 밀어내는 통에, 진혁은 중심을 못 잡고 결국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진짜… 살면서 내가, 이렇게 내가 싫은 적이 없는데.”

결국 우석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데뷔 전부터 몇 년을 알았는데, 몇 년을 붙어 있었는데, 요 몇 주 사이에 이 녀석의 눈물을 너무 자주 본다.

“…나는 너 좋은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도 뭔 개소리냐는 듯 저를 보는 우석을 마주 바라보며, 진혁은 몸을 일으켜 앉고는 우석의 양 손을 잡아 제 손으로 모아 쥐었다.

“내가 좋아해. 김우석.”
“야 너는…,”

누가 들어도 백프로의 진심.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우석은 차라리 진혁이 화라도 내 주길 바랐다. 화를 내고, 그래서 차라리 주먹다짐이라도 오가고, 치고 박고 싸우기라도 하면 마음이 좀 나아질 것만 같았다.

“알아, 나 병신 같은 거. 근데 상관없어 너한테는.”
“…….”
“이거 비밀인데. 진짜 누가 들음 배부른 소리 한다고 존나 욕먹을 거 같은데.”

진혁은 거기까지 하고 말을 고르는 듯 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이게 정확히 전달이 될까. 말은 늘 서툴고, 행동은 조급했다.

“너, 내가 무슨 말 해도 안 질릴 자신 있어?”

우석이 먼저 물었다.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어깻죽지로 눈물을 대강 닦아내고 헛기침을 했다. 진혁은 혹시라도 우석이 손을 빼버릴까봐, 고쳐 꽉 잡고서는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순발식 할 때… 니가 일등이면 나는 진짜 축하해 줄 자신이 없더라. 너는 니가 몇 등을 하든 내가 일등 하면 제일 축하해줄텐데. 나는 내가 일등 했음 좋겠더라?”

진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어…….”

“나는 네가 나 이기면, 그래서 너 일등하면, 진심으로 축하해 줄 자신이 없다고. 내가 이렇게 못돼 처먹었는지 이제 알았어. 그러니까……!”

우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혁의 다급한 입술이 우석의 말을 가로챘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양 손으로 쥐고 다급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미 욕실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던 우석은 도망갈 방법도 없이 진혁에게 붙들렸다. 얼큰하게 오른 취기와, 뜨겁게 밀고 들어오는 진혁의 혀가 온 입 안을 훑고, 입천장부터 발끝까지 저릿하게 전기가 올랐다. 밀어내려 들었던 팔이 진혁의 목에 감겼다. 익숙하고 뜨거운 감각에 순간 이성이 날아갔다.

진혁이 점점 몰아붙이자, 우석은 아예 구석 틈으로 사라질 판이었다. 으응, 결국 우석이 진혁의 어깨를 팡팡 내려쳤다. 번뜩이는 눈으로 숨을 몰아 쉬며 떨어진 진혁은, 제 입술을 손등으로 한번 훔치면서도 우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파, 안 그래도 나 작은데 다 찌그러지겠어.”

볼 멘 소리를 하는 우석의 팔 아래에 손을 넣어,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암만 괴물 같은 피지컬이라지만 대체 이런 힘은 어디서 나오지. 그 순간에도 우석은 그런 뻘한 생각을 잠시 했다.

얼마나 다급한 키스였는지, 반대편에 붙은 욕실 거울로 보이는 우석 자신의 모습이 가관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눈은 벌겋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고, 입술은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머리는 어디서 쥐어 뜯기고 온 마냥 난리였다.

후우, 우석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진혁을 지나쳐 세면대 앞에 섰다. 찬 물을 틀고 거푸 세수를 하는 우석의 뒷모습을 보던 진혁이 제 머리를 사정 없이 흐트러트렸다.

“너 인제 가. 나 잘 거야.”
“나 보고 말해.”

우석은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고, 진혁 앞에 섰다. 집에 가, 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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